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카레오 - 카미가쿠시(神隠し)
* 츠카레오
* 2017년에 미나비님과 함께한 인외 츠카사x레오 소설 트윈지 [츠카사일지도 모르는 이야기]의 제 파트만 공개합니다.
* 약간의 에이레오 요소도 있으니 주의해 주세요.
* 표지는 혜리(@cremmme)님이 작업해 주셨습니다!
츠카사
일지도 모르는
이야기
Suou Tsukasa x Tsukinaga Leo
카미가쿠시(神隠し) │ 루우
전화와 편지는 동시에 왔다. 아마 편지가 먼저 왔을 것이다. 레오는 이 학교와 멀리 떨어진 집과 건조한 대화를 나누고 온 참이었다. 방학은 학교에서 보낼게. 그런 용건을 나누는 것뿐인 통화는 아주 짧았지만 불필요한 감정적인 소모를 하기엔 충분했다. 작별 인사는 서로의 안부도 아니었다. 루카는 잘 지내? 그 아이는 아주 잘하고 있어. 레오는 보이지도 않을 상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행이고.
전화는 끊겼고 같은 곳에서 온 편지는 아까 안부를 물은 아이에게서 왔다. ‘from 츠키나가 루카’가 써진 편지를 손에 쥔 레오는 아까의 늘어지는 걸음과 달리 아주 가벼웠고 훨씬 재빨랐다. 루카땅 사랑해! 편지를 뜯기도 전에 그렇게 외친 레오는 편지를 품에 안고 좁은 기숙사 침대에서 한 바퀴 데구루루 굴렀다가 벌떡 일어나 아까와는 다른 제법 정중하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편지를 뜯었다.
친애하는 오빠에게.
작은 구슬 같은 앙증맞은 글씨. 익숙한 글씨체를 쓸어보다가 레오는 다시 자세를 바로 하고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잠시 후 레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 길지 않은 편지를 다시 찬찬히 훑는다. 제대로 읽으면 무언가 단서가 나타날 것처럼. 하지만 몇 번을 들여다봐도 종이에 숨겨진 글자가 떠오르는 일은 없었다. 조금 후에 레오는 다시 옆방의 문을 두들겼다. 핸드폰, 다시 빌려줘.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고, 그냥 방학 때 집 내려가려고.
츠키나가 레오의 여름방학 일정은 그렇게 갑자기 변경되었다.
*
굽이치는 기찻길을 따라 좁은 선로가 달린다. 점점 지도의 안쪽으로 파고드는 선로는 어두운 동굴을 몇 번이나 통과했고 점점 짙어지는 녹음 속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덜커덩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귀에서 연신 울린다. 기차 안은 한가했다. 적어도 이 칸엔 레오 밖에 없었다. 귀가 찢어져라 우는 아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철로를 달리는 기차소리만 고요하게 울리고 있었다. 돌고래 같은 높은 울음소리와 아이를 달래는 어머니의 목소리의 조화는 독특한 리듬이 있어서 한 곡의 곡이 나올 것 같았는데. 여로의 끝이 다가올수록 침묵이 가득해지는 느낌이다.
주변이 고요하자 음악 대신 다른 잡상이 레오의 머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언제나 세상을 가득 메우던 음 같은 것들 대신, 시시하고 재미없는 생각들이다. 이를테면, 가족들과 언제 만났는지. 저번 겨울 방학에 이 기차를 끝까지 못 탄 것 같다. 걸핏하면 눈이 쌓이는 곳이라 운행 중지가 되어 기차역에서 노숙을 했던가? 쏟아지는 영감, 밀어닥치는 추위 둘 중 어떤 걸 우선해야 할지 몰랐던 기억이 얼핏 난다. 그 때는 사고로 못 간 거니까. 지난 여름방학은 어땠더라. 너무 더운데, 집에 에어컨이 고장 났다는 소식을 듣고 안 가기로 결정했다. 딱딱한 이야기만 종일 늘어놓는 주제에 학비는 무시무시하다던 학교의 좋은 점은 사시사철 냉난방 완비라는 점이었다. 그 여름방학을 뒤로 하면 입학식이다. 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집에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어쩐지 루카땅이 많이 그립다 했더니 오래되긴 했다.
가족 간의 불화 같은 건 거창한 이야깃거리도 아니다. 고등학교 2학년인 레오에게 그런 관계는 사춘기의 불명예스러운 타이틀 밖에 되지 못한다. 대신 자신에게는 아주 특별한, 사랑스럽고 귀여운 여동생이 있으니까. 부모는 레오의 질 나쁜 병이 루카에게 전염되지 않게 하기 위한 것 같지만.
기차 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아니 잠이 들고 있다. 자는 건 좋아하지 않지만 도리가 없었다. 이제 곧 도착할 곳은 지금의 기차와 비교도 안 되게 더 조용한 마을이다.
레오가 기차에서 내렸을 때는 눈부시던 태양의 자취는 온데간데없이 어둠이 세상을 시커멓게 잡아먹고 있는 시간이었다. 줄곧 혼자였던 기차에서 레오는 홀로 내렸고, 기차는 어딘지 모를 곳을 향해 바퀴를 움직여 떠났다.
갈 길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레오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유난히 반짝이는 별의 바다가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아서 현기증이 났다.
“오빠―!”
수명이 다하기 직전의 가로등 불빛 밑에서 작은 인영이 반갑게 뛰어온다.
“루카.”
사랑스러운 여동생에게 마음껏 달려드는 대신 레오는 의젓하게 손을 흔들었다. 이제 고등학교 2학년이니까. 평소에는 생각지도 않던 나이를 되새기며 레오는 달려오는 루카를 토닥였다. 저번보다 더 길어진 풍성한 갈색머리 뒤로 역시 전봇대 아래에 누군가 서 있는 게 보인다. 성인 남성, 그것도 두 명.
“누구야?”
루카도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같은 마을에 계신 아저씨들인데, 밤에는 위험하다고 같이 와주셨어. 차도 태워주신대”
사람이 적은 동네지만 아이가 일일이 어른의 얼굴을 기억하지 않는다. 가로등 아래에서 가득 음영 진 얼굴은 그들이 기괴한 가면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레오는 그들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상대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걸로 끝이었다. 남자 둘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루카를 쳐다본다. 무언가의 독촉처럼도 보이는 그것에 루카가 퍼뜩 놀라 레오의 소매를 잡았다.
“오빠, 어서 집에 가자. 밤이 늦었어.”
작은 손이 끌어당긴다.
루카와 나란히 앞장서서 걷고, 그 뒤로 남자들이 따라온다. 마치 영주의 뒤를 따르는 병사들처럼. 레오는 슬쩍 남자를 보았고 루카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진짜 마을 어른이지?”
레오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고 루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치곤 불안해 보이는 기색으로 그녀는 세워둔 차를 향해 조금 걸음을 빨리 옮겼다.
츠키나가 가의…, 거기 장남이라고. 남자들이 짧게 나누는 대화도 얼핏 들린다. 위해를 가하려고 하는 것 같진 않지만 경계가 수그러들지 않는다. 여자 아이 혼자 밤길은 위험하지만 별로 살갑지도 않은 어른 둘이 따라올 일인가? 레오는 루카의 편지를 기억했다. 그녀는 거창한 말을 쓰지 않았다. 자신의 학교도 여름 방학을 맞았고, 방학 숙제도 산더미처럼 받았다고. 기쁜 소식과 슬픈 소식 두 가지가 있는데, 기쁜 소식은 그 많은 방학 숙제를 안 해도 된다는 것, 슬픈 소식은 오빠가 여기에 와도 당분간 볼 수 없다는 것 정도였다. 왜 볼 수 없다는 건지는 전혀 적혀있지 않았다. 친구와 이런 일이 있었다느니, 학교에 있는 고양이가 자기를 알아봤다느니 같은 일들 하나하나 다 적던 그녀의 편지는 단출한 내용을 담고 부연 설명도 없이 바로 끊겼다.
레오의 걱정과 달리 전화상에서 루카는 마중을 나가겠다고 기쁜 목소리로 답했고 그녀는 레오의 기억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옆에 있다.
역에서 마을까지는 꽤 거리가 있다. 자전거가 있어도 한참 밟아야 했고, 없다면 꽤나 긴 거리를 걸어야 했다. 곧 있으면 날이 바뀔 시간에 차가 있다는 건 굉장히 다행스런 이야기긴 했다. 차 안의 공기는 아주 어색했다. 한 남자가 운전대를 잡았고 다른 남자는 조수석에 앉아서 레오와 루카는 자연스럽게 뒷좌석에 앉았다.
듬성듬성한 가로등이 비추는 흙길을 덜컹이며 차가 지나갔다. 루카의 작은 손은 여전히 레오에게 잡혀 있었다. 이제는 루카 쪽이 더 꽉 쥐고 있는 것 같다. 백미러 너머로 남자와 가끔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면 남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좁은 차 안은 밤이어도 금방 후덥지근해져서 더욱 갑갑해졌다. 남자도 그걸 느꼈는지 창문을 열었다. 곧이어 서늘한 공기와 흙냄새가 가득 들어찼다. 도시에선 맡을 수 없는 냄새. 나무가 땅에 단단히 뿌리를 내려 깊숙한 원천을 빨아들이고 잎사귀로 뿜어내고, 그 숲 사이를 바쁘게 오가는 작은 벌레들, 좀 더 큼직한 발걸음으로 자신의 영토를 누비는 들짐승들. 그런 순환의 정중앙에 터를 잡은 인간만을 위한 그들의 마을. 그 가득한 자연의 덩어리를 레오는 지금도 선명히 기억한다. 자신이 태어난 곳을 사랑했었고, 지금도 사랑한다. 떠나야 했던 곳이지만.
차가 천천히 멈춰 섰다. 도로 포장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마을의 유일한 입구에는 이질적인 차단기가 가로막고 있었다. 차단기를 사이에 둔 나무에는 긴 붉은 천이 걸려 있다. 운전석에 있는 남자가 창문을 열어서 차단기 옆 부스에 있는 어느 남자에게 말을 건다.
“여, 수고.”
“금방 오셨네요. 별다른 문제는 없죠?”
순경 복장을 한 젊은 남자가 뒷좌석을 힐끔였다.
“응. 내린 사람도 츠키나가 장남 혼자였어.”
“그렇죠, 이런 벽촌에 외지인이 올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순경은 그렇게 대답하며 부스로 들어가 버튼을 눌렀다. 차단기가 올라가자 운전석에 있던 남자가 수고해, 라고 말하고 다시 차를 움직였다. 길은 여전히 포장되어 있지 않다. 양 옆에 숲으로 가득 찼던 것이 점점 줄어든다.
듬성듬성한 나무가 끊어질 듯 말 듯 이어지다가 어느새 확 트인 정경이 펼쳐졌다. 달빛을 받아 빼곡히 심어진 벼가 푸릇푸릇한 잎을 한층 뻗고, 그 사이를 차가 빠르지 않은 속도로 달린다. 머지않아 점점이 인공적인 불을 밝히고 있는 마을이 다가온다.
돌아왔다. 이곳을 나갈 때만 해도 집을 잊기로 한 레오지만 저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차는 정확히 츠키나가 집 앞에서 멈췄다.
“감사합니다.”
차에서 내리고 레오는 운전석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만날 때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인 그들은 차를 움직였다. 레오는 저도 모르게 차가 간 방향을 보고 있었다. 차를 돌리지 않고 그대로 오르막길로 가고 있다. 저쪽으로 쭉 간다면 아마 신사에 도착할 것이다.
“어서와, 오빠.”
문득 들리는 목소리에 다시 앞을 보면 루카가 아까보다 풀어진 웃음을 짓고 있었다. 어쩐지 잔뜩 날 서 있던 마음이 가라앉아 레오는 비슷한 웃음을 마주 지었다.
“응.”
손을 내밀어 여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면 변하지 않는 수줍은 웃음소리를 들려주었다.
아버지는 이미 잠자리에 드셨고, 어머니만이 레오를 맞았다. 오느라 고생했어, 밥은 먹었니? 기차에서 도시락 먹었어. 목욕물 준비해 뒀으니 씻으렴. 일 년 넘게 보지 못한 모친과 나누기엔 조금 어색한 대화와 함께 레오는 자신의 방에 들어갔다. 어스름한 전깃불 아래 드러나는 방안은 나갈 때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긴 부재에도 먼지 한 톨 쌓이지 않은 바닥을 확인한 레오는 이불에 망설임 없이 드러누웠다. 조용해진 방 안에 풀벌레 소리가 조금씩 들어온다. 고요하고 숨 막히는 공간. 태어날 때부터 레오와 함께 했던 모든 것들이 숨을 죄고 있다.
“오빠, 자?”
문 너머로 들리는 조그만 목소리. 레오의 숨통을 트여줬던 건 언제나 사랑스러운 여동생뿐이었다. 레오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와.”
문이 열리더니 빼꼼 얼굴을 내민 루카가 살짝 방안을 둘러보았다.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선다.
“오빠랑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고.”
파자마를 입은 어깨에 평소처럼 양 갈래로 묶은 머리가 풀어져서 사자 갈기 같은 풍성한 머리를 한 루카가 수줍게 웃었다.
“거기 가서 노래도 만들었다고 했잖아? 그것도 듣고 싶어.”
“좋아! 그래 어디부터 이야기할까. 아무래도 기독교 학교 하면 뭔가 상상하는 이미지가 있잖아? 되게 정숙하고 그런 느낌이 있지. 근데 우리 마을이 더 조용한 것 같아. 다른 사람들은 여기가 아주 조용한 편이라고 했지만, 시끄러웠는걸! 그러니까 이렇게 사람들 마음이 말이야. 막 잡힐 듯이 웅성거렸어.”
루카가 눈을 반짝이며 듣고 있다. 밖으로 나갈 기회가 별로 없는 마을의 아이는 바깥 이야기가 언제나 궁금해 한다. 텔레비전도 마을 회관에 한 대, 라디오 역시 마찬가지. 신문은 자유롭게 가져갈 수 있지만 어린 아이들이 읽기엔 많은 한자와 겨우 읽어도 재미없는 이야기가 가득했다. 마을의 아이들에게, 루카에게 아주 귀중할 이야기를 레오는 계속 입에 담는다.
“루카, 예수라고 알아? 우리 마을의 신님과는 다른 거야. 다른 나라의, 다른 신이지. 내가 다닌 학교는 그 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지은 학교야. 그래서 매번 정해진 시간에 신의 말씀을 전하지. 이런 것도 있어. 성서라고, 그들의 신이 한 말들을 적어 놓은 무겁고 아리송한 책이야….”
레오의 이야기를 들으면 루카도 편지에 적지 못한 이야기를 해줄 것이다.
*
“오늘 루카와 신사에 다녀올 거다.”
한동안 젓가락 소리만 이어지던 아침밥상 앞에서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다.
레오가 돌아오고 난 매일은 극히 일상적이었다. 아버지는 원래부터 이 집에 레오가 있다는 듯이 대했다. 그간 어떻게 지냈냐느니 같은 말은 전혀 없었다. 레오는 루카와 함께 마을이 달라진 곳이 없는지 돌아다녔고 가끔 마주치는 동네 어르신들에게 인사를 할 뿐. 마을은 뭐하나 쉽게 변하지 않았다. 마을의 거목이 조금 더 두꺼워졌을까? 가지에 잔뜩 걸린 붉은 천 때문에 나무는 더 부풀어 보였다. 레오가 자라면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치장이다. 축제야? 라고 레오는 물었고 루카는 비슷한 거라고 들었어, 라고 답했다. 그 붉은 천은 각 집마다 걸려있었는데 레오네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너도 같이 갈 거냐?”
아버지는 그렇게 물었고 그 시선에 끝에 있는 레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랜만이기도 하고.”
루카는 자신의 상황을 정확하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못했다는 편이 맞을까.
‘그건… 내가 정한 게 아니고. 엄마랑 아빠도 잠시 여행을 가는 거라고 생각하랬어. 그러기 전에 오빠를 볼 수 있어서 기뻐.’
중학생이 긴 여행을 갈 일이 수학여행 말고 뭐가 있단 말인가. 레오가 본 바로는 아버지는 평소와 같지만 어머니는 루카를 왠지 더 챙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여행’에 대해 꺼내지 않는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츠키나가 일가의 생활은 평탄하게 이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밖에 나오니 매미 소리가 한층 더 강렬하게 들렸다. 뙤약볕이 떨어지는 한낮에 돌아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레오는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어머니에게 받아 그걸 썼고, 같은 모자를 쓴 루카와 나란히 걸었다. 앞서 가는 아버지를 포함해 오가는 말은 무엇 하나 없다. 이글거리는 바닥에 돌이 달궈지고, 태양에 지지 않을 것처럼 매미가 울어 녹색이 더 깊어져간다.
야트막하게 쭉 이어지던 오르막길은 곧 좁은 산길까지 이어진다. 산길은 돌계단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 길을 감싸듯이 위는 붉고 아래는 검은 도리이가 층층이 계단마다 관문처럼 겹쳐있다. 삐죽한 고딕 양식의 건물들이 어느새 익숙해진 건지 그 모습이 어쩐지 이질적이다. 도리이는 일반 세계와 신사를 구분하는 경계라고 했다. 도리이가 이어진 너머에서 서늘한 공기가 불어오는 것도 같다. 어렸을 때는 루카와 이곳을 달음박치며 올라간 적이 많다. 끝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돌계단 위로 붉은 통로를 오르며 루카 힘내, 다 왔어 라고 작은 아이의 손을 잡아주기도 했었다. 그 때보다 커진 레오의 동생은, 밀짚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어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길게 이어진 계단을 벗어나자 푸른 하늘을 등 진 신사가 드러났다. 그 앞마당에도 붉은 깃발이 그 천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들 앞으로 기다리고 있다는 듯이 무녀가 서 있었다.
“주지스님이 기다리셔요.”
검은 눈동자가 루카를, 그리고 레오를 한 번 본다. 그녀는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이 분은….”
“우리 집 장남입니다.”
“아―, 실례를. 그러면 같이 오시겠어요?”
종종 걸음으로 무녀가 앞장선다. 반질반질한 돌길을 밟으며 레오는 뒤를 따랐다. 모든 음이 가라앉는 세계. 이 신사는 마을에서도 무척이도 조용했다.
안내 받은 본전에는 검은 가사를 입고 커다란 안경을 쓴 승려가 기다리고 있었다. 승려 역시 레오를 보고는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눈을 둥글게 떴다.
“장남입니다. 외지에 나가 있다가 이번에 돌아오게 됐습니다.”
“그렇다면….”
깊게 패인 눈주름이 좁혀지면서 레오와 루카를 번갈아 바라본다. 레오는 어리둥절하게 그 시선을 받고 루카는 고개를 숙였다.
“다름이 아니고 이제 멀지 않았습니다. 이번 주 중으로, 빠르면 당장 내일이라도. 그러니 오늘밤부터 와주셔야겠습니다. 예정대로라면 따님께서….”
열기로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던 루카의 뺨이 어느새 하얗게 질려있었다. 그녀는 얼어붙은 표정으로 경내의 매끈한 바닥에만 시선을 던지고만 있다. 레오는 루카를, 그리고 승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짧게 알았다는 대답을 했다. 나머지는 일정대로, 그 외에 자세한 건 여기로 다시 오고 나서. 아버지는 승려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며 아이들을 내보내 더 이상 레오가 들을 수 있는 이야기는 없었다.
아까의 무녀는 어딘가로 갔는지 경내에는 아무도 없었다. 바람도 불지 않아 붉은 깃발은 일말의 펄럭임도 없이 추욱 늘어져 있을 뿐이다.
“루카, 이제 무슨 일인지 말해줘도 되지 않아?”
아이는 아까 이야기를 한 이후로 잔뜩 긴장해 있는 것 같았다. 레오의 말에 깜짝 놀랐다가도 주춤주춤 시선을 아래로 깐다.
“마, 말해도 될까…?”
“아버지도 내가 신사에 오는 거 찬성했잖아? 괜찮아. 먼 여행을 가는 거라고 했으니까, 어딜 가는 것 정도는 알려줘.”
연한 녹색 눈이 갈팡질팡한다. 레오는 가만히 루카의 대답을 기다렸다. 곧이어 그녀의 입이 열렸다.
“오빠는 이 신사가 누굴 모시는지 알아…?”
“…그냥 신이라고만 알고 있는데.”
“나도 그랬어. 마을에 있는 신사잖아? 어렸을 땐 오빠랑 같이 놀러다녔고, 지금은 시험 보기 전이나 새해 때 참배하고. 그런 곳일 뿐이었는데, 여기엔 정말로 신이 오기도 한대. 그리고 곧 신이 내려올 거래. 아니, 태어날 거래. 스님도 정확히 알려주지 않았어. 나는, 그저 신이 태어나면 옆에서 도와주기만 하면 된다고. 신은 아기의 형태로 이 땅에 나타나기 때문에 누가 도와줘야 하는데 그게 내 일이라는 거야. 그리고 그건 아주 쉽다고, 유치원생도 할 수 있을 정도의 일이라고 했어. 그걸 아무도 만나지 않고 계속 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운 거라고 했어…. 하지만 나라면 할 수 있다고….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 오빠. 갑자기 들었을 뿐이야. 때가 되면 나는 혼자 거기에 가서 신과 함께 살아야 한대.”
그건 아주 신기한 이야기였다. 자신을 아주 잘 따르는 귀여운 여동생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어서 더욱. 외계인이 루카의 거죽을 쓰고 이야기를 했다는 게 더 신빙성이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외계인도 루카와 같이 살아야 하는 신이라는 것과 같은 맥락의 이야기다. 레오의 머릿속에는 살고 있지만, 누군가는 있다고 떠들어대지만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은 그런 것들.
한 곡 쓸 수 있을 것 같아. 지금 당장 손에 펜을 쥐고 머리에서 폭발할 것 같은 음들을 마구 써내려가고 싶었다. 그 이야기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 루카만 아니었다면 레오는 당장이라도 자신의 욕망을 충실하게 표현했을 것이다. 하지만 레오는 그녀의 좋은 오빠이길 원했고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왔다. 루카는 레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녀의 말을 믿는지, 그렇지 않은지.
“그 역할이 왜 루카야? 무슨 이유라도 있는 거야?”
“우리 집이 할 차례라고 하셨어. 마을의 임원 가문들이 돌아가면서 해야 한다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 것 같지만 정말이래. 나는 그냥 옛날이야기 해주시는 줄 알았어. 그냥 이런 일들이 있다고. 그런데 마을이 대대적으로 준비하고, 아무래도 진짜인가 봐. 오빠, 내가 하는 말이 거짓말 같지만 그렇지 않아….”
“나는 당연히 루카의 말을 믿어.”
불안해하는 여동생의 어깨를 꼭 잡으며 레오는 말했다. 더 이상 정확한 사정을 모르는 걸 보면 루카에게 일부러 정보를 제한할 수도 있었다. 기차에서 잠든 이후부터 계속 현실이 아닌 꿈길을 걷는 것 같았다. 사랑스러운 여동생이 있고 묘한 공기가 감도는 고향. 레오가 다니던 고등학교도 생생한 현실은 아니었다. 찬송가가 들리고, 검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거대한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모아 신이 알려준 음악이라는 찬송가를 소리 높여 부르는 곳. 어느 쪽도 현실이 아니어도 좋았다. 레오는 그저 꿈같은 세상을 부유하며 오르간을 연주하고, 사랑스러운 여동생과 높은 돌계단을 오르고, 붉은 천으로 장식된 마을을 걷는다. 언제부터였을까, 이런 땅과 멀어진 기분은. 생생했던 건 아마 입술에 닿았던 감각, 그 이후의 뜨거운 숨. 주먹이 얼굴을 강타하는 폭력, 순식간에 가득 차는 피 냄새, 성난 목소리. 그것들도 지금은 꿈같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 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걸 위해 자신은 이곳에 왔다.
*
둥둥둥.
어디선가 북소리가 들린다. 아마 너른 마당에서 붉은 옷을 입은 무녀들이 두드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주변은 어수선했다. 북소리 때문이 아니었다. 사람이,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이 술렁거리고 있었다. 불안, 초조, 긴장, 흥분. 모든 것들이 회오리치고 있다.
레오는 납죽 엎드려 있었다. 손을 모으고 그 아래에 머리를 박고 있는 이 자세를 이거 말고는 뭐라고 설명할 수 없었다. 신을 기다리는 신실한 모습이라기엔 바닥에 배붙인 개구리 같고. 길고 펄럭이는, 헤이안 시대의 음양사 같은 옷을 입은 채 그러고 있는 모습이 위에서 보면 어떻게 보일 지를 고민하며 저릿하다 못해 감각이 없어지는 허리를 움찔거려 본다. 폭이 넓은 흰 천은 그런 사소한 움직임 정도는 가려주고 있었다.
북소리와 사람 소리.
루카는 근처에 있을까. ‘여행’을 떠나기 전에 제대로 된 인사를 못했다. 그것만이 마음에 걸렸다.
임원 가문들이 돌아가면서 해야 한다면 그게 꼭 루카일 필요는 없다.
루카를 먼저 집으로 돌려보내고 레오는 아직 신사에 남아있는 그의 아버지에게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물어보았고 그것이 맞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이해가 됐다. 거의 절연 당하다시피 기숙사 학교로 쫓겨난 자신이 집에 온다고 할 때 순순히 허락했는지, 신사에 갈 때도 구태여 언급을 했는지도. 부모의 입장에서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러운 딸보다 내놓은 아들 쪽이 하는 게 마음이 편할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자신이 루카를 대신할 수 있다면 그거야 말로 원하는 바였다.
레오가 신을 모시는 기간은 9개월. 이 땅에 강림한 신은 갓 태어난 아기처럼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그가 성장할 때까지 시중을 들 사람이 필요하다고 한다. 신을 부르는 명칭도 아기님이다. 아기님에게 접촉이 허락된 건 단 한 사람이어야만 하고 매일매일 해야 할 것들이 있다고 한다. 그건 루카가 말했던 것과 비슷하게 아주 쉬운 것들이며, 정확히 무엇인지는 그날이 되면 알려준다고 했다.
그리고 그 날은 아주 빠르게 찾아왔다. 레오가 루카 대신 하겠다고 말한 날, 저녁부터 신사는 아주 분주해졌다. 신이 오늘 새벽 자락을 적시며 내려온다고. 레오는 영문도 모른 채 신성한 물이라는 아주 차가운 물로 냉수마찰을 해야 했으며 가져온 소지품은 소금 세례를 받는 등 이승의 더러움을 정화하기 위함이라는 이유로 온갖 것을 당했다. 그리고 신사 뒷길로 이어진, 어렸을 적 신사를 제집처럼 들락날락한 레오도 처음 보는 곳으로 안내했다. 본당의 뒷문을 통해야만 갈 수 있는 길. 신사를 감싸는 산의 좀 더 높고 깊숙한 언저리로 그 길은 이어졌다.
숲의 향이 더 짙어진다. 사람들이 지나는 길보다 산짐승들이 지나는 길에 좀 더 가까운 땅을 밟으며 도착한 곳엔 붉은 도리이와 역시 붉게 칠해진 담, 그리고 잿빛 기와가 소복히 쌓인 작은 건물이었다. 밑에 있는 신사의 축소판 같은 곳에 들어가 레오는 지금의 개구리 자세로 줄곧 기다려야 했다.
신은 어떻게 나타날까. 하늘에서 이어진 은빛 계단을 밟고 내려온 천사 품에 안긴다던가? 앗 이건 너무 서양스럽나. 구름을 탄 흰 수염의 선인이 안고 내려온다던가. 번개가 떨어져서 그 자리에 짜잔 신이 나타났습니다 라던가. 어떤 방식이 됐든 레오는 그 광경을 직접 보지 못한다. 레오는 아기님이 말을 걸기 전까지 절대로 고개를 들어서는 안 된다는 엄명을 들었다. 지금 이곳에 자기 밖에 없는 것 같고 살짝 얼굴을 들어서 보는 것 정도는 되지 않을까. 엄청난 인스피레이션이 쏟아질 것 같은데.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일 것처럼 슬금슬금 나왔지만 결국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기님을 돌보는 임무를 제대로 완수하지 못 할 경우 화는 그의 가족들에게 미칠 것이라고 주지승은 엄중히 말했다. 레오에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협박이었다. 이 시대에 이런 의식을 진지하게 치르는 무리들이기에 말로만 하는 말은 아닐 것 같고. 레오는 얌전히 고개를 드는 걸 포기한다.
피워둔 향이 방을 감돌며 코를 알싸하게 찌른다. 저 밑에서 들려오는 듯한 북소리도 끊이지 않는다. 루카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상냥한 아이는 오빠가 자기 대신 갔다는 소식에 슬퍼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잖아? 신을 영접하는 위대한 일이라고 무녀들은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런 좋은 일을 뺏어서 미안. 하지만 루카가 이런 곳에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틀어박히는 것보단 나으니까. 방에 처박히는 능력은 내 쪽이 더 재능이 있었고. 생각이 똑바로 진전되다가 가닥처럼 갈라지고 뭉쳐지고. 머리가 잠잠해진다고 느낄 때 레오는 자기가 졸고 있다는 걸 눈치 챘다. 언제 와서 말을 걸지 모르니까 자면 안 될 것 같은데. 하지만 자지 말라는 말도 없었고. 그건 너무 당연한 소리니까 안 한 거 아닐까. 누가 신이 올 때 잠을 자고 있어. 고민 속에서도 레오는 이미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문득 들린 소리에 눈꺼풀이 움직인다. 방금 무슨 소리가 들렸을까. 그걸 무감각하게 인식한 뇌가 뒤이어 굉장한 소란을 일으킨다. 허겁지겁 일어나면 뻐근한 허리와 다리 통증이 느껴진다. 엎드려 있던 자세도 어느새 풀어져 바닥에 손과 발을 추욱 늘어뜨리고 아주 그냥 뻗어 잔 것 같았다. 열린 창문으로 보이는 검푸른 하늘엔 새벽이 가득했다. 흰 달빛이 내려오는 가운데 비어있던 요람이, 그 안에 흰 무언가가 있었다. 홀린 듯이 보던 레오는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발을 옮긴다. 발걸음 한 걸음, 한 걸음이 기묘한 진동을 내고 있다. 소리를 낸 건 저기 있을 아기님이?
“케헥.”
요람이 꿈틀거리며 이번엔 명백하게 소리를 냈다. 판도라의 상자에 다가가는 것처럼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다. 천천히 레오의 그림자가 요람 끄트머리에 닿는다. 요람 안에 담긴 무언가가 간헐적인 소리를 낸다. 홍채에 그것이 잡히자 레오의 발걸음이 우뚝 멎었다.
그건 기괴하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흰 천으로 감싸인 그것이 어떤 생물임은 분명했지만 흔히 말하는 ‘아기’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었다. 갓 태어난 동물들이 그러하듯이 그건 쭈글거렸으며, 이목구비는 온데간데없고 아기의 붉은 피부 대신 주름진 흰 색이 몸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굳이 비슷한 것을 찾자면 아주 거대한 누에 벌레였다. 강보에 감춰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머리는 몸만큼 비대했으며 목은 자취가 없었다. 얼굴이라 추정되는 쪽에 깊은 주름이 나란히 패어 있는 것이 감긴 두 눈 정도로 보였다. 아기님인지 거대 유충인지 모를 것이 왜 그런 소리를 냈는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눈주름의 아래에 자리 잡은 구멍―아마도 입―에서 보글거리는 거품이 올라오고 있었다. 코도 없는 것으로 보아 아기님은 저 유일한 구멍으로 숨을 쉬고 있을 것이다. 레오는 손을 뻗다가 잠시 망설였다. 함부로 손대도 되는 걸까. 거대 유충으로 보이지만 어쨌든 신인 거고, 인간이 범접해도 될까? 그 고민은 잠시 뿐이었다. 신이라는 특수한 상대긴 하지만 레오의 역할은 보모다. 불경하건 뭐건 보모가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 레오는 치렁치렁 따라오는 커다란 소매로 아기님의 입가에 묻은 거품을 조심히 닦아내었다. 거창한 옷이니 아마 속세의 뭔가가 묻지 않았겠지. 거품이 가라앉자 아기님은 더 이상 이상한 소리를 내는 대신 쌕쌕하며 풍선의 바람 빠지는 소리를 들려줬다. 검은 하늘에 걸린 달은 유달리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레오가 해야 할 일, 그들의 말대로 그건 유치원생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 아기님."
그렇게 말하며 요람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무언가를 씹고 있는 것처럼 오므려지고 다시 벌어지는 입에 닿는다. 기묘한 감각. 키스와는 전혀 다른 감각이 입술에 눌린다. 입을 벌리자 가르릉거리는 숨소리가 레오의 입 안에 가득 찬다. 그걸 삼키고 숨을 불어넣는다. 차가워진 손을 녹이는 것처럼 불어낸 숨은 깊은 구멍 속으로 꺼지듯이 사라졌다.
*
신의 보모가 된 지 일주일 째, 이곳은 레오가 있던 그 어느 곳보다 고요했다.
기상시간은 딱히 정해지지 않는다. 레오가 편할 때 일어나고 잠도 마찬가지다. 아기님은 갓난아기처럼 젖을 물릴 필요도 없었고, 밤잠을 설치는 울음을 내며 부모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도 않았다. 아기님의 두 눈으로 추정되는 깊은 주름은 떠지는 일이 없었고 제일 활발히 움직이는 건 입 정도였다. 그건 항상 오물거렸으며 근원을 알 수 없는 소리를 옹알이처럼 뱉었다. 거품을 뱉어낼 때도 있어 그럴 땐 닦아줘야 했지만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레오에게 내려진 가장 막중한 임무는 아기님에게 자신의 숨을 불어넣는 일이었다.
이승에 내려선 아기님은 아주 불안정한 존재여서 사람이 이 땅에 묶여있는 것과는 달리 아주 쉽게 사라질 수 있다고 한다. 그런 아기님을 여기에 붙들기 위해서는 산 사람의 숨이 필요하다고 주지승은 말했다. 해가 지고 세상에 양기 대신 음의 기운이 가득해 지는 새벽에 아기님의 입에 직접 숨을 불어넣는다. 그렇게 매일매일 그 의식을 빠짐없이 이어해 9개월이 지나면 아기님은 스스로의 힘으로 이 땅에 존재할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이 여기에 있는 레오의 중요한 역할.
승려는 축시라는 레오에게 아주 어색한 시간 개념으로 시간을 정했다. 레오는 매일 새벽 1시 반에서 두 시 반 사이에 아기님에게 숨을 불어넣고 마당에 있는 종을 울린다. 의식을 했다는 신호다. 축시가 지나서도 종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즉시 사람이 올라온다고 한다. 잠이 별로 없는 편인 레오에게 그렇게 힘든 시간도 아니었지만 사람에 따라 고역이었을 지도 모른다.
눈앞에 있는 것은 어떠한 신앙심도 가지기 힘든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갓 태어난 아기는 모유를 빨아 젖 냄새가 나지만 아기님에게 나는 냄새는 그것과 거리가 멀었다. 오물 속에 묻혀 있다가 꺼낸 냄새라고 해야 할까. 그 악취는 유일한 구멍인 입에서 올라온다. 그와 입을 닿고 있으면 그 냄새는 레오를 침범하려는 것처럼 한껏 올라온다. 그 숨을 들이마시고 자신의 숨을 돌려준다. 언제까지가 적절한지 몰라 길게 숨을 넣는다. 아기님의 입은 분명 작을 텐데 마주한 그곳에 끝없는 구멍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무언가 새어나오려는 것을 자신의 숨으로 틀어막는 기분도 든다.
역시 씻겨야 하지 않을까. 요즘 레오는 그런 생각을 한다. 아기님을 덮고 있는 흰 강보는 무엇에도 닿지 않았는데도 점점 누렇게 변색되어 간다. 아마 저 강보를 영원히 입힐 순 없을 테니 교체해야 할 거고, 그렇다면 아기님은? 어린 아기는 물에 씻어야 하지만 인간도 동물도 무엇도 아닌 신을 씻겨도 괜찮은가. 레오는 머리를 긁적이며 책을 뒤적인다. 그가 유일하게 읽을 수 있는 책, 역대 아기님의 보모들이 남긴 기록들이다. 서적은 오래되어서 조금만 난폭하게 다루면 금세 낱장이 흩뿌려질 정도였다. 귀중한 자료이니 소중하게 다루라고 엄명을 했기에 레오는 조심조심 손끝으로 한 장 한 장을 넘긴다. 정갈하던 글씨가 처음엔 아기님과의 나날들을 정성스럽게 기록한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글씨는 점점 무너지고 기록 대신 일기장으로 변모해 하루의 시름을 털어놓는다.
‘아무도 이곳을 찾아오지 않는다. 산에 사는 많은 짐승들도, 하물며 벌레조차 이곳을 방문하지 않고 있다. 사람이 너무 그리워 식사를 두고 가는 사람을 기다렸다. 얼굴에 종이를 덧댄 사람은 내 간절한 말을 무시하고 담 너머로 하루치 식사만 두고 가버렸다. 외로움이 사무친다. 한 달 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게 믿을 수가 없다.’
‘밤마다 아기님이 말을 건다. 그 순간이 너무 무서워 참을 수가 없다. 나는 자다 말고 일어나 아가님이 계신 방향으로 엎드려 예, 예 하고 대답을 드린다. 아기님은 이것저것을 나에게 명하시지만 도저히 내가 할 수 없는 것들뿐이다. 신의 말씀을 여기에 적어도 되는 것인지 몰라 적지는 못하지만 이곳에 갇혀있는 이상 도저히 아기님의 말씀을 수행하지 못한다. 그럼 아기님은 무서운 말씀들을 내리기 시작하는데 그 자리에서 도망쳐 어디에 있어도 그 목소리가 들려와 마당으로 도망쳐 나무에 몸을 기대어 두려워한다.’
‘하루하루 달력에 가위표를 하는 게 유일한 낙이다. 끝은 멀고 하루는 길다. 해가 지고 밤이 오면 하루의 가장 끔찍한 순간이 찾아온다. 젖을 물리는 것보다 나은 일이라고 누구는 말할 지도 모른다. 신을 돌보는 그 위치가 얼마나 숭고한 일인지 아냐며 머리가 벗겨진 이들은 잘도 떠든다. 나에게 훈계 비슷한 것도 내렸었다. 그 자들은 자신이 해보지 않아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입에 댈 때마다 불경하게도 이게 과연 신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신은 은혜를 내리는 존재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도저히 은혜를 내릴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신이 아닌 죽음과, 그보다 깊은 증오와 원한에게 숨을 불어넣는 느낌이 든다. 사실 이건 신 따위가 아니고 커다란 재앙이고 이것을 땅에 붙잡아 두고 있다면, 나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다른 이의 기록은 조금 더 짧다.
‘아기님의 피부에 버짐 같은 것이 점점 번져간다. 이에 대해 승려와 의논을 했지만 그들 역시 모른다고 한다. 솔직히 누가 여기에 입을 비비고 싶지? 좀 망설이다가 시간을 넘길 뻔 했다. 다음날 주지스님이 직접 올라와 크게 화를 내고 돌아갔다.’
‘천이 모자란다. 아기님의 피부에 무언가가 늘어나지만 약을 바르는 일 등은 허락되지 않았다. 아기님에게 무슨 악영향이 올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빨래 양만 잔뜩 늘었다.’
‘아기님의 말이 점점 더 많아지고 심해진다. 나는 가급적이면 집에 있지 않는다. 그곳은 이미 그의 영역이다. 아기면서 늙은이처럼 아무도 듣지 않는데 궁시렁궁시렁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마당에 있는 커다란 벚나무로 쉬는 공간을 만들고 싶은데 여긴 톱은커녕 줄자 하나 없다.’
‘대롱으로 전해도 숨이 충분히 전해지지 않을까 하는 의견은 단칼에 기각 당했다. 인공호흡기로 대체해도 되는 문제 아냐? 중은 머리가 너무 딱딱하다.’
레오는 가만히 그 내용들을 곱씹는다. 시선 끝에 머무른 요람은 움직이지 않는다. 유독 커다란 숨소리는 여전해 아기님의 극히 평범한 일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기록을 보면 아기님은 무슨 이야기란 걸 하는 듯 하지만 레오는 아직 기침 비슷한 소리 외에는 전혀 듣지 못했다. 시간이 더 지나야 할지도 모른다. 그 많은 기록들 속에 레오가 알고 싶은 정보는 얻지 못했다. 아기님의 서로 다른 보모들의 공통점은 가급적 아기님에게 무언가를 하고 싶지 않아했다. 지금 레오가 너무나 궁금한 아기님을 씻겨도 되는지, 일광욕을 시켜도 되는지, 요람에서 꺼내도 되는 지, 말을 걸어도 되는 지 등은 없다. 아기님이 먼저 말을 하고 대답을 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말을 거는 건 상관없는 문제인지도 모른다. 말을 시작해 대화를 하게 되면 조금 더 나아지지 않을까. 나무 요람은 여전히 미동도 없다. 어쨌든 천을 갈아주는 것도 괜찮은 것 같으니 레오는 좀 더 상황을 지켜보자고 생각했다.
레오가 있는 곳은 새소리도, 풀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바람이 불어 풀과 나뭇잎을 스치는 소란과 레오 옆에서 맹렬히 돌아가는 선풍기만이 이곳의 유일한 소리다. 한창 생명이 약동한다는 여름인데도 이러면 겨울은 정말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레오는 일부러 소리 내어 마룻바닥을 밟기도 하고, 마당에 혹시 모를 벌레를 찾으러 샅샅이 뒤지기도 했다. 모기가 없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지금은 그게 조금 그리워질 정도였다. 괜히 크게 혼잣말을 하거나 시끄럽게 노래를 불러도 뭐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레오가 입을 다물면 멸망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생존자인 것처럼 침묵이 들어찬다. 마을의 고요함은 이곳에서 내려오는 게 아닐까. 원래도 조용한 마을이었다. 아이보다 어른들이 더 많은 마을. 사람들은 어디서든 신사에 온 것처럼 경건히 행동했고 아이들의 밝은 소란은 이상하게도 어른들의 정숙함에 묻혔었다.
밤이 되어 깊어진 공기 속에 고요는 더욱 은근하게 다가온다. 레오는 이제 막 종을 울린 참이었다. 달빛만이 유일한 조명 속에서 레오는 그 모습을 바라본다. 아기님은 여전히 자라지 않는다. 쪼글거리는 건 조금 사라졌지만 곤충의 외피 같은 피부를 점점 두르고 있다. 닿을 때마다 점점 거칠어져서 시멘트를 바른 느낌도 든다. 손을 내밀어 만져보려고 하다가도 움찔하며 멈추고는 얌전히 손을 내려놓는다.
“아기님을 돌보기엔 내가 너무 가볍지 않아? 사실 이건 신사에 있는 스님이 해야 될 것 같은데. 그 사람들은 그걸 위해 살아가는 거잖아. 신에게 평생 몸을 의탁하고 그들의 진리를 전하고? 나는 신이 눈앞에 있어도 신앙심이 생길 기미도 없는데. 앗, 네가 잘못 됐다는 게 아니고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인 것 같아. 나는 아마 너에게도, 그리고 저쪽 바다 건너 있을 서양쪽 신에게도 몹쓸 신자라. 앗, 반말을 하고 있잖아. 죄송합니다…? 반말을 계속해도 괜찮겠습니까…?”
아기님은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아무 미동도 없다. 레오는 그걸 긍정으로 해석하기로 했다.
“왜 스님들이 널 돌보지 않을까. 변신소녀물처럼 성인이 되기 전의 나이여야 한다면 무녀라던가 애기승도 있을 텐데 말이야. 그 사람들은 나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거든. 그러니까 내가 매일매일 빠지지 않고 너에게 뽀뽀를 잘 하기만 하면 만족한다는 소리야. 이런 냉담 신자가 해도 괜찮은 걸까.”
아무 것도 하지 않은 몸은 피곤도 없어 쉽게 잠에 들지도 못한다. 레오는 이제 창밖을 바라보았다. 벌레 한 마리도 들이닥치지 않기 때문에 여름에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잘 수 있다는 건 굉장한 이점이다.
내일은 좀 더 노래를 쓰자. 레오의 유일한 특기이자 취미이기도 한 작곡을 레오는 생각한다. 레오가 있던 학교에서 노래의 기원은 신의 목소리라고 가르친다. 신이 자신을 따르는 백성들을 위해 찬양할 수단을 내려주었고 그것이 노래라는 것이다. 따라서 찬송가의 음은 급격히 휘지 않고 단계를 밟아 천천히 올라가며 정박자로 찬양이 담긴 메시지를 전한다. 악보가 없는 아주 옛날의 노래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그만큼 쉬우면서 지루하다. 신을 찬양하려면 좀 더 재밌는 쪽이 좋지 않을까. 레오는 느릿한 찬송가만 부르던 날들 속에서 머릿속에서 재조립되던 음을 생각한다.
음악이 신을 위한 것이 기원이라면 여기에 계시는 내가 돌봐야 하는 작은 신에게 노래를 줘도 좋지 않을까. 승려들이 밑에서 신나게 부르고 있을 지도 모르지만 잘 들리지도 않고, 아마 자신이 신이랑은 제일 가깝고. 깊었던 밤하늘이 창백해진다. 여름밤은 짧다. 레오는 곱게 펴두었던 요로 꾸물꾸물 몸을 밀어 넣었다. 졸리지 않은 눈을 감으며 애써 잠을 청한다. 그러다 문득 말이 들려왔다. 속삭이는가 싶을 정도로 아주 작았음에도 귀에 곧장 꽂히는 것 같은 소리였다.
“죽어.”
그것은 레오가 처음 들은 신의 목소리였다.
*
신에게 기원을 드릴 때는 언제인가. 기쁨이 흘러넘칠 때 신과 이 기쁨을 공유하는 모습은 거의 보지 못했다. 심적으로 불안할 때, 무언가 기대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신을 찾는다. 나라에 큰 우환이 찾아올 때 대규모로 제사를 지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신은 기쁨의 순간을 공유할 때 배제돼 있다. 그 누구보다 절박할 때 신을 찾고 고통의 순간에 부른다. 신은 절망과 함께 한다.
“지옥의 불구덩이 속 가장 깊은 곳에 너의 자리가 있을 거야.”
신이 뱉는 저주라는 건 상상해 본 적도 없지만 직접 들어보니 그 무게는 확실히 남달랐다. 곧바로 지옥에 자신의 거주지가 결정된 것 같은 느낌이다. 기원이 아닌 선고. 신이 만약 정말로 있다면 한 인간의 생사쯤은 아주 손쉽게 결정할 것이다.
“네 몸 깊은 곳에 병마가 깃들 것이다. 어떻게 살아남는다 해도 평생 고통스러워하겠지.”
기록대로 아기님의 일방적인 말은 밤에 이어졌다. 낮에도 꾹 다물려있던 것이 거짓말처럼 숨을 불어넣고 난 후엔 이어졌다. 옹알이대신 악의가 담긴 문구를 뱉는다. 그게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아기님의 목소리는 아기의 것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응애응애하며 울 것 같은 목소리가 또박또박 말을 뱉는다. 누군가의 위해를 잔뜩 끼치는 말을 뱉고 딸꾹질을 한다. 그리고 다시 말한다. 레오가 아기님과 아주 가까이 붙어 있지 않아도 그 목소리는 잘 들렸다.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닫아도 그곳에 같이 있는 양 아기님의 목소리는 레오와 함께 했다. 머리를 쾅쾅 두들기는 듯한 목소리였다.
“매일 밤 너를 난도질하는 꿈을 꾼다.”
“음, 오늘은 수필 같네. 제법 시적이기도 하고!”
레오가 펜을 움직이며 말했다. 방의 전깃불을 켜는 대신 등잔불을 켜 달빛과 어우러져 꽤나 근사한 분위기가 낸다. 아기님의 입이 벌어지며 저번 밤과 비슷한 말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여전히 멀쩡히 살아있구나. 수치도 모른 채 눈이 먼 자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겠지.”
“눈이 먼 자라면 장님? 아니, 이럴 경우엔 비유적인 표현일까? 미안, 나 언어 쪽은 영 센스가 없어서.”
“아무도 너를 심판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사지를 찢어주겠다. 이건 일도 아니다. 아무리 용서를 구해도 이 심판은 멈추지 않을 거다.”
“시작은 시적이지만 끝은 행동파군. 그래서 뜻을 이루었어? 해냈다면 철창행이겠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끄륵끄륵대는 숨소리만 일어났다. 레오는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기님의 입가에 누런 거품이 올라오고 있었다. 옆에 놔두었던 손수건으로 조심히 그 거품들을 훔친다. 눈주름이라고 여겼던 곳은 눈이 맞았다. 일반 사람들이 가진 홍채와 수정체가 존재하는 그런 눈은 아니었지만. 말을 뱉을 때 아기님의 눈은 떠지는데 주름을 좁히며 열린 그 곳엔 텅 빈 허공만이 존재했다. 검은 두 구멍을 치켜뜨고 입을 열심히 움직이며 저주의 말을 뱉는 모습을 신사 사람들이 보면 확실히 가슴이 아플 거라고 레오는 생각했다. 어쨌든 그들은 자신의 신이 이런 괴악한 모습보다는 존엄한 형태로 있어주기 원할 테니까. 금실로 수놓인 가사로 덮고 온갖 꽃으로 만든 화환을 머리에 씌워주는 그런 불상들처럼. 그런 뜻에서 승려들이 이 일을 못 맡는 게 아닌 가 까지 고민하던 레오는 마저 펜을 움직였다. 음표가 수선스럽게 돌아다니고 박자가 제멋대로 튄다. 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와 함께 잠잠해져 쌔액쌔액 대는 숨소리가 섞여 화음처럼 어우러진다.
“오늘의 무시무시한 복음은 끝난 건가?”
악보 하단에 fine를 날려 적고는 레오가 바닥에서 벌떡 일어난다. 아기님의 두 눈은 닫혀 있었다. 입은 여전히 숨구멍으로만 활용되고 있다. 레오는 자신이 마구잡이로 그려둔 악보를 훑는다. 제법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한 번도 정식으로 작곡을 배운 적이 없는 레오는 무엇이 훌륭한 음악인지 모른다. 단지 자신이 불러서 괜찮으면, 루카가 좋다고 해주면 잘 만든 곡이다.
“흠흠, 그럼 한 곡 뽑아보겠습니다. 1장 1절… 아앗 제목을 안정했다. 불면증에 걸린 작은 신에게 바치는 자장가 정도로 할까.”
아기님이 어째서 저런 말들을 하는지 레오는 알지 못한다. 신의 말을 유일하게 들어줄 사람은 레오지만 그 대상은 레오가 아니라는 걸 며칠에 걸쳐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이제 막 태어난 아기님을 괴롭힌 사람은 누구일까. 혹시 그건 신에게 위탁하는 과거의 사람들 목소리들이 아닐까 하고 레오는 추측했다. 누군가의 간절한 파멸을 원하면서 여과 없이 들리는 속내. 그것까지 모조리 듣고 아기님이 그 목소리들을 꾸역꾸역 뱉어내는 것이 아닐까 하고. 선대의 보모들이 남긴 기록에도 아기님의 말이 정확히 무엇인지 아는 자는 없었다. 레오는 필요한 물건을 매번 가져다주는 이에게 물어봤지만 그는 과묵한 자였고 이번에도 종이를 덧댄 얼굴은 표정을 감춘 채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것이 모른다 인지, 말할 수 없다 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온전히 레오의 망상의 영역이었다. 아무도 답을 주지 않으면 멋대로 생각할 뿐이고, 레오는 그것이 특기였다.
가엾게 저주의 말만 잔뜩 듣고 있을 신에게 레오는 선물을 하기로 했다. 음악을 알려준 게 신인지의 진위는 알 수 없지만 노래를 듣는 게 딱히 싫은 것 같지 않으니. 세상의 들끓는 시름과 탄원 속에서 노래가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기를. 저렇게 조그만 몸을 가지고 있는데 하는 말들이 저런 거라면 딱하지 않은가. 신을 동정하는 게 한없이 주제넘을 지도 모르지만 보모 역할이니 이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하고.
어린 신을 위한 자장가는 레오의 목소리보다는 어른의 목소리가 어울리겠지만 아쉬운 대로 부른다. 모든 것이 가라앉은 세상에 레오의 목소리만이 둥실둥실 떠다닌다. 아기님은 귀도 없고 코도 없지만 어떻게든 들어주겠지. 움직이지 않는 요람을 잡고 은하수를 떠도는 초승달 배에 아기님을 태운 것처럼 노래를 천천히 부른다. 밤하늘에 별이 가득하다. 우주에서 한없이 작을 지구의 작은 아기 신을 위한 자장가는 작지만 아주 다정하게 울려 퍼진다.
“아, 여름이야. 여름…. 진짜 여름….”
레오는 죽어가고 있었다. 선풍기로도 어찌할 수 없는 더위가 신사를 급습하고 있다. 방에 도저히 있을 수 없어 레오는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건물 이쪽저쪽을 서성이다가 산을 등진 툇마루에 나가서야 드러누울 수 있었다. 산의 찬 기운아 모두 이쪽으로 와줘. 푸르른 녹음은 잠깐 더위를 가시게 해주지만 곧 팍팍 찌는 열이 엄습한다. 대야에 물을 받고, 식사를 가지러 오시는 분이 계시면 그 때 수박 같은 것도 달라고 하고. 가능하면 빙수, 아니 에어컨을 요청하는 게 좋을까. 형광등이나 냉장고도 있으니 당연히 전기는 통할 테니. 이러다 사람 잡겠다며 늘어져 있다가 문득 레오는 아기님을 떠올렸다. 아기님도 더위를 탈까?
“아기님, 더워?”
한낮의 야트막한 그늘에 눕혀 있는 아기님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슬쩍 손을 가져다 대본다. 거칠거칠한 피부가 왠지 뜨끈하게 열이 오른 것 같다. 역시 덥지 않을까. 엄연히 살아있는 생물인데.
“실례합니다.”
레오는 요람에서 아기님을 안아들었다. 아기는 생각보다 묵직했다. 혹시 눈을 뜨지 않을까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기며 뜨거운 방 안을 빠져나간다. 확실히 툇마루 쪽이 시원했다.
“방 안에만 있으면 답답하잖아, 그렇지?”
당연히 대답은 없었다. 레오는 잠시 아기님을 바닥에 내려놓을지를 고민하다가 결국 자신의 품에 눕혔다. 다리를 쭉 뻗고 아기님을 품에 안고 산바람을 한껏 머금는다.
“매미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 좀 심심하네. 요양하기엔 딱 좋지만 조금 더 자극적인 일이 있으면 좋겠기도 하고. 아기님도 충분히 자극적이지만, 뭐랄까 그것도 이제 일상이고. 둘이 이렇게 같이 있는 거 말야. 밤에 아기님이 말 안하면 심심할지도 몰라. 그래도 가끔은 좀 예쁜 말을 하면 좋겠지만 그건 무리려나? 심약한 사람들이 들으면 악몽을 꿀 지도 모를 정도던데 역시 내가 여기에 와서 다행이야.”
아기님의 입이 옹알이하듯 움직이지만 깨는 기색은 없다.
“세상에 더 좋은 말이 꽤 많아. 좋아해, 라거나 사랑해! 라거나. 참, 원래 여기로 올 사람은 내가 아니고 내 여동생이었어. 아주 러블리한~! 좋아해와 사랑해를 아낌없이 쏟아 부어야 할 천사라고나 할까. 아기님은 나보다 루카인 편이 좋았을 지도 모르지만 아니 물어볼 필요도 없이 그렇겠지만 나로 참아줘. 루카는 내년에 마을 밖에 있는 도시 고등학교에 다닐 거라고 아주 신나했단 말이야. 그리고 친구들도 만나야 해. 나도 친구가 있긴 한데… 으음, 내 걱정 해주면 좋겠다. 아무 연락 없이 와버렸거든. 내가 학교에 돌아가면 잊어버리는 거 아냐? 그럴 가능성이 높아. 이럴 수가, 더 많이 말해둘걸,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매번 시끄럽다고 하면서도 다 받아주거든. 좋은 친구야. 앗, 그보다 다음 노래 생각했는데 들어봐. 도입부는 굉장히 마음에 드는 중간에 반전이 없다고 할까, 조금 심심한 느낌인데. 한 번 들어볼래? 완성되면 밤에 제대로 불러줄 거니까 지금은 리허설 느낌으로!”
이곳의 좋은 점은 레오가 분이 풀릴 때까지 노래를 불러도 된다는 점이다. 레오는 신나게 목청을 높인다. 산을 향해 외치니 발성 연습도 하는 기분이고. 근처에 폭포라도 있으면 소리꾼의 흥이 날 텐데. 툇마루에 있으니 아기님의 열도 가라앉은 기분이 되어 레오는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음은 정해져 있지만 가사는 없어서 제멋대로 말들이 뛰쳐나온다. 아기님은 땀구멍이 없어서 땀을 흘리지 않네~ 더운 건지 아닌지 모른다네~ 하지만 뱀은 더워해~ 땀구멍이 없는 뱀도 더워하니 아기님도 더울지도 모르지~ 매미 소리 반주가 없는 걸 아쉬워하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 바람이 산을 스치고 지나갔다. 바람이 잦아들고 산도 침묵을 지킬 때도 아무 말 노래는 수박을 먹고 싶다는 가사로 이어지며 한동안 계속 되었다.
레오는 한참 동안 닫혀있던 옷장을 멋지게 열었다. 깊숙이 묵혀둔 이불에선 오래된 냄새가 났다. 누런 이불보를 세탁기에 넣고 솜은 한참을 팡팡 두들겨 먼지를 없앤다. 어젯밤 분명 머리끝까지 이불을 올려 도롱이벌레처럼 잤음에도 너무 추웠다. 이제 여름 이불로는 쌀쌀한 바람을 막을 수 없다. 활짝 열어놓던 창문은 어느새 닫혀있고 수박은 자취를 감췄다. 반바지에서 긴바지로 반팔에서 긴팔로. 옷도 슬금슬금 바뀌었다. 덧붙여 앞머리도 엉망진창으로 되었다. 커튼처럼 눈을 가리는 게 귀찮아서 가위로 재주껏 잘라봤더니 미용 쪽엔 재능이 없다는 확인사살을 받고 말았다. 예상한 것보다 훨씬 짧게, 그리고 고르지 못한 앞머리를 보며 이곳에 루카가 없다는 걸 천만다행으로 여겼다. 유일한 식구인 아기님은 레오의 앞머리가 짧든, 길든 평등하게 밤에는 저주를 퍼붓고 낮에는 입을 열지 않는다. 레오에겐 굉장히 다행인 일이었다.
짧은 앞머리 대행진이란 곡을 막 다 지은 레오는 그제사 허기를 눈치 채고 주전부리를 슬금슬금 꺼낸다. 낮에 삶은 고구마를 잔뜩 받아 그걸 먹어보지만 식어버려서 맛이 덜하다. 불을 쓸 수 있다면 낙엽이라도 긁어모아서 데워보기로 할 텐데 여기에서 불은 금지되어 있다. 군고구마를 생각하면서 레오는 밥 대신 차가운 고구마를 삼킨다. 가을바람을 맞아 빨아둔 이불이 펄럭인다. 녹색으로 가득 찼던 마당은 어느새 붉고 노랗다. 노을과 비슷한 색 속에 노을이 저물고 있다. 레오 옆에는 아기님이 누워있다. 여전히 눈을 꼭 감고 요상하게 큰 숨소리로 숨을 내쉰다.
“오늘 루카 편지를 받았어. 내가 아주 보고 싶대. 이상하게 멀리 있는 학교에 갔을 때보다 더 보고 싶다고. 가까이에 있는데 못 봐서 그런 걸까? 면회라는 느낌으로 누가 찾아와줘도 좋을 텐데. 면회인은 루카가 유일하겠지만. 사실 그게 노림수야. 누구랑 대화를 하는 건 생각보다 근사한 일이거든. 아기님도 어서 커서 누구와 대화하면 좋을 텐데. 신이니까 대화는 안 하나? 그보다 너 자라긴 하는 거야?”
레오는 방석 위에 눕혀놨던 아기님을 안아들었다. 여전히 묵직한 무게지만 여름과 별반 달라지진 않은 것 같다.
“자르는 게 더 이상한가. 넌 아무 것도 안 먹으니까. 이렇게 잘 있는 거 보면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아기님은 뭘 먹고 자라는 거야? 공기를 먹으면서 사실은 점점 살찌고 있는 건가. 말도 살찌는 계절이니까 좀 커지는 것도 어때? 아가님도 가을 공기를 먹고 포동포동~ 오옷, 다음 곡은 이거다!”
마루에서 신나게 다리를 동당거린다. 아기님도 같이 우쭐우쭐 댄다. 한참을 그러다 신사 승려가 보면 크게 화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저도 모르게 다리를 얌전히 내린다.
“그러고 보면 너는 크면 더 이상 아기님이 아닌데 뭐라고 불리는 거야? 다른 호칭이 생기는 거야? 비샤몬님 같은 거?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부르면 좋을 텐데 왜 아기님은 아기님인 거지.”
레오는 대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아기님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가 두 눈을 껌벅인다.
“앗, 설마 이거 콧구멍? 너 코 생긴 거야?!”
우둘투둘한 피부여서 눈치 채기 어려웠지만 꽉 감긴 두 눈, 아래에 있는 입 그 사이에 아주 작은 구멍이 보인다. 정말로 코라도 되는 양 두 구멍이 나란히 점 찍혀 있다. 레오는 살짝 손을 그 구멍에 가져다 대본다. 들숨이나 날숨은 전혀 느껴지지 않지만 어쩐지 코라는 확신이 들었다.
“오옷, 아기님도 열심히 자라고 있구나! 어른님으로 으쌰으쌰 한 걸음을 걷고 있는 거야? 역시 이름이 뭔지 알려달라고 하는 게 좋겠어! 정말 이름이 어른님이면 슬프잖아. 내 이름이 츠키나가 학생이라면 엄청 끔찍해! 어른이 되면 개명해야 할 것 같은 이름!! 그러면 너를 뭐라 부르는 게 좋을까…. 아시다시피 나 언어 센스가 없어서. 가사나 이름 짓기는 내 영역이 아닌 것 같단 말이지….”
레오는 그렇게 말하며 마당을 멍하니 본다. 붉게 물든 하늘이 마당에 진한 색으로 내려앉아있다. 마당에 있는 커다란 나무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집 안까지 들이닥치는 걸 보던 레오는 문득 이름을 하나 입에 담았다.
“스오, 스오…. 음, 스오 어때?”
아기님에게 동의를 구해보지만 대답은 없다.
“여기에 있는 나무, 벚나무래. 일기장에 써 있었어. 이 밑 신사에도 벚나무가 잔뜩 있거든. 근데 그 벚나무들 다 하나 같이 붉은 벚나무여서 말야. 붉은 벚나무 밑에는 시체가 묻어 있다고들 하니까 루카랑 몰래 밑을 파보다가 들켜서 혼이 잔뜩 났었는데. 여기도 신사에 있는 거와 같으면 붉은 벚꽃이 피지 않을까? 마침 내가 너를 돌보는 날도 봄까지고, 그 때 쯤이면 저 나무도 벚꽃이 피겠지. 아마 너도 아기님에서 다른 신이 될 테고, 그건 또 다시 태어나는 느낌이 아닐까. 그래서 붉은 벚꽃을 따서 스오(朱桜)! 이의 없으면 이대로 낙찰!”
레오의 목소리만 쩌렁쩌렁 울린다. 아기님은 눈을 뜨지 않고 숨을 내쉰다. 어감 좋지, 스오~ 스오~! 한동안 소란스럽게 굴다가 즉석에서 지어낸 스오 합창곡을 솔로 파트로 부르기 시작한다. 옆에는 먹다 만 고구마가 굴러다니고 아이의 고사리손 같은 단풍이 산을 뒤덮어 갈 때 레오는 멋대로 신의 이름을 붙였다.
산에서 넘어 온 마른 낙엽이 한창 마당 바닥을 뒹굴던 때는 레오도 바빴다. 레오가 보기엔 가을의 정취가 물씬 느껴지는 자연의 일부였는데 승려들의 생각은 다른 듯 했다. 아기님을 모시는 신사에서 지저분함은 용납 못한다는 말에 레오는 낙엽이 쌓이면 어김없이 비로 쓸어야 했다. 가을은 하루 종일 낙엽과 싸워야 했어서 더 이상 나무가 떨궈낼 잎이 없는 겨울이 반가울 지경이었다. 물론 하늘에서 떨어지는 흰 낙엽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지만.
“…이 상태인데 정말로 해도 되나요.”
코가 잔뜩 막힌 목소리로 레오가 물었다. 상대는 무어라 한자가 쓰인 종이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난처해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상대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레오가 쿨쩍이며 콧물을 삼켰다. 저녁 식사와 함께 받은 것 중엔 두터운 담요와 감기약도 포함돼 있었다.
“추워서 먼저 들어갈게요. 눈 쌓이기 전에 빨리 내려가세요.”
매번 상대가 내려가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지만 머리를 잔뜩 누르는 고열 속에서는 도저히 서 있을 자신이 없었다.
여전히 하늘에선 하얀 눈이 팝콘처럼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어제는 분명 눈을 뜨고 세상을 가득 채운 흰 풍경에 탄성도 질렀었는데, 마당에 쌓인 모든 눈을 치워야 한다는 현실을 깨달았을 때 레오는 속으로도, 밖으로도 커다랗게 비명을 질렀다. 결국 눈을 치우다가 덜컥 감기에 걸린 게 현재 꼴이다. 연거푸 터져 나오는 기침에 목도리 입을 말고 죽은 듯이 누워서 머리의 두통과 힘겨운 실랑이를 했다. 와중에 또 쏟아지는 눈을 보며 항복 버튼이 있으면 누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콜록일 때마다 두터운 솜이불이 같이 움직인다. 승려들이 임시방편으로 가져다 준 전기 히터가 빨갛게 물드는 걸 레오는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지만 이불 밖으로 발 한 짝만 빼도 온몸에 오한이 들 정도로 춥다. 춥거나, 덥거나 하나만 해줬으면 좋겠는데. 눈앞이 어질어질하다. 다 먹지 못한 죽그릇이 방구석에 보인다. 부엌에 가져다 놓을 정도의 힘도 남아있지 않다. 레오는 눈을 뜨고 다시 감았다.
아주 잠깐 눈을 붙였을 뿐인데 시곗바늘은 한참 돌아가 있었다. 시침이 2를 벗어나있다. 레오는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현기증이 들어 비틀거리면서도 요람 쪽으로 다가갔다.
“미안, 오늘은 조금 지각.”
잔뜩 잠긴 목소리가 요람의 아기님, 스오에게 떨어졌다. 어둑한 방에 아기님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다.
“좀 병균이 섞여 있을 거야. 스님들이 괜찮다고 했는데 걱정은 되네…. 감기에 걸린 신은 들어본 적이 없다지만. 아기에게 나쁜 병을 옮기는 어른이 된 기분이야….”
그리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간다. 스오의 피부는 더 단단해져 있었다. 추위를 버티기 위해서 일까. 벌어지는 아기 입에 입술을 누르고 열이 가득한 숨을 전달했다. 너무나 익숙한 의식을 마치고 레오는 종이 걸려있는 밖으로 이동했다. 창문만 간신히 열어 처마에 매달려 있는 종을 힘줘 흔들었다. 기묘하게 밝은 한밤중에도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내일 올라오는 사람도 여간 고생이 아니겠다. 창문을 닫고 그 자리에서 미끄러진다. 이대로 자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었다. 한참을 휴휴 숨만 내쉬다가 결국은 엉금엉금 기다시피 들어와 방문을 닫았다.
“두 눈을 파내어 새 먹이로 줘도 모자랄 새끼.”
스오가 떠드는 목소리가 들렸다. 건강하네. 안도의 한숨인지 열을 뱉어내려는 한숨인지가 흘렀다. 레오는 다시 이불 속으로 몸을 묻었다.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지옥에 떨어지는 말을 자주 들어서일까 정말로 지옥의 열탕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긴장이 풀렸는지 혹은 약이 독해선지 눈은 금세 감긴다. 의식을 놓는 게 아닌 누군가 끊어버리는 것 같았다. 레오는 검은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오늘은 왜 노래 안 불러?
꿈속의 누군가가 물었다. 레오는 소리 내어 대답하려 했지만 거한 기침만 튀어나왔다. 목구멍 속의 깔깔한 무언가가 목과 가슴을 쥐어뜯는 것 같다.
-매일매일 불러놓고서 왜 그만 두는 거야? 성실하지 않은 사람은 싫어.
대답해야 되는데. 감기에 걸렸다고.
-나에게 바치는 노래도 엄청 만들었잖아.
-나를 찬양한다고 했잖아.
-난 너의 신이잖아.
아이가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다음날, 감기는 씻은 듯이 나아있었다. 자면서 땀을 엄청 흘렸는지 녹진해진 베개에서 레오는 추욱 처진 몸을 일으켰다. 씻어야 할 것 같은 찝찝함은 여전하지만 머리를 지배하던 열이 사라져 몸은 한결 가벼워졌다. 배도 고프고, 마당의 눈도 치워야 할 테고.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은 와중에 레오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스오에게 다가가는 일이었다. 괜히 머리에 손을 대어 열이 있나 없나를 재어보고는 평소와 똑같은 상태에 한시름을 놓는다. 요람을 잡고 목을 몇 번 크흠 큼 하며 가다듬었다. 그리고 언제 만든 지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는 어느 노래를 부른다. 감기에 잔뜩 절여있던 목이 뱉어내는 소리는 아주 형편없었다. 그럼에도 레오는 계속 노래를 이어나갔다. 어째선지 그렇게 해야 할 것만 같았다.
*
레오는 창문을 열었다. 날카로운 추위를 두르다 한껏 상냥해진 바람이 눅눅한 공기를 비집고 들어온다. 레오는 새로 가져온 강보를 밑에 깔고 요람에서 스오를 들어올린다. 어제 갈아줬음에도 아기님을 감싸고 있는 강보는 벌써 갈색 진물이 얼룩덜룩 배어있다.
스오는 울지 않는다. 그래서 더 상태를 알 수 없었다. 아픈지, 괜찮은지, 괴로운지, 아무렇지도 않은지, 견딜 수 없는지. 겨울의 끝이 다가오면서 스오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 기록에도 그랬던 것처럼 아기님의 거친 피부는 무언가 곪아가는 것처럼 화농이 생기는가 싶더니 이제는 온몸으로 번졌다. 지독한 피부병에 걸린 모습이다. 레오는 헌 강보를 벗겨 스오의 몸을 꼼꼼히 살핀다. 스오에게 생긴 건 코뿐만이 아니었다. 몸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지만 팔과 다리도 조그맣게 나 있었다. 인간의 형태처럼 어깨와 이어지는 게 아닌 몸통에 생긴 아주 작은 그것은 어떻게 보면 올챙이에 생겨난 다리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때만 해도 건강했는데 지금은 고름에 뒤덮여 그 작은 팔다리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어떠한 약을 쓸 수도 없다. 수없이 요청을 해보았지만 돌아오는 건 거절뿐이었다. 기록과 같았다.
레오가 사는 작은 신사에 수많은 기록도 그 끝은 자세히 서술되어 있지 않다. 마지막 날을 고대하고 그리고 갑작스럽게 끊긴다. 그래서 길러진 신은, 그를 돌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레오도 이곳을 떠날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인가.
젖은 수건으로 흐르는 진물들을 훔친다. 꼭 감긴 눈두덩에도 화농은 여지없이 피어있다. 언제부턴가 스오에게 들려주는 노래는 아픔아 날아가라 같은 노래들로만 되었다. 자신이 뭔가 잘못한 건 아닐까. 이런 상태가 정상일리 없다. 그럼에도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한참을 몸을 닦아주고 새로운 강보로 작은 신을 감싼다. 어느 때보다 더 무력해 보이는 존재가 요람에 눕혀진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온화하다. 임무의 끝이 점점 다가오고 있어 초조함이 더해진다.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이에게 스오의 상태를 온전히 보이면서 이대로 방치해도 되냐고 윽박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나 때문이야?”
레오는 그렇게 묻고는 벌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기다린다. 어떤 일이 있어도 스오가 대답한 적은 없고 이번도 역시 그러했다.
“바람을 좀 쐬는 게 좋을까? 움직이지 않는 게 더 좋은 걸까?”
의사가 아닌 레오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다. 저절로 튀어나오려는 한숨을 레오는 눌러 담았다. 모르긴 몰라도 레오보다 스오 쪽이 더 괴로울 건 뻔했다.
강보 밖으로 아기의 작은 손이 비죽 나와 있다. 손가락을 가져다 대면 마주 잡아줄 것 같지만 축 늘어져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다. 밤에 뱉던 말도 요즘은 전혀 하지 않는다. 간신히 들리는 숨소리만이 요람 속의 아기가 살아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내가 뭘 하면 되지….”
방금 갈아준 흰 천이 점점 누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밖은 꽃향기가 간지러울 정도로 산과 신사를 휘감고 있다. 여전히 벌레 하나도 보이지 않는데 신사 근처엔 꽃이 만발하다. 벌이 없어도 꽃이 필 수 있는 건지, 아니면 레오가 보이지 않는 사이 슬쩍슬쩍 자연이 스스로 생태계를 굴리고 있는 건지. 겨우내 아픈 이도 기력을 차린다는 봄기운이 만연한데 스오는 나아지질 않는다. 화농은 점점 심해져 딱딱하게 피부처럼 자리 잡았다. 원래 거칠다고는 해도 저런 고름으로 얼룩덜룩할 정도는 아니었다. 딱딱하게 굳은 그것은 해변의 암초에 제멋대로 들러붙은 따개비들 마냥 몸의 일부처럼 굴고 있다.
신사의 승려들은 그들의 신을 죽이려는 거야? 레오는 기록을 이 잡듯이 뒤졌고, 매번 아기님의 상태에 대해 언급했으며 그 어떤 소득도 얻지 못하고 무력하게 숨을 불어넣는 일만 할 뿐이다. 아기의 입술이 제대로 열리지 않아 그것마저도 쉽지 않았다.
아기님이 떠들지 않아 고요한 밤에 레오는 계속 잠을 설쳤다. 언제든 그가 도움을 요청하면 그것에 응답하기 위해 요람 아주 가까이서 그를 보고 잔다. 그렇게 뜬 눈으로 요람을 지켜보다가 푸른 새벽이 한 걸음 물러나며 점점 그 빛을 잃어갈 때 기절하듯이 잠들었다.
날은 이상하게 빠르게 삭제되어 갔다. 자신만 시끄럽고 세상 모든 것이 고요하던 날들이 점점 사라지는 게 안타까워 잠드는 순간마저도 아쉽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점점 밝아지는 하늘을 보고 나서야 레오는 이불로 들어갔다. 너무 정이 들었다. 신에게 정들다니 웃을 수 없는 농담이다. 그래도 내가 돌봐야 할 아기였고, 신이라고 해도 저주를 아주 또박또박 잘 말한다 말고는 보통 아기 같았고. 스스로 움직일 수도 없어서 안고 다녀야 하고, 점점 바뀌는 계절을 보여주며 멋대로 떠들고.
정말 혼자 즐거운 나날이었다. 아무도 레오를 무시하지 않았고, 아무도 레오를 부정하지 않았다. 흐릿하게 붕붕 겉돌던 나날 속에 이상하게도 스오와 같이 있으면 주변 색이 진해졌다. 모든 자연은 그 앞에서 숨을 죽이면서도 풍성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스오와 함께 해서 그 모습들을 모두 볼 수 있었다.
마당에 있는 벚나무도 붉은 꽃망울을 잔뜩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다. 역시 그 나무는 붉은 벚나무가 맞았다. 레오는 스오를 안고 그 나무 밑에서 둘만의 벚꽃놀이라는 멋진 계획을 잡아놓고 있었다. 그의 이름을 딴 나무 밑에서 그 이름을 한 작은 신과 벚꽃놀이.
‘아픈 건 반칙인데….’
점점 딱딱해진다고 볼 수밖에 없는 스오를 떠올리고 레오는 베개에 얼굴을 박았다. 역시 내가 오는 건 잘못된 거였어. 의사가 왔어야 했어. 나는 아무것도 몰라. 뭘 잘못했는지 조차도 몰라. 잠을 못 잔 탓인지 두통이 머리를 눌러왔다. 잠을 자기도 미안했다. 그럼에도 피곤한 의식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레오 발치로 무언가 툭 닿았다. 레오는 허리를 굽혀 그것을 주워들었다. 색실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붉은 공이었다. 공이 굴러온 쪽에서 키득키득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붉은 기모노를 입은 여자 아이가 나무에 숨어 레오를 보고 있었다. 나무에 매달린 벚꽃이 잎을 뿌리고 있다. 레오는 공을 내밀었다. 꺄르륵 웃는 소리와 함께 아이가 냉큼 나온다. 손을 뻗으며 달려오는 아이의 붉은 머리가 나부낀다 싶더니 곧장 품으로 뛰어 들어왔다. 허리를 끌어안는 손길과 함께 높게 터지는 웃음소리가 선명하다.
그리고 레오는 눈을 떴다. 낯선 흰 천장이 높게 자리 잡고 있었다. 눈만 몇 차례 깜박이다가 레오는 몸을 일으켰다. 끼익하며 철제로 만들어진 무언가가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레오는 어리둥절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난간이 붙어 있는 침대가 보이고 손목에 연결된 얇은 튜브가 길게 이어져 높이 있는 투명한 링거액과 닿아있다. 희고 깨끗한 병실, 열려있는 창문, 나부끼는 커튼.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인물에 레오는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텐시…?”
창문 밖을 보고 있던 남자가 돌아선다. 레오와 같은 환자복을 입고 있는 남자, 텐쇼인 에이치가 레오와 눈이 마주치자 빙긋 웃어왔다.
“일어났구나, 츠키나가 군.”
오랜만에 보는 그는 여전했다. 꿀로 빚어놓은 것 같은 화사한 금빛 머리와 보석처럼 박힌 푸른 눈동자에 천사 같은 얼굴. 그리고 환자복을 입고 있는 것마저도.
“병문안을 받았으면 받았지 누구에게 가는 건 처음이라 굉장히 어색했어. 심지어 상대는 혼수상태라니.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느껴볼 수 있는 좋은 체험이었다고 해야 할까.”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에이치는 어제 만난 것처럼 여상하게 말을 건넸다. 레오가 정신을 잃고 있었던 건 약 사흘. 창밖에선 한창 만발한 분홍 벚꽃들이 조심스럽게 꽃잎을 뿌리고 있었다. 에이치와 처음 만났을 때는 좀 더 추운 계절이었다. 연신 기침을 하며 커다란 병원에 갇혀 있는 천사. 도시에서 왔다고는 하지만 레오는 그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해도 믿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반짝반짝하고 예쁜 사람이었다. 심지어 노래하는 목소리도 아름다웠다. 커다란 병실에 갇힌 카나리아 같은 그를 찾아가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체스를 두기도 하고, 레오가 만들어준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그의 음색에 맞춘 노래만 생각해도 당장 곡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레오는 에이치에게 열중했었다.
“텐시는 계속 여기에 입원해 있었던 거야?”
“그런 건 아니야. 나도 일단은 학교를 다녀야 하고. 츠키나가 군과 헤어지고 난 그 날 후에 나도 일단 돌아갔어. 지금은 때가 때니까 여기로 다시 왔지만 말이야. 공기 좋은 곳이니까 요양 겸 해서 말이지. 그보다 츠키나가 군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병’은 고쳐졌어?”
눈을 가늘게 뜨며 웃는 모습을 흘겨보다가도 레오는 고개를 돌렸다. 웃는 얼굴에 침도 못 뱉는다고도 하지만 저렇게 천상에서 갓 내려온 듯한 얼굴에 도저히 뭘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아쉽게도 열렬히 앓는 중. 텐시는 여전히 얼굴은 예쁜데 심술궂네.”
“내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마을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어서 놀랐어.”
“떠난 게 아니고 거의 쫓겨나다시피 나온 거지만. 부모님은 내 병이 고쳐지길 바라서 어엄청 떨어진 외딴 신학교에 넣었다고. 다른 의미로 수도원 생활을 했지. 그래도 여기가 훨씬 정숙하다고. 폐쇄된 학교는 뭐랄까, 위험하거든.”
“그래도 거기엔 내가 없잖아? 츠키나가 군에겐 지금이 더 위험한 거 아냐?”
“오옷, 언제 봐도 대단한 자신감!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텐시의 망상에 맡겨볼까~”
“차가운걸. 이래봬도 나는 제법 츠키나가 군을 그리워했어. 좋아, 그럼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그렇게 마을에서 나간 츠키나가 군이 돌연 이곳으로 돌아오고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다가 혼수상태로 병원에 입원하게 된 경위라던가?”
가만히 웃고 있는 푸른빛이 예리하게 레오를 찌르고 있는 것 같았다. 레오는 그 시선을 말없이 받아들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텐시는 다 알고 있잖아?”
“알고 있는 것과 본인이 확인시켜주는 건 다르지.”
“으음, 잘 모르겠는걸.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하는지도. 잘못 말했다간 우리 가족에게 무시무시한 위협이 닥칠지도 모르고.”
“그런 츠키나가 군에게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줄게. 이 마을에서 츠키나가 군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공공연한 비밀이야. 사정을 모르는 어린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해.”
“역할이라면?”
“츠키나가 군이 어린 신의 보모 역할이었다는 것. 그런 츠키나가 군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이 땅에 신이 강림했다는 것 정도?”
“에, 뭐야. 다 알고 있잖아. 내가 텐시에게 알려줄 건 없겠는걸. 스오가, 아니 아기님이 어떠했는지 이런 건 절대 말해선 안 된다고 했으니까. 신이 강림했다고 했지? 그렇다면 아기님은 무사하단 얘기네.”
“그래, 츠키나가 군이 키운 신은 무사해. 아니 낳았다고 해야 할까? 그 역할은 9개월이라고 들었어. 의미심장하지 않아? 인간이 아이를 배에 품은 것과 같은 기간이야.”
레오는 묵묵히 아기님을 떠올렸다. 에이치는 아기님과 지내지 못해서 저런 말을 하는 거다. 오히려 레오가 작은 신에게 의지해 살아갔다. 마지막 기억은 아픈 모습들 밖에 없다. 고름에 집어삼켜지듯 크지도 않은 몸이 잠식되는 광경. 어떻게 잘 나았을까. 찾아간다고 하면 모습을 보게 해줄까. 아기님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 거부당하는 건 아닐까.
속마음과 다른 이야기를 레오는 불쑥 뱉었다.
“텐시는 의외로 그런 것들을 잘 믿네. 도시에서 왔는데 신이라느니. 현실주의자 아니었어?”
“신은 있다고 믿어. 신에게 사랑받는 자들을 보면 확실히 있지 않을까? 그 신이 나를 봐주지 않는다는 것쯤은 물론 알고 있고. 그걸 혹자는 재능이라고 칭할 수도 있겠지. 신이란 건 정확한 형체가 없기도 하고. 하지만 츠키나가 군, 이곳은 좀 특별해. 츠키나가 군은 직접 봤겠지만 이곳은 신이 내려서는 땅이잖아?”
“헤에, 이 마을 오컬트 마니아들의 성지였구나.”
“오히려 그쪽 무리들은 이곳을 모를 거야. 위에서 정보를 단단히 통제하고 있거든. 그 혜택을 자신들만이 얻기 위해 섣불리 밝혀지지 않도록. 그렇다면 어디에서 유명할 것 같아? 온갖 부와 명성을 거머쥐고 세상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고 싶은 자들이 이곳을 알고 있어.”
“텐시네 집 같은 곳을 말하는 거야? 어째서?”
“생각해봐. 공기가 좋다는 것 하나 만으로 하나 뿐인 후계자를 이 먼 곳까지 보냈을까? 이런 산골 벽촌에 최신식 설비가 갖춰진 큰 병원이 어째서 있는 걸까? 할아버지는 요양이라는 명목상의 이유만 내게 말했지만 수상한 냄새가 나도 너무 나잖아? 나도 내 나름의 정보망이 있으니까 이것저것 캐봤어. 그리고 어떤 결론에 도달했지. 이곳에 적을 두면 신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는 걸. 너는 이곳에서 태어났으니 아주 자연스럽게 그 은총을 받을 기회를 가지고 있지. 이건 널 폄하하려는 건 아니지만, 어쩌면 츠키나가 군의 천재성도 이 땅에서 태어났기 때문일지도?”
희고 긴 손가락이 미끄러져와 머리를 볼을 차례로 쓸어 만지면서 에이치가 눈을 가늘게 휘며 웃는다.
“츠키나가 군의 고향은 다른 이름으로 아주 유명하거든. 신이 보살피는 땅이라는 이름으로 말야.”
*
레오의 퇴원 수속은 금방 끝이 났다. 의사는 레오에게 과로라는 진단을 내렸고 걸려있는 수액을 맞은 후에 곧장 집에 가면 된다고 했다. 과로로 사흘을 의식불명이 될 수 있는지 의문이지만 레오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은 별로 좋아하지 않고 굳이 이유를 붙여가며 더 있을 필요도 없었다. 병원비는 누가 냈는지 모르지만 이미 완납된 상태. 병실에 남아있는 에이치에게 또 오겠다는 작별 인사를 남기고 레오는 병원을 빠져나왔다.
꽃가루로 코가 간질거릴 정도로 봄은 이미 완연했다. 레오는 천천히 발을 옮긴다. 에이치의 말을 들어서이기 때문일까, 유독 고급 승용차들이 많이 보이는 듯 했다. 그러고 보면 외진 곳인데도 기묘하게 별장이 많았었다. 딱히 관광객이 오는 것 같지도 않은데. 봄이라 들뜰 법도 한데 마을은 여전히 조용하다. 차가 지나가는 소리, 멀리서 들리는 새소리 같은 자잘한 소음만 간간히 들릴 뿐이다. 한동안 아주 조용한 곳에 있었지만 역시 사람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은 뭔가 이상하다.
집으로 가는 대신 레오는 신사 쪽으로 향하는 언덕길을 올랐다. 돌계단이 끝없이 이어진 곳이 묘하게 소란스러워 보였다. 신사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자 평일 낮의 신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참배객들이 있었다. 검은 양복을 단단히 입고 있는 사람들에서부터 기모노를 입은 사람, 뾰족한 힐을 신은 사람들이 제각기 웅성이며 그들의 소음을 만들고 있었다. 이 사람들 전부 아기님을 보러 온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레오는 기웃거리며 신사의 사람들을 찾았다. 전에 신사에 왔을 때 봤던 무녀를 발견하고 레오는 급히 그쪽으로 다가갔다.
“아아, 일어나셨군요. 지금 주지스님께 말씀 드리고 올게요.”
그녀는 역시 종종 걸음으로 사라졌고 조금 후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주지스님이 안쪽에서 얘기하고 싶다고 하셔서요. 같이 가주시겠어요?”
레오는 고개를 끄덕이고 무녀의 뒤를 따랐다.
본전으로 들어서는 웅성거리는 소음들이 사그라지고 가라앉은 공기와 신사의 특유의 냄새가 레오를 반겼다. 어쩐지 익숙한 향기. 아기님과 함께 지냈던 건물에서도 비슷한 향이 났던 것 같다. 전에 루카와 같이 들어갔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커다란 안경을 쓴 주지스님은 가장 깊은 방에 있었다.
“오랜 기간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덕분에 츠카사님은 무사히 자라나셨습니다. 츠키나가 씨가 고생해주신 만큼 신사에서도 그에 따른 합당한 보답을 드릴 예정입니다.”
“츠카사님이라면… 아기님?”
“예, 이제 더 이상 아기가 아니시니까요.”
역시 이름이 있었구나. 레오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혹시 츠카사님을 만날 수 있나요?”
“지금은 좀 힘듭니다. 밖의 사람들을 보셨지요? 모두 츠카사님을 만나러 멀리에서 오신 분들입니다. 일일이 다 만나드리면 아무리 신이라 해도 몸이 남아나시지 않겠지요. 이제 막 땅을 제대로 디딘 참이니 무엇보다 안정이 제일이지요.”
“…그렇군요.”
레오는 납득했지만 섭섭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 아기님, 아니 츠카사님의 상태는 괜찮나요? 제가 쓰러져버리는 바람에…. 한창 피부병 같은 거에 시달려서요….”
레오가 어물거리며 묻자 주지승은 이번에도 담담히 대답했다.
“아주 편안하십니다. 츠키나가 씨가 돌보던 그것은 껍질 비슷한 것입니다. 신의 혼이 땅에 자리 잡기 전에 날아가는 걸 막기 위해 두터운 껍질로 막아둔 거지요. 지금은 그 껍질을 깨고 나오신 상태입니다. 그 즈음에 곁에 있는 자들이 대부분 기력을 뺏기어 혼절 비슷한 현상을 보이는데 츠키나가 씨도 비슷한 경험을 하셨지요?”
“진짜 어디 아픈 게 아니라면 다행이겠네요. 그렇다면 지금은 아기의 모습이 아니겠군요. 원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앗, 곤란한 대답이라면 딱히 안 들어도 괜찮으니까―.”
“아닙니다, 츠키나가 씨라면 들어도 괜찮겠지요. 숨길 것도 아니고요. 신의 모습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정하는 건 당시 지상 곁에 있던 사람의 역할이 지대하지요. 츠카사님의 여러 모습을 기록에서 등장하지만 저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입니다. 이번 츠카사님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계십니다. 모든 것은 당신 덕분입니다. 당신의 선대의 기록도 남아있는데, 그 때도 츠카사님은 사람의 모습으로 내리셨다고 합니다. 역시 츠키나가 가문이라는 말이 절로 나왔지요.”
주지승과 이야기를 마치고 나오면 붉은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경내에는 여전히 사람이 많았다. 그들을 스쳐지나가며 레오는 어쩐지 멍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성취감은 없었다. 레오의 역할은 끝났다. 집에 돌아가서 루카에게 안부를 전하고 다시 답답한 학교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변에 있지만 고요하던 그 날이 덜 외로웠던 것 같다. 현실 감각이 자꾸 멀어진다. 부유하며 걷는 기분이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돌계단의 끝이 보인다. 일상에 돌아왔다는 걸 고하는 것 같았다.
순간 큰 울림이 느껴졌다. 땅 전체가 울리어 레오는 주춤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잔뜩 꽂힌 도리이는 여전히 평온하게 서 있고 발밑의 돌도 여전하다. 하지만 분명히 지진 같은 게…. 생각은 다 이어지지 못했다. 머리에 또다시 강한 울림이 일어난다. 세계가 아니라 레오의 머릿속이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갑자기 높은 곳으로 끌려간 것처럼 숨이 막히고 머리가 꽝꽝 울렸다.
‘토할 것 같아….’
무릎이 풀린다 싶더니 몸이 풀썩 쓰러진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일어나니 기억에 없는 천장. 오늘만 해도 두 번이나 겪는 광경에 레오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병약하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는데 기절만 두 번째라니. 어둠에 익숙해진 두 눈이 거뭇하게 주변을 살핀다. 굉장히 오랜만인 벽지. 레오의 방이었다.
목까지 잘 덮여있는 이불 속에서 레오는 몸을 꿈틀거리며 일어섰다. 방문을 나서면 2층 복도는 어둡지만 1층에선 환한 불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어머, 일어났니? 몸은 괜찮아?”
“…응, 괜찮아.”
부엌에 있던 어머니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하던 설거지를 내버려두고 아들의 안색을 살폈다.
“나 어떻게 여기에 왔어?”
“신사 계단에 쓰러져 있는 걸 마을 사람이 발견해서 여기까지 데려다 주셨어. 퇴원하자마자 신사로 가다니 너무 무리한 거 아니니.”
어머니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며 레오는 머쓱하게 웃었다. 위에서 대단한 걸 한 기억은 없다. 누가 가도 손쉽게 할 수 있는 일들뿐이다. 낙엽 청소와 눈 치우기만 좀 힘들었지, 사실 그건 아기님과 관련이 있는 일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거실에서 신문을 보고 계셨다.
“수고했다.”
여전히 신문을 내리지 않은 채 그의 아버지가 말했다. 레오도 대답했다.
“아, 응. 학교는 어떻게 됐어?”
“사정 설명하고 휴학계 내뒀다. 언제쯤 돌아갈 거냐.”
“루카 보고. 다음 주 주말에 온댔으니까 보고 가야지.”
아기님과 1년을 가까이 있는 동안 루카는 고등학생이 되어 마을 밖에 있는 학교를 다니고 있다. 이 마을에 자신이 할 것은 더 이상 없었다. 어색한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레오는 저녁을 마다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다시 침대로 꿈틀꿈틀 기어들어가 눈을 깜박인다. 목재로 된 건물 대신 베이지색이 엷게 발린 벽지와 익숙한 책상을 바라본다. 그곳에선 심심하면 노래를 불렀다. 외로울 때도 불렀고, 신이 날 때도 불렀다. 낙엽이 떨어져도 불렀고 바람이 지나갈 때도 불렀다. 유일한 청중은 아무 불만도 말하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고요 속에서 들리던 노래는 꽤나 근사했다고, 우쭐거리며 생각하던 나날이 멀다. 고작 며칠만 지났을 뿐인데. 지금 그렇게 커다랗게 노래를 부른다면 어머니가 올라올 것이고 아버지의 불편한 기침 소리를 들을 것이다. 레오는 이불 속으로 몸을 파고들었다. 익숙한 정적인데도 전혀 익숙하지 않았다.
*
“그래서 주말까지만 여기 있고 다음날 학교로 돌아갈 거야.”
에이치와 레오가 앉아있는 벤치에 엷은 분홍빛 꽃잎이 살랑살랑 떨어진다. 새삼 느꼈지만 이곳의 병원은 크기 치고는 환자가 많지 않다. 날이 좋은 날인데도 병원 정원에 있는 건 에이치와 레오 둘 뿐이었다.
“생각보다 빨리 돌아가네, 츠키나가 군.”
“여기서 특별히 할 것도 없고. 한 학기를 통째로 빠졌으니 틀림없이 유급이다~! 일 년을 더 다녀야 한다니 최악이야….”
“츠키나가 군은 소원을 빌지 않아?”
“소원, 글쎄….”
에이치는 레오에게 알려주었다. 이곳이 특별한 이유, 그것은 신이 강림했을 때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한다. 그것이 어떤 소원이든, 무조건. 물론 그에 따른 대가 역시 따라온다.
평생 놀아도 굶어죽지 않고 펑펑 돈을 쓰고 싶다는 소원을 빈 자가 있었다. 당시의 신은 그 소원을 들어주었다. 업계를 독점하던 기업의 주식이 곤두박질치면서 소원을 빈 남자가 퇴직금 대신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야만 했던 주식이 아주 큰 폭으로 상승했다. 그는 순식간에 부자가 되었고 그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이러한 주가변동의 이면에는 해당 기업의 임원진과 대표 가족의 몰살이 있었다. 그들을 태운 비행기가 원인 모를 고장을 일으켜 바다에 그대로 곤두박질쳤고 그들의 시체조차 제대로 건질 수 없었다. 소원의 대가는 이런 식이라 했다. 하나의 소원으로 한 사람이 행복을 얻는다면 그 만큼의 사람이 혹은 그의 배가 되는 사람들은 불행해졌다.
물론 여기에 모인 자들은 그 리스크도 개의치 않아 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소원을 적을 수 있는 자들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에 한한다. 즉, 그 사람의 적이 이 마을이어야 할 것. 이 때문에 많은 유력 인사들이 이곳에 들어오기 위해 무던히 노력을 한다고 한다. 그 노력의 결과로 교통이 지독히 불편한 이 시골 마을이 사실은 상당히 부유한 마을이라고 에이치는 설명했다. 그리고 신을 모시는 이들을 중심으로 한 종교도 비밀 결사 모임처럼 굳건해지고 폐쇄적이 되고 있다고.
그런 그들에게 오랜 기다림 끝에 신이 내려왔다. 물밑으로 마을 사람을 포섭하여 소원을 위탁하는 모양도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소원은 사랑 당 하나로만 정해져 있기에.
무엇이든지 이루어지는 건 확실히 매력적이지만 레오는 홀로 행복한 것보다 다 같이 행복해지는 게 좋았다. 그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것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역시 난 딱히. 생각나는 것도 없고….”
팔짱을 끼고 다시금 생각해보지만 여전히 답은 똑같다. 에이치에게 그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레오는 자신의 소원에 대해 생각해봤다. 지구상의 모두가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다. 유치원생이 할 법한 것이 당장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무리인 건 뻔했다. 핏줄로 연결된 가 간의 사이도 이렇게 엉망진창인데. 세계 모두가 행복해지려면 여기를 넘어선 우주 전체가 고통스러워지지 않을까. 결과적으로 레오가 바라는 건 없다.
“텐시는 건강해지는 거?”
“응. 이것만은 내 어떠한 능력으로도 고칠 수 없는 거니까. 신이 손을 내밀어 준다는데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고.”
레오는 에이치의 환자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 집보다 병원에 오래 있는 삶을 레오는 감히 헤아릴 수 없다. 그가 얼마나 건강한 몸을 원할 지는 레오도 손에 잡힐 것처럼 느껴졌다. 그의 노래에는 생명에 대한 열망이 담겨 있어 더 아름다웠다.
“나 소원으로 텐시가 건강해지는 거 쓸까?”
레오가 불쑥 말했다.
“그래도 괜찮겠어? 하나 뿐인 소원이야.”
“원래 소원을 빌 생각도 없었고. 내가 될지 모르지만 이왕이면 친구가 건강해지는 게 좋으니까. 다만, 그 소원을 통해 누가 불행해 질지는 신경 쓰이지만….”
“굉장히 기쁜 말이지만 조금 더 심사숙고하는 게 좋지 않을까? 집의 비원이 있을 수도 있고, 츠키나가 군이 자주 말한 사랑스러운 여동생에게도 간절한 소원이 있을 수도 있을 지도 모르잖아?”
“루카땅은… 이걸로 얘기해 본 적이 없네. 루카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지도 모르겠어.”
“나는 경솔한 결정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 물론 츠키나가 군의 마음은 아주 기쁘지만.”
문득 레오는 에이치의 얼굴이 아주 가깝다는 걸 깨달았다. 놀라 숨을 들이켠 사이 긴 속눈썹을 가진 푸른 눈이 휜다. 입술에 짧게 닿고 떼어지는 감촉에 기시감이 떠오른다. 입술과 입술이 부딪히는 감각, 뜨거운 숨. 밤에 닿았던 그 때와 달리 지금은 웃고 있는 푸른 눈동자가 선명하게 보인다.
“그보다 친구끼리는 이런 거 하지 않잖아. 그래도 너와 나는 친구야? 츠키나가 군.”
“바―보. 당연히 친구지.”
“이런, 나 또 차인 거야?”
농담을 말하는 목소리가 가볍다. 즐거워 보이는 에이치 뒤로 분홍 꽃잎이 하늘하늘 떨어진다. 또 모든 것이 꿈결 같다. 설레었던 그 날이 다시 재현되는 것처럼. 과거를 다시 곱씹어 보는 대낮의 꿈. 레오는 어쩐지 그것을 감흥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
에이치의 병문안을 마치면 레오에게 더 이상 할 일은 없었다. 발길 닿는 데로 아무데나 쏘다니다가 결국은 집으로 도착한다. 부모님은 아직 동사무소의 일이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빈 집에서 신나게 작곡이라도 하는 건 어떨까. 신사에서 내려온 이후로 작곡은 거의 손도 대지 않았다. 그 집에 놓고 온 수많은 명곡은 어떻게 되었을까. 승려들이 그 곡의 가치를 알아본다면 소중히 모셔놨을 테고 그렇지 않다면 진작 불태워 버렸을 지도 모른다. 어쩐지 후자가 됐을 지도 모르는 마음에 풀이 죽는다. 레오의 음악을 환영해 준 사람은 루카와 에이치뿐이었다.
“다녀왔습니다.”
텅 빈 집에 인사를 하고 허리를 숙여 신발을 벗는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곳은 더 이상 집이 아니었다. 레오는 눈을 깜박였고 손으로 비비기까지 했다. 눈앞에 펼쳐진 건 좁은 나무 복도. 너무나 익숙한 곳이었다. 레오가 9개월 동안 살아온 곳. 아기님과 함께 했던 작은 신사 속에 레오는 있었다.
“어? 어…?”
얼떨떨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볼을 꼬집어도 풍경은 변하지 않는다. 레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신사 내부는 그렇게 넓지 않다. 화장실이 하나, 방은 두 개. 가장 넓은 방에 큰 창문이 있고 스오의 요람은 보통 그곳에 있었다.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진다. 레오는 스오와 함께 있던 방문으로 달려가듯이 들어갔다.
그곳엔 누군가가 있었다. 가지런한 붉은 머리칼이 팔꿈치까지 내려와 있는 작은 아이. 루카 정도의 체형으로 보이는 아이는 붉은 빛의 화려한 전통 기모노를 입고 있었다. 얼굴은 확인할 수 없다. 레오에게 매번 식사를 날라다 주던 남자처럼 종이 한 장이 아이의 얼굴에 붙어 있었다. 간단한 한자 대신 뭔가 복잡한 것이 문양처럼 그려져 있다. 그 아이 옆에는 텅 빈 나무 요람이 있었다. 레오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스오…?”
아이가 움찔 놀란다.
“왔구나, 왔어.”
아이의 입이 크게 벌어진다 싶더니 그렇게 말했다.
“드디어 불렀어요. 해냈어. 어서, 어서 이걸 떼어줘요. 이게 있어서 아무 것도 못해. 어서요.”
아이가 자기 얼굴에 있는 종이를 가리켰다. 스스로 뗄 수 없는 걸까? 레오가 아이에게 다가갔다.
“정말 스오야?”
“네, 스오 츠카사. 당신의 스오예요. 줄곧 만나고 싶었어. 어서 얼굴을 보게 해줘요.”
여자아이의 높은 목소리가 노래하듯이 흘러나왔다. 레오는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에 종이의 질감이 닿았다. 그냥 평범한 종이 재질인 것 같은데 아이는 꼼짝 못하고 있다. 레오는 그것을 잡아당겼다. 종이는 아주 손쉽게 떼어졌고 동시에 화륵하며 타오르더니 금세 사라졌다.
종이 밑으로 드러난 아이는 보라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에이치처럼 화려한 외모는 아니지만 아주 단정하고 도자기 인형처럼 곱다.
“너무 늦었어요. 왜 이제 왔어요?”
어린 아이가 기모노자락을 펄럭이며 칭얼거렸다. 정말 츠카사일까. 레오는 꼼짝도 못한 투박한 돌덩이 같던 아기를 떠올린다.
“내가 온 거야? 눈 뜨니까 여기던데.”
“힘들었어요. 이 종이가 방해해서 계속 실패만 했지만. 당신이 올 생각을 안 하니까요, 날 떠날 궁리만 하니까. 너무해요. 낳고 나니 내가 미워졌어요? 그래도 난 당신의 신이에요. 이름도 모르는 나의 신자, 당신의 이름을 말해줘요. 내 이름만 달랑 정해놓고 자기는 숨기는 게 어디 있어요? 어서 말해요.”
아이의 목소리는 아기 때와 같았다. 앞에서 이야기 하고 있지만 사방에서 울린다.
“앗, 자기소개도 안 했었나? 미안…. 이름은 츠키나가 레오.”
“레오, 레오. 츠키나가 레오.”
소리 내어 이름을 곱씹다가 활짝 웃었다.
“얼굴도 알고 이름도 알았으니 모두 해결이에요. 좋아요, 이제 소원을 말해줘요.”
“에, 갑자기 소원?”
“네. 당신의 소원을 이루어주고 대가로 당신을 가질 거예요.”
보라색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계속, 계속 기다렸어요. 상냥한 레오, 사랑스러운 레오. 당신과의 나날은 꿈에 그리던 안식이에요. 그 안식을 줄 수 있는 건 당신뿐이에요. 레오는 작고 귀여운 여자아이를 좋아하죠? 당신의 하나뿐인 동생처럼. 열심히 생각했어요. 당신에게 어울리는 짝이 되기 위해서 말이에요. 어서 소원을 말해요. 그리고 혼례를 치러요. 나는 당신의 신이고 동시에 반려가 될 거예요. 어서 말해 봐요.”
자칭 스오 츠카사는 오랜 기간 동안 말하지 못했던 것이 분했던 것처럼 재잘재잘 쉴 새 없이 떠들었다. 그 모습이 지저귀는 새 같다. 들뜬 목소리는 좋았지만 내용은 그러지 못했다. 레오는 고개를 저었다.
“뭔가 엄청 갑작스러운데 미안, 스오. 나 딱히 소원이 없어.”
“…그럴 리가 없잖아요? 소원이 없는 인간은 없어요.”
“그럴 지도 모르지만 스오에게 빌어서까지 이루고 싶은 건 없는걸.”
“거짓말이에요. 레오 나의 반려가 되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그래서 지금 도망치려고 이러는 거죠?”
아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가 불만이에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요?”
“아니, 아니. 잠깐. 소원은 그렇다 치고 반려는 좀 더 신중히 선택해야 하는 거 아냐? 스오는 막 태어났고 어리고, 그리고 신이잖아.”
“신에게 신중한 선택을 말하는 거예요? 레오는 역시 재밌네요…. 하지만 이 모습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올까요?”
아이는 그렇게 말했고 레오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붉은 생머리에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여자 아이 대신 갈색의 곱슬머리에 연둣빛 눈동자를 가진 여동생이 눈앞에 있었다.
“이러면 되는 거죠? 소원은 나중에 천천히 생각해도 좋으니까, 먼저 하나가 돼요.”
목소리도 루카의 목소리다. 루카가, 아니 츠카사가 제멋대로 기모노 앞섶을 풀기 시작한다. 레오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하, 하지 마! 루카땅 몸으로 그런 짓 하지 마! 스오 바보!!”
필사적으로 눈을 가리며 레오가 외쳤다. 어이없다는 듯이 츠카사의 목소리도 꽝꽝 울린다.
“지금 나한테 바보라고 한 거예요? 레오면 다예요?! 너무해요!!”
“루카땅은 그런 거 안 해. 지금은 스오가 잘못한 거야!”
“맨날 동생이 좋다고 해놓고 왜 내가 하니 싫어해요? 레오는 제멋대로예요!”
“생리적으로 무리! 스오 아직 루카땅 모습 하고 있는 거 아니지? 빨리 그 모습부터 어떻게 해줘!!”
작은 신사를 떠나가라 지르던 두 사람의 목소리가 잠잠해진다. 레오는 속으로 10까지 세고 살그머니 손을 내렸다. 루카의 모습 대신 붉은 머리칼의 아이가 볼을 부풀리고 앉아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레오는 아이에게 다가갔다.
“그러니까 루카는 내가 제일 사랑하는 여동생이야. 거기에 반려니 그런 건 없어. 물론 루카땅이 결혼 상대를 데려오면 아주 엄정하게 심사할 거지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나도 사랑하는 여동생으로 하면 되잖아요.”
“내 여동생은 루카땅 하나뿐인걸.”
한숨과 함께 벌어진 앞섶을 잘 여며준다. 아이의 고운 미간은 접힐 채 펴질 줄 모른다.
“그럼 남동생은요? 남동생이면 사랑해 줄 거예요?”
“스오는 여자애잖아. 애초에 남자도 아니고. 앗, 혹시 아까 루카처럼 휙휙 변할 수 있는 거야?”
“…아뇨. 그건 환상을 덧댄 거고 내 모습은 그대로예요. 레오가 사랑하지 않는 스오 츠카사 모습이죠.”
“으으, 그거 아니야. 내가 스오를 싫어할 리 있겠어? 엄청 좋아해. 사랑한다고!”
“말로만.”
아이가 입을 삐죽거렸다. 어떻게 달래줘야 할까. 제멋대로 신을 두고 레오는 고민에 빠진다. 아이는 그새 꿈질거리며 레오 품을 파고들었다.
“나만 레오가 엄청 보고 싶었나 봐요. 속상해. 레오가 쓰러져서 밑으로 가버린 후에 오지도 않고.”
꿍얼꿍얼 대는 목소리가 품을 타고 울린다. 레오는 어정쩡하게 그 등을 쓸었다. 한참을 중얼거리던 아이가 문득 말을 멈춘다. 화나 보이는 보라색 눈동자가 똑바로 레오에게 향하고 있었다.
“레오, 입, 아.”
“아?”
손이 두 볼을 무자비하게 잡아당긴다 싶더니 얼굴을 불쑥 들이밀고 냄새를 킁킁 맡는다. 곧 단정한 얼굴이 험악하게 변했다.
“이제 나 말고 또 다른 신을 키워요?”
“어…, 그거 무슨 말?”
“다른 사람한테 숨 넣었잖아요. 아직도 입에 고약한 냄새가 남아있어요. 이 마을에 신은 나밖에 없을 텐데.”
“잠깐만…. 텐시를 이야기하는 거야?”
“텐시? 천사요? 정말 다른 신이 있어요?”
“아니, 텐시는 별명이고. 분명 신이 아니고 사람이 맞을 거야. 신이 자주 입원할리 없잖아?”
“인간이라면 더 용서할 수 없어요. 레오는 어째서 숨이 필요하지 않은 인간한테 숨을 넣어요?”
아이는 아주 화가 많이 나 보였다.
“넣었다기 보단 내가 당한 건데….”
“레오의 숨은 츠카사만의 것이에요. 도대체 그런 짓을 왜 하는 거죠? 숨을 넣을 필요 없는 인간에게 헛되이 불어 넣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요?”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애정을 주고받을 때 입술을 맞물리고 스오가 말하는 숨을 넣기도 해.”
“애정이요…? 레오는 그 사람과 애정을 나누는 사이인 거예요?”
아이는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여전히 분노 일색인 얼굴이지만 어쩐지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니, 아닐 거야. 그 녀석은 남 놀리기를 좋아하니까 장난으로 그런 걸 테고 나도 지금은 아무 감정 없어. 텐시는… 내가 병에 걸려있다는 걸 깨닫게 해준 사람이고 친구야. 그것 뿐.”
“레오는 건강하잖아요.”
아이는 삐뚜름하게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전히 불퉁한 볼이 귀여웠다. 레오는 가만히 아이의 화가 풀리길 기다렸다. 한참을 바닥을 보고 있다가 레오가 말했다.
“일단은 믿어 줄게요. 대신 나도 해줘요. 레오의 숨 받고 싶어요.”
보라색 눈이 도전장을 내민 것처럼 기세등등하다. 그건 어렵지 않은 부탁이다. 아기님일 때는 그게 일이었다. 레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고 아이에게 몸을 굽혔다. 흘러내린 옆머리를 조심스레 귀 뒤로 넘겨주고 입술을 가져다 댄다. 긁힐 것 같은 피부 대신 젤리처럼 아주 말랑한 촉감이 입술에 꾹 눌러 닿는다. 숨까지 넣어야 할까. 망설이다가 입을 벌리고 작은 한숨 같은 걸 섞는다. 아이의 몸이 푸득 떨렸다. 루카와 비슷한 체구. 기분이 이상해져서 레오는 얼른 입술을 뗐다. 아이의 흰 볼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제 화 안 낼 거지?”
“…레오 하는 거 봐서요.”
여전히 퉁명스럽지만 그래도 화는 꽤 풀려보여서 레오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한참을 가만히 있던 아이는 척척 일어나 레오의 품에 다시 폭삭 안긴다.
“이번만 용서해 줄게요. 다시는 누구에게도 숨을 주면 안 돼요.”
“네, 네, 알겠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저도 모르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신에게 하면 안 되는 태도인 걸까? 그렇지만 아까 무례한 온갖 짓은 다 한 기분이다. 아이는 레오의 품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확실히 아기 때보다 훨씬 커진 몸이다. 레오는 아이를 고쳐 앉고는 노래를 부른다. 예전에 여기에 있을 때 만들어 둔 노래였다. 제목은 벌거벗은 산에 내리는 흰 먼지.
“응, 이 노래 좋아.”
어린 신이 만족스럽게 중얼거렸다. 손가락으로 가슴을 톡톡 두들기며 박자를 맞추다가 흥얼흥얼거리며 같이 따라 부른다.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기묘한 정적 속의 온건한 나날. 그 때엔 레오 혼자 불렀지만 이제는 같이 불러주는 이도 있다. 창에는 붉은 노을이 가득 차고 있다. 황혼에 섞여 붉은 잎이 간간히 흩날린다.
“아.”
레오가 노래를 멈추자 품 안의 작은 신이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스오, 꽃놀이 가자. 마당에 벚꽃 피었지?”
“꽃놀이? 꽃을 보러 가는 걸 말하는 건가요?”
“응. 마당의 벚나무가 피면 같이 보기로 했는데 스오가 아파서…. 아 아픈 게 아니랬던가? 여튼 볼 상황이 아니었잖아? 아직 해도 안 떨어졌으니까 지금이 기회야!”
아이는 정확히 이해를 못한 것 같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나무보다 한참 품이 넓었던 나무였다. 무성히 뻗어나갔던 가지에 수도 없을 붉음이 장식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꽃은 분명 스오와도 아주 잘 어울릴 터였다.
그날부터 작은 신, 스오 츠카사는 하루가 멀다 하고 레오를 불렀다. 어디를 가다가도 정신 차려 보면 신사 앞에 있었다. 츠카사가 있는 곳은 성역으로 지정되어 일반인들은 함부로 출입할 수 없다지만 레오는 매번 츠카사의 능력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그곳에 있을 수 있었다.
츠카사와 특별한 것을 하는 건 아니었다. 아이는 심심하다고 레오에게 매달렸고 그런 츠카사와 하는 일들은 대부분 태평한 일이었다. 작곡을 하면서 노래를 부르거나, 낮잠을 자거나, 산으로 산책을 나가거나. 츠카사와 숲 속을 함께 다니면 산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지곤 해서 자주하지 않는 편이 산에 산의 주민들에겐 좋을 지도 모른다고 레오는 생각하곤 했다.
오늘은 전화를 끊고 방문을 열자마자 신사로 이동돼 있었다. 토요일에 올 거라며, 맛있는 거 사들고 간다는 여동생의 사랑스러운 통화였다. 여동생과 함께 하는 주말이 끝나면 레오도 원래의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 레오가 학교를 가도 츠카사는 불쑥불쑥 레오를 데려올까.
“어….”
“어서 와요, 레오.”
언제나처럼 높은 목소리 대신 조금 낮은 목소리가 레오를 맞이해 레오는 우뚝 멈춰 섰다. 방석 위에 반듯하게 앉아있는 건 츠카사가 맞지만 어깨를 덮고 있던 붉은 머리칼이 사라졌다. 목덜미가 훤히 드러날 정도로 짧게 잘린 머리를 한 그 모습에 레오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스오, 머리 잘랐어?”
“아, 네. 엄청 허전한 느낌이네요.”
츠카사의 손이 머리 밑을 쓸어보았다. 짧아진 머리칼이 살랑인다.
“왜 잘랐어? 일본 인형 같이 예쁘장했는데.”
“그래요? 레오 취향이 그쪽일 줄 몰랐다면 안 잘랐는데…. 남자는 짧은 머리가 많으니까 자르는 게 낫지 않을까 하고요. 그래도 걱정 마요. 금방 길어요.”
“아니, 그것보다… 스오 여자애 아니었어? 목소리도 변했잖아….”
츠카사의 목소리는 명백하게 레오 또래의 남자아이 목소리였다.
“신에게 성별이 어디 있어요? 인간들은 남녀가 쌍을 이루니 당연히 여자로 몸을 만들기 시작한 거고요. 근데 레오는 싫다니까. 맞출 수 있는 쪽이 맞춰야죠.”
“남자끼리도 결혼 못 해, 스오.”
“이익! 그럼 그 남자랑은 왜 그랬어요? 남자까리 결혼 못하는데! 다 알아놨어요, 레오랑 숨을 교환한 사람. 텐쇼인 에이치. 레오는 그런 색이 반쯤 날아간 사람이 취향이에요?”
“아니, 그러니까…. 취향이라기보다 얼굴이 예쁘다고 해야 하나…. 물론 스오도 엄청 예쁜 얼굴인데 뭐랄까 장르가 좀 다르지. 텐시가 서양의 왕자님 같다면 스오는 일본 공주님?”
“뭡니까, 그거. 괜히 기분 나쁘네요. 당신 엄청 무례한 거 알아요? 신이랑 인간을 비교하는 인간은 레오 밖에 없어요. 거기다 소원도 없고. 빨리 소원을 빌어서 얌전히 저에게 오면 될 텐데.”
츠카사가 홱 고개를 돌렸다. 레오는 난처하게 볼을 긁적였다. 반응이 잘못 되었을까? 상대가 큰 맘 먹고 헤어스타일을 바꿨는데 ‘예전 머리가 더 잘 어울렸어’ 같은 말을 해버린 게 아닐까. 어쨌든 하루아침에 변한 건 아닌 것 같고. 며칠에 걸쳐서 준비를 했는데 확실히 상대 반응이 별로면 맥 빠질 만도 하고. 신도 생각보다 만능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레오는 츠카사 옆에 딱 붙어 앉았다. 옆을 흘끔 보다가 츠카사는 뾰루퉁하게 고개를 돌렸다. 어깨를 살살 부딪치며 레오가 말했다.
“음, 하지만 지금 모습도 예뻐. 진짜야, 스오.”
인정해야 했다. 남자로 변한 것뿐인 츠카사가 레오에게 한없이 취향이었다. 하지만 츠카사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신의 예쁘다, 좋아한다, 사랑한다가 한없이 가볍다는 건 요 며칠로 아주 잘 알았어요. 항상 그렇게 다른 인간들도 꼬시나요?”
“엑, 진심인데. 내가 말하는 마음들은 언제나 진심이야!”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말에 무게가 있다면 당신의 말은 깃털보다 가벼울 거예요. 이렇게 가벼운 사람을 반려로 맞아들인 제가 잘못이죠.”
“나 벌써 반려된 거야?”
“된 거나 마찬가지죠. 당신이 버티고 있지만 그것도 얼마 못갈 테고. 이런 관계를 뭐라고 하더라, 사실혼? 맞죠, 사실혼?”
“어, 글쎄…. 뭔가 좀 다른 기분도 들긴 하는데.”
신과의 결혼 신고를 받아주는 기관이 과연 있을 것인가. 그렇게 고민하다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하도 혼인, 혼인하고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말을 들었기 때문일까, 너무 자연스럽게 그런 상상을 한다. 정말로 이 신과 혼례를 치르는 말도 안 되는 망상.
츠카사는 저런 걸 어떻게 아는 걸까. 설마 사람들에 섞여 드라마라도 같이 보는 걸까. 마냥 아이로만 보이는데도 신은 신인지 레오가 생각 못한 말들을 하기도 해서 깜짝깜짝 놀란다. 애초에 아기가 아닐 수도 있는데. 그니까 신이란 건 좀 더 이상한 쪽에서 전지전능할 수도 있다. 모든 걸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알 수 있을 지도 모르는 존재.
“레오는 바보니까 별로 반응을 기대한 건 아니에요. 그보다 해요. 뽀뽀.”
그러니까 저번에 새로 배운 단어는 뽀뽀였다. 숨 나누기라는 단어보다 좀 더 직설적이다. 아이의 어리광을 받아주는 것처럼 레오는 츠카사에게 짧은 뽀뽀를 하곤 했다. 달래는 의미도 있다. 귀여운 동물을 쓰다듬어 주는 느낌으로.
동물도 그랬지만 츠카사는 눈을 감지 않는다. 얼굴이 가까이 다가와도 보라색이 가득 녹아든 눈동자가 똑바로 레오를 직시한다. 그 눈동자도 사랑한다. 레오는 츠카사를 아주 많이 사랑한다. 좋아하고, 사랑한다고 할 때 그 말에 거짓이 섞인 적은 없었다. 루카를 사랑하듯이, 츠카사도 사랑한다. 모두 소중한 사람이다. 한 쪽은 신이지만.
츠카사의 어깨를 잡고 조심스레 입술을 가져다 댄다. 얼굴이 가까워져도 츠카사는 눈을 감지 않았다. 어쩐지 레오가 부끄러워져서 눈을 감고 입술을 가져다 댄다. 말랑한 입술이 서로 맞닿고 벌어진다. 숨을 줘야 하는데, 이상하게 혀가 닿는다. 그냥 신체기관이 닿았을 뿐인데 이상하게도 오싹한 기분이 든다. 츠카사는 피하지 않았다. 마치 손을 잡는 것처럼 혀가 얽혀왔다. 츠카사의 손이 허리를 끌어당긴다. 레오는 입을 떼려고 했지만 츠카사가 허락하지 않는다. 입 안에 단 숨이 가득 찬다. 뽀뽀라는 접촉의 범주를 한참 벗어났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뿌리치고 싶지도 않다. 이제 여자 아이가 아니니까. 똑같은 스오 츠카사인데도 가로 막고 있던 이상한 거부감이 사라진다. 츠카사의 말대로 신에게 성별은 없고 역시 문제는 레오 쪽에 있다.
조금 후에 레오는 몸을 밀어내며 고개를 틀었다. 막혀 있던 호흡이 원활해지자 급하게 숨을 들이킨다. 츠카사는 숨이 찬 기색은 없다. 평상시처럼 하얀 얼굴로 레오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힘들어요?”
“아, 아니. 좀 덜 익숙해서.”
“덜 익숙하다뇨. 뽀뽀가? 매번 해줬잖아요.”
“이번엔 길었잖아. 나는 숨을 쉰다고.”
“저도 쉬어요. 코로 쉬면 되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하던데.”
“…다른 사람들이라니. 스오 혹시 이 집에 있는 부부생활 엿보고 그런 거 아니지…?”
“엿보다뇨, 말이 좀 그렇네요. 전 이 마을의 신이에요. 제가 지켜보는 건 당연하다고요.”
신은 드라마 같은 걸 본 게 아니었다. 실제로 보고 있었다.
“너, 그거 범죄…! 아, 아니 인간이 아니니 법을 어긴 건 아니려나. 집 안에 있는 거미가 보고 있는 느낌인가….”
“이젠 거미 취급까지 가요? 다들 내 앞에선 절 하느라 정신없는데, 이 무례한 인간.”
츠카사가 볼을 쭈욱 잡아당긴다. 제법 힘이 실린 손에 레오가 항복을 외쳤다. 얼얼한 두 뺨을 문지르다가 레오는 문득 어느 사실에 눈치챘다.
“스오, 손도 커진 거야? 저번보다 엄청 아픈데.”
“아무래도 골격이 다르긴 하죠. 저 당신과 같은 나이의 남자라고요.”
츠카사의 손바닥을 서로 마주대어 본다. 마디 하나 못 미치게 작았던 손이 지금은 거의 비슷하다. 얼굴은 그대로인데. 레오는 불만스럽게 츠카사를 바라보았다.
“이러다 나보다 더 커지는 거 아냐?”
“그럴 수도 있죠. 레오와 달리 제 성장판은 열려있으니까요.”
“내 성장판 이미 닫혔어?! 이럴 수가, 소원이 생길 것 같아…!”
“소원을 쓰는 건 언제든지 환영이에요! 얼마든지 말만 하세요. 2미터의 키를 원하시나요?”
“아, 아니. 되게 악덕업체에게 덜미를 잡히는 기분이니 사양하겠습니다….”
츠카사는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고 레오는 내심 진지하게 소원에 대해 고민한다. 에이치가 말했듯이 자신의 능력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라면 키가 그에 딱 부합하지 않을까. 미래의 자신이 클 거라는 자신감이 있던 레오에게 츠카사의 말은 여러모로 충격이 아닐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역시 소원을 빌미로 바로 츠카사에게 저당 잡힐 것 같고, 만약 그렇다면 그건 역시 자신의 키보다 건강을 바라는 에이치에게 주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레오는 소원을 비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다. 자식에게 소원을 비는 부모는 없다. 자신의 소원을 투영해 키우는 부모는 있다지만 자식에게 엎드려 빌며 돈이 생기게 해달라고 빌지 않는다. 그런 느낌이다. 레오는 그저 츠카사와 이렇게 하릴없는 말을 주고받고, 가끔 얼굴을 보고, 츠카사가 행복하게 웃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이다. 이게 츠카사에게 빌고 싶은 소원이다. 그런 소원도 츠카사는 받아줄까? 알 수 없었다.
*
레오는 달력을 보고 놀랐다. 금요일. 내일이면 루카가 오고, 모레면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 신선놀음에 도낏자루가 썩는 줄도 모른다더니 레오가 딱 그 꼴이었다. 실제로 츠카사가 신이라는 게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었지만.
루카를 보는 건 좋지만 학교로 돌아가는 건 싫었다. 학교로 돌아가도 이렇게 자주 볼 수 있을까. 수업 시간에 갑자기 뿅 하고 사라지면 곤란하겠지만 사실 그것도 상관없어진 기분이다. 다른 신을 모시는 학교로 가야 한다는 걸 들으면 츠카사가 어떤 반응을 할지도 궁금했다. 바람피우지 말라는 소리를 할까? 하지만 이미 그 신에게는 신부들이 잔뜩 있다. 신부와 수녀는 신과 결혼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이렇게도 생각해 보면 사실 신과 결혼하는 것은 그렇게 특이할 것도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니까 신과 이런 걸 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을 거란 이야기.
“레오, 무슨 생각해요?”
“…주말 이후의 미래?”
“그 미래에 당연히 제가 있겠죠? 그래도 지금에 집중해 줘요. 지금 당신 옆에 있는 건 나잖아요.”
입술에 가벼운 키스가 날아든다. 촉촉 하고 닿는 것을 입을 벌고 등을 끌어당긴다. 츠카사는 바로 응답해 주었다.
이제 츠카사는 뽀뽀와 키스가 뭔지도 알고 더 한 것도 안다. 정확한 단어는 모를 지라도 서로 사랑을 나눌 때 어떤 단계를 밟으며 흥분을 고양시키는지 알고 있다. 아마 마을에 있는 모두가 선생님일 것이다. 왠지 레오가 대신 사죄를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서로 입술을 겹치고 상대의 호흡 뿐 아니라 혀도, 타액도. 남김없이 삼킬 것처럼 탐하면서 자연스럽게 몸을 더듬는 스킨십이 이어진다. 츠카사는 아주 능숙하게 움직인다. 체구가 비슷해진 그는 어렵지 않게 레오를 이불에 눕혔다. 옷을 풀어헤치고 드러난 살결에 사랑스럽다는 듯이 입술을 내린다.
‘왜 사람들이 이렇게 하는지 알겠어요. 레오, 당신의 반응이 너무 사랑스러워요. 지금까지 이런 걸 하지 않고 어떻게 참아왔던 거예요? 이렇게 좋아하면서.’
선생님들이 그런 말도 가르쳐? 라고 묻고 싶은 걸 레오는 애써 참았다. 점점 단계를 밟아가는 츠카사를 말릴 기분도 들지 않았다. 아이의 성장에 대견해하는 것도 아니다. 신이 반려라고 칭하는 기분에 취해 받아들이는 걸지도 모른다. 어쨌든 레오는 츠카사를 사랑한다. 고집쟁이에 떼쓰기도 잘하는 아주 귀여운 신이 원한다면 자기 몸뚱이는 얼마든지 주어도 좋았다.
“…역시 분해요. 이런 레오의 모습을 보는 게 나만이 아니라니.”
“지, 금은 스오 밖에, 없는데….”
“과거의 츠키나가 레오도 온전한 당신이죠. 가능했다면 과거의 당신을 붙잡아서 여기에서 나가지 못하게 했을 거예요. 어디에서 그 깃털 같은 말들로 사랑을 고백하고 누군가가 여기를 파고들기 전에, 내가 먼저. 불공평해요. 왜 당신은 먼저 태어난 거죠?”
아이는 커져도 아이다. 칭얼대는 그를 끌어안고 푹신한 머리칼에 입을 맞췄다. 물론 이걸로 기분이 풀리기를 기대하는 건 아니었지만 조금은 진정이 될지도 모른다.
그의 부모에겐 유감이게도 레오의 첫 경험은 신학교에서 이루어졌다. 레오의 동성애 기질을 알게 된 아버지가 불 같이 화내며 그의 ‘병’을 고치겠다며 넣은 학교에서 말이다. 그곳엔 레오와 같은 성을 가진 이 밖에 없었고, 그들은 종교로 억눌리기엔 제일 성에 관심이 많은 무리였다.
에이치를 만나 그를 좋아하는 걸 자각함과 동시에, 지금까지 한 번도 여성의 몸에 아무 흥미가 없었다는 걸 깨달은 중학생의 어느 날. 루카를 지키기 위해서 라고 생각했던 기사도는 처음부터 기만의 모양을 가지고 있었다. 철저하게 폐쇄된 고딕 양식의 건물 속에서 레오는 병을 치유하지 못했고 오히려 더 악화시키고 있었다. 부모님의 부탁을 받은 학교는 레오에게 병을 낫게 하기 위한 교육을 나머지 공부처럼 계속 시켰다. 길을 잘못 들었을 뿐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거룩하고 엄숙한 노래와 함께 비춰주는 동성애자들의 말로를 되새기면서 레오는 종교에 몸담을 거라고 말하던 룸메이트와, 운동부 소속 아이와, 레오의 노래에 흥미를 가진 아이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계속 가졌다. 스테인드글라스의 색색 유리의 빛을 받으며 빛나는 거대한 십자가 아래에서 몸을 섞은 적도 있다. 쾌감에 아우성치면서도 그렇게 생각했다. 병을 고쳐주세요, 고쳐주세요. 죄책감과 배덕감이 뒤섞인 액체를 바닥에 흩뿌리면서 가증스러운 소원을 빌었었다.
이 작은 신은 무슨 교리를 가졌는지 모르겠지만 전혀 개의치 않아했다.
‘전 잘 모르겠어요. 인간을 만든 게 제가 아니어서 일수도 있겠지만, 글쎄요. 예전에도 레오에게 병이 있다고 들었을 때 의아했어요. 레오는 아주 건강해요. 그런 당신이 병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인간 기준의 이야기겠지요. 뭐가 되었든 츠카사는 당신이 덜 거부감을 느끼는 쪽으로 맞췄을 거예요. 이건 내가 당신과 만나면서 결심한 일이기도 하고요. 당신이 인간을 싫어한다 해도 나는 어떠한 모습으로도 몸을 만들 수 있어요.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레오는 나를 선택하면 돼요. 내가 레오를 선택했듯이.’
“오늘은 역시 다른 생각을 많이 하네요.”
츠카사가 볼을 꼬집는다. 과거의 츠카사와 현재의 츠카사가 겹친다. 레오가 작게 사과했다.
“미안.”
“무슨 일 있어요?”
걱정스러운 눈동자에 레오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
익숙한 것처럼 굴지만 어쩐지 익숙해지지 않는 정사 후에 들리는 건 서로의 온건한 호흡이다. 조금씩 잦아드는 숨소리 대신 계속 귓가에 입술을 내리는 소리만이 울렸다. 그 소리만이 울려야 했다.
문득 덜컹이는 소리가 경종처럼 들려왔다. 레오는 몸을 굳혔고 츠카사가 고개를 들었다. 방문은 닫혀있지만 이 집의 많지 않은 방문자가 복도만 거닐고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츠카사님, 문안 여쭈옵니다.”
신사에 있는 주지승의 목소리였다. 레오가 다급히 말을 하려 할 때 문득 무언가가 츠카사와 레오를 덮고 있다는 걸 눈치 챘다. 하늘하늘한 커다란 베일 같은 것이 그들이 누워있는 요를 포함하여 방의 절반을 반투명하게 덮고 있었다.
“들어오세요.”
바로 앞에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레오가 앞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얼굴에 종이를 붙이고 있는 긴 붉은 머리칼을 가진 여자아이가 앉아있었다. 처음 츠카사의 모습이다. 여자 아이는 레오가 있는 방향을 보더니 입꼬리를 올려 살짝 미소를 짓는다.
“분신이에요.”
이번엔 등 위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허리를 잡고 있던 츠카사가 몸을 늘어뜨린다. 무게가 온전히 느껴졌다.
“이게 덮여있는 한 저 중은 아무것도 눈치 못 채요. 제가 이렇게 뽀뽀를 계속 해도요.”
일부러 소리 내서 하는지 쪽쪽 거리는 소리가 자못 크게 울렸지만 방으로 들어선 중은 츠카사와 레오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도 않는다. 어쩐지 포복자세로 레오는 그 모습들을 지켜보았다. 중은 츠카사의 대역에게 깊숙이 절한 다음 이야기를 꺼냈다.
“모레에 예정된 집회는 알고 계시겠지요.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이번에야말로 가엾은 민초들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셔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고대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몇 번을 말하지 않습니까. 저는 저를 돌봐온 인간의 소원을 먼저 들어드릴 겁니다. 그 사람이 아니면 싫습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츠카사님은 그 인간의 이름조차 모르지 않습니까.”
“당신이 말해주면 바로 알게 되는데 뭐가 문제입니까?”
“츠카사님이 이룰 수 있는 소원량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먼저 다른 이의 소원을 들어주시면 원하시는 대로 그 자의 이름을 밝혀드리겠습니다.”
“몇 번이나 반복한 이야기도 지치네요. 저는 그 사람의 소원을 들어드릴 겁니다. 다른 이의 소원은 전혀 내키지가 않기도 하고요.”
아이와 승려의 공방을 지켜보던 레오가 흘끗 뒤에 있는 츠카사에게 시선을 던진다.
“저게 무슨 소리야?”
어쩐지 목소리를 죽여 묻게 된다. 그에 비해 평온한 츠카사의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제가 매번 주지승과 하는 실랑이에요.”
“이름을 모른다니, 이미 알고 있잖아? 거기다 이름은 무슨 상관이 있어?”
“저 자는 레오가 여기에 찾아오고 있는 걸 모르지요. 그 얄팍한 봉인이 깨졌다는 것 또한요. 소원을 빌기 위해선 제가 그 사람의 이름과 얼굴을 알고 있어야 해요. 저 자는 그걸 모든 사람에게 의도적으로 숨기고 있죠. 많은 사람들이 소원패를 아무리 걸어도 제가 이뤄줄 수 있는 건 이름과 얼굴을 알고 있는 자 뿐이에요. 그리고 중은 저에게 한정된 사람의 사진과 이름만 알려주지요. 그는 그런 식으로 저를 제어하려고 해요. 아마도 그의 종교에 도움이 되는 자들이나, 아니면 보여주기 식인 사람들을 골라 이 자들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강요합니다.”
여전히 소리 높여 오가는 대화 속에 레오는 물었다.
“스오는 그 말을 따르기 싫은 거야?”
“물론이죠. 그리고 제가 하는 말도 사실이고요. 나는 당신의 소원이 아니면 들어주기 싫어요. 어떤 소원이든 당신의 소원을 이룬 다음에 생각할 거예요. 두 번째 소원도 당신이 비는 소원으로 정할 거고, 세 번째도 마찬가지예요. 그리고 소원의 대가로 당신은 더 강하게 나에게 묶이겠죠.”
목덜미에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 떨어져 레오는 몸을 움츠렸다. 다른 두 사람의 대화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나를 길러준 사람입니다. 어미의 소원을 먼저 들어드리는 마음이 뭐가 잘못됐지요?”
“그 자는 어미가 아닙니다. 당신은 이 마을이 품었고 마을의 태반에서 태어난 신입니다. 츠카사님은 그 자를 소중하게 생각하시겠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그자는 형식적인 임무를 다하고 당신을 한 번도 보러 온 적이 없지 않습니까. 거기까지인 자입니다. 소승이 드리는 말은 다 츠카사님을 생각하여 드리는 말입니다. 미련을 놓으시는 게 이롭습니다. 그 자는 이번 주말에 마을을 떠납니다. 스스로 외지인으로 살아가길 결정한 것을 봐도 모르겠습니까?”
아, 마지막 말은 사실이다. 당장 코앞의 일. 고향을 버릴 생각은 없지만 어쨌든 마을을 떠나야 한다.
“따분한 이야기네요. 더 이상 들을 가치도 없어요.”
츠카사의 낮은 목소리가 아주 가까이 들린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마자 입술이 닿는다. 열어 달라는 듯이 치열을 훑던 혀가 곧 깊숙하게 들어온다. 혀끝을 감아 올려 저도 모르게 소리를 흘린다.
“―스오, 아직 있어, 사람….”
“어차피 못 봐요. 듣지도 못하고. 내가 당신의 이런 모습을 보여줄 것 같아요?”
배 밑에 손을 넣어 허리를 바짝 끌어당기며 츠카사가 말했다. 흠칫거리며 몸을 빼려는 레오를 츠카사가 단단히 잡아왔다.
“레오, 새로운 관객이 생겼으니 더 예쁘게 울어주세요. 노랫소리를 듣지 못하는 저 가엾은 중은 자신이 청중인 것도 모를 테지만요.”
*
주지승은 아마 소득 없이 돌아갔을 것이다. 그들의 대화에 집중하기엔 집요하게 파고드는 아래의 자극에 레오는 모든 걸 포기하고 츠카사에게 매달려 달콤한 울음을 내기 바빴다.
그들이 돌아가고 몇 번 이어지던 비역질이 끝나고 나서 레오는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까까지 달콤하게 속삭이던 목소리에 날이 바짝 서 있다. 보라색 눈동자가 진위를 확인하듯 계속 레오를 바라보고 있다. 큰 동공에 담긴 건 불안과 의심이다.
“주지 스님이 한 말 중 일부는 맞아. 이번 주말에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야 돼. …미리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껄끄러운 말이 겨우 목구멍에서 흘러 나왔다. 츠카사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레오, 당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요? 이 땅을 떠난다고 했죠. 그건 내게서 떠난다는 말이랑 똑같은 거예요. 나는 이곳의 토지신이에요. 내 힘이 닿는 곳은 이 땅에 있는 자들에만 한해요. 나 또한 이곳을 벗어날 수 없어요. 당신은 지금 츠카사를 버리겠다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어느새 손이 레오의 팔을 꽉 잡고 있었다.
“돌아간다고요? 당신은 애초에 이곳 사람이 아니었던 거예요? 내가 있을 곳은 당신 곁인데 왜 당신은 그렇지 않아요? 불공평해요. 자의가 아니라 해도 나를 거둬준 건 당신이잖아요. 나를 이렇게 키운 건 당신이에요, 레오.”
그 목소리는 지엄하신 신의 음성 같은 것이 아니었다. 어미를 잃고 우는 아이의 목소리로 츠카사가 레오를 붙든다.
하지만. 흔들리는 마음과 달리 상반된 목소리가 말한다. 레오가 마을에 남아 있는 게 과연 츠카사를 위하는 일일까? 신사의 사람들은 마을에 남아있기로 결정한 레오를 가만히 내버려 둘까? 레오를 이용해 좀 더 츠카사를 수월하게 조종하려 하지 않을까. 레오가 어떻게 피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가족이 남아있다. 아까 본 모습으로는 승려가 신의 목소리를 전한다거나, 그가 모시는 신에게 헌신적이라는 낌새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게 츠카사의 족쇄가 되느니 멀리 떨어진 편이 좋지 않을까.
무엇이 정답인지 모른 채 머리가 마구 뒤엉킨다. 레오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츠카사는 상처를 받은 것 같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레오의 품으로 파고들고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가지 마세요. 레오, 가지 않는다고 말해줘요. 네? 더 이상 떼쓰지 않을게요. 심심하다고 계속 부르지 않을게요. 가끔 찾아와 줘도 좋아요. 그걸로 만족할게요. 그러니 날 떠나지 마요, 레오….”
목소리에 물기가 스며들어간다. 아이처럼 엉엉 울기 시작하는 츠카사를 레오가 토닥였다. 등을 두드려주니 츠카사의 울음이 더 심해졌다. 그럼에도 입은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막막한 감정을 끌어안고 레오는 계속 어린 신을 보듬었다.
울며 매달리던 츠카사가 지쳐 곯아떨어지고 신사는 더욱 정적에 잠겼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붉어진 하늘만큼이나 붉게 부은 츠카사의 눈두덩을 레오가 가만히 어루만졌다. 츠카사의 손은 여전히 레오를 붙들고 있었다. 망설이다가 가만히 그 손가락을 하나하나 푼다. 손가락은 생각보다 쉽게 떼어졌고 레오는 주변에 널린 옷을 주워 입었다. 이불을 끌어다 츠카사의 어깨까지 잘 덮어주고 레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지막으로 돌아본 츠카사의 눈가는 여전히 빨갛다. 한참을 그 얼굴을 보다가 결국 레오는 발을 뗐다.
현관에 레오의 신발은 없었다. 화장실로 가려다가 갑자기 이곳으로 잡혀온 게 느릿하게 생각난다. 문을 열면 작은 신사의 마당 대신 다른 곳이 펼쳐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레오는 문을 열었다. 그곳은 역시 신사의 마당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레오의 집도 아니었다.
“어라,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던 거야? 츠키나가 군.”
익숙한 모습이 눈앞에 있었다. 벤치에 앉아 유달리 빨리 사라지는 산골의 노을을 보고 있던 에이치가 레오를 보며 놀란다.
“텐시.”
“급히 나왔나 보네? 신발도 신지 않고. 그렇지 않아도 너에게 전해주려 했는데. 예상보다 신사의 치들도 행동이 빠르네.”
“무슨 말이야?”
“도망쳐 나온 거 아니었어? 신사 관계자들이 츠키나가 군을 찾고 있던데. 중을 화나게라도 한 거야?”
쿡쿡 거리며 에이치가 물었다. 레오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텐시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신사 사람들이 날 찾아? 왜?”
“그건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데. 츠키나가 군에게만 말하자면 신사에 심어놓은 인물들이 몇몇 있거든. 그쪽을 통해 츠키나가 군의 수배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들었어. 이 마을은 작으니까 소동을 일으키면 금세 눈치 챌 테니… 츠키나가 군은 이번 주말까지만 마을에 머문다고 했으니까 일을 일으킨다면 마을을 빠져나가는 이동 중일 거라고 생각해서 미리 일러주려고 했었지. 이렇게 빠르게 움직일 줄은 몰랐지만.”
레오는 숨을 들이 삼켰다.
신사의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그들은 레오가 이 마을을 순순히 떠나게 두려 하지 않았다. 만약 마을 밖에서 레오를 잡는다면 츠카사의 힘은 통용되지 않는다. 레오가 외지에 격리되어 있는 편이 츠카사를 더 쉽게 다룰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마을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무사히 나간다 해도 끝까지 도망칠 수 있을까? 어쨌든 지금은 집에 돌아갈 수 없다. 어떻게든 덜미가 잡힐 지도 모른다. 마을의 임원 가문이기도 한 츠키나가 가는 신사에 매우 협조적이다.
“텐시, 오늘밤만 여기서 재워줄 수 있어?”
에이치는 선선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명한 선택이야, 츠키나가 군. 그들도 병원을 수색하지는 않겠지. 한다고 해도 텐쇼인이 머무는 병실을 감히 침입할 자들은 없을 거고 말이야. 환영할게, 츠키나가 군.”
그는 예나 지금이나 흥미로운 것은 절대 마다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병원에 찾아오는 이들은 없었다. 에이치도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람을 들이지 말라는 명령을 수하에게 내려둔 상태였다. 레오는 얼마 남지 않은 낮을 집어삼킨 밤이 오고 에이치가 먼저 잠들 때까지 있다가 한참 뒤에 누웠다. 보조 침대에 있는 얇은 이불을 덮으며 레오는 눈을 깜박였다. 몸은 피곤했고 마음도 무거웠다. 병원 공기에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이 답답한 기분이 병원 때문이 아닌 건 잘 알고 있었지만.
‘뭐가 잘 안 되고 있는 건 확실하지. 신이랍시고 내세운 건 예쁘장한 인형 같은 아이뿐인데 그 아이가 보여준 건 아무 것도 없어. 여러 불만과 함께 신이 맞긴 하냐는 의심도 슬슬 나오고 있거든. 중들은 이번 일요일 밤에 있는 집회로 모든 불만을 종식시키려는 느낌인데, 여기에 츠키나가 군이 연루돼 있을 지도 모르는 건 굉장히 흥미로워. 말해주지 않을래? 츠키나가 군은 뭘 숨기고 있지?’
신이 아끼고 있을 지도 모르는 사람. 그것이 전부다. 물론 에이치에게 한 대답은 ‘신사의 아르바이트를 잠깐 했을 뿐이야’ 였지면.
내일이면 루카가 온다. 그것조차 말리고 싶었다. 이 마을은 이상하다. 이곳에 속한 이들중에 비밀을 아는 자들은 신이라는 이름의 원망(願望)의 항아리에 눈이 멀어 있다. 어떻게든 그 안에 손을 집어넣어 자신들이 원하는 보물을 끄집어내려고 하고 있다.
츠카사는 자신을 키운 건 레오라고 했다. 주지승도 신의 모습에 기여하는 건 곁에 있던 사람의 영향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레오는 아주 외로운 신을 만들어 버렸다. 정이 많고 눈물도 많은 신은 사람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것보다 한 사람의 손길만을 원하고 있다. 어린 아이다. 그 어린 아이는 어른들 틈에 홀로 있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부서지고 말 것이다.
뒤엉킨 생각 속에서 레오는 현실과 닮은 꿈을 꾼다. 짙은 밤하늘 아래에 잔뜩 모여든 흰 가면을 쓴 사람들, 어둠을 불로 물리치려는 듯 군데군데 세워진 화톳불이 간간히 불씨를 뿌린다. 그들의 정점에 있는 건 한 어린 아이. 올곧은 자세로 앉아있는 아이의 눈에 비치는 건 신을 외치는 무리들. 욕망이 꿈틀거리며 아이를 집어삼킬 것처럼 타오른다. 어떤 어둠을 고르실 겁니까. 제가 추천하는 소원은 이러한 것들입니다. 역시 가면을 쓰고 있는 승려가 누군가의 여러 사진과 소원패를 내민다. 아이는 그것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검은 욕망들이 소원패에 잠들어 있다. 그중에서 가장 흉측하게 꿈틀거리는 걸 아이가 집어 든다. 레오는 깨닫는다. 아기님 시절에 나던 고약한 냄새는 저 소원패에서 나오고 있다. 한 개만 집어 삼켜도 코를 찌르는 악취가 함께 할 것이다. 아이는 입을 벌리고 그것을 삼키려 든다. 레오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안 돼!
꿈은 갑작스럽게 깨진다. 현실인지 꿈인지 구분 되지 않는 경계 속에서 숨만 몰아쉰다. 소독약이 가득한 공기가 레오를 누른다. 레오는 몸을 웅크렸다. 어디선가 전자 기기가 웅웅거린다. 문틈으로 들어온 찬바람이 레오를 괴롭힌다. 눈을 꼭 감아버린다. 이번엔 울음소리가 들렸다. 얼굴을 엉망으로 적실 정도로 굵은 눈물이 쉼 없이 쏟아지는 서러운 울음소리. 울지 마, 울지 마. 누군가의 어깨를 끌어안고 달랜다.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손길이 애달프다. 아무리 달래도 어린 신의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
“응, 지금 마을이 굉장히 어수선해서 돌아오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새학기니까 바쁘잖아? 걱정 마, 어디 아픈 곳 하나도 없어. 응, 루카도 밥 꼭 잘 먹고, 너무 무리하지 말고. 친구들이랑도 사이좋게 지내고, 아프면 꼭 병원 가고. 응? …아니, 내가 어딜 가겠어. 가봤자 학교 아닐까. 정말 별 일 없어. …그럼, 루카. 잘 지내.”
전화를 끊고 레오는 한숨을 쉬었다. 병원 옥상에서는 기분 좋은 봄바람이 불고 있었다. 바람의 손길에 나무들이 조금씩 꽃비를 내리는 풍경은 꽤나 근사했다. 빌린 핸드폰을 돌려주러 가는 대신 레오는 벤치에 그걸 얌전히 둔다. 그리고 미리 챙겨온 메모지에 ‘텐시, 고마웠어’ 라고 적었다. 메모가 날아가지 않도록 핸드폰 밑에 잘 껴두고 레오는 기지개를 쭈욱 폈다. 넓지 않은 인간관계가 이럴 때는 편하다.
옥상으로 내려가는 문을 활짝 열고 그곳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병원으로 내려가는 계단 대신 익숙한 나무 복도가 레오를 맞이했다. 이 기묘한 능력은 츠카사의 능력이지만 이상하게도 레오의 소망에 따라 움직인다. 이미 이걸로도 여러 번 소원을 사용한 게 아닐까 싶지만 츠카사는 매번 소원을 빌라고 조른다. 이건 카운트가 되지 않는 걸까?
신발도 신지 않고 돌아다닌 통에 잔뜩 더러워진 양말을 벗어 던진다. 어쩐지 가벼워진 걸음으로 레오는 나무 복도를 디뎠다. 얼마 가지 않아 넓은 방이 나오고 방석에 앉아있는 신의 모습이 보였다.
단정한 자세, 동그란 머리, 그리고 여전히 부어있는 눈. 신도 붓기는 어쩔 수 없는 건가 싶어서 레오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어떻게 보면 참 허당인 신이었다.
츠카사는 레오가 오는 걸 알고 있었다. 흘끗 보고 다시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부루퉁하게 말했다.
“왜 왔어요. 작별 인사라면 안 들을 거예요. 멋대로 가버리세요.”
“정말? 인사 안 하고 막 가도 돼?”
레오가 짐짓 물으면 한참을 가만히 있던 츠카사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싫어요. 가기 전까지 많이 얘기해 해줘요. 노래도 불러줘요. 머리도 만져줘요. 예쁘다 예쁘다 하면서 안아줘요.”
시선을 맞춰오는 보라색 눈동자가 예쁘다. 레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츠카사에게 다가가 안아주면 바로 매달려왔다. 바싹 안겨 코를 비비며 잔뜩 어리광을 부린다. 그러면서도 가지 말아요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나 여기 온 거 소원 빌러 왔는데, 괜찮아?”
“…! 무, 물론이죠! 아무렴요. 소원의 대가는 전에 말했지요. 레오, 어서 말해줘요. 당신이 꽁꽁 숨기고 있던 그 소원을요.”
츠카사의 눈동자가 기대에 차 반짝거린다. 레오는 고개를 끄덕였고 진지하게 말했다.
“지구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예쁜 얼굴이 또 삽시간에 일그러진다.
“…뭐예요, 그 말도 안 되는 말. 마지막까지 절 놀리러 온 거예요? 불가능하다는 거 알고 있잖아요.”
“아, 역시. 소원을 한다면 이걸로 하고 싶었어. 세계 평화는 지구인 누구나가 원하는 거니까. 물론 그만큼 힘들다는 거겠지만…. 그렇다면 이 소원은 될까.”
레오는 츠카사의 손을 잡았다.
“네가, 스오 츠카사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보라색 눈동자가 둥그렇게 커진다. 입이 벌어지고 무언가 말을 어물거리려다가 뱉지 못하고 다시 다문다. 동요가 여기까지 느껴지는 모습이 아주 귀여웠다.
“이것도 불가능한 소원이야?”
“그, 그건…. 잘 모르겠어요. 나는, 레오만 있으면 되는데. 이건 내 힘이 아니고, 레오의 힘이 필요해요…. 제가 억지로 레오를 잡아 둔다고 해도 레오는 행복하지 않겠고, 그럼 나도 행복하지 않겠죠. …레오의 소원은 제가 이룰 수 없는 소원이에요.”
어물거리며 말하는 츠카사의 어깨가 점점 처졌다. 마지막 희망마저 빼앗긴 모습이다. 레오는 그런 그에게 천천히 말했다.
“그럼 내가 협조할게.”
“네?”
“내 소원이야. 내 소원이니 이루어지게 내가 협조할게. 나는 스오 옆에 있고 싶어. 하지만 문제가 있어. 내가 이 마을에 있으면 너는 더 부자유스러워질 거야. 나와 얽힌 사람들 모두가 휘말릴 거고. 스오는 괜찮아? 내가 이곳에 있어서 스오는 억지로 다른 사람의 소원을 들어줘야 할지도 몰라.”
“그건, 방법이 있어요.”
츠카사가 말했다. 그는 들떠 보였지만 동시에 조심스러웠다. 눈치를 살피듯이 신중하게 말을 잇는다.
“레오를 내가 숨기면 돼요. 그 때 레오와 나를 숨겨줬던 천 기억해요? 그 천을 레오에게 계속 씌우면 돼요. …대신, 레오는 천천히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돼요. 당신은 모두의 기억 속에서 점점 사라져 나중엔 아무도 레오가 있었다는 걸 기억 못할 거예요. 나를 제외한 모두가요.”
조심스럽게 츠카사가 손을 마주 잡았다. 불안과 기대가 손끝에 잔뜩 묻어 있다. 레오는 두 눈을 깜박였다. 허탈할 정도로 간단했다.
“뭐야, 완벽한 방법이 있었잖아! 아, 괜히 고민했네. 스오에게 더 빨리 말할걸.”
“…레오는 모두가 당신을 잊어도 괜찮아요?”
“물론이지. 루카땅이 날 잊는 건 조금 슬프지만… 괜찮아, 내가 잊지 않으니까. 그리고 스오도 있으니까. 그러면 돼. 계속 함께 있자.”
레오가 함박웃음을 짓자 츠카사의 얼굴도 점점 밝아졌다.
“레오-!”
커다란 개가 주인에게 안기는 것처럼 츠카사가 레오에게 뛰어들었다. 꼭 끌어안는 몸짓에 안도와 환희가 가득했다.
“고마워요, 레오. 레오가 가지 않아서 정말 기뻐요. 레오, 너무 좋아요.”
“스오를 혼자 두기엔 불안하니까. 나라도 괜찮으면 계속 함께 있자. 혼자 두지 않을게.”
“네! 츠카사는 레오와 계속 함께예요.”
어린 신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레오, 마지막으로 인사하고 올래요? 그 정도는 기다릴 수 있어요. 아냐, 인사하고 싶은 사람에겐 다했어. 그러니까 지금도 괜찮아. 정말이죠, 레오? 말 무르기 없기에요. 저희 계속 함께잖아요, 그럼 저기에 더 깊이 산으로 들어가요. 레오가 없을 때 좋은 곳을 봐뒀어요. 마을 산책도 괜찮을 지도 몰라요. 레오도 거미의 기분을 느끼는 거예요. 그거 언제까지 담아둘래, 스오도 은근 뒤끝이 있구나? 신에게 무례한 레오가 잘못한 거죠.
소풍을 가는 아이들처럼 들뜬 목소리들이 속삭이듯이 오갔다.
곧 츠카사가 허공에서 하늘하늘한 천을 꺼냈다. 중력을 무시하는 것 같은 그 천은 츠카사의 손짓에 맞춰 천천히 레오의 머리에 덮였다. 레오는 문득 그것이 신부의 베일 같다고 생각했다. 천을 매만지던 츠카사가 속삭였다.
“레오, 사랑해요.”
얼굴을 잡고 조심스레 닿는 입술을 레오는 기꺼이 받아들인다. 하객은 없는, 온전한 둘만의 결혼식이었다.
*
한 시골 마을에서 고등학생이 행방불명이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전날까지 여동생과 전화를 주고받았다던 소년은 말 그대로 마을에서 연기처럼 사라졌고, 유일한 단서는 산 속 깊숙이 있는 작은 신사에서 발견된 양말뿐이었다. 그 신사는 불상 하나만 놓여 있을 뿐 사람이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에, 마을에서는 카미가쿠시(神隠し)를 당했다는 소문이 무성하게 돌았다. 결국 소년의 유해조차 발견하지 못한 채 실종사건은 미제로 남고 말았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지금, 사라진 소년을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그저 카미가쿠시에 대한 전설만이 어렴풋하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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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가끔 이상한 예감 같은 것이 드는 날이 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은 더운 여름날에 갑자기 밖에 나가봐야 할 것 같다던가. 그런 예감이 들면 츠키나가 루카는 매번 움직였다.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오옷, 도망치지도 않고 얌전히 있네? 착한 녀석~!”
매미소리만 시끄럽게 울리고 아무도 돌아다니지 않을 뙤약볕,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담벼락에 있는 고양이를 만지며 소란스럽게 구는 사람이 있었다. 짧게 묶인 주황색 머리가 남자가 크게 손짓할 때마다 우쭐거렸다. 외부인이 적은 이 마을에서 처음 보는 사람.
“저기….”
“힉?!”
루카가 다가가 말을 걸자 남자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엑, 어째서, 앗, 언제 벗겨졌지?!”
그는 허둥지둥 주위를 둘러보더니 땅에 떨어져있는 흰 천 같은 걸 주워들었다. 곧이어 그가 머쓱하게 루카를 바라본다. 녹색 눈, 날카롭게 올라간 눈. 누가 보면 남매냐고 할 정도로 굉장히 닮은 얼굴. 그리고 이상하게 익숙했다.
“아, 음, 고양이가 있는데 얌전해서. 귀엽지?”
동네에 자주 보이는 고양이였다. 사람 손을 피하는 편해서 먹이를 가져다주는 루카에게도 살가운 행동을 보이지 않는데 이상하게 저 남자에게만은 머리를 비비며 골골대는 소리를 내고 있다. 고양이를 좋아하는데 이상하게도 루카는 남자가 계속 신경 쓰였다. 아주 중요한 걸 잊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루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머쓱해졌는지 남자가 슬슬 뒤로 물러선다.
“아, 너무 시끄럽게 했나? 미안해. 음, 난 이만 가볼게.”
“잠시 만요!”
루카가 급히 남자를 붙잡았다. 우, 아, 앗. 볼썽사나운 소리를 내며 남자가 루카를 쳐다본다. 엄청난 숙맥 같은 반응이었다.
“저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아요?”
말하고 나서야 한물간 헌팅 멘트라는 걸 깨닫고 루카의 얼굴이 붉어졌다. 어째선지 상대방도 같이 붉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뭔가, 굉장히 기뻐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 그거야 모르지! 꿈 속 같은데서 만났을 수도 있고, 정말 지나가다 우연히 볼 수도 있고, 이런 만남을 상상한 걸 수도 있고! 망상의 세계는 아주 넓어!”
이런 작은 마을에서 그런 말들은 있을 수 없지만 루카는 남자의 말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 이렇게 대화하는 게 아주 그리운 기분도 들었다.
“저기, 모르는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도 이상한데 엄청 우연으로 소식을 접해서. 결혼한다면서? 으으, 루카의 판단력을 믿지만 그래도 조금 불안하달까, 섭섭하달까…. 어느 놈팡이인지 자세히 조사했지만 흠이 안 잡혀서 더 찜찜하달까…. 아니, 아니, 앞에 말 모두 취소! …정말 축하해. 루카는 행복해 질 수 있을 거야. 지금보다 훨씬 더―!!”
남자의 말은 굉장히 이상했다. 루카를 아주 잘 알고 있는 듯한 말투. 어쩌면 스토커일지도 모르는데 하나도 무섭지 않다. 마음이 굉장히 소란스럽다. 더운 열기 속에 있는 남자는 굉장히 이상하지만 자신도 이상했다. 지금 당장 울고 싶었다. 저 남자를 붙들고.
문득 루카는 모든 것이 고요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시끄럽게 울던 매미소리조차 사라져 이 세상에 남자와 둘만 남겨진 것만 같다. 남자도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문득 뒤를 돌아본다. 그 뒤에는 아무도 없는데 남자는 방정맞은 손짓을 하고는 다시 루카를 보았다.
“이제 진짜 가볼게. 갑자기 이상한 사람이 나타나서 이상한 소리해서 미안! 루카 결혼하면 이 마을을 떠날 테니까 그 전에 축하해 주고 싶었어.”
루카를 짝사랑하던 마을 사람A 정도로 생각해줘. 남자는 그렇게 농담처럼 말하고 뒤를 돌았다. 루카는 저도 모르게 외쳤다.
“자, 잘 지내고 있죠?!”
왜 그런 소리를 했는지 루카 본인도 이해하지 못했다. 이름도 모를 남자는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햇살처럼 환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이지. 좋은 신을 만나서 엄~청 행복하다고!”
손을 크게 붕붕 휘두르며 작별 인사를 한 남자는 품에 안고 있던 흰 천을 베일이라도 쓰듯이 뒤집어썼고, 그걸로 끝이었다.
루카는 한동안 길가에 멍하니 서 있었다. 매미의 울음소리가 기세 좋게 울리는 걸 멍하니 듣고 있다가 흠칫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왜 여기 서 있는 거지? 누굴 만날 예정도 아니었는데. 그런 루카의 눈에 담벼락에 웅크리고 있는 길고양이 한 마리가 보였다. 삼색 무늬를 가진 고양이는 눈도 깜박거리지 않은 채 어느 한 쪽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루카도 덩달아 그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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