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어나스테에 나올 예정인츠카레오 소설본 트윈지(R-19)"비 오는 날" 샘플 입니다. => 펑크 나서 11월 츠카레오 배포전에 나옵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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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비 오는 날에 사람 줍는 츠카레오 이야기
루우: 레오가 츠카사를 줍습니다.
미나비: 츠카사가 레오를 줍습니다.
사양:
A5 / 120p / 16000원
샘플에 성적 행위에 대한 묘사는 등장하지 않지만 본편에서는 (미나비님 편에서 많이) 등장하니 주의해 주세요.
비가 쏟아지는 밤이었다.
사방이 먹으로 가득 찬 길거리에 가로등만 빛났고 걸음을 재촉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늘부터 장마라더니 웬일로 맞아떨어진 일기예보에 모두들 외출을 꺼린 듯 했다. 아니면 아주 늦은 밤이어서 그랬을 지도 모른다. 막차를 간신히 타고 나서 집으로 천천히 향하는 구두걸음은 빗물과 바닥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찰박찰박 밟고 지나간다. 걸음 하나하나에 오늘의, 한 주의, 한 달의, 어쩌면 평생을 걸쳐 풀리지 않은 피곤함이 그림자처럼 진득하게 녹아 떨어졌다. 씻고 자면 다음의 출근이 기다린다. 톱니바퀴처럼 내일 하루도 짤각짤각 맞춰 돌아갈 것이다. 직업이라는 이름의 부품이 서로 맞물려 거대한 경제가 돌아가고 있다고 세상의 노동자들을 독려하지만, 그 위대한 흐름에 작은 부품의 잡상은 고려되지 않는다. 녹이 슬어 움직이지 않게 되면 더 튼튼하고 반짝이는 새 부품이 기다리고 있다. 이전 바퀴와 마찬가지로 낡은 부품이 될 때까지 쉴 새 없이 회전을 반복할 것이다. 하지만 이게 당연했다. 이런 진창을 갈아야 할 것 같은 생활을 반복해야만 했다.
“…….”
먹구름이 가득 낀 머리는 멍청한 생각을 반복한다. 지하철 플랫폼 끄트머리에 서서 멍하니 다가오는 열차를 바라보다가 결국은 한 발자국을 무른 것처럼,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해도 마찬가지. 장마 기간이니 좀 더 축축해졌을 뿐, 오늘도 내일도.
“……?”
발걸음을 멈췄다. 바닥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고독한 소음 속에서 길거리에 녹아들지 못한 이질적인 걸 바라본다. 그건 얼핏 보면 버려진 커다란 인형 같이 보였다. 자주 가는 빵집-지금은 문을 닫아 불빛은 새어 나오지 않는-의 좁은 처마 밑에서 간신히 비를 맞지 않는 모습으로 주저 앉아있는 그것. 희미하게 닿는 주황색 가로등 불빛에 붉은 머리칼이 어룽지고 눈썹을 살짝 가리는 앞머리 아래로 눈이 감겨 있다. 비가 쏟아지는 이런 날에 가게 앞에서 머리를 기대고 잠들어 있는지, 기절한지 모를 남자를 멈춰 서서 바라보았다.
모른 척 지나가야 한다. 괜히 건드렸다가 이상한 일에 휘말릴 수 있으니까. 경찰을 부를 수도 있다. 웬 남자가 쓰러져 있다고 하면 된다. 피곤에 지친 뇌는 그 간단한 일마저 거부하고 있지만 어째선지 발길을 움직이지도 않았다. 언젠가 봤던 뉴스에서 나오던 묻지 마 범죄 때문일지도 모른다. 동네에서 일어난 일이라 더 자세하게 봤던 그 뉴스에서 범죄 대상은 20대 청년이었고 다행히도 목숨엔 지장이 없지만 범인은 아직 잡지 못했다는 것. 이렇게 길거리가 조용한 건 다들 뉴스를 봐서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뒤늦게 했다. 내버려 두면 죽는다던가. 그러니까 역시 신고를 해야겠지.
핸드폰을 꺼내어 번호를 누르려고 할 때 남자가 움찔하는 게 보였다. 어깨를 잠깐 움츠리더니 눈을 천천히 뜬다. 어둠 속에 잠긴 보라색이 잠시 후 똑바로 바라보았다. 흰 피부에 붉은 머리칼의 붉은색과 눈동자의 보라색이 도드라진다. 그리고 이내 부드러운 곡선을 지으며 웃어 보였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안녕하세요.”
“…….”
남자의 인사에 누르려던 핸드폰을 보다가 잠시 보류한다.
"시간이 늦었네요. 이제 퇴근하세요?"
마치 옆집 이웃이라도 되는 양 여상하게 물어보고 있다.
“…멀쩡히 말할 기운이 있으면 잠은 집에 가서 자는 게 어때. 힘들면 구급차는 불러줄게.”
“당신이 더 피곤해 보여요.”
아닌 게 아니라 굉장히 피곤했다. 하지만 이 날씨에 노숙하는 사람에게 들을 말은 아니었다.
“그럼.”
어디 아픈 기색이 없다는 걸 확인했으니 더 이상 남아있을 이유는 없다. 발걸음을 돌리려는데 남자가 말을 걸었다. 좁은 처마를 벗어나서 구멍이라도 뚫린 듯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서 있다.
“저도 데려가면 안 돼요?”
머리가 엉망으로 젖어 들어가는 게 보였다. 입고 있는 반팔 티도 금방 어깨부터 색이 진해졌다.
“말 잘 들을게요. 옆에만 있게 해주세요.”
정말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다.
*
츠키나가 레오는 이 나라에 흔히 있는 샐러리맨이었다. 대학도 졸업하지 못했지만 인력 손실로 인해 간신히 회사에 들어갔고 양복을 입은 이들 틈에 섞여 당연하게 일을 지속했다. 자기소개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 아침 8시 신주쿠역을 보시면 전철에서 우르르 몰려나오는 사람들이 보이죠, 그런 사람들 중 한 사람입니다. 그보다 조금 뒤떨어질지도. 이게 제일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조금 지쳐있고 주말을 기다리지만 커다란 약속이 잡힌 것도 아니다. 침대에 누워 가만히 숨을 쉬어 피로를 떨치려 하지만 월요일이면 으레 무거워지는 몸을 알고 있다. 그런 사람이었다.
“욕실 잘 썼어요.”
아까 비를 맞을 때처럼 똑같이 물에 젖었지만 훨씬 개운한 얼굴을 한 남자가 말했다. 레오가 헐렁하게 입었던 반팔티와 바지가 남자 몸에 애처로울 정도로 달라붙어 있었다. 남자는 전혀 개의치 않은 듯 따끈따끈해 보이는 얼굴로 레오에게 눈웃음을 치고 근처로 다가온다.
“먼저 써서 미안해요. 당신도 씻어야죠.”
딱히 거부할 마음도 들지 않아 고개를 끄덕이고 레오는 욕실로 들어갔다. 이전 남자가 쓴 열기가 채 빠져나가지 않은 곳에서 옷을 하나 하나 벗으며 지금의 상황을 생각한다. 왜 저 남자를 집으로 들였는지.
답은 간단했다. 궁금해서다.
일본의 각박한 인심을 알려주기 위한 몰래카메라 같은 걸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뭔지도 모를 방송이 심야의 시각에 굳이 이 변두리 동네까지 와서 찍을 필요는 없고. 그래서 무슨 일로? 왜 자정인 시간에 밖에 나와 비를 피하고 있는지, 처음 보는 사람을 기다렸다는 듯이 데려가 달라고 하는 지. 사실 제일 궁금한 건 이거였다. 낯선 이를 아무 경계 없이 데려간 이후의 끝은 무엇인지.
목욕이 끝나고 나오면 쑥대밭이 되어 있는 방이 기다리고 있다던가. 혹은 식칼을 들고 서 있다던가. 그러면 역시 돈을 줘야겠지? 증거 인멸을 위해 결국엔 살해당하는 건? 레오는 남의 일처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저녁 뉴스에 나올 일들을 잔뜩 생각하고 욕실을 나왔지만 좁은 방 안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심지어 남자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는지 아까 앉아있던 모습에서 조금도 변하지도 않았다. 어쩐지 김새서 레오는 한숨과 함께 방으로 들어섰다.
-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지만 고개를 들진 않는다. 한 번 더 똑똑, 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츠카사는 쓴웃음을 짓는다. 노크라니, 놀리고 있다. 안 들리는 척 한 번 더 무시하자 문이 열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카펫 위를 천천히 걸어오는 움직임. 피부가 쓸리는 마찰음. 갑자기 시야가 밝아진다. 츠카사는 눈을 떴다.
"지쳤어?"
레오다. 얼굴을 덮고 있던 책을 들어올린 그가 짓궂게묻는다. 츠카사는 대답 않고 다시 눈을 감았다. 스오~. 조르는 목소리의 남자가 츠카사의 뺨을 꼬집는다. 츠카사는 다시 눈을 떴다. 레오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입을 맞춘다. 짧은 키스가 간지러운지 킥킥거리며 웃는 레오가 츠카사의 입술을 피하려는 듯 몸을 뒤로 뺀다. 츠카사는 레오의 몸을 붙잡아 아래로 끌어 당겼다. 자신의 몸 위로 앉히려 하자 레오가 싫다며 저항했다.
"여기서 또 하기 싫어."
츠카사의 무릎 위의 그가 고개를 흔들며 내려왔다. 츠카사는 레오를 붙잡는 대신 이젠 책상에 팔을 내려놓고 턱을 괴었다. 레오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레오가 다시 문을 가리켰다.
"밥 먹으러 가자."
"작업은 다 하셨어요?"
"응. 이제 더 안 나와. 밥 먹어야 해."
츠카사한테 다시 잡힐새라 가볍게 앞서 걷더니 카펫 위의 레오가 다시 손짓했다. 스오, 밥 먹으러 가. 츠카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네, 대답까지 덧붙이자 만족한 얼굴로 레오가 문을 연다. 츠카사는 문을 나서다 말고 서재를 돌아보았다. 카펫 위로 떨어진 얼룩이 보인다. 책상 앞편에도 꽤 질펀한 흔적이 남았다. 서류에도 좀 묻었을지 모른다. 중요한 서류는 없으니 상관없을 테다. 정리하는 메이드들에겐 지나친 상상의 여지를 주게 되겠지만.... 그들도 이젠 익숙하겠지.
문을 닫고 나오면 앞서 걸어가는 레오의 모습이 있다. 작은 남자는 헐렁한 티 하나만 걸치고 경쾌하게 걸어간다. 남자의 작은 엉덩이에 손자국이 선명했다. 아래는 잘 닦아줬던가? 츠카사는 격렬한 정사 뒤를 떠올렸다. 인스피레이션이라며 엉덩이를 들어올린 그는 풀려버린 다리에도 아랑곳 않고 신이 나서 서재를 벗어났었다. 남자의 작업실이 엉망일 거라는 데에 생각이 미친다.
"좀 식었어. 데워줄까?"
저택을 관리하는 이들의 얼굴을 보기엔 좀 낯뜨겁겠지만, 이런 오후가 하루이틀의 일은 아니다. 츠카사는 식당으로 들어와 레오가 가리키는 접시를 바라보았다. 어깨를 으쓱였다.
"전 괜찮아요. 리더는요?"
"나는 데울래."
잘 세팅되어 있는 음식 접시를 들고, 레오는 그대로 저쪽편에 있는 전자레인지로 향했다. 두 사람이 앉기엔 조금 넓은 식탁, 간단한 조리가 가능한 아일랜드 부엌. 거대한 저택엔 어쩐지 낯선 신혼 분위기의 주방이다. 츠카사는 자리에 앉았다. 메이드들이 오전에 준비한 음식들이다. 따끈할 때 먹으면 더 맛있겠지만 식어도 크게 바뀌지 않을 메뉴다.
"앗, 뜨뜨...."
데운 접시를 가져오다 말고 레오가 손가락을 빤다. 꼼지락거리더니 아무 트레이를 집어 그 위에 접시를 급하게 내려놓는다.
"괜찮아요?"
"응."
샌드위치에 차가운 스프. 스크램블 에그를 대충 덜고 츠카사는 느릿느릿 포크를 움직인다. 레오는 물을 먼저 마시더니 다리를 꼬았다. 숟가락을 들고 스프부터 마시기 시작한다. 오전엔 서재에 있었고, 정오 지나선 작업실에서 한동안 열중했던 모양이다. 배가 고플 수 밖에. 츠카사는 남자가 식사를 하는 걸 지켜보며 과일접시도 밀어주었다. 접시를 긁는 소리, 음료를 홀짝이고, 포크와 나이프가 부딪힌다. 이곳의 소음말고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저택은 고요하다. 두 사람만의 시간.
그러니까 오늘은, 방해받고 싶지 않은 날이다. 스오 이사님의 오프는 그리 많지 않아서, 며칠을 통째로 비우는 건 잘 없는 일이고 온전한 주말의 휴일을 즐기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온전한 휴일을 가지는 날이면 츠카사는 낮부터 저녁까지 저택에 모든 사람을 물리고 레오와 둘만 있고는 했다.
"후아...."
접시를 반정도 비운 남자가 크게 숨을 내쉰다. 한참 집중해서 먹더니 제법 배가 부른지 기지개를 켠다. 츠카사는 포크를 내려놓고 입가를 닦았다. 커피 대신 가져온 주스를 마시고 팔을 올려 턱을 괴었다.
"안 먹어?"
"먹었어요."
"솔직히 말해도 돼?"
"네."
"배고파서 죽을 뻔 했어."
그렇게 말하고 씨익 웃는다. 츠카사도 마주 웃었다. 레오가 다시 오목한 수프 그릇을 쥐었다. 숟가락으로 천천히 떠먹으며 발을 앞 뒤로 움직인다. 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본래도 이곳에서 누구의 눈도 신경쓰지 않는 사람이지만, 방해받을 일도, 방해할 사람도 없어서 행복해 보인다.
"리더. 입술."
입가를 닦을 생각도 않는 남자의 입술에 끈적한 잼이 묻었다. 츠카사는 자신의 입가를 톡톡 건드렸다. 레오가 응? 하더니 혀를 내밀어 입술 주변을 이리저리 애써 핥는다. 작은 입술과 붉은 혀. 경망스러운 혀놀림에 츠카사는 푸, 숨을 터트렸다.
"하면 안돼요?"
"지금?"
"네."
레오가 흐으음, 곤란하다는 소리를 낸다. 레오의 두 다리가 여전히 식탁 밑에서 휘적휘적거리고 있다. 츠카사는 자신의 바지 버클을 풀었다. 허벅지를 툭툭 두드려 보인다.
알싸한 향냄새와 엇비슷하지만 매캐한 담배 냄새가 섞여 사방을 진동한다. 멀리서 어렴풋이 들리는 가족을 잃은 이들의 곡소리는 이곳에 모여 있는 남자들에게 그 어떠한 애도의 감정도 자아내지 못했다. 그들은 충혈된 눈으로 자기 앞에 놓인 패를 연신 확인하고 걸린 판돈을 확인하며 옆자리의 상대에게 견제의 눈초리를 보낼 뿐이다. 검은 떼가 잔뜩 낀 손톱으로 조심조심 패를 뒤집고서는 이내 누렁니를 드러내며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거나, 입술을 짓씹으며 패배를 맛보는, 희비가 교차하고, 그런 그들과 상관없이 판을 벌인 주인에겐 이익을 선사할 이곳은 노름판이었다.
여러 조각의 나무들과 일정의 작은 공간들만 있으면 가능한 이 놀이는 하루 일해 하루 먹을 것을 간신히 마련하는 척박한 현실에서 눈을 돌려 패 몇 개를 뒤집기만 해도 돈을 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허황된 꿈을 가지게 했다. 순식간에 나라 전역에 걸쳐 유행하게 되어 패가망신하는 이들이 속속 늘어나자 높으신 분들도 마냥 두고 볼 수 없었는지 엄한 금지령이 내려졌다. 어마어마한 벌금형에도 일확천금을 노리는 이들과, 그들의 한줌 돈을 노리는 조직패들은 관리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알음알음 도박판을 열고 있었다. 개중엔 경계가 상대적으로 누그러지는 상갓집에서 하는 경우도 있었다. 오늘의 장소도 그러했다. 오랫동안 병을 앓다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건너게 된 아비를 두고 슬피 우는 자식들의 울음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노름꾼들은 안락한 장소에 만족해하며 속세의 놀이에 집중했다.
문이 끼익 열리며 찌들은 담배 향이 좀 빠져나가는 것과 동시에 다른 남자가 들어왔다. 슬쩍 얼굴을 확인한 남자들 중 몇 명의 인상이 눈에 띄게 구겨졌다.
“낄 거냐?”
“물론. 안 그러면 이 냄새나고 더러운 곳에 왜 왔겠어?”
새로 들어온 남자의 목소리는 쾌활했다.
“너 이 새끼 또 허튼 수작 부리려고 이번에야말로 네 놈의 그 얕은 수를 잡아내겠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말이지.”
남자의 주황색 머리가 호롱불 옆에서 더 밝게 빛났다. 남자들은 투덜거리긴 했지만 자리를 비켜줬다. 그 사이에 주저앉은 남자가 헐렁한 소매에 넣어둔 담뱃대를 꺼내며 웃었다.
“그럼 오늘도 한 판 놀아보실까.”
담뱃대를 물고는 뻐끔이며 연기를 내보내는 틈에 드러난 송곳니가 남자를 개구쟁이로 보이게 했다. 나무패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상주들의 피 맺힌 목소리가 사그라든지 오래일 때, 검정 하늘이 쉰 새벽을 찬찬히 맞이하자 판은 슬슬 접는 분위기로 들어갔다. 남자들이 달아오른 얼굴로 욕지기를 뱉고 적당히 챙긴 남자들은 그들의 노름에 만족해하며 주섬주섬 자리를 떴다. 주황색 머리의 남자도 거나하게 하품을 하곤 오늘 밤 몇 번이고 털어버린 재를 마지막까지 재떨이에 털어버리며 훌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자식 부른 거 누구야?”
불만스러운 목소리에 남자는 장난스럽게 손을 까딱였다.
“빠지면 섭섭해 할 거 아니었어~?”
“그렇게 털어만 먹다가 콱 뒈지는 수가 있어. 조심해.”
“따뜻한 걱정에 감사! 내 몸은 알아서 챙기니까 아저씨는 마누라 바가지 조심하셔.”
“진짜 재수 없는 자식, 아오.”
남자는 불끈 쥔 주먹을 내보였지만 마음 가득 담긴 폭력은 행사하지 못했다. 그러지 못한 이유엔 남자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칼이 한 몫을 했지만 남자는 자신이 분노를 잘 참는 것에 다행이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오늘의 노름판을 쓸어 담다시피 한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한 귀로 흘려듣는 것이 명백해 보였다.
“대체 여긴 왜 오는 거야? 호위 무사가 그렇게 빈곤한 직장인가?”
“하물며 그 스오 가문을 섬기고 있는데. 그쪽은 뭐가 부족해서 저런 부랑자를 들이는 거야?”
“자네, 그거 모르나? 저 남자는 칼질 뿐 아니라 비역질에도 능하다고 하더라고.”
남자들 사이에서 저급한 웃음이 스쳤다.
“그 스오 가의 도련님이 남색에 취미가 있다는 소문이 돌던데. 칼잡이를 부른 건지, 남창을 부른 건지 우리 같이 낮은 것들이 어찌 높으신 분의 뜻을 알겠나?”
“그래? 하지만 스오 가라면 얼마 전에 화려하게 혼례를 치르지 않았나.”
“그러니까 저 남자가 이런 노름판에 굴러들어온 거지. 직장을 잃게 생겼으니.”
“헤에, 그러고 보니 그쪽 도련님이 지나치게 곱상하다는 소린 들었는데. 과연 그런 취미가 있었나?”
“높으신 분이 계집처럼 안기는 꼴을 못 봐서 아쉽군. 가만 보니 비역질이 능한 건 그쪽 얘기였던게로군?”
들으라는 듯 소리를 높이는 치들에게 눈길을 준 남자는 곧 입을 벌리고 즐거운 것처럼 크게 웃었다.
“이게 바로 패배자들이 내는 아우성이란 건가? 이런 소리를 들으니 오늘의 승리자가 누군지 명확해졌네! 승부에서 진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권리, 뚫린 입으로 마음껏 떠들기! 인간의 자기방어기재란 거겠지? 재밌어! 흥미로워…!!”
신나서 남자들 사이에 얼굴을 들이밀며 떠들다가 훌쩍 일어나며 말했다.
“그래도 입은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나는 그런 너희들을 좋아하지만 스오 가의 높으신 분들의 생각은 또 다를 수도 있어. 가문의 명예를 해하는 무뢰배를 없애라는 명을 내리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거든. 알잖아, 우리 같이 낮은 것들은 시키는 대로 해야 해. 그러니까 그런 말을 했단 거, 소문나지 않게 조심하고?”
허리춤에 찬 칼을 톡톡 치며 남자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입을 다문 남자들을 내버려두고 남자는 덜컥거리는 장지문을 열었다. 새벽의 찬 공기도 이제는 옅다. 해를 토해내기 위해 점점 밝아지는 하늘 아래서 남자는 소맷자락에 손을 넣으며 걸음을 옮겼다. 늘어지는 하품이 뒤를 따랐다.
어느 누가 짖었던가, 새벽은 조용하기만 했다.
1.
츠키나가 레오는 스오 가의 호위무사였다. 그 명망 높은 가문에서도 적장자인 스오 츠카사 전속 호위다. 칼을 좀 쓸 줄 알지만 그렇다고 그가 장안에 화제가 될 정도로 특출난 실력을 가진 건 아니었다. 그는 그저 마을에서 흔히 있는 낭인이었고, 우연히 적의 습격을 받은 츠카사를 구해줬을 뿐이다. 그 우연은 아주 큰 행운으로 돌아왔다. 칼을 차고 대로변을 하염없이 어슬렁거리며 내심 귀족 가문에 눈에 띄길 바라는, 그런 낭인들의 염원 자체가 이루어졌으니. 의탁 할 곳 하나 없는 방랑자 신세에서 평생 발치도 못 가볼 대가문의 문턱을 제 집처럼, 아니 말 그대로 제 집이 되어 드나들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엄청난 운수대통이다. 그렇게 자신의 인생을 평가하다가도 레오는 자신의 주인의 생각에 빠지곤 했다.
스오 츠카사는 재밌는 사람이다. 레오가 재밌다고 칭하는 사람을, 세간에서는 이상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지만 재밌는 건 재밌는 거였다.
하인에게 존대를 하는 것부터 그랬다. 꼬박꼬박 씨까지 붙였다. 이 집에서 유일하게 레오를 ‘츠키나가 씨’라 부르면서 언제나 해사한 미소를 짓곤 했다. 주변의 등쌀에 못 이겨 ‘제발 말 좀, 아니 말씀을 낮추어 주십시오’ 라고 간언한 적도 몇 번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은인에게 어찌 그럴 수 있냐며 단칼에 거절했다. ‘츠키나가 씨도 그러셨잖아요? 은인에게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물론 그건 츠카사의 신분을 몰랐을 때 한 말이었다. 기껏 구해 놓고 나니 오히려 적 취급을 한 어디 귀한 도련님이 얄미워 그쪽은 집에서 물에 빠진 놈 건져 놓으면 봇짐 내놓으라 가르치냐고 비꼬았을 뿐이다. 나중에 가서야 어느 안전에 입을 함부로 놀리냐며 큰 벌을 받아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높으신 분이란 걸 알았다. 그럼에도 무슨 오기일지, 천성이 비뚤어져서인지 레오는 츠카사를 만났을 때부터 하던, 그리고 본인이 너그럽게 계속 그렇게 해주십사 허락한 하대를 츠카사에게 마구 했다. 불경죄로 정말로 목이 떨어져도 레오는 상관없었지만 츠카사는 그런 무례에 개의치 않아했다.
스오 츠카사는 재밌는 사람이지만 그의 기준에서도 그는 이상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가 정상이라면 자기 같은 것이 좋다며 얼굴을 붉히고 가만히 손을 잡아오지 않을 것이다. 사랑한다고 속삭이며 입술을 겹쳐오는 그런 기행은 벌이지 않을 것이다.
노름판에서 남자들이 떠들어대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어쨌든 그가 자신의 주인과 붙어먹었던 건 사실이니까.
그런 철없는 도련님의 일탈 행위도 결국은 끝을 고했다.
레오는 그날 밤을 기억한다. 거대한 스오 가문의 저택은 주인처럼 단정한 분위기를 자아낸 집이었지만, 그날만은 여름 축제를 앞둔 소란함을 감추지 못했다. 하인들의 조신한 걸음걸이에는 흥분이 어려 있었고 거의 들리지 않는 호흡 속엔 부산함이 언뜻언뜻 내비쳤다. 그걸 눈치 챈 가문의 어르신들은 하인들에게도 술과 떡을 내려주었다. 아랫것들도 마음껏 기뻐해야 할 날이었다. 스오 가문의 적장자가 무사히 성인을 맞음과 동시에 긴히 혼담이 오간 집안에서 허혼서를 보내왔다. 겹경사였다.
레오 역시 그날 차려진 푸짐하게 한 상을 대접받았다. 실컷 먹어치우고 거나해진 기분으로 소화도 시킬 겸 레오는 밤거리에 나섰다. 그날은 스오 가 식솔 뿐 아니라 모두가 즐거워 보였다. 평소라면 시종(時鐘)도 울리지 않는 어두운 밤거리지만 오늘은 야시장이 열렸다. 저마다 등을 줄줄이 맨 노점들이 들어선 곳에 추운 겨울을 녹이고 다가온 따뜻한 봄밤을 거리의 사람들이 한껏 봄밤을 즐기고 있었다. 모든 세상이 스오 가를 축복하기 위해 작정한 것 같았다. 그 속에서 레오는 옆 사람의 웃음이 번진 것처럼 미소를 짓다가도 미아가 된 아이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충만한 기쁨의 물결에서 레오는 멀어지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휩쓸리고 싶었다. 마구 뒤엉키는 생각 속에 정신을 차리면 ‘형씨 칼을 차고 있네’ 하면서 얼결에 끌려간 무술 대회에 참가하고 있었다. 힘 좀 쓴다는 젊은이들이 관심 있는 아낙들에게 힘을 선보이려 나가는 그런 작은 대회였다. 술이 조금 들어가긴 했지만 검을 쥐는 것조차 어설픈 젊은이들에게 질 실력은 아니었다. 가볍게 우승하고선 이 정도면 호위 무사를 할 실력은 되지 않겠냐고 스스로를 재단하던 레오는 픽 웃고 말았다. 호위 임무가 아닌 다른 이유로 스오 가에 붙어있었다는 걸 스스로 인정해 버린 꼴이었다.
하룻밤 정도는 진탕 놀 수 있는 상금을 짤랑거리며 레오는 천으로 얼기설기 세워진 간이 극장으로 들어섰다. 짚으로 이은 낡은 돗자리에 옹기종기 앉아있는 사람들이 가장 밝게 빛나는 무대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레오는 기둥이 세워져 있는 구석 자리에 주저앉았다. 얼굴 한가득 하얗게 분을 칠한 배우가 커다란 목소리로 곡조를 뽑아내고 있었다. 절절한 손짓 끝에는 하얀 가면을 쓴 다른 배우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노래가 정점을 향해 달려가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머리칼을 가진 배우는 결국 눈앞의 남자의 손을 마주 잡는다. 상대의 구혼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 이후 노도처럼 몰아치는 가무극을 레오는 묵묵히 바라보았다.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거짓 감정이 관객들에게 사정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소매로 슬쩍 눈물을 훔치는 코울음이 곳곳을 울렸다. 신분의 차가 크지만 서로를 사랑하게 된 남녀는 파멸이 기다리는 종막을 향해 가고 있었다. 좋은 음식을 잘 삼켰을 속이 점점 거북해졌다.
레오는 자리를 뜨는 대신 끝까지 그 무대를 지켜보았다. 겁도 없이 높으신 아가씨에게 손을 내민 남자는 어떻게 되지? 모두의 비난과 함께 저잣거리에 매달리나? 비극적인 사랑을 슬퍼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나? 속세를 떠나 머리를 밀고 한껏 경건해진 얼굴로 여자의 행복을 빌어주나? 각본가가 쓴 대로 움직이는 남자를 보며 레오는 비스듬히 턱을 기댔다. 북소리가 고조되어 갔다.
예상대로 두 남녀는 행복해질 수 없었다. 남자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고 여자는 슬피 울며 그대로 절로 들어가 언제까지고 남자를 향한 기도를 올린다. 무대를 비추던 호롱불이 어슴푸레 어두워지자 간이 극장을 뒤흔드는 박수 소리가 열렬하게 울렸다. 열연한 배우들의 이름을 연호하는 함성에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별로 재미있는 내용은 아니네요.”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레오는 움찔하다가 이내 한숨을 쉬었다.
“언제부터 있었어?”
“남자가 그녀를 사랑한 것이 죄냐며 울부짖을 때요.”
꽤 오래전부터 있었잖아. 레오는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평소에 입던 질 좋은 기모노 대신 어디서 많이 본 허름한 옷을 뒤집어 쓴 도련님이 쭈그려 앉아 있었다. 레오는 얼굴을 찡그렸다.
“내 옷이잖아?”
“주인이 없어서 양해를 구할 수가 없었어요. 당신의 옷을 입어도 괜찮을까요? 이미 입었지만요.”
“제 것은 도련님 것이니까, 굳이 미천한 놈의 양해를 구할 필요는?”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요. 밤거리로 빨려들어가는 당신을 빨리 따라가야 해서 경황이 없었어요. 허락도 없이 입은 건 죄송합니다.”
“아니, 사과를 바란 게 아니고. 변장에 잠입이라니, 언제부터 닌자 놀이가 취미가 됐어? 그렇게 한가한 몸이셨나, 스오 가의 도련님은?”
“츠키나가 씨를 찾는 것보다 급한 일이 어딨어요.”
농을 쳐도 진지하게 대답하는 모습이 얄미워 손으로 볼을 당기자 아야야 하는 소리가 나왔다. 손을 떼니 울상이었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오늘 야시장이 열리는 지도 몰랐네요. 구경 가요. 성인이 되고 난 후 첫 번째 밤이잖아요? 츠키나가 씨와 함께 있고 싶어요.”
보라색 눈동자가 아이처럼 반짝였다. 아직 젖살이 덜 빠졌는지 원체 동그란지 모를 얼굴엔 앳된 모습이 여전히 애틋하게 남아있다.
“이런 어린 애가 성인이라니, 말도 안 돼.”
“츠키나가 씨가 할 말입니까? 나이 차도 얼마 나지 않으면서.”
투덜대던 츠카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요, 밤은 짧아요.”
어스름한 극장 안에서 레오를 향해 곱게 휘어지는 눈이 무척이나 예뻤다. 내민 손도 상처 하나 없이 매끄럽고 곱다. 츠키나가 레오가 사랑해 마지않는 스오 츠카사의 모든 것.
“모처럼 자유시간이나 했더니, 도련님의 서민 생활 체험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과장되게 말하며 레오는 그 손을 잡았다.
“가극은 봤으니 이제 뭐 할까. 금붕어 잡기도 있던데, 그거부터?”
“좋아요. 이번에는 기필코 성공하고 말 겁니다.”
따뜻한 체온이 한 손에 온전히 담겨왔다. 밤에 잔뜩 몰려든 사람들 틈에서, 그 소란 속에서 레오와 츠카사는 주인과 하인 사이라기엔 너무나 친밀한 대화들을 주고받았다. 그 많은 말들 중에서 혼인에 관한 말은 한 마디도 없단 걸 깨달았지만 레오는 짐짓 모른 척 했다. 아니, 모른 척 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맞닥뜨린 현실에서 애써 눈을 돌리며 밝은 불빛으로 깊어지는 밤거리를 지금도 기억한다.
***
레오는 눈을 떴다. 닫힌 창문으로도 어스름한 빛이 그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새벽이 슬슬 물러나고 있는 듯 했다. 머리를 긁적이다가 레오는 훌쩍 몸을 일으켰다. 이 계절엔 맨살에 와 닿는 공기가 하나도 차갑지 않다. 여름이란 것은 좋다. 옷으로 꽁꽁 싸맬 필요도 없고, 추위로 손이 곱트는 일도 없으며, 칼도 공기를 가르며 시원스레 제 소리를 낸다. 조금만 지나면 이 계절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매미가 짝을 찾아 긴 울음소리를 낼 것이다.
주위에 어질러진 옷가지들을 하나씩 주워 모아 입고선 다시 이부자리를 돌아보았다. 자기가 덮기엔 송구할 정도로 질 좋은 비단 이불 속엔 다른 사람이 아직 잠들어 있었다. 색색 들리는 숨소리에 레오는 절로 마음이 느슨해지는 걸 느꼈다. 어깨가 드러나지 않게 이불을 잘 덮어주다가 문득 그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보라색 눈동자를 숨긴 눈꺼풀의 끝이 빨갛다. 조금 부어있는 것도 같다. 그걸 묵묵히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술을 내렸다. 잠을 깨우지 않는 접촉은 시시할 정도로 가벼웠지만 가슴을 묵직하게 누르는 느낌으로 돌아왔다.
레오는 미련 없이 몸을 일으켰다. 문을 조심스레 닫고 기지개를 쭉 폈다. 대단한 하루의 시작이 될 터였다.
“이나바 님이라고 하셨지요.”
기다란 두루마리를 바삐 훑으며 남자는 그 이름을 찾는다. 곧 원하는 글자를 찾았는지 그곳에 붓으로 표시를 하고는 허리를 숙여 인사한다. 옆에 나란히 서 있던 레오도 건성이나마 고개를 숙였다. 가문의 문장을 보인 시종을 거느린 이나바는 느긋한 걸음걸이로 문을 들어섰다. 그 뒷모습들이 문 안으로 사라지자 레오가 툭 말했다.
“대단해 보이는 나리들이 줄줄이구만.”
“보이는 게 아니고 대단한 게지. 나라의 실세를 잡고 있는 분들이시니.”
비단 두루마리를 정갈하게 만 남자가 타박을 주었다. 레오는 포르르 날아다니는 새를 보다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역으로 이 가문이 얼마나 큰지 알려주는 거네.”
“두말하면 입 아픈 소리.”
스오 가의 하인은 자부심 넘치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남자 뒤로 보이는 하늘이 눈부시다.
정말 좋은 날이었다. 마가 끼지 않고 길한 날이다 어쩌다하며 신이 닳도록 돌아다니며 수소문한 날들이 헛되지 않을 정도로. 새파란 하늘에 그림처럼 두어 점의 구름이 걸려있고, 상쾌한 공기가 피부를 스친다. 여름 특유의 끈덕지던 습기는 지금만은 기세를 접고 한 걸음 물러서 있었다. 나무 그늘 아래서 낮잠 한 잔 걸치면 딱 좋겠다고 생각하며 레오는 하품을 집어삼켰다. 평소라면 슬그머니 꽁무니를 뺄지도 몰랐지만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킬 정도로, 오늘은 정말 중요한 날이었다. 스오 가의 하나 뿐인 후계자가 혼인을 하는 날이니.
“자네도 그렇게 차려 입고 있으니 꽤 그럴싸해 보이잖아. 낭인 시절 옷은 이제 버릴 때가 되지 않았어?”
소매에 팔을 넣고 기우뚱 서 있던 레오는 흘끗 자신의 옷차림을 살폈다. 단정하게 다려진 남색 상의엔 은실로 흘러가듯 나무와 그 위에 핀 꽃, 그리고 가지에 걸린 달을 그렸다. 상의처럼 역시나 빳빳하게 길이 든 새하얀 하의 자락은 그 결을 유지하며 발등을 살포시 덮고 있었다. 이나바의 등에 있던, 비단에 새겨진 꽃과 새, 산수 등이 화려하게 어우러진 옷과 비교하면 검소하기 짝이 없지만, 레오가 입고 다니던 남루하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옷차림에 비하면 퍽이나 훌륭한 옷이긴 했다.
“무슨 소리야. 이런 옷차림으로 칼질을 제대로 할 수 있겠어? 뭐 묻을까 겁난다구~”
“그야 다시 빨면 되지 않느냐. 이상한데서 야단이구나.”
“이런 건 마음의 문제거든? 칼질이 아니라 칼춤을 춰야 할 것 같아.”
“유난스럽긴. 화려한 것은 싫다하여 도련님이 특별히 맞춰준 옷인 것을.”
그게 아니면 입지도 않았지. 완고한 츠카사의 목소리는 지금도 바로 떠오른다. ‘츠키나가 씨가 입지 않는다면 그냥 버릴 거예요.’ 레오는 한숨과 함께 자세를 고쳐 잡으며 소매에 팔을 넣었다. 평소와 달리 피부에 부드럽게 닿는 천의 감촉에 더 나오려는 한숨을 먹는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이런 날이면 나도 옷 정도는 깨끗하게 입는다고.”
“도련님이 마음 써주신 게야.”
하인이 달래듯 말했다. 그를 향한 눈빛에 위로와 동정의 시선이 섞여 있는 걸 눈치 챈 레오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서 눈에 띄는 기모노를 입은 행렬이 스오 가문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너도 이런 날이 올 줄은 알고 있지 않았느냐. 생각 없이 행동하는 척 굴어도 사실은 영리한 녀석이라는 거 우리도 다 안다.”
“웬일로 치켜세우네.”
“실제로 그러하니까 말이야. 아랫것들은 어르신들의 기분을 빨리빨리 파악해야 하니까 자연스레 사람을 꿰뚫어 보게 되지. 너같이 새파란 젊은이가 가진 깊이 정도는 알 수 있다고. 도련님은 너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으신 게야.”
“……”
“나도 네가 스오 가에 오래오래 남아있으면 좋겠으니 말이다. 같이 계속해서 주인 나리를 모시자꾸나.”
레오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남자도 그에게 대답을 바라는 건 아닌 듯 했다. 갑작스레 침묵이 찾아온 동안 저 멀리 가마 행렬은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시선이 저절로 안쪽으로 향한다. 그 거대한 저택 깊숙한 안쪽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갈한 검은 예복을 차려입은 스오 츠카사가 있겠고, 그를 마주할 흰 옷을 곱게 차려입은 신부가 일생의 한 번 뿐인 혼례를 치르기 위해 치장하고 있을 것이다.
밝은 햇살 아래서 아지랑이처럼 소란함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음이 시끄럽다. 목구멍 안쪽에서 긁어 올라오는 감정을 다시 묵직하게 누르면서 동시에 입도 다물어진다. 평소라면 안마당에 내려앉은 새들처럼 조잘거릴 입이 마음을 토하지 못하게 무겁게 닫혀있다. 다만 바라기를, 얼굴에 티가 나지 않기를. 이 좋은 날에 아무 일 없이 완벽하게 치러지길 바라는 하인들의 굳은 의지로 보이길, 혹은 큰 행사로 긴장된 얼굴로 보이길. 그렇게 바라며 레오는 스오 가의 커다란 대문을 등지고 묵묵히 서 있었다.
이리 오시어요.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칠흑으로 칠해진 짙은 밤에 굉장히 잘 어울린다고 레오는 생각하며 그 말에 따랐다. 흘러내린 옷 사이로 보이는 어깨와 그를 따라 이어지는 팔, 그리고 가볍게 올라간 손가락 끝까지 유려한 곡선을 그리고 있다. 화가가 붓 끝을 신중하게 놀려 그려낸 한폭의 그림 같았다. 레오의 눈빛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모를 여자가 살풋 눈웃음을 쳤다. 붉게 바른 눈꼬리가 어여쁘다.
“높으신 분이신가요?”
그림이 살아 움직여 말을 한다. 아니, 눈앞에 있는 것은 사람이다. 레오는 고개를 저었다. 방울이 울리는 것 같은 웃음소리가 짧게 울렸다.
“거짓말. 이렇게 좋은 옷을 입고 계시면서.”
“잘못 짚었어. 주인의 씀씀이가 좋은 거지, 내가 대단한 사람은 아니거든.”
개의치 않다는 듯 여자의 손이 천천히 등을 어루만졌다. 기다란 손가락이 부드러운 비단을 눌렀다.
“그래도 이 밤을 같이 보내줄 고귀한 분이시겠죠.”
등에서 어깨로 그리고 얼굴로 다가온 손가락은 따뜻한 온기가 있었다. 그림 따위가 아니었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기분 좋다. 스오, 여자란 이렇게 좋은 거였어. 딱딱하기만 한 마른 몸만 맛봤을 그에게 변명이라도 하듯 레오는 계속 말하고 있었다. 억지로 넓힐 필요 없이, 사내를 받아들이기 위해 젖어드는 몸과 기분 좋은 향기와 아름다운 목소리. 내가 너에게 빼앗은 것이었고 이제 돌려줄 때가 왔어. 레오가 떠올리는 스오 츠카사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않은 채 묵묵히 레오 발치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레오는 시선을 피하듯 여자의 몸 위로 올라탔다. 옷섶이 벌려지며 드러난 봉긋하게 솟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 마쉬었다. 장난스러운 웃음이 몸을 타고 올랐다.
그러다 문득 튀어나오지도 않은 그런 평평한 가슴을 떠올렸다. 잔뜩 붉어진 얼굴과 함께 달달하게 흐르던 말들도 같이 생각나면서 가슴이 뜨거워졌다. 스오, 스오, 스오.
그 넓은 스오 저택에서 가장 좋게 준비된 방에서 곱게 자란 아가씨와 침상을 같이 하고 있을 스오 츠카사를, 변두리 유곽의 외딴 방에 있는 츠키나가 레오는 소리 없이 불렀다. 수많은 걸음으로도 메우지 못할 사이에서 츠카사를 겹치며 여자를 보았다. 어둑한 방에 초가 일렁이며 어느 도련님의 상냥한 눈처럼 보이게 했다. 레오는 그 눈으로 고개를 내렸다.
***
언제 하루가 끝났는지, 어떻게 흘러갔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해가 뜨기 전부터 음식 준비와 혼례 준비로 정신없는 하인들 틈에서 얼기설기 찬을 들고, 츠카사가 준비해둔 옷을 입고 칼을 찰 때까지만 해도 나름 정신은 붙잡고 있었던 것 같았는데. 어느새 오늘은 어제로 넘어가고 내일이 오늘로 다가왔다.
시간이 더럽게 느리게 갈 줄 알았는데. 새벽의 푸른빛이 한가득 쏟아지는 돌길을 걸으며 레오는 얼얼한 뺨을 문질렀다. 왜 가느다란 버드나무 가지를 회초리로 쓰는지 알 수 있었다. 희고 가느다란 손바닥에 힘차게 얻어맞은 뺨은 안 봐도 붉은 손자국을 선명히 남기며 부어올랐을 것이다.
‘미안한 짓은 했지만.’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레오를 노려보던 여자는 방을 나갔고, 홀로 남은 레오는 뒤늦게 옷가지를 주워들었었다. 그 방에서 그대로 자도 됐었지만 남아있는 공기가 묘하게 불쾌했다. 더 녹진하고 땀범벅인 상태에서도 잘도 잠들었던 걸 생각하면 확실히 지금이 묘하게 곤두선 것도 같았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 길거리의 공기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갑자기 나타나 사람을 해치고 도망간다는 살인귀의 소문 때문에 다들 밤마실을 꺼려해서 레오 홀로 새벽의 서늘함을 맘껏 맛보고 있었다. 온갖 생각을 배회하는 머리 대신 발은 익숙하게 그의 주인을 스오 가로 이끌었다. 걸음을 서두른 것도 아닌데 어느새 거대한 대문 앞에 있었다.
여자 앞에서 제대로 구실을 못하여 돌아오다니 이 얼마나 한심한 꼴인가. 레오는 제 모습에 커다랗게 배를 잡고 웃고 싶어졌다. 어떤 희극보다도 우스운 장면일 것이다. 그 호위 무사는 이제 사람 구실도 제대로 못하는 게지! 짐짓 높은 소리에 관객이 웃음을 터뜨린다. 그래서 그 계집질도 못하는 무사의 말로는? 커다란 대문을 지나 널따란 벽을 지나고 하인이 드나드는 조그만 문으로 향하며 레오는 생각한다. 그 한심한 무사란 작자의 끝을 빨리 알려달라고!
끼익 거리는 낡은 문을 고개 숙여 지나가자 달빛이 환하게 쏟아지는 뒤뜰이 보였다. 레오는 멈춰 섰다. 모두가 잠들어 있어야 할 밤에, 눈을 감고 있어야 할 사람이 밤하늘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무문 소리에 천천히 돌아본 시선과 마주쳤다.
“…….”
“…….”
말문을 잃은 레오에게 다행히도 상대는 말이 없었다. 급게 틀어올린 머리칼에 장식될 것 같은 고운 색의 눈동자가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결국 먼저 말을 꺼낸 건 레오였다.
“안자고 뭐해?”
“츠키나가 씨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렇게 바로 대답한 츠카사는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처소에 갔는데, 안계시기에. 밤마실을 나가셨다면 밤이 개기 전에 돌아오지 않으실까 싶어서.”
레오는 바로 반발하는 자신을 느꼈다. 나를 기다렸다고 너는 말하지만 아까까지 너는 오늘부터 너의 반쪽이 된 사람을 안고 있었겠지, 나와 달리 제대로.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목구멍 바깥까지 튀어나오진 않았다. 생각만으로도 한심했다. 아니, 아니, 결국 귀결은 죄책감이었다. 이 집에서 새벽부터 시달린 건 다름 아닌 너일 텐데. 피곤했으며 잠에도 못 들고 밤을 헤매게 하고 말았구나. 아랫것의 천박한 행동거지에도 아무 탓도 하지 않고 돌아왔으니 안도했다는 표정이나 짓고서. 그러면서 섣불리 다가오지 못하고 초조하게 레오를 보고 있다.
레오는 지금이야말로 웃지 않으려고 배에 힘을 줬다. 명석하다고 불린 스오 가의 도련님, 그런 도련님이 왜 모르는 걸까요. 그대와 정분을 나눈 무사는 이 날이 올 것을 몇 번이고, 아니 몇 십번이고 몇 백번이고 계속 상상했답니다. 정인이 생겼다고 마음이 떠날까 두려워해야 하는 건 도련님이 아니라 분수를 모르는 무사인 거지요. 레오 안의 광대가 외치고 있었다. 레오는 입을 열려다 문득 목구멍 가득 치밀어 오르는 열기에 놀라 입을 닫았다. 참고 있던 건 웃음이 아니었다.
어두운 밤인 게 다행이었다. 몇 번의 심호흡 끝에 아무렇지도 않게 레오는 말할 수 있었다.
“…당연히 돌아오지.”
“어서 오세요.”
눈치를 보며 츠카사가 묻는다.
“밤 산책은 즐거우셨나요…?”
“아니. 역시 평소에 안하던 짓은 하는 게 아니라니까.”
농담조로, 그래도 솔직하게 레오는 말했다.
“도련님이야말로 밤 산책은 괜찮았어?”
“…달을 볼 수 있어서 좋네요. 언제나 그랬지만 오늘도 달이 정말 예뻐서.”
레오와 눈을 마주치며 말한 츠카사는 빙그레 웃었다.
“그 옷 잘 어울려요. 맞추길 정말 잘했네요.”
“누구님의 높으신 안목 덕에 빛 좋은 개살구라도 될 수 있는 거지.”
냉큼 뱉고는 레오는 덧붙여 말했다.
“이제 산책 시간은 끝이야. 착한 도련님은 잠들 시간이지. 물론 나쁜 하인도 잘 시간이고.”
깊어지는 새벽 속에서 말들은 허공을 떠돌았다. 가만히 레오를 바라보던 츠카사가 한 발 다가왔다. 천천히 거리를 좁혀오고는 어깨를 조심스럽게 쓸었다.
“정말 잘 어울려요.”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다정하다. 그렇게 옷이 마음에 들었나. 레오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만 입고 내팽개치려고 했는데 이렇게 열렬한 반응일 줄이야!”
“그럴 것 같아서 말하는 거예요. 일주일이라도 좋으니 더 입어 주세요.”
“아~ 그건 좀 고려를. 칼 한 번 휘둘렀다가 소매가 나비처럼 나풀거릴 거야.”
“―그것도 괜찮겠네요. 분명 멋진 광경일 거예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대답에 오히려 농을 친 레오가 흥이 식어버렸다. 손을 뻗어 츠카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레오는 말했다.
“밤이 깊었어. 자러 가자.”
그건 습관이었다. 대부분 침상을 함께 한 나날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말이었기에 말을 뱉은 당사자도 뒤늦게 자신의 실언을 깨달았다. 츠카사는 눈치 채지 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자러 가요. 소매를 잡고 이끄는 손을 레오가 떼어냈다.
“아참참, 이게 아니지. 이러다 새신부와 대면하겠어.”
굳어지는 상대의 얼굴을 보며 레오는 정적 속에서 가상의 관객들이 요란하게 웃는 걸 들었다. 희극이다, 희극이야.
“졸음이 너무 와서 망언을 해버렸습니다. 먼저 물러나는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고개를 꾸벅 숙인 채 대답을 듣지 않고 레오는 등을 돌렸다. 시선이 꽂히는 게 느껴졌다. 여전히 폭소를 터뜨리는 관객들에게 레오가 묻고 싶었다. 지금 도련님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지? 죽일 듯이 노려보나? 미련이 뚝뚝 넘치는 얼굴인가? 알려줘! 아니, 알려주지 마! 무슨 표정을 지어도 호위무사 역은 돌아보지 못하니까. 이제 무대에서 퇴장해야 하는 배우니까.
프로듀서는 오늘도 열심히 움직였다. 유메노사키에는 수많은 별들이 각자의 빛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고 그들 중 단 한 명 빛을 밝히려 뛰어다니는 프로듀서가 있었다. 개성 넘치는 이들은 서로 부딪히거나 화합하며 그들의 세계를 만들어 내었고, 유일한 프로듀서는 그들을 공전하듯이 떠돌며 각각에게 걸맞은 도움을 주어야 했다. 아이돌이라는 이름의 우주. 그것은 무척이나 아름다웠지만 그 뒤로 암약하는 사람들은 보람을 느끼지만 꽤나 피곤한 업무의 연속이라는 것도 사실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늦은 밤에 안즈는 귀가를 하고 있었다. 고개를 들면 어느새 잔뜩 먹칠을 한 밤하늘이 까마득하게 내려와 있었다.
“안즈?”
나란히 걷던 남자가 문득 안즈를 눈치 채고 말을 건다. 오늘 집 데려주기 당번은 마오. 괜찮다고 만류해도 오히려 펄쩍 뛰는 트릭스타들이기에 안즈는 이번에도 얌전히 그 호의를 받아들였다.
“하늘이 엄청 까맣길래.”
“그러게. 이런 시간까지 남아있는 게 당연해서 몰랐는데, 우리 해 지기 전에 집 들어간 지 좀 됐지.”
같이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마오의 눈가에도 피곤한 그림자가 잔뜩 쌓여있다. 연말의 대규모 라이브가 다가오는 지금, 학생회 소속인 마오도 안즈 못지않게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내년이면 좀 나아질까? 그 3학년 선배들도 졸업이니까….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아직 20대도 되지 않은 그이건만 중년가장의 모습이 겹쳐온다. 그리고 아마 안즈도 마찬가지. 분명 스바루라면 검은 융단에 보석처럼 반짝이는 별의 모습에 기뻐하며 따오고 싶다고 사다리를 찾는 수선을 피울지도 모른다. 그런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까. 하지만 자신이 따라가기엔 좀 힘든 긍정적인 사고방식이라는 걸 금방 깨달으며 안즈는 한숨을 쉬었다.
“역시 가끔은 푹 쉬고 싶기도 해.”
“동감. 너도 나도 일을 찾아다니는 타입이지만 역시 휴식도 소중하니까. 침대에서 하루 종일 늘어지거나, 온천의 뜨거운 물에 푹 잠기거나.”
“온천도 괜찮네…. 이 근처 말고 멀리 어디에 나가기만 해도 좋을 것 같아. 바람도 쐬고.”
“안즈, 여행을 가고 싶은 거야?”
깨끗한 겨울 하늘은 좁은 골목길과 달리 거대한 하늘의 광장을 다 덮어버리고 있다. 왠지 그 검은 바다에 빠질 것 같은 아찔한 기분마저도 들어 안즈는 손을 뻗었다. 유난히 반짝이는 별을 엄지와 검지로 만든 동그란 원에 넣으며 안즈는 대답했다.
“응, 그럴 지도 모르겠어.”
“이번 라이브가 끝나면 다 같이 뒤풀이 겸 여행이라도? 으음, 왠지 이렇게 말하니 플래그 같아 불안해지는데…. 전쟁 영화에서 가족사진 보는 느낌이지, 이거….”
자못 심각해지는 마오지만 그들 위로 펼쳐진 검은 하늘은 여전히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색을 더 깊게 품어간다.
여행, 나쁘지 않네. 지금은 겨울이니까 따뜻한 곳이 좋을 지도. 너무 멀리는 무리지만 여기보다 조금 더 따뜻한 도시에서 이름난 맛집에 찾아가는 거야…. 상상만으로도 금방 기분이 좋아진다. 유메노사키에서 쉴 새 없이 달려오다가 어느새 한 해가 끝나간다. 그런 바쁜 일상 속에서 잠깐의 포상은 괜찮겠지. 안즈는 저도 모르게 진지하게 여행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방학 때 바쁘지 않으면 좋을 텐데. 이 학교에선 그런 걸 기대하기 힘들지만 상상 속의 방학은 꽤나 그럴싸한 정경을 만들어 낸다. 역시 좀 피곤한가보다. 상상만으로 이리 달콤한 걸 보니.
점점 가까워지는 집을 보던 안즈는 옆을 바라보았다. 마찬가지로 한창 휴식 시뮬레이션을 돌렸을 마오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머쓱하게 웃어 왔다.
오늘 수고 많았고 내일도 파이팅. 언제부턴가 정착해버린 작별 인사는 유메노사키 일꾼들의 결속을 오늘도 든든하게 다져준다. 안즈가 문을 여는 것까지 보고 나서야 마오가 천천히 멀어진다. 밤이 천천히 무겁게 가라앉고 있다. 집 안의 따뜻한 공기를 한껏 들이켠 안즈는 집 식구들에게 왔다는 인사를 한다. 여행을 가면 좋겠지만 그게 당장이 될 수 없다. 피곤한 오늘을 어서 마무리하고 내일을 준비해야 했다.
*
…어나. …왔어. …군.
귓가에 왕왕 소리가 들린다. 안즈는 여전히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릴지 말지 고민했다. 좀 더 자고 싶은 기분. 하지만 옆 사람은 끈질기다. 성가시게 들러붙는 목소리에 뭔가 경종이 울린다. 안즈는 눈을 떴다. 침대에 누워있어야 할 몸은 꼿꼿한 의자에 불편하게 파묻혀 있었다.
“일어났어? 다 왔어.”
옆에 있는 남자가 말한다. 안즈는 옆을 보았고 그리고 경악했다.
“세, 세나 선배?!”
“뭐?”
이상하게 목소리가 튀었다. 미간을 좁히는 너무나 익숙한 얼굴을 내버려두고 안즈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젖힐 수 있는 흰 좌석, 훨씬 낮은 찬장, 귀를 막고 있는 것 같은 이물감, 그리고 창문 너머에 펼쳐진 파란 하늘과 새하얀 구름.
“비행기…?! 제가 왜 비행기를 타고 있죠? 세나 선배, 또 회장님이 뭔가를 기획하신 건가요??”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잠이라도 덜 깼어? 그리고 징그럽게 웬 존댓말.”
파란 눈이 아주 이상한 것을 쳐다보는 기색으로 그렇게 말했다.
“슬슬 정신 차리지? 곧 도착한다니까.”
“…그러니까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대답한 목소리는 자신의 것이 아니지만 묘하게 낯이 익었다. 안즈는 저도 모르게 목을 만져 보았다. 어디가 가라앉거나 하지 않았는데 목 부근에 이상한 게 잡히는 느낌이 들어 화들짝 손을 뗐다.
“저기, 정말 괜찮아? 상태 진짜 이상해 보이네, 레오 군.”
이제는 그 눈에 짜증 대신 걱정까지 스며들기 시작한다. 저 눈에 비추는 건 정말 안즈 자신이 아닌 걸까? 선배들의 놀림이 아니라?
“세나 선배, 거울 있어요?”
“그러니까 선배는 왜 자꾸 붙이는 거야? 미쳤어?”
“아니, 중요해요. 거울 있으시죠?”
“존댓말은 왜 하냐고!”
그렇게 투덜대면서도 이즈미는 거칠게 자신의 소지품을 뒤졌다. 당연하게 튀어나오는 손거울을 받아들고 안즈는 심호흡과 함께 자신의 앞으로 가져다댔다. 벌어진 입에서 삐죽 보이는 송곳니, 날카롭게 올라간 눈, 녹색과 주황. 자신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조합이 거울에 한 가득이다. 마치 거울 너머에 레오가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평소처럼 함박웃음을 지으며 시끄럽게 주변을 휘젓는 대신 아주 당혹스러운 얼굴로 안즈를 바라보고 있다. 입을 다물고, 눈을 깜박이고, 고개도 흔들리고. 완벽한 팬터마임이라도 하는 것처럼 움직이는 그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몇 번이고 표정을 바꾸고 있자 이즈미의 시선이 내리 꽂힌다. 볼을 잡아 늘리자 거울 속의 그까지 똑같이 잡아 늘리고, “아파.” 하고 말하니까 그의 목소리로 동시에 같은 말을 한다. 지켜보는 이즈미의 표정 역시 점점 심상치 않아진다.
“자다가 머리라도 부딪힌 거? 잠시만, 여기―”
승무원을 부르려는 이즈미의 팔을 안즈는 급히 끌어안았다.
“아, 아니, 괜찮아요. 저는 멀쩡해요. 이제 이해했어요.”
이 얼토당토않은 상황은 단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다. 안즈는 이즈미에게 자신 있게 말했다.
“이건 꿈이잖아요?”
“어, 네가 이상하단 건 아주 잘 알고 있지만 재미없으니까 그만해줄래?”
“꿈속의 세나 선배는 츠키나가 선배에게도 가차 없군요.”
“이젠 자기를 삼인칭으로 부르는 거? 그 컨셉 완전 이상해.”
"아 그렇지. 저는 츠키나가 선배죠? 이 꿈과 완벽하게 녹아들어 볼게요. 자, 보세요…. 세나!"
최대한 기억 속의 레오를 떠올리면서 그가 하듯 안즈는 이름을 커다랗게 외쳤다. 그러면서도 아주 불안하게 이즈미의 눈치를 살폈다. 금방이라도 어딜 선배 앞에서 그런 건방진 소리를 하며 무서운 얼굴로 윽박지르지는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이즈미의 얼굴은 아주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안즈는 도망치고 싶었다. 무시무시한 얼굴 밑으로 손이 뻗어져 온다 싶더니 그대로 볼을 주욱 잡아당겼다.
“내가, 비행기에선, 조용히, 하랬지, 레 오 군.”
“헤하헌해- 아하, 아하여-.”
“뭘 또 잘했다고 떠들어?! 수학여행 나온 유치원생도 아니니까 조용히 좀 하라고!”
그렇게 말하는 이즈미의 목소리도 제법 컸지만 그걸 지적하지 않을 눈치 정도는 있었다. 그보다 잡힌 볼이 너무 아팠다. 잔뜩 잡아당기다가 손을 놓고 이즈미가 투덜거렸다.
“좀 얌전해졌나 싶더니 여전하잖아? 잠꼬대는 그만하고 다 왔어.”
“어, 어딜…?”
안즈는 자동으로 달라붙는 어미를 가까스로 잘랐다. 이즈미는 그런 안즈의 바보 같은 물음도 익숙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어디긴, 파리지.”
“파리…!”
안즈의 눈이 반짝였다. 아마 안즈의 상상으로 잔뜩 뒤범벅된 도시겠지만 가슴이 뛰었다. 엄청 현실 같은 꿈, 거기에 이걸 꿈이라고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일명 자각몽. 이런 재미있는 상황은 즐겨두지 않으면 손해다.
“세나 선, 아니 세나! 이제 얌전히 있을게.”
항복하는 자세로 말하니 이즈미의 눈매가 좁혀졌다.
“너 또 뭐 꾸미지?”
츠키나가 선배의 신뢰도는 제로군요. 안즈는 어느 선배에게 유감을 표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하나도 없어. 굳이 있다면 그냥 여행을 가고 싶다고 해야 하나.”
“여행이라면 이미 하고 있잖아. 멀리 떠나고 싶다며.”
그건 분명 안즈의 바람이기도 했다.
“그렇지?”
레오가 으레 하듯 안즈는 활짝 웃었다. 무엇이든 그녀의 상상대로 되는 세계, 꿈을 지배하는 자의 웃음이었다.
“―라는 꿈을 꾸었어요.”
“헤에―.”
안즈는 그렇게 말했고 지금 그녀 앞의 유일한 대화 상대이자 안즈가 꿈에서 뒤집어 쓴 역할인 츠키나가 레오는 무언가를 쓰면서도 꽤나 흥미롭게 들어주었다.
“그거 재밌는 걸?! 꿈은 멈춰있는 곳이지만 그런 상상도 펼칠 수 있는 곳이 되는 구나! 한 세계를 마음대로 조종하고 그 기억들을 온전히 가져올 수 있다면 가끔은 잠을 자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잠은 제대로 주무셔야죠, 츠키나가 선배.”
안즈의 짐짓 엄한 소리도 남자는 웃음으로 흘려버렸다.
화창한 날, 아무도 없는 음악실. 있는 건 레오와 안즈 둘 뿐. 매번 탈주하기로 소문난 레오지만 안즈에게 작곡을 가르치는 시간을 빼먹은 적은 거의 없었다. 작곡에서만큼은 진지한 그의 태도 때문일까.
약속 장소는 매번 달라지지만 그는 어김없이 자리에 있다. 추운 겨울이 들이닥친 만큼 히터를 빵빵하게 틀어 안온한 둥지를 만들고 그곳으로 안즈를 초대한다. 그곳에선 레오의 리듬만큼이나 독특한 수업이 이어졌다.
“그래서 세나와의 여행은 괜찮았어?”
“네. 꿈인 걸 알지만 즐거웠어요. 처음에 간 곳은 콩코르드 광장이었어요. 거기서 루브르 박물관으로 이동했고, 노트르담 성당도 봤어요! 개선문도 보고 싶었지만 세나 선배가 일정이 안 된다고 하셔서 다음 스케줄 빌 때 보러 가자고 하셨어요. 꿈이어도 어느 정도 제약은 있나 봐요.”
“꿈속의 세나가 딱딱한 걸 수도 있지. 아니, 원래 딱딱했던가! 그럴 때는 세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하는 거야. ‘나는 날 수 있어 세나!’ 이러고 냅다 하늘로 날아버리는 거야~ 광장의 수많은 비둘기처럼! 그럼 어디로든 가겠지. 우주로도 말이야!”
“초능력이 있을 수도 있군요? 꿈이니까…. 묘하게 그럴 분위기가 아닌 꿈이어서 시도는 못했는데…. 츠키나가 선배는 그런 꿈을 자주 꾸시나요?”
“전―혀. 나는 꿈을 안 꾸거든. 새까맣고 거무죽죽한 진흙 속에 파묻힌 걸 꿈이라고 하면 꾸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거기에 잠겨있을 뿐이고 아무 것도 못하거든. 그런 고로 잠은 인스피레이션을 달아나게 할 뿐! 깨어있을 때 두뇌를 팽팽 돌려야 영감이 찾아오는 거라고.”
레오의 손에 잡힌 볼펜이 원을 크게 그린다. 그 볼펜은 아까까지 흰 종이에 들쭉날쭉한 음표를 그리고 있었다. 쏟아지는 대화에서도 남자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아마 연말에 있을 라이브로 나이츠가 말하는 ‘무기’를 그는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을 터였다.
“츠키나가 선배, 많이 바쁘신 것 같은데 당분간 작곡 수업은 쉴까요? 라이브도 몇 주 남지 않았고….”
살짝 말을 흘리며 레오의 대답을 기다린다. 안즈가 아는 레오는 잔뜩 부풀려서 말을 떠들긴 하지만 자신의 뜻을 똑바로 관철하는 스타일을 가졌다. 아마 레오가 바쁘다고 여기면 그는 안즈의 제안을 바로 받아들일 것이다.
문득 펜이 멈추고 날카롭게 올라간 녹색 눈이 안즈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나보다 안즈 쪽이 큰일 아니야?”
그러고선 레오가 불쑥 말했다.
“나는 내 나이츠만 돌보면 되지만 안즈는 라이브 전체를 총괄하는 것도 있을 테고. 그보다 너 정신없어 보였으니까 내가 먼저 쉬는 게 어떠냐고 말할 셈이었는데.”
“제 입장에선 바쁜 쪽이 오히려 좋달까…. 다들 바쁜데 무언가를 하고 있지 않으면 오히려 더 불안해져요. 오늘 부회장님이 일을 갑자기 가져가셔서 지금은 오히려 한가한 편이기도 하고요. 제가 맡아도 상관없는 일까지 모두 빼버리셔서….”
“내가 케이토여도 그랬을 거야. 안즈, 어제 확실히 이상했지.”
“어제요…?”
“좋아, 망상해 볼까?! 유메노사키 유일한 프로듀서에게 과중된 업무! 주위엔 시커먼 사내들만 득시글! 프로듀서의 마음에는 청춘이라는 씨앗도 발화하지 못해 어둠을 집어삼키고 결국 기존 마왕 레이를 밀어내고 새로운 어둠의 마왕으로 군림한다!!”
“무슨 말씀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영감이 내려오기 시작했다며 다른 종이를 급히 끄집어내려 신명나게 적어대는 레오를 보며 안즈는 한숨을 쉰다.
조금의 이상한 하루긴 했다. 유일한 여학생, 유일한 프로듀서. 안즈에게 부여된 타이틀은 학교에선 이질적이어서인지, 아이돌이라는 시선을 잡아끄는 사람들 속에서 예상치 못하게 주목 받기도 했다. 프로듀서라는 위치상 전교생들과도 교류가 많은 그녀지만 오늘은 뭔가 이상했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호의적인 인사가 따라붙는 대신, 숨죽인 시선이 따라붙었다. 빤히 바라보거나 날씨가 참 좋네 같은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인사가 오기도 했다. 교실에선 그 기색이 더 심해져서,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모두의 시선이 쏠리고(심지어 문을 크게 연 것도 아니었다) 애써 침착한 척 하지만 어느 때보다 불안해 보이는 호쿠토의 아침인사를 받아야 했다. 인사말도 이상했다. 평소처럼 ‘좋은 아침이야’가 아닌 ‘피곤한 건 좀 풀렸나’ 였었다. 전날 꿈은 아주 재미있었기에 몸도 가뿐했고 안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안도하는 호쿠토의 뒤로 나타난 스바루는 한결 같아서 별 생각 없이 넘겼었는데.
“저, 츠키나가 선배. 혹시 무슨 일이 있었나요…?”
하교할 때만 해도 언제나처럼 바쁘고 시끌벅적한 너무나 평소의 유메노사키였었는데. 그 시끌벅적한 유메노사키를 만드는 한 축인 레오는 여전히 의뭉스러운 눈빛으로 안즈를 보고 있다.
“꼭 다른 사람 같았지.”
“네?”
“아니, 어제 너. 진짜 재밌었거든.”
“제가 어제 츠키나가 선배를 만났었나요…?”
“안즈가 세나 하우스에 들이닥쳤잖아. 이렇게 창문으로 넘어와서!”
“예…?”
“와하하! 엄청 재밌었다고? 다들 눈이 이렇게 돼서 쳐다보는데 너는 멋지게 착지하고선 악당을 앞에 둔 히어로처럼 갑자기 일장연설을 좔좔 늘어놨다고~! 뭐랬었지? 그런 안이한 마음으로 너만 편해지는 길을 선택하지 말라고? 멋진 말이야~ 역시 어제 안즈는 히어로였던 거지?!”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레오를 안즈는 충격과 혼란 속에서 바라보았다. 이 선배는 외계인에게 납치됐다는 그런 말들을 하고 있는 걸까? 그렇다고 넘기기엔 오늘 이상했던 학생들의 반응이 걸렸다. 하지만 안즈는 전혀 기억에 없는 일들이다. 나이츠를 만날 예정도 없는데 창문을 뛰어넘어 스튜디오에 들어갔다니?
“선배 놀리시는 거예요? 그런 기억은 전혀 없는데….”
“히어로 모드가 되면 기존 인격은 사라지는 거야?!”
“그런 모드를 가지고 있을 리가 없잖아요….”
안즈는 울고 싶었다. 겨울 만우절 같은 걸 지정해서 모두가 합심해서 놀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런 안즈를 빙글거리며 바라보던 레오가 말했다.
“그거 알고 있어? 안즈 아까 3학년 교실에 찾아와서 수업 장소가 어디인지 물었잖아? 하지만 약속한 작곡 레슨 날은 어제였어.”
이상한 소리를 곧잘 떠들던 남자는 눈엔 장난스러운 기색이 가득하지만 거짓말을 하는 걸론 보이지 않았다. 괴짜 학생들이 가득한 이 학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모든 말들을 귀담아 듣지 않는 법을 익혔지만 그럴 수 없었던 건 이상한 하루도 한몫했다. 안즈는 주춤거리며 핸드폰을 꺼냈다. 네모난 화면에 표시되는 날짜는 그녀가 있어야 할 날짜에서 하루가 더해진 날이었다.
이제 막 시작된 주말의 열기를 뒤로하자 아라시의 목소리가 반갑게 울렸다. 밖은 차가운 겨울 바람이 사정없이 앙상한 가로수를 흔들어대는데 이곳은 따뜻하다 못해 덥기까지 한 열기가 가득하다. 회식 자리로 애용될 것 같은 술집의 공기를 어색하게 해치며 도착한 방에는 선배들의 얼굴이 조로록 모여 있었다. 예나 전이나 소녀 같이 꺅꺅 거리며 자신의 옆 자리를 내주는 아라시, “카사 군, 늦었잖아.” 라며 뚱한 표정으로 그에게 볼멘 소리하는 이즈미, 벽에 머리를 기대어 졸고 있는 리츠까지. 상에는 화려한 안주들이 잔뜩 놓여있지만 모델과 아이돌이라는 특수한 위치 때문에 거의 그대로 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츠카사는 선배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미리 알려줬으니 괜찮아~ 요즘 바쁘지?”
“어딜 가나 불황이니까요. 저, 근데 Leader는...?”
오랜만에 나이츠가 모이는 날이었다. 유메노사키 졸업 후, 예전처럼 하나의 유닛 아래 있던 것도 잠시, 각자의 길을 걷게 된 지 몇 년이 지난 그들은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자리를 가져 서로 변하는 모습들 속에서 마른 꽃다발처럼 버석이는 추억의 향기를 조금씩이나마 맡았다. 그 가운데에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 같았던 그들의 리더 역시―굉장히 놀랍게도―매번 참석했었다.
“아- 임금님은 오긴 왔는데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갔어.”
“...그렇군요.”
오후부터 몰아닥치는 일 더미에 뭐하나 챙겨 먹을 틈도 없어 텅 빈 속이지만 이상하게 식욕은 전혀 나지 않았다. 습관적으로 집어든 젓가락은 갈 곳을 못 찾다가 샐러드에 뒤섞인 양상추 조각 하나를 겨우 집어 들었다.
“스-쨩, 서프라이즈 있는 거 알아?”
“어머, 미리 말하면 서프라이즈가 아니지!”
츠카사는 고개를 들었다. 졸고 있던 리츠가 어느새 눈을 반쯤 뜨고 가늘게 웃고 있었다. 그를 짧게 타박한 아라시가 곧바로 츠카사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이건...?”
“임금님의 전언이야.”
아무리 봐도 카드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을 츠카사는 어리둥절하며 받았다. 입구를 봉하고 있는 금색 스티커를 떼고 역시나 딱딱한 카드로 보이는 모습에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남녀가 마주 바라보는 카드의 앞면. 그리고 멋들어진 필기체로 쓰인 금박이 입힌 글씨. 영어에 익숙한 츠카사는 단박에 그 글자들을 읽을 수 있었다.
-Wedding Invitation
아무것도 먹지 못한 속이 뒤집힐 것처럼 울렁였다. 당장이라도 카드를 집어던지고 기가 차다는 듯이 웃어주고 싶었지만 선배들이 보고 있는 자리에서 그럴 순 없었다. 한가한 아라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도 받고 깜짝 놀랐지 뭐야? 그 임금님이 청첩장이라니.”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그 말대로라면 쿠마 군이 먼저 했어야지.”
“...확실히 surprise긴 하네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하며 츠카사는 내용물을 펼쳤다. 곧바로 들어오는 ‘츠키나가 레오’라는 익숙한 글자, 그 바로 밑에 낯설지만 여성일게 분명한 어느 이름이 반듯하게 적혀 있다. 이즈미도 이 상황이 마땅찮은지 목소리에 날이 서있다.
“이것만 던져주고 자기는 휙 가버리다니, 진짜 제정신?”
“그것도 그래. 이런 날엔 맛있는 밥을 먹으면서 다 같이 이야기하다가 주는 거잖아? 명색이 청첩장 받는 날인데, 정말이지-.”
선배들의 목소리와 술집의 소음이 한데 뭉쳐져 귓가에서 윙윙대는 와중에 츠카사는 글자가 그리 많지 않은 청첩장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리츠가 말했다.
“스-쨩이었나? 임금님 좋아했던 거.”
“어머, 그러고 보니.”
츠카사에게 시선이 쏠렸다. 츠카사는 청첩장을 덮고 어색하게 웃었다.
“그랬었죠....”
“1학년 츠카사쨩 정말 귀여웠는데! 임금님만 만나면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사랑하는 남자아이도 세계의 보물이라고~”
“그랬던 카사군도 지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어른이 돼버렸지만. 임금님도 그렇고 말이지. 정신이 있는 거야? 이런 중대사를 통보하고 가버리는 게 어딨어?”
“이즈미쨩, 아이들은 언젠가 어른이 되는 거야. 알고 있으면서~”
테이블 너머로 쿡쿡 찔러대는 아라시를 이즈미가 귀찮다는 듯이 인상을 찡그리며 쳐내고 그 옆에서 리츠는 스-쨩, 밥 먹어 라며 접시를 밀어준다. 그에 대답을 했는지 안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흐릿하고 꿀렁인다.
짝사랑이었지만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짝사랑이다. 그 사랑의 화살표가 향하는 당사자는 어떠할지는 모르겠지만. 나이츠의 리더인 그는 스스로에게 쏟아져 내리는 음악상을 끌어내기에도 바쁜 사람이었다. 그런 제멋대로인 모습에 휘둘리면서 어느새 츠카사는 연정을 품고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다. 츠카사가 마음을 자각하기 전까지, 그리고 그의 유일한 왕이 학원을 떠나기까지. 일 년도 채 안 되는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 감정은 짝사랑의 쓰라림보다 솜사탕 같은 달콤함이 더 진했다. 유메노사키라는 그들의 공통점이 사라지는 날에 벚꽃을 맞는 뒷모습을 떠나보내면서 츠카사는 그 달디 단 감정을 접는 것을 택했다. 이 마음은 사랑보다 동경에 더 가깝다고, 자신과 너무 정반대의 모습에 흥미가 당긴 거라고, 사람을 좋아하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고. 츠카사가 자신을 납득시킬 수 있는 말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유메노사키에 새로운 봄이 찾아오고 나서도 시간은 거침없이 흘러갔다. 짧은 시간에 만들어진 마음은 그의 생각대로 빨리 사그라지는 듯했고 츠카사는 자신의 판단에 만족했다. 그것이 오산이라는 걸 깨달은 건 츠카사가 졸업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휴대폰이 부부 거리며 연락을 알렸다. 발신인은 나루카미 아라시. 졸업식에 못 갈 것 같으니 그 전에 나이츠 멤버끼리 만나자는 말이었다. 개인 SNS로 꾸준하게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나이츠 원년멤버가 모두 모이는 자리는 처음이었다. 나이츠의 명실상부한 리더가 되었을 때에도 언제나 각별한 존재였던 선배들이기에 츠카사는 당연히 만남에 응했다.
기억하는 모습과 거의 그대로인 외모, 변하지 않는 말투. 성인이 된 그들은 유메노사키에 있을 때처럼 츠카사를 막내 취급하며 그간의 공백을 말로 채워나갔다. 너무나 즐거운 시간이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기쁘지 않을 리 없었다. 집에 돌아왔을 때도 가슴 가득 들어찬 행복감은 여전해 츠카사는 기분 좋게 잠들 수 있었다. 꿈은 무의식의 연장이라고 했던가. 츠카사는 사방이 기쁨으로 별처럼 반짝이는 꿈을 꾸었다. 처음은 분명 그랬다.
눈앞에서 술잔이 오간다.
츠카사는 풀린 눈으로 그 모양들을 바라보았다. 찰랑이는 잔은 그대로 벌어진 입속으로 투명한 액체를 쏟아 부었다. 주위가 웅웅댔다. 이즈미쨩 너무 빨라. 오늘은 마실 거라고 했잖아. 그래도 페이스는 어느 정도 조절해야지. 츠카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세상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나이츠의 모임은 이렇게 술을 마시지 않았다. 만나도 조용한, 음식이 깔끔한, 인테리어도 괜찮은―분명 모델인 선배들의 취향에 맞춘―가게이곤 했는데 이런 퇴근 시간대에 붐빌 시끄러운 술집으로 부를 때부터 이상하긴 했다. 분명 약속 장소에서 청첩장을 도전장인양 던지고 사라진 그들의 리더에 대한 화풀이가 될 수 있는 장소로 급하게 변경됐을 지도 모른다. 그러한 가설을 뒷받침 하듯 가장 음식에 깐깐한 이즈미가 작정한 듯이 잔을 채우고 있었다. 와중에 안주에 거의 손을 대지 않는 게 그다운 점이지만 빈속에 들이붓는 술이 좋을 리 없었다. 남의 사정에 신경 쓸 정도로 츠카사가 여유 있는 건 아니었다. 눈을 깜박깜박해도 제대로 초점이 안 잡히는데 손은 이즈미가 채운 술잔을 쥐고 있다. 카사 군도 적당히 마셔! 사이에서 고생이네요, 나루카미 선배. 츠카사는 남 일처럼 생각했다. 벽에 기대어 자고 있는 리츠가 보였다. 술집이 파도에 잠긴 것처럼 일렁였다. 그 때 꿈처럼.
나이츠 선배들과 평온한 일상. 꿈인 만큼 말도 안 되는 장소에서 츠카사는 선배들과 함께 웃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새, 일렁이는 세상 한가운데 리더가 있었다. 아니 츠카사 밑에 레오가 있었다. 뜨겁고 축축한 꿈이었다. 흰 시트에 흐트러진 머리칼이 얼마나 관능적이었는지, 눈시울이 젖은 채로 가늘게 웃는 모습이 얼마나 예뻤는지. 라이브를 막 마쳤을 때도 이랬을까 싶을 정도로 츠카사는 굉장히 흥분해버렸다. 꿈에서 깨어난 후에도 폭풍이 쓸고나간 자리에 멍하니 서있는 것처럼 한동안 아무것도 못했을 정도였다. 정신을 차린 후엔 바로 화장실에 가야 했지만.
한동안 바빴으니까, 제대로 못 빼기도 했고. 제법 이성적인 머리로 그렇게 상황을 판단했다. 리더를 오랜만에 봐서 그렇게 꿈이 이어진 거야. 생각해 보면 가슴이 있었던 것도 같아. 우연히 리더의 얼굴을 하고 나온 가상의 인물. 조금 붉어진 뺨을 문지르며 그렇게 상황을 정리했더랬다. 그걸 비웃기라도 하듯 다음날에 또 레오가 나오는 꿈을 꾸고 말았다. 이번에는 제대로 보았다. 여성이 가진 풍만한 가슴은커녕 밋밋하기만 한 그 가슴에 츠카사는 코를 비비며 향을 맡고 그와 함께 아래의 결합을 깊이 했다. 상대가 달콤한 신음소리를 흘린다. 허릿짓이 격렬히 이어지고 등을 달리는 쾌감에 몸을 떨면서 눈을 뜨면, 아까의 열락 같던 공기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익숙한 천장과 식은 기온이 츠카사를 맞이했다.
그 이후부터였다. 교복을 입고 리더인 그의 모습에 설레어하던 시절엔 없었던 진득한 욕망이 츠카사 마음속에 고이게 된 건. 처음부터 있었지만 눈치 못 챘던 걸 수도 있다. 솜사탕 같은 폭신한 감정은 그의 의지로 사라졌지만 미처 깨닫지 못한 육욕이라는 생소한 욕망이 모습을 드러낸 걸 수도 있다. 츠카사는 그걸 직시할 수 없었지만 무시할 수도 없었다. 가끔 이루어지던 자위의 대상으로 꿈의 레오가 번번이 등장했다. 스쳐지나가며 본 광고의 잔재 같던 그 이미지는 날을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어딘가 과장되어 츠카사의 흥분을 부추겼다.
츠카사가 대학생이 되고, 멤버 전원이 유메노사키에서 벗어나 각자의 길을 걸을 때도 나이츠의 모임은 이어졌다. 정기적은 아니지만 때가 되면 으레 누군가가 나이츠를 소집하곤 했다. 이유는 다양했다. 이번 달에 누구의 생일이 있다, 봄이 싫다, 좋은 가게를 발견했다, 오랜만의 오프다. 그렇게 만나는 면면에서 레오는 쾌활하게 분위기를 흔들었고 츠카사는 꿈과 사뭇 다른 그 모습에서 묘한 죄책감을 느꼈다. 그런 날들이 시간을 꾸역꾸역 잡아먹으며 이어졌다.
다른 사람도 사귀었지만 꿈과 현실의 괴리에 얼마 못가 헤어져버리곤 했다. 웃기는 일이었다. 성격이 안 맞는다거나 같은 흔한 이별 사유가 아닌 잠자리에서 츠키나가 레오가 아니라는 이유로 파국을 맞이한다. 상대편에게 그렇게 고할 수 없지만 매번 버티지 못하고 츠카사는 이별의 말과 함께 상대를 연인이란 이름의 자리에서 밀어냈다. 대학을 졸업하고, 해외를 다녀오고, 이제는 스오 가가 이끄는 기업의 일원이 되었을 때도 츠키나가 레오를 버리지 못하는 것이 그의 삶인 것 마냥 기약 없이 이어졌다.
“물론 알고야 있지, 그렇게 제멋대로인 녀석이란 거. 하지만 중대사인데 이걸 던지기 전에 간단히 소개 정도는 시켜줄 수 있는 거 아니야? 우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 임금님은. 여전히 폭군이야. 언제까지 우리 머리 위에 있을 셈? 지금이라도 그 왕좌에서 끌어내려 줄 수도 있다고.”
얼굴이 제법 붉어진 이즈미가 그렇게 투덜댔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는 건 아라시다. 고개를 끄덕이고, 츠카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카사 군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 사람은 여전히 모르겠어요.”
츠카사는 얌전히 대답했다. 중력이 고장 났는지 모든 것이 제멋대로 흔들리는 세계 속에 간신히 앉아있는 상황인데도 목소리는 의외로 멀쩡하게 나왔다.
“내가 아끼고 사랑했던 것들은 매번 이러지. 이쪽은 준비도 안됐는데 멋대로 떠나버려.”
이번에도 츠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즈미는 다른 사람을 생각하며 말을 여는 걸지도 모르지만 츠카사에게 그저 모두 자기 이야기 같았다. 아니, 자기 이야기였다. 츠카사는 남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자신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에 츠카사의 사정이, 츠카사와 레오의 사정이 빠져 있다. 이즈미가 알 도리는 없을 두 사람의 사정이.
여기 있는 선배들이 기억하는 스오 츠카사는 자신의 감정도 제대로 못 숨기는데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실수를 연발하던 미숙한 자였을 것이다. 그래서 선배들의 귀여움을 받기엔 충분한 유닛의 막내. 그 막내는 큰 짓을 저지르고 말았답니다, 그것도 최악의 형태로. 술이라는 변명으로 몸을 감싸고 평소에 하던 더러운 생각을 끝내 실천하고 말았지요. 입술 사이로 비실거리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자조와 자기혐오와 동시에 말할 수 없는 배신감이 폭발할 것처럼 꿈틀댔다.
그들의 왕이 급작스럽게 나오지 않는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고 한다면, 눈앞의 선배는 무슨 얼굴을 할지 츠카사는 궁금했다.
저번 나이츠 모임에서도 지금처럼 술을 진탕 마셨다. 차이점이라면 그 때엔 레오도 제대로 참석하고 있었고, 츠카사는 얼굴에 붉은 손바닥 자국을 장식처럼 달고 있었다. 하필 모임이 있는 날에 헤어지고, 성격 있는 여자에게 뺨이 힘껏 올려붙여진 츠카사는 어색하게 한쪽 얼굴을 감싸고 들어가야 했다. 안 그래도 눈썰미가 좋은 선배들이다. 대문짝만하게 있는 손자국은 금방 들켰고, 그 안타까운 사정을 알고 난 후 막내도 어른이 다 되었다는 감상과 함께 위로라는 명목으로 다 같이 마셔주는 분위기가 되었다. 날뛰던 레오도 그날만큼은 얌전했던 것 같다. 선배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크게 상심한 건 아니지만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그 결과 목까지 차오르는 알콜이 마지막 기억으로 그 뒤는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눈을 뜨자마자 낯선 천장과 머리를 강타하는 두통 속에서 츠카사는 끙끙대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두통을 단숨에 날릴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제대로 묶이지 않아 어깨 밑으로 흐트러진 주황색 머리, 흰 셔츠. 그 밑으로 뻗어진 흰 다리.
“Leader..?”
등을 보인 상대가 눈에 띄게 움찔했다. 평소에 불러도 대답이 늦는 사람이긴 했다. 하지만 그건 작곡에 집중했을 때나지, 츠카사가 온 걸 알아채면 그의 이름 끝을 길게 부르며 화사한 웃음을 짓곤 했다. 츠카사의 목소리를 들은 게 명백한 상황에도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바닥에 있는 옷가지를 주워들어 서둘러 다리를 집어넣으려 했다. 셔츠와 덜 입은 바지 사이로 보이는 허벅지에 저절로 눈이 가면서 안 그래도 멍한 머리가 더 멍청해지는 기분이었다. 많은 생각들이 순식간에 머리를 스치면서 츠카사는 레오의 손목을 급히 잡았다. 몸을 덮은 이불이 미끄러지면서 셔츠만 입은 남자보다 더 입은 게 없다는 걸 깨달은 츠카사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자, 잠시 만요. 저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레오를 붙잡은 채로 주위를 둘러본다. 아마도 모텔 방. 특유의 기묘한 소독 냄새와 낮일 텐데도 햇빛이 거의 들지 않는 창문, 작은 화장실. 그런 곳에서 바지를 입고 있는 리더와 아무 것도 입고 있지 않는 자신. 뻔하다면 뻔한 상황이지만 정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여기에 어떻게 오게 된 건지도, 여기에 누워서 있던 일들도 모두.
“이런 상황에 죄송합니다만, 제가 왜 여기 있는지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습니다.”
그제야 레오는 고개를 돌렸다. 오른쪽으로 묶여있던 머리가 풀어져 있는 위화감이 가득한 그가 츠카사를 직시했다. 그 모습은 그가 아는 나이츠의 리더가 아니고 오히려 꿈속에 나오던 모습과... 츠카사는 입술을 달싹였다.
“뭔가 알고 계시면 말해주세요. 저흰 그러니까-.”
“몰라.”
레오가 대답했다.
“나도 기억 안나. 많이 마셨거든.”
너도 그랬지만. 평소보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레오가 그렇게 말했다.
“눈 뜨니까 네가 옆에 있었고. 지금은 보시다시피 옷을 주워 입고 있고.”
“그럼, 이런 상황이란 건...”
레오는 대답이 없었고 츠카사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평소라면 상상해 보라며 외쳤을 남자가 지금만큼은 묵묵부답이다. 다음 말을 꺼내지 못하는 사이 레오는 다시 몸을 틀어 바지를 입으려 했다.
“잠깐만요, Leader. 입으시면 안 돼요.”
츠카사가 다급하게 말했다. 어리둥절한 레오에게 다가간 츠카사는 주저하다가 침대 옆의 티슈 한 장을 뽑았다.
“흘러나와요.”
셔츠 아래로 감춰져 있는 둔부 아래로 이어진 허벅지를 따라 흰 액체가 조금씩 흐르고 있었다. 숨을 삼키는가 싶더니 레오는 티슈를 받아들어 대충 문질렀다. 그의 손짓마다 은근히 보이는 허벅지와 그로 이어지는 엉덩이 선을 저도 모르게 보고 있었다. 휴지를 쓰레기통에 던지며 레오가 말했다.
“이런 건 상관없어.”
“속옷도 입지 않으셨어요.”
멈칫한 그는 바지에서 발을 빼고 신경질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답지 않게 말도 적고 눈도 안 마주치는 모양새가 어떻게든 이 자리를 빨리 피하려는 걸로 보여서 츠카사는 다시 레오를 돌려세웠다.
“남아있으면 몸에 좋지 않을 거예요. 제가 말하는 것도 그렇지만 이왕 이렇게 됐으니 끝까지 처리해요.”
말하면서도 현실감이 없었다. 정말 자신이 그와 그런 일을 한 건지, 이건 사실 오해가 있다든지. 애초에 남자와 남잔데. 그와 동시에 아까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허벅지를 끈끈하게 감아 내리던 정액. 얼마나 그 안에 부어냈던 걸까. 일어나면 흘러나올 정도로 가득 찰, 아마 자신이 했을, 그러나 전혀 기억나지 않는 행동의 일련들. 미칠 것 같은 와중에도 츠카사는 끝까지 말할 수 있었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카사 군?!”
갑작스럽게 들린 목소리에 츠카사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고개를 숙인 채로 졸고 있었다. 츠카사가 반문할 필요 없이 이즈미가 말을 이었다.
“완전 별로야! 제대로 정신이 박힌 여자라면 그 나이에 결혼을 한다는 생각을 하겠어? 그것도 한창 활동 중인 가수가?!”
“사랑에 미치면 그럴 수도 있어. 이즈미쨩도 알잖아? 사랑은 무서운 거야.”
기대어 졸던 리츠가 이제는 아예 바닥에 누워서 누군가의 겉옷을 덮고 잠들어 있는 와중에 유일한 대화의 상대인 아라시가 말했다. 이즈미는 코웃음을 쳤다.
“그건 사리분별도 안 되는 사람이란 말?”
“이즈미쨩은 하면 안 될 말이네.”
아라시의 한숨 섞인 웃음소리가 흘렀다. 그 대화들을 가만히 듣고 있던 츠카사는 조금 후에 그들이 떠드는 대상이 청첩장에 나란히 이름을 올린 상대 여자라는 걸 깨달았다.
“나이가 어려요?”
조금 더듬거리며 츠카사가 그 대화에 끼어들었다.
“응. 이제 갓 성인이 된 아이야. 요즘 한창 인기인 주말 드라마 있잖아? 그 ost를 부르고 꽤 유명해졌어. 그 전까진 얼굴 없는 가수였는데~”
“그 곡을 쓴 건 임금님이고. 유명이고 뭐고, 결국은 임금님 좋다고 쫓아다니는 나부랭이잖아? 임금님도 보는 눈이 너무 없어. 애초에 생각을 하긴 한 건가?”
난 별로야. 술잔을 신경질적으로 내려놓는 소리엔 불편한 심기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그래도 임금님이 선택한 사람이잖아. 임금님에게만 먹히는 매력이 있을 지도-.”
“상황이야 보나마나 뻔하지. 한창 작곡 도중에 말했을 테고, 사람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임금님이니까 정신없는 와중에 아무렇게나 대답했겠고.”
부정을 하고 싶지만 충분히 있을 법한 상황이라 테이블은 잠깐 조용해졌다. 문 밖에서 다른 소음들이 슬금슬금 들어올 때 이즈미가 코웃음을 쳤다.
“둘이 눈 맞아서 그런 거라면 말도 안 해. 요전 오프에 임금님이 갑자기 집에 쳐들어온 적이 있었어. ‘주말인데 여기서 뭐하냐고, 임금님 연애 안 해?’ 하니까 뭐라고 대답한 줄 알아? ‘못해’ 라고 딱 잘라 말하더라고. 그랬던 사람이 결혼? 웃기지도 않는 소리.”
“그게 언젠데요?”
츠카사가 불쑥 물었다.
“Leader가 세나 선배 집에 찾아온 게 언제쯤인가요?”
“흐음? 대충 한 달 전인 것 같은데.”
그게 중요해? 라는 기색이 역력한 이즈미에게 대답 대신 츠카사는 술 대신 물을 들이켰다.
레오와 연락이 되지 않은 건 한달 언저리였다. 그 전까지는 우스울 정도로 연락이 잘 됐다. 심지어 만나기도 여러 번 만났다. 츠카사는 그 하룻밤의 사고를 어떻게 해서든 책임을 질 생각이 있었고 레오는 기사도라며 놀리긴 했지만 약속은 어울려주었다. 생각지도 못한 연결 고리는 유메노사키에서 추억으로 접혔을 시간을 다시 만들어내었다. 영화관도, 공연도, 저녁 식사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1박 정도의 여행도. 서로의 시간이 맞는 한에서 그는 거절 대신 긍정을 했다. 메신저에서도 하루에 한 번씩은 꼭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설레고, 설레어 심장이 제 할 일을 어느 때보다 열심히 한 나날이었다.
그리고 고백을 해버렸다.
어느 때보다 일에 치인 하루였다. 스트레스가 목구멍까지 가득 찬 와중에, 그는 시간을 쪼개어 만나러 와주었다. 무거운 어깨만큼 밤이 짙어진 검은 하늘 아래서 그가 나타났고, 어린애 다루듯 머리를 쓸어주며 힘내라는 다정한 말들은 그 어떤 노래보다 감미로웠다. 안온함에 취해 츠카사는 벤치에 앉은 채 그를 올려다보며 고백을 해버렸다.
그 이후로 무섭게 내려앉던 침묵을 츠카사는 기억한다. 당황이 가득한 표정으로 츠카사를 내려다보다가 말을 할 듯 말 듯 입을 껌벅이던 그는 조금 후에 크게 웃었다. 평소처럼 사방으로 퍼지던 명랑한 소리 대신 이상한 호흡이 실린 억지웃음이었다.
‘스오~ 우리들은 남자잖아? 남자들끼리는 좀 이상한 거 아냐? 곡의 소재는 될 것 같지만. 아~ 역시 안 될 것 같아. 그냥 좀 재미있고, 불쾌한 이야기로 들려.’
상냥하게 위로하던 목소리는 어디로 가고, 연극 대사를 뱉듯이 남자는 질린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간의 내 행동이 너를 착각하게 했다면 미안. 너와 그런 일이 있던 것도 내가 딱히 그 쪽이라서 그런 건 아니고 오히려 아무 생각도 없는 행동들이니까. 그냥 돈 많은 도련님과 놀면 어떤 기분인지 알고 싶었어. 곡을 쓸 때도 도움이 될까 싶었고, 자극이 필요하다고 해야 하나? 그게 지나쳤던 거네. 나도 정도를 모른다니까.’
레오의 말이 형체를 가지고 있다면 그건 사방으로 가시가 뻗친 모습일 거다. 섣불리 손으로 집으려고 했다가 잔뜩 찔려 상처만 입을 뿐인.
‘그나저나 스오 가도 큰일이겠어? 하나 뿐인 후계자가 남자한테 고백하다니. 이른바 흑역사라는 걸 내가 실시간으로 목격중인 건가?! 가십 잡지들의 좋은 먹잇감인데. 하지만 모른 척 해줄 테니까 너무 걱정은 말고. 그냥 없던 일로 하자.’
한 발자국 떨어져서 나불나불 떠들던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가 잠시 후에 말했다.
그럼 이만. 츠카사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 레오는 그대로 멀어졌다. 어두운 밤거리에 삼켜지는 뒷모습도 츠카사는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그 이후로 연락이 끊겼던 그의 유일한 의사는 다른 사람 손으로 전해 주는 청첩장이다. 주는 게 고마울 정도일지도 모른다. 그 네모난 거절은 봉투 속에 도로 담겨 츠카사 옆에 얌전히 잠들어 있다.
좋은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레오와 관계를 가졌지만 어디까지나 우발적인 사고였고, 애초에 그가 남자를 좋아하는 지도 모른다. 레오는 그런 일쯤은 익숙하다는 듯이 굴었지만 정말 익숙한 건지, 그런 척을 하는 건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가 자신을 그저 흥밋거리로 이용했다는 게 지금도 믿기지 않았다. 본인의 입으로 들어서 더했다. 지나가는 소문으로 들었다면, 츠키나가 레오가 어떤 돈 많은 후계자를 갖고 놀았더란다 하는 지저분한 이야기가 돌았다면 납득했을 지도 모른다.
호의의 가면 뒤에 상대의 조소가 깔려있다면 어느 누군들 상처받지 않을까. 그가 사랑한다는 기사를 버리고 레오의 선택은 자신을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들 중에서도 여성이라는 껍질을 뒤집어 쓴 자에 한한 이야기다. 레오와 평생을 함께 할 여자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츠카사에게 중요하지 않았고, 알 바도 아니었다.
사실 청첩장을 받기 전부터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이 작은 카드 따위야 그저 자신의 결심이 틀리지 않다는 걸 알려주는 소도구일 뿐이다.
레오와 그렇게 헤어지고 난 후 수많은 감정들이 싸웠고, 승리한 것은 소유와 집착과 애증이었다. 그들의 왕의 뒷모습을 보며 남몰래 연모하는 수줍은 어린 기사의 숨통은 끊어졌다.
“우리가 이렇게 말해도 임금님은 결국 결혼식을 올릴 테고, 어찌 됐든 축복은 해줘야 하잖아.”
아라시의 달래는 목소리가 들렸다. 츠카사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결혼식이 열리는 날은 없을 거예요, 나루 선배.
“또 알아? 없던 일로 될지.”
맞아요, 세나 선배.
결혼쯤이야 없던 일로 만들면 되는 문제였다.
*
날이 풀리면서 불황도 한결 가셨다. 덕분에 정신없이 돌아가는 회사 안에서 츠카사는 개인 휴대폰으로 걸어오는 전화를 받았다. 발신자는 츠키나가 레오.
“오랜만이에요, Leader.”
“-.”
“Leader?”
바로 말을 꺼내지 않는 핸드폰에 대고 츠카사는 다시 반문했다. 수화기 건너편에서 숨을 집어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본 적 없는 낯선 여성의 목소리였다.
“아, 처음 뵙겠습니다. 스오 츠카사라고 합니다. 말씀은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Leader 휴대폰으로 무슨 일이신가요?”
손가락이 가볍게 마우스를 톡톡 두들겼다.
“음... 그래요? 저도 Leader와 연락한 게 몇 달 전이라. 저 말고 다른 선배들께도 여쭤보셨나요? ...그러셨군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변덕적인 면이 있으신 분이라, 말도 없이 어디로 훌쩍 떠나고 그런 일도 많으시니까요. 금방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오시고요. 예, 학원 시절에는 그러셨어요. 경찰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신출귀몰하셨고.”
츠카사는 드라마 ost를 떠올렸다. 그의 왕이 만든 음을 타고 흘러내리던 그 목소리. 전화에서 들리는 목소리와는 잘 연결되지 않는다.
“네, 아니요, 괜찮습니다. 빨리 연락되시길 바랄게요. 네. 아, 지금 상황도 좀 그렇지만 이렇게 연락 주셨으니 미리 말씀드릴게요. 결혼 축하드립니다.”
전화가 끊어졌고 츠카사는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옮겨 마저 업무를 처리한다. 오늘도 바쁜 날이었다.
5월 X일 금요일
지금 시간은 오후 11시를 막 지났다. 리더는 지금 잠들어 있고 나는 이 노트를 처음으로 쓰고 있다.
오늘은 리더가 이곳에 온 지 첫 날이다.
집은 쾌적하다. 위치, 방음 등 여러 까다로운 조건을 걸어서 구한 보람이 있다. 본격적으로 여름이 다가와야 알겠지만 당장은 만족스럽다.
가장 난관일 거라고 생각한 리더를 데려오는 일은 예상보다 어렵지 않았다. 보고에 따르면 리더는 한 지점에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고 한다. 작곡을 하냐고 되물었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계속 앉아만 있었다는 것이 설명이었다.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였지만 계속 움직임이 없었기에 인적이 없는 시간이 되었을 때 무저항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확보했고 이 집으로 바로 옮겨졌다.
건강은 양호하진 않은 상태. 수면 부족과 영양 부족 증상을 보이고 있다고 하여 그가 아직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사이 수액을 놓았다. 작업이 있나 싶지만 한 달 전인 결혼을 의식해선지 그의 스케줄에 이렇다 할 만한 일은 없었다. 당분간 작곡 요청이 들어오지 못하게 컨택을 막아놓은 것도 있으니 그에게 일이 들어오긴 힘들 것이다. 물론 일을 받을 수도 없을 테지만.
리더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눈이 가려지고 손이 구속된 상태의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는 태도였다. 그가 처음 한 말은 이거였다.
“어라, 이거 무슨 상황?”
눈이 안 보인다고, 라며 하하 웃었다. 눈을 가려선지 그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송곳니가 보일 정도로 벌어진 입을 보면 두려움의 기색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그게 좋았다. 내가 데려온―납치한 사람이 내가 알고 있는 리더라는 걸 테니까.
이렇게 그를 가까이서 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그렇게 헤어지기 직전에 나와 리더는 연인이 되기 직전의 남녀처럼 그런 수줍음의 거리만 조금 남겨두고 같이 붙어있어서, 그의 눈가 밑에 내려온 피곤함의 수도 세어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 때의 거리와 지금의 거리는 비슷한 것 같은데 묘하게도 멀게 느껴졌다. 그는 침대에서 버르작 거리며 일어났고 나는 그와 조금 떨어진 의자에 앉아 지켜보고 있었다.
그에게 처음으로 할 말을 고민도 했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실망하셨나요? 아니면 당신이 가지고 논 남자는 이 정도로 비열합니다, 아니면 이런 상황이 될 거라고 상상은 해 보셨나요?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는 그에게 건넬 말은 많았지만 그만큼 고르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 고민들은 모두 필요 없는 것이었다.
“저기, 근데 누구?”
그는 그렇게 말하며 어설프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마 사람이 있는 방향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방금 깨웠으니 근처에 있는 거 맞지? 눈 가린 거 답답해. 풀어주면 안 돼?”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리더에게 할 수 있는 무수한 말들은 모두 그를 끌고 온 것이 ‘스오 츠카사’라는 걸 아는 전제로 하는 말들이었다. 그는 나의 혼란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끊임없이 물어왔다.
이렇게 정중히 끌고 왔으면 용건을 말해야 할 차례 아니야? 눈을 가리고 있으면 뭘 원하는 지도 알기 어려워. 날 아는 사람이야?
그 목소리들은 명백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앞으로 이 사람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말하는 순간 그는 내가 누군지는 눈치 채고 비난과 경멸을 모조리 쏟아 부을 것이다. 한때 좋아했던, 지금도 좋아하고 있을 지도 모를 그에게 더 이상의 폭언은 듣고 싶지 않았다. 대신 입을 열지 않으면 그는 바로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알 수 없다. 나는 눈을 가린 저 얇은 천 하나로 익명이라는 가면을 뒤집어 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