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카레오 - 계모임01
* 츠카레오
* 서로 보고 싶은 주제를 사다리타기하여 연성하는 계모임입니다.
* 참가자: 동풍, 미나비, 루우
미나비
이게 무슨 꼴이람.
가만히 앉아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본다. 부드럽고 매끈한 천이다. 조심스럽게 팔을 들면 품도 넉넉하고 색도 고운 옷이라는 걸 알 수 있다. 특별한 의뢰가 아니고서야 이런 걸 입을 일은 없었다. 레오는 양 팔을 펄럭이다 다시 축 늘어트린다. 아, 지루해. 가만히 있으려니 좀이 쑤셔온다. 슬쩍 눈을 돌려 문가와 침상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대로 뛰어나가서 나무 위에 몸을 숨기면 모든 게 다 끝날텐데. 흠.... 그래볼까. 지루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보단 그게 나을 것이다. 레오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발소리를 내지 않고 걷는다. 질질 끌리는 치맛자락이 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자 인상을 찡그리고 천을 움켜쥐어 들어올렸다. 살금살금 걸어 문가에 귀를 대었다. 살짝 정신을 집중하면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여시종의 숨소리가 들리고, 그 너머 호위하고 서 있는 무사들의 얕은 기척이 느껴진다. 별 다른 일은 없네. 들어올 일도 없겠지. 레오는 자리로 돌아가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었다. 꽁꽁 싸맨 겉옷을 하나, 둘, 벗고 속곳만 남겨놓고는 침구 밑을 더듬었다. 익숙한 검은 옷이 거기 있었다. 옷을 벗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속도로 손을 움직인다. 레오는 금세 수상쩍은 검은 옷의 사람이 된다.
"......."
뒤를 돌아보면 자신이 벗어던진 허물과 같은 풍성한 옷들이 늘어져 있다. 돌아와서 입는 것도 문제인데.... 분명 혼자서는 입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리 선수를 쳐서 누워있을까? 몸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댄다거나.... 어쩌면 그 사이에 누가 들어올지도 모르겠는데. 잠시 인상을 쓴다. 아, 모르겠다. 그렇게 되면 그 잘나신 황제님께서 어떻게 하겠지. 레오는 이 거처의 사람들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시종 정도는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싶지만.... 딱히 계약을 파기하려고 한 건 아니니까 말야. 들켜도 별 문제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레오는 조용히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그대로 천장을 타고 올랐다.
지붕에 올라온 건 다행이었지만 황제의 궁은 너무 컸다. 레오는 지붕에 납작하게 붙은 채 인상을 쓴다. 바람은 동쪽으로 불고 있고, 그 안에 여러 냄새가 섞여 있었다. 레오가 찾는 상대의 냄새는 느껴지지 않는다. 지붕에 붙은 채 멀리 두었던 시선을 근처로 가지고 오면, 넓은 궁을 바쁘게 걷는 시종의 무리가 보였다. 귀를 기울여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 소리를 쫓는다. 남자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정례 시간은 이미 지났을 것이다. 그렇다고 침실에 가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어디 신하들의 기관을 감찰하고 있을까? 그게 아니면....
"...지금 바로?"
여시종의 무리가 저쪽을 지나간다. 레오는 그 안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해냈다. 황제의 뒤를 따라다니는 시종이다. 지금은 다른 시종들과 있지만.... 레오는 지붕 위를 사뿐히 넘었다. 시종들이 향하는 방향을 따라 자신도 움직인다.
"곧 그쪽으로 향하신다고 하셨으니까요. 준비가 필요할 겁니다."
"...천비님께서 기뻐하시겠군요."
"쉿. 너무 노골적이지 않습니까."
작은 목소리로 소근소근하고 있지만 레오에게는 전부 다 잘 들렸다. 천비라는 건 황제가 지난 번에 들인 네번째 첩이다. 레오는 골치아프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이던 황제를 떠올렸다. 남자는 탐탁찮다는 표정이었지만 상황과 책무에 순종하는 편이었다. 레오는 그저 안됐네, 라고 생각했다. 지금와서는 한 층 더 안됐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니까 그 천비라고 불리는 여자가.
"얼마나 걸릴까요, 지금 폐하께서는 어디에...."
"서관을 둘러보시고 계십니다."
레오는 종종걸음으로 멀어지는 여자들을 흘끔거린다. 시종들은 그대로 천비의 궁으로 향할 것이다. 서관이라면 분명 각종 기록을 관장하는 곳이었던 거 같다. 차도 한 잔 하고 나오겠지. 간략한 회의도 종종 그곳에서 한다고 들었다. 지금의 황제는 제법 행동파라서, 모든 일을 신하들에게 맡기던 시절과는 또 다른 모양이었다. 그래서 적도 많은 듯 했지만.
"흐음...."
천비의 궁으로 향하는 시종들을 내버려 두고, 레오는 조금 허리를 펴본다. 나무 그늘 밑에 숨어 있어 눈에 잘 띄지 않을 것이다. 서관이면... 금방 갈 수 있을지도. 레오는 기지개를 켜고, 그대로 다시 그림자 속에 녹아들었다.
황제, 스오 츠카사는 서신을 읽고 있었다. 그건 과거의 편지였다. 스오 츠카사가 황제가 되기 전에 오갔던 외교문서로 남자는 그 때의 기록을 정확하게 알고 싶었다. 신하들에게 지시를 해왔지만 속도는 매우 느렸고, 결국 직접 찾아 와야만 했다. 이렇게 자주 움직여선 신하들에게 신뢰를 줄 수 없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츠카사는 서신을 넘기면서 속으로 쓴웃음을 짓는다. 다들 귀찮아 하겠는데.... 젊은 황제는 그 정도의 자각은 갖고 있었다.
"이 다음은...."
"예?"
"여기서 끝이 아닐텐데요."
종이에서 눈을 떼고 흔들어 보이자 황제 주위를 둘러싼 신하들이 낮은 신음소리를 낸다. 츠카사는 피식 웃고 종이를 협탁 위로 내려놓았다. 담당자인 남자가 앞으로 걸어나와 허리를 숙였다.
"폐하, 그것은...."
"존재는 알았으니 이제 다른 말은 안 통합니다."
츠카사는 웃으며 협탁을 두드렸다.
"준비해서, 가지고 오도록 하세요."
주위의 낮은 탄식을 뒤로 하고, 츠카사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왔다. 궁궐 지붕에 석양이 걸려 있었다. 시간이 벌써.... 손을 뒤로 해 신하들을 물리고, 츠카사는 천천히 걸어나왔다. 시종이 뒤따라왔다.
"폐하."
알고 있어요, 이 방향이 아니란 말이죠. 츠카사는 어깨를 으쓱이고 방향을 돌렸다. 첩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말에는 조금 한숨이 나왔다. 남자는 피곤했고, 그 자리에서 시간을 어떻게 때워야 좋을지 고민했다. 덕분에 걸음은 점점 느려지고, 해가 지고 있어 어두워진다. 츠카사는 깊은 고뇌 속에서 자신의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를 들었다. 괜히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본다. 어느 새 안뜰의 정원이었다. 나무가 있고, 연못이 있고.... 물 위로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나무 위에 사람이 있었다.
"......."
웃음이 나오는 걸 꾹 참고 츠카사는 잠시 손을 뒤로 했다. 뒤 따르던 시종들을 서른 걸음 뒤로 보낸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거리를 만들고 황제는 잠시 뒷짐을 지었다. 연못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낸다.
"숨어 계시는 게 맞나요?"
"알아 봤어? 다행이네."
"물 위로 다 비치는 걸요."
"그걸 알아볼 주의가 있어서 다행이란 뜻이야."
고개를 들자 나뭇가지 위에 걸터 앉은 검은 옷의 남자가 보였다. 남자가 손을 흔들었다. 츠카사가 그를 향해 손을 내밀자 남자가 고개를 흔든다.
"없는 척 해야지. 괜히 이러고 나왔다고 생각해?"
"그 검은 옷 때문에 더 눈에 띄는 게 아닐까요?"
"아니지. 지금은 내가 스오에게 마음먹고 보여주고 있는 거야."
이러면 안 보인다고?
목소리가 끊기고 시야에서 모습이 사라진다. 츠카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물 위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단지 잔잔한 잔물결만 흐를 뿐.
"알겠어요. 실력을 의심하지 않아요."
"거짓말."
다행히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었다. 츠카사는 피식 웃었고, 검은 옷의 레오는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 앉아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심심해서."
"외출?"
"그런 셈이지."
"어때요. 외출 결과는."
"음.... 몇 가지 불온한 물건을 찾았어."
"불온한 물건?"
"저주 인형 같은 거랑.... 어디에 쓰는 건지 알 수 없는 약이랑....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
표정을 잘 살펴보고 싶지만 코까지 가린 복면으로 보이지 않았다. 츠카사는 아쉽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어디로 갈 거죠?"
"내 방?"
"산책은 다 한 거예요?"
"응. 종착지가 폐하였어."
남자가 몸을 일으키는 걸 보며 츠카사는 조금 급하게 목소리를 냈다.
"제가 보고 싶었다면 그대로 나오셔도 됐을 텐데요."
"무슨 소리야. 그건 최악이지. 그 옷도, 그 자리도 불편하니까."
밤에는 안 오는 거지? 다음 이야기는 나중에. 안녕, 폐하.
뭐라고 말을 하기 전에 물 위의 그림자는 사라졌다. 츠카사는 한 손을 어정쩡하게 든 채 자리에 서 있었다. 방에 간다고 했으니 마련해 준 거처로 갔을 것이다. 애매한 기분으로 빈 손을 내린다. 일과를 마치고 얼른 가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황제는 미친놈이라더니.
뒤에서 끌어안고, 어깨를 무는 남자를 느끼며 레오는 숨을 삼켰다. 아래가 얼얼했다. 혼을 쏙 빼놓는 허릿짓에 이불 천을 손으로 움켜쥐며 눈을 감는다. 배 안이 뜨거운 걸로 얻어맞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힉, 아.... 짧은 숨을 띄엄띄엄 토해내면 손이 올라와 레오의 뺨을 쥐고 고개를 돌리게 했다. 불편한 자세로 얼굴을 뒤로 해 부딪히는 입술을 받는다. 꼭꼭 위로 쳐올릴 때마다 몸이 저릿했다. 아, 스오, 스.... 레오는 잠자리에서 남자의 이름을 불러본 적이 없었다. 그건 너무 연인스러운 것 같았다.
굳이 정의한다면 이건 계약 관계다. 황제의 암살을 의뢰받았던 츠키나가 레오는 별로 좋지 못 한 전략을 선택했다. 여성의 옷을 입고 궁에 숨어드는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연회 자리에 섞여들어 일을 처리한 후에는 시종이나, 호위병으로 위장할 생각이었다. 황궁엔 무수히 많은 사람이 있고, 황제가 자신을 발견할 리는 없었다. 이를테면 사전 조사였다. 레오는 황궁의 은밀한 사정과 그 길을 알고 싶었고 그 일을 위해 여장을 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섞여들기까지는 수월했다. 레오는 의심받지 않고 황궁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담을 넘던 남자와 마주쳤다. 남자는 낑낑거리며 애쓰고 있었다. 레오는 못 본 척 지나가야 했지만 그러질 못 했고, 상대가 궁금했다. 결국 가까이 다가가 도와주고 말았다. 헉헉거리며 높은 담 밑으로 떨어진 남자는 오도가도 못 하고 난처했다고 설명했다. 좀 전까지 도와주긴 했지만 얼굴을 마주해서야 좋지 못 하다. 레오는 다소 말괄량이 기질이 있지만 어쨌든 정숙한 양갓집 규수를 연기해야 했다. 한 손을 들어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호호 웃었다. 별 다른 게 없다면 그대로 지나쳐 가야 했으나, 남자는 레오에게 손을 내밀었다. 갑갑해서 나오신 게 아닙니까? 나와 같다면 이것도 인연이니까 좋은 곳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 손을 잡기 위해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을 때, 레오는 상대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아주 예쁘고, 잘생긴 얼굴이었다. 레오는 아... 하고 숨을 삼켰고 어정쩡하게 남자의 손을 붙잡았다. 남자가 레오의 손을 잡아 끌었다. 이거 아닌데... 하면서도 그를 따라가면서, 레오는 그 얼굴이 이상하게 낯이 익다는 걸 깨달았다.
놀랍게도 그건 황제였다. 그렇다면 이건 기회다.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좀 더 으슥하고, 좀 더 깊숙한 곳으로 가서 상대를 살해하면 된다. 레오는 너무나도 쉽게 일이 흘러가는 느낌에 다른 의미로 당황했다. 속임수일까? 정말 이게 황제라고? 머리 속으로 온갖 생각이 지나가는 동안, 황제인 남자는 레오에게 좋은 곳을 구경시켜주고 침소로 이끌었다. 으슥하고 깊숙한 곳. 단 둘인 상황이라면 최고다. 레오는 그대로 그에게 끌려갔고, 이윽고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이상했다. 정말이지, 모든 것이 너무나도 이상했다.
호화로운 침상 위에 누워서, 황제는 레오의 가짜 머리카락을 떨구고, 레오가 꼭꼭 싸매어 감추었던 판판한 가슴을 드러냈다. 그는 레오의 맨살을 만지며 웃었다. 당신, 역시 남자로군요. 미소짓는 얼굴이 가까워졌다. 레오는 이대로 그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언가 다른 목적이 있어서 궁에 들어왔다는 것도 알겠어요. 좋아요, 목적이 뭐죠? 레오는 대답을 하지 못 했다. 역시 여장을 하고 들어왔던 게 문제가 아닐까. 자신이 뻣뻣하게 굳어진 그 이유를 레오는 알지 못 했다. 그 밤을 그렇게 보내고 레오는 황제의 첩으로 거처를 받았다.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었다.
"......."
옆으로 누워 가만히 숨을 흘리면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이 느껴진다. 레오는 눈을 내리깐 채 입을 다물었다. 미친 놈이라는 이 황제는 남자인 레오를 안았고, 남자인 게 다행이라며 기뻐했다. 아이가 생기지 않을 거 잖아요. 잘 됐어요. 뭐가 잘 됐다고 하는 건지, 레오는 알 수가 없었다.
"얌전하네요."
"내가?"
"네. 난폭하게 굴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럴 리가. 계약을 했잖아."
"목숨을 건 계약?"
그 계약에 걸려 있는 목숨은 자신의 것이 아니다. 레오는 머리카락을 만지는 손을 느끼며 몸을 돌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이 황제는 어리고, 잘 생긴 얼굴을 하고 있다. 손을 뻗어 그 뺨을 쓰다듬으면 그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고 레오의 손을 잡아 손가락 다섯개를 모두 얽게 하고는 꼭 쥐어왔다.
"...있잖아, 역시 날 데리고 다니는 게 낫지 않겠어?"
"그럴 수도 있겠네요."
"난 솜씨가 좋아. 황제 폐하의 그림자에 숨어서, 폐하에게 닥치는 위험은 모두 감지할 수 있으니까."
"좋은 일이죠."
웃는 얼굴에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건 이런 거다. 레오는 인상을 쓰고 한 자 한 자 힘을 줘서 말했다.
"난 이 궁에 얌전히 쳐박혀 있는 게 싫은데."
"전 당신이 여기 있었으면 좋겠어요."
"...암살자에, 밀정인데? 애초에 나는 여자도 아니야. 황제의 첩같은 거, 할 수 있을 리 없잖아."
"맞아요, 저도 잘 알죠."
손가락 다섯을 모두 맞물리게 한 남자가 그대로 몸을 붙여 온다. 레오는 인상을 쓰다 말고 잠시 숨을 삼켰다. 남자가 상냥하게 이마에 입술을 댄다.
"하지만.... 역시 그냥, 제 연인이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이 말에 대꾸할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자신은 여자가 아닌데, 이 멍청한 황제는 사랑을 기대하고 끌어안아 온다. 떠나고 싶으면 언제든, 이 목숨을 가지고 새 시작을 해요, 암살자 씨. 그런 계약이었던 것 같다. 레오는 그의 목을 가져가는 대신 자신이 받은 상냥한 입술을 돌려 주었다. 이런 류의 주고받기엔 서툴러서, 레오는 남자가 하는 행위를 흉내내는 정도에 불과했다. 이런 걸 사랑이라고 여길 수는 없었다.
"폐하는 정말... 바보네."
연인 같은 게 아니라 목숨을 주고 받는 사이일 뿐이지. 다른 사람들이 미친 놈이라고 수군거리는 이유를 알겠다고 생각하면서, 레오는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 이 알 수 없는 황제를 끌어안았다.
루우
츠키나가 레오는 옥상에 걸터앉아 하늘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석양이 짙게 내려오는 하늘은 새빨간 단풍의 색깔을 한껏 뽐내고 있지만 곧 다가올 밤이 짙은 장막을 불러올 것이다.
레오가 처음 지상에 내려왔을 때에는 지금보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푸른 커튼에 걸려 있었다. 일부러 시간을 낭비한 건 아니다. 흠집 하나 없는 새파란 하늘에 도드라지는 흰 구름이 흘러가는 것이 토끼의 여정 같아서 저도 모르게 따라가게 됐을 뿐이다. 바닷가에서 시작한 여행은 어느새 빌딩이 가득한 숲까지 이어졌다. 사실 그 토끼는 한참 전에 사라졌다. 동그랗고 새하얀 구름이 점점 흩어지고 조금 탁해진 하늘을 춤추듯 떠돌다가 가장 높은 건물 위에 내려앉았다. 조금 있으면 얼마 남지 않은 낮을 밤이 집어삼킬 것이다.
‘슬슬 일어나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한지도 몇 시간이 흘렀던가. 빌딩 숲에 하나둘 켜지는 반딧불을 보면서도 레오는 일어나지 않았다. 조금만 더 있어도 되지 않을까. 저기 건물에 불이 다 켜지면. 혹은 저어기 건물에 불이 다 꺼지면. 이러고 있다간 금방 다가올 새벽을 생각하니 조바심이 마구 들었다. 이미 이틀을 아무 일 없이 보냈다. 여기서 더 지체했다간 그냥 문책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일어나야겠지.’
그렇게 마음먹었을 때는 이미 새까만 밤이었다. 밤의 주민들이 움직일 시간. 기지개를 쭈욱 핀 레오는 그대로 건물 밑으로 몸을 던졌다.
*
“정말 이렇게 늦게까지 있는 시간인데 걱정하시지 않아?”
“아시잖아요, 가족 아무도 절 신경 쓰지 않아요.”
“남의 부모님 나쁘게 말하는 건 좀 그렇지만, 이해가 안 돼. 어떻게 츠카사 같은 아이를 내버려두지? 내가 츠카사 엄마였으면 하루 종일 걱정돼서 일도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을 거야.”
밤의 거리에 마구 섞여드는 대화 중 하나가 그렇게 떠든다. 교복을 입은 소년, 츠카사는 보랏빛 눈동자를 곱게 휘며 웃었다.
“괜찮아요, 저는 누님만 있으면 되니까요. 그래서 기분은 좀 괜찮으신가요?”
“응, 츠카사랑 같이 있기만 해도 기분이 나아져서 이제 정말 괜찮아!"
“누님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뻐요. 괜찮으시다면 저와 조금 더 같이... 아.”
문득 닿은 시선의 끝에 있는 인물을 발견한 츠카사는 멈칫했다가 이내 한숨을 쉬었다.
“아니, 역시 오늘은 일찍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죄송해요.”
“이미 일찍이 아니잖아~ 얼른 집에 들어가. 데려다줄까?”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오히려 제가 누님을 에스코트해야 하는데, 다음엔 츠카사에게 부디 그 기회를 주세요.”
아이는 제법 꼬마 신사처럼 말을 늘어놓았다. 거기에 매끈한 미소년의 얼굴까지 더해지자 상대는 홍조 어린 얼굴로 웃음을 터뜨렸다. "다음에 기회를 줄게, 작은 기사님." 소년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여자는 한껏 가벼워진 걸음으로 인파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여자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미소를 지으며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소년은 이내 표정을 굳혔고 벤치를 향해 똑바로 걸어갔다.
"여기에서 뭐하는 겁니까, 당신."
“응? 뭐야, 벌써 끝난 거야?”
벤치에 앉아있는 후드티를 입은 소년, 레오가 짐짓 놀란 척 물었다.
“또 방해하러 온 겁니까?”
“아니, 아니. 이번에 그냥 구경하기만 했는 걸?”
“그렇게 빤히 바라보고 있으면 될 일도 안 될 겁니다. 굳이 하계까지 내려와서 남의 비즈니스를 망치나요?”
“와하핫, 보고만 있어도 방해라니 나 그래도 나름 천사라는 걸까! 악마의 유혹에 빠질 뻔한 어린 양을 구했다!”
“이미 늦었다고요. 넘어오기 직전이라는 말조차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그녀는 제 손아귀에 있어요. 아마 내일쯤이면 몸도 마음도 홀랑 저에게 바쳐서 영혼은 제 것이 되겠죠. 당신의 방해는 딱 하루 정도의 시간 벌기에 지나지 않는다고요.”
츠카사가 손가락으로 허공에 하트를 그리며 무미건조하게 대답한다.
츠키나가 레오는 천사, 스오우 츠카사는 악마.
각자 서로 다른 색의 날개를 지니고 그들의 경계선이자 주 근무처인 인간들의 세상, 하계에서 레오는 츠카사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어린 악마는 천사를 처음 보았고, 오래된 천사는 어린 악마를 재미있어 했다. 그렇게 이어진 인연은 만날 때마다 부싯돌이 틱틱 튀는 대화로 이어지긴 했지만 다른 천사와 악마의 관계에 비하면 매우 온화한 축에 속했다.
천사와 악마는 본디 상성이 극악이어서 그 자리에서 서로의 존재를 제거하려고 드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신의 피조물과 신에게 반발하는 자들의 무리가 나눌 대화라고는 피의 대화 말고는 있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괜히 악마에게 집적거리는 레오는 천사로서 굉장히 비정상적이었다.
“그 어린 양을 내가 구원하기 보다는 그전에 널 한 방 먹이는 게 더 빠르지 않겠어?”
“천사들은 거만하기 짝이 없군요. 지금 당장 소멸시켜드려요?”
“오래 살고 볼일이네!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악마한테 이런 소리나 듣고 말이야. 그래도 털을 곤두세운 아기고양이 같아서 귀엽긴 하네. 착하지~”
머리를 쓰다듬자 츠카사가 발끈하며 손을 쳐냈다.
“바보 취급하지 마세요!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왜 이런 시간에 거리를 나다닙니까. 착한 천사님들은 양모 잠옷을 입고 코 자야 할 시간 아닌가요?”
“야간 근무라는 것도 있는 거니까. 여기도 좀 바쁘거든.... 스오를 방해할 생각은 없었어. 앗, 천사가 이런 말 하면 안 되나? 결과적으로 방해했으니까 내 할 일은 한 셈인가?!”
“여전히 정신없는 천사군요. 처음엔 천사들은 다 당신 같은 줄 알았는데.”
한숨을 쉬던 츠카사가 레오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교복을 입고 있는 어린 소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수트를 차려 입은 성인 남성이 있었다.
“이런 곳에서 아무 것도 안 하고 있다는 건 농땡이 치고 있단 소리겠죠. 가요, 인간들 식으로 식사 같은 거나해요. 당신의 태만함에 동참해 줄 테니까.”
“오오, 굉장한걸. 이브닝드레스라도 입어야 해?”
“됐네요. 학생 둘이서 밤길을 다녔다간 경찰이 부르는 경우도 있으니까. 갈 거예요, 말 거예요?”
“갈래~”
내민 손을 레오가 덥석 잡는다. 조심성 없게, 라며 혀를 차지만 츠카사는 익숙하게 레오의 손을 잡고 밤의 거리로 들어간다.
“야경이 나름 괜찮은 곳이 있으니까 거기 가요.”
“오옷, 스오가 쏘는 거야?!”
“돈 없는 천사들과 달리 저희는 rich하거든요. 천사의 일을 방해할 수 있다면 이쪽은 환영이니까.”
“헤에, 이게 바로 시간 끌기 작전인가? 그래도 결국, 하게 될 거고. 스오는 헛돈을 쓰게 될 지도 몰라!”
“상관없어요. 끽해야 식사 한 번뿐인걸. 그리고... 뭔가 엄청 가기 싫은 얼굴 하고 있어서.”
중얼거리던 츠카사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뒷말은 없던 걸로 해주세요. 저기에요, 불성실한 천사 씨.”
레오는 가리키는 가게 대신 츠카사의 얼굴을 흘끔 살폈다. 둔한데 이상한 데서는 눈치가 빠르네. 이러쿵저러쿵하지만 츠카사랑도 만난 지 꽤 됐다는 걸 깨달았다. 천사를 에스코트하는 유일한 악마. 모든 악마가 츠카사 같으면 사이좋게 지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문제는 악마가 아니고 천사 쪽일지도....
레오가 대답이 없자 츠카사가 갸웃거리며 레오의 안색을 살핀다.
“왜 그래요? 별로 마음에 안 들어요?”
“아니. 스오가 잘생겨서 나도 모르게 쳐다보고 말았어.”
“다, 당신, 천사가 그래도 돼요?!”
빨개진 얼굴로 츠카사가 버럭 외쳤다.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며 레오는 츠카사의 팔짱을 꼈다.
“얼른 가자고, 성실한 악마 씨.”
천사와 악마라는 상극의 관계일 텐데도 츠카사는 어쩐지 싫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
천사들이 기거하는 곳에는 언제나 눈이 부실 정도의 하얀 빛이 드리워졌다. 일절의 그림자는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구석구석 빛들이 들어차있다. 신의 사자들이 신탁을 받기 위한 자리기도 했기에 당연할 지도 모른다.
불순물 하나 섞이지 않고 에메랄드빛으로 흐르는 물줄기가 이어진 거대한 호수 위에 그들의 성이 있었다. 레오는 그 공간을 사랑했다. 새들이 걱정 없이 지저귀고 경건한 오르간 소리가 간간히 들리는 천사들만의 낙원. 그 중에서 가장 중앙의 가장 높은 곳에서 그들은 신의 말씀을 받든다.
까마득하게 높은 천장 아래로 둥글게 내려오는 홀에서 샹들리에가 무지갯빛으로 빛난다. 레오는 그 가운데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흰 계단이 이어져있고 그 끝은 감히 고개를 들어서도 안 되는 위대한 창조주인 신이 존재하는 곳이다. 계단의 끝에는 양 옆으로는 창을 든 천사들이 줄지어 있다. 접선의 자리에는 주교급 천사들이 기록자로서 자리를 지킨다. 레오는 사도로서 명을 받고 인간계로 내려가게 될 것이다. 줄곧 그랬던 것처럼.
[ 무지몽매한 인간들에게 가르침을 전하고 오너라. ]
귀로 듣는 게 아닌 몸 전체가 받아들이는 소리였다. 레오는 고개를 숙였다.
엄격한 눈들이 레오를 바라보고 있다. 모든 것은 신의 말씀대로. 그들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츠키나가 레오가 명을 부여 받은 지 사흘 째.
신의 말은 그대로 실현이 되었다.
*
“17일 현지 시각, 오전 남태평양에 위치한 사모아 제도 부근에서 진도 8.0의 강진과 함께 높이 6미터의 쓰나미가 발생해 대규모 인명피해가 일어났습니다. 정부에서는 재해가 일어난 직후....”
침대 맡 스탠드만 켜진 호텔 안에서 적막을 메우듯 텔레비전이 떠든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화면의 빛과 스탠드의 불빛이 방 안에 있는 두 사람을 언뜻언뜻 비춘다. 한 사람은 테이블에 앉아 무언가를 적고 있고, 한 명은 침대에 다리를 뻗고 길게 누워있다. 두 사람의 차이라면, 서로의 성별이 다르다는 것과 한쪽은 살아있고 한쪽은 죽었다는 점이 있었다.
츠카사는 한참 보고서를 적고 있었다. 그녀는 필요한 조건에 딱 알맞은 영혼이었다. 그 영혼을 지하로 보내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마침내 목적은 달성했다. 그녀의 혼은 크리스탈 병에 담아 보낸 참이었다. 그에게 남은 일은 이번 일의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 정도였다.
갑자기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츠카사는 의문스럽게 문 쪽을 바라보았다. 이 새벽에 찾아올 방문자가 있을 리 없었다. 숨을 거둔 그녀 역시. 침대 위의 그녀는 잠에 든 것처럼 편안한 얼굴로 누워있었다.
츠카사는 노크를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그녀의 죽음은 체크아웃 시간에 알려진다. 마저 펜을 움직이려는 찰나, 놀랍게도 문이 찰칵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은 당연히 잠겨있었고 방 카드키 역시도 문 근처에 꽂힌 상태였다.
굳게 닫힌 문이 끼이익 열렸다. 복도의 불빛을 등지고 어떤 이가 서 있었다.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그가 똑바로 츠카사를 바라보았다. 곧이어 등 뒤에서 네 장의 흰 날개가 뻗어나왔다.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남자가 외쳤다.
“죽이러 왔다, 이 악마야!”
“...레오?”
“에, 단번에 눈치 채잖아. 재미없네, 너.”
새벽의 무단 침입자는 순순히 인정하며 날개를 접었다. 곧 시선이 고요히 누워있는 여자에게 향했다.
“결국 데려갔구나. 신의 품에서 평안하라고 기도도 할 수 없겠네.”
“그녀와는 정당한 계약 조건을 걸었으니까요. 일곱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대신 영혼을 받기로. 서로 win-win인 계약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마지막 소원은?”
“그녀가 줄곧 짝사랑하던 상대와 잠자리를 갖는 거였지요.”
“그래서 멋진 분장을 한 스오가 열일했다는 거네. 으음, 이럴 때는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미 내가 개입하기도 늦어버렸고.”
레오가 움직일 때마다 카펫이 깔린 바닥에 젖은 자국이 남았다. 츠카사는 창문을 보았다. 그가 기억하는 한 이 도시에 비는 내리지 않았었다.
“당신, 젖었네요.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츠카사가 가까이 다가와 레오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레오는 어깨를 으쓱였다.
“말했잖아, 바빴다고.”
“...엄청 피곤해 보이네요. 천천히 이야기를 하고 싶으니 일단 자리를 옮길래요?”
“어디로?”
“제가 살고 있는 곳은 어떠세요? 아, 걱정하지 마세요. 인간계에 있는 집이니까. 사는 곳이 하나쯤은 있어야 업무가 편하거든요. 어때요? 아무도 들어와 본 적이 없는 곳이라고요. 하물며 당신 같은 천사는 절대 부르지 않겠지만, 당신만 특별히.”
“오오, 이게 악마의 유혹이라는 건가? 재밌네, 흥미로워. 그럼 한 번만 그 유혹에 넘어가보도록 할까.”
제법 익살스럽게 말하지만 전처럼 달라붙지 않는다. 옷이 젖었기 때문일까? 보고서는 돌아가서 쓰자고 생각하며 츠카사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우두커니 서서 여자를 가만히 보는 레오를 츠카사는 호텔 방문을 닫고, 다시 열었다. 호텔 복도가 아닌 츠카사의 은신처가 나타났다.
“가요.”
레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츠카사 곁으로 다가갔다.
곧 호텔 방에는 두 사람이 사라지고 누워있는 한 사람만이 남겨지게 되었다.
*
세탁기에서는 레오가 입었던 옷들이 돌고 있었다. 옷의 주인이 씻고 있는 걸 알려주는 물소리가 샤워실에서 들리고 있었다. 츠카사는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레오가 커피 취향이란 건 다년간의 접촉으로 알고 있었다. 츠카사는 홍차파였지만 이번에는 둘 다 커피를 준비한다.
물소리가 끊겼다. 다시 이어지지 않는 걸 확인하고 츠카사는 포트를 들어올렸다. 머그잔에 검은 액체가 고이기 시작했다.
“목욕 잘 했어! 오오, 옷에서 스오 냄새가 난다~”
헐렁한 반팔을 펄럭거리는 그에게 츠카사가 커피를 건넸다.
“당신에게선 아직 바다 냄새가 나네요.”
“이상하네. 깨끗이 씻었는데.”
레오가 쓰게 웃으며 커피를 받아들였다. 의심하는 기색 없이 호록호록 잘도 마신다. 비어버린 커피대신 한동안 침묵이 고였다.
“그래서 왜 절 찾아온 거예요?”
“가끔 그런 날 있잖아. 엄청 피곤할 때 잘생긴 얼굴로 위안 받고 싶은 날.”
“당신은 정말 거짓말을 못하네요. 저한테는 할 수 없는 이야기인가요?”
“아니야~ 진짜로 스오를 보고 싶어서 온 건데.”
“...왜 제가 보고 싶은데요?”
“그냥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데 동료보다는 뭔가....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천사가 말하니 칭찬인지 조롱인지 모르겠네요. 말도 횡설수설하는 거 보니 제정신이 아니 신 것 같고 어서 주무세요. 침대는 편히 쓰셔도 됩니다.”
“와하하, 환자 취급 받았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레오는 침대에 걸터앉아 얌전히 손에 든 커피를 삼켰다. 츠카사는 책상에 앉아 마저 보고서를 썼다. 펜 끝을 열심히 움직이면서도 레오의 상태를 살핀다. 제대로 시선이 마주치자 레오가 웃어온다.
“악마는 왜 있을까?”
아니, 시비를 걸어온다. 츠카사가 대번에 인상을 쓰며 대꾸했다.
“갑자기 뭡니까? 지금이라도 퇴치하려고요?”
“그럴 리가! 그냥 문득 궁금해서. 이상하지 않아? 이 세상을 만든 건 신인데, 왜 그 의지와 정반대인 것들이 존재할까. 스오가, 악마가 여기 있다는 건 신이 만들었기 때문이잖아? 일부러 적대세력을 만든 걸까?”
“그건 아닐 겁니다. 저는 나이가 어린 편이라 정확히는 모릅니다만, 당신들과 같이 신의 피조물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럼 너희들은 어떻게 태어난 거야?”
천사의 질문에 악의는 일절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악마는 잠시 고민하다가 순순히 말한다.
“...아마 결핍에서 태어나지 않았을까 합니다. 이곳은 신이 만든 세계입니다. 하지만 그 세계가 완벽하지 않아서 결핍이 일어났습니다. 인간들이 소원을 가졌다는 것은 즉 결핍을 가지고 있단 말이에요. 저희는 그 부족한 것을 메우려는 수많은 이들의 원념 속에서 태어났다고 해요. 애초에 신이 완벽한 세계를 만들었다면 저희는 태어나지도 않았다는 말이죠.”
“꽤 흥미로운 대답인걸. 신이 완벽하지 않아서 악마들이 태어났다라....”
“그 악마라는 명칭도 우스워요. 선악은 아주 모호해요. 하루하루 남편에게 매질을 당하던 아내가 칼을 들어 원흉의 배를 찔렀어요. 이럴 때 그녀에게 악이라는 정의를 덧씌울 수 있을까요? 선악을 결정지을 수 있는 건 신도 악도 아닌 자기 자신이에요. 하지만 낙원의 높으신 분은 생각이 다르겠지만요. 애초에 신은 절대선이 아니지 않나요?”
“회사마다 방침은 다른 거니까. 다만, 그래. 창조주가 절대선이 아닐 수도 있어. 그래도 나는 사명을 따라야하고....”
레오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너무 오래 살았나봐. 생각이 많아지네. 쓸데없는 생각만.”
“곧 죽을 영감처럼 그러지 마요. 자고 일어나면 대충 정리되지 않을까요.”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그러네, 요 꼬맹이. 나 언제까지 여기 있어도 돼?”
“당신이 있고 싶은 만큼요.”
“오옷, 숙박비는~?”
“흠, 그건 고민 좀 해볼게요. 천사에게 뜯어낼만한 게 뭐가 있을지 정말 흥미로워요.”
“우와, 방금 진짜 악마 같았어 스오!”
“악마 맞거든요.”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구석에서 나왔다. 레오가 주섬주섬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것이 보인다. 츠카사는 다시 펜을 제대로 집었다. 아마 보고서는 저 천사가 잠들고 나서야 제대로 마무리를 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마워, 스오.”
이불에 얼굴을 반쯤 파묻은 천사가 그렇게 말했다.
“천사에게 감사 인사 받아봐야 하나도 고맙지 않으니까 빨리 자기나 해요.”
일부러 쀼루퉁하게 대답하며 츠카사는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귀가 화끈거리는 기분이었다.
*
며칠 만이더라. 레오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보았다. 열손가락을 한 번 다 접고도 다시 펴도 셈은 끝나지 않았다. 와, 엄청 돌아가지 않았잖아. 소환장이 내려올 만하네. 한숨을 쉬며 레오는 손을 내렸다. 손목을 묵직하게 죄고 있는 것에서 절그럭 거리는 소리가 난다. 날개도 구속구에 갇혀 꼼짝을 할 수 없다.
소환장은 귀여운 표현이었다. 아무와도 연락하지 않고 츠카사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과연 악마의 은신처라고 하더니 동료들도 쉽게 연락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끝끝내 낙원의 연락은 레오에게 도착했다. 레오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엄중하고 무거운 선고가 내려져 있었다.
언제나 낙원에 울려 퍼지던 신성한 음률이 들리지 않는다. 레오도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빛으로 가득 찼던 곳에서 걸어가면 걸어갈수록 어둠에 감싸여졌다. 한참을 걸어가다가 이곳에서 대기하라는 말을 듣고 레오는 멍하니 서있는 참이었다. 이곳이라고 해도 아무 것도 없었다. 새까만 어둠만이 주위에 가득했다.
갑자기 레오 주위가 환하게 밝아졌다. 레오는 눈을 가늘게 떴다. 둥그런 조명이 레오만 내리쬐고 있는 것 같았다. 높지만 아주 작은 원형 무대에 레오가 서 있는 모양새였다. 주변이 잘 보이지 않지만 지켜보는 이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앞에서 어떤 목소리가 엄숙하게 선언했다.
“지금부터 츠키나가 레오의 재판을 시작한다.”
*
“하스미 선배, 큰일 났어요!”
하스미 케이토는 방정맞은 행동거지를 싫어한다. 문을 열기 전부터 계단을 우당탕탕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어떤 예감은 있는 법이다. 케이토는 이사라 마오의 품위 없는 행동을 지적하는 대신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역시나 나쁜 예감은 들어맞았다.
“츠키나가 선배의 재판이 열렸다고 합니다.”
“뭐라고...? 지금?”
“네, 방금 들어온 소식이에요. 일부러 저희에게 연락이 가지 않도록 한 것 같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신관장인 에이치가 부재중인데 어떻게 재판을 진행할 수가 있지?”
“그게, 지하 재판장에서 비밀리에 치러진 것 같습니다.”
“거긴 이단 심판장이잖아.”
인상을 쓰며 케이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츠키나가 레오는 규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멋대로 구는 망나니에 시끄럽기까지 한, 케이토와는 아주 정반대의 천사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 한 동료기도 했다. 그와는 아웅다웅하면서도 등을 맡길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자 중 하나였다.
“평소보다 부재가 길었지만 재판까지 갈 일도 아니었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냐.... 죄목은 뭐지?”
“그게... 임무 관련 보고 누락 및 소환 명령 무시가 있는데 이다음이 문제예요. 악마와 의도적 접촉 및 부적절한 관계가 의심되고 있고, 창조주를 모독하는 언사가 있었다고....”
“이 죄를 모두 인정하는가.”
목소리가 무겁게 떨어졌다. 레오는 머리 위로 쏟아지는 죄목들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과장된 것도 없지 않아 있었다. 조그만 행동 하나를 부풀리고 죄로 만든다. 항변할 수 있었지만 부질없어 보였다. 이미 죄의 낙인이 찍힌 상황이다. 레오가 아무리 부정해도 결과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큰 죄목인 ‘악마를 친구’라고 생각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인정합니다.”
레오는 담담하게 말했다. 자신의 임무에 회의를 느끼고 있는 이상 레오가 천사의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도 의심스러웠다. 레오를 둘러싸는 낙원의 모든 것에 지쳐버렸다.
“그대의 죄가 무거워 엄벌에 처해야 하나, 지금까지 쌓아온 공적을 인정하여 하나의 보속만을 내리도록 하겠다. 부적절한 접촉을 한 악마를 처단하고 오거라. 그 악마의 피로 너의 죄가 씻길 것이니 가서 지금 바로 비천한 악마에게 신의 말씀을 전하고 오너라.”
레오는 고개를 들었다. 뒤편으로 빛이 비쳐 들어왔다. 언제까지고 갇혀있어야 할 것 같은 재판장의 출구가 열리고 있다. 어느새 손의 구속구가 사라져 있다. 날개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레오는 움직이지 않았다.
구속구가 물려있지 않던 입이 움직였다.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츠키나가, 제발 쓸데없는 행동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라. 곧 에이치가 오니까 어떻게든 수습할 수 있어. 말을 듣는 척 하고 상황이 나아질 때까지 기다려.’
케이토는 그렇게 속으로 씹어 삼켰다. 이런 걱정을 한다는 건 그럴 행동을 저지르고도 남을 인물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뭔가 이상해. 진행이 너무 빨라. 여기도 이제 알게 된 정보를 미리 가지고 있었다고? 츠키나가는 여기에서도 제대로 연락이 되지 않았어. 대체 어디서 그 정보를 얻었다는 거지? 에이치가 없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은 움직임인데. 마치 누가 뒤에서 수를 쓴 것 같은....’
케이토의 생각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하얀 빛이 케이토 주위를 깜박이고 있다. 마오의 연락이었다.
“뭐냐, 이사라. 재판장까지 얼마 남지 않았어. 조금만 더 가면....”
“하스미 선배, 끝났어요. 거긴 텅 비어있을 겁니다. 판결이 선고됐어요, 형벌도 벌써 집행됐다고 합니다....”
“그 멍청이는 시간 끌줄도 모르나?! 그래서 츠키나가는 어디 있지?”
“...너무 늦었어요.”
케이토의 걸음이 멈췄다.
“무슨 소리야?”
“낙원 추방이 선고됐어요. 날개도 이미....”
*
천사에게 낙원 추방이란 죽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낙원을 떠나기 전 날개가 뽑히는데 그것은 천사들의 힘의 원천이나 다름없어 즉시 아무런 힘도 못쓰게 된다고 한다. 그 상태에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하계, 인간 세계로 버려진다. 돈도 가족도 무엇도 가지지 못한 채 버려지는 천사들의 최후는 뻔했다. 운이 좋으면 마음씨 좋은 인간들에게 거둬지는 경우도 있지만 극소수였고, 보통은 호된 꼴을 당하며 운 나쁘게는 천사에게 악감정을 가진 악마들에게 찢어발겨지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찾았다.”
츠카사는 검은 날개를 접고 후미진 골목으로 들어섰다. 그 끝에는 웅크린 누군가가 있었다. 운이 좋았다. 아프리카 오지에 떨어졌으면 수색에 애를 먹었을 것이다. 그래도 결국 찾아냈겠지만.
주황색 머리칼을 가진 남자의 두 눈은 꼭 감겨 있었고, 등에는 핏자국이 가득했다. 아직 부상에서 회복되지 않은 듯했다. 츠카사는 레오를 안아 올렸다. 그는 아직도 깨어나지 못했다.
“숙박비는 당신의 날개로 받았어요. 저희 집이 좀 비싼 편이라서.... 대신 당신은 이제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어요.”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내심 레오의 날개가 사라진 걸 안타깝게 여겼다. 그의 흰 날개는 유독 아름다웠다. 그 네 장의 날개를 모두 펼쳐들고 대재앙을 일으키는 모습은 말도 못할 아름다움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악마인 츠카사가 천사인 레오를 가지기 위해서는 이 수밖에 없었으니까. 날개도 지위도 갈 곳마저도 잃은 레오는 결핍덩어리가 되어 악마를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츠카사는 여전히 감겨 있는 눈두덩에 경건히 입술을 떨어뜨렸다.
“이제 영원히 함께 해요, 나만의 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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