츠카레오 - 두근두근 하트 대작전
* 츠카레오
* 가볍습니다.
* 메타적 발언이 있습니다...☆
어느 날부터 츠키나가 레오에게 이상한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건 스오우 츠카사 주위에만 떠 있는 하트모양 틀이었다. 우주적 망상을 사랑하는 레오여도 제법 현실적인 레오는 그 옆에 당당히 존재하는 비정상적인 조형에 당황했다. 마치 츠카사에게 붙어 있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존재하는 그것은 레오가 몇 번이나 눈을 깜박이고 코타츠에 파묻혀 한숨 자고 일어난 후에도 그대로였다. ‘스오 너 사실 우주인이었구나?! 세나는 알고 있었어?! 라고 외쳤다가 츠카사와 이즈미의 한심한 눈초리를 받은 이후 레오는 저 이상한 것이 자신의 눈에만 보인다는 걸 깨달았다. 레오는 이 기현상이 끝내 자신이 미쳐버린 증거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8시간 이상의 수면, 규칙적인 삼시세끼를 지속하고 난 후에도 여전히 있는 걸 보고 생각을 포기했다.
그 하트(레오는 일단 저걸 하트라고 부르기로 했다. 사람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공중에 고정돼 있는 걸 레오는 뭐라고 부르는지 모른다.)는 텅 비어 있다가 츠카사가 누군가와 대화, 혹은 행동을 할 시에 채워졌다. 아마도 츠카사가 흡족하다고 느낄 만한 말을 한 경우 하트가 3분의 1 정도가 채워졌다. 하트가 다 채워질 경우 특정 행동을 하면 그는 굉장히 기뻐했고 이내 몸에 ‘HAPPY’라는 글자가 뜨기도 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으며 제법 불쾌한 반응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다. 수업도 포기한 레오가 츠카사를 졸졸 미행하며 집요하게 이어진 관찰의 성과였다.
사실 우주인이나 있을 법한 저 하트가 정확히 언제 떴는지 레오는 알고 있었다. 그건 츠카사 때문일 수도 있지만 레오가 원인일 수도 있었다.
저 하트는 츠키나가 레오가 스오우 츠카사를 좋아하고 있다는 감정을 자각하고 난 후 츠카사 옆에 나타났으니까.
언제부터 자신이 받아들이지 않은 유닛의 막내에게 코 꿰인 지 레오는 기억하지 못한다. 연습 중에 자꾸 시선이 따라가는 건 미숙하기 때문이었고, 목소리를 자꾸 듣게 되는 건 옆에서 종알종알 떠들기 때문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신입이 자신의 나이츠에서 있는 것을 부루퉁하게 바라봤던 한때의 감정들은 푸른 망토 너머로 펼쳐지던 붉은 황혼에 다 녹아버렸을 지도 모른다.
시작이 언제인지는 아무래도 좋다. 츠카사가 옆에 있으면 편안해진다, 목소리를 자꾸자꾸 듣고 싶다, 나를 더 많이 봐줬으면 좋겠다, 좀 더 같이 있고 싶다, 손 한 번 잡아보고 싶다, 나를 보고 웃어줬으면 좋겠다. 이런 욕구들이 뭘 가리키는지는 뻔했다. 그리고 그에 맞추어 눈에 보이는 기준도 나타났다. 정확히 뭔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 하트를 채우면 좋은 일은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그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무슨 일이시죠?”
눈앞의 츠카사가 레오를 의심 충만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1학년이 가득한 복도에 검은색 넥타이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 레오는 빨려들 것 같은 보라색 눈동자를 멍청히 바라보다가 뒤늦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오늘 레슨은 제 때에 갈게!”
이정도면 합격 아니려나? 레오는 두근두근한 눈으로 빈 하트를 바라보았다. 츠카사의 얼굴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갑자기 나타나셔서 하신다는 말씀이 그겁니까. 오늘은 Lesson일이 아니잖아요. 절 놀리러 오신 겁니까? 이럴 시간이 있으면 제대로 수업을 들으시죠!”
[ LUCK Down↓ ]
거대한 글자가 츠카사의 몸에 일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레오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츠카사는 교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때마침 수업종이 쳤기에 레오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사실 저 ‘럭다운’이라는 것에 걸린 건 이번 한 번이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레오는 화술에 재능이 없는지 츠카사에게 저 정 없는 단어를 번번이 받곤 했다. 그런 날은 정말로 운이 떨어지기라도 하든지 돌부리에 걸려 우당탕 넘어지기도 하고, 인스피레이션을 펼치려고 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케이토에게 걸리기도 하는 등 하루 종일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츠카사의 교실을 돌아 나온 지금도 체육관에서 튀어나온 갈색 농구공에 머리를 얻어맞아 레오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당황한 목소리들 틈에서 레오는 자신의 다음 목적지를 떠올렸다. 가야할 곳은 정해져 있었다.
2학년 A반. 모든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렸고 담임교사의 종례도 끝났는지 교실 문이 열린다. 레오의 모습을 발견한 사가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츠키나가 수업은 빠지지 마라~’라는 말로 적당히 넘어가주었다. 웅성거리는 소음이 점점 커진다. 의자들이 바닥을 끄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고 교실 문을 나서는 2학년의 모습들도 속속 보인다. 곧 이 학교의 유일한 프로듀서도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미행, 아니 관찰을 통해 주목해야할 인물도 눈치챘다. 바로 안즈였다. 츠카사의 인물 관계도에는 그녀도 포함돼 있었고, 놀랍게도 그녀는 아주 쉽사리 츠카사의 하트를 쑥쑥 채워나갔다. 복도에서도, 정원에서도, 스테이지 앞에서도, 연습실에서도.... 그 어느 곳에서 대화를 해도 안즈는 츠카사의 마음에 드는 흡족한 대답을 들려주는 듯 했다. 덕분에 레오는 하트가 꽉 채워지는 모습도, 그 하트는 한 번 채우면 끝이 아닌 계속 반복되는 구조라는 것도 알게 됐다. 츠카사가 괜히 누님이라 부르며 존경하는 것이 아니었다.
약속 없이 불쑥 찾아가니 안즈는 조금 놀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학생들이 찾아오는 것이 익숙한지 예의바르게 인사를 돌려줬다. 그리고 잠깐의 대화 요청에도 기꺼이 승낙해 주었다.
“에, 그러니까 스오우 군의 호감을 사는 법을 알고 싶다고요...?”
한 마디로 정리하니까 굉장히 우스운 모양새였지만 그것 말고는 어떻게 전달할 말이 없었다. 갑자기 츠카사 옆에 하트 모양의 무언가가 떠다닌다는 현상을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안즈는 눈을 깜박거리며 레오의 진위를 살피는 듯한 모양이었다.
“음~ 스오가 안즈를 잘 의지하는 것 같아서. 이야기도 잘 통하는 것 같고...? 내가 얘기하면 왠지 자꾸 화나게 만들어서....”
설명을 덧붙이니 반항기의 자식을 둔 학부모의 고민 상담 같은 것이 돼버렸다. 하지만 안즈는 비웃지 않았고 오히려 진지한 표정이 되어 열심히 생각해 보는 듯 했다.
“저도 큰 도움은 안 될 것 같은데....”
“아니야! 안즈는 교과서 같은 수준이니까!”
“그렇게까지 말해 주시면.... 스오우 군이 가끔 고민 상담을 해오기도 하거든요. 그 때는 진지하게 들어주고 조언을 해준다던가...? 일전에는 영어 발음에 대해서 고민을 하길래 천천히 말해보는 건 어떠냐고 대답한 적이 있어요.”
놀랍게도 레오도 비슷한 고민을 츠카사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때의 레오는 ‘와하하! 너 발음 엄청 웃기긴 하니까! 아니 너무 좋은 건가? 너무 좋으면 독이 되어 웃기는 경지까지 이어지는 건가!’라고 대답했던 것 같다....
‘망했네.’
“또, 스오우 군 게임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체스 같은 것도 좋지만 일전에는 스마트폰으로 하는 게임에도 관심을 가졌어요. 그쪽으로 얘기해 보시는 건 어떠세요?”
츠카사가 게임을 좋아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라시와 진지하게 체스를 두고 있길래 그 얼굴이 너무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죽은 나이트를 들고 나이트빔 하며 훼방을 놓았었다. 그 때 스오 얼굴 엄청 울그락불그락해져서 토마토 같았는데. 결론은 자신이 하는 말과 행동은 모두 파멸로 이어지는 지름길이라는 거였다.
“...으응, 조언 고마워.”
“스오우 군은 성실하고 좋은 후배니까 분명 츠키나가 선배가 하려는 말들을 진지하게 들어줄 거예요.”
안즈의 격려에 레오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즈는 어떻게 그렇게 상대가 원하는 말을 잘 아는 거야? 이야기도 잘 들어주고 대답도 그렇고 정말 대단하네.”
“친애도가 높아져야 신규 보이스를 획... 아, 아니, 저는 프로듀서니까요! 아이돌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것도 제 일이니까!”
“에, 프로듀서의 스킬인 거야?”
“그보다는 암기라고 해야 하나... 츠키나가 선배의 박물관 같은 거예요.”
“응...?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안즈. 박물관을 가고 싶다는 거야? 나도 아주 좋아하지만!”
“네, 그러니까 방금 같은.... 흐흠! 어쨌든 결론은 츠키나가 선배가 진심으로 부딪히면 스오우 군도 받아줄 거라 생각해요.”
굳게 고개를 끄덕이는 안즈를 보며 레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안즈의 조언을 얻어도 크게 바뀌는 건 없었다. 츠카사 근처로 자주 얼쩡거리니까 화를 내며 럭다운을 먹이길래 거리감이 필요한 걸까하며 좀 숨어 지냈더니 기어코 레오를 찾아내서는 자꾸 어디를 돌아다니냐며 화를 내는 것이다.
울분에 잠겨 레오는 작곡을 했다. 딱히 화나서 하는 작곡은 아니었다. 그들의 유닛 라이브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었고 레오는 나이츠의 잘 벼려진 무기를 만들어야 했다. 레오가 작곡에 돌입한 걸 알자 츠카사의 럭다운 공격도 줄어들었다. 역시 말을 섞으면 안 되는 걸까. 우울함과는 별개로 손은 멋진 곡을 뽑아내는 걸 보면서 시련도 인스피레이션을 자극한다는 씁쓸한 결과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신곡을 들려주는 날 레오는 기대하지도 않은 것을 보게 되었다.
“이번 신곡이군요...! 자, 잠시 만요. 이어폰을 가져오겠습니다. 조용히 듣게 해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도련님의 값비싼 이어폰으로 연결하며 스튜디오 구석에서 듣고 오더니 잔뜩 흥분한 얼굴로 레오에게 바싹 다가왔다.
“Leader는 평소에 정말 반푼이인데, 노래 하나만은 정말 끝내주네요. 바보 같은 Leader에게서 이런 노래가 나오다니 신은 정말 공평한 것 같습니다!”
악담인지 칭찬인지를 뱉는 것과 동시에 지금껏 한 번도 차지 않았던 하트 한 칸이 떡하니 차는 게 아닌가. 레오는 눈을 크게 뜨고 하트를 바라보다가 눈을 꾸욱 감았다가 다시 번쩍 떴다. 하트의 3분의 1을 차지한 분홍색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츠카사 말대로 반푼이 같은 자신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 바로 작곡. 작곡만 하면 츠카사의 하트를 바로 채울 수 있을 것이다.
마침 슬슬 멤버들의 솔로곡을 써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츠카사의 솔로곡 역시도. 혼신의 힘을 기울인 곡을 듣는다면 이 작은 기사는 지금처럼 잔뜩 고양된 얼굴로 마음 한 조각을 허락하는 것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레오는 바로 작업에 착수하기로 했다.
*
“당신, 제정신입니까?!”
화난 목소리가 귀에서 왕왕 울렸다. 레오는 파들파들 떨리는 눈꼬리를 힘겹게 들어 올리며 희뿌연 시야를 바로 잡으려 애썼다. 붉은 머리칼이 아주 가깝게 있었다. 보라색 눈동자 역시. 그 눈동자에 가득한 게 화라는 걸 깨닫자 도로 눈을 감고 싶은 심정이었다.
“며칠째 여기 계시는 거죠? 금요일에도 계셨었잖아요. 주말에 집은 가셨어요?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똑같은 차림을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식사는 챙기긴 하셨나요?!”
불같은 기세를 내뿜고 있지만 레오는 괜찮았다. 네 명의 곡을 모두 완성하는 건 스퍼트로도 무리였지만 그래도 츠카사의 곡은 완성했다. 언제인지 기억도 못하는 사이에 쓰러져 잠들어 버린 덕에 컨디션은 그닥 나쁘지 않았다. 레오는 몸을 일으켰다.
“그보다, 스오 이거 봐. 스오 곡 완성했으니까.”
코타츠 위에 흩어진 악보를 주섬주섬 그러모으고는 츠카사에게 내민다. 어서 봐줘, 이번 것도 엄청 자신작이야, 스오도 내 노래 좋아하잖아. 기대를 품고 있지만 찌푸린 이마는 펴지지 않은 채 악보도 받아들지 않는다.
“지금 그게 중요한가요? 자신의 몸도 돌보지도 않고 이렇게 엉망진창이 되어서. Idol은 몸이 재산입니다. 자신이 무엇인지도 망각했나요? Leader의 태도는 전혀 프로답지 않습니다.”
하트는 채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지긋지긋한 그 영어 단어가 츠카사에게 스치듯이 떠올랐다. 한심한 이를 보는 것 같은 얼굴. 레오는 츠카사의 웃는 얼굴보다 그런 표정이 훨씬 익숙하다는 걸 깨달았다. 레오 앞의 츠카사는 언제나 그랬다.
받아들여지지 못한 흰 종이가 바닥에 흩어졌다. 억울함이 뜨거운 것이 되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와 이내 터져버렸다.
“어쩌라는 거야! 어차피 난 안즈처럼 잘 못하니까!!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려고 한 것뿐이야!”
“What?! 거기서 왜 누님이 나옵니까? 설마 누님에게 뭘 부탁한 건가요?! 그러지 말고 이 츠카사에게 이야기를 했으면-....”
“그런 거 아니거든, 바보야! 이번 거 엄청 노력했다고. 스오를 위해서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데 맨날 스오는 화만 내고...!!”
“네? 저, 절 위해서 인가요?”
“당연하지! 그럼 내가 누굴 위해서....”
레오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잠을 자서 헛것이 보이는 게 아니라면....
츠카사 옆에 떠 있는 하트에 다른 한 칸이 채워진다. 하트는 이제 나머지 한 칸을 제외하고는 분홍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레오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츠카사를 바라보았다. 대체 뭐에 반응한 거야? 아직 곡도 보지 않았잖아?
“그, 그래도 이건 아니죠. 잠도 안자고 밥도 안 먹고 작업하는 건 수명 단축의 지름길입니다.”
“스오, 뭐야. 너 진짜 이상해!!”
“갑자기 Attack입니까?!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당신의 곡은 훌륭하지만 그렇게까지 막무가내로 쥐어짜낼 필요는 전혀 없다고요. 아직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많습니다. 먼저 자신의 몸을 챙기세요. 지금 자기 몰골이 어떤지는 알고 있어요?”
“내, 내 곡을 좋아한다면 나온 걸로 된 거 아니야? 유일하게 봐줄만한 게 곡이라고 했으면서-.”
“제가 언제 그런 말을 했습니까?!”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고 있잖아...? 나는 맨날 스오를 화나게 만들지만 곡을 줄 때는 너는 한 번도 화내지 않았어. 오히려 기뻐해줬잖아? 그러니까, 이거라도 빨리 하고 싶었던 거야! 너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나는 너와 달리 스오를 좋아하니까...!!”
잔뜩 씩씩거리며 함성처럼 말이 스튜디오에서 터졌다. 유일한 청중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어디선가 종소리가 울렸다. 멸망의 종이다. 무덤까지 가지고 갔어야 할 속셈마저 홧김에 다 토해내고 말했다. 다 잠을 못 자서야, 아니 스오가 갑자기 찾아와서 일수도 있어, 그놈의 하트가 보이지만 않았어도! 종소리 속에서 혼란의 소용돌이가 거세게 휘몰아쳤다. 츠카사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그게 잘못됐다는 거예요. 그런 건 전혀 기뻐할 수 없어요.”
멸망! 멸망! 레오의 심상 속 소용돌이가 크게 연호했다.
하지만 각오한 연심의 최후는 아직 일렀다.
“좋아하는 사람의 건강이 나빠지는 걸 어느 누가 기뻐할까요? 대답해 봐요, 제가 정말로 좋아하는 Leader.”
얼굴이 새빨개진 츠카사가 그렇게 힘주어 말했다. 그와 함께 옆에 있던 하트의 빈 칸이 채워지고 있었다. 아무 조각 없이 완벽한 분홍색 하트가 츠카사 옆에서 선연하게 빛을 냈다.
“여기까지 들었으니 이제 도망 못가요. 아시겠어요?”
저도 당신을 좋아해요.
바닥을 짚은 손 위로 다른 이의 손이 겹쳐졌다. 츠카사의 모든 것이 아주 가까웠다. 어딘가에서 들리는 종소리가 계속하여 뎅그렁 뎅그렁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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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카레오 - 계모임01
* 츠카레오
* 서로 보고 싶은 주제를 사다리타기하여 연성하는 계모임입니다.
* 참가자: 동풍, 미나비, 루우
미나비
이게 무슨 꼴이람.
가만히 앉아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본다. 부드럽고 매끈한 천이다. 조심스럽게 팔을 들면 품도 넉넉하고 색도 고운 옷이라는 걸 알 수 있다. 특별한 의뢰가 아니고서야 이런 걸 입을 일은 없었다. 레오는 양 팔을 펄럭이다 다시 축 늘어트린다. 아, 지루해. 가만히 있으려니 좀이 쑤셔온다. 슬쩍 눈을 돌려 문가와 침상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대로 뛰어나가서 나무 위에 몸을 숨기면 모든 게 다 끝날텐데. 흠.... 그래볼까. 지루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보단 그게 나을 것이다. 레오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발소리를 내지 않고 걷는다. 질질 끌리는 치맛자락이 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자 인상을 찡그리고 천을 움켜쥐어 들어올렸다. 살금살금 걸어 문가에 귀를 대었다. 살짝 정신을 집중하면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여시종의 숨소리가 들리고, 그 너머 호위하고 서 있는 무사들의 얕은 기척이 느껴진다. 별 다른 일은 없네. 들어올 일도 없겠지. 레오는 자리로 돌아가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었다. 꽁꽁 싸맨 겉옷을 하나, 둘, 벗고 속곳만 남겨놓고는 침구 밑을 더듬었다. 익숙한 검은 옷이 거기 있었다. 옷을 벗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속도로 손을 움직인다. 레오는 금세 수상쩍은 검은 옷의 사람이 된다.
"......."
뒤를 돌아보면 자신이 벗어던진 허물과 같은 풍성한 옷들이 늘어져 있다. 돌아와서 입는 것도 문제인데.... 분명 혼자서는 입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리 선수를 쳐서 누워있을까? 몸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댄다거나.... 어쩌면 그 사이에 누가 들어올지도 모르겠는데. 잠시 인상을 쓴다. 아, 모르겠다. 그렇게 되면 그 잘나신 황제님께서 어떻게 하겠지. 레오는 이 거처의 사람들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시종 정도는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싶지만.... 딱히 계약을 파기하려고 한 건 아니니까 말야. 들켜도 별 문제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레오는 조용히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그대로 천장을 타고 올랐다.
지붕에 올라온 건 다행이었지만 황제의 궁은 너무 컸다. 레오는 지붕에 납작하게 붙은 채 인상을 쓴다. 바람은 동쪽으로 불고 있고, 그 안에 여러 냄새가 섞여 있었다. 레오가 찾는 상대의 냄새는 느껴지지 않는다. 지붕에 붙은 채 멀리 두었던 시선을 근처로 가지고 오면, 넓은 궁을 바쁘게 걷는 시종의 무리가 보였다. 귀를 기울여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 소리를 쫓는다. 남자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정례 시간은 이미 지났을 것이다. 그렇다고 침실에 가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어디 신하들의 기관을 감찰하고 있을까? 그게 아니면....
"...지금 바로?"
여시종의 무리가 저쪽을 지나간다. 레오는 그 안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해냈다. 황제의 뒤를 따라다니는 시종이다. 지금은 다른 시종들과 있지만.... 레오는 지붕 위를 사뿐히 넘었다. 시종들이 향하는 방향을 따라 자신도 움직인다.
"곧 그쪽으로 향하신다고 하셨으니까요. 준비가 필요할 겁니다."
"...천비님께서 기뻐하시겠군요."
"쉿. 너무 노골적이지 않습니까."
작은 목소리로 소근소근하고 있지만 레오에게는 전부 다 잘 들렸다. 천비라는 건 황제가 지난 번에 들인 네번째 첩이다. 레오는 골치아프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이던 황제를 떠올렸다. 남자는 탐탁찮다는 표정이었지만 상황과 책무에 순종하는 편이었다. 레오는 그저 안됐네, 라고 생각했다. 지금와서는 한 층 더 안됐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니까 그 천비라고 불리는 여자가.
"얼마나 걸릴까요, 지금 폐하께서는 어디에...."
"서관을 둘러보시고 계십니다."
레오는 종종걸음으로 멀어지는 여자들을 흘끔거린다. 시종들은 그대로 천비의 궁으로 향할 것이다. 서관이라면 분명 각종 기록을 관장하는 곳이었던 거 같다. 차도 한 잔 하고 나오겠지. 간략한 회의도 종종 그곳에서 한다고 들었다. 지금의 황제는 제법 행동파라서, 모든 일을 신하들에게 맡기던 시절과는 또 다른 모양이었다. 그래서 적도 많은 듯 했지만.
"흐음...."
천비의 궁으로 향하는 시종들을 내버려 두고, 레오는 조금 허리를 펴본다. 나무 그늘 밑에 숨어 있어 눈에 잘 띄지 않을 것이다. 서관이면... 금방 갈 수 있을지도. 레오는 기지개를 켜고, 그대로 다시 그림자 속에 녹아들었다.
황제, 스오 츠카사는 서신을 읽고 있었다. 그건 과거의 편지였다. 스오 츠카사가 황제가 되기 전에 오갔던 외교문서로 남자는 그 때의 기록을 정확하게 알고 싶었다. 신하들에게 지시를 해왔지만 속도는 매우 느렸고, 결국 직접 찾아 와야만 했다. 이렇게 자주 움직여선 신하들에게 신뢰를 줄 수 없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츠카사는 서신을 넘기면서 속으로 쓴웃음을 짓는다. 다들 귀찮아 하겠는데.... 젊은 황제는 그 정도의 자각은 갖고 있었다.
"이 다음은...."
"예?"
"여기서 끝이 아닐텐데요."
종이에서 눈을 떼고 흔들어 보이자 황제 주위를 둘러싼 신하들이 낮은 신음소리를 낸다. 츠카사는 피식 웃고 종이를 협탁 위로 내려놓았다. 담당자인 남자가 앞으로 걸어나와 허리를 숙였다.
"폐하, 그것은...."
"존재는 알았으니 이제 다른 말은 안 통합니다."
츠카사는 웃으며 협탁을 두드렸다.
"준비해서, 가지고 오도록 하세요."
주위의 낮은 탄식을 뒤로 하고, 츠카사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왔다. 궁궐 지붕에 석양이 걸려 있었다. 시간이 벌써.... 손을 뒤로 해 신하들을 물리고, 츠카사는 천천히 걸어나왔다. 시종이 뒤따라왔다.
"폐하."
알고 있어요, 이 방향이 아니란 말이죠. 츠카사는 어깨를 으쓱이고 방향을 돌렸다. 첩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말에는 조금 한숨이 나왔다. 남자는 피곤했고, 그 자리에서 시간을 어떻게 때워야 좋을지 고민했다. 덕분에 걸음은 점점 느려지고, 해가 지고 있어 어두워진다. 츠카사는 깊은 고뇌 속에서 자신의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를 들었다. 괜히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본다. 어느 새 안뜰의 정원이었다. 나무가 있고, 연못이 있고.... 물 위로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나무 위에 사람이 있었다.
"......."
웃음이 나오는 걸 꾹 참고 츠카사는 잠시 손을 뒤로 했다. 뒤 따르던 시종들을 서른 걸음 뒤로 보낸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거리를 만들고 황제는 잠시 뒷짐을 지었다. 연못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낸다.
"숨어 계시는 게 맞나요?"
"알아 봤어? 다행이네."
"물 위로 다 비치는 걸요."
"그걸 알아볼 주의가 있어서 다행이란 뜻이야."
고개를 들자 나뭇가지 위에 걸터 앉은 검은 옷의 남자가 보였다. 남자가 손을 흔들었다. 츠카사가 그를 향해 손을 내밀자 남자가 고개를 흔든다.
"없는 척 해야지. 괜히 이러고 나왔다고 생각해?"
"그 검은 옷 때문에 더 눈에 띄는 게 아닐까요?"
"아니지. 지금은 내가 스오에게 마음먹고 보여주고 있는 거야."
이러면 안 보인다고?
목소리가 끊기고 시야에서 모습이 사라진다. 츠카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물 위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단지 잔잔한 잔물결만 흐를 뿐.
"알겠어요. 실력을 의심하지 않아요."
"거짓말."
다행히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었다. 츠카사는 피식 웃었고, 검은 옷의 레오는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 앉아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심심해서."
"외출?"
"그런 셈이지."
"어때요. 외출 결과는."
"음.... 몇 가지 불온한 물건을 찾았어."
"불온한 물건?"
"저주 인형 같은 거랑.... 어디에 쓰는 건지 알 수 없는 약이랑....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
표정을 잘 살펴보고 싶지만 코까지 가린 복면으로 보이지 않았다. 츠카사는 아쉽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어디로 갈 거죠?"
"내 방?"
"산책은 다 한 거예요?"
"응. 종착지가 폐하였어."
남자가 몸을 일으키는 걸 보며 츠카사는 조금 급하게 목소리를 냈다.
"제가 보고 싶었다면 그대로 나오셔도 됐을 텐데요."
"무슨 소리야. 그건 최악이지. 그 옷도, 그 자리도 불편하니까."
밤에는 안 오는 거지? 다음 이야기는 나중에. 안녕, 폐하.
뭐라고 말을 하기 전에 물 위의 그림자는 사라졌다. 츠카사는 한 손을 어정쩡하게 든 채 자리에 서 있었다. 방에 간다고 했으니 마련해 준 거처로 갔을 것이다. 애매한 기분으로 빈 손을 내린다. 일과를 마치고 얼른 가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황제는 미친놈이라더니.
뒤에서 끌어안고, 어깨를 무는 남자를 느끼며 레오는 숨을 삼켰다. 아래가 얼얼했다. 혼을 쏙 빼놓는 허릿짓에 이불 천을 손으로 움켜쥐며 눈을 감는다. 배 안이 뜨거운 걸로 얻어맞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힉, 아.... 짧은 숨을 띄엄띄엄 토해내면 손이 올라와 레오의 뺨을 쥐고 고개를 돌리게 했다. 불편한 자세로 얼굴을 뒤로 해 부딪히는 입술을 받는다. 꼭꼭 위로 쳐올릴 때마다 몸이 저릿했다. 아, 스오, 스.... 레오는 잠자리에서 남자의 이름을 불러본 적이 없었다. 그건 너무 연인스러운 것 같았다.
굳이 정의한다면 이건 계약 관계다. 황제의 암살을 의뢰받았던 츠키나가 레오는 별로 좋지 못 한 전략을 선택했다. 여성의 옷을 입고 궁에 숨어드는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연회 자리에 섞여들어 일을 처리한 후에는 시종이나, 호위병으로 위장할 생각이었다. 황궁엔 무수히 많은 사람이 있고, 황제가 자신을 발견할 리는 없었다. 이를테면 사전 조사였다. 레오는 황궁의 은밀한 사정과 그 길을 알고 싶었고 그 일을 위해 여장을 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섞여들기까지는 수월했다. 레오는 의심받지 않고 황궁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담을 넘던 남자와 마주쳤다. 남자는 낑낑거리며 애쓰고 있었다. 레오는 못 본 척 지나가야 했지만 그러질 못 했고, 상대가 궁금했다. 결국 가까이 다가가 도와주고 말았다. 헉헉거리며 높은 담 밑으로 떨어진 남자는 오도가도 못 하고 난처했다고 설명했다. 좀 전까지 도와주긴 했지만 얼굴을 마주해서야 좋지 못 하다. 레오는 다소 말괄량이 기질이 있지만 어쨌든 정숙한 양갓집 규수를 연기해야 했다. 한 손을 들어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호호 웃었다. 별 다른 게 없다면 그대로 지나쳐 가야 했으나, 남자는 레오에게 손을 내밀었다. 갑갑해서 나오신 게 아닙니까? 나와 같다면 이것도 인연이니까 좋은 곳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 손을 잡기 위해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을 때, 레오는 상대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아주 예쁘고, 잘생긴 얼굴이었다. 레오는 아... 하고 숨을 삼켰고 어정쩡하게 남자의 손을 붙잡았다. 남자가 레오의 손을 잡아 끌었다. 이거 아닌데... 하면서도 그를 따라가면서, 레오는 그 얼굴이 이상하게 낯이 익다는 걸 깨달았다.
놀랍게도 그건 황제였다. 그렇다면 이건 기회다.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좀 더 으슥하고, 좀 더 깊숙한 곳으로 가서 상대를 살해하면 된다. 레오는 너무나도 쉽게 일이 흘러가는 느낌에 다른 의미로 당황했다. 속임수일까? 정말 이게 황제라고? 머리 속으로 온갖 생각이 지나가는 동안, 황제인 남자는 레오에게 좋은 곳을 구경시켜주고 침소로 이끌었다. 으슥하고 깊숙한 곳. 단 둘인 상황이라면 최고다. 레오는 그대로 그에게 끌려갔고, 이윽고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이상했다. 정말이지, 모든 것이 너무나도 이상했다.
호화로운 침상 위에 누워서, 황제는 레오의 가짜 머리카락을 떨구고, 레오가 꼭꼭 싸매어 감추었던 판판한 가슴을 드러냈다. 그는 레오의 맨살을 만지며 웃었다. 당신, 역시 남자로군요. 미소짓는 얼굴이 가까워졌다. 레오는 이대로 그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언가 다른 목적이 있어서 궁에 들어왔다는 것도 알겠어요. 좋아요, 목적이 뭐죠? 레오는 대답을 하지 못 했다. 역시 여장을 하고 들어왔던 게 문제가 아닐까. 자신이 뻣뻣하게 굳어진 그 이유를 레오는 알지 못 했다. 그 밤을 그렇게 보내고 레오는 황제의 첩으로 거처를 받았다.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었다.
"......."
옆으로 누워 가만히 숨을 흘리면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이 느껴진다. 레오는 눈을 내리깐 채 입을 다물었다. 미친 놈이라는 이 황제는 남자인 레오를 안았고, 남자인 게 다행이라며 기뻐했다. 아이가 생기지 않을 거 잖아요. 잘 됐어요. 뭐가 잘 됐다고 하는 건지, 레오는 알 수가 없었다.
"얌전하네요."
"내가?"
"네. 난폭하게 굴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럴 리가. 계약을 했잖아."
"목숨을 건 계약?"
그 계약에 걸려 있는 목숨은 자신의 것이 아니다. 레오는 머리카락을 만지는 손을 느끼며 몸을 돌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이 황제는 어리고, 잘 생긴 얼굴을 하고 있다. 손을 뻗어 그 뺨을 쓰다듬으면 그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고 레오의 손을 잡아 손가락 다섯개를 모두 얽게 하고는 꼭 쥐어왔다.
"...있잖아, 역시 날 데리고 다니는 게 낫지 않겠어?"
"그럴 수도 있겠네요."
"난 솜씨가 좋아. 황제 폐하의 그림자에 숨어서, 폐하에게 닥치는 위험은 모두 감지할 수 있으니까."
"좋은 일이죠."
웃는 얼굴에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건 이런 거다. 레오는 인상을 쓰고 한 자 한 자 힘을 줘서 말했다.
"난 이 궁에 얌전히 쳐박혀 있는 게 싫은데."
"전 당신이 여기 있었으면 좋겠어요."
"...암살자에, 밀정인데? 애초에 나는 여자도 아니야. 황제의 첩같은 거, 할 수 있을 리 없잖아."
"맞아요, 저도 잘 알죠."
손가락 다섯을 모두 맞물리게 한 남자가 그대로 몸을 붙여 온다. 레오는 인상을 쓰다 말고 잠시 숨을 삼켰다. 남자가 상냥하게 이마에 입술을 댄다.
"하지만.... 역시 그냥, 제 연인이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이 말에 대꾸할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자신은 여자가 아닌데, 이 멍청한 황제는 사랑을 기대하고 끌어안아 온다. 떠나고 싶으면 언제든, 이 목숨을 가지고 새 시작을 해요, 암살자 씨. 그런 계약이었던 것 같다. 레오는 그의 목을 가져가는 대신 자신이 받은 상냥한 입술을 돌려 주었다. 이런 류의 주고받기엔 서툴러서, 레오는 남자가 하는 행위를 흉내내는 정도에 불과했다. 이런 걸 사랑이라고 여길 수는 없었다.
"폐하는 정말... 바보네."
연인 같은 게 아니라 목숨을 주고 받는 사이일 뿐이지. 다른 사람들이 미친 놈이라고 수군거리는 이유를 알겠다고 생각하면서, 레오는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 이 알 수 없는 황제를 끌어안았다.
루우
츠키나가 레오는 옥상에 걸터앉아 하늘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석양이 짙게 내려오는 하늘은 새빨간 단풍의 색깔을 한껏 뽐내고 있지만 곧 다가올 밤이 짙은 장막을 불러올 것이다.
레오가 처음 지상에 내려왔을 때에는 지금보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푸른 커튼에 걸려 있었다. 일부러 시간을 낭비한 건 아니다. 흠집 하나 없는 새파란 하늘에 도드라지는 흰 구름이 흘러가는 것이 토끼의 여정 같아서 저도 모르게 따라가게 됐을 뿐이다. 바닷가에서 시작한 여행은 어느새 빌딩이 가득한 숲까지 이어졌다. 사실 그 토끼는 한참 전에 사라졌다. 동그랗고 새하얀 구름이 점점 흩어지고 조금 탁해진 하늘을 춤추듯 떠돌다가 가장 높은 건물 위에 내려앉았다. 조금 있으면 얼마 남지 않은 낮을 밤이 집어삼킬 것이다.
‘슬슬 일어나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한지도 몇 시간이 흘렀던가. 빌딩 숲에 하나둘 켜지는 반딧불을 보면서도 레오는 일어나지 않았다. 조금만 더 있어도 되지 않을까. 저기 건물에 불이 다 켜지면. 혹은 저어기 건물에 불이 다 꺼지면. 이러고 있다간 금방 다가올 새벽을 생각하니 조바심이 마구 들었다. 이미 이틀을 아무 일 없이 보냈다. 여기서 더 지체했다간 그냥 문책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일어나야겠지.’
그렇게 마음먹었을 때는 이미 새까만 밤이었다. 밤의 주민들이 움직일 시간. 기지개를 쭈욱 핀 레오는 그대로 건물 밑으로 몸을 던졌다.
*
“정말 이렇게 늦게까지 있는 시간인데 걱정하시지 않아?”
“아시잖아요, 가족 아무도 절 신경 쓰지 않아요.”
“남의 부모님 나쁘게 말하는 건 좀 그렇지만, 이해가 안 돼. 어떻게 츠카사 같은 아이를 내버려두지? 내가 츠카사 엄마였으면 하루 종일 걱정돼서 일도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을 거야.”
밤의 거리에 마구 섞여드는 대화 중 하나가 그렇게 떠든다. 교복을 입은 소년, 츠카사는 보랏빛 눈동자를 곱게 휘며 웃었다.
“괜찮아요, 저는 누님만 있으면 되니까요. 그래서 기분은 좀 괜찮으신가요?”
“응, 츠카사랑 같이 있기만 해도 기분이 나아져서 이제 정말 괜찮아!"
“누님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뻐요. 괜찮으시다면 저와 조금 더 같이... 아.”
문득 닿은 시선의 끝에 있는 인물을 발견한 츠카사는 멈칫했다가 이내 한숨을 쉬었다.
“아니, 역시 오늘은 일찍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죄송해요.”
“이미 일찍이 아니잖아~ 얼른 집에 들어가. 데려다줄까?”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오히려 제가 누님을 에스코트해야 하는데, 다음엔 츠카사에게 부디 그 기회를 주세요.”
아이는 제법 꼬마 신사처럼 말을 늘어놓았다. 거기에 매끈한 미소년의 얼굴까지 더해지자 상대는 홍조 어린 얼굴로 웃음을 터뜨렸다. "다음에 기회를 줄게, 작은 기사님." 소년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여자는 한껏 가벼워진 걸음으로 인파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여자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미소를 지으며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소년은 이내 표정을 굳혔고 벤치를 향해 똑바로 걸어갔다.
"여기에서 뭐하는 겁니까, 당신."
“응? 뭐야, 벌써 끝난 거야?”
벤치에 앉아있는 후드티를 입은 소년, 레오가 짐짓 놀란 척 물었다.
“또 방해하러 온 겁니까?”
“아니, 아니. 이번에 그냥 구경하기만 했는 걸?”
“그렇게 빤히 바라보고 있으면 될 일도 안 될 겁니다. 굳이 하계까지 내려와서 남의 비즈니스를 망치나요?”
“와하핫, 보고만 있어도 방해라니 나 그래도 나름 천사라는 걸까! 악마의 유혹에 빠질 뻔한 어린 양을 구했다!”
“이미 늦었다고요. 넘어오기 직전이라는 말조차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그녀는 제 손아귀에 있어요. 아마 내일쯤이면 몸도 마음도 홀랑 저에게 바쳐서 영혼은 제 것이 되겠죠. 당신의 방해는 딱 하루 정도의 시간 벌기에 지나지 않는다고요.”
츠카사가 손가락으로 허공에 하트를 그리며 무미건조하게 대답한다.
츠키나가 레오는 천사, 스오우 츠카사는 악마.
각자 서로 다른 색의 날개를 지니고 그들의 경계선이자 주 근무처인 인간들의 세상, 하계에서 레오는 츠카사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어린 악마는 천사를 처음 보았고, 오래된 천사는 어린 악마를 재미있어 했다. 그렇게 이어진 인연은 만날 때마다 부싯돌이 틱틱 튀는 대화로 이어지긴 했지만 다른 천사와 악마의 관계에 비하면 매우 온화한 축에 속했다.
천사와 악마는 본디 상성이 극악이어서 그 자리에서 서로의 존재를 제거하려고 드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신의 피조물과 신에게 반발하는 자들의 무리가 나눌 대화라고는 피의 대화 말고는 있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괜히 악마에게 집적거리는 레오는 천사로서 굉장히 비정상적이었다.
“그 어린 양을 내가 구원하기 보다는 그전에 널 한 방 먹이는 게 더 빠르지 않겠어?”
“천사들은 거만하기 짝이 없군요. 지금 당장 소멸시켜드려요?”
“오래 살고 볼일이네!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악마한테 이런 소리나 듣고 말이야. 그래도 털을 곤두세운 아기고양이 같아서 귀엽긴 하네. 착하지~”
머리를 쓰다듬자 츠카사가 발끈하며 손을 쳐냈다.
“바보 취급하지 마세요!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왜 이런 시간에 거리를 나다닙니까. 착한 천사님들은 양모 잠옷을 입고 코 자야 할 시간 아닌가요?”
“야간 근무라는 것도 있는 거니까. 여기도 좀 바쁘거든.... 스오를 방해할 생각은 없었어. 앗, 천사가 이런 말 하면 안 되나? 결과적으로 방해했으니까 내 할 일은 한 셈인가?!”
“여전히 정신없는 천사군요. 처음엔 천사들은 다 당신 같은 줄 알았는데.”
한숨을 쉬던 츠카사가 레오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교복을 입고 있는 어린 소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수트를 차려 입은 성인 남성이 있었다.
“이런 곳에서 아무 것도 안 하고 있다는 건 농땡이 치고 있단 소리겠죠. 가요, 인간들 식으로 식사 같은 거나해요. 당신의 태만함에 동참해 줄 테니까.”
“오오, 굉장한걸. 이브닝드레스라도 입어야 해?”
“됐네요. 학생 둘이서 밤길을 다녔다간 경찰이 부르는 경우도 있으니까. 갈 거예요, 말 거예요?”
“갈래~”
내민 손을 레오가 덥석 잡는다. 조심성 없게, 라며 혀를 차지만 츠카사는 익숙하게 레오의 손을 잡고 밤의 거리로 들어간다.
“야경이 나름 괜찮은 곳이 있으니까 거기 가요.”
“오옷, 스오가 쏘는 거야?!”
“돈 없는 천사들과 달리 저희는 rich하거든요. 천사의 일을 방해할 수 있다면 이쪽은 환영이니까.”
“헤에, 이게 바로 시간 끌기 작전인가? 그래도 결국, 하게 될 거고. 스오는 헛돈을 쓰게 될 지도 몰라!”
“상관없어요. 끽해야 식사 한 번뿐인걸. 그리고... 뭔가 엄청 가기 싫은 얼굴 하고 있어서.”
중얼거리던 츠카사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뒷말은 없던 걸로 해주세요. 저기에요, 불성실한 천사 씨.”
레오는 가리키는 가게 대신 츠카사의 얼굴을 흘끔 살폈다. 둔한데 이상한 데서는 눈치가 빠르네. 이러쿵저러쿵하지만 츠카사랑도 만난 지 꽤 됐다는 걸 깨달았다. 천사를 에스코트하는 유일한 악마. 모든 악마가 츠카사 같으면 사이좋게 지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문제는 악마가 아니고 천사 쪽일지도....
레오가 대답이 없자 츠카사가 갸웃거리며 레오의 안색을 살핀다.
“왜 그래요? 별로 마음에 안 들어요?”
“아니. 스오가 잘생겨서 나도 모르게 쳐다보고 말았어.”
“다, 당신, 천사가 그래도 돼요?!”
빨개진 얼굴로 츠카사가 버럭 외쳤다.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며 레오는 츠카사의 팔짱을 꼈다.
“얼른 가자고, 성실한 악마 씨.”
천사와 악마라는 상극의 관계일 텐데도 츠카사는 어쩐지 싫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
천사들이 기거하는 곳에는 언제나 눈이 부실 정도의 하얀 빛이 드리워졌다. 일절의 그림자는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구석구석 빛들이 들어차있다. 신의 사자들이 신탁을 받기 위한 자리기도 했기에 당연할 지도 모른다.
불순물 하나 섞이지 않고 에메랄드빛으로 흐르는 물줄기가 이어진 거대한 호수 위에 그들의 성이 있었다. 레오는 그 공간을 사랑했다. 새들이 걱정 없이 지저귀고 경건한 오르간 소리가 간간히 들리는 천사들만의 낙원. 그 중에서 가장 중앙의 가장 높은 곳에서 그들은 신의 말씀을 받든다.
까마득하게 높은 천장 아래로 둥글게 내려오는 홀에서 샹들리에가 무지갯빛으로 빛난다. 레오는 그 가운데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흰 계단이 이어져있고 그 끝은 감히 고개를 들어서도 안 되는 위대한 창조주인 신이 존재하는 곳이다. 계단의 끝에는 양 옆으로는 창을 든 천사들이 줄지어 있다. 접선의 자리에는 주교급 천사들이 기록자로서 자리를 지킨다. 레오는 사도로서 명을 받고 인간계로 내려가게 될 것이다. 줄곧 그랬던 것처럼.
[ 무지몽매한 인간들에게 가르침을 전하고 오너라. ]
귀로 듣는 게 아닌 몸 전체가 받아들이는 소리였다. 레오는 고개를 숙였다.
엄격한 눈들이 레오를 바라보고 있다. 모든 것은 신의 말씀대로. 그들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츠키나가 레오가 명을 부여 받은 지 사흘 째.
신의 말은 그대로 실현이 되었다.
*
“17일 현지 시각, 오전 남태평양에 위치한 사모아 제도 부근에서 진도 8.0의 강진과 함께 높이 6미터의 쓰나미가 발생해 대규모 인명피해가 일어났습니다. 정부에서는 재해가 일어난 직후....”
침대 맡 스탠드만 켜진 호텔 안에서 적막을 메우듯 텔레비전이 떠든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화면의 빛과 스탠드의 불빛이 방 안에 있는 두 사람을 언뜻언뜻 비춘다. 한 사람은 테이블에 앉아 무언가를 적고 있고, 한 명은 침대에 다리를 뻗고 길게 누워있다. 두 사람의 차이라면, 서로의 성별이 다르다는 것과 한쪽은 살아있고 한쪽은 죽었다는 점이 있었다.
츠카사는 한참 보고서를 적고 있었다. 그녀는 필요한 조건에 딱 알맞은 영혼이었다. 그 영혼을 지하로 보내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마침내 목적은 달성했다. 그녀의 혼은 크리스탈 병에 담아 보낸 참이었다. 그에게 남은 일은 이번 일의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 정도였다.
갑자기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츠카사는 의문스럽게 문 쪽을 바라보았다. 이 새벽에 찾아올 방문자가 있을 리 없었다. 숨을 거둔 그녀 역시. 침대 위의 그녀는 잠에 든 것처럼 편안한 얼굴로 누워있었다.
츠카사는 노크를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그녀의 죽음은 체크아웃 시간에 알려진다. 마저 펜을 움직이려는 찰나, 놀랍게도 문이 찰칵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은 당연히 잠겨있었고 방 카드키 역시도 문 근처에 꽂힌 상태였다.
굳게 닫힌 문이 끼이익 열렸다. 복도의 불빛을 등지고 어떤 이가 서 있었다.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그가 똑바로 츠카사를 바라보았다. 곧이어 등 뒤에서 네 장의 흰 날개가 뻗어나왔다.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남자가 외쳤다.
“죽이러 왔다, 이 악마야!”
“...레오?”
“에, 단번에 눈치 채잖아. 재미없네, 너.”
새벽의 무단 침입자는 순순히 인정하며 날개를 접었다. 곧 시선이 고요히 누워있는 여자에게 향했다.
“결국 데려갔구나. 신의 품에서 평안하라고 기도도 할 수 없겠네.”
“그녀와는 정당한 계약 조건을 걸었으니까요. 일곱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대신 영혼을 받기로. 서로 win-win인 계약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마지막 소원은?”
“그녀가 줄곧 짝사랑하던 상대와 잠자리를 갖는 거였지요.”
“그래서 멋진 분장을 한 스오가 열일했다는 거네. 으음, 이럴 때는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미 내가 개입하기도 늦어버렸고.”
레오가 움직일 때마다 카펫이 깔린 바닥에 젖은 자국이 남았다. 츠카사는 창문을 보았다. 그가 기억하는 한 이 도시에 비는 내리지 않았었다.
“당신, 젖었네요.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츠카사가 가까이 다가와 레오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레오는 어깨를 으쓱였다.
“말했잖아, 바빴다고.”
“...엄청 피곤해 보이네요. 천천히 이야기를 하고 싶으니 일단 자리를 옮길래요?”
“어디로?”
“제가 살고 있는 곳은 어떠세요? 아, 걱정하지 마세요. 인간계에 있는 집이니까. 사는 곳이 하나쯤은 있어야 업무가 편하거든요. 어때요? 아무도 들어와 본 적이 없는 곳이라고요. 하물며 당신 같은 천사는 절대 부르지 않겠지만, 당신만 특별히.”
“오오, 이게 악마의 유혹이라는 건가? 재밌네, 흥미로워. 그럼 한 번만 그 유혹에 넘어가보도록 할까.”
제법 익살스럽게 말하지만 전처럼 달라붙지 않는다. 옷이 젖었기 때문일까? 보고서는 돌아가서 쓰자고 생각하며 츠카사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우두커니 서서 여자를 가만히 보는 레오를 츠카사는 호텔 방문을 닫고, 다시 열었다. 호텔 복도가 아닌 츠카사의 은신처가 나타났다.
“가요.”
레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츠카사 곁으로 다가갔다.
곧 호텔 방에는 두 사람이 사라지고 누워있는 한 사람만이 남겨지게 되었다.
*
세탁기에서는 레오가 입었던 옷들이 돌고 있었다. 옷의 주인이 씻고 있는 걸 알려주는 물소리가 샤워실에서 들리고 있었다. 츠카사는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레오가 커피 취향이란 건 다년간의 접촉으로 알고 있었다. 츠카사는 홍차파였지만 이번에는 둘 다 커피를 준비한다.
물소리가 끊겼다. 다시 이어지지 않는 걸 확인하고 츠카사는 포트를 들어올렸다. 머그잔에 검은 액체가 고이기 시작했다.
“목욕 잘 했어! 오오, 옷에서 스오 냄새가 난다~”
헐렁한 반팔을 펄럭거리는 그에게 츠카사가 커피를 건넸다.
“당신에게선 아직 바다 냄새가 나네요.”
“이상하네. 깨끗이 씻었는데.”
레오가 쓰게 웃으며 커피를 받아들였다. 의심하는 기색 없이 호록호록 잘도 마신다. 비어버린 커피대신 한동안 침묵이 고였다.
“그래서 왜 절 찾아온 거예요?”
“가끔 그런 날 있잖아. 엄청 피곤할 때 잘생긴 얼굴로 위안 받고 싶은 날.”
“당신은 정말 거짓말을 못하네요. 저한테는 할 수 없는 이야기인가요?”
“아니야~ 진짜로 스오를 보고 싶어서 온 건데.”
“...왜 제가 보고 싶은데요?”
“그냥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데 동료보다는 뭔가....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천사가 말하니 칭찬인지 조롱인지 모르겠네요. 말도 횡설수설하는 거 보니 제정신이 아니 신 것 같고 어서 주무세요. 침대는 편히 쓰셔도 됩니다.”
“와하하, 환자 취급 받았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레오는 침대에 걸터앉아 얌전히 손에 든 커피를 삼켰다. 츠카사는 책상에 앉아 마저 보고서를 썼다. 펜 끝을 열심히 움직이면서도 레오의 상태를 살핀다. 제대로 시선이 마주치자 레오가 웃어온다.
“악마는 왜 있을까?”
아니, 시비를 걸어온다. 츠카사가 대번에 인상을 쓰며 대꾸했다.
“갑자기 뭡니까? 지금이라도 퇴치하려고요?”
“그럴 리가! 그냥 문득 궁금해서. 이상하지 않아? 이 세상을 만든 건 신인데, 왜 그 의지와 정반대인 것들이 존재할까. 스오가, 악마가 여기 있다는 건 신이 만들었기 때문이잖아? 일부러 적대세력을 만든 걸까?”
“그건 아닐 겁니다. 저는 나이가 어린 편이라 정확히는 모릅니다만, 당신들과 같이 신의 피조물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럼 너희들은 어떻게 태어난 거야?”
천사의 질문에 악의는 일절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악마는 잠시 고민하다가 순순히 말한다.
“...아마 결핍에서 태어나지 않았을까 합니다. 이곳은 신이 만든 세계입니다. 하지만 그 세계가 완벽하지 않아서 결핍이 일어났습니다. 인간들이 소원을 가졌다는 것은 즉 결핍을 가지고 있단 말이에요. 저희는 그 부족한 것을 메우려는 수많은 이들의 원념 속에서 태어났다고 해요. 애초에 신이 완벽한 세계를 만들었다면 저희는 태어나지도 않았다는 말이죠.”
“꽤 흥미로운 대답인걸. 신이 완벽하지 않아서 악마들이 태어났다라....”
“그 악마라는 명칭도 우스워요. 선악은 아주 모호해요. 하루하루 남편에게 매질을 당하던 아내가 칼을 들어 원흉의 배를 찔렀어요. 이럴 때 그녀에게 악이라는 정의를 덧씌울 수 있을까요? 선악을 결정지을 수 있는 건 신도 악도 아닌 자기 자신이에요. 하지만 낙원의 높으신 분은 생각이 다르겠지만요. 애초에 신은 절대선이 아니지 않나요?”
“회사마다 방침은 다른 거니까. 다만, 그래. 창조주가 절대선이 아닐 수도 있어. 그래도 나는 사명을 따라야하고....”
레오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너무 오래 살았나봐. 생각이 많아지네. 쓸데없는 생각만.”
“곧 죽을 영감처럼 그러지 마요. 자고 일어나면 대충 정리되지 않을까요.”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그러네, 요 꼬맹이. 나 언제까지 여기 있어도 돼?”
“당신이 있고 싶은 만큼요.”
“오옷, 숙박비는~?”
“흠, 그건 고민 좀 해볼게요. 천사에게 뜯어낼만한 게 뭐가 있을지 정말 흥미로워요.”
“우와, 방금 진짜 악마 같았어 스오!”
“악마 맞거든요.”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구석에서 나왔다. 레오가 주섬주섬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것이 보인다. 츠카사는 다시 펜을 제대로 집었다. 아마 보고서는 저 천사가 잠들고 나서야 제대로 마무리를 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마워, 스오.”
이불에 얼굴을 반쯤 파묻은 천사가 그렇게 말했다.
“천사에게 감사 인사 받아봐야 하나도 고맙지 않으니까 빨리 자기나 해요.”
일부러 쀼루퉁하게 대답하며 츠카사는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귀가 화끈거리는 기분이었다.
*
며칠 만이더라. 레오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보았다. 열손가락을 한 번 다 접고도 다시 펴도 셈은 끝나지 않았다. 와, 엄청 돌아가지 않았잖아. 소환장이 내려올 만하네. 한숨을 쉬며 레오는 손을 내렸다. 손목을 묵직하게 죄고 있는 것에서 절그럭 거리는 소리가 난다. 날개도 구속구에 갇혀 꼼짝을 할 수 없다.
소환장은 귀여운 표현이었다. 아무와도 연락하지 않고 츠카사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과연 악마의 은신처라고 하더니 동료들도 쉽게 연락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끝끝내 낙원의 연락은 레오에게 도착했다. 레오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엄중하고 무거운 선고가 내려져 있었다.
언제나 낙원에 울려 퍼지던 신성한 음률이 들리지 않는다. 레오도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빛으로 가득 찼던 곳에서 걸어가면 걸어갈수록 어둠에 감싸여졌다. 한참을 걸어가다가 이곳에서 대기하라는 말을 듣고 레오는 멍하니 서있는 참이었다. 이곳이라고 해도 아무 것도 없었다. 새까만 어둠만이 주위에 가득했다.
갑자기 레오 주위가 환하게 밝아졌다. 레오는 눈을 가늘게 떴다. 둥그런 조명이 레오만 내리쬐고 있는 것 같았다. 높지만 아주 작은 원형 무대에 레오가 서 있는 모양새였다. 주변이 잘 보이지 않지만 지켜보는 이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앞에서 어떤 목소리가 엄숙하게 선언했다.
“지금부터 츠키나가 레오의 재판을 시작한다.”
*
“하스미 선배, 큰일 났어요!”
하스미 케이토는 방정맞은 행동거지를 싫어한다. 문을 열기 전부터 계단을 우당탕탕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어떤 예감은 있는 법이다. 케이토는 이사라 마오의 품위 없는 행동을 지적하는 대신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역시나 나쁜 예감은 들어맞았다.
“츠키나가 선배의 재판이 열렸다고 합니다.”
“뭐라고...? 지금?”
“네, 방금 들어온 소식이에요. 일부러 저희에게 연락이 가지 않도록 한 것 같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신관장인 에이치가 부재중인데 어떻게 재판을 진행할 수가 있지?”
“그게, 지하 재판장에서 비밀리에 치러진 것 같습니다.”
“거긴 이단 심판장이잖아.”
인상을 쓰며 케이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츠키나가 레오는 규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멋대로 구는 망나니에 시끄럽기까지 한, 케이토와는 아주 정반대의 천사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 한 동료기도 했다. 그와는 아웅다웅하면서도 등을 맡길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자 중 하나였다.
“평소보다 부재가 길었지만 재판까지 갈 일도 아니었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냐.... 죄목은 뭐지?”
“그게... 임무 관련 보고 누락 및 소환 명령 무시가 있는데 이다음이 문제예요. 악마와 의도적 접촉 및 부적절한 관계가 의심되고 있고, 창조주를 모독하는 언사가 있었다고....”
“이 죄를 모두 인정하는가.”
목소리가 무겁게 떨어졌다. 레오는 머리 위로 쏟아지는 죄목들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과장된 것도 없지 않아 있었다. 조그만 행동 하나를 부풀리고 죄로 만든다. 항변할 수 있었지만 부질없어 보였다. 이미 죄의 낙인이 찍힌 상황이다. 레오가 아무리 부정해도 결과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큰 죄목인 ‘악마를 친구’라고 생각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인정합니다.”
레오는 담담하게 말했다. 자신의 임무에 회의를 느끼고 있는 이상 레오가 천사의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도 의심스러웠다. 레오를 둘러싸는 낙원의 모든 것에 지쳐버렸다.
“그대의 죄가 무거워 엄벌에 처해야 하나, 지금까지 쌓아온 공적을 인정하여 하나의 보속만을 내리도록 하겠다. 부적절한 접촉을 한 악마를 처단하고 오거라. 그 악마의 피로 너의 죄가 씻길 것이니 가서 지금 바로 비천한 악마에게 신의 말씀을 전하고 오너라.”
레오는 고개를 들었다. 뒤편으로 빛이 비쳐 들어왔다. 언제까지고 갇혀있어야 할 것 같은 재판장의 출구가 열리고 있다. 어느새 손의 구속구가 사라져 있다. 날개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레오는 움직이지 않았다.
구속구가 물려있지 않던 입이 움직였다.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츠키나가, 제발 쓸데없는 행동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라. 곧 에이치가 오니까 어떻게든 수습할 수 있어. 말을 듣는 척 하고 상황이 나아질 때까지 기다려.’
케이토는 그렇게 속으로 씹어 삼켰다. 이런 걱정을 한다는 건 그럴 행동을 저지르고도 남을 인물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뭔가 이상해. 진행이 너무 빨라. 여기도 이제 알게 된 정보를 미리 가지고 있었다고? 츠키나가는 여기에서도 제대로 연락이 되지 않았어. 대체 어디서 그 정보를 얻었다는 거지? 에이치가 없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은 움직임인데. 마치 누가 뒤에서 수를 쓴 것 같은....’
케이토의 생각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하얀 빛이 케이토 주위를 깜박이고 있다. 마오의 연락이었다.
“뭐냐, 이사라. 재판장까지 얼마 남지 않았어. 조금만 더 가면....”
“하스미 선배, 끝났어요. 거긴 텅 비어있을 겁니다. 판결이 선고됐어요, 형벌도 벌써 집행됐다고 합니다....”
“그 멍청이는 시간 끌줄도 모르나?! 그래서 츠키나가는 어디 있지?”
“...너무 늦었어요.”
케이토의 걸음이 멈췄다.
“무슨 소리야?”
“낙원 추방이 선고됐어요. 날개도 이미....”
*
천사에게 낙원 추방이란 죽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낙원을 떠나기 전 날개가 뽑히는데 그것은 천사들의 힘의 원천이나 다름없어 즉시 아무런 힘도 못쓰게 된다고 한다. 그 상태에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하계, 인간 세계로 버려진다. 돈도 가족도 무엇도 가지지 못한 채 버려지는 천사들의 최후는 뻔했다. 운이 좋으면 마음씨 좋은 인간들에게 거둬지는 경우도 있지만 극소수였고, 보통은 호된 꼴을 당하며 운 나쁘게는 천사에게 악감정을 가진 악마들에게 찢어발겨지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찾았다.”
츠카사는 검은 날개를 접고 후미진 골목으로 들어섰다. 그 끝에는 웅크린 누군가가 있었다. 운이 좋았다. 아프리카 오지에 떨어졌으면 수색에 애를 먹었을 것이다. 그래도 결국 찾아냈겠지만.
주황색 머리칼을 가진 남자의 두 눈은 꼭 감겨 있었고, 등에는 핏자국이 가득했다. 아직 부상에서 회복되지 않은 듯했다. 츠카사는 레오를 안아 올렸다. 그는 아직도 깨어나지 못했다.
“숙박비는 당신의 날개로 받았어요. 저희 집이 좀 비싼 편이라서.... 대신 당신은 이제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어요.”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내심 레오의 날개가 사라진 걸 안타깝게 여겼다. 그의 흰 날개는 유독 아름다웠다. 그 네 장의 날개를 모두 펼쳐들고 대재앙을 일으키는 모습은 말도 못할 아름다움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악마인 츠카사가 천사인 레오를 가지기 위해서는 이 수밖에 없었으니까. 날개도 지위도 갈 곳마저도 잃은 레오는 결핍덩어리가 되어 악마를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츠카사는 여전히 감겨 있는 눈두덩에 경건히 입술을 떨어뜨렸다.
“이제 영원히 함께 해요, 나만의 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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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레오 - 겨울 2악장
* 이즈레오 교류회2에 들고간 통행료입니다...
벚꽃 잎이 축포처럼 온 세상을 수놓는 졸업식이 끝났다. 말도 많고 탈도 많다로도 압축이 되지 않는 유메노사키 생활이 오늘의 이 하루로 끝이 난다는 걸 세나 이즈미는 처음에 실감하지 못했다. 적어도 10년은 보낸 것 같은데, 그러한 감상 속에서도 얼굴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영영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울 일이야? 끝내 눈물을 보이고 마는 나이츠의 막내에게는 짐짓 엄하게 말하기도 했었다.
무엇보다 다행인 건 동급생이자 나이츠의 리더인 츠키나가 레오도 무사히 졸업했다는 것이다. 정학과 등교 거부로 출석 일수가 부족한 게 뻔한 상황이지만 아이돌 육성 학교 특성상 그런 건 눈 감아 줄 실적이 있었기에 졸업도 간신히 허락된 것 같았다. 남자는 신나게 방방거리며 떠들고 있었다. 유메노사키의 세나 이즈미에게 있어서 츠키나가 레오란 인물은 빼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아주 긴 이야기였다. 기쁨과 후회와 눈물과 미소가 얼룩진 끈적끈적한 이야기. 청춘이란 이름으로 뭉뚱그려 포장할 수 있을 그 이야기가 이즈미의 취향은 아니었지만 기어코 막을 내렸다. 이렇게 나란히 졸업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했던 시절을 넘어 결국엔 벚꽃을 배경으로 한 해피엔딩.
“뭐해, 세나. 그렇게 느슨해빠진 얼굴을 하곤! 앗, 세나도 역시 졸업하니까 막 울컥울컥해?! 아니면 봄이라도 타는 거야?!!”
“시끄러워, 레오 군.”
밉살스러운 얼굴을 졸업장으로 밀면서도 이즈미는 내심 기뻤다. 결국 이렇게 너와 졸업한다. 모두가 행복해졌습니다의 뒤에는 대학생이라는 또 다른 대단원이 시작될 것이다. 그 이야기가 부디 유메노사키 만큼 치열하지 않기를. 그리고 이 녀석과 다시는 떨어지지 않기를.
머리에 묻은 벚꽃 잎을 털어주는 척하며 밝은 주황색의 머리를 매만지자 금방 볼이 발그레해지며 녹색 눈이 기쁜 듯이 웃음 짓는다. 어쩐지 여기까지 간질거리는 벚꽃 잎이 묻어오는 기분이었다. 확실히 앞으로가 더 나을 것이다. 동급생에서 시작했고 이제는 이 세계에 하나 뿐인 연인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서 일은 벌어졌다.
*
“뭐? 집을 구했어?”
“응, 아직은 가계약만 해뒀지만! 지금 집이랑 학교 머니까 역시 자취해야 하니까.”
“아니, 아니, 그건 이미 알고 있고. 너 나랑 같은 대학이잖아?”
“와하핫, 세나 이제 안 거야? 나랑 세나는 같은 대학이라고!”
“아아, 이 멍청아 내가 그걸 모르겠어?! 내 말은 왜 집을 멋대로 혼자 구한 거냐고!!”
격노하는 이즈미를 멀뚱히 쳐다보는 초록빛 눈동자가 있다. 이 녀석은 항상 그렇다. 대화를 하는 이쪽이 더 복장 터지게 만드는 재능이 있다. 말뿐이 아니라 행동도 마찬가지다.
작곡이 시작되면 주변의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작곡을 한다는 행위에만 충실하다. 그것이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인지, 해변의 모래사장인지, 한창 데이트 중의 영화관인지는 그에게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그렇게 탄생한 곡은 이즈미가 사랑해 마지않는 음악들이었지만 그와 별개로 자기 몸 하나 정도도 건사 못하고 매번 바닥에 주저앉고, 낙서를 하고, 핸드폰을 잊어버리는 등등의 초등학생도 하지 않을 행동들을 연달아 보여줬었다.
그런 한창 어린 아이 같은 아이가 나이는 훌쩍 먹어서 이제는 자취를 하지 않으면 상황이 돼버렸다. 어찌 걱정이 안 될 수가 있는가. 제 딴에는 여동생 앞에서는 어른인척 하는데 이젠 그 여동생도 생활 공간에서 없어지는 상황이다.
다행히도 이즈미와 레오는 같은 대학을 다니게 되었다. 고교 시절의 아이돌 활동을 인정하고 그에 가산점을 주고, 또한 편의도 봐줄 수 있는 대학. 이즈미는 모델 일을 재개했고, 이 작곡 바보는 그 명성에 따라 작곡에 매진하기로 했다. 이미 둘 다 프로로 활동하고 있는 이상 대학 졸업 타이틀은 그저 작은 간판일 뿐 견문을 넓힐 수단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생활 리듬이 얼마나 겹칠지 모르지만 연인이자 이제 대학 동문이 될 이즈미가 레오를 챙기는 것은 당연해보였다. 적어도 이즈미는 그걸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어때, 괜찮지?”
이즈미가 화난 이유를 잘못 짚었는지 레오는 이즈미를 집에 데려갔다. 짐 하나 들어가 있지 않은 집은 벽지를 새로 했는지 얼룩 없이 깔끔했다. 넓은 거실과 작은 부엌 그리고 침실인지 작업실인지로 쓰일지 모를 조그만 방 하나까지. 혼자 살기에 딱 좋을 집. 첫 집 치고는 나쁘지 않다는 것이 객관적인 감상이었지만 그보다 더 큰 감정적인 파도가 여전히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그냥 평범한데.”
“세나에게 그 정도면 합격이란 얘기네.”
정답이지만 이즈미는 동의 대신 인상을 썼다.
“전혀 아니거든. 그보다 왜 말도 하지 않고 먼저 구했냐고. 레오 군도 자취, 나도 자취니까 같이 사는 게 당연한 거 아니었어?”
연인이니까 라는 말은 꺼내지 못했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이유는 충분했다. 둘 다 자취가 필요한 상황에 상대는 같은 학교에 심지어 같은 아이돌 유닛이었고 사이도 나쁘지 않았다.(연인까지 갔는데 사이가 나쁘면 곤란하다.) 오히려 평소에는 저쪽이 좋다고 엉겨 붙었다.
고백은 이즈미가 먼저 했지만 듣자마자 입을 벌리며 기쁘다고 활짝 웃다가 이내 바보 같이 엉엉 울음을 터뜨린 훌륭한 리액션도 보여준 주제에 집은 홀랑 먼저 구해버리고. 그것도 지 혼자만 쏙 들어가 살 집을.
“오옷, 세나 외로운 거야?☆”
“그럴 리가? 핸드폰도 맨날 어디다 두고 다니는지 잊어버리는 얼간이가 갑자기 혼자 산다는데 얼씨구나 하고 넘어가겠어? 집에 불이나 내지 않으면 다행이지.”
“에, 너무하네. 나도 이제 성인이니까 자취 정도는 할 수 있어. 다들 하는 거잖아?”
“아아, 잘도 하시겠네. 아무데나 낙서하고 민폐 부리는 우리 임금님이 얼마나 혼자 잘할 수 있는지 정말 기대되는데?”
“왜 그렇게 화내는 거야? 난 오히려 세나를 생각해서 한 건데.”
이즈미의 역정에 레오가 불만스럽다는 듯이 맞받아쳤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지 이즈미 속이 더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무슨 소리? 여기에 나를 생각할 여지가 어디 있어? 무시를 잘못 말한 건 아니고?”
“여, 연인이라고 해도 같이 사는 것보단 조금 떨어져 있는 편이 관계 망치지 않고 좋댔어. 그러니까 그 적당한 거리라는 거 있잖아. 나는 그런 걸 재는 걸 잘 못하니까.”
“어떤 자식이 레오 군에게 그런 말을 했어?”
“유우 군이라는 자식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이즈미는 머리를 한 대라도 맞은 것 같았다. 레오는 우물쭈물 거리며 이즈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하아??? 왜 여기서 유우 군이 나오는데? 그보다 유우 군이랑 그런 이야기도 해?”
“음, 가끔? 뭔가 유우 군, 나랑 세나 사귀게 됐다니까 엄청 안도하는 눈치여서 말이야~ 그리고 세나가 유우 군 엄청 좋아하니까 나도 뭐 닮을 수 있는 점이 있나 싶어서?”
부연하자면 이때 이즈미는 아주 감정적이었다. 스스로도 알고 있지만 이미 속력을 있는 대로 올려버린 차는 뒤늦게 브레이크를 밟아도 끼이익 하며 타이어 자국을 시끄럽게 남길 뿐이었고, 세나 이즈미의 감정적 폭발 역시 불행하게도 제멋대로 떠드는 입을 멈출 수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런 짓 해봤자 레오 군은 평생 가도 유우 군을 따라갈 수 없으니까!”
“어머, 이즈미쨩. 그건 정말 최악이네….”
“…실언이었어.”
테이블에 머리를 박을 기세로 한숨을 쉰 이즈미 건너편에는 입을 가리고 있는 아라시가 있었다. 오늘의 상담역은 이즈미가 모델로 출연한 신상 화장품을 양도하는 조건으로 지금 자리에 나와 주었다. 화장품이 담긴 종이봉투는 이미 예쁘장한 핸드백 속에 들어간 지 오래였다.
“그러니까 그렇게 말 하려는 게 아니었고. 유우 군은 유우 군이고 레오 군은 레오 군이니까,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하고 싶었는데.”
“여기서 말해도…. 그래서 임금님은 뭐라고 했는데?”
“…바로 그 자리에 전화 걸더니 집 계약하더라.”
레오의 그런 무서운 눈빛은 처음이었다. 말없이 이즈미를 노려보다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전화를 걸어서는 가계약 건을 정식 계약 하고 싶다고 또박또박 말했다. 지금 부동산으로 가겠다고 전화를 끊은 레오는 곧장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이즈미쨩이 화를 자초했네.”
“그 녀석 나름 고집이 있어서 한 번 결정한 건 안 굽히니까, 아마 내가 뭐라고 했었어도 집 계약은 했겠지. 나는 그저 왜 나와 상의도 없이 혼자 살기로 결정했는지가….”
“섭섭했구나?”
이즈미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침묵은 긍정이나 다름없었다.
레오는 숨기는 성격은 아니다. 서투른 거짓말을 하는 대신 스트레이트로 대답을 하면 했지 빙빙 돌아가는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다만 의중이 있는 행동을 하는 경우는 있었다. 생각이 없는 척을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이즈미는 알고 있다.
많은 것들을 입 밖으로 꺼내는 대신 속에 품고 혼자 무너져 내리는 걸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본 이즈미의 심정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더 이상 그런 건 싫어서, 이제는 모른척하지 않고 옆에 있고 싶어서, 네가 소중하다는 걸 인정해서 그에게 고백했고 상대도 아마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예전과 그대로인 기분이 들었다. 집이라는 중요한 사안에서 자신이 속해 있지 않은 것, 어쩌면 레오는 이즈미와 그 정도로까지 붙어 있고 싶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울렁이는 불안감도 같이.
“임금님이 말한 대로 의도일 수 있잖아? 너무 붙어 있으면 싸우거나 할 수도 있으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쳐. 하지만 그 전에 나한테 한 마디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그것도 그렇네…. 임금님은 예전부터 알 수가 없었으니까.”
결국은 이즈미와 레오 둘의 사정이었다. 제 3자에게 상담이란 무릇 자신의 마음을 되돌아보고 결국 어떠한 결정에 확신을 가지게 하는 도움이었다. 이즈미는 견딜 수 없는 불안을 느끼고 있었고 그걸 다른 사람과 대화로 호소하려고 했다.
사실 이즈미에게는 그런 행동이 흔한 일이 아니었다. 노력파인 그가 지금의 커리어를 쌓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했던 건 세나 이즈미 본인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었다.
그러한 유일신의 신자가 가진 견고한 믿음이 기울어져, 어느새 다른 사람을 향한 신앙으로 변해버렸다면. 그 신이 자신을 더 이상 보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다면. 판판한 대로가 어느새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로 변해 소름끼치는 바람만이 발 밑에서 웅웅대고 있다면.
“레오 군이 사실은 동거까지는 원하지 않는다거나….”
“아니, 이즈미쨩도 참! 답지 않게 왜 그래! 임금님이 그런 말 한 거 아니잖아? 역시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없겠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
한창 목에 감겨있던 머플러가 얌전히 옷장에 머무르는 날씨가 점점 이어지고 세상의 모든 것이 따뜻하게 녹아갈 때, 다들 너그러워진 기분이 드는 지금에도 이즈미는 섣불리 레오에게 연락하지 못했다.
메신저는 이즈미가 먼저 거는 일이 많았다. 스케줄을 챙기거나 연습 시간을 리마인드 하거나, 집 앞에 있다고 알리거나. 레오는 성실하게 답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먼저 세나 뭐해? 세나 바빠? 세나 지금 보러 가도 돼? 등을 보내기도 했다. 지금은 그 어느 말도 오가지 않는다. 약 일주일간의 정적 속에 이즈미 속만 타들어갔다. 먼저 연락을, 연락을, 연락을….
츠키나가 레오의 번호가 덩그러니 떠 있는 핸드폰을 노려보던 이즈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사실은 지금도 레오네 집 근처 카페였다. 늦은 레오를 기다리곤 할 때는 언제나 여기 있었다. 누구라도 만날 것처럼 옷까지 다 차려입고 정작 연락도 못하고 한참을 핸드폰만 노려본다. 이게 첫 번째가 아니었다. 아라시와 만나고 난 다음날 기세를 몰아 근처까지 갔지만 결국 아무것도 누르지 못하고 돌아갔었다.
확인 받는 게 두려웠다. 너와 내 사이는 그렇게까지 깊지 않고 깊어질 생각도 없다는 것이 엄숙한 판결문처럼 선언될까봐. 상상만으로도 무참한 공포였다. 그 판결이 시간 문제라는 걸 알면서도 이즈미는 그 시간을 당기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있는 것도 싫었다. 어쩌면 오늘도 아무 연락도 하지 못한 채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누군가 앞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즈미는 인상을 쓰며 고개를 들었고 이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레오 군?”
“세나~.”
남색 머플러를 두른 이가 녹색 눈을 깜박이며 이즈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너, 왜 여기 있어?”
“그야 세나가 여기 있으니까?”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는데.”
“카페 안인데 선글라스를 끼고 창가 자리에 앉아있으면 엄-청 눈에 띈다고~!”
레오가 손을 뻗더니 귀에 걸린 선글라스를 조심스레 벗기면서 헤죽 웃는다.
“이 편이 훨씬 예쁘네.”
“사람들한테 들키면 골치 아파지잖아….”
말은 그렇게 해도 이즈미는 굳이 레오에게서 선글라스를 다시 가져가지 않았다.
파란색과 녹색 시선이 뒤엉키는 일련의 시간 후 먼저 입을 연 건 레오였다.
“그런데 정말 세나 여기 무슨 일? 근처에 미팅 있었어?”
“…왜.”
“왜?”
“왜 연락 안했어.
겨우 목구멍을 비집어 나온다는 소리가 고작 이거였다. 레오가 우물쭈물거리며 대답했다.
“-세나 화나 있었잖아.”
“내가 뭘.”
“지금도 엄청 퉁명스러우면서.”
이렇게~ 하며 손가락으로 화난 눈썹을 그린 레오가 이내 멋쩍은 웃음소리를 흘린다. 이즈미는 한 번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솔직하게 말하는 것도 그에게는 일이었다.
“화 안 났어. 그보다 왜 머플러 매고 있어. 감기라도 걸린 거야?”
“응? 날씨 춥지 않아? 엄청 쌩쌩 바람 부는데. 아니면 역시 세나가 화나서 인가! 있지, 세나랑 그 날 헤어지고 나서 계속 귀에서 비발디의 사계 겨울 1악장이 휘몰아치는 거야! 창문 밖에 잔뜩 보이는 건 연두색인데 엄청나게 긴 겨울이 오는 것 같아서 춥고 무서웠어!”
남자는 연극이라도 하는 것처럼 두 손을 펼치고 장황하게 외쳤다.
“지금 보니 세나는 정말 겨울 같은 색이네. 머리는 잿빛이 쌓인 하얀 들판, 그 밑으로 얼어붙은 두 개의 푸른 호수! 그 밑에선 냉기 같은 말들이 북풍처럼 몰아닥치지, 와하핫!”
“…하아.”
이즈미는 한숨을 크게 쉬었다. 이 녀석은 언제나 이렇다. 남의 말을 듣기는커녕 자기 페이스로 끌고 가서 신나게 떠든다. 그렇게 중요한 본심은 숨긴다. 솔직하지 못한 자와 솔직함 대신 익살스러움으로 넘어가는 자의 만남은 매번 먼 길만 돌아왔었다.
“미안해.”
레오의 휘적거리던 움직임이 돌연 멈췄다. 믿을 수 없다는 걸 보는 눈이 이즈미에게 또렷이 박혀 있었다.
“왜, 왜…? 세나야말로 감기 걸렸어? 어디 아파?”
“멀쩡해. -그러니까 저번에는 내가 말이 심했어. 네 말마따나 너는 어린 아이도 아니고, 나랑 같은 나이인데 잔소리를 계속 하고 화만 내니까, 확실히 레오 군에게 나는 겨울 같은 이미지 일지도 모르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이 레오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고 이즈미는 말라가는 입 안을 열심히 굴리며 최후의 변론을 늘어놓으려 했다.
“지난번에 레오 군에게 했던 말들이 지나쳤다는 건 알고 있어. 유우 군 얘기도 그럴 의도로 말한 게 아니었고, 네가 굳이 유우 군을 닮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는데. 이런 오해 살 말과 행동을 앞으로 고치도록 노력하려고 해. 당장은 아닐 수도 있지만 앞으로 점점 더 나아지도록 할 테니까. 잠시만, 그러니까 내 말은….”
자신이 이렇게 말을 못했던가. 어렸을 적부터 어려운 자리에도 셀 수 없이 나갔었고 그 자리에서도 이즈미는 주눅 든 적이 없이, 어른의 입을 빌리지도 않고 자신을 충분히 어필했었는데. 그 어떤 자리보다 지금이 무섭다.
이즈미가 다시 말을 고르고 입을 열려할 때 이즈미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따끈한 체온을 가진 손이 이즈미의 이마를 돌연 덮었기 때문이다. 레오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이즈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음, 열은 없는데…. 하지만 이건 어디가 아파야지만 가능한 현상인걸?!”
“저기, 남이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데….”
“잘 모르겠어, 세나가 그런 말을 하는 이유. 역시 집 때문이야?”
이즈미는 입을 다물었다. 이마에 있던 손은 거두어졌지만 가까이 다가온 얼굴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세나, 세나 말이 맞아. 나는 보통이라는 기준과 좀 다르잖아. 상식과 인스피레이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나는 언제나 망설임 없이 인스피레이션을 골라. 그게 주변 사람들에게 큰 폐를 끼치고 있는 걸 알고 있어. 금전 감각도 엉망이고, 세나가 걱정한 대로 혼자 살면 불을 낼지도 몰라. 하지만 그런 나를 24시간, 365일 내내 지켜보면 세나가 너무 지쳐버릴 거야.”
“바보야, 그런 건 전혀 걱정할 필요가-.”
“걱정해야 해! 그도 그럴 게 나는 세나와 오래 있고 싶으니까!!”
박력 있는 말이 냉수처럼 쏟아졌고 그 냉수를 오롯이 맞은 이즈미는 두 눈만 껌벅였다. 다시 맞은편 의자로 앉은 레오가 말했다.
“세나는 모르겠지만, 나는 세나를 아주아주아주 좋아해. 그래서 세나와 떨어지는 거 싫고 그래. 사실은, 같은 대학에 가게 됐을 때도 너무 신났어. 세나랑 같이 살아야지, 싫다고 해도 찰싹 달라붙어서, 안 되면 벽장에라도 몰래 숨어서 같이 살아야지 했었어. 하지만 알았어. 같이 산다는 건 아주 나를 오롯이 보여줘야 해. 분명 세나한테 못마땅한 일도 많이 저지를 거고 보여 버릴 거야. 루카땅에게도 그런 모습, 많이 보여주고 마는걸. 멋진 오빠가 되고 싶지만 그게 잘 안 됐어. 그건 혼자 살게 돼서도 더 그럴 거야. 같이 있다는 행복보다 같이 있어서 생기는 짜증과 포기가 난 더 무서워. 그런 세나를 보는 것보다 잠깐 떨어져 있는 편이 훨씬 나아. 나는 첫 자취를 하며 겪을 바보 같은 실수들을 세나도 겪게 하고 싶지 않아. 세나는 이미 유메노사키에서 실컷 날 보살폈는걸. 그러니까 이 엉망진창인 생활을 실컷 겪고 혼자서도 멀끔하게 살아갈 수 있을 때에 세나에게 부탁할 거야. 나와 같이 살아달라고.”
이야기를 이어가는 레오의 뺨은 점점 붉어지고 있었다. 추운 곳에 있는 사람처럼 그렇게 볼을 발갛게 물들이고 있지만 목소리는 전혀 떨리지 않았다.
“세나는 확실히 겨울을 닮았어. 겨울은 말이야 귓가를 얼리는 엄청 차가운 바람도 있고, 손이 곱는 추위도 있잖아? 하지만 그 추위 속에서 따끈따끈 김이 나는 호빵의 맛도, 상대와 서로 몸을 꼭 붙이는 온기도 분명 겨울이야. 보석처럼 빛나는 얼음조각도 눈이 뒤엎은 순백의 평원도 모두 겨울의 아름다운인 것처럼. 겨울도 다양한 모습이 있잖아? 난 그런 세나가 좋아. 이 세상 누구보다 사랑하고 있어.”
결국 판사의 판결문이 엄숙하게 내려왔다.
아니, 지금 있는 이곳은 법원 같은 곳이 아니었다. 커다란 홀을 꽉 채우는 웅장한 오케스트라가 울려 퍼졌고, 그 중앙에 선 주황머리의 지휘자가 이즈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귀가 멀 것 같은 모든 음들이 모조리 이즈미에게 향하고 있다. 어이없는 웃음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바보야, 이건… 거의 프로포즈잖아.’
눈앞의 사람은 언제나 사랑을 외쳐대긴 했었다. 어떤 이는 그 가벼움에 혀를 찼고 어떤 이는 가볍게 여기며 사랑의 증거를 요구하며 그의 재능을 강탈했었다.
물론 이즈미는 그렇게 굴지 않을 것이다.
이즈미는 속을 알 수 없는 이에게 받은 고민투성이의 깊은 고백의 대답을 고민한다. 정답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레오 군이 날 싫어하지 않으면 그걸로 충분해.”
“에엑, 그럴 리가. 어떻게 세상에 세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
지휘자는 사라지고 자신이 익히 아는 츠키나가 레오가 소란스럽게 떠들었다.
“역시 세나 외로움 타는 거야? 봄이 그렇게 만든 건가?! 유메노사키의 마지막 저주 같은 건가?!! 혼자 내버려 둘 수 없어! 아, 하지만 그래도 역시 세나가 날 싫어하는 건 더 싫으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응?”
“정신 사나워. 뭐, 기다리는 것쯤이야 익숙하고.”
줄곧 경직되었던 입 꼬리는 어느새 느슨해져서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레오가 고개를 힘주어 끄덕였다.
“응, 대학을 졸업하면 동거인 츠키나가 레오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지금의 혼자를 즐겨둬!”
*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했으면서.
이즈미는 대답 없는 초인종을 몇 번이나 눌렀다. 핸드폰은 이미 열다섯 번째의 통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혼자인 순간을 주지도 않는데 어떻게 즐기라는 거야.
열여섯 번째 통화가 이어지기 직전 기계음 대신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기어코 연결됐다.
“어, 집 앞. 슬슬 나오시지? …뭐? 오늘 뭐 있냐고? 세 시에 미팅 있다고 몇 번을 말했어! 꼭두새벽 같은 소리하네. 지금 오후 두 시거든?? 헛소리 하지 말고 당장 문 열어.”
비척거리는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통화가 끊겼다.
역시 고백의 대답은 반지로 먼저를 선수 치자. 몇 년이 지나도 아마 크게 개선되지 않을 미래의 동거인에게 카운터펀치를 다짐하며 이즈미는 아직은 동거인이 아닌 그가 열어주는 문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
제목은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 2악장에서 따왔습니다. 개살벌한 겨울인데 2악장은 따끈따끈하더라구요 다이스키. 물론 초반의 빡친 이즈미는 1악장이 맞습니다.
아 다시 봐도 부끄럽군요.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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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카레오 - 카미가쿠시(神隠し)
* 츠카레오
* 2017년에 미나비님과 함께한 인외 츠카사x레오 소설 트윈지 [츠카사일지도 모르는 이야기]의 제 파트만 공개합니다.
* 약간의 에이레오 요소도 있으니 주의해 주세요.
* 표지는 혜리(@cremmme)님이 작업해 주셨습니다!
츠카사
일지도 모르는
이야기
Suou Tsukasa x Tsukinaga Leo
카미가쿠시(神隠し) │ 루우
전화와 편지는 동시에 왔다. 아마 편지가 먼저 왔을 것이다. 레오는 이 학교와 멀리 떨어진 집과 건조한 대화를 나누고 온 참이었다. 방학은 학교에서 보낼게. 그런 용건을 나누는 것뿐인 통화는 아주 짧았지만 불필요한 감정적인 소모를 하기엔 충분했다. 작별 인사는 서로의 안부도 아니었다. 루카는 잘 지내? 그 아이는 아주 잘하고 있어. 레오는 보이지도 않을 상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행이고.
전화는 끊겼고 같은 곳에서 온 편지는 아까 안부를 물은 아이에게서 왔다. ‘from 츠키나가 루카’가 써진 편지를 손에 쥔 레오는 아까의 늘어지는 걸음과 달리 아주 가벼웠고 훨씬 재빨랐다. 루카땅 사랑해! 편지를 뜯기도 전에 그렇게 외친 레오는 편지를 품에 안고 좁은 기숙사 침대에서 한 바퀴 데구루루 굴렀다가 벌떡 일어나 아까와는 다른 제법 정중하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편지를 뜯었다.
친애하는 오빠에게.
작은 구슬 같은 앙증맞은 글씨. 익숙한 글씨체를 쓸어보다가 레오는 다시 자세를 바로 하고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잠시 후 레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 길지 않은 편지를 다시 찬찬히 훑는다. 제대로 읽으면 무언가 단서가 나타날 것처럼. 하지만 몇 번을 들여다봐도 종이에 숨겨진 글자가 떠오르는 일은 없었다. 조금 후에 레오는 다시 옆방의 문을 두들겼다. 핸드폰, 다시 빌려줘.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고, 그냥 방학 때 집 내려가려고.
츠키나가 레오의 여름방학 일정은 그렇게 갑자기 변경되었다.
*
굽이치는 기찻길을 따라 좁은 선로가 달린다. 점점 지도의 안쪽으로 파고드는 선로는 어두운 동굴을 몇 번이나 통과했고 점점 짙어지는 녹음 속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덜커덩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귀에서 연신 울린다. 기차 안은 한가했다. 적어도 이 칸엔 레오 밖에 없었다. 귀가 찢어져라 우는 아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철로를 달리는 기차소리만 고요하게 울리고 있었다. 돌고래 같은 높은 울음소리와 아이를 달래는 어머니의 목소리의 조화는 독특한 리듬이 있어서 한 곡의 곡이 나올 것 같았는데. 여로의 끝이 다가올수록 침묵이 가득해지는 느낌이다.
주변이 고요하자 음악 대신 다른 잡상이 레오의 머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언제나 세상을 가득 메우던 음 같은 것들 대신, 시시하고 재미없는 생각들이다. 이를테면, 가족들과 언제 만났는지. 저번 겨울 방학에 이 기차를 끝까지 못 탄 것 같다. 걸핏하면 눈이 쌓이는 곳이라 운행 중지가 되어 기차역에서 노숙을 했던가? 쏟아지는 영감, 밀어닥치는 추위 둘 중 어떤 걸 우선해야 할지 몰랐던 기억이 얼핏 난다. 그 때는 사고로 못 간 거니까. 지난 여름방학은 어땠더라. 너무 더운데, 집에 에어컨이 고장 났다는 소식을 듣고 안 가기로 결정했다. 딱딱한 이야기만 종일 늘어놓는 주제에 학비는 무시무시하다던 학교의 좋은 점은 사시사철 냉난방 완비라는 점이었다. 그 여름방학을 뒤로 하면 입학식이다. 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집에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어쩐지 루카땅이 많이 그립다 했더니 오래되긴 했다.
가족 간의 불화 같은 건 거창한 이야깃거리도 아니다. 고등학교 2학년인 레오에게 그런 관계는 사춘기의 불명예스러운 타이틀 밖에 되지 못한다. 대신 자신에게는 아주 특별한, 사랑스럽고 귀여운 여동생이 있으니까. 부모는 레오의 질 나쁜 병이 루카에게 전염되지 않게 하기 위한 것 같지만.
기차 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아니 잠이 들고 있다. 자는 건 좋아하지 않지만 도리가 없었다. 이제 곧 도착할 곳은 지금의 기차와 비교도 안 되게 더 조용한 마을이다.
레오가 기차에서 내렸을 때는 눈부시던 태양의 자취는 온데간데없이 어둠이 세상을 시커멓게 잡아먹고 있는 시간이었다. 줄곧 혼자였던 기차에서 레오는 홀로 내렸고, 기차는 어딘지 모를 곳을 향해 바퀴를 움직여 떠났다.
갈 길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레오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유난히 반짝이는 별의 바다가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아서 현기증이 났다.
“오빠―!”
수명이 다하기 직전의 가로등 불빛 밑에서 작은 인영이 반갑게 뛰어온다.
“루카.”
사랑스러운 여동생에게 마음껏 달려드는 대신 레오는 의젓하게 손을 흔들었다. 이제 고등학교 2학년이니까. 평소에는 생각지도 않던 나이를 되새기며 레오는 달려오는 루카를 토닥였다. 저번보다 더 길어진 풍성한 갈색머리 뒤로 역시 전봇대 아래에 누군가 서 있는 게 보인다. 성인 남성, 그것도 두 명.
“누구야?”
루카도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같은 마을에 계신 아저씨들인데, 밤에는 위험하다고 같이 와주셨어. 차도 태워주신대”
사람이 적은 동네지만 아이가 일일이 어른의 얼굴을 기억하지 않는다. 가로등 아래에서 가득 음영 진 얼굴은 그들이 기괴한 가면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레오는 그들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상대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걸로 끝이었다. 남자 둘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루카를 쳐다본다. 무언가의 독촉처럼도 보이는 그것에 루카가 퍼뜩 놀라 레오의 소매를 잡았다.
“오빠, 어서 집에 가자. 밤이 늦었어.”
작은 손이 끌어당긴다.
루카와 나란히 앞장서서 걷고, 그 뒤로 남자들이 따라온다. 마치 영주의 뒤를 따르는 병사들처럼. 레오는 슬쩍 남자를 보았고 루카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진짜 마을 어른이지?”
레오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고 루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치곤 불안해 보이는 기색으로 그녀는 세워둔 차를 향해 조금 걸음을 빨리 옮겼다.
츠키나가 가의…, 거기 장남이라고. 남자들이 짧게 나누는 대화도 얼핏 들린다. 위해를 가하려고 하는 것 같진 않지만 경계가 수그러들지 않는다. 여자 아이 혼자 밤길은 위험하지만 별로 살갑지도 않은 어른 둘이 따라올 일인가? 레오는 루카의 편지를 기억했다. 그녀는 거창한 말을 쓰지 않았다. 자신의 학교도 여름 방학을 맞았고, 방학 숙제도 산더미처럼 받았다고. 기쁜 소식과 슬픈 소식 두 가지가 있는데, 기쁜 소식은 그 많은 방학 숙제를 안 해도 된다는 것, 슬픈 소식은 오빠가 여기에 와도 당분간 볼 수 없다는 것 정도였다. 왜 볼 수 없다는 건지는 전혀 적혀있지 않았다. 친구와 이런 일이 있었다느니, 학교에 있는 고양이가 자기를 알아봤다느니 같은 일들 하나하나 다 적던 그녀의 편지는 단출한 내용을 담고 부연 설명도 없이 바로 끊겼다.
레오의 걱정과 달리 전화상에서 루카는 마중을 나가겠다고 기쁜 목소리로 답했고 그녀는 레오의 기억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옆에 있다.
역에서 마을까지는 꽤 거리가 있다. 자전거가 있어도 한참 밟아야 했고, 없다면 꽤나 긴 거리를 걸어야 했다. 곧 있으면 날이 바뀔 시간에 차가 있다는 건 굉장히 다행스런 이야기긴 했다. 차 안의 공기는 아주 어색했다. 한 남자가 운전대를 잡았고 다른 남자는 조수석에 앉아서 레오와 루카는 자연스럽게 뒷좌석에 앉았다.
듬성듬성한 가로등이 비추는 흙길을 덜컹이며 차가 지나갔다. 루카의 작은 손은 여전히 레오에게 잡혀 있었다. 이제는 루카 쪽이 더 꽉 쥐고 있는 것 같다. 백미러 너머로 남자와 가끔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면 남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좁은 차 안은 밤이어도 금방 후덥지근해져서 더욱 갑갑해졌다. 남자도 그걸 느꼈는지 창문을 열었다. 곧이어 서늘한 공기와 흙냄새가 가득 들어찼다. 도시에선 맡을 수 없는 냄새. 나무가 땅에 단단히 뿌리를 내려 깊숙한 원천을 빨아들이고 잎사귀로 뿜어내고, 그 숲 사이를 바쁘게 오가는 작은 벌레들, 좀 더 큼직한 발걸음으로 자신의 영토를 누비는 들짐승들. 그런 순환의 정중앙에 터를 잡은 인간만을 위한 그들의 마을. 그 가득한 자연의 덩어리를 레오는 지금도 선명히 기억한다. 자신이 태어난 곳을 사랑했었고, 지금도 사랑한다. 떠나야 했던 곳이지만.
차가 천천히 멈춰 섰다. 도로 포장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마을의 유일한 입구에는 이질적인 차단기가 가로막고 있었다. 차단기를 사이에 둔 나무에는 긴 붉은 천이 걸려 있다. 운전석에 있는 남자가 창문을 열어서 차단기 옆 부스에 있는 어느 남자에게 말을 건다.
“여, 수고.”
“금방 오셨네요. 별다른 문제는 없죠?”
순경 복장을 한 젊은 남자가 뒷좌석을 힐끔였다.
“응. 내린 사람도 츠키나가 장남 혼자였어.”
“그렇죠, 이런 벽촌에 외지인이 올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순경은 그렇게 대답하며 부스로 들어가 버튼을 눌렀다. 차단기가 올라가자 운전석에 있던 남자가 수고해, 라고 말하고 다시 차를 움직였다. 길은 여전히 포장되어 있지 않다. 양 옆에 숲으로 가득 찼던 것이 점점 줄어든다.
듬성듬성한 나무가 끊어질 듯 말 듯 이어지다가 어느새 확 트인 정경이 펼쳐졌다. 달빛을 받아 빼곡히 심어진 벼가 푸릇푸릇한 잎을 한층 뻗고, 그 사이를 차가 빠르지 않은 속도로 달린다. 머지않아 점점이 인공적인 불을 밝히고 있는 마을이 다가온다.
돌아왔다. 이곳을 나갈 때만 해도 집을 잊기로 한 레오지만 저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차는 정확히 츠키나가 집 앞에서 멈췄다.
“감사합니다.”
차에서 내리고 레오는 운전석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만날 때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인 그들은 차를 움직였다. 레오는 저도 모르게 차가 간 방향을 보고 있었다. 차를 돌리지 않고 그대로 오르막길로 가고 있다. 저쪽으로 쭉 간다면 아마 신사에 도착할 것이다.
“어서와, 오빠.”
문득 들리는 목소리에 다시 앞을 보면 루카가 아까보다 풀어진 웃음을 짓고 있었다. 어쩐지 잔뜩 날 서 있던 마음이 가라앉아 레오는 비슷한 웃음을 마주 지었다.
“응.”
손을 내밀어 여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면 변하지 않는 수줍은 웃음소리를 들려주었다.
아버지는 이미 잠자리에 드셨고, 어머니만이 레오를 맞았다. 오느라 고생했어, 밥은 먹었니? 기차에서 도시락 먹었어. 목욕물 준비해 뒀으니 씻으렴. 일 년 넘게 보지 못한 모친과 나누기엔 조금 어색한 대화와 함께 레오는 자신의 방에 들어갔다. 어스름한 전깃불 아래 드러나는 방안은 나갈 때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긴 부재에도 먼지 한 톨 쌓이지 않은 바닥을 확인한 레오는 이불에 망설임 없이 드러누웠다. 조용해진 방 안에 풀벌레 소리가 조금씩 들어온다. 고요하고 숨 막히는 공간. 태어날 때부터 레오와 함께 했던 모든 것들이 숨을 죄고 있다.
“오빠, 자?”
문 너머로 들리는 조그만 목소리. 레오의 숨통을 트여줬던 건 언제나 사랑스러운 여동생뿐이었다. 레오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와.”
문이 열리더니 빼꼼 얼굴을 내민 루카가 살짝 방안을 둘러보았다.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선다.
“오빠랑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고.”
파자마를 입은 어깨에 평소처럼 양 갈래로 묶은 머리가 풀어져서 사자 갈기 같은 풍성한 머리를 한 루카가 수줍게 웃었다.
“거기 가서 노래도 만들었다고 했잖아? 그것도 듣고 싶어.”
“좋아! 그래 어디부터 이야기할까. 아무래도 기독교 학교 하면 뭔가 상상하는 이미지가 있잖아? 되게 정숙하고 그런 느낌이 있지. 근데 우리 마을이 더 조용한 것 같아. 다른 사람들은 여기가 아주 조용한 편이라고 했지만, 시끄러웠는걸! 그러니까 이렇게 사람들 마음이 말이야. 막 잡힐 듯이 웅성거렸어.”
루카가 눈을 반짝이며 듣고 있다. 밖으로 나갈 기회가 별로 없는 마을의 아이는 바깥 이야기가 언제나 궁금해 한다. 텔레비전도 마을 회관에 한 대, 라디오 역시 마찬가지. 신문은 자유롭게 가져갈 수 있지만 어린 아이들이 읽기엔 많은 한자와 겨우 읽어도 재미없는 이야기가 가득했다. 마을의 아이들에게, 루카에게 아주 귀중할 이야기를 레오는 계속 입에 담는다.
“루카, 예수라고 알아? 우리 마을의 신님과는 다른 거야. 다른 나라의, 다른 신이지. 내가 다닌 학교는 그 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지은 학교야. 그래서 매번 정해진 시간에 신의 말씀을 전하지. 이런 것도 있어. 성서라고, 그들의 신이 한 말들을 적어 놓은 무겁고 아리송한 책이야….”
레오의 이야기를 들으면 루카도 편지에 적지 못한 이야기를 해줄 것이다.
*
“오늘 루카와 신사에 다녀올 거다.”
한동안 젓가락 소리만 이어지던 아침밥상 앞에서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다.
레오가 돌아오고 난 매일은 극히 일상적이었다. 아버지는 원래부터 이 집에 레오가 있다는 듯이 대했다. 그간 어떻게 지냈냐느니 같은 말은 전혀 없었다. 레오는 루카와 함께 마을이 달라진 곳이 없는지 돌아다녔고 가끔 마주치는 동네 어르신들에게 인사를 할 뿐. 마을은 뭐하나 쉽게 변하지 않았다. 마을의 거목이 조금 더 두꺼워졌을까? 가지에 잔뜩 걸린 붉은 천 때문에 나무는 더 부풀어 보였다. 레오가 자라면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치장이다. 축제야? 라고 레오는 물었고 루카는 비슷한 거라고 들었어, 라고 답했다. 그 붉은 천은 각 집마다 걸려있었는데 레오네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너도 같이 갈 거냐?”
아버지는 그렇게 물었고 그 시선에 끝에 있는 레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랜만이기도 하고.”
루카는 자신의 상황을 정확하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못했다는 편이 맞을까.
‘그건… 내가 정한 게 아니고. 엄마랑 아빠도 잠시 여행을 가는 거라고 생각하랬어. 그러기 전에 오빠를 볼 수 있어서 기뻐.’
중학생이 긴 여행을 갈 일이 수학여행 말고 뭐가 있단 말인가. 레오가 본 바로는 아버지는 평소와 같지만 어머니는 루카를 왠지 더 챙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여행’에 대해 꺼내지 않는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츠키나가 일가의 생활은 평탄하게 이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밖에 나오니 매미 소리가 한층 더 강렬하게 들렸다. 뙤약볕이 떨어지는 한낮에 돌아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레오는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어머니에게 받아 그걸 썼고, 같은 모자를 쓴 루카와 나란히 걸었다. 앞서 가는 아버지를 포함해 오가는 말은 무엇 하나 없다. 이글거리는 바닥에 돌이 달궈지고, 태양에 지지 않을 것처럼 매미가 울어 녹색이 더 깊어져간다.
야트막하게 쭉 이어지던 오르막길은 곧 좁은 산길까지 이어진다. 산길은 돌계단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 길을 감싸듯이 위는 붉고 아래는 검은 도리이가 층층이 계단마다 관문처럼 겹쳐있다. 삐죽한 고딕 양식의 건물들이 어느새 익숙해진 건지 그 모습이 어쩐지 이질적이다. 도리이는 일반 세계와 신사를 구분하는 경계라고 했다. 도리이가 이어진 너머에서 서늘한 공기가 불어오는 것도 같다. 어렸을 때는 루카와 이곳을 달음박치며 올라간 적이 많다. 끝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돌계단 위로 붉은 통로를 오르며 루카 힘내, 다 왔어 라고 작은 아이의 손을 잡아주기도 했었다. 그 때보다 커진 레오의 동생은, 밀짚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어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길게 이어진 계단을 벗어나자 푸른 하늘을 등 진 신사가 드러났다. 그 앞마당에도 붉은 깃발이 그 천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들 앞으로 기다리고 있다는 듯이 무녀가 서 있었다.
“주지스님이 기다리셔요.”
검은 눈동자가 루카를, 그리고 레오를 한 번 본다. 그녀는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이 분은….”
“우리 집 장남입니다.”
“아―, 실례를. 그러면 같이 오시겠어요?”
종종 걸음으로 무녀가 앞장선다. 반질반질한 돌길을 밟으며 레오는 뒤를 따랐다. 모든 음이 가라앉는 세계. 이 신사는 마을에서도 무척이도 조용했다.
안내 받은 본전에는 검은 가사를 입고 커다란 안경을 쓴 승려가 기다리고 있었다. 승려 역시 레오를 보고는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눈을 둥글게 떴다.
“장남입니다. 외지에 나가 있다가 이번에 돌아오게 됐습니다.”
“그렇다면….”
깊게 패인 눈주름이 좁혀지면서 레오와 루카를 번갈아 바라본다. 레오는 어리둥절하게 그 시선을 받고 루카는 고개를 숙였다.
“다름이 아니고 이제 멀지 않았습니다. 이번 주 중으로, 빠르면 당장 내일이라도. 그러니 오늘밤부터 와주셔야겠습니다. 예정대로라면 따님께서….”
열기로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던 루카의 뺨이 어느새 하얗게 질려있었다. 그녀는 얼어붙은 표정으로 경내의 매끈한 바닥에만 시선을 던지고만 있다. 레오는 루카를, 그리고 승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짧게 알았다는 대답을 했다. 나머지는 일정대로, 그 외에 자세한 건 여기로 다시 오고 나서. 아버지는 승려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며 아이들을 내보내 더 이상 레오가 들을 수 있는 이야기는 없었다.
아까의 무녀는 어딘가로 갔는지 경내에는 아무도 없었다. 바람도 불지 않아 붉은 깃발은 일말의 펄럭임도 없이 추욱 늘어져 있을 뿐이다.
“루카, 이제 무슨 일인지 말해줘도 되지 않아?”
아이는 아까 이야기를 한 이후로 잔뜩 긴장해 있는 것 같았다. 레오의 말에 깜짝 놀랐다가도 주춤주춤 시선을 아래로 깐다.
“마, 말해도 될까…?”
“아버지도 내가 신사에 오는 거 찬성했잖아? 괜찮아. 먼 여행을 가는 거라고 했으니까, 어딜 가는 것 정도는 알려줘.”
연한 녹색 눈이 갈팡질팡한다. 레오는 가만히 루카의 대답을 기다렸다. 곧이어 그녀의 입이 열렸다.
“오빠는 이 신사가 누굴 모시는지 알아…?”
“…그냥 신이라고만 알고 있는데.”
“나도 그랬어. 마을에 있는 신사잖아? 어렸을 땐 오빠랑 같이 놀러다녔고, 지금은 시험 보기 전이나 새해 때 참배하고. 그런 곳일 뿐이었는데, 여기엔 정말로 신이 오기도 한대. 그리고 곧 신이 내려올 거래. 아니, 태어날 거래. 스님도 정확히 알려주지 않았어. 나는, 그저 신이 태어나면 옆에서 도와주기만 하면 된다고. 신은 아기의 형태로 이 땅에 나타나기 때문에 누가 도와줘야 하는데 그게 내 일이라는 거야. 그리고 그건 아주 쉽다고, 유치원생도 할 수 있을 정도의 일이라고 했어. 그걸 아무도 만나지 않고 계속 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운 거라고 했어…. 하지만 나라면 할 수 있다고….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 오빠. 갑자기 들었을 뿐이야. 때가 되면 나는 혼자 거기에 가서 신과 함께 살아야 한대.”
그건 아주 신기한 이야기였다. 자신을 아주 잘 따르는 귀여운 여동생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어서 더욱. 외계인이 루카의 거죽을 쓰고 이야기를 했다는 게 더 신빙성이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외계인도 루카와 같이 살아야 하는 신이라는 것과 같은 맥락의 이야기다. 레오의 머릿속에는 살고 있지만, 누군가는 있다고 떠들어대지만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은 그런 것들.
한 곡 쓸 수 있을 것 같아. 지금 당장 손에 펜을 쥐고 머리에서 폭발할 것 같은 음들을 마구 써내려가고 싶었다. 그 이야기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 루카만 아니었다면 레오는 당장이라도 자신의 욕망을 충실하게 표현했을 것이다. 하지만 레오는 그녀의 좋은 오빠이길 원했고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왔다. 루카는 레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녀의 말을 믿는지, 그렇지 않은지.
“그 역할이 왜 루카야? 무슨 이유라도 있는 거야?”
“우리 집이 할 차례라고 하셨어. 마을의 임원 가문들이 돌아가면서 해야 한다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 것 같지만 정말이래. 나는 그냥 옛날이야기 해주시는 줄 알았어. 그냥 이런 일들이 있다고. 그런데 마을이 대대적으로 준비하고, 아무래도 진짜인가 봐. 오빠, 내가 하는 말이 거짓말 같지만 그렇지 않아….”
“나는 당연히 루카의 말을 믿어.”
불안해하는 여동생의 어깨를 꼭 잡으며 레오는 말했다. 더 이상 정확한 사정을 모르는 걸 보면 루카에게 일부러 정보를 제한할 수도 있었다. 기차에서 잠든 이후부터 계속 현실이 아닌 꿈길을 걷는 것 같았다. 사랑스러운 여동생이 있고 묘한 공기가 감도는 고향. 레오가 다니던 고등학교도 생생한 현실은 아니었다. 찬송가가 들리고, 검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거대한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모아 신이 알려준 음악이라는 찬송가를 소리 높여 부르는 곳. 어느 쪽도 현실이 아니어도 좋았다. 레오는 그저 꿈같은 세상을 부유하며 오르간을 연주하고, 사랑스러운 여동생과 높은 돌계단을 오르고, 붉은 천으로 장식된 마을을 걷는다. 언제부터였을까, 이런 땅과 멀어진 기분은. 생생했던 건 아마 입술에 닿았던 감각, 그 이후의 뜨거운 숨. 주먹이 얼굴을 강타하는 폭력, 순식간에 가득 차는 피 냄새, 성난 목소리. 그것들도 지금은 꿈같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 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걸 위해 자신은 이곳에 왔다.
*
둥둥둥.
어디선가 북소리가 들린다. 아마 너른 마당에서 붉은 옷을 입은 무녀들이 두드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주변은 어수선했다. 북소리 때문이 아니었다. 사람이,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이 술렁거리고 있었다. 불안, 초조, 긴장, 흥분. 모든 것들이 회오리치고 있다.
레오는 납죽 엎드려 있었다. 손을 모으고 그 아래에 머리를 박고 있는 이 자세를 이거 말고는 뭐라고 설명할 수 없었다. 신을 기다리는 신실한 모습이라기엔 바닥에 배붙인 개구리 같고. 길고 펄럭이는, 헤이안 시대의 음양사 같은 옷을 입은 채 그러고 있는 모습이 위에서 보면 어떻게 보일 지를 고민하며 저릿하다 못해 감각이 없어지는 허리를 움찔거려 본다. 폭이 넓은 흰 천은 그런 사소한 움직임 정도는 가려주고 있었다.
북소리와 사람 소리.
루카는 근처에 있을까. ‘여행’을 떠나기 전에 제대로 된 인사를 못했다. 그것만이 마음에 걸렸다.
임원 가문들이 돌아가면서 해야 한다면 그게 꼭 루카일 필요는 없다.
루카를 먼저 집으로 돌려보내고 레오는 아직 신사에 남아있는 그의 아버지에게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물어보았고 그것이 맞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이해가 됐다. 거의 절연 당하다시피 기숙사 학교로 쫓겨난 자신이 집에 온다고 할 때 순순히 허락했는지, 신사에 갈 때도 구태여 언급을 했는지도. 부모의 입장에서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러운 딸보다 내놓은 아들 쪽이 하는 게 마음이 편할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자신이 루카를 대신할 수 있다면 그거야 말로 원하는 바였다.
레오가 신을 모시는 기간은 9개월. 이 땅에 강림한 신은 갓 태어난 아기처럼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그가 성장할 때까지 시중을 들 사람이 필요하다고 한다. 신을 부르는 명칭도 아기님이다. 아기님에게 접촉이 허락된 건 단 한 사람이어야만 하고 매일매일 해야 할 것들이 있다고 한다. 그건 루카가 말했던 것과 비슷하게 아주 쉬운 것들이며, 정확히 무엇인지는 그날이 되면 알려준다고 했다.
그리고 그 날은 아주 빠르게 찾아왔다. 레오가 루카 대신 하겠다고 말한 날, 저녁부터 신사는 아주 분주해졌다. 신이 오늘 새벽 자락을 적시며 내려온다고. 레오는 영문도 모른 채 신성한 물이라는 아주 차가운 물로 냉수마찰을 해야 했으며 가져온 소지품은 소금 세례를 받는 등 이승의 더러움을 정화하기 위함이라는 이유로 온갖 것을 당했다. 그리고 신사 뒷길로 이어진, 어렸을 적 신사를 제집처럼 들락날락한 레오도 처음 보는 곳으로 안내했다. 본당의 뒷문을 통해야만 갈 수 있는 길. 신사를 감싸는 산의 좀 더 높고 깊숙한 언저리로 그 길은 이어졌다.
숲의 향이 더 짙어진다. 사람들이 지나는 길보다 산짐승들이 지나는 길에 좀 더 가까운 땅을 밟으며 도착한 곳엔 붉은 도리이와 역시 붉게 칠해진 담, 그리고 잿빛 기와가 소복히 쌓인 작은 건물이었다. 밑에 있는 신사의 축소판 같은 곳에 들어가 레오는 지금의 개구리 자세로 줄곧 기다려야 했다.
신은 어떻게 나타날까. 하늘에서 이어진 은빛 계단을 밟고 내려온 천사 품에 안긴다던가? 앗 이건 너무 서양스럽나. 구름을 탄 흰 수염의 선인이 안고 내려온다던가. 번개가 떨어져서 그 자리에 짜잔 신이 나타났습니다 라던가. 어떤 방식이 됐든 레오는 그 광경을 직접 보지 못한다. 레오는 아기님이 말을 걸기 전까지 절대로 고개를 들어서는 안 된다는 엄명을 들었다. 지금 이곳에 자기 밖에 없는 것 같고 살짝 얼굴을 들어서 보는 것 정도는 되지 않을까. 엄청난 인스피레이션이 쏟아질 것 같은데.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일 것처럼 슬금슬금 나왔지만 결국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기님을 돌보는 임무를 제대로 완수하지 못 할 경우 화는 그의 가족들에게 미칠 것이라고 주지승은 엄중히 말했다. 레오에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협박이었다. 이 시대에 이런 의식을 진지하게 치르는 무리들이기에 말로만 하는 말은 아닐 것 같고. 레오는 얌전히 고개를 드는 걸 포기한다.
피워둔 향이 방을 감돌며 코를 알싸하게 찌른다. 저 밑에서 들려오는 듯한 북소리도 끊이지 않는다. 루카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상냥한 아이는 오빠가 자기 대신 갔다는 소식에 슬퍼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잖아? 신을 영접하는 위대한 일이라고 무녀들은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런 좋은 일을 뺏어서 미안. 하지만 루카가 이런 곳에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틀어박히는 것보단 나으니까. 방에 처박히는 능력은 내 쪽이 더 재능이 있었고. 생각이 똑바로 진전되다가 가닥처럼 갈라지고 뭉쳐지고. 머리가 잠잠해진다고 느낄 때 레오는 자기가 졸고 있다는 걸 눈치 챘다. 언제 와서 말을 걸지 모르니까 자면 안 될 것 같은데. 하지만 자지 말라는 말도 없었고. 그건 너무 당연한 소리니까 안 한 거 아닐까. 누가 신이 올 때 잠을 자고 있어. 고민 속에서도 레오는 이미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문득 들린 소리에 눈꺼풀이 움직인다. 방금 무슨 소리가 들렸을까. 그걸 무감각하게 인식한 뇌가 뒤이어 굉장한 소란을 일으킨다. 허겁지겁 일어나면 뻐근한 허리와 다리 통증이 느껴진다. 엎드려 있던 자세도 어느새 풀어져 바닥에 손과 발을 추욱 늘어뜨리고 아주 그냥 뻗어 잔 것 같았다. 열린 창문으로 보이는 검푸른 하늘엔 새벽이 가득했다. 흰 달빛이 내려오는 가운데 비어있던 요람이, 그 안에 흰 무언가가 있었다. 홀린 듯이 보던 레오는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발을 옮긴다. 발걸음 한 걸음, 한 걸음이 기묘한 진동을 내고 있다. 소리를 낸 건 저기 있을 아기님이?
“케헥.”
요람이 꿈틀거리며 이번엔 명백하게 소리를 냈다. 판도라의 상자에 다가가는 것처럼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다. 천천히 레오의 그림자가 요람 끄트머리에 닿는다. 요람 안에 담긴 무언가가 간헐적인 소리를 낸다. 홍채에 그것이 잡히자 레오의 발걸음이 우뚝 멎었다.
그건 기괴하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흰 천으로 감싸인 그것이 어떤 생물임은 분명했지만 흔히 말하는 ‘아기’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었다. 갓 태어난 동물들이 그러하듯이 그건 쭈글거렸으며, 이목구비는 온데간데없고 아기의 붉은 피부 대신 주름진 흰 색이 몸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굳이 비슷한 것을 찾자면 아주 거대한 누에 벌레였다. 강보에 감춰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머리는 몸만큼 비대했으며 목은 자취가 없었다. 얼굴이라 추정되는 쪽에 깊은 주름이 나란히 패어 있는 것이 감긴 두 눈 정도로 보였다. 아기님인지 거대 유충인지 모를 것이 왜 그런 소리를 냈는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눈주름의 아래에 자리 잡은 구멍―아마도 입―에서 보글거리는 거품이 올라오고 있었다. 코도 없는 것으로 보아 아기님은 저 유일한 구멍으로 숨을 쉬고 있을 것이다. 레오는 손을 뻗다가 잠시 망설였다. 함부로 손대도 되는 걸까. 거대 유충으로 보이지만 어쨌든 신인 거고, 인간이 범접해도 될까? 그 고민은 잠시 뿐이었다. 신이라는 특수한 상대긴 하지만 레오의 역할은 보모다. 불경하건 뭐건 보모가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 레오는 치렁치렁 따라오는 커다란 소매로 아기님의 입가에 묻은 거품을 조심히 닦아내었다. 거창한 옷이니 아마 속세의 뭔가가 묻지 않았겠지. 거품이 가라앉자 아기님은 더 이상 이상한 소리를 내는 대신 쌕쌕하며 풍선의 바람 빠지는 소리를 들려줬다. 검은 하늘에 걸린 달은 유달리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레오가 해야 할 일, 그들의 말대로 그건 유치원생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 아기님."
그렇게 말하며 요람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무언가를 씹고 있는 것처럼 오므려지고 다시 벌어지는 입에 닿는다. 기묘한 감각. 키스와는 전혀 다른 감각이 입술에 눌린다. 입을 벌리자 가르릉거리는 숨소리가 레오의 입 안에 가득 찬다. 그걸 삼키고 숨을 불어넣는다. 차가워진 손을 녹이는 것처럼 불어낸 숨은 깊은 구멍 속으로 꺼지듯이 사라졌다.
*
신의 보모가 된 지 일주일 째, 이곳은 레오가 있던 그 어느 곳보다 고요했다.
기상시간은 딱히 정해지지 않는다. 레오가 편할 때 일어나고 잠도 마찬가지다. 아기님은 갓난아기처럼 젖을 물릴 필요도 없었고, 밤잠을 설치는 울음을 내며 부모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도 않았다. 아기님의 두 눈으로 추정되는 깊은 주름은 떠지는 일이 없었고 제일 활발히 움직이는 건 입 정도였다. 그건 항상 오물거렸으며 근원을 알 수 없는 소리를 옹알이처럼 뱉었다. 거품을 뱉어낼 때도 있어 그럴 땐 닦아줘야 했지만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레오에게 내려진 가장 막중한 임무는 아기님에게 자신의 숨을 불어넣는 일이었다.
이승에 내려선 아기님은 아주 불안정한 존재여서 사람이 이 땅에 묶여있는 것과는 달리 아주 쉽게 사라질 수 있다고 한다. 그런 아기님을 여기에 붙들기 위해서는 산 사람의 숨이 필요하다고 주지승은 말했다. 해가 지고 세상에 양기 대신 음의 기운이 가득해 지는 새벽에 아기님의 입에 직접 숨을 불어넣는다. 그렇게 매일매일 그 의식을 빠짐없이 이어해 9개월이 지나면 아기님은 스스로의 힘으로 이 땅에 존재할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이 여기에 있는 레오의 중요한 역할.
승려는 축시라는 레오에게 아주 어색한 시간 개념으로 시간을 정했다. 레오는 매일 새벽 1시 반에서 두 시 반 사이에 아기님에게 숨을 불어넣고 마당에 있는 종을 울린다. 의식을 했다는 신호다. 축시가 지나서도 종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즉시 사람이 올라온다고 한다. 잠이 별로 없는 편인 레오에게 그렇게 힘든 시간도 아니었지만 사람에 따라 고역이었을 지도 모른다.
눈앞에 있는 것은 어떠한 신앙심도 가지기 힘든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갓 태어난 아기는 모유를 빨아 젖 냄새가 나지만 아기님에게 나는 냄새는 그것과 거리가 멀었다. 오물 속에 묻혀 있다가 꺼낸 냄새라고 해야 할까. 그 악취는 유일한 구멍인 입에서 올라온다. 그와 입을 닿고 있으면 그 냄새는 레오를 침범하려는 것처럼 한껏 올라온다. 그 숨을 들이마시고 자신의 숨을 돌려준다. 언제까지가 적절한지 몰라 길게 숨을 넣는다. 아기님의 입은 분명 작을 텐데 마주한 그곳에 끝없는 구멍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무언가 새어나오려는 것을 자신의 숨으로 틀어막는 기분도 든다.
역시 씻겨야 하지 않을까. 요즘 레오는 그런 생각을 한다. 아기님을 덮고 있는 흰 강보는 무엇에도 닿지 않았는데도 점점 누렇게 변색되어 간다. 아마 저 강보를 영원히 입힐 순 없을 테니 교체해야 할 거고, 그렇다면 아기님은? 어린 아기는 물에 씻어야 하지만 인간도 동물도 무엇도 아닌 신을 씻겨도 괜찮은가. 레오는 머리를 긁적이며 책을 뒤적인다. 그가 유일하게 읽을 수 있는 책, 역대 아기님의 보모들이 남긴 기록들이다. 서적은 오래되어서 조금만 난폭하게 다루면 금세 낱장이 흩뿌려질 정도였다. 귀중한 자료이니 소중하게 다루라고 엄명을 했기에 레오는 조심조심 손끝으로 한 장 한 장을 넘긴다. 정갈하던 글씨가 처음엔 아기님과의 나날들을 정성스럽게 기록한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글씨는 점점 무너지고 기록 대신 일기장으로 변모해 하루의 시름을 털어놓는다.
‘아무도 이곳을 찾아오지 않는다. 산에 사는 많은 짐승들도, 하물며 벌레조차 이곳을 방문하지 않고 있다. 사람이 너무 그리워 식사를 두고 가는 사람을 기다렸다. 얼굴에 종이를 덧댄 사람은 내 간절한 말을 무시하고 담 너머로 하루치 식사만 두고 가버렸다. 외로움이 사무친다. 한 달 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게 믿을 수가 없다.’
‘밤마다 아기님이 말을 건다. 그 순간이 너무 무서워 참을 수가 없다. 나는 자다 말고 일어나 아가님이 계신 방향으로 엎드려 예, 예 하고 대답을 드린다. 아기님은 이것저것을 나에게 명하시지만 도저히 내가 할 수 없는 것들뿐이다. 신의 말씀을 여기에 적어도 되는 것인지 몰라 적지는 못하지만 이곳에 갇혀있는 이상 도저히 아기님의 말씀을 수행하지 못한다. 그럼 아기님은 무서운 말씀들을 내리기 시작하는데 그 자리에서 도망쳐 어디에 있어도 그 목소리가 들려와 마당으로 도망쳐 나무에 몸을 기대어 두려워한다.’
‘하루하루 달력에 가위표를 하는 게 유일한 낙이다. 끝은 멀고 하루는 길다. 해가 지고 밤이 오면 하루의 가장 끔찍한 순간이 찾아온다. 젖을 물리는 것보다 나은 일이라고 누구는 말할 지도 모른다. 신을 돌보는 그 위치가 얼마나 숭고한 일인지 아냐며 머리가 벗겨진 이들은 잘도 떠든다. 나에게 훈계 비슷한 것도 내렸었다. 그 자들은 자신이 해보지 않아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입에 댈 때마다 불경하게도 이게 과연 신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신은 은혜를 내리는 존재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도저히 은혜를 내릴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신이 아닌 죽음과, 그보다 깊은 증오와 원한에게 숨을 불어넣는 느낌이 든다. 사실 이건 신 따위가 아니고 커다란 재앙이고 이것을 땅에 붙잡아 두고 있다면, 나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다른 이의 기록은 조금 더 짧다.
‘아기님의 피부에 버짐 같은 것이 점점 번져간다. 이에 대해 승려와 의논을 했지만 그들 역시 모른다고 한다. 솔직히 누가 여기에 입을 비비고 싶지? 좀 망설이다가 시간을 넘길 뻔 했다. 다음날 주지스님이 직접 올라와 크게 화를 내고 돌아갔다.’
‘천이 모자란다. 아기님의 피부에 무언가가 늘어나지만 약을 바르는 일 등은 허락되지 않았다. 아기님에게 무슨 악영향이 올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빨래 양만 잔뜩 늘었다.’
‘아기님의 말이 점점 더 많아지고 심해진다. 나는 가급적이면 집에 있지 않는다. 그곳은 이미 그의 영역이다. 아기면서 늙은이처럼 아무도 듣지 않는데 궁시렁궁시렁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마당에 있는 커다란 벚나무로 쉬는 공간을 만들고 싶은데 여긴 톱은커녕 줄자 하나 없다.’
‘대롱으로 전해도 숨이 충분히 전해지지 않을까 하는 의견은 단칼에 기각 당했다. 인공호흡기로 대체해도 되는 문제 아냐? 중은 머리가 너무 딱딱하다.’
레오는 가만히 그 내용들을 곱씹는다. 시선 끝에 머무른 요람은 움직이지 않는다. 유독 커다란 숨소리는 여전해 아기님의 극히 평범한 일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기록을 보면 아기님은 무슨 이야기란 걸 하는 듯 하지만 레오는 아직 기침 비슷한 소리 외에는 전혀 듣지 못했다. 시간이 더 지나야 할지도 모른다. 그 많은 기록들 속에 레오가 알고 싶은 정보는 얻지 못했다. 아기님의 서로 다른 보모들의 공통점은 가급적 아기님에게 무언가를 하고 싶지 않아했다. 지금 레오가 너무나 궁금한 아기님을 씻겨도 되는지, 일광욕을 시켜도 되는지, 요람에서 꺼내도 되는 지, 말을 걸어도 되는 지 등은 없다. 아기님이 먼저 말을 하고 대답을 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말을 거는 건 상관없는 문제인지도 모른다. 말을 시작해 대화를 하게 되면 조금 더 나아지지 않을까. 나무 요람은 여전히 미동도 없다. 어쨌든 천을 갈아주는 것도 괜찮은 것 같으니 레오는 좀 더 상황을 지켜보자고 생각했다.
레오가 있는 곳은 새소리도, 풀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바람이 불어 풀과 나뭇잎을 스치는 소란과 레오 옆에서 맹렬히 돌아가는 선풍기만이 이곳의 유일한 소리다. 한창 생명이 약동한다는 여름인데도 이러면 겨울은 정말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레오는 일부러 소리 내어 마룻바닥을 밟기도 하고, 마당에 혹시 모를 벌레를 찾으러 샅샅이 뒤지기도 했다. 모기가 없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지금은 그게 조금 그리워질 정도였다. 괜히 크게 혼잣말을 하거나 시끄럽게 노래를 불러도 뭐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레오가 입을 다물면 멸망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생존자인 것처럼 침묵이 들어찬다. 마을의 고요함은 이곳에서 내려오는 게 아닐까. 원래도 조용한 마을이었다. 아이보다 어른들이 더 많은 마을. 사람들은 어디서든 신사에 온 것처럼 경건히 행동했고 아이들의 밝은 소란은 이상하게도 어른들의 정숙함에 묻혔었다.
밤이 되어 깊어진 공기 속에 고요는 더욱 은근하게 다가온다. 레오는 이제 막 종을 울린 참이었다. 달빛만이 유일한 조명 속에서 레오는 그 모습을 바라본다. 아기님은 여전히 자라지 않는다. 쪼글거리는 건 조금 사라졌지만 곤충의 외피 같은 피부를 점점 두르고 있다. 닿을 때마다 점점 거칠어져서 시멘트를 바른 느낌도 든다. 손을 내밀어 만져보려고 하다가도 움찔하며 멈추고는 얌전히 손을 내려놓는다.
“아기님을 돌보기엔 내가 너무 가볍지 않아? 사실 이건 신사에 있는 스님이 해야 될 것 같은데. 그 사람들은 그걸 위해 살아가는 거잖아. 신에게 평생 몸을 의탁하고 그들의 진리를 전하고? 나는 신이 눈앞에 있어도 신앙심이 생길 기미도 없는데. 앗, 네가 잘못 됐다는 게 아니고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인 것 같아. 나는 아마 너에게도, 그리고 저쪽 바다 건너 있을 서양쪽 신에게도 몹쓸 신자라. 앗, 반말을 하고 있잖아. 죄송합니다…? 반말을 계속해도 괜찮겠습니까…?”
아기님은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아무 미동도 없다. 레오는 그걸 긍정으로 해석하기로 했다.
“왜 스님들이 널 돌보지 않을까. 변신소녀물처럼 성인이 되기 전의 나이여야 한다면 무녀라던가 애기승도 있을 텐데 말이야. 그 사람들은 나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거든. 그러니까 내가 매일매일 빠지지 않고 너에게 뽀뽀를 잘 하기만 하면 만족한다는 소리야. 이런 냉담 신자가 해도 괜찮은 걸까.”
아무 것도 하지 않은 몸은 피곤도 없어 쉽게 잠에 들지도 못한다. 레오는 이제 창밖을 바라보았다. 벌레 한 마리도 들이닥치지 않기 때문에 여름에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잘 수 있다는 건 굉장한 이점이다.
내일은 좀 더 노래를 쓰자. 레오의 유일한 특기이자 취미이기도 한 작곡을 레오는 생각한다. 레오가 있던 학교에서 노래의 기원은 신의 목소리라고 가르친다. 신이 자신을 따르는 백성들을 위해 찬양할 수단을 내려주었고 그것이 노래라는 것이다. 따라서 찬송가의 음은 급격히 휘지 않고 단계를 밟아 천천히 올라가며 정박자로 찬양이 담긴 메시지를 전한다. 악보가 없는 아주 옛날의 노래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그만큼 쉬우면서 지루하다. 신을 찬양하려면 좀 더 재밌는 쪽이 좋지 않을까. 레오는 느릿한 찬송가만 부르던 날들 속에서 머릿속에서 재조립되던 음을 생각한다.
음악이 신을 위한 것이 기원이라면 여기에 계시는 내가 돌봐야 하는 작은 신에게 노래를 줘도 좋지 않을까. 승려들이 밑에서 신나게 부르고 있을 지도 모르지만 잘 들리지도 않고, 아마 자신이 신이랑은 제일 가깝고. 깊었던 밤하늘이 창백해진다. 여름밤은 짧다. 레오는 곱게 펴두었던 요로 꾸물꾸물 몸을 밀어 넣었다. 졸리지 않은 눈을 감으며 애써 잠을 청한다. 그러다 문득 말이 들려왔다. 속삭이는가 싶을 정도로 아주 작았음에도 귀에 곧장 꽂히는 것 같은 소리였다.
“죽어.”
그것은 레오가 처음 들은 신의 목소리였다.
*
신에게 기원을 드릴 때는 언제인가. 기쁨이 흘러넘칠 때 신과 이 기쁨을 공유하는 모습은 거의 보지 못했다. 심적으로 불안할 때, 무언가 기대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신을 찾는다. 나라에 큰 우환이 찾아올 때 대규모로 제사를 지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신은 기쁨의 순간을 공유할 때 배제돼 있다. 그 누구보다 절박할 때 신을 찾고 고통의 순간에 부른다. 신은 절망과 함께 한다.
“지옥의 불구덩이 속 가장 깊은 곳에 너의 자리가 있을 거야.”
신이 뱉는 저주라는 건 상상해 본 적도 없지만 직접 들어보니 그 무게는 확실히 남달랐다. 곧바로 지옥에 자신의 거주지가 결정된 것 같은 느낌이다. 기원이 아닌 선고. 신이 만약 정말로 있다면 한 인간의 생사쯤은 아주 손쉽게 결정할 것이다.
“네 몸 깊은 곳에 병마가 깃들 것이다. 어떻게 살아남는다 해도 평생 고통스러워하겠지.”
기록대로 아기님의 일방적인 말은 밤에 이어졌다. 낮에도 꾹 다물려있던 것이 거짓말처럼 숨을 불어넣고 난 후엔 이어졌다. 옹알이대신 악의가 담긴 문구를 뱉는다. 그게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아기님의 목소리는 아기의 것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응애응애하며 울 것 같은 목소리가 또박또박 말을 뱉는다. 누군가의 위해를 잔뜩 끼치는 말을 뱉고 딸꾹질을 한다. 그리고 다시 말한다. 레오가 아기님과 아주 가까이 붙어 있지 않아도 그 목소리는 잘 들렸다.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닫아도 그곳에 같이 있는 양 아기님의 목소리는 레오와 함께 했다. 머리를 쾅쾅 두들기는 듯한 목소리였다.
“매일 밤 너를 난도질하는 꿈을 꾼다.”
“음, 오늘은 수필 같네. 제법 시적이기도 하고!”
레오가 펜을 움직이며 말했다. 방의 전깃불을 켜는 대신 등잔불을 켜 달빛과 어우러져 꽤나 근사한 분위기가 낸다. 아기님의 입이 벌어지며 저번 밤과 비슷한 말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여전히 멀쩡히 살아있구나. 수치도 모른 채 눈이 먼 자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겠지.”
“눈이 먼 자라면 장님? 아니, 이럴 경우엔 비유적인 표현일까? 미안, 나 언어 쪽은 영 센스가 없어서.”
“아무도 너를 심판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사지를 찢어주겠다. 이건 일도 아니다. 아무리 용서를 구해도 이 심판은 멈추지 않을 거다.”
“시작은 시적이지만 끝은 행동파군. 그래서 뜻을 이루었어? 해냈다면 철창행이겠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끄륵끄륵대는 숨소리만 일어났다. 레오는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기님의 입가에 누런 거품이 올라오고 있었다. 옆에 놔두었던 손수건으로 조심히 그 거품들을 훔친다. 눈주름이라고 여겼던 곳은 눈이 맞았다. 일반 사람들이 가진 홍채와 수정체가 존재하는 그런 눈은 아니었지만. 말을 뱉을 때 아기님의 눈은 떠지는데 주름을 좁히며 열린 그 곳엔 텅 빈 허공만이 존재했다. 검은 두 구멍을 치켜뜨고 입을 열심히 움직이며 저주의 말을 뱉는 모습을 신사 사람들이 보면 확실히 가슴이 아플 거라고 레오는 생각했다. 어쨌든 그들은 자신의 신이 이런 괴악한 모습보다는 존엄한 형태로 있어주기 원할 테니까. 금실로 수놓인 가사로 덮고 온갖 꽃으로 만든 화환을 머리에 씌워주는 그런 불상들처럼. 그런 뜻에서 승려들이 이 일을 못 맡는 게 아닌 가 까지 고민하던 레오는 마저 펜을 움직였다. 음표가 수선스럽게 돌아다니고 박자가 제멋대로 튄다. 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와 함께 잠잠해져 쌔액쌔액 대는 숨소리가 섞여 화음처럼 어우러진다.
“오늘의 무시무시한 복음은 끝난 건가?”
악보 하단에 fine를 날려 적고는 레오가 바닥에서 벌떡 일어난다. 아기님의 두 눈은 닫혀 있었다. 입은 여전히 숨구멍으로만 활용되고 있다. 레오는 자신이 마구잡이로 그려둔 악보를 훑는다. 제법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한 번도 정식으로 작곡을 배운 적이 없는 레오는 무엇이 훌륭한 음악인지 모른다. 단지 자신이 불러서 괜찮으면, 루카가 좋다고 해주면 잘 만든 곡이다.
“흠흠, 그럼 한 곡 뽑아보겠습니다. 1장 1절… 아앗 제목을 안정했다. 불면증에 걸린 작은 신에게 바치는 자장가 정도로 할까.”
아기님이 어째서 저런 말들을 하는지 레오는 알지 못한다. 신의 말을 유일하게 들어줄 사람은 레오지만 그 대상은 레오가 아니라는 걸 며칠에 걸쳐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이제 막 태어난 아기님을 괴롭힌 사람은 누구일까. 혹시 그건 신에게 위탁하는 과거의 사람들 목소리들이 아닐까 하고 레오는 추측했다. 누군가의 간절한 파멸을 원하면서 여과 없이 들리는 속내. 그것까지 모조리 듣고 아기님이 그 목소리들을 꾸역꾸역 뱉어내는 것이 아닐까 하고. 선대의 보모들이 남긴 기록에도 아기님의 말이 정확히 무엇인지 아는 자는 없었다. 레오는 필요한 물건을 매번 가져다주는 이에게 물어봤지만 그는 과묵한 자였고 이번에도 종이를 덧댄 얼굴은 표정을 감춘 채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것이 모른다 인지, 말할 수 없다 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온전히 레오의 망상의 영역이었다. 아무도 답을 주지 않으면 멋대로 생각할 뿐이고, 레오는 그것이 특기였다.
가엾게 저주의 말만 잔뜩 듣고 있을 신에게 레오는 선물을 하기로 했다. 음악을 알려준 게 신인지의 진위는 알 수 없지만 노래를 듣는 게 딱히 싫은 것 같지 않으니. 세상의 들끓는 시름과 탄원 속에서 노래가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기를. 저렇게 조그만 몸을 가지고 있는데 하는 말들이 저런 거라면 딱하지 않은가. 신을 동정하는 게 한없이 주제넘을 지도 모르지만 보모 역할이니 이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하고.
어린 신을 위한 자장가는 레오의 목소리보다는 어른의 목소리가 어울리겠지만 아쉬운 대로 부른다. 모든 것이 가라앉은 세상에 레오의 목소리만이 둥실둥실 떠다닌다. 아기님은 귀도 없고 코도 없지만 어떻게든 들어주겠지. 움직이지 않는 요람을 잡고 은하수를 떠도는 초승달 배에 아기님을 태운 것처럼 노래를 천천히 부른다. 밤하늘에 별이 가득하다. 우주에서 한없이 작을 지구의 작은 아기 신을 위한 자장가는 작지만 아주 다정하게 울려 퍼진다.
“아, 여름이야. 여름…. 진짜 여름….”
레오는 죽어가고 있었다. 선풍기로도 어찌할 수 없는 더위가 신사를 급습하고 있다. 방에 도저히 있을 수 없어 레오는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건물 이쪽저쪽을 서성이다가 산을 등진 툇마루에 나가서야 드러누울 수 있었다. 산의 찬 기운아 모두 이쪽으로 와줘. 푸르른 녹음은 잠깐 더위를 가시게 해주지만 곧 팍팍 찌는 열이 엄습한다. 대야에 물을 받고, 식사를 가지러 오시는 분이 계시면 그 때 수박 같은 것도 달라고 하고. 가능하면 빙수, 아니 에어컨을 요청하는 게 좋을까. 형광등이나 냉장고도 있으니 당연히 전기는 통할 테니. 이러다 사람 잡겠다며 늘어져 있다가 문득 레오는 아기님을 떠올렸다. 아기님도 더위를 탈까?
“아기님, 더워?”
한낮의 야트막한 그늘에 눕혀 있는 아기님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슬쩍 손을 가져다 대본다. 거칠거칠한 피부가 왠지 뜨끈하게 열이 오른 것 같다. 역시 덥지 않을까. 엄연히 살아있는 생물인데.
“실례합니다.”
레오는 요람에서 아기님을 안아들었다. 아기는 생각보다 묵직했다. 혹시 눈을 뜨지 않을까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기며 뜨거운 방 안을 빠져나간다. 확실히 툇마루 쪽이 시원했다.
“방 안에만 있으면 답답하잖아, 그렇지?”
당연히 대답은 없었다. 레오는 잠시 아기님을 바닥에 내려놓을지를 고민하다가 결국 자신의 품에 눕혔다. 다리를 쭉 뻗고 아기님을 품에 안고 산바람을 한껏 머금는다.
“매미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 좀 심심하네. 요양하기엔 딱 좋지만 조금 더 자극적인 일이 있으면 좋겠기도 하고. 아기님도 충분히 자극적이지만, 뭐랄까 그것도 이제 일상이고. 둘이 이렇게 같이 있는 거 말야. 밤에 아기님이 말 안하면 심심할지도 몰라. 그래도 가끔은 좀 예쁜 말을 하면 좋겠지만 그건 무리려나? 심약한 사람들이 들으면 악몽을 꿀 지도 모를 정도던데 역시 내가 여기에 와서 다행이야.”
아기님의 입이 옹알이하듯 움직이지만 깨는 기색은 없다.
“세상에 더 좋은 말이 꽤 많아. 좋아해, 라거나 사랑해! 라거나. 참, 원래 여기로 올 사람은 내가 아니고 내 여동생이었어. 아주 러블리한~! 좋아해와 사랑해를 아낌없이 쏟아 부어야 할 천사라고나 할까. 아기님은 나보다 루카인 편이 좋았을 지도 모르지만 아니 물어볼 필요도 없이 그렇겠지만 나로 참아줘. 루카는 내년에 마을 밖에 있는 도시 고등학교에 다닐 거라고 아주 신나했단 말이야. 그리고 친구들도 만나야 해. 나도 친구가 있긴 한데… 으음, 내 걱정 해주면 좋겠다. 아무 연락 없이 와버렸거든. 내가 학교에 돌아가면 잊어버리는 거 아냐? 그럴 가능성이 높아. 이럴 수가, 더 많이 말해둘걸,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매번 시끄럽다고 하면서도 다 받아주거든. 좋은 친구야. 앗, 그보다 다음 노래 생각했는데 들어봐. 도입부는 굉장히 마음에 드는 중간에 반전이 없다고 할까, 조금 심심한 느낌인데. 한 번 들어볼래? 완성되면 밤에 제대로 불러줄 거니까 지금은 리허설 느낌으로!”
이곳의 좋은 점은 레오가 분이 풀릴 때까지 노래를 불러도 된다는 점이다. 레오는 신나게 목청을 높인다. 산을 향해 외치니 발성 연습도 하는 기분이고. 근처에 폭포라도 있으면 소리꾼의 흥이 날 텐데. 툇마루에 있으니 아기님의 열도 가라앉은 기분이 되어 레오는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음은 정해져 있지만 가사는 없어서 제멋대로 말들이 뛰쳐나온다. 아기님은 땀구멍이 없어서 땀을 흘리지 않네~ 더운 건지 아닌지 모른다네~ 하지만 뱀은 더워해~ 땀구멍이 없는 뱀도 더워하니 아기님도 더울지도 모르지~ 매미 소리 반주가 없는 걸 아쉬워하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 바람이 산을 스치고 지나갔다. 바람이 잦아들고 산도 침묵을 지킬 때도 아무 말 노래는 수박을 먹고 싶다는 가사로 이어지며 한동안 계속 되었다.
레오는 한참 동안 닫혀있던 옷장을 멋지게 열었다. 깊숙이 묵혀둔 이불에선 오래된 냄새가 났다. 누런 이불보를 세탁기에 넣고 솜은 한참을 팡팡 두들겨 먼지를 없앤다. 어젯밤 분명 머리끝까지 이불을 올려 도롱이벌레처럼 잤음에도 너무 추웠다. 이제 여름 이불로는 쌀쌀한 바람을 막을 수 없다. 활짝 열어놓던 창문은 어느새 닫혀있고 수박은 자취를 감췄다. 반바지에서 긴바지로 반팔에서 긴팔로. 옷도 슬금슬금 바뀌었다. 덧붙여 앞머리도 엉망진창으로 되었다. 커튼처럼 눈을 가리는 게 귀찮아서 가위로 재주껏 잘라봤더니 미용 쪽엔 재능이 없다는 확인사살을 받고 말았다. 예상한 것보다 훨씬 짧게, 그리고 고르지 못한 앞머리를 보며 이곳에 루카가 없다는 걸 천만다행으로 여겼다. 유일한 식구인 아기님은 레오의 앞머리가 짧든, 길든 평등하게 밤에는 저주를 퍼붓고 낮에는 입을 열지 않는다. 레오에겐 굉장히 다행인 일이었다.
짧은 앞머리 대행진이란 곡을 막 다 지은 레오는 그제사 허기를 눈치 채고 주전부리를 슬금슬금 꺼낸다. 낮에 삶은 고구마를 잔뜩 받아 그걸 먹어보지만 식어버려서 맛이 덜하다. 불을 쓸 수 있다면 낙엽이라도 긁어모아서 데워보기로 할 텐데 여기에서 불은 금지되어 있다. 군고구마를 생각하면서 레오는 밥 대신 차가운 고구마를 삼킨다. 가을바람을 맞아 빨아둔 이불이 펄럭인다. 녹색으로 가득 찼던 마당은 어느새 붉고 노랗다. 노을과 비슷한 색 속에 노을이 저물고 있다. 레오 옆에는 아기님이 누워있다. 여전히 눈을 꼭 감고 요상하게 큰 숨소리로 숨을 내쉰다.
“오늘 루카 편지를 받았어. 내가 아주 보고 싶대. 이상하게 멀리 있는 학교에 갔을 때보다 더 보고 싶다고. 가까이에 있는데 못 봐서 그런 걸까? 면회라는 느낌으로 누가 찾아와줘도 좋을 텐데. 면회인은 루카가 유일하겠지만. 사실 그게 노림수야. 누구랑 대화를 하는 건 생각보다 근사한 일이거든. 아기님도 어서 커서 누구와 대화하면 좋을 텐데. 신이니까 대화는 안 하나? 그보다 너 자라긴 하는 거야?”
레오는 방석 위에 눕혀놨던 아기님을 안아들었다. 여전히 묵직한 무게지만 여름과 별반 달라지진 않은 것 같다.
“자르는 게 더 이상한가. 넌 아무 것도 안 먹으니까. 이렇게 잘 있는 거 보면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아기님은 뭘 먹고 자라는 거야? 공기를 먹으면서 사실은 점점 살찌고 있는 건가. 말도 살찌는 계절이니까 좀 커지는 것도 어때? 아가님도 가을 공기를 먹고 포동포동~ 오옷, 다음 곡은 이거다!”
마루에서 신나게 다리를 동당거린다. 아기님도 같이 우쭐우쭐 댄다. 한참을 그러다 신사 승려가 보면 크게 화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저도 모르게 다리를 얌전히 내린다.
“그러고 보면 너는 크면 더 이상 아기님이 아닌데 뭐라고 불리는 거야? 다른 호칭이 생기는 거야? 비샤몬님 같은 거?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부르면 좋을 텐데 왜 아기님은 아기님인 거지.”
레오는 대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아기님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가 두 눈을 껌벅인다.
“앗, 설마 이거 콧구멍? 너 코 생긴 거야?!”
우둘투둘한 피부여서 눈치 채기 어려웠지만 꽉 감긴 두 눈, 아래에 있는 입 그 사이에 아주 작은 구멍이 보인다. 정말로 코라도 되는 양 두 구멍이 나란히 점 찍혀 있다. 레오는 살짝 손을 그 구멍에 가져다 대본다. 들숨이나 날숨은 전혀 느껴지지 않지만 어쩐지 코라는 확신이 들었다.
“오옷, 아기님도 열심히 자라고 있구나! 어른님으로 으쌰으쌰 한 걸음을 걷고 있는 거야? 역시 이름이 뭔지 알려달라고 하는 게 좋겠어! 정말 이름이 어른님이면 슬프잖아. 내 이름이 츠키나가 학생이라면 엄청 끔찍해! 어른이 되면 개명해야 할 것 같은 이름!! 그러면 너를 뭐라 부르는 게 좋을까…. 아시다시피 나 언어 센스가 없어서. 가사나 이름 짓기는 내 영역이 아닌 것 같단 말이지….”
레오는 그렇게 말하며 마당을 멍하니 본다. 붉게 물든 하늘이 마당에 진한 색으로 내려앉아있다. 마당에 있는 커다란 나무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집 안까지 들이닥치는 걸 보던 레오는 문득 이름을 하나 입에 담았다.
“스오, 스오…. 음, 스오 어때?”
아기님에게 동의를 구해보지만 대답은 없다.
“여기에 있는 나무, 벚나무래. 일기장에 써 있었어. 이 밑 신사에도 벚나무가 잔뜩 있거든. 근데 그 벚나무들 다 하나 같이 붉은 벚나무여서 말야. 붉은 벚나무 밑에는 시체가 묻어 있다고들 하니까 루카랑 몰래 밑을 파보다가 들켜서 혼이 잔뜩 났었는데. 여기도 신사에 있는 거와 같으면 붉은 벚꽃이 피지 않을까? 마침 내가 너를 돌보는 날도 봄까지고, 그 때 쯤이면 저 나무도 벚꽃이 피겠지. 아마 너도 아기님에서 다른 신이 될 테고, 그건 또 다시 태어나는 느낌이 아닐까. 그래서 붉은 벚꽃을 따서 스오(朱桜)! 이의 없으면 이대로 낙찰!”
레오의 목소리만 쩌렁쩌렁 울린다. 아기님은 눈을 뜨지 않고 숨을 내쉰다. 어감 좋지, 스오~ 스오~! 한동안 소란스럽게 굴다가 즉석에서 지어낸 스오 합창곡을 솔로 파트로 부르기 시작한다. 옆에는 먹다 만 고구마가 굴러다니고 아이의 고사리손 같은 단풍이 산을 뒤덮어 갈 때 레오는 멋대로 신의 이름을 붙였다.
산에서 넘어 온 마른 낙엽이 한창 마당 바닥을 뒹굴던 때는 레오도 바빴다. 레오가 보기엔 가을의 정취가 물씬 느껴지는 자연의 일부였는데 승려들의 생각은 다른 듯 했다. 아기님을 모시는 신사에서 지저분함은 용납 못한다는 말에 레오는 낙엽이 쌓이면 어김없이 비로 쓸어야 했다. 가을은 하루 종일 낙엽과 싸워야 했어서 더 이상 나무가 떨궈낼 잎이 없는 겨울이 반가울 지경이었다. 물론 하늘에서 떨어지는 흰 낙엽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지만.
“…이 상태인데 정말로 해도 되나요.”
코가 잔뜩 막힌 목소리로 레오가 물었다. 상대는 무어라 한자가 쓰인 종이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난처해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상대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레오가 쿨쩍이며 콧물을 삼켰다. 저녁 식사와 함께 받은 것 중엔 두터운 담요와 감기약도 포함돼 있었다.
“추워서 먼저 들어갈게요. 눈 쌓이기 전에 빨리 내려가세요.”
매번 상대가 내려가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지만 머리를 잔뜩 누르는 고열 속에서는 도저히 서 있을 자신이 없었다.
여전히 하늘에선 하얀 눈이 팝콘처럼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어제는 분명 눈을 뜨고 세상을 가득 채운 흰 풍경에 탄성도 질렀었는데, 마당에 쌓인 모든 눈을 치워야 한다는 현실을 깨달았을 때 레오는 속으로도, 밖으로도 커다랗게 비명을 질렀다. 결국 눈을 치우다가 덜컥 감기에 걸린 게 현재 꼴이다. 연거푸 터져 나오는 기침에 목도리 입을 말고 죽은 듯이 누워서 머리의 두통과 힘겨운 실랑이를 했다. 와중에 또 쏟아지는 눈을 보며 항복 버튼이 있으면 누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콜록일 때마다 두터운 솜이불이 같이 움직인다. 승려들이 임시방편으로 가져다 준 전기 히터가 빨갛게 물드는 걸 레오는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지만 이불 밖으로 발 한 짝만 빼도 온몸에 오한이 들 정도로 춥다. 춥거나, 덥거나 하나만 해줬으면 좋겠는데. 눈앞이 어질어질하다. 다 먹지 못한 죽그릇이 방구석에 보인다. 부엌에 가져다 놓을 정도의 힘도 남아있지 않다. 레오는 눈을 뜨고 다시 감았다.
아주 잠깐 눈을 붙였을 뿐인데 시곗바늘은 한참 돌아가 있었다. 시침이 2를 벗어나있다. 레오는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현기증이 들어 비틀거리면서도 요람 쪽으로 다가갔다.
“미안, 오늘은 조금 지각.”
잔뜩 잠긴 목소리가 요람의 아기님, 스오에게 떨어졌다. 어둑한 방에 아기님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다.
“좀 병균이 섞여 있을 거야. 스님들이 괜찮다고 했는데 걱정은 되네…. 감기에 걸린 신은 들어본 적이 없다지만. 아기에게 나쁜 병을 옮기는 어른이 된 기분이야….”
그리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간다. 스오의 피부는 더 단단해져 있었다. 추위를 버티기 위해서 일까. 벌어지는 아기 입에 입술을 누르고 열이 가득한 숨을 전달했다. 너무나 익숙한 의식을 마치고 레오는 종이 걸려있는 밖으로 이동했다. 창문만 간신히 열어 처마에 매달려 있는 종을 힘줘 흔들었다. 기묘하게 밝은 한밤중에도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내일 올라오는 사람도 여간 고생이 아니겠다. 창문을 닫고 그 자리에서 미끄러진다. 이대로 자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었다. 한참을 휴휴 숨만 내쉬다가 결국은 엉금엉금 기다시피 들어와 방문을 닫았다.
“두 눈을 파내어 새 먹이로 줘도 모자랄 새끼.”
스오가 떠드는 목소리가 들렸다. 건강하네. 안도의 한숨인지 열을 뱉어내려는 한숨인지가 흘렀다. 레오는 다시 이불 속으로 몸을 묻었다.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지옥에 떨어지는 말을 자주 들어서일까 정말로 지옥의 열탕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긴장이 풀렸는지 혹은 약이 독해선지 눈은 금세 감긴다. 의식을 놓는 게 아닌 누군가 끊어버리는 것 같았다. 레오는 검은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오늘은 왜 노래 안 불러?
꿈속의 누군가가 물었다. 레오는 소리 내어 대답하려 했지만 거한 기침만 튀어나왔다. 목구멍 속의 깔깔한 무언가가 목과 가슴을 쥐어뜯는 것 같다.
-매일매일 불러놓고서 왜 그만 두는 거야? 성실하지 않은 사람은 싫어.
대답해야 되는데. 감기에 걸렸다고.
-나에게 바치는 노래도 엄청 만들었잖아.
-나를 찬양한다고 했잖아.
-난 너의 신이잖아.
아이가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다음날, 감기는 씻은 듯이 나아있었다. 자면서 땀을 엄청 흘렸는지 녹진해진 베개에서 레오는 추욱 처진 몸을 일으켰다. 씻어야 할 것 같은 찝찝함은 여전하지만 머리를 지배하던 열이 사라져 몸은 한결 가벼워졌다. 배도 고프고, 마당의 눈도 치워야 할 테고.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은 와중에 레오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스오에게 다가가는 일이었다. 괜히 머리에 손을 대어 열이 있나 없나를 재어보고는 평소와 똑같은 상태에 한시름을 놓는다. 요람을 잡고 목을 몇 번 크흠 큼 하며 가다듬었다. 그리고 언제 만든 지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는 어느 노래를 부른다. 감기에 잔뜩 절여있던 목이 뱉어내는 소리는 아주 형편없었다. 그럼에도 레오는 계속 노래를 이어나갔다. 어째선지 그렇게 해야 할 것만 같았다.
*
레오는 창문을 열었다. 날카로운 추위를 두르다 한껏 상냥해진 바람이 눅눅한 공기를 비집고 들어온다. 레오는 새로 가져온 강보를 밑에 깔고 요람에서 스오를 들어올린다. 어제 갈아줬음에도 아기님을 감싸고 있는 강보는 벌써 갈색 진물이 얼룩덜룩 배어있다.
스오는 울지 않는다. 그래서 더 상태를 알 수 없었다. 아픈지, 괜찮은지, 괴로운지, 아무렇지도 않은지, 견딜 수 없는지. 겨울의 끝이 다가오면서 스오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 기록에도 그랬던 것처럼 아기님의 거친 피부는 무언가 곪아가는 것처럼 화농이 생기는가 싶더니 이제는 온몸으로 번졌다. 지독한 피부병에 걸린 모습이다. 레오는 헌 강보를 벗겨 스오의 몸을 꼼꼼히 살핀다. 스오에게 생긴 건 코뿐만이 아니었다. 몸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지만 팔과 다리도 조그맣게 나 있었다. 인간의 형태처럼 어깨와 이어지는 게 아닌 몸통에 생긴 아주 작은 그것은 어떻게 보면 올챙이에 생겨난 다리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때만 해도 건강했는데 지금은 고름에 뒤덮여 그 작은 팔다리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어떠한 약을 쓸 수도 없다. 수없이 요청을 해보았지만 돌아오는 건 거절뿐이었다. 기록과 같았다.
레오가 사는 작은 신사에 수많은 기록도 그 끝은 자세히 서술되어 있지 않다. 마지막 날을 고대하고 그리고 갑작스럽게 끊긴다. 그래서 길러진 신은, 그를 돌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레오도 이곳을 떠날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인가.
젖은 수건으로 흐르는 진물들을 훔친다. 꼭 감긴 눈두덩에도 화농은 여지없이 피어있다. 언제부턴가 스오에게 들려주는 노래는 아픔아 날아가라 같은 노래들로만 되었다. 자신이 뭔가 잘못한 건 아닐까. 이런 상태가 정상일리 없다. 그럼에도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한참을 몸을 닦아주고 새로운 강보로 작은 신을 감싼다. 어느 때보다 더 무력해 보이는 존재가 요람에 눕혀진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온화하다. 임무의 끝이 점점 다가오고 있어 초조함이 더해진다.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이에게 스오의 상태를 온전히 보이면서 이대로 방치해도 되냐고 윽박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나 때문이야?”
레오는 그렇게 묻고는 벌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기다린다. 어떤 일이 있어도 스오가 대답한 적은 없고 이번도 역시 그러했다.
“바람을 좀 쐬는 게 좋을까? 움직이지 않는 게 더 좋은 걸까?”
의사가 아닌 레오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다. 저절로 튀어나오려는 한숨을 레오는 눌러 담았다. 모르긴 몰라도 레오보다 스오 쪽이 더 괴로울 건 뻔했다.
강보 밖으로 아기의 작은 손이 비죽 나와 있다. 손가락을 가져다 대면 마주 잡아줄 것 같지만 축 늘어져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다. 밤에 뱉던 말도 요즘은 전혀 하지 않는다. 간신히 들리는 숨소리만이 요람 속의 아기가 살아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내가 뭘 하면 되지….”
방금 갈아준 흰 천이 점점 누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밖은 꽃향기가 간지러울 정도로 산과 신사를 휘감고 있다. 여전히 벌레 하나도 보이지 않는데 신사 근처엔 꽃이 만발하다. 벌이 없어도 꽃이 필 수 있는 건지, 아니면 레오가 보이지 않는 사이 슬쩍슬쩍 자연이 스스로 생태계를 굴리고 있는 건지. 겨우내 아픈 이도 기력을 차린다는 봄기운이 만연한데 스오는 나아지질 않는다. 화농은 점점 심해져 딱딱하게 피부처럼 자리 잡았다. 원래 거칠다고는 해도 저런 고름으로 얼룩덜룩할 정도는 아니었다. 딱딱하게 굳은 그것은 해변의 암초에 제멋대로 들러붙은 따개비들 마냥 몸의 일부처럼 굴고 있다.
신사의 승려들은 그들의 신을 죽이려는 거야? 레오는 기록을 이 잡듯이 뒤졌고, 매번 아기님의 상태에 대해 언급했으며 그 어떤 소득도 얻지 못하고 무력하게 숨을 불어넣는 일만 할 뿐이다. 아기의 입술이 제대로 열리지 않아 그것마저도 쉽지 않았다.
아기님이 떠들지 않아 고요한 밤에 레오는 계속 잠을 설쳤다. 언제든 그가 도움을 요청하면 그것에 응답하기 위해 요람 아주 가까이서 그를 보고 잔다. 그렇게 뜬 눈으로 요람을 지켜보다가 푸른 새벽이 한 걸음 물러나며 점점 그 빛을 잃어갈 때 기절하듯이 잠들었다.
날은 이상하게 빠르게 삭제되어 갔다. 자신만 시끄럽고 세상 모든 것이 고요하던 날들이 점점 사라지는 게 안타까워 잠드는 순간마저도 아쉽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점점 밝아지는 하늘을 보고 나서야 레오는 이불로 들어갔다. 너무 정이 들었다. 신에게 정들다니 웃을 수 없는 농담이다. 그래도 내가 돌봐야 할 아기였고, 신이라고 해도 저주를 아주 또박또박 잘 말한다 말고는 보통 아기 같았고. 스스로 움직일 수도 없어서 안고 다녀야 하고, 점점 바뀌는 계절을 보여주며 멋대로 떠들고.
정말 혼자 즐거운 나날이었다. 아무도 레오를 무시하지 않았고, 아무도 레오를 부정하지 않았다. 흐릿하게 붕붕 겉돌던 나날 속에 이상하게도 스오와 같이 있으면 주변 색이 진해졌다. 모든 자연은 그 앞에서 숨을 죽이면서도 풍성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스오와 함께 해서 그 모습들을 모두 볼 수 있었다.
마당에 있는 벚나무도 붉은 꽃망울을 잔뜩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다. 역시 그 나무는 붉은 벚나무가 맞았다. 레오는 스오를 안고 그 나무 밑에서 둘만의 벚꽃놀이라는 멋진 계획을 잡아놓고 있었다. 그의 이름을 딴 나무 밑에서 그 이름을 한 작은 신과 벚꽃놀이.
‘아픈 건 반칙인데….’
점점 딱딱해진다고 볼 수밖에 없는 스오를 떠올리고 레오는 베개에 얼굴을 박았다. 역시 내가 오는 건 잘못된 거였어. 의사가 왔어야 했어. 나는 아무것도 몰라. 뭘 잘못했는지 조차도 몰라. 잠을 못 잔 탓인지 두통이 머리를 눌러왔다. 잠을 자기도 미안했다. 그럼에도 피곤한 의식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레오 발치로 무언가 툭 닿았다. 레오는 허리를 굽혀 그것을 주워들었다. 색실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붉은 공이었다. 공이 굴러온 쪽에서 키득키득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붉은 기모노를 입은 여자 아이가 나무에 숨어 레오를 보고 있었다. 나무에 매달린 벚꽃이 잎을 뿌리고 있다. 레오는 공을 내밀었다. 꺄르륵 웃는 소리와 함께 아이가 냉큼 나온다. 손을 뻗으며 달려오는 아이의 붉은 머리가 나부낀다 싶더니 곧장 품으로 뛰어 들어왔다. 허리를 끌어안는 손길과 함께 높게 터지는 웃음소리가 선명하다.
그리고 레오는 눈을 떴다. 낯선 흰 천장이 높게 자리 잡고 있었다. 눈만 몇 차례 깜박이다가 레오는 몸을 일으켰다. 끼익하며 철제로 만들어진 무언가가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레오는 어리둥절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난간이 붙어 있는 침대가 보이고 손목에 연결된 얇은 튜브가 길게 이어져 높이 있는 투명한 링거액과 닿아있다. 희고 깨끗한 병실, 열려있는 창문, 나부끼는 커튼.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인물에 레오는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텐시…?”
창문 밖을 보고 있던 남자가 돌아선다. 레오와 같은 환자복을 입고 있는 남자, 텐쇼인 에이치가 레오와 눈이 마주치자 빙긋 웃어왔다.
“일어났구나, 츠키나가 군.”
오랜만에 보는 그는 여전했다. 꿀로 빚어놓은 것 같은 화사한 금빛 머리와 보석처럼 박힌 푸른 눈동자에 천사 같은 얼굴. 그리고 환자복을 입고 있는 것마저도.
“병문안을 받았으면 받았지 누구에게 가는 건 처음이라 굉장히 어색했어. 심지어 상대는 혼수상태라니.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느껴볼 수 있는 좋은 체험이었다고 해야 할까.”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에이치는 어제 만난 것처럼 여상하게 말을 건넸다. 레오가 정신을 잃고 있었던 건 약 사흘. 창밖에선 한창 만발한 분홍 벚꽃들이 조심스럽게 꽃잎을 뿌리고 있었다. 에이치와 처음 만났을 때는 좀 더 추운 계절이었다. 연신 기침을 하며 커다란 병원에 갇혀 있는 천사. 도시에서 왔다고는 하지만 레오는 그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해도 믿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반짝반짝하고 예쁜 사람이었다. 심지어 노래하는 목소리도 아름다웠다. 커다란 병실에 갇힌 카나리아 같은 그를 찾아가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체스를 두기도 하고, 레오가 만들어준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그의 음색에 맞춘 노래만 생각해도 당장 곡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레오는 에이치에게 열중했었다.
“텐시는 계속 여기에 입원해 있었던 거야?”
“그런 건 아니야. 나도 일단은 학교를 다녀야 하고. 츠키나가 군과 헤어지고 난 그 날 후에 나도 일단 돌아갔어. 지금은 때가 때니까 여기로 다시 왔지만 말이야. 공기 좋은 곳이니까 요양 겸 해서 말이지. 그보다 츠키나가 군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병’은 고쳐졌어?”
눈을 가늘게 뜨며 웃는 모습을 흘겨보다가도 레오는 고개를 돌렸다. 웃는 얼굴에 침도 못 뱉는다고도 하지만 저렇게 천상에서 갓 내려온 듯한 얼굴에 도저히 뭘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아쉽게도 열렬히 앓는 중. 텐시는 여전히 얼굴은 예쁜데 심술궂네.”
“내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마을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어서 놀랐어.”
“떠난 게 아니고 거의 쫓겨나다시피 나온 거지만. 부모님은 내 병이 고쳐지길 바라서 어엄청 떨어진 외딴 신학교에 넣었다고. 다른 의미로 수도원 생활을 했지. 그래도 여기가 훨씬 정숙하다고. 폐쇄된 학교는 뭐랄까, 위험하거든.”
“그래도 거기엔 내가 없잖아? 츠키나가 군에겐 지금이 더 위험한 거 아냐?”
“오옷, 언제 봐도 대단한 자신감!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텐시의 망상에 맡겨볼까~”
“차가운걸. 이래봬도 나는 제법 츠키나가 군을 그리워했어. 좋아, 그럼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그렇게 마을에서 나간 츠키나가 군이 돌연 이곳으로 돌아오고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다가 혼수상태로 병원에 입원하게 된 경위라던가?”
가만히 웃고 있는 푸른빛이 예리하게 레오를 찌르고 있는 것 같았다. 레오는 그 시선을 말없이 받아들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텐시는 다 알고 있잖아?”
“알고 있는 것과 본인이 확인시켜주는 건 다르지.”
“으음, 잘 모르겠는걸.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하는지도. 잘못 말했다간 우리 가족에게 무시무시한 위협이 닥칠지도 모르고.”
“그런 츠키나가 군에게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줄게. 이 마을에서 츠키나가 군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공공연한 비밀이야. 사정을 모르는 어린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해.”
“역할이라면?”
“츠키나가 군이 어린 신의 보모 역할이었다는 것. 그런 츠키나가 군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이 땅에 신이 강림했다는 것 정도?”
“에, 뭐야. 다 알고 있잖아. 내가 텐시에게 알려줄 건 없겠는걸. 스오가, 아니 아기님이 어떠했는지 이런 건 절대 말해선 안 된다고 했으니까. 신이 강림했다고 했지? 그렇다면 아기님은 무사하단 얘기네.”
“그래, 츠키나가 군이 키운 신은 무사해. 아니 낳았다고 해야 할까? 그 역할은 9개월이라고 들었어. 의미심장하지 않아? 인간이 아이를 배에 품은 것과 같은 기간이야.”
레오는 묵묵히 아기님을 떠올렸다. 에이치는 아기님과 지내지 못해서 저런 말을 하는 거다. 오히려 레오가 작은 신에게 의지해 살아갔다. 마지막 기억은 아픈 모습들 밖에 없다. 고름에 집어삼켜지듯 크지도 않은 몸이 잠식되는 광경. 어떻게 잘 나았을까. 찾아간다고 하면 모습을 보게 해줄까. 아기님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 거부당하는 건 아닐까.
속마음과 다른 이야기를 레오는 불쑥 뱉었다.
“텐시는 의외로 그런 것들을 잘 믿네. 도시에서 왔는데 신이라느니. 현실주의자 아니었어?”
“신은 있다고 믿어. 신에게 사랑받는 자들을 보면 확실히 있지 않을까? 그 신이 나를 봐주지 않는다는 것쯤은 물론 알고 있고. 그걸 혹자는 재능이라고 칭할 수도 있겠지. 신이란 건 정확한 형체가 없기도 하고. 하지만 츠키나가 군, 이곳은 좀 특별해. 츠키나가 군은 직접 봤겠지만 이곳은 신이 내려서는 땅이잖아?”
“헤에, 이 마을 오컬트 마니아들의 성지였구나.”
“오히려 그쪽 무리들은 이곳을 모를 거야. 위에서 정보를 단단히 통제하고 있거든. 그 혜택을 자신들만이 얻기 위해 섣불리 밝혀지지 않도록. 그렇다면 어디에서 유명할 것 같아? 온갖 부와 명성을 거머쥐고 세상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고 싶은 자들이 이곳을 알고 있어.”
“텐시네 집 같은 곳을 말하는 거야? 어째서?”
“생각해봐. 공기가 좋다는 것 하나 만으로 하나 뿐인 후계자를 이 먼 곳까지 보냈을까? 이런 산골 벽촌에 최신식 설비가 갖춰진 큰 병원이 어째서 있는 걸까? 할아버지는 요양이라는 명목상의 이유만 내게 말했지만 수상한 냄새가 나도 너무 나잖아? 나도 내 나름의 정보망이 있으니까 이것저것 캐봤어. 그리고 어떤 결론에 도달했지. 이곳에 적을 두면 신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는 걸. 너는 이곳에서 태어났으니 아주 자연스럽게 그 은총을 받을 기회를 가지고 있지. 이건 널 폄하하려는 건 아니지만, 어쩌면 츠키나가 군의 천재성도 이 땅에서 태어났기 때문일지도?”
희고 긴 손가락이 미끄러져와 머리를 볼을 차례로 쓸어 만지면서 에이치가 눈을 가늘게 휘며 웃는다.
“츠키나가 군의 고향은 다른 이름으로 아주 유명하거든. 신이 보살피는 땅이라는 이름으로 말야.”
*
레오의 퇴원 수속은 금방 끝이 났다. 의사는 레오에게 과로라는 진단을 내렸고 걸려있는 수액을 맞은 후에 곧장 집에 가면 된다고 했다. 과로로 사흘을 의식불명이 될 수 있는지 의문이지만 레오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은 별로 좋아하지 않고 굳이 이유를 붙여가며 더 있을 필요도 없었다. 병원비는 누가 냈는지 모르지만 이미 완납된 상태. 병실에 남아있는 에이치에게 또 오겠다는 작별 인사를 남기고 레오는 병원을 빠져나왔다.
꽃가루로 코가 간질거릴 정도로 봄은 이미 완연했다. 레오는 천천히 발을 옮긴다. 에이치의 말을 들어서이기 때문일까, 유독 고급 승용차들이 많이 보이는 듯 했다. 그러고 보면 외진 곳인데도 기묘하게 별장이 많았었다. 딱히 관광객이 오는 것 같지도 않은데. 봄이라 들뜰 법도 한데 마을은 여전히 조용하다. 차가 지나가는 소리, 멀리서 들리는 새소리 같은 자잘한 소음만 간간히 들릴 뿐이다. 한동안 아주 조용한 곳에 있었지만 역시 사람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은 뭔가 이상하다.
집으로 가는 대신 레오는 신사 쪽으로 향하는 언덕길을 올랐다. 돌계단이 끝없이 이어진 곳이 묘하게 소란스러워 보였다. 신사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자 평일 낮의 신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참배객들이 있었다. 검은 양복을 단단히 입고 있는 사람들에서부터 기모노를 입은 사람, 뾰족한 힐을 신은 사람들이 제각기 웅성이며 그들의 소음을 만들고 있었다. 이 사람들 전부 아기님을 보러 온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레오는 기웃거리며 신사의 사람들을 찾았다. 전에 신사에 왔을 때 봤던 무녀를 발견하고 레오는 급히 그쪽으로 다가갔다.
“아아, 일어나셨군요. 지금 주지스님께 말씀 드리고 올게요.”
그녀는 역시 종종 걸음으로 사라졌고 조금 후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주지스님이 안쪽에서 얘기하고 싶다고 하셔서요. 같이 가주시겠어요?”
레오는 고개를 끄덕이고 무녀의 뒤를 따랐다.
본전으로 들어서는 웅성거리는 소음들이 사그라지고 가라앉은 공기와 신사의 특유의 냄새가 레오를 반겼다. 어쩐지 익숙한 향기. 아기님과 함께 지냈던 건물에서도 비슷한 향이 났던 것 같다. 전에 루카와 같이 들어갔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커다란 안경을 쓴 주지스님은 가장 깊은 방에 있었다.
“오랜 기간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덕분에 츠카사님은 무사히 자라나셨습니다. 츠키나가 씨가 고생해주신 만큼 신사에서도 그에 따른 합당한 보답을 드릴 예정입니다.”
“츠카사님이라면… 아기님?”
“예, 이제 더 이상 아기가 아니시니까요.”
역시 이름이 있었구나. 레오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혹시 츠카사님을 만날 수 있나요?”
“지금은 좀 힘듭니다. 밖의 사람들을 보셨지요? 모두 츠카사님을 만나러 멀리에서 오신 분들입니다. 일일이 다 만나드리면 아무리 신이라 해도 몸이 남아나시지 않겠지요. 이제 막 땅을 제대로 디딘 참이니 무엇보다 안정이 제일이지요.”
“…그렇군요.”
레오는 납득했지만 섭섭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 아기님, 아니 츠카사님의 상태는 괜찮나요? 제가 쓰러져버리는 바람에…. 한창 피부병 같은 거에 시달려서요….”
레오가 어물거리며 묻자 주지승은 이번에도 담담히 대답했다.
“아주 편안하십니다. 츠키나가 씨가 돌보던 그것은 껍질 비슷한 것입니다. 신의 혼이 땅에 자리 잡기 전에 날아가는 걸 막기 위해 두터운 껍질로 막아둔 거지요. 지금은 그 껍질을 깨고 나오신 상태입니다. 그 즈음에 곁에 있는 자들이 대부분 기력을 뺏기어 혼절 비슷한 현상을 보이는데 츠키나가 씨도 비슷한 경험을 하셨지요?”
“진짜 어디 아픈 게 아니라면 다행이겠네요. 그렇다면 지금은 아기의 모습이 아니겠군요. 원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앗, 곤란한 대답이라면 딱히 안 들어도 괜찮으니까―.”
“아닙니다, 츠키나가 씨라면 들어도 괜찮겠지요. 숨길 것도 아니고요. 신의 모습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정하는 건 당시 지상 곁에 있던 사람의 역할이 지대하지요. 츠카사님의 여러 모습을 기록에서 등장하지만 저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입니다. 이번 츠카사님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계십니다. 모든 것은 당신 덕분입니다. 당신의 선대의 기록도 남아있는데, 그 때도 츠카사님은 사람의 모습으로 내리셨다고 합니다. 역시 츠키나가 가문이라는 말이 절로 나왔지요.”
주지승과 이야기를 마치고 나오면 붉은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경내에는 여전히 사람이 많았다. 그들을 스쳐지나가며 레오는 어쩐지 멍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성취감은 없었다. 레오의 역할은 끝났다. 집에 돌아가서 루카에게 안부를 전하고 다시 답답한 학교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변에 있지만 고요하던 그 날이 덜 외로웠던 것 같다. 현실 감각이 자꾸 멀어진다. 부유하며 걷는 기분이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돌계단의 끝이 보인다. 일상에 돌아왔다는 걸 고하는 것 같았다.
순간 큰 울림이 느껴졌다. 땅 전체가 울리어 레오는 주춤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잔뜩 꽂힌 도리이는 여전히 평온하게 서 있고 발밑의 돌도 여전하다. 하지만 분명히 지진 같은 게…. 생각은 다 이어지지 못했다. 머리에 또다시 강한 울림이 일어난다. 세계가 아니라 레오의 머릿속이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갑자기 높은 곳으로 끌려간 것처럼 숨이 막히고 머리가 꽝꽝 울렸다.
‘토할 것 같아….’
무릎이 풀린다 싶더니 몸이 풀썩 쓰러진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일어나니 기억에 없는 천장. 오늘만 해도 두 번이나 겪는 광경에 레오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병약하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는데 기절만 두 번째라니. 어둠에 익숙해진 두 눈이 거뭇하게 주변을 살핀다. 굉장히 오랜만인 벽지. 레오의 방이었다.
목까지 잘 덮여있는 이불 속에서 레오는 몸을 꿈틀거리며 일어섰다. 방문을 나서면 2층 복도는 어둡지만 1층에선 환한 불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어머, 일어났니? 몸은 괜찮아?”
“…응, 괜찮아.”
부엌에 있던 어머니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하던 설거지를 내버려두고 아들의 안색을 살폈다.
“나 어떻게 여기에 왔어?”
“신사 계단에 쓰러져 있는 걸 마을 사람이 발견해서 여기까지 데려다 주셨어. 퇴원하자마자 신사로 가다니 너무 무리한 거 아니니.”
어머니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며 레오는 머쓱하게 웃었다. 위에서 대단한 걸 한 기억은 없다. 누가 가도 손쉽게 할 수 있는 일들뿐이다. 낙엽 청소와 눈 치우기만 좀 힘들었지, 사실 그건 아기님과 관련이 있는 일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거실에서 신문을 보고 계셨다.
“수고했다.”
여전히 신문을 내리지 않은 채 그의 아버지가 말했다. 레오도 대답했다.
“아, 응. 학교는 어떻게 됐어?”
“사정 설명하고 휴학계 내뒀다. 언제쯤 돌아갈 거냐.”
“루카 보고. 다음 주 주말에 온댔으니까 보고 가야지.”
아기님과 1년을 가까이 있는 동안 루카는 고등학생이 되어 마을 밖에 있는 학교를 다니고 있다. 이 마을에 자신이 할 것은 더 이상 없었다. 어색한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레오는 저녁을 마다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다시 침대로 꿈틀꿈틀 기어들어가 눈을 깜박인다. 목재로 된 건물 대신 베이지색이 엷게 발린 벽지와 익숙한 책상을 바라본다. 그곳에선 심심하면 노래를 불렀다. 외로울 때도 불렀고, 신이 날 때도 불렀다. 낙엽이 떨어져도 불렀고 바람이 지나갈 때도 불렀다. 유일한 청중은 아무 불만도 말하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고요 속에서 들리던 노래는 꽤나 근사했다고, 우쭐거리며 생각하던 나날이 멀다. 고작 며칠만 지났을 뿐인데. 지금 그렇게 커다랗게 노래를 부른다면 어머니가 올라올 것이고 아버지의 불편한 기침 소리를 들을 것이다. 레오는 이불 속으로 몸을 파고들었다. 익숙한 정적인데도 전혀 익숙하지 않았다.
*
“그래서 주말까지만 여기 있고 다음날 학교로 돌아갈 거야.”
에이치와 레오가 앉아있는 벤치에 엷은 분홍빛 꽃잎이 살랑살랑 떨어진다. 새삼 느꼈지만 이곳의 병원은 크기 치고는 환자가 많지 않다. 날이 좋은 날인데도 병원 정원에 있는 건 에이치와 레오 둘 뿐이었다.
“생각보다 빨리 돌아가네, 츠키나가 군.”
“여기서 특별히 할 것도 없고. 한 학기를 통째로 빠졌으니 틀림없이 유급이다~! 일 년을 더 다녀야 한다니 최악이야….”
“츠키나가 군은 소원을 빌지 않아?”
“소원, 글쎄….”
에이치는 레오에게 알려주었다. 이곳이 특별한 이유, 그것은 신이 강림했을 때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한다. 그것이 어떤 소원이든, 무조건. 물론 그에 따른 대가 역시 따라온다.
평생 놀아도 굶어죽지 않고 펑펑 돈을 쓰고 싶다는 소원을 빈 자가 있었다. 당시의 신은 그 소원을 들어주었다. 업계를 독점하던 기업의 주식이 곤두박질치면서 소원을 빈 남자가 퇴직금 대신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야만 했던 주식이 아주 큰 폭으로 상승했다. 그는 순식간에 부자가 되었고 그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이러한 주가변동의 이면에는 해당 기업의 임원진과 대표 가족의 몰살이 있었다. 그들을 태운 비행기가 원인 모를 고장을 일으켜 바다에 그대로 곤두박질쳤고 그들의 시체조차 제대로 건질 수 없었다. 소원의 대가는 이런 식이라 했다. 하나의 소원으로 한 사람이 행복을 얻는다면 그 만큼의 사람이 혹은 그의 배가 되는 사람들은 불행해졌다.
물론 여기에 모인 자들은 그 리스크도 개의치 않아 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소원을 적을 수 있는 자들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에 한한다. 즉, 그 사람의 적이 이 마을이어야 할 것. 이 때문에 많은 유력 인사들이 이곳에 들어오기 위해 무던히 노력을 한다고 한다. 그 노력의 결과로 교통이 지독히 불편한 이 시골 마을이 사실은 상당히 부유한 마을이라고 에이치는 설명했다. 그리고 신을 모시는 이들을 중심으로 한 종교도 비밀 결사 모임처럼 굳건해지고 폐쇄적이 되고 있다고.
그런 그들에게 오랜 기다림 끝에 신이 내려왔다. 물밑으로 마을 사람을 포섭하여 소원을 위탁하는 모양도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소원은 사랑 당 하나로만 정해져 있기에.
무엇이든지 이루어지는 건 확실히 매력적이지만 레오는 홀로 행복한 것보다 다 같이 행복해지는 게 좋았다. 그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것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역시 난 딱히. 생각나는 것도 없고….”
팔짱을 끼고 다시금 생각해보지만 여전히 답은 똑같다. 에이치에게 그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레오는 자신의 소원에 대해 생각해봤다. 지구상의 모두가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다. 유치원생이 할 법한 것이 당장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무리인 건 뻔했다. 핏줄로 연결된 가 간의 사이도 이렇게 엉망진창인데. 세계 모두가 행복해지려면 여기를 넘어선 우주 전체가 고통스러워지지 않을까. 결과적으로 레오가 바라는 건 없다.
“텐시는 건강해지는 거?”
“응. 이것만은 내 어떠한 능력으로도 고칠 수 없는 거니까. 신이 손을 내밀어 준다는데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고.”
레오는 에이치의 환자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 집보다 병원에 오래 있는 삶을 레오는 감히 헤아릴 수 없다. 그가 얼마나 건강한 몸을 원할 지는 레오도 손에 잡힐 것처럼 느껴졌다. 그의 노래에는 생명에 대한 열망이 담겨 있어 더 아름다웠다.
“나 소원으로 텐시가 건강해지는 거 쓸까?”
레오가 불쑥 말했다.
“그래도 괜찮겠어? 하나 뿐인 소원이야.”
“원래 소원을 빌 생각도 없었고. 내가 될지 모르지만 이왕이면 친구가 건강해지는 게 좋으니까. 다만, 그 소원을 통해 누가 불행해 질지는 신경 쓰이지만….”
“굉장히 기쁜 말이지만 조금 더 심사숙고하는 게 좋지 않을까? 집의 비원이 있을 수도 있고, 츠키나가 군이 자주 말한 사랑스러운 여동생에게도 간절한 소원이 있을 수도 있을 지도 모르잖아?”
“루카땅은… 이걸로 얘기해 본 적이 없네. 루카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지도 모르겠어.”
“나는 경솔한 결정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 물론 츠키나가 군의 마음은 아주 기쁘지만.”
문득 레오는 에이치의 얼굴이 아주 가깝다는 걸 깨달았다. 놀라 숨을 들이켠 사이 긴 속눈썹을 가진 푸른 눈이 휜다. 입술에 짧게 닿고 떼어지는 감촉에 기시감이 떠오른다. 입술과 입술이 부딪히는 감각, 뜨거운 숨. 밤에 닿았던 그 때와 달리 지금은 웃고 있는 푸른 눈동자가 선명하게 보인다.
“그보다 친구끼리는 이런 거 하지 않잖아. 그래도 너와 나는 친구야? 츠키나가 군.”
“바―보. 당연히 친구지.”
“이런, 나 또 차인 거야?”
농담을 말하는 목소리가 가볍다. 즐거워 보이는 에이치 뒤로 분홍 꽃잎이 하늘하늘 떨어진다. 또 모든 것이 꿈결 같다. 설레었던 그 날이 다시 재현되는 것처럼. 과거를 다시 곱씹어 보는 대낮의 꿈. 레오는 어쩐지 그것을 감흥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
에이치의 병문안을 마치면 레오에게 더 이상 할 일은 없었다. 발길 닿는 데로 아무데나 쏘다니다가 결국은 집으로 도착한다. 부모님은 아직 동사무소의 일이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빈 집에서 신나게 작곡이라도 하는 건 어떨까. 신사에서 내려온 이후로 작곡은 거의 손도 대지 않았다. 그 집에 놓고 온 수많은 명곡은 어떻게 되었을까. 승려들이 그 곡의 가치를 알아본다면 소중히 모셔놨을 테고 그렇지 않다면 진작 불태워 버렸을 지도 모른다. 어쩐지 후자가 됐을 지도 모르는 마음에 풀이 죽는다. 레오의 음악을 환영해 준 사람은 루카와 에이치뿐이었다.
“다녀왔습니다.”
텅 빈 집에 인사를 하고 허리를 숙여 신발을 벗는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곳은 더 이상 집이 아니었다. 레오는 눈을 깜박였고 손으로 비비기까지 했다. 눈앞에 펼쳐진 건 좁은 나무 복도. 너무나 익숙한 곳이었다. 레오가 9개월 동안 살아온 곳. 아기님과 함께 했던 작은 신사 속에 레오는 있었다.
“어? 어…?”
얼떨떨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볼을 꼬집어도 풍경은 변하지 않는다. 레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신사 내부는 그렇게 넓지 않다. 화장실이 하나, 방은 두 개. 가장 넓은 방에 큰 창문이 있고 스오의 요람은 보통 그곳에 있었다.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진다. 레오는 스오와 함께 있던 방문으로 달려가듯이 들어갔다.
그곳엔 누군가가 있었다. 가지런한 붉은 머리칼이 팔꿈치까지 내려와 있는 작은 아이. 루카 정도의 체형으로 보이는 아이는 붉은 빛의 화려한 전통 기모노를 입고 있었다. 얼굴은 확인할 수 없다. 레오에게 매번 식사를 날라다 주던 남자처럼 종이 한 장이 아이의 얼굴에 붙어 있었다. 간단한 한자 대신 뭔가 복잡한 것이 문양처럼 그려져 있다. 그 아이 옆에는 텅 빈 나무 요람이 있었다. 레오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스오…?”
아이가 움찔 놀란다.
“왔구나, 왔어.”
아이의 입이 크게 벌어진다 싶더니 그렇게 말했다.
“드디어 불렀어요. 해냈어. 어서, 어서 이걸 떼어줘요. 이게 있어서 아무 것도 못해. 어서요.”
아이가 자기 얼굴에 있는 종이를 가리켰다. 스스로 뗄 수 없는 걸까? 레오가 아이에게 다가갔다.
“정말 스오야?”
“네, 스오 츠카사. 당신의 스오예요. 줄곧 만나고 싶었어. 어서 얼굴을 보게 해줘요.”
여자아이의 높은 목소리가 노래하듯이 흘러나왔다. 레오는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에 종이의 질감이 닿았다. 그냥 평범한 종이 재질인 것 같은데 아이는 꼼짝 못하고 있다. 레오는 그것을 잡아당겼다. 종이는 아주 손쉽게 떼어졌고 동시에 화륵하며 타오르더니 금세 사라졌다.
종이 밑으로 드러난 아이는 보라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에이치처럼 화려한 외모는 아니지만 아주 단정하고 도자기 인형처럼 곱다.
“너무 늦었어요. 왜 이제 왔어요?”
어린 아이가 기모노자락을 펄럭이며 칭얼거렸다. 정말 츠카사일까. 레오는 꼼짝도 못한 투박한 돌덩이 같던 아기를 떠올린다.
“내가 온 거야? 눈 뜨니까 여기던데.”
“힘들었어요. 이 종이가 방해해서 계속 실패만 했지만. 당신이 올 생각을 안 하니까요, 날 떠날 궁리만 하니까. 너무해요. 낳고 나니 내가 미워졌어요? 그래도 난 당신의 신이에요. 이름도 모르는 나의 신자, 당신의 이름을 말해줘요. 내 이름만 달랑 정해놓고 자기는 숨기는 게 어디 있어요? 어서 말해요.”
아이의 목소리는 아기 때와 같았다. 앞에서 이야기 하고 있지만 사방에서 울린다.
“앗, 자기소개도 안 했었나? 미안…. 이름은 츠키나가 레오.”
“레오, 레오. 츠키나가 레오.”
소리 내어 이름을 곱씹다가 활짝 웃었다.
“얼굴도 알고 이름도 알았으니 모두 해결이에요. 좋아요, 이제 소원을 말해줘요.”
“에, 갑자기 소원?”
“네. 당신의 소원을 이루어주고 대가로 당신을 가질 거예요.”
보라색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계속, 계속 기다렸어요. 상냥한 레오, 사랑스러운 레오. 당신과의 나날은 꿈에 그리던 안식이에요. 그 안식을 줄 수 있는 건 당신뿐이에요. 레오는 작고 귀여운 여자아이를 좋아하죠? 당신의 하나뿐인 동생처럼. 열심히 생각했어요. 당신에게 어울리는 짝이 되기 위해서 말이에요. 어서 소원을 말해요. 그리고 혼례를 치러요. 나는 당신의 신이고 동시에 반려가 될 거예요. 어서 말해 봐요.”
자칭 스오 츠카사는 오랜 기간 동안 말하지 못했던 것이 분했던 것처럼 재잘재잘 쉴 새 없이 떠들었다. 그 모습이 지저귀는 새 같다. 들뜬 목소리는 좋았지만 내용은 그러지 못했다. 레오는 고개를 저었다.
“뭔가 엄청 갑작스러운데 미안, 스오. 나 딱히 소원이 없어.”
“…그럴 리가 없잖아요? 소원이 없는 인간은 없어요.”
“그럴 지도 모르지만 스오에게 빌어서까지 이루고 싶은 건 없는걸.”
“거짓말이에요. 레오 나의 반려가 되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그래서 지금 도망치려고 이러는 거죠?”
아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가 불만이에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요?”
“아니, 아니. 잠깐. 소원은 그렇다 치고 반려는 좀 더 신중히 선택해야 하는 거 아냐? 스오는 막 태어났고 어리고, 그리고 신이잖아.”
“신에게 신중한 선택을 말하는 거예요? 레오는 역시 재밌네요…. 하지만 이 모습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올까요?”
아이는 그렇게 말했고 레오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붉은 생머리에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여자 아이 대신 갈색의 곱슬머리에 연둣빛 눈동자를 가진 여동생이 눈앞에 있었다.
“이러면 되는 거죠? 소원은 나중에 천천히 생각해도 좋으니까, 먼저 하나가 돼요.”
목소리도 루카의 목소리다. 루카가, 아니 츠카사가 제멋대로 기모노 앞섶을 풀기 시작한다. 레오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하, 하지 마! 루카땅 몸으로 그런 짓 하지 마! 스오 바보!!”
필사적으로 눈을 가리며 레오가 외쳤다. 어이없다는 듯이 츠카사의 목소리도 꽝꽝 울린다.
“지금 나한테 바보라고 한 거예요? 레오면 다예요?! 너무해요!!”
“루카땅은 그런 거 안 해. 지금은 스오가 잘못한 거야!”
“맨날 동생이 좋다고 해놓고 왜 내가 하니 싫어해요? 레오는 제멋대로예요!”
“생리적으로 무리! 스오 아직 루카땅 모습 하고 있는 거 아니지? 빨리 그 모습부터 어떻게 해줘!!”
작은 신사를 떠나가라 지르던 두 사람의 목소리가 잠잠해진다. 레오는 속으로 10까지 세고 살그머니 손을 내렸다. 루카의 모습 대신 붉은 머리칼의 아이가 볼을 부풀리고 앉아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레오는 아이에게 다가갔다.
“그러니까 루카는 내가 제일 사랑하는 여동생이야. 거기에 반려니 그런 건 없어. 물론 루카땅이 결혼 상대를 데려오면 아주 엄정하게 심사할 거지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나도 사랑하는 여동생으로 하면 되잖아요.”
“내 여동생은 루카땅 하나뿐인걸.”
한숨과 함께 벌어진 앞섶을 잘 여며준다. 아이의 고운 미간은 접힐 채 펴질 줄 모른다.
“그럼 남동생은요? 남동생이면 사랑해 줄 거예요?”
“스오는 여자애잖아. 애초에 남자도 아니고. 앗, 혹시 아까 루카처럼 휙휙 변할 수 있는 거야?”
“…아뇨. 그건 환상을 덧댄 거고 내 모습은 그대로예요. 레오가 사랑하지 않는 스오 츠카사 모습이죠.”
“으으, 그거 아니야. 내가 스오를 싫어할 리 있겠어? 엄청 좋아해. 사랑한다고!”
“말로만.”
아이가 입을 삐죽거렸다. 어떻게 달래줘야 할까. 제멋대로 신을 두고 레오는 고민에 빠진다. 아이는 그새 꿈질거리며 레오 품을 파고들었다.
“나만 레오가 엄청 보고 싶었나 봐요. 속상해. 레오가 쓰러져서 밑으로 가버린 후에 오지도 않고.”
꿍얼꿍얼 대는 목소리가 품을 타고 울린다. 레오는 어정쩡하게 그 등을 쓸었다. 한참을 중얼거리던 아이가 문득 말을 멈춘다. 화나 보이는 보라색 눈동자가 똑바로 레오에게 향하고 있었다.
“레오, 입, 아.”
“아?”
손이 두 볼을 무자비하게 잡아당긴다 싶더니 얼굴을 불쑥 들이밀고 냄새를 킁킁 맡는다. 곧 단정한 얼굴이 험악하게 변했다.
“이제 나 말고 또 다른 신을 키워요?”
“어…, 그거 무슨 말?”
“다른 사람한테 숨 넣었잖아요. 아직도 입에 고약한 냄새가 남아있어요. 이 마을에 신은 나밖에 없을 텐데.”
“잠깐만…. 텐시를 이야기하는 거야?”
“텐시? 천사요? 정말 다른 신이 있어요?”
“아니, 텐시는 별명이고. 분명 신이 아니고 사람이 맞을 거야. 신이 자주 입원할리 없잖아?”
“인간이라면 더 용서할 수 없어요. 레오는 어째서 숨이 필요하지 않은 인간한테 숨을 넣어요?”
아이는 아주 화가 많이 나 보였다.
“넣었다기 보단 내가 당한 건데….”
“레오의 숨은 츠카사만의 것이에요. 도대체 그런 짓을 왜 하는 거죠? 숨을 넣을 필요 없는 인간에게 헛되이 불어 넣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요?”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애정을 주고받을 때 입술을 맞물리고 스오가 말하는 숨을 넣기도 해.”
“애정이요…? 레오는 그 사람과 애정을 나누는 사이인 거예요?”
아이는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여전히 분노 일색인 얼굴이지만 어쩐지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니, 아닐 거야. 그 녀석은 남 놀리기를 좋아하니까 장난으로 그런 걸 테고 나도 지금은 아무 감정 없어. 텐시는… 내가 병에 걸려있다는 걸 깨닫게 해준 사람이고 친구야. 그것 뿐.”
“레오는 건강하잖아요.”
아이는 삐뚜름하게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전히 불퉁한 볼이 귀여웠다. 레오는 가만히 아이의 화가 풀리길 기다렸다. 한참을 바닥을 보고 있다가 레오가 말했다.
“일단은 믿어 줄게요. 대신 나도 해줘요. 레오의 숨 받고 싶어요.”
보라색 눈이 도전장을 내민 것처럼 기세등등하다. 그건 어렵지 않은 부탁이다. 아기님일 때는 그게 일이었다. 레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고 아이에게 몸을 굽혔다. 흘러내린 옆머리를 조심스레 귀 뒤로 넘겨주고 입술을 가져다 댄다. 긁힐 것 같은 피부 대신 젤리처럼 아주 말랑한 촉감이 입술에 꾹 눌러 닿는다. 숨까지 넣어야 할까. 망설이다가 입을 벌리고 작은 한숨 같은 걸 섞는다. 아이의 몸이 푸득 떨렸다. 루카와 비슷한 체구. 기분이 이상해져서 레오는 얼른 입술을 뗐다. 아이의 흰 볼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제 화 안 낼 거지?”
“…레오 하는 거 봐서요.”
여전히 퉁명스럽지만 그래도 화는 꽤 풀려보여서 레오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한참을 가만히 있던 아이는 척척 일어나 레오의 품에 다시 폭삭 안긴다.
“이번만 용서해 줄게요. 다시는 누구에게도 숨을 주면 안 돼요.”
“네, 네, 알겠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저도 모르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신에게 하면 안 되는 태도인 걸까? 그렇지만 아까 무례한 온갖 짓은 다 한 기분이다. 아이는 레오의 품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확실히 아기 때보다 훨씬 커진 몸이다. 레오는 아이를 고쳐 앉고는 노래를 부른다. 예전에 여기에 있을 때 만들어 둔 노래였다. 제목은 벌거벗은 산에 내리는 흰 먼지.
“응, 이 노래 좋아.”
어린 신이 만족스럽게 중얼거렸다. 손가락으로 가슴을 톡톡 두들기며 박자를 맞추다가 흥얼흥얼거리며 같이 따라 부른다.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기묘한 정적 속의 온건한 나날. 그 때엔 레오 혼자 불렀지만 이제는 같이 불러주는 이도 있다. 창에는 붉은 노을이 가득 차고 있다. 황혼에 섞여 붉은 잎이 간간히 흩날린다.
“아.”
레오가 노래를 멈추자 품 안의 작은 신이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스오, 꽃놀이 가자. 마당에 벚꽃 피었지?”
“꽃놀이? 꽃을 보러 가는 걸 말하는 건가요?”
“응. 마당의 벚나무가 피면 같이 보기로 했는데 스오가 아파서…. 아 아픈 게 아니랬던가? 여튼 볼 상황이 아니었잖아? 아직 해도 안 떨어졌으니까 지금이 기회야!”
아이는 정확히 이해를 못한 것 같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나무보다 한참 품이 넓었던 나무였다. 무성히 뻗어나갔던 가지에 수도 없을 붉음이 장식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꽃은 분명 스오와도 아주 잘 어울릴 터였다.
그날부터 작은 신, 스오 츠카사는 하루가 멀다 하고 레오를 불렀다. 어디를 가다가도 정신 차려 보면 신사 앞에 있었다. 츠카사가 있는 곳은 성역으로 지정되어 일반인들은 함부로 출입할 수 없다지만 레오는 매번 츠카사의 능력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그곳에 있을 수 있었다.
츠카사와 특별한 것을 하는 건 아니었다. 아이는 심심하다고 레오에게 매달렸고 그런 츠카사와 하는 일들은 대부분 태평한 일이었다. 작곡을 하면서 노래를 부르거나, 낮잠을 자거나, 산으로 산책을 나가거나. 츠카사와 숲 속을 함께 다니면 산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지곤 해서 자주하지 않는 편이 산에 산의 주민들에겐 좋을 지도 모른다고 레오는 생각하곤 했다.
오늘은 전화를 끊고 방문을 열자마자 신사로 이동돼 있었다. 토요일에 올 거라며, 맛있는 거 사들고 간다는 여동생의 사랑스러운 통화였다. 여동생과 함께 하는 주말이 끝나면 레오도 원래의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 레오가 학교를 가도 츠카사는 불쑥불쑥 레오를 데려올까.
“어….”
“어서 와요, 레오.”
언제나처럼 높은 목소리 대신 조금 낮은 목소리가 레오를 맞이해 레오는 우뚝 멈춰 섰다. 방석 위에 반듯하게 앉아있는 건 츠카사가 맞지만 어깨를 덮고 있던 붉은 머리칼이 사라졌다. 목덜미가 훤히 드러날 정도로 짧게 잘린 머리를 한 그 모습에 레오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스오, 머리 잘랐어?”
“아, 네. 엄청 허전한 느낌이네요.”
츠카사의 손이 머리 밑을 쓸어보았다. 짧아진 머리칼이 살랑인다.
“왜 잘랐어? 일본 인형 같이 예쁘장했는데.”
“그래요? 레오 취향이 그쪽일 줄 몰랐다면 안 잘랐는데…. 남자는 짧은 머리가 많으니까 자르는 게 낫지 않을까 하고요. 그래도 걱정 마요. 금방 길어요.”
“아니, 그것보다… 스오 여자애 아니었어? 목소리도 변했잖아….”
츠카사의 목소리는 명백하게 레오 또래의 남자아이 목소리였다.
“신에게 성별이 어디 있어요? 인간들은 남녀가 쌍을 이루니 당연히 여자로 몸을 만들기 시작한 거고요. 근데 레오는 싫다니까. 맞출 수 있는 쪽이 맞춰야죠.”
“남자끼리도 결혼 못 해, 스오.”
“이익! 그럼 그 남자랑은 왜 그랬어요? 남자까리 결혼 못하는데! 다 알아놨어요, 레오랑 숨을 교환한 사람. 텐쇼인 에이치. 레오는 그런 색이 반쯤 날아간 사람이 취향이에요?”
“아니, 그러니까…. 취향이라기보다 얼굴이 예쁘다고 해야 하나…. 물론 스오도 엄청 예쁜 얼굴인데 뭐랄까 장르가 좀 다르지. 텐시가 서양의 왕자님 같다면 스오는 일본 공주님?”
“뭡니까, 그거. 괜히 기분 나쁘네요. 당신 엄청 무례한 거 알아요? 신이랑 인간을 비교하는 인간은 레오 밖에 없어요. 거기다 소원도 없고. 빨리 소원을 빌어서 얌전히 저에게 오면 될 텐데.”
츠카사가 홱 고개를 돌렸다. 레오는 난처하게 볼을 긁적였다. 반응이 잘못 되었을까? 상대가 큰 맘 먹고 헤어스타일을 바꿨는데 ‘예전 머리가 더 잘 어울렸어’ 같은 말을 해버린 게 아닐까. 어쨌든 하루아침에 변한 건 아닌 것 같고. 며칠에 걸쳐서 준비를 했는데 확실히 상대 반응이 별로면 맥 빠질 만도 하고. 신도 생각보다 만능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레오는 츠카사 옆에 딱 붙어 앉았다. 옆을 흘끔 보다가 츠카사는 뾰루퉁하게 고개를 돌렸다. 어깨를 살살 부딪치며 레오가 말했다.
“음, 하지만 지금 모습도 예뻐. 진짜야, 스오.”
인정해야 했다. 남자로 변한 것뿐인 츠카사가 레오에게 한없이 취향이었다. 하지만 츠카사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신의 예쁘다, 좋아한다, 사랑한다가 한없이 가볍다는 건 요 며칠로 아주 잘 알았어요. 항상 그렇게 다른 인간들도 꼬시나요?”
“엑, 진심인데. 내가 말하는 마음들은 언제나 진심이야!”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말에 무게가 있다면 당신의 말은 깃털보다 가벼울 거예요. 이렇게 가벼운 사람을 반려로 맞아들인 제가 잘못이죠.”
“나 벌써 반려된 거야?”
“된 거나 마찬가지죠. 당신이 버티고 있지만 그것도 얼마 못갈 테고. 이런 관계를 뭐라고 하더라, 사실혼? 맞죠, 사실혼?”
“어, 글쎄…. 뭔가 좀 다른 기분도 들긴 하는데.”
신과의 결혼 신고를 받아주는 기관이 과연 있을 것인가. 그렇게 고민하다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하도 혼인, 혼인하고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말을 들었기 때문일까, 너무 자연스럽게 그런 상상을 한다. 정말로 이 신과 혼례를 치르는 말도 안 되는 망상.
츠카사는 저런 걸 어떻게 아는 걸까. 설마 사람들에 섞여 드라마라도 같이 보는 걸까. 마냥 아이로만 보이는데도 신은 신인지 레오가 생각 못한 말들을 하기도 해서 깜짝깜짝 놀란다. 애초에 아기가 아닐 수도 있는데. 그니까 신이란 건 좀 더 이상한 쪽에서 전지전능할 수도 있다. 모든 걸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알 수 있을 지도 모르는 존재.
“레오는 바보니까 별로 반응을 기대한 건 아니에요. 그보다 해요. 뽀뽀.”
그러니까 저번에 새로 배운 단어는 뽀뽀였다. 숨 나누기라는 단어보다 좀 더 직설적이다. 아이의 어리광을 받아주는 것처럼 레오는 츠카사에게 짧은 뽀뽀를 하곤 했다. 달래는 의미도 있다. 귀여운 동물을 쓰다듬어 주는 느낌으로.
동물도 그랬지만 츠카사는 눈을 감지 않는다. 얼굴이 가까이 다가와도 보라색이 가득 녹아든 눈동자가 똑바로 레오를 직시한다. 그 눈동자도 사랑한다. 레오는 츠카사를 아주 많이 사랑한다. 좋아하고, 사랑한다고 할 때 그 말에 거짓이 섞인 적은 없었다. 루카를 사랑하듯이, 츠카사도 사랑한다. 모두 소중한 사람이다. 한 쪽은 신이지만.
츠카사의 어깨를 잡고 조심스레 입술을 가져다 댄다. 얼굴이 가까워져도 츠카사는 눈을 감지 않았다. 어쩐지 레오가 부끄러워져서 눈을 감고 입술을 가져다 댄다. 말랑한 입술이 서로 맞닿고 벌어진다. 숨을 줘야 하는데, 이상하게 혀가 닿는다. 그냥 신체기관이 닿았을 뿐인데 이상하게도 오싹한 기분이 든다. 츠카사는 피하지 않았다. 마치 손을 잡는 것처럼 혀가 얽혀왔다. 츠카사의 손이 허리를 끌어당긴다. 레오는 입을 떼려고 했지만 츠카사가 허락하지 않는다. 입 안에 단 숨이 가득 찬다. 뽀뽀라는 접촉의 범주를 한참 벗어났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뿌리치고 싶지도 않다. 이제 여자 아이가 아니니까. 똑같은 스오 츠카사인데도 가로 막고 있던 이상한 거부감이 사라진다. 츠카사의 말대로 신에게 성별은 없고 역시 문제는 레오 쪽에 있다.
조금 후에 레오는 몸을 밀어내며 고개를 틀었다. 막혀 있던 호흡이 원활해지자 급하게 숨을 들이킨다. 츠카사는 숨이 찬 기색은 없다. 평상시처럼 하얀 얼굴로 레오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힘들어요?”
“아, 아니. 좀 덜 익숙해서.”
“덜 익숙하다뇨. 뽀뽀가? 매번 해줬잖아요.”
“이번엔 길었잖아. 나는 숨을 쉰다고.”
“저도 쉬어요. 코로 쉬면 되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하던데.”
“…다른 사람들이라니. 스오 혹시 이 집에 있는 부부생활 엿보고 그런 거 아니지…?”
“엿보다뇨, 말이 좀 그렇네요. 전 이 마을의 신이에요. 제가 지켜보는 건 당연하다고요.”
신은 드라마 같은 걸 본 게 아니었다. 실제로 보고 있었다.
“너, 그거 범죄…! 아, 아니 인간이 아니니 법을 어긴 건 아니려나. 집 안에 있는 거미가 보고 있는 느낌인가….”
“이젠 거미 취급까지 가요? 다들 내 앞에선 절 하느라 정신없는데, 이 무례한 인간.”
츠카사가 볼을 쭈욱 잡아당긴다. 제법 힘이 실린 손에 레오가 항복을 외쳤다. 얼얼한 두 뺨을 문지르다가 레오는 문득 어느 사실에 눈치챘다.
“스오, 손도 커진 거야? 저번보다 엄청 아픈데.”
“아무래도 골격이 다르긴 하죠. 저 당신과 같은 나이의 남자라고요.”
츠카사의 손바닥을 서로 마주대어 본다. 마디 하나 못 미치게 작았던 손이 지금은 거의 비슷하다. 얼굴은 그대로인데. 레오는 불만스럽게 츠카사를 바라보았다.
“이러다 나보다 더 커지는 거 아냐?”
“그럴 수도 있죠. 레오와 달리 제 성장판은 열려있으니까요.”
“내 성장판 이미 닫혔어?! 이럴 수가, 소원이 생길 것 같아…!”
“소원을 쓰는 건 언제든지 환영이에요! 얼마든지 말만 하세요. 2미터의 키를 원하시나요?”
“아, 아니. 되게 악덕업체에게 덜미를 잡히는 기분이니 사양하겠습니다….”
츠카사는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고 레오는 내심 진지하게 소원에 대해 고민한다. 에이치가 말했듯이 자신의 능력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라면 키가 그에 딱 부합하지 않을까. 미래의 자신이 클 거라는 자신감이 있던 레오에게 츠카사의 말은 여러모로 충격이 아닐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역시 소원을 빌미로 바로 츠카사에게 저당 잡힐 것 같고, 만약 그렇다면 그건 역시 자신의 키보다 건강을 바라는 에이치에게 주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레오는 소원을 비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다. 자식에게 소원을 비는 부모는 없다. 자신의 소원을 투영해 키우는 부모는 있다지만 자식에게 엎드려 빌며 돈이 생기게 해달라고 빌지 않는다. 그런 느낌이다. 레오는 그저 츠카사와 이렇게 하릴없는 말을 주고받고, 가끔 얼굴을 보고, 츠카사가 행복하게 웃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이다. 이게 츠카사에게 빌고 싶은 소원이다. 그런 소원도 츠카사는 받아줄까? 알 수 없었다.
*
레오는 달력을 보고 놀랐다. 금요일. 내일이면 루카가 오고, 모레면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 신선놀음에 도낏자루가 썩는 줄도 모른다더니 레오가 딱 그 꼴이었다. 실제로 츠카사가 신이라는 게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었지만.
루카를 보는 건 좋지만 학교로 돌아가는 건 싫었다. 학교로 돌아가도 이렇게 자주 볼 수 있을까. 수업 시간에 갑자기 뿅 하고 사라지면 곤란하겠지만 사실 그것도 상관없어진 기분이다. 다른 신을 모시는 학교로 가야 한다는 걸 들으면 츠카사가 어떤 반응을 할지도 궁금했다. 바람피우지 말라는 소리를 할까? 하지만 이미 그 신에게는 신부들이 잔뜩 있다. 신부와 수녀는 신과 결혼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이렇게도 생각해 보면 사실 신과 결혼하는 것은 그렇게 특이할 것도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니까 신과 이런 걸 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을 거란 이야기.
“레오, 무슨 생각해요?”
“…주말 이후의 미래?”
“그 미래에 당연히 제가 있겠죠? 그래도 지금에 집중해 줘요. 지금 당신 옆에 있는 건 나잖아요.”
입술에 가벼운 키스가 날아든다. 촉촉 하고 닿는 것을 입을 벌고 등을 끌어당긴다. 츠카사는 바로 응답해 주었다.
이제 츠카사는 뽀뽀와 키스가 뭔지도 알고 더 한 것도 안다. 정확한 단어는 모를 지라도 서로 사랑을 나눌 때 어떤 단계를 밟으며 흥분을 고양시키는지 알고 있다. 아마 마을에 있는 모두가 선생님일 것이다. 왠지 레오가 대신 사죄를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서로 입술을 겹치고 상대의 호흡 뿐 아니라 혀도, 타액도. 남김없이 삼킬 것처럼 탐하면서 자연스럽게 몸을 더듬는 스킨십이 이어진다. 츠카사는 아주 능숙하게 움직인다. 체구가 비슷해진 그는 어렵지 않게 레오를 이불에 눕혔다. 옷을 풀어헤치고 드러난 살결에 사랑스럽다는 듯이 입술을 내린다.
‘왜 사람들이 이렇게 하는지 알겠어요. 레오, 당신의 반응이 너무 사랑스러워요. 지금까지 이런 걸 하지 않고 어떻게 참아왔던 거예요? 이렇게 좋아하면서.’
선생님들이 그런 말도 가르쳐? 라고 묻고 싶은 걸 레오는 애써 참았다. 점점 단계를 밟아가는 츠카사를 말릴 기분도 들지 않았다. 아이의 성장에 대견해하는 것도 아니다. 신이 반려라고 칭하는 기분에 취해 받아들이는 걸지도 모른다. 어쨌든 레오는 츠카사를 사랑한다. 고집쟁이에 떼쓰기도 잘하는 아주 귀여운 신이 원한다면 자기 몸뚱이는 얼마든지 주어도 좋았다.
“…역시 분해요. 이런 레오의 모습을 보는 게 나만이 아니라니.”
“지, 금은 스오 밖에, 없는데….”
“과거의 츠키나가 레오도 온전한 당신이죠. 가능했다면 과거의 당신을 붙잡아서 여기에서 나가지 못하게 했을 거예요. 어디에서 그 깃털 같은 말들로 사랑을 고백하고 누군가가 여기를 파고들기 전에, 내가 먼저. 불공평해요. 왜 당신은 먼저 태어난 거죠?”
아이는 커져도 아이다. 칭얼대는 그를 끌어안고 푹신한 머리칼에 입을 맞췄다. 물론 이걸로 기분이 풀리기를 기대하는 건 아니었지만 조금은 진정이 될지도 모른다.
그의 부모에겐 유감이게도 레오의 첫 경험은 신학교에서 이루어졌다. 레오의 동성애 기질을 알게 된 아버지가 불 같이 화내며 그의 ‘병’을 고치겠다며 넣은 학교에서 말이다. 그곳엔 레오와 같은 성을 가진 이 밖에 없었고, 그들은 종교로 억눌리기엔 제일 성에 관심이 많은 무리였다.
에이치를 만나 그를 좋아하는 걸 자각함과 동시에, 지금까지 한 번도 여성의 몸에 아무 흥미가 없었다는 걸 깨달은 중학생의 어느 날. 루카를 지키기 위해서 라고 생각했던 기사도는 처음부터 기만의 모양을 가지고 있었다. 철저하게 폐쇄된 고딕 양식의 건물 속에서 레오는 병을 치유하지 못했고 오히려 더 악화시키고 있었다. 부모님의 부탁을 받은 학교는 레오에게 병을 낫게 하기 위한 교육을 나머지 공부처럼 계속 시켰다. 길을 잘못 들었을 뿐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거룩하고 엄숙한 노래와 함께 비춰주는 동성애자들의 말로를 되새기면서 레오는 종교에 몸담을 거라고 말하던 룸메이트와, 운동부 소속 아이와, 레오의 노래에 흥미를 가진 아이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계속 가졌다. 스테인드글라스의 색색 유리의 빛을 받으며 빛나는 거대한 십자가 아래에서 몸을 섞은 적도 있다. 쾌감에 아우성치면서도 그렇게 생각했다. 병을 고쳐주세요, 고쳐주세요. 죄책감과 배덕감이 뒤섞인 액체를 바닥에 흩뿌리면서 가증스러운 소원을 빌었었다.
이 작은 신은 무슨 교리를 가졌는지 모르겠지만 전혀 개의치 않아했다.
‘전 잘 모르겠어요. 인간을 만든 게 제가 아니어서 일수도 있겠지만, 글쎄요. 예전에도 레오에게 병이 있다고 들었을 때 의아했어요. 레오는 아주 건강해요. 그런 당신이 병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인간 기준의 이야기겠지요. 뭐가 되었든 츠카사는 당신이 덜 거부감을 느끼는 쪽으로 맞췄을 거예요. 이건 내가 당신과 만나면서 결심한 일이기도 하고요. 당신이 인간을 싫어한다 해도 나는 어떠한 모습으로도 몸을 만들 수 있어요.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레오는 나를 선택하면 돼요. 내가 레오를 선택했듯이.’
“오늘은 역시 다른 생각을 많이 하네요.”
츠카사가 볼을 꼬집는다. 과거의 츠카사와 현재의 츠카사가 겹친다. 레오가 작게 사과했다.
“미안.”
“무슨 일 있어요?”
걱정스러운 눈동자에 레오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
익숙한 것처럼 굴지만 어쩐지 익숙해지지 않는 정사 후에 들리는 건 서로의 온건한 호흡이다. 조금씩 잦아드는 숨소리 대신 계속 귓가에 입술을 내리는 소리만이 울렸다. 그 소리만이 울려야 했다.
문득 덜컹이는 소리가 경종처럼 들려왔다. 레오는 몸을 굳혔고 츠카사가 고개를 들었다. 방문은 닫혀있지만 이 집의 많지 않은 방문자가 복도만 거닐고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츠카사님, 문안 여쭈옵니다.”
신사에 있는 주지승의 목소리였다. 레오가 다급히 말을 하려 할 때 문득 무언가가 츠카사와 레오를 덮고 있다는 걸 눈치 챘다. 하늘하늘한 커다란 베일 같은 것이 그들이 누워있는 요를 포함하여 방의 절반을 반투명하게 덮고 있었다.
“들어오세요.”
바로 앞에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레오가 앞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얼굴에 종이를 붙이고 있는 긴 붉은 머리칼을 가진 여자아이가 앉아있었다. 처음 츠카사의 모습이다. 여자 아이는 레오가 있는 방향을 보더니 입꼬리를 올려 살짝 미소를 짓는다.
“분신이에요.”
이번엔 등 위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허리를 잡고 있던 츠카사가 몸을 늘어뜨린다. 무게가 온전히 느껴졌다.
“이게 덮여있는 한 저 중은 아무것도 눈치 못 채요. 제가 이렇게 뽀뽀를 계속 해도요.”
일부러 소리 내서 하는지 쪽쪽 거리는 소리가 자못 크게 울렸지만 방으로 들어선 중은 츠카사와 레오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도 않는다. 어쩐지 포복자세로 레오는 그 모습들을 지켜보았다. 중은 츠카사의 대역에게 깊숙이 절한 다음 이야기를 꺼냈다.
“모레에 예정된 집회는 알고 계시겠지요.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이번에야말로 가엾은 민초들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셔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고대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몇 번을 말하지 않습니까. 저는 저를 돌봐온 인간의 소원을 먼저 들어드릴 겁니다. 그 사람이 아니면 싫습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츠카사님은 그 인간의 이름조차 모르지 않습니까.”
“당신이 말해주면 바로 알게 되는데 뭐가 문제입니까?”
“츠카사님이 이룰 수 있는 소원량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먼저 다른 이의 소원을 들어주시면 원하시는 대로 그 자의 이름을 밝혀드리겠습니다.”
“몇 번이나 반복한 이야기도 지치네요. 저는 그 사람의 소원을 들어드릴 겁니다. 다른 이의 소원은 전혀 내키지가 않기도 하고요.”
아이와 승려의 공방을 지켜보던 레오가 흘끗 뒤에 있는 츠카사에게 시선을 던진다.
“저게 무슨 소리야?”
어쩐지 목소리를 죽여 묻게 된다. 그에 비해 평온한 츠카사의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제가 매번 주지승과 하는 실랑이에요.”
“이름을 모른다니, 이미 알고 있잖아? 거기다 이름은 무슨 상관이 있어?”
“저 자는 레오가 여기에 찾아오고 있는 걸 모르지요. 그 얄팍한 봉인이 깨졌다는 것 또한요. 소원을 빌기 위해선 제가 그 사람의 이름과 얼굴을 알고 있어야 해요. 저 자는 그걸 모든 사람에게 의도적으로 숨기고 있죠. 많은 사람들이 소원패를 아무리 걸어도 제가 이뤄줄 수 있는 건 이름과 얼굴을 알고 있는 자 뿐이에요. 그리고 중은 저에게 한정된 사람의 사진과 이름만 알려주지요. 그는 그런 식으로 저를 제어하려고 해요. 아마도 그의 종교에 도움이 되는 자들이나, 아니면 보여주기 식인 사람들을 골라 이 자들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강요합니다.”
여전히 소리 높여 오가는 대화 속에 레오는 물었다.
“스오는 그 말을 따르기 싫은 거야?”
“물론이죠. 그리고 제가 하는 말도 사실이고요. 나는 당신의 소원이 아니면 들어주기 싫어요. 어떤 소원이든 당신의 소원을 이룬 다음에 생각할 거예요. 두 번째 소원도 당신이 비는 소원으로 정할 거고, 세 번째도 마찬가지예요. 그리고 소원의 대가로 당신은 더 강하게 나에게 묶이겠죠.”
목덜미에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 떨어져 레오는 몸을 움츠렸다. 다른 두 사람의 대화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나를 길러준 사람입니다. 어미의 소원을 먼저 들어드리는 마음이 뭐가 잘못됐지요?”
“그 자는 어미가 아닙니다. 당신은 이 마을이 품었고 마을의 태반에서 태어난 신입니다. 츠카사님은 그 자를 소중하게 생각하시겠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그자는 형식적인 임무를 다하고 당신을 한 번도 보러 온 적이 없지 않습니까. 거기까지인 자입니다. 소승이 드리는 말은 다 츠카사님을 생각하여 드리는 말입니다. 미련을 놓으시는 게 이롭습니다. 그 자는 이번 주말에 마을을 떠납니다. 스스로 외지인으로 살아가길 결정한 것을 봐도 모르겠습니까?”
아, 마지막 말은 사실이다. 당장 코앞의 일. 고향을 버릴 생각은 없지만 어쨌든 마을을 떠나야 한다.
“따분한 이야기네요. 더 이상 들을 가치도 없어요.”
츠카사의 낮은 목소리가 아주 가까이 들린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마자 입술이 닿는다. 열어 달라는 듯이 치열을 훑던 혀가 곧 깊숙하게 들어온다. 혀끝을 감아 올려 저도 모르게 소리를 흘린다.
“―스오, 아직 있어, 사람….”
“어차피 못 봐요. 듣지도 못하고. 내가 당신의 이런 모습을 보여줄 것 같아요?”
배 밑에 손을 넣어 허리를 바짝 끌어당기며 츠카사가 말했다. 흠칫거리며 몸을 빼려는 레오를 츠카사가 단단히 잡아왔다.
“레오, 새로운 관객이 생겼으니 더 예쁘게 울어주세요. 노랫소리를 듣지 못하는 저 가엾은 중은 자신이 청중인 것도 모를 테지만요.”
*
주지승은 아마 소득 없이 돌아갔을 것이다. 그들의 대화에 집중하기엔 집요하게 파고드는 아래의 자극에 레오는 모든 걸 포기하고 츠카사에게 매달려 달콤한 울음을 내기 바빴다.
그들이 돌아가고 몇 번 이어지던 비역질이 끝나고 나서 레오는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까까지 달콤하게 속삭이던 목소리에 날이 바짝 서 있다. 보라색 눈동자가 진위를 확인하듯 계속 레오를 바라보고 있다. 큰 동공에 담긴 건 불안과 의심이다.
“주지 스님이 한 말 중 일부는 맞아. 이번 주말에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야 돼. …미리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껄끄러운 말이 겨우 목구멍에서 흘러 나왔다. 츠카사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레오, 당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요? 이 땅을 떠난다고 했죠. 그건 내게서 떠난다는 말이랑 똑같은 거예요. 나는 이곳의 토지신이에요. 내 힘이 닿는 곳은 이 땅에 있는 자들에만 한해요. 나 또한 이곳을 벗어날 수 없어요. 당신은 지금 츠카사를 버리겠다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어느새 손이 레오의 팔을 꽉 잡고 있었다.
“돌아간다고요? 당신은 애초에 이곳 사람이 아니었던 거예요? 내가 있을 곳은 당신 곁인데 왜 당신은 그렇지 않아요? 불공평해요. 자의가 아니라 해도 나를 거둬준 건 당신이잖아요. 나를 이렇게 키운 건 당신이에요, 레오.”
그 목소리는 지엄하신 신의 음성 같은 것이 아니었다. 어미를 잃고 우는 아이의 목소리로 츠카사가 레오를 붙든다.
하지만. 흔들리는 마음과 달리 상반된 목소리가 말한다. 레오가 마을에 남아 있는 게 과연 츠카사를 위하는 일일까? 신사의 사람들은 마을에 남아있기로 결정한 레오를 가만히 내버려 둘까? 레오를 이용해 좀 더 츠카사를 수월하게 조종하려 하지 않을까. 레오가 어떻게 피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가족이 남아있다. 아까 본 모습으로는 승려가 신의 목소리를 전한다거나, 그가 모시는 신에게 헌신적이라는 낌새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게 츠카사의 족쇄가 되느니 멀리 떨어진 편이 좋지 않을까.
무엇이 정답인지 모른 채 머리가 마구 뒤엉킨다. 레오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츠카사는 상처를 받은 것 같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레오의 품으로 파고들고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가지 마세요. 레오, 가지 않는다고 말해줘요. 네? 더 이상 떼쓰지 않을게요. 심심하다고 계속 부르지 않을게요. 가끔 찾아와 줘도 좋아요. 그걸로 만족할게요. 그러니 날 떠나지 마요, 레오….”
목소리에 물기가 스며들어간다. 아이처럼 엉엉 울기 시작하는 츠카사를 레오가 토닥였다. 등을 두드려주니 츠카사의 울음이 더 심해졌다. 그럼에도 입은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막막한 감정을 끌어안고 레오는 계속 어린 신을 보듬었다.
울며 매달리던 츠카사가 지쳐 곯아떨어지고 신사는 더욱 정적에 잠겼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붉어진 하늘만큼이나 붉게 부은 츠카사의 눈두덩을 레오가 가만히 어루만졌다. 츠카사의 손은 여전히 레오를 붙들고 있었다. 망설이다가 가만히 그 손가락을 하나하나 푼다. 손가락은 생각보다 쉽게 떼어졌고 레오는 주변에 널린 옷을 주워 입었다. 이불을 끌어다 츠카사의 어깨까지 잘 덮어주고 레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지막으로 돌아본 츠카사의 눈가는 여전히 빨갛다. 한참을 그 얼굴을 보다가 결국 레오는 발을 뗐다.
현관에 레오의 신발은 없었다. 화장실로 가려다가 갑자기 이곳으로 잡혀온 게 느릿하게 생각난다. 문을 열면 작은 신사의 마당 대신 다른 곳이 펼쳐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레오는 문을 열었다. 그곳은 역시 신사의 마당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레오의 집도 아니었다.
“어라,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던 거야? 츠키나가 군.”
익숙한 모습이 눈앞에 있었다. 벤치에 앉아 유달리 빨리 사라지는 산골의 노을을 보고 있던 에이치가 레오를 보며 놀란다.
“텐시.”
“급히 나왔나 보네? 신발도 신지 않고. 그렇지 않아도 너에게 전해주려 했는데. 예상보다 신사의 치들도 행동이 빠르네.”
“무슨 말이야?”
“도망쳐 나온 거 아니었어? 신사 관계자들이 츠키나가 군을 찾고 있던데. 중을 화나게라도 한 거야?”
쿡쿡 거리며 에이치가 물었다. 레오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텐시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신사 사람들이 날 찾아? 왜?”
“그건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데. 츠키나가 군에게만 말하자면 신사에 심어놓은 인물들이 몇몇 있거든. 그쪽을 통해 츠키나가 군의 수배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들었어. 이 마을은 작으니까 소동을 일으키면 금세 눈치 챌 테니… 츠키나가 군은 이번 주말까지만 마을에 머문다고 했으니까 일을 일으킨다면 마을을 빠져나가는 이동 중일 거라고 생각해서 미리 일러주려고 했었지. 이렇게 빠르게 움직일 줄은 몰랐지만.”
레오는 숨을 들이 삼켰다.
신사의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그들은 레오가 이 마을을 순순히 떠나게 두려 하지 않았다. 만약 마을 밖에서 레오를 잡는다면 츠카사의 힘은 통용되지 않는다. 레오가 외지에 격리되어 있는 편이 츠카사를 더 쉽게 다룰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마을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무사히 나간다 해도 끝까지 도망칠 수 있을까? 어쨌든 지금은 집에 돌아갈 수 없다. 어떻게든 덜미가 잡힐 지도 모른다. 마을의 임원 가문이기도 한 츠키나가 가는 신사에 매우 협조적이다.
“텐시, 오늘밤만 여기서 재워줄 수 있어?”
에이치는 선선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명한 선택이야, 츠키나가 군. 그들도 병원을 수색하지는 않겠지. 한다고 해도 텐쇼인이 머무는 병실을 감히 침입할 자들은 없을 거고 말이야. 환영할게, 츠키나가 군.”
그는 예나 지금이나 흥미로운 것은 절대 마다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병원에 찾아오는 이들은 없었다. 에이치도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람을 들이지 말라는 명령을 수하에게 내려둔 상태였다. 레오는 얼마 남지 않은 낮을 집어삼킨 밤이 오고 에이치가 먼저 잠들 때까지 있다가 한참 뒤에 누웠다. 보조 침대에 있는 얇은 이불을 덮으며 레오는 눈을 깜박였다. 몸은 피곤했고 마음도 무거웠다. 병원 공기에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이 답답한 기분이 병원 때문이 아닌 건 잘 알고 있었지만.
‘뭐가 잘 안 되고 있는 건 확실하지. 신이랍시고 내세운 건 예쁘장한 인형 같은 아이뿐인데 그 아이가 보여준 건 아무 것도 없어. 여러 불만과 함께 신이 맞긴 하냐는 의심도 슬슬 나오고 있거든. 중들은 이번 일요일 밤에 있는 집회로 모든 불만을 종식시키려는 느낌인데, 여기에 츠키나가 군이 연루돼 있을 지도 모르는 건 굉장히 흥미로워. 말해주지 않을래? 츠키나가 군은 뭘 숨기고 있지?’
신이 아끼고 있을 지도 모르는 사람. 그것이 전부다. 물론 에이치에게 한 대답은 ‘신사의 아르바이트를 잠깐 했을 뿐이야’ 였지면.
내일이면 루카가 온다. 그것조차 말리고 싶었다. 이 마을은 이상하다. 이곳에 속한 이들중에 비밀을 아는 자들은 신이라는 이름의 원망(願望)의 항아리에 눈이 멀어 있다. 어떻게든 그 안에 손을 집어넣어 자신들이 원하는 보물을 끄집어내려고 하고 있다.
츠카사는 자신을 키운 건 레오라고 했다. 주지승도 신의 모습에 기여하는 건 곁에 있던 사람의 영향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레오는 아주 외로운 신을 만들어 버렸다. 정이 많고 눈물도 많은 신은 사람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것보다 한 사람의 손길만을 원하고 있다. 어린 아이다. 그 어린 아이는 어른들 틈에 홀로 있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부서지고 말 것이다.
뒤엉킨 생각 속에서 레오는 현실과 닮은 꿈을 꾼다. 짙은 밤하늘 아래에 잔뜩 모여든 흰 가면을 쓴 사람들, 어둠을 불로 물리치려는 듯 군데군데 세워진 화톳불이 간간히 불씨를 뿌린다. 그들의 정점에 있는 건 한 어린 아이. 올곧은 자세로 앉아있는 아이의 눈에 비치는 건 신을 외치는 무리들. 욕망이 꿈틀거리며 아이를 집어삼킬 것처럼 타오른다. 어떤 어둠을 고르실 겁니까. 제가 추천하는 소원은 이러한 것들입니다. 역시 가면을 쓰고 있는 승려가 누군가의 여러 사진과 소원패를 내민다. 아이는 그것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검은 욕망들이 소원패에 잠들어 있다. 그중에서 가장 흉측하게 꿈틀거리는 걸 아이가 집어 든다. 레오는 깨닫는다. 아기님 시절에 나던 고약한 냄새는 저 소원패에서 나오고 있다. 한 개만 집어 삼켜도 코를 찌르는 악취가 함께 할 것이다. 아이는 입을 벌리고 그것을 삼키려 든다. 레오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안 돼!
꿈은 갑작스럽게 깨진다. 현실인지 꿈인지 구분 되지 않는 경계 속에서 숨만 몰아쉰다. 소독약이 가득한 공기가 레오를 누른다. 레오는 몸을 웅크렸다. 어디선가 전자 기기가 웅웅거린다. 문틈으로 들어온 찬바람이 레오를 괴롭힌다. 눈을 꼭 감아버린다. 이번엔 울음소리가 들렸다. 얼굴을 엉망으로 적실 정도로 굵은 눈물이 쉼 없이 쏟아지는 서러운 울음소리. 울지 마, 울지 마. 누군가의 어깨를 끌어안고 달랜다.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손길이 애달프다. 아무리 달래도 어린 신의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
“응, 지금 마을이 굉장히 어수선해서 돌아오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새학기니까 바쁘잖아? 걱정 마, 어디 아픈 곳 하나도 없어. 응, 루카도 밥 꼭 잘 먹고, 너무 무리하지 말고. 친구들이랑도 사이좋게 지내고, 아프면 꼭 병원 가고. 응? …아니, 내가 어딜 가겠어. 가봤자 학교 아닐까. 정말 별 일 없어. …그럼, 루카. 잘 지내.”
전화를 끊고 레오는 한숨을 쉬었다. 병원 옥상에서는 기분 좋은 봄바람이 불고 있었다. 바람의 손길에 나무들이 조금씩 꽃비를 내리는 풍경은 꽤나 근사했다. 빌린 핸드폰을 돌려주러 가는 대신 레오는 벤치에 그걸 얌전히 둔다. 그리고 미리 챙겨온 메모지에 ‘텐시, 고마웠어’ 라고 적었다. 메모가 날아가지 않도록 핸드폰 밑에 잘 껴두고 레오는 기지개를 쭈욱 폈다. 넓지 않은 인간관계가 이럴 때는 편하다.
옥상으로 내려가는 문을 활짝 열고 그곳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병원으로 내려가는 계단 대신 익숙한 나무 복도가 레오를 맞이했다. 이 기묘한 능력은 츠카사의 능력이지만 이상하게도 레오의 소망에 따라 움직인다. 이미 이걸로도 여러 번 소원을 사용한 게 아닐까 싶지만 츠카사는 매번 소원을 빌라고 조른다. 이건 카운트가 되지 않는 걸까?
신발도 신지 않고 돌아다닌 통에 잔뜩 더러워진 양말을 벗어 던진다. 어쩐지 가벼워진 걸음으로 레오는 나무 복도를 디뎠다. 얼마 가지 않아 넓은 방이 나오고 방석에 앉아있는 신의 모습이 보였다.
단정한 자세, 동그란 머리, 그리고 여전히 부어있는 눈. 신도 붓기는 어쩔 수 없는 건가 싶어서 레오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어떻게 보면 참 허당인 신이었다.
츠카사는 레오가 오는 걸 알고 있었다. 흘끗 보고 다시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부루퉁하게 말했다.
“왜 왔어요. 작별 인사라면 안 들을 거예요. 멋대로 가버리세요.”
“정말? 인사 안 하고 막 가도 돼?”
레오가 짐짓 물으면 한참을 가만히 있던 츠카사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싫어요. 가기 전까지 많이 얘기해 해줘요. 노래도 불러줘요. 머리도 만져줘요. 예쁘다 예쁘다 하면서 안아줘요.”
시선을 맞춰오는 보라색 눈동자가 예쁘다. 레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츠카사에게 다가가 안아주면 바로 매달려왔다. 바싹 안겨 코를 비비며 잔뜩 어리광을 부린다. 그러면서도 가지 말아요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나 여기 온 거 소원 빌러 왔는데, 괜찮아?”
“…! 무, 물론이죠! 아무렴요. 소원의 대가는 전에 말했지요. 레오, 어서 말해줘요. 당신이 꽁꽁 숨기고 있던 그 소원을요.”
츠카사의 눈동자가 기대에 차 반짝거린다. 레오는 고개를 끄덕였고 진지하게 말했다.
“지구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예쁜 얼굴이 또 삽시간에 일그러진다.
“…뭐예요, 그 말도 안 되는 말. 마지막까지 절 놀리러 온 거예요? 불가능하다는 거 알고 있잖아요.”
“아, 역시. 소원을 한다면 이걸로 하고 싶었어. 세계 평화는 지구인 누구나가 원하는 거니까. 물론 그만큼 힘들다는 거겠지만…. 그렇다면 이 소원은 될까.”
레오는 츠카사의 손을 잡았다.
“네가, 스오 츠카사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보라색 눈동자가 둥그렇게 커진다. 입이 벌어지고 무언가 말을 어물거리려다가 뱉지 못하고 다시 다문다. 동요가 여기까지 느껴지는 모습이 아주 귀여웠다.
“이것도 불가능한 소원이야?”
“그, 그건…. 잘 모르겠어요. 나는, 레오만 있으면 되는데. 이건 내 힘이 아니고, 레오의 힘이 필요해요…. 제가 억지로 레오를 잡아 둔다고 해도 레오는 행복하지 않겠고, 그럼 나도 행복하지 않겠죠. …레오의 소원은 제가 이룰 수 없는 소원이에요.”
어물거리며 말하는 츠카사의 어깨가 점점 처졌다. 마지막 희망마저 빼앗긴 모습이다. 레오는 그런 그에게 천천히 말했다.
“그럼 내가 협조할게.”
“네?”
“내 소원이야. 내 소원이니 이루어지게 내가 협조할게. 나는 스오 옆에 있고 싶어. 하지만 문제가 있어. 내가 이 마을에 있으면 너는 더 부자유스러워질 거야. 나와 얽힌 사람들 모두가 휘말릴 거고. 스오는 괜찮아? 내가 이곳에 있어서 스오는 억지로 다른 사람의 소원을 들어줘야 할지도 몰라.”
“그건, 방법이 있어요.”
츠카사가 말했다. 그는 들떠 보였지만 동시에 조심스러웠다. 눈치를 살피듯이 신중하게 말을 잇는다.
“레오를 내가 숨기면 돼요. 그 때 레오와 나를 숨겨줬던 천 기억해요? 그 천을 레오에게 계속 씌우면 돼요. …대신, 레오는 천천히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돼요. 당신은 모두의 기억 속에서 점점 사라져 나중엔 아무도 레오가 있었다는 걸 기억 못할 거예요. 나를 제외한 모두가요.”
조심스럽게 츠카사가 손을 마주 잡았다. 불안과 기대가 손끝에 잔뜩 묻어 있다. 레오는 두 눈을 깜박였다. 허탈할 정도로 간단했다.
“뭐야, 완벽한 방법이 있었잖아! 아, 괜히 고민했네. 스오에게 더 빨리 말할걸.”
“…레오는 모두가 당신을 잊어도 괜찮아요?”
“물론이지. 루카땅이 날 잊는 건 조금 슬프지만… 괜찮아, 내가 잊지 않으니까. 그리고 스오도 있으니까. 그러면 돼. 계속 함께 있자.”
레오가 함박웃음을 짓자 츠카사의 얼굴도 점점 밝아졌다.
“레오-!”
커다란 개가 주인에게 안기는 것처럼 츠카사가 레오에게 뛰어들었다. 꼭 끌어안는 몸짓에 안도와 환희가 가득했다.
“고마워요, 레오. 레오가 가지 않아서 정말 기뻐요. 레오, 너무 좋아요.”
“스오를 혼자 두기엔 불안하니까. 나라도 괜찮으면 계속 함께 있자. 혼자 두지 않을게.”
“네! 츠카사는 레오와 계속 함께예요.”
어린 신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레오, 마지막으로 인사하고 올래요? 그 정도는 기다릴 수 있어요. 아냐, 인사하고 싶은 사람에겐 다했어. 그러니까 지금도 괜찮아. 정말이죠, 레오? 말 무르기 없기에요. 저희 계속 함께잖아요, 그럼 저기에 더 깊이 산으로 들어가요. 레오가 없을 때 좋은 곳을 봐뒀어요. 마을 산책도 괜찮을 지도 몰라요. 레오도 거미의 기분을 느끼는 거예요. 그거 언제까지 담아둘래, 스오도 은근 뒤끝이 있구나? 신에게 무례한 레오가 잘못한 거죠.
소풍을 가는 아이들처럼 들뜬 목소리들이 속삭이듯이 오갔다.
곧 츠카사가 허공에서 하늘하늘한 천을 꺼냈다. 중력을 무시하는 것 같은 그 천은 츠카사의 손짓에 맞춰 천천히 레오의 머리에 덮였다. 레오는 문득 그것이 신부의 베일 같다고 생각했다. 천을 매만지던 츠카사가 속삭였다.
“레오, 사랑해요.”
얼굴을 잡고 조심스레 닿는 입술을 레오는 기꺼이 받아들인다. 하객은 없는, 온전한 둘만의 결혼식이었다.
*
한 시골 마을에서 고등학생이 행방불명이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전날까지 여동생과 전화를 주고받았다던 소년은 말 그대로 마을에서 연기처럼 사라졌고, 유일한 단서는 산 속 깊숙이 있는 작은 신사에서 발견된 양말뿐이었다. 그 신사는 불상 하나만 놓여 있을 뿐 사람이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에, 마을에서는 카미가쿠시(神隠し)를 당했다는 소문이 무성하게 돌았다. 결국 소년의 유해조차 발견하지 못한 채 실종사건은 미제로 남고 말았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지금, 사라진 소년을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그저 카미가쿠시에 대한 전설만이 어렴풋하게 남았다.
+
아주 가끔 이상한 예감 같은 것이 드는 날이 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은 더운 여름날에 갑자기 밖에 나가봐야 할 것 같다던가. 그런 예감이 들면 츠키나가 루카는 매번 움직였다.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오옷, 도망치지도 않고 얌전히 있네? 착한 녀석~!”
매미소리만 시끄럽게 울리고 아무도 돌아다니지 않을 뙤약볕,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담벼락에 있는 고양이를 만지며 소란스럽게 구는 사람이 있었다. 짧게 묶인 주황색 머리가 남자가 크게 손짓할 때마다 우쭐거렸다. 외부인이 적은 이 마을에서 처음 보는 사람.
“저기….”
“힉?!”
루카가 다가가 말을 걸자 남자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엑, 어째서, 앗, 언제 벗겨졌지?!”
그는 허둥지둥 주위를 둘러보더니 땅에 떨어져있는 흰 천 같은 걸 주워들었다. 곧이어 그가 머쓱하게 루카를 바라본다. 녹색 눈, 날카롭게 올라간 눈. 누가 보면 남매냐고 할 정도로 굉장히 닮은 얼굴. 그리고 이상하게 익숙했다.
“아, 음, 고양이가 있는데 얌전해서. 귀엽지?”
동네에 자주 보이는 고양이였다. 사람 손을 피하는 편해서 먹이를 가져다주는 루카에게도 살가운 행동을 보이지 않는데 이상하게 저 남자에게만은 머리를 비비며 골골대는 소리를 내고 있다. 고양이를 좋아하는데 이상하게도 루카는 남자가 계속 신경 쓰였다. 아주 중요한 걸 잊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루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머쓱해졌는지 남자가 슬슬 뒤로 물러선다.
“아, 너무 시끄럽게 했나? 미안해. 음, 난 이만 가볼게.”
“잠시 만요!”
루카가 급히 남자를 붙잡았다. 우, 아, 앗. 볼썽사나운 소리를 내며 남자가 루카를 쳐다본다. 엄청난 숙맥 같은 반응이었다.
“저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아요?”
말하고 나서야 한물간 헌팅 멘트라는 걸 깨닫고 루카의 얼굴이 붉어졌다. 어째선지 상대방도 같이 붉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뭔가, 굉장히 기뻐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 그거야 모르지! 꿈 속 같은데서 만났을 수도 있고, 정말 지나가다 우연히 볼 수도 있고, 이런 만남을 상상한 걸 수도 있고! 망상의 세계는 아주 넓어!”
이런 작은 마을에서 그런 말들은 있을 수 없지만 루카는 남자의 말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 이렇게 대화하는 게 아주 그리운 기분도 들었다.
“저기, 모르는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도 이상한데 엄청 우연으로 소식을 접해서. 결혼한다면서? 으으, 루카의 판단력을 믿지만 그래도 조금 불안하달까, 섭섭하달까…. 어느 놈팡이인지 자세히 조사했지만 흠이 안 잡혀서 더 찜찜하달까…. 아니, 아니, 앞에 말 모두 취소! …정말 축하해. 루카는 행복해 질 수 있을 거야. 지금보다 훨씬 더―!!”
남자의 말은 굉장히 이상했다. 루카를 아주 잘 알고 있는 듯한 말투. 어쩌면 스토커일지도 모르는데 하나도 무섭지 않다. 마음이 굉장히 소란스럽다. 더운 열기 속에 있는 남자는 굉장히 이상하지만 자신도 이상했다. 지금 당장 울고 싶었다. 저 남자를 붙들고.
문득 루카는 모든 것이 고요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시끄럽게 울던 매미소리조차 사라져 이 세상에 남자와 둘만 남겨진 것만 같다. 남자도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문득 뒤를 돌아본다. 그 뒤에는 아무도 없는데 남자는 방정맞은 손짓을 하고는 다시 루카를 보았다.
“이제 진짜 가볼게. 갑자기 이상한 사람이 나타나서 이상한 소리해서 미안! 루카 결혼하면 이 마을을 떠날 테니까 그 전에 축하해 주고 싶었어.”
루카를 짝사랑하던 마을 사람A 정도로 생각해줘. 남자는 그렇게 농담처럼 말하고 뒤를 돌았다. 루카는 저도 모르게 외쳤다.
“자, 잘 지내고 있죠?!”
왜 그런 소리를 했는지 루카 본인도 이해하지 못했다. 이름도 모를 남자는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햇살처럼 환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이지. 좋은 신을 만나서 엄~청 행복하다고!”
손을 크게 붕붕 휘두르며 작별 인사를 한 남자는 품에 안고 있던 흰 천을 베일이라도 쓰듯이 뒤집어썼고, 그걸로 끝이었다.
루카는 한동안 길가에 멍하니 서 있었다. 매미의 울음소리가 기세 좋게 울리는 걸 멍하니 듣고 있다가 흠칫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왜 여기 서 있는 거지? 누굴 만날 예정도 아니었는데. 그런 루카의 눈에 담벼락에 웅크리고 있는 길고양이 한 마리가 보였다. 삼색 무늬를 가진 고양이는 눈도 깜박거리지 않은 채 어느 한 쪽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루카도 덩달아 그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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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카레오 - 어느 휴양지의 밤
* 츠카레오
* 여행 가서 싸움이라는 주제가 리퀘였는데 언제나처럼 이상한 방향으로 갑니다.
정계 가문으로 깊은 역사를 가진 스오우 가의 외동아들 스오우 츠카사는 돈을 씀에 있어 쓸데없는 낭비와 남에게 보이기 위한 허세를 굉장히 싫어했다. 그와 동갑내기인 탓에 사교계에서 몇 번이나 얼굴을 부딪쳐야 하는 교양이라곤 털끝만치도 없이 한없이 버릇없는 어느 후계자 때문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돈을 허투로 쓰는 건 옳지 않다 여겼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프라이빗 비치를 예약할 걸 하는 후회로 가득 찼다. 대중의 시선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왕족이나 가질 법한 철학으로 적당한 가격의 휴양지를 선택했지만 당연히 이 여름철에 사람들은 가득했고, 더위가 가시는 여름 피서 대신 꽉 들어찬 사람들과 그 부대낌에 피어나는 습기와 짜증이 휴양지를 지배하고 있었다. 옷깃만 스쳐도 싸움이 날 정도의 이 날씨에 파트너 헌팅이라는 사유는 큰 싸움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아니, 그러니까 그럴 의도는 없었다고 재차 말씀 드리는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 자식아! 내가 멀리서부터 똑똑히 봤다고! 죽고 싶어? 그 멀끔한 면상을 좀 터프하게 만들어줘, 엉?”
츠카사는 억울했다. 그럴 의도는 정말 눈곱만큼도 없었기에.
이미 피서고 뭐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서 메이드가 타 주는 홍차가 간절한 차에 문득 코 끝을 스치는 향기가 있었다. 츠카사가 사랑하는 홍차 브랜드처럼 은은하면서도 열대 과일처럼 달콤하다. 가향차라면 반드시 사고 싶을 정도의 향. 사람이 홍차가 아닌 이상 스스로 향을 낼리 없으니 아마도 향수. 츠카사는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곧 선명한 색의 음료수를 무료하게 쪽쪽 빠는 한 남자에게서 그 향이 난다는 걸 깨달았다. 마시고 있는 주스 때문일까도 잠깐 고민했지만 같은 음료수를 든 주변의 사람에겐 그러지 않았다. 츠카사는 다이렉트로 나가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갑작스럽게 죄송한데 여쭤 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남자의 녹색 눈이 데구룩 굴러 츠카사에게 향한다. 이후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쓰시는 향수를 알 수 있을까요?’
‘향수?’
남자가 빨대에서 입술을 떼고 그렇게 되물었다. 곧 자기 어깨 쪽을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어리둥절하게 대답했다.
‘딱히 뿌리진 않았는데. 호텔 샴푸를 말하는 거야?’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잠시.’
츠카사는 에스코트라도 하듯 정중히 손을 내밀었고 남자는 망설이 없이 그쪽에 손을 턱하니 올렸다. 고개를 조금만 숙이면 과연 아까보다 진하게 향이 느껴졌다. 사실 그의 주변으로 다가갔을 때부터 주변이 온통 꽃밭이라도 된 것 같았다. 역시 샴푸는 아닌 것 같다고 말하려는 찰나에 남자의 노호성이 들려왔고 츠카사를 윽박지르는 이 상황에 도달했다.
향수를 묻는 게 그렇게 크나큰 죄인가? 츠카사의 부모님이 이 자리에 없으신게 다행인지 아닌지 모를 상황이었다. 마치 누가 보면 츠카사가 엉덩이라도 만진 것처럼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남자에게 츠카사는 질린 참이었다. 당사자가 그런 게 아니라고 한 마디만 하면 괜찮아 질 텐데 그는 고양이 같은 눈매로 미니 선풍기를 얼굴에 댄 채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그러니까 향수를 여쭤본 참이란 말입니다!”
“향수는 무슨, 그 핑계로 손이나 잡았겠지!”
츠카사의 인내심이 거의 바닥날 순간에 문득 남자가 끼어들었다.
“아하, 너 혹시 알파?”
그건 이 상황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상대방의 눈이 뒤집히기 직전까지 변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어떻게 아셨는지 모르겠지만 이 상황이랑 무슨 상관인가요?!”
“허여멀건한게 꼴에 알파라고?! 지금 당장 네놈을 바다 속에-”
“아아, 저리 좀 빠져봐. 그러니까 알파 맞지? 나한테 향기가 난다고?”
정신 차리면 녹색 눈이 바로 앞에 와 있었다. 호기심인지 무엇 때문인지 반짝거리고 있다. 달큰한 향이 뇌까지 잠식하는 기분이었다.
“나, 납니다….”
“그럼 얘는?”
남자가 분노에 차 있는 남자의 손을 붙잡고 내밀자 츠카사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자, 잘 모르겠는데요…. 그보다 전 향 감별사 같은 게 아닌….”
“재밌네! 좋아, 네 헌팅에 넘어가 줄게. 오늘 밤 같이 있자.”
“레오, 그게 무슨 소리야!”
비통한 비명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레오라 불린 남자는 손을 휘휘 저었다.
“음, 너 아까부터 시끄러웠거든. 일단 장소 선택도 미스. 거기다 이런 사람 많은 곳에서 방치라니, 뭔가 잘해 볼 생각은 있는 거야? 이 뒤는 안 봐도 뻔하지. 이쯤에서 바이바이하자고.”
남자는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레오는 완고한 태도로 몇 마디를 더 붙였다. 잠시 후 그렁그렁한 눈으로 변한 남자는 그대로 울먹거리며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 버렸다. 개그 시트콤이라도 본 것처럼 얼빠져 있는 츠카사에게 레오가 냉큼 팔짱을 꼈다.
“자, 그런고로 책임져 주셔야겠어. 덕분에 일정이 통째로 날아갔다고.”
“무, 무슨 소리십니까?! 그쪽이 멋대로 한 행동이잖아요!”
“헌팅까지 했으면서 빼는 거야~? 설마 나쁜 남자 컨셉?”
아까와는 다른 억울함이 물밀 듯이 몰려와 츠카사는 큰 소리로 외치고 말았다.
“그러니까 헌팅이 아니라고요-!!”
*
“헤에, 엄청 좋은 방이잖아? 알고 보니 엄청 부자였던거~?”
“지금 남은 방이 스위트룸 밖에 없어서잖아요. 이게 다 그쪽 때문입니다.”
츠카사가 부루퉁하게 대답했다. 물론 부모님과 함께 묵은 방 역시 스위트룸이지만 그것까지는 말할 필요는 없었다.
“그쪽이 아니라 츠키나가 레오! 걱정 마, 걱정 마. 나도 돈 많으니까 숙박비는 절반 줄게! 그보다 스오네 부모님은? 같이 왔다면서.”
레오가 하도 헌팅남 헌팅남이라고 부르길래 발끈하여 제 이름은 스오우 츠카사입니다! 하고 외치니 남자는 또 멋대로 스오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헌팅남보단 낫기에 츠카사는 불만을 꾸욱 눌러 삼켜야했다.
“…새로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고 말씀 드리니 오늘은 놀고 오라고 하시더군요.”
실제로 그의 부모님은 꽤나 반색을 했다. 츠카사가 밖에서 친구까지 사귀고 오다니, 여기로 오길 잘했다는 말까지 하셨다. 딱히 친구가 없는 티를 낸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서 여기가 맛있다느니, 사람 적은 곳을 안다느니, 이쪽 풍경이 끝내준다더니 등을 쉴 새 없이 나불거리면서 츠카사를 끌고 다니다가 해가 바다에 잠기자 숙소에 들어가자며 칭얼거렸다. 덕분에 완전히 지쳐버렸다.
“땀으로 온 몸이 엉망진창이에요. 먼저 씻겠습니다.”
“다녀와~”
레오는 스위트룸을 여기저기 구경하느라 바빠 보였다. 저 사람은 지치지도 않습니까. 혀를 내두르며 츠카사는 욕실로 들어섰다. 잠시나마 혼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안도를 느끼며 츠카사는 내리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았다.
‘잠깐.’
츠카사의 행동이 문득 멎었다.
‘이거 위험한 상황 아닌가?’
자칭 ‘헌팅’했다는 사람과 같이 같은 방에 들어왔다. 심지어 침대는 하나. 피곤해서 앞뒤 안 가리고 방을 잡긴 했지만 정말로 위험한 상황이 아닌지? 혼란 속에서 츠카사는 뿌연 욕실을 바라보았다. 정말 이대로 나가도 괜찮을까?
평소에 씻는 것보다 한참을 시간을 끌어 손바닥이 쭈글쭈글해질 때까지 버티던 츠카사는 결국 가운을 걸쳐 입고 쭈뼛쭈뼛 밖에 나갔다. 욕실의 후끈한 공기를 빠져나오자마자 느껴지는 건 예의 츠키나가 레오의 향기. 헌팅이다 뭐다 떠드는 시끄러운 남자와 붙어 있을 수 있었던 건 저 향기가 기분 좋아서이기도 했다. 남자는 아까까지 시끄러웠던 것과 달리 바닥에 깔린 양탄자에 늘어져서 세상 모르게 자고 있었다. 어쩐지 한숨이 나오는 걸 느끼며 츠카사는 레오를 툭툭 쳐서 깨웠다.
“바닥에서 주무시지 마시고 씻고 주무세요. 더럽습니다.”
“…아니, 애초에 스오가 너무 늦게 나온 거고.”
레오는 예상과 달리 쉽게 일어났다. 눈을 비비며 하는 말에 할 말은 없어서 씻고 편하게 주무세요 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했다. 비척비척 걸어가는 레오의 거한 하품 소리와 함께 욕실 문이 닫혔다. 괜히 깨운 게 아닐까? 그냥 바닥에서 자게 내버려둬야 했을까? 하지만 그 사람 땀 냄새도 나고 더러운 건 역시 좀. 씻고 나면 더 노곤해지니 그대로 자버렸으면 좋겠는데. 근데 만약 잠들지 않는다면?
괜히 초조해져서 츠카사는 방 안을 서성였고 물줄기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멈추면 흠칫하고 또 다시 들리는 물줄기 소리에 안도를 반복했다.
이쪽은 헌팅을 부정했으니까 정말 휴양지에서 사귄 친구 개념으로…. 그보다 저 사람 내가 알파인걸 알아챘는데 어떻게? 설마, 설마 오메가….
츠카사는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왜 이 생각을 지금 했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츠카사는 오메가를 만나 본 적이 없다. 애초에 알파와 오메가 자체가 워낙 희귀한 지라 평생 한 번 만날까 말까할 확률이었다. 그걸 또 기가 막히게 이런 곳에서…? 물론 소문은 익히 들어왔다. 그들은 히트 싸이클이 오면 농익은 열매처럼 달콤한 향기를 뿌린다고. 그렇다면 아까 남자가 왜 그렇게 츠카사에게 화를 냈는지도 이해가 간다. 히트 싸이클이 다가온 오메가에게 하필 또 알파가 집적인다면 누구나 그렇게 분노할 것이다. 상식적으로 일반 사람이 향수를 뿌리지도 않았는데 계속해서 그런 향이 나올 리도 없는데.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질렀다.
츠카사는 얼어붙은 채로 욕실 문을 바라보았다. 레오는 그럴 생각으로 여기에 온 것일까?
그 순간 물소리가 뚝 멎었다. 츠카사는 간절히 물소리가 다시 이어지길 바랐다. 혹은 욕조에 담그는 릴렉스한 시간을 가진다던가…. 그러나 허망하게도 문은 벌컥 열렸다. 욕실의 후끈한 기운보다 남자의 향기가 더 빨리 다가왔다. 츠카사는 저도 모르게 자기 하반신을 바라보았다. 아직, 아직 잠잠했다…!
“왜 그렇게 멍청히 서 있어?”
“네? 아뇨? 멍청히 있지 않고 여러 생각 중인데요!”
“와하하! 역시 재밌네, 스오는!”
츠카사와 마찬가지로 가운을 입은 레오가 휘적휘적 걸어와 컵에 물을 따랐다. 츠카사는 저도 모르게 방 안을 살폈다. 침대가 있고, 테이블이 있고, 소파가 있고. 남자가 침대에서 자면 츠카사는 자연스럽게 소파에서 자면 된다. 침착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머리가 핑핑 돌았다. 스오우 츠카사 인생 전대미문의 사태에 조상님이 온갖 신호를 삐용삐용 보내는 것처럼 정신이 없었다. 그런 츠카사와 달리 레오는 평온해 보였다. 들고 온 가방에서 조그만 통을 꺼내고 약 같은 걸 꺼내어 물과 함께 삼킨다.
“…무, 무슨 약을 드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뭐긴, 당연히 억제제지. 향이 질질 새고 있다면 슬슬 하겠다는 소리니까 먹어둬야지.”
츠카사의 머릿속에서 법정에서나 들릴 땅땅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 당신 역시 오메가였나요…? 아, 걱정 마세요. 제가 나갈 겁니다. 제가 나갈게요. 스위트룸 좋죠, 편히 쉬시고 오늘 즐거웠습니다. 그럼 이만….”
가운만 입고 있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옷은 사면 된다, 방은 구하면 된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 여기를 나가야 한다.
츠카사의 행동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어느새 다가온 지 모를 레오가 츠카사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뭘 멋대로 오해하는 거야?”
“오, 오해! 좋은 말이네요! 그러니까 츠키나가 씨는 그럴 생각이 없다는-”
“그거 말고, 오메가 말이야. 누가 언제 오메가라고 했어?”
“네?”
레오의 얼굴이 불쑥 앞으로 다가왔다.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을 지은 얼굴이 츠카사를 이리저리 뜯어본다.
“그래서, 향 아직도 나?”
“네? 네….”
“정말 재밌단 말이야. 좋은 향이 난다고? 스오, 나는 알파야.”
아까 나와 있던 녀석이 오메가. 그런데 그 녀석에게서 향은 못 맡고 내게 난다고?
덧붙인 말에 츠카사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 향은 분명 레오에게서 나고 있다, 당시 그 분노하던 남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는데.
붙잡힌 손이 강하게 끌어당긴다. 멍하니 있는 사이에 레오는 손쉽게 츠카사를 침대 위로 쓰러트렸다. 푹신한 침대 위에서 조명을 등진 레오가 츠카사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고개를 숙여 목가를 킁킁거리며 맡은 레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스오에게도 향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그냥 바디샴푸 냄새인가? 스오도 알다시피 보통 알파끼리는 서로의 향을 경계해. 적대적이란 말이야. 하지만 너는 그렇지 않은 거지?”
츠카사는 부정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가까이 다가온 레오의 향기에 머리가 아찔해졌다. 어쩌면 하반신도 반응을 하고 있을 지도 몰랐다. 대답하지 못하는 츠카사를 레오가 만족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키스라도 할 것처럼 가까이 다가온 얼굴이 은밀하게 속삭였다.
“있잖아, 스오. 알파끼리도 할 수 있을까?”
응? 알려줘.
아주 달콤한 유혹이 속삭이고 있는 것 같았다.
-
※츠카레오 맞음.
알파x알파였습니다! 너무 딴짓이 하고 싶어서 리퀘를 받았고 버스정류장인 저는 이것도 버스로 해볼까로 이어진 결과가...
풍님 주제 감사드립니다! 저도 여행 가고 싶네요...
+추가
존자르르르 풍님께서 이걸로 만화를 그려주셨어요........ 오져버린다!!!!!!!!!!!!!!!!!!!
모두.. 모두 봐주세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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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카레오 - 츠키나가 레오의 죽음
츠키나가 레오에게는 언제나 사랑이 있었다.
주변 하나하나가 모두 보석 같다. 보석은 각기 다른 색과 다른 빛남으로 레오를 황홀하게 했다. 아름다운 것은 사랑해야 한다. 레오는 그것들을 찬양할 능력이 있었다. 그들을 찬양하는 노래마저도 보석처럼 빛났다. 사랑이 가득 찬 세계지만 마냥 아름다운 건 아니다. 바닥에 구를지언정, 결국은 다시 일어나서 빛을 발한다. 같은 가지에서 피어나는 꽃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한 이가 있었으니까 기대대로 꽃을 피웠다.
레오는 다시 오른 무대의 눈부심을 기억한다. 눈물처럼 흩날리는 사이리움의 물결에서 느꼈던 전율, 수많은 이의 시선. 레오는 다시 눈을 깜박였다. 이번에도 수많은 이의 시선이 느껴졌다. 다들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레오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레오는 전율 대신 공포를 느꼈다. 붉게 펼쳐진 버진 로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보석 같은 순간에 레오는 그 어느 때보다 죽음을 느끼고 있었다.
예능을 찍으러 멤버끼리 합숙을 간 날이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조명도 반사판도 그 빛을 내지 않고 속살거리는 소리 대신 풀숲에서 우는 벌레소리가 선명하게 들릴 적 레오는 어둠 속에서 홀로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인스피레이션이 내려온 것도 아닌데 왜 잠이 오지 않는 걸까.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방 안의 가라앉은 공기를 입으로 코로 가늠하고 있을 때, 레오는 자신의 옆자리가 무던히 신경 쓰인다는 걸 그제사 깨달았다. 아마 자고 있을 것이다. 더운 여름에 엄청 지쳐했지만 그만큼 시골 배경에 누구보다 흥분하고 있었다. 귀여워, 귀여워. 우리 막내 너무 귀여워. 팔불출처럼 그렇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닿고 싶어, 그런 느낌. 모두의 숨소리는 고요하다. 잠자리에 든 지 몇 시간은 지났을 거다. 레오는 뒤척이는 척하며 한 바퀴 뱅그르르 굴렀다. 살짝 닿았을 거리면 충분한데 생각보다 가까웠는지 레오는 곤히 잠든 몸과 거의 정면으로 부딪혔다. 끄응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미안, 이렇게 소처럼 받을 생각은 아니었어! 내적 비명은 울리지 않았다. 레오는 숨을 멈췄다. 잠결에 밀어낼 줄 알았던 손은 얌전히 레오를 덮는다. 뭔가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심장 소리가 이 세상의 소리를 잡아먹을 정도로 쿵쿵 울리고 있었다. 죽부인 같은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굴러들어온 자신을 얌전히 안아주는 츠카사 품에서 레오는 몇 번이고 눈을 깜박였다. 이대로 있어도 될까. 잠결이고. 나는 잠결이 아니지만. 냉동 고등어처럼 딱딱하게 얼어붙은 채로 레오는 등에서 들리는 다른 이의 심장 소리를 듣는다. 황홀한 소리였다. 잠에 들 수 있을 리 없었다. 이 소리를 영원히 들어야 했다.
희망은 저도 모르게 피어나고 있었다. 연습 중에 스치듯이 부딪친 손을 피하지 않았고, 눈을 마주치면 동그랗게 떴다가 환하게 웃어왔다. 무슨 일이세요? 무슨 일이냐면 너와 잘 되는 상상을 하고 있어. 물론 그렇게 대답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잠결에 와도 안아주고, 그럼 이 정도 상상은 용서되지 않을까. 팬들의 눈을 피해 모자를 푹 눌러쓰고 선글라스도 쓰고 사람이 적은 곳으로 가 함께 걷는 상상, 카페에서 달콤한 것들을 잔뜩 시키고 행복해하는 너를 보고 있는 상상, 서로의 생일에 단둘이 불을 켜는 상상, 어쩌면 서로 손을 잡고 잔뜩 고양된 눈으로 마주보다가 서서히 가까이 오는 얼굴이라던가....
달콤하지만 부질없는 상상이었다. 레오는 옆을 보았다. 긴 머리칼을 가진 그녀가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붉어진 얼굴로 웃고 있다. 레오는 웃을 수 있었다. 이곳이 무대라면 그 무대를 망칠 수 없었다. 레오는 제법 잘 해내고 있었다. 인사하는 이들에게 웃어왔다. 퍼펙트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행복한 신랑을 그럭저럭 연기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앞에선 모르겠다. 달콤한 상상의 주인공은 여전히 상냥했다. 레오가 기억하는 부드러운 얼굴로 다가와서 결혼 축하한다고 말했다. 그 때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잘 했을 거라는 자신감도 없다.
하객들 속에 어느 보라색 눈동자도 자신을 보고 있을 것이다. 멤버들은 모두 너그러웠다. 나이츠를 망칠 뻔한 그의 결혼식에도 찾아와주었다. 아니면 매스컴이 보고 있기 때문에 그랬을 지도 모른다. 나이츠는 아무 문제없어. 이것만 알아주면 된다. 하지만 역시 츠카사에게 축하 인사는 받고 싶지 않았다.
평소에 아무거나 마시지 말랬는데. 팬이 주는 거니까 더 조심하라고 했는데. 세나 말을 들을걸. 가장 많이 했던 후회였다. 눈을 뜨니 낯선 천장. 머리가 기분 나쁘게 징징 울리고 있을 때 레오는 어리둥절하게 몸을 일으켰다. 싸구려 매트릭스가 기우는 느낌과 함께 레오는 자신이 아무것도 안 입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반사적으로 옆을 봤지만 우려와 달리 옆자리는 텅 비어있었다. 화장실에서도 누가 씻고 있는 기색은 아니었다. 어제 술을 마셨나? 전혀 기억이 없다. 무언가를 먹은 건... 팬이 준 음료였다. 하지만 아무도 없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떨어진 옷들을 주워 입고는 누가 올지 몰라 기다리다가 결국 체크아웃 시간이 돼서 나왔었다. 아마도 이 때였을 거다. 레오의 아이가 생긴 날은.
그 기억마저 흐릿해질 때 소속사에 몇 장의 사진이 날아왔다. 침대에 나신으로 누워있는 남자와 여자, 여러 각도의 사진(남자는 멍청한 얼굴로 잠들어 있다), 그리고 초음파 사진. 그 사진의 주인공은 전혀 기억을 못하는 웃기는 상황. 모텔은 기억나요. 거기서 혼자 자고 있었는데. 이 한 마디로 소속사는 모든 상황 파악을 완료한 듯 했다.
하나씩 하나씩 차근차근 쌓아올려 이룩한 시간보다 무너지는 시간은 훨씬 빨랐다. 그나마 나이츠 전체가 무너지는 건 막을 수 있었다. 레오 하나만 빠지고, 팬과의 결혼으로. 일선에서 물러나지만 뒤에서 작곡으로 멤버들을 지지한다. 멤버 한 명의 공백은 타격이 크겠지만 팬을 건드리고 심지어 임신까지 시켰다는 스캔들보단 나았다. 상대가 원하는 건 하나였다.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매스컴 보도까지 불사하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만큼 사고치고 연락 일절도 없는 한심한 남자를 원한다고 했다....
신부의 배가 더 부르기 전에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레오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여자를 만나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줄곧 이 날을 꿈꿨다는 그녀 앞에서 레오는 그가 줄곧 꿈꿨던 날을 말하지 못했다. 아직도 기억하는 온기가 있는데 이젠 가질 수 없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붉은 융단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왜 이렇게 됐을까, 뭐가 잘못 됐지? 그날 모텔을 나오지 말고 사람을 불러서 해결할걸, 역시 세나 말을 들을걸. 다 멍청했어, 그러니까 그냥 도망치면. 이 자리에서 도망쳐서 없었던 일로 만들어 버리고 사라지자. 도망치는 건 특기니까.
하지만 그러지 못한 건 하객들 사이에 있을 한 사람 때문이었다. 모든 이들 앞에서 도망칠 용기는 없지만 그 한 사람 앞에서 도망칠 수 없었다. 축하한다고, 행복해지라고 했다. 도망치면 행복해질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적어도 여기에선 도망칠 수 없다. 도망 끝에 나이츠의 몰락이 있다면 더더욱.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는 벌거벗은 왕 츠키나가 레오는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신부와 검은 양복을 입은 주례사에게 그가 사랑하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사형을 당했습니다.
로 이야기가 끝날 줄 알았지만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결혼이라는 무덤속에서도 망자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심지어 더 이상 출연하지 않을 뜻밖의 배우까지 함께.
“스오 삼촌~~~”
레오 품에 안겨 있던 아이는 남자를 발견하자마자 보채기 시작했고 작은 발은 땅을 디디자마자 곧바로 달음박질 친다. 남자는 두 팔을 벌려 아이를 끌어안았고 번쩍 안아들었다. 마이쨩 잘 지냈어요? 솜사탕처럼 사르르 녹을 것 같은 웃음이 아이에게 아낌없이 내려지고 있었다. 이곳에선 들리지 않는 속살거리는 소리가 오가고 있었다. 레오는 어쩐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후에 아주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마이쨩, 스오를 너무 귀찮게 굴면 안 돼.”
“하지만 마이는 스오 삼촌이 아주 좋은걸. 스오 삼촌도 그렇지?”
“물론이죠.”
아주 잠깐이다. 자신이 마이였더라면, 저렇게 거리낌 없이 달려서 안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잠깐의 생각이 폭죽처럼 피어오르고 이내 빵! 하는 소리와 함께 사그러든다. 4살짜리 애아빠가 가지기에는 파렴치한 생각이다.
“오늘은 뭐가 먹고 싶어요? 마이쨩이 먹고 싶은 거라면 뭐든지 사줄게요. 두 사람은 운이 좋네요, 오늘 마침 월급날이거든요.”
“아니, 이번에도 얻어먹을 순 없거든. 저번에도 먹었으니까 이번엔 내가 살게.”
“저것 봐요, 마이쨩. 삼촌이 멋지게 뽐낼 찬스를 리더가 가져가려고 해요.”
남자의 장난기 넘치는 눈이 레오에게 닿았다. 상냥한 얼굴이다.
아마 레오 가족 다음으로 츠키나가라 명패가 써 붙인 집에 많이 들렸을 츠카사는 언제나 이랬다. 나이츠 멤버와 모두 데면데면해질 거라 생각했는데 츠카사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예전보다 친밀하게 다가왔다. 아이를 좋아하는 성격인 모양이었다. 아이가 제 발로 걷기 시작할 무렵엔 그 빈도수가 더 늘었다. 츠카사가 이렇게 아이를 잘 보는 지 레오도 몰랐다. 사랑을 받은 아이는 사랑을 더 잘 나눠준다고 하는데, 그런 맥락이 아닐까 레오는 생각했다. 테이블에 앉아서도 자연스럽게 수저를 레오와 마이, 자신 앞으로 놔준다. 셀프로 수저를 두어야 하는 식당에 잘 가지도 않을 거면서 물까지 따라놓고는 눈이 마주치자 미소로 답한다. 레오는 시선을 슬쩍 피했다. 친절을 웃으며 받아들이는 것조차 힘겹다. 그 친절의 끝을 상상할 수 없게 돼서는 더더욱.
“디저트 아이스크림은 어떤 맛으로 드릴까요? 딸기맛, 바닐라맛, 메론맛이 있는데 따님은 무슨 맛을 좋아하시나요?”
직원의 친절한 말은 두 사람을 당혹시켰다. 약간 헛기침을 한 츠카사가 말했다.
“아버지는 이쪽이에요.”
“네? 앗, 실례했습니다!”
허리를 명백히 츠카사 쪽으로 기울인 점원은 화들짝 놀라다가 뒤늦게 레오를 바라보았다.
“마이는 무슨 맛이 좋아?”
“마이는 딸기맛~!”
고개를 들면 딸기맛, 알겠습니다 라고 대답한 점원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황급히 돌아갔다.
“나보다 스오가 더 아빠 같은가봐.”
“리더가 동안인 것도 있겠지만요. 그리고, 리더랑 많이 닮은 편은 아니니까.”
살짝 목소리를 낮추어 츠카사가 말했다. 마이는 식당 밖에서 지나다니는 퍼레이드에 온통 정신이 쏠려 있었다.
“응, 엄마를 닮았지.”
아이의 둥그런 머리통을 레오는 슥슥 쓰다듬었다.
“그래도 셋이 나란히 있으면 한 가족처럼 보이지? 그러니까 내가 입만 다물면.”
“옛날 얘기네요. 예전 리더의 평가였죠? 입 다물면 기품이 느껴진다고 했었나.”
“기품보다 어른스러움이 느껴져야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멀리 들렸다. 꼭 남이 말하는 걸 옆에서 보는 기분이었다. 그랬던 시절도 있었다. 이제 자신의 것이 아닌 이야기 같았다.
츠키나가 레오의 사형은 훌륭히 집행되었다. 이제 이전의 츠키나가 레오는 없다. 이전을 기억하는 사람들 앞에서 그 허상을 흉내 낸다. 그 정도는 자신 있었다. 예전의 자신의 모습을 흉내내는 것 정도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행복한 가정 속의 츠키나가 레오였다. 팬과 연애 결혼이 가능하다는 것, 이후도 문제없다는 것. 레오에게 아이돌의 모습 대신 또 다른 조명이 비춰졌다. 예상하지 못했던 것들이다. 팬들에게 또 다른 꿈을 심어줘야 했다. 지금은 좀 덜하지만 잊을만 하면 매스컴이 찾아왔다. 예능에도 나와야 했다. 그의 아내는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레오는 거절해선 안되었다. 나이츠를 은퇴하면서까지 이뤄낸 결혼이 불행덩어리여선 안됐다. 나이츠가 해산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끝까지 나이츠를 아름답게 빛내야 했다.
“사실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리더는 리더인 걸요. 실컷 떠들어도, 가만히 있어도, 어떤 행동을 해도, 어떤 곳에 있어도 당신이란 사람이고요. 신경 쓸 것 없어요.”
반듯한 유닛의 막내는 이때도 이런 소리를 했다. 그런 점을 레오는 사랑했었다. 무엇을 해도 츠키나가 레오, 너무 좋은 말이었다. 그런 말이 적용되지 않는 인간이 된 지금은 더더욱.
“지금 무슨 생각해요?”
레오는 그 질문에 너무 늦게 반응했다는 걸 깨달았다. 입이 열기도 전에 날카로운 마찰과 함께 얼굴이 돌아갔다. 레오는 저도 모르게 뺨에 손을 가져갔다. 잔상처럼 남은 열이 화끈거렸다.
“날 앞에 두고 딴 생각 했어요?!”
물기가 가득 담긴 눈으로 그렇게 말했다. 아니, 아니. 레오는 고개를 흔들었다. 시야 너머로 둥그런 가슴과 결을 따라 완만한 곡선들이 보인다.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나신이 눈앞에 있다. 관능적인 장면에서 침대 위의 신입 배우는 처음 카메라를 받은 것처럼 압박감에 시달린다. 어떻게든 해야,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나이츠 멤버끼리 야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부끄러워하는 반응이 귀여워서 짜증내는 이즈미를 모른 척 더 떠든 적이 없다. 그래서 봤다는 말이야? 하하! 이렇게 빼는 스오도 결국은 하겠지! 스오 인기 많을 거야! 여기 있는 모두가 그렇겠죠, 저희는 아이돌이잖아요. 볼멘소리로 말하는 아이의 볼 끝이 좀 붉어져 있었다. 아이돌은 사랑 받아야 하고 사랑을 나눠줘야 한다. 이제 유일한 레오의 팬에게 레오는 사랑의 결실을, 아니 사고의 책임을 마땅히 짊어져야 하는데. 잘 되지 않았다. 술이라도 먹어야 하는 걸까? 레오는 흰 살결 앞에서 얼어붙고 심지어 겁에 질리는 자신을 보았다.
무대 위에서 빛나던 아이돌은 정말로 죽었다. 그 재 속에서 태어난 한 가정의 가장은 조립이 덜 된 것처럼 마구 삐그덕거렸다. 스테이지가 제 안방인양 마구 날뛰고 멤버들에게 이리저리 치대며 브이 사인을 크게 보였던 이는 사라졌고, 점점 수그러드는 어깨와 한 마디도 제대로 못해 어물거리는 한심한 인간만이 남아있다.
“아아, 나도 모르게 얼굴을.... 그래도 레오 씨는 아이돌인데, 미안해요. 너무 화가 나서 그만... 아아, 어떡해....”
은퇴했으니 더 이상 아이돌이 아닌데, 그녀는 언제나 그렇게 말했다. 손이 뻗어져와 볼을 부드럽게 감싸서 어루만진다. 뭐라고 대답을 하지도 못하는 사이 뺨을 비비던 손이 머리를 끌어당겼고 이내 레오는 둥근 둔덕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달콤한 사과의 목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손바닥이 아무 것도 입지 않은 등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미안해요, 레오 씨, 다 알아요. 응응, 이런 건 내가 처음이랬잖아요? 엄청 기뻐요. 당신은 당연히 이런 거에 익숙할 줄 알았는데.... 아니야, 괜찮아요. 비록 사고였지만 마이를, 우리 아이를 함께 만들었잖아요? 그건 사고가 아니고 이 미래로 이어져야 할 당연한 일이었어요. 그러니까 우린 잘 할 수 있어요.”
그녀는 둘째를 원했다. 그렇게 하면 더 사랑이 깊어질 것이라는 듯이.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원하는 상사처럼 레오를 쉼 없이 쪼았다. 레오는 점점 위축되어갔다. 그 사고라는 것도 기억도 없는 일이다. 그녀를 사랑해야 하는 것마저도 벅찬 상황에서 그러한 행위까지 이어질 수 있을 리 없었다. 이제는 츠키나가에 적을 둔 그녀는 그런 레오를 이해하지 못했다. 울고 화내고 급기야 폭력까지 나왔다. 그녀의 인생을 진흙탕으로 처박은 것에 대한 아주 당연한 형벌이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맞는 건 아팠다. 견디다 못해 막거나 하면 그녀가 더 크게 울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정당한 폭력에 레오는 점점 무뎌져가는 자신을 느꼈다.
“엄마랑 싸우지 마....”
유독 심했던 어느 밤의 다음날, 마이가 그렁거리며 말했다. 레오는 멍한 눈으로 아이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 아빠가 잘할게.”
어떻게 잘해야 할까? 그 방법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대답했었다. 손바닥도 맞부딪혀야 소리가 난다고 했다. 레오는 저항하지 않지만 그 이전에 그녀의 자존심이 매번 부수어져 어떻게든 소리가 나고야 말았다. 그러니까 그녀를 제대로 안을 수 있다면 무언가 맞부딪히는 소리는 나지 않을 터였다.
아예 그쪽이 고장 난 건 아닌지 쌓이고 쌓인 날엔 어떻게든 할 수 있었다. 쾌락 보다는 의무에 가까운 행위가 한차례 끝나면 레오는 방전된 기계처럼 아무 것도 못하고 쓰러져 잠들었다. 유일하게 여러 번을 한 적도 있었다. 염색을 고민하는 그녀에게 붉은 머리를 아무 생각 없이 추천했었다. 그리고 침대 위에 흐트러진 붉은색 머리칼은 이상한 연상을 가져다줬다. 그녀는 너무나 만족스러워했지만 레오는 죄의식에 짓눌려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두 사람에게 터무니없는 짓을 저질렀다는 자책에 아주 오랜만에 눈물이 흘러나왔다.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이었다.
그녀의 붉은 염색은 금방 빠졌지만 좋은 기억 때문인지 그녀의 머리는 가끔 붉게 물들곤 했다. 물론 그 때와 같은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누군갈 겹쳐서 안는 것보다는 남자 구실도 제대로 못하는 폭언과 함께 얻어맞는 편이 더 좋다고 레오는 생각했다. 아주 간신히 그녀를 안는 날은 이어졌다.
아이돌 레오가 죽은 날, 작곡가 레오도 죽었다. 이 죽음은 레오 혼자 눈치 챘다. 여자는 아이돌이자 작곡가인 남편을 자랑스러워했다. 집안에는 언제나 레오가 만들었던 노래가 흘렀으며, 나이츠가 해체한 것을 아쉬워하면서도 레오가 새로운 남성 아이돌의 노래를 작곡해 주었으면 했다. 레오는 그 기대에 부응해 펜을 잡고 텅 빈 오선지를 보고 억지로 손을 움직였다가 멍청이처럼 이어진 음계들을 찢곤 했다. 어느 부부의 밤과 똑같았다. 간신히 짜내어 만든 곡을 가져가면 사람들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말고 다른 느낌은 없을까요? 좀 더 통통 튀었으면 하는데....’
‘나쁘지 않지만.... 흠, 이런 것보다 예전에 만들었던 그 곡처럼 말이죠....’
평작을 눈앞에 둔 사람들은 감탄 대신 어정쩡한 감상을 내놓았다. 그 말들이 한 덩어리로 뭉치면 이런 말이 되었다.
‘츠키나가 레오도 이제 한물갔네.’
레오는 동의했다. 이런 곡은 나도 쓰고 싶지 않아. 내가 하고 싶은 건 좀 더 이런, 가닥들이 높은 곳으로 올라올 생각도 못하는, 느릿느릿하게 한걸음 한걸음 전진하는 곡. 장엄하게 내리 떨어지는 노래는 격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다가 거대한 어둠으로 막을 내릴 것이다. 장송곡, 무엇보다 쓰고 싶은 노래였다. 아무도 추모하지 않는 죽음을 스스로가 추모하고 싶었다. 그 누구도 모르는 죽음에게 홀로 바치는 노래.
그렇게 흐르는 서정적인 감정 옆에서 한 이가 열심히 숫자를 중얼거린다. 아직 괜찮아, 곡 저작료가 있고 이걸로는 당분간 문제없어, 아이 한 명 키우는 데에 돈이 얼마나 들지? 두 명이면 감당이 안 될지도 몰라.
둘째. 레오는 숨이 막혔다. 안 돼, 지금도 엉망진창인데 나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 쓰는 곡 하나도 제대로 완성 못하고 머저리 같은 것만이 튀어나오고 있는데 맞으면서 겨우겨우 한심하게 만든 아이까지, 그만, 그만, 그만.
레오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머리를 처박고 자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작업실에서 멍하니 있다가 핸드폰을 켰다. 아내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우리 도착했어요, 피곤하니까 금방 잘 것 같아. 작곡 힘내요, 사랑해요.]
레오는 글자들을 느릿느릿하게 읽다가 손을 움직였다.
나도 사랑ㅎ
그렇게나 외치고 다녔던 사랑이 지금은 잘 나오지 않았다. 그 거대한 사랑은 어디 갔을까. 시체에게 감정이 깃들리 없었다. 결국 아무 것도 적지 못하고 레오는 핸드폰을 닫았다. 오늘도 아무것도 못한 채 작업실을 나왔다. 검은 밤이 죽음처럼 다가와 있었다. 레오는 죽음을 향해 주춤주춤 걸어갔다. 그리고 곧 집어삼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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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봐도 대체 무슨 소리인지, 하실 텐데 사실 츠카사 시점이랑 서로 맞물려야 되는 글이라 정말 영문을 모르겠죠.
그래서 공개 안하려고 했는데 어흐......
미래AU의 배경 같은 느낌으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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