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레오 - 겨울 2악장
* 이즈레오 교류회2에 들고간 통행료입니다...
벚꽃 잎이 축포처럼 온 세상을 수놓는 졸업식이 끝났다. 말도 많고 탈도 많다로도 압축이 되지 않는 유메노사키 생활이 오늘의 이 하루로 끝이 난다는 걸 세나 이즈미는 처음에 실감하지 못했다. 적어도 10년은 보낸 것 같은데, 그러한 감상 속에서도 얼굴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영영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울 일이야? 끝내 눈물을 보이고 마는 나이츠의 막내에게는 짐짓 엄하게 말하기도 했었다.
무엇보다 다행인 건 동급생이자 나이츠의 리더인 츠키나가 레오도 무사히 졸업했다는 것이다. 정학과 등교 거부로 출석 일수가 부족한 게 뻔한 상황이지만 아이돌 육성 학교 특성상 그런 건 눈 감아 줄 실적이 있었기에 졸업도 간신히 허락된 것 같았다. 남자는 신나게 방방거리며 떠들고 있었다. 유메노사키의 세나 이즈미에게 있어서 츠키나가 레오란 인물은 빼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아주 긴 이야기였다. 기쁨과 후회와 눈물과 미소가 얼룩진 끈적끈적한 이야기. 청춘이란 이름으로 뭉뚱그려 포장할 수 있을 그 이야기가 이즈미의 취향은 아니었지만 기어코 막을 내렸다. 이렇게 나란히 졸업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했던 시절을 넘어 결국엔 벚꽃을 배경으로 한 해피엔딩.
“뭐해, 세나. 그렇게 느슨해빠진 얼굴을 하곤! 앗, 세나도 역시 졸업하니까 막 울컥울컥해?! 아니면 봄이라도 타는 거야?!!”
“시끄러워, 레오 군.”
밉살스러운 얼굴을 졸업장으로 밀면서도 이즈미는 내심 기뻤다. 결국 이렇게 너와 졸업한다. 모두가 행복해졌습니다의 뒤에는 대학생이라는 또 다른 대단원이 시작될 것이다. 그 이야기가 부디 유메노사키 만큼 치열하지 않기를. 그리고 이 녀석과 다시는 떨어지지 않기를.
머리에 묻은 벚꽃 잎을 털어주는 척하며 밝은 주황색의 머리를 매만지자 금방 볼이 발그레해지며 녹색 눈이 기쁜 듯이 웃음 짓는다. 어쩐지 여기까지 간질거리는 벚꽃 잎이 묻어오는 기분이었다. 확실히 앞으로가 더 나을 것이다. 동급생에서 시작했고 이제는 이 세계에 하나 뿐인 연인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서 일은 벌어졌다.
*
“뭐? 집을 구했어?”
“응, 아직은 가계약만 해뒀지만! 지금 집이랑 학교 머니까 역시 자취해야 하니까.”
“아니, 아니, 그건 이미 알고 있고. 너 나랑 같은 대학이잖아?”
“와하핫, 세나 이제 안 거야? 나랑 세나는 같은 대학이라고!”
“아아, 이 멍청아 내가 그걸 모르겠어?! 내 말은 왜 집을 멋대로 혼자 구한 거냐고!!”
격노하는 이즈미를 멀뚱히 쳐다보는 초록빛 눈동자가 있다. 이 녀석은 항상 그렇다. 대화를 하는 이쪽이 더 복장 터지게 만드는 재능이 있다. 말뿐이 아니라 행동도 마찬가지다.
작곡이 시작되면 주변의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작곡을 한다는 행위에만 충실하다. 그것이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인지, 해변의 모래사장인지, 한창 데이트 중의 영화관인지는 그에게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그렇게 탄생한 곡은 이즈미가 사랑해 마지않는 음악들이었지만 그와 별개로 자기 몸 하나 정도도 건사 못하고 매번 바닥에 주저앉고, 낙서를 하고, 핸드폰을 잊어버리는 등등의 초등학생도 하지 않을 행동들을 연달아 보여줬었다.
그런 한창 어린 아이 같은 아이가 나이는 훌쩍 먹어서 이제는 자취를 하지 않으면 상황이 돼버렸다. 어찌 걱정이 안 될 수가 있는가. 제 딴에는 여동생 앞에서는 어른인척 하는데 이젠 그 여동생도 생활 공간에서 없어지는 상황이다.
다행히도 이즈미와 레오는 같은 대학을 다니게 되었다. 고교 시절의 아이돌 활동을 인정하고 그에 가산점을 주고, 또한 편의도 봐줄 수 있는 대학. 이즈미는 모델 일을 재개했고, 이 작곡 바보는 그 명성에 따라 작곡에 매진하기로 했다. 이미 둘 다 프로로 활동하고 있는 이상 대학 졸업 타이틀은 그저 작은 간판일 뿐 견문을 넓힐 수단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생활 리듬이 얼마나 겹칠지 모르지만 연인이자 이제 대학 동문이 될 이즈미가 레오를 챙기는 것은 당연해보였다. 적어도 이즈미는 그걸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어때, 괜찮지?”
이즈미가 화난 이유를 잘못 짚었는지 레오는 이즈미를 집에 데려갔다. 짐 하나 들어가 있지 않은 집은 벽지를 새로 했는지 얼룩 없이 깔끔했다. 넓은 거실과 작은 부엌 그리고 침실인지 작업실인지로 쓰일지 모를 조그만 방 하나까지. 혼자 살기에 딱 좋을 집. 첫 집 치고는 나쁘지 않다는 것이 객관적인 감상이었지만 그보다 더 큰 감정적인 파도가 여전히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그냥 평범한데.”
“세나에게 그 정도면 합격이란 얘기네.”
정답이지만 이즈미는 동의 대신 인상을 썼다.
“전혀 아니거든. 그보다 왜 말도 하지 않고 먼저 구했냐고. 레오 군도 자취, 나도 자취니까 같이 사는 게 당연한 거 아니었어?”
연인이니까 라는 말은 꺼내지 못했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이유는 충분했다. 둘 다 자취가 필요한 상황에 상대는 같은 학교에 심지어 같은 아이돌 유닛이었고 사이도 나쁘지 않았다.(연인까지 갔는데 사이가 나쁘면 곤란하다.) 오히려 평소에는 저쪽이 좋다고 엉겨 붙었다.
고백은 이즈미가 먼저 했지만 듣자마자 입을 벌리며 기쁘다고 활짝 웃다가 이내 바보 같이 엉엉 울음을 터뜨린 훌륭한 리액션도 보여준 주제에 집은 홀랑 먼저 구해버리고. 그것도 지 혼자만 쏙 들어가 살 집을.
“오옷, 세나 외로운 거야?☆”
“그럴 리가? 핸드폰도 맨날 어디다 두고 다니는지 잊어버리는 얼간이가 갑자기 혼자 산다는데 얼씨구나 하고 넘어가겠어? 집에 불이나 내지 않으면 다행이지.”
“에, 너무하네. 나도 이제 성인이니까 자취 정도는 할 수 있어. 다들 하는 거잖아?”
“아아, 잘도 하시겠네. 아무데나 낙서하고 민폐 부리는 우리 임금님이 얼마나 혼자 잘할 수 있는지 정말 기대되는데?”
“왜 그렇게 화내는 거야? 난 오히려 세나를 생각해서 한 건데.”
이즈미의 역정에 레오가 불만스럽다는 듯이 맞받아쳤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지 이즈미 속이 더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무슨 소리? 여기에 나를 생각할 여지가 어디 있어? 무시를 잘못 말한 건 아니고?”
“여, 연인이라고 해도 같이 사는 것보단 조금 떨어져 있는 편이 관계 망치지 않고 좋댔어. 그러니까 그 적당한 거리라는 거 있잖아. 나는 그런 걸 재는 걸 잘 못하니까.”
“어떤 자식이 레오 군에게 그런 말을 했어?”
“유우 군이라는 자식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이즈미는 머리를 한 대라도 맞은 것 같았다. 레오는 우물쭈물 거리며 이즈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하아??? 왜 여기서 유우 군이 나오는데? 그보다 유우 군이랑 그런 이야기도 해?”
“음, 가끔? 뭔가 유우 군, 나랑 세나 사귀게 됐다니까 엄청 안도하는 눈치여서 말이야~ 그리고 세나가 유우 군 엄청 좋아하니까 나도 뭐 닮을 수 있는 점이 있나 싶어서?”
부연하자면 이때 이즈미는 아주 감정적이었다. 스스로도 알고 있지만 이미 속력을 있는 대로 올려버린 차는 뒤늦게 브레이크를 밟아도 끼이익 하며 타이어 자국을 시끄럽게 남길 뿐이었고, 세나 이즈미의 감정적 폭발 역시 불행하게도 제멋대로 떠드는 입을 멈출 수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런 짓 해봤자 레오 군은 평생 가도 유우 군을 따라갈 수 없으니까!”
“어머, 이즈미쨩. 그건 정말 최악이네….”
“…실언이었어.”
테이블에 머리를 박을 기세로 한숨을 쉰 이즈미 건너편에는 입을 가리고 있는 아라시가 있었다. 오늘의 상담역은 이즈미가 모델로 출연한 신상 화장품을 양도하는 조건으로 지금 자리에 나와 주었다. 화장품이 담긴 종이봉투는 이미 예쁘장한 핸드백 속에 들어간 지 오래였다.
“그러니까 그렇게 말 하려는 게 아니었고. 유우 군은 유우 군이고 레오 군은 레오 군이니까,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하고 싶었는데.”
“여기서 말해도…. 그래서 임금님은 뭐라고 했는데?”
“…바로 그 자리에 전화 걸더니 집 계약하더라.”
레오의 그런 무서운 눈빛은 처음이었다. 말없이 이즈미를 노려보다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전화를 걸어서는 가계약 건을 정식 계약 하고 싶다고 또박또박 말했다. 지금 부동산으로 가겠다고 전화를 끊은 레오는 곧장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이즈미쨩이 화를 자초했네.”
“그 녀석 나름 고집이 있어서 한 번 결정한 건 안 굽히니까, 아마 내가 뭐라고 했었어도 집 계약은 했겠지. 나는 그저 왜 나와 상의도 없이 혼자 살기로 결정했는지가….”
“섭섭했구나?”
이즈미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침묵은 긍정이나 다름없었다.
레오는 숨기는 성격은 아니다. 서투른 거짓말을 하는 대신 스트레이트로 대답을 하면 했지 빙빙 돌아가는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다만 의중이 있는 행동을 하는 경우는 있었다. 생각이 없는 척을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이즈미는 알고 있다.
많은 것들을 입 밖으로 꺼내는 대신 속에 품고 혼자 무너져 내리는 걸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본 이즈미의 심정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더 이상 그런 건 싫어서, 이제는 모른척하지 않고 옆에 있고 싶어서, 네가 소중하다는 걸 인정해서 그에게 고백했고 상대도 아마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예전과 그대로인 기분이 들었다. 집이라는 중요한 사안에서 자신이 속해 있지 않은 것, 어쩌면 레오는 이즈미와 그 정도로까지 붙어 있고 싶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울렁이는 불안감도 같이.
“임금님이 말한 대로 의도일 수 있잖아? 너무 붙어 있으면 싸우거나 할 수도 있으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쳐. 하지만 그 전에 나한테 한 마디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그것도 그렇네…. 임금님은 예전부터 알 수가 없었으니까.”
결국은 이즈미와 레오 둘의 사정이었다. 제 3자에게 상담이란 무릇 자신의 마음을 되돌아보고 결국 어떠한 결정에 확신을 가지게 하는 도움이었다. 이즈미는 견딜 수 없는 불안을 느끼고 있었고 그걸 다른 사람과 대화로 호소하려고 했다.
사실 이즈미에게는 그런 행동이 흔한 일이 아니었다. 노력파인 그가 지금의 커리어를 쌓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했던 건 세나 이즈미 본인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었다.
그러한 유일신의 신자가 가진 견고한 믿음이 기울어져, 어느새 다른 사람을 향한 신앙으로 변해버렸다면. 그 신이 자신을 더 이상 보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다면. 판판한 대로가 어느새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로 변해 소름끼치는 바람만이 발 밑에서 웅웅대고 있다면.
“레오 군이 사실은 동거까지는 원하지 않는다거나….”
“아니, 이즈미쨩도 참! 답지 않게 왜 그래! 임금님이 그런 말 한 거 아니잖아? 역시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없겠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
한창 목에 감겨있던 머플러가 얌전히 옷장에 머무르는 날씨가 점점 이어지고 세상의 모든 것이 따뜻하게 녹아갈 때, 다들 너그러워진 기분이 드는 지금에도 이즈미는 섣불리 레오에게 연락하지 못했다.
메신저는 이즈미가 먼저 거는 일이 많았다. 스케줄을 챙기거나 연습 시간을 리마인드 하거나, 집 앞에 있다고 알리거나. 레오는 성실하게 답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먼저 세나 뭐해? 세나 바빠? 세나 지금 보러 가도 돼? 등을 보내기도 했다. 지금은 그 어느 말도 오가지 않는다. 약 일주일간의 정적 속에 이즈미 속만 타들어갔다. 먼저 연락을, 연락을, 연락을….
츠키나가 레오의 번호가 덩그러니 떠 있는 핸드폰을 노려보던 이즈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사실은 지금도 레오네 집 근처 카페였다. 늦은 레오를 기다리곤 할 때는 언제나 여기 있었다. 누구라도 만날 것처럼 옷까지 다 차려입고 정작 연락도 못하고 한참을 핸드폰만 노려본다. 이게 첫 번째가 아니었다. 아라시와 만나고 난 다음날 기세를 몰아 근처까지 갔지만 결국 아무것도 누르지 못하고 돌아갔었다.
확인 받는 게 두려웠다. 너와 내 사이는 그렇게까지 깊지 않고 깊어질 생각도 없다는 것이 엄숙한 판결문처럼 선언될까봐. 상상만으로도 무참한 공포였다. 그 판결이 시간 문제라는 걸 알면서도 이즈미는 그 시간을 당기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있는 것도 싫었다. 어쩌면 오늘도 아무 연락도 하지 못한 채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누군가 앞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즈미는 인상을 쓰며 고개를 들었고 이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레오 군?”
“세나~.”
남색 머플러를 두른 이가 녹색 눈을 깜박이며 이즈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너, 왜 여기 있어?”
“그야 세나가 여기 있으니까?”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는데.”
“카페 안인데 선글라스를 끼고 창가 자리에 앉아있으면 엄-청 눈에 띈다고~!”
레오가 손을 뻗더니 귀에 걸린 선글라스를 조심스레 벗기면서 헤죽 웃는다.
“이 편이 훨씬 예쁘네.”
“사람들한테 들키면 골치 아파지잖아….”
말은 그렇게 해도 이즈미는 굳이 레오에게서 선글라스를 다시 가져가지 않았다.
파란색과 녹색 시선이 뒤엉키는 일련의 시간 후 먼저 입을 연 건 레오였다.
“그런데 정말 세나 여기 무슨 일? 근처에 미팅 있었어?”
“…왜.”
“왜?”
“왜 연락 안했어.
겨우 목구멍을 비집어 나온다는 소리가 고작 이거였다. 레오가 우물쭈물거리며 대답했다.
“-세나 화나 있었잖아.”
“내가 뭘.”
“지금도 엄청 퉁명스러우면서.”
이렇게~ 하며 손가락으로 화난 눈썹을 그린 레오가 이내 멋쩍은 웃음소리를 흘린다. 이즈미는 한 번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솔직하게 말하는 것도 그에게는 일이었다.
“화 안 났어. 그보다 왜 머플러 매고 있어. 감기라도 걸린 거야?”
“응? 날씨 춥지 않아? 엄청 쌩쌩 바람 부는데. 아니면 역시 세나가 화나서 인가! 있지, 세나랑 그 날 헤어지고 나서 계속 귀에서 비발디의 사계 겨울 1악장이 휘몰아치는 거야! 창문 밖에 잔뜩 보이는 건 연두색인데 엄청나게 긴 겨울이 오는 것 같아서 춥고 무서웠어!”
남자는 연극이라도 하는 것처럼 두 손을 펼치고 장황하게 외쳤다.
“지금 보니 세나는 정말 겨울 같은 색이네. 머리는 잿빛이 쌓인 하얀 들판, 그 밑으로 얼어붙은 두 개의 푸른 호수! 그 밑에선 냉기 같은 말들이 북풍처럼 몰아닥치지, 와하핫!”
“…하아.”
이즈미는 한숨을 크게 쉬었다. 이 녀석은 언제나 이렇다. 남의 말을 듣기는커녕 자기 페이스로 끌고 가서 신나게 떠든다. 그렇게 중요한 본심은 숨긴다. 솔직하지 못한 자와 솔직함 대신 익살스러움으로 넘어가는 자의 만남은 매번 먼 길만 돌아왔었다.
“미안해.”
레오의 휘적거리던 움직임이 돌연 멈췄다. 믿을 수 없다는 걸 보는 눈이 이즈미에게 또렷이 박혀 있었다.
“왜, 왜…? 세나야말로 감기 걸렸어? 어디 아파?”
“멀쩡해. -그러니까 저번에는 내가 말이 심했어. 네 말마따나 너는 어린 아이도 아니고, 나랑 같은 나이인데 잔소리를 계속 하고 화만 내니까, 확실히 레오 군에게 나는 겨울 같은 이미지 일지도 모르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이 레오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고 이즈미는 말라가는 입 안을 열심히 굴리며 최후의 변론을 늘어놓으려 했다.
“지난번에 레오 군에게 했던 말들이 지나쳤다는 건 알고 있어. 유우 군 얘기도 그럴 의도로 말한 게 아니었고, 네가 굳이 유우 군을 닮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는데. 이런 오해 살 말과 행동을 앞으로 고치도록 노력하려고 해. 당장은 아닐 수도 있지만 앞으로 점점 더 나아지도록 할 테니까. 잠시만, 그러니까 내 말은….”
자신이 이렇게 말을 못했던가. 어렸을 적부터 어려운 자리에도 셀 수 없이 나갔었고 그 자리에서도 이즈미는 주눅 든 적이 없이, 어른의 입을 빌리지도 않고 자신을 충분히 어필했었는데. 그 어떤 자리보다 지금이 무섭다.
이즈미가 다시 말을 고르고 입을 열려할 때 이즈미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따끈한 체온을 가진 손이 이즈미의 이마를 돌연 덮었기 때문이다. 레오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이즈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음, 열은 없는데…. 하지만 이건 어디가 아파야지만 가능한 현상인걸?!”
“저기, 남이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데….”
“잘 모르겠어, 세나가 그런 말을 하는 이유. 역시 집 때문이야?”
이즈미는 입을 다물었다. 이마에 있던 손은 거두어졌지만 가까이 다가온 얼굴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세나, 세나 말이 맞아. 나는 보통이라는 기준과 좀 다르잖아. 상식과 인스피레이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나는 언제나 망설임 없이 인스피레이션을 골라. 그게 주변 사람들에게 큰 폐를 끼치고 있는 걸 알고 있어. 금전 감각도 엉망이고, 세나가 걱정한 대로 혼자 살면 불을 낼지도 몰라. 하지만 그런 나를 24시간, 365일 내내 지켜보면 세나가 너무 지쳐버릴 거야.”
“바보야, 그런 건 전혀 걱정할 필요가-.”
“걱정해야 해! 그도 그럴 게 나는 세나와 오래 있고 싶으니까!!”
박력 있는 말이 냉수처럼 쏟아졌고 그 냉수를 오롯이 맞은 이즈미는 두 눈만 껌벅였다. 다시 맞은편 의자로 앉은 레오가 말했다.
“세나는 모르겠지만, 나는 세나를 아주아주아주 좋아해. 그래서 세나와 떨어지는 거 싫고 그래. 사실은, 같은 대학에 가게 됐을 때도 너무 신났어. 세나랑 같이 살아야지, 싫다고 해도 찰싹 달라붙어서, 안 되면 벽장에라도 몰래 숨어서 같이 살아야지 했었어. 하지만 알았어. 같이 산다는 건 아주 나를 오롯이 보여줘야 해. 분명 세나한테 못마땅한 일도 많이 저지를 거고 보여 버릴 거야. 루카땅에게도 그런 모습, 많이 보여주고 마는걸. 멋진 오빠가 되고 싶지만 그게 잘 안 됐어. 그건 혼자 살게 돼서도 더 그럴 거야. 같이 있다는 행복보다 같이 있어서 생기는 짜증과 포기가 난 더 무서워. 그런 세나를 보는 것보다 잠깐 떨어져 있는 편이 훨씬 나아. 나는 첫 자취를 하며 겪을 바보 같은 실수들을 세나도 겪게 하고 싶지 않아. 세나는 이미 유메노사키에서 실컷 날 보살폈는걸. 그러니까 이 엉망진창인 생활을 실컷 겪고 혼자서도 멀끔하게 살아갈 수 있을 때에 세나에게 부탁할 거야. 나와 같이 살아달라고.”
이야기를 이어가는 레오의 뺨은 점점 붉어지고 있었다. 추운 곳에 있는 사람처럼 그렇게 볼을 발갛게 물들이고 있지만 목소리는 전혀 떨리지 않았다.
“세나는 확실히 겨울을 닮았어. 겨울은 말이야 귓가를 얼리는 엄청 차가운 바람도 있고, 손이 곱는 추위도 있잖아? 하지만 그 추위 속에서 따끈따끈 김이 나는 호빵의 맛도, 상대와 서로 몸을 꼭 붙이는 온기도 분명 겨울이야. 보석처럼 빛나는 얼음조각도 눈이 뒤엎은 순백의 평원도 모두 겨울의 아름다운인 것처럼. 겨울도 다양한 모습이 있잖아? 난 그런 세나가 좋아. 이 세상 누구보다 사랑하고 있어.”
결국 판사의 판결문이 엄숙하게 내려왔다.
아니, 지금 있는 이곳은 법원 같은 곳이 아니었다. 커다란 홀을 꽉 채우는 웅장한 오케스트라가 울려 퍼졌고, 그 중앙에 선 주황머리의 지휘자가 이즈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귀가 멀 것 같은 모든 음들이 모조리 이즈미에게 향하고 있다. 어이없는 웃음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바보야, 이건… 거의 프로포즈잖아.’
눈앞의 사람은 언제나 사랑을 외쳐대긴 했었다. 어떤 이는 그 가벼움에 혀를 찼고 어떤 이는 가볍게 여기며 사랑의 증거를 요구하며 그의 재능을 강탈했었다.
물론 이즈미는 그렇게 굴지 않을 것이다.
이즈미는 속을 알 수 없는 이에게 받은 고민투성이의 깊은 고백의 대답을 고민한다. 정답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레오 군이 날 싫어하지 않으면 그걸로 충분해.”
“에엑, 그럴 리가. 어떻게 세상에 세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
지휘자는 사라지고 자신이 익히 아는 츠키나가 레오가 소란스럽게 떠들었다.
“역시 세나 외로움 타는 거야? 봄이 그렇게 만든 건가?! 유메노사키의 마지막 저주 같은 건가?!! 혼자 내버려 둘 수 없어! 아, 하지만 그래도 역시 세나가 날 싫어하는 건 더 싫으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응?”
“정신 사나워. 뭐, 기다리는 것쯤이야 익숙하고.”
줄곧 경직되었던 입 꼬리는 어느새 느슨해져서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레오가 고개를 힘주어 끄덕였다.
“응, 대학을 졸업하면 동거인 츠키나가 레오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지금의 혼자를 즐겨둬!”
*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했으면서.
이즈미는 대답 없는 초인종을 몇 번이나 눌렀다. 핸드폰은 이미 열다섯 번째의 통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혼자인 순간을 주지도 않는데 어떻게 즐기라는 거야.
열여섯 번째 통화가 이어지기 직전 기계음 대신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기어코 연결됐다.
“어, 집 앞. 슬슬 나오시지? …뭐? 오늘 뭐 있냐고? 세 시에 미팅 있다고 몇 번을 말했어! 꼭두새벽 같은 소리하네. 지금 오후 두 시거든?? 헛소리 하지 말고 당장 문 열어.”
비척거리는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통화가 끊겼다.
역시 고백의 대답은 반지로 먼저를 선수 치자. 몇 년이 지나도 아마 크게 개선되지 않을 미래의 동거인에게 카운터펀치를 다짐하며 이즈미는 아직은 동거인이 아닌 그가 열어주는 문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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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 2악장에서 따왔습니다. 개살벌한 겨울인데 2악장은 따끈따끈하더라구요 다이스키. 물론 초반의 빡친 이즈미는 1악장이 맞습니다.
아 다시 봐도 부끄럽군요.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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