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약 리퀘2 가이린
* 가이린
* 섬의궤적2 엔딩 후 기반입니다. 네타 조심,..
누가 처음 얘기를 꺼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와 말할 때마다 볼 끝이 붉게 물들어 있는 알리사일수도 있고, 이런 걸 들었다며 가볍게 말한 엘리엇일수도 있다. 사실 누구인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어느 날 저녁, 먼저 방으로 올라간 유시스와 곯아떨어졌을 밀리엄을 제외한 토르즈 특과 클래스 7반은 테이블에 둘러 앉아 진실게임을 했었다.
사건의 시작은 하루의 일정을 마치고 제3 기숙사에서 샤론이 만들어준 저녁 식사를 배불리 먹었을 때였다. 기숙사 문을 당차게 열고 들어온 밀리엄은 양 손에 한가득 거대한 종이봉투를 들고 있었다.
‘같이 먹으려고 열심히 만들었어!!’
오늘 요리부 활동이 있었던 모양인지 얼굴과 머리 곳곳에 누런 밀가루 반죽과 소스가 덕지덕지 묻어있는 채로 밀리엄이 해맑게 말했었다. ‘그럼 모두 맛있게 먹어! 난 가서 잘래~’ 하품을 크게 하곤 가트에게 둥실둥실 업힌 밀리엄이 떠난 자리에는 기묘하게 부피가 큰 요리가 남아 있었다. 수상쩍어하는 기색이 분명한 표정으로 봉지 안을 본 유시스가 급하게 손으로 코를 막았다. 안색이 파랗게 질려선 ‘피곤하니 먼저 쉬러가겠다.’는 말과 함께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기숙사 계단을 올라갔고 조금 뒤에 도망쳤다며 마키아스가 분개했지만 이미 사라진 유시스를 붙잡고 내려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사연을 가진 음식은 식탁 정중앙에 놓여 시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섣불리 손을 대선 안 될 것 같은 비쥬얼과 그닥 향기롭지 못한 냄새의 조합으로 다들 난감하게 바라보던 차, 밀리엄의 정성을 생각하서라도 어느 정도는 먹어야 하지 않겠냐는 7반스러운 결론이 나오고 말았다. 그 먹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다가 게임이 제안되었고 문제의 진실게임이 나왔다. 룰은 간단했다. 질문이 나오고 그 질문에 진실되게 대답한다, 대답할 수 없으면 벌칙―여기선 밀리엄이 가져온 음식을 한 접시씩 먹는다. 그렇게 동료의 손길이 듬뿍 들어간 음식을 가운데 두고 진실게임은 시작됐다.
자리 때문에 첫 번째가 돼버린 엘리엇은 한참을 고민하다 겨우 질문을 던졌다. 아마 ‘개파인가, 고양이파인가’ 같은 거였다. 알리사는 ‘진실게임이 아니어도 되는 거잖아!’라고 했지만 어쩐지 안심한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다음 차례는 라우라로, 그녀는 아주 진지한 얼굴로 ‘그대들이 걷고 있는 무의 길에 대한 진솔한 생각을 듣고 싶다’ 고 물었다. 그 질문에도 알리사는 엘리엇 때와 같은 요지의 말을 외쳤다.
분위기가 바뀐 건 어떤 질문이 나온 다음이었다.
‘좋아하는 사람 있어?’
알리사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대답을 할지 음식을 먹을지 고민하다가 결국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있어...’라고 대답했다. 바로 반대편에 앉아있던 린과 눈을 마주친 그녀는 곧바로 얼굴을 피해 린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질문은 모든 사람이 대답해야 했다. 린은 그 질문에 별다른 고민 없이 ‘없는 것 같아.’ 라고 대답했고 어쩐지 글썽거리는 알리사의 눈망울을 봐야했다.
그 다음 질문은 한 사람을 더 핀치로 몰았다.
‘좋아하는 사람이 7반에 있어?’
결국 알리사는 밀리엄이 가져온 음식의 첫 시식자가 되었다. 울상인 채로 접시에 음식을 덜어와 먹는 그녀가 조금 귀엽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그것도 곧 다른 사람 목소리에 지워졌다.
‘있다.’
린은 옆을 바라보았다. 알리사의 반응과 대조적으로 평온하게 대답한 가이우스는 자기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분위기는 다시 묘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가이우스에게 쏠렸고 아까의 질문과 대답을 확인하는 말들이 이어졌다. ‘그건 가이우스가 7반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온몸으로 경악을 드러내는 마키아스 옆에서 린도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누, 누군데?’
‘그 질문이 나오면 그 때 대답하도록 하지.’
그들 중 정작 고백을 한 당사자가 가장 담담해 보였다. 잠시 혼돈 속에 빠져있던 진실게임은 다시 재개됐다. 다음 질문은 그 자리의 사람은 모두가 예상하듯 좋아하는 사람 이름 말하기였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가이우스는 자신의 차례에 조용히 음식을 더는 것으로 대답을 끝냈다. 덩달아 알리사도 두 그릇째 음식을 담아야 했다.
그 끝은 어떻게 됐더라. 린은 기억을 끄집어 올렸다.
묵비권을 행사한 가이우스가 음식을 한 입 먹고서는 ‘괜찮은 맛이다.’ 라고 평을 내렸다. 다들 의심의 눈동자로 가이우스를 봤지만 알리사도 ‘어라.. 그러고 보니 괜찮았어.’ 라고 말하자 결국 7반의 모두가 밀리엄의 음식을 맛보게 되었다. 겉을 덮고 있는, 일부러 코팅이라도 한 것마냥 딱딱한 부분에서만 역한 냄새가 나지 그 안에 감춰져 있는 것은 촉촉한 쉬폰 케이크 같은 것이었다. 가끔 정체불명의 이물질이 씹히긴 하지만 먹는데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결국 다 같이 한 접시씩 가져가 저녁의 티타임 비슷한 것이 되었고 진실게임은 어영부영 끝이 났다.
이게 왜 갑자기 생각났을까.
옛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과 별개로 린은 지체 없이 걸었다. 단단한 금속 바닥을 부츠가 디디면서 금관 악기가 막힌 소리를 내듯 침체된 복도를 텅텅 울렸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면 좋으련만 머리는 또다시 생각에 꼬리를 물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어질 것 같았던 상냥하고 온화한 날들. 토르즈와 트리스타라는 그들만의 세계에서 린은 바쁘게도 움직였었다. 구교사 조사, 특별 실습, 학생회 일 돕기. 그런 와중에도 린은 가끔 가이우스를 생각했다. 그 자리에 있었던 7반이라면 누구나 가이우스의 연모 상대가 누군지 추측했을 것이다. 린도 비슷했다. 알리사, 피, 라우라, 엠마... 조금 위험하지만 밀리엄까지도. 같은 반이라는 유대감도 있지만 객관적으로 봐도 정말 좋은 사람들이다. 어느 누가 상대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한동안은 7반의 모두가 가이우스를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바라보곤 했다. 7반 최초의 커플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언뜻언뜻 떠다녔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것도 금방이었다. 다가오는 시험과 특과 클래스만의 빡빡한 일정은 그들에게 망각 비슷한 것을 내려줬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화제는 자연스레 잦아들었다. 하지만 린은 그러지 못했다. 언젠가 가이우스가 말해 주겠지, 로 마무리 되어야 할 생각을 어째선지 린은 계속하고 있었다. 잊히지가 않아 불쑥불쑥 가이우스의 상대를 고민했다. 누군지 알려준다면 잘 되게 도와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가이우스를 쳐다보면 가끔 눈이 마주칠 때가 있었다. 딱히 용건이 있는 건 아니기에 내심 놀라는 린에게 가이우스는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다. 시선을 돌리는 대신 린을 똑바로 바라보고 소리 없이 빙긋이 웃었다. 엷게 휘어지는 눈꼬리의 곡선이, 얕지만 온화한 호를 그리는 입술의 모양이 평소에는 딱딱해 보일지 모르는 그를 부드러운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럴 때면 린은 무엇 때문에 가이우스를 본 지도 잊고선 그에 화답하듯 같이 미소를 짓곤 했다. 은밀한 신호인 마냥 짧게 주고받고는 다시 눈앞의 일에 고개를 돌렸다. 그 짧지만 간질간질한 시간이 린은 좋았다.
부츠가 다시 금속과 부딪히는 소리를 냈고 린은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철문 옆에는 경비병들이 서 있었고 린을 보자 경례의 손짓을 취했다. 의례적으로 고개를 끄덕인 린은 문 밖을 나섰다. 무기질적이 냄새로 가득 찬 곳이 순식간에 하늘로 채워진다. 어떤 곳보다 선명한 푸른색 하늘에서 린은 풀잎 냄새가 가득한 바람을 맞았다. 어디선가 양의 울음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북쪽으로 말고삐를 쥐고 달릴 수 있다면 바람과 여신을 숭상하고 이방인에게도 따뜻했던 가족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린은 갈 수 없었다. 그에게는 해야 할 임무가 주어졌고 그 임무는 노르드 고원의 평화로운 유랑민들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제국의 명령으로 움직이는 린과 자신의 땅을 지키려는 그들 사이에는 메우기 힘든 틈이 생겨버렸다는 것을 린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한 구석에 잠들어 있던 낡은 추억들을 떠올리는 것 정도였다. 실습으로 이곳을 찾아온 사관생도 시절의 린과 유목민의 마을에서 그들을 이끈 가이우스를.
그래서 가이우스가 좋아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말린꽃처럼 추억이 마음 한 켠에서 버석였다. 이제 향기도 남지 않을 그 생각이 문득 다른 질문을 던진다.
왜 그렇게 신경이 쓰였을까.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저 그의 옆에서 여러 여자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괜히 복잡한 마음으로 서 있기만 했었다. 그 때와 훌쩍 멀어진 시간, 아마도 그와 같은 하늘 아래 있을 지금은 알 것 같았다.
린은 가이우스를 좋아했다.
스스로 내린 결론에 아연해진 린은 곧 멋쩍게 웃었다. 이제 와서 알아차리다니 늦어도 너무 늦었다. 학원제 때 왜 가이우스를 떠올리고 그와 함께 대화를 나눴는지. 발리마르 안에 있는 자신을 향해 해준 그의 이야기를 언제까지고 기억하고 있던 것도. 몰랐던 게 바보 같이 모든 것이 맞아 떨어졌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같이 바래진 감정이 그 색을 기억하며 조금씩 움직인다. 린은 술렁이는 마음에 쓴 웃음을 지었다.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인 만큼 아쉬움도 들었다. 조금 더 빨리 눈치 챘으면 나는 너에게 고백할 수 있었을까. 네가 진실게임에서 누군가를 향해 비췄던 것처럼 나도 너에게 감정의 조각을 조심스레 보이지 않았을까.
어느새 떠나야 할 시간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발리마르를 타고 가도 아슬아슬하게 도착한단 걸 깨달은 린은 먼 하늘을 보던 고개를 내렸다. 그의 잿빛 기신은 젠더 문 앞에서 한 쪽 무릎을 꿇고 자신의 기동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충직한 모습을 향해 린은 발걸음을 뗐다.
다시 가이우스를 만나면 이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토르즈 시절, 가이우스를 좋아했었다고. 그렇게 생각하던 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과거의 감정이기엔 아주 가까웠다. 임무 루트 중에 노르드가 있는 걸 깨닫고 저도 모르게 가슴이 설렜던 건 사관생도 시절의 일이 아니다. 들려오는 7반의 소식 중에서 유독 가이우스 워젤의 이름에 위안을 얻은 것도 며칠 전의 기억이었다. 린 슈바르처는 지금도 가이우스를 좋아하고 있다.
“이렇게 눈치가 없었나...”
「무슨 일인가, 기동자여.」
“아니, 혼잣말이야. 늦게 와서 미안해. 어서 가자.”
고개를 젓고 린은 콕피트 내부로 이동했다. 발리마르가 땅에서 이륙하면서 네모난 화면은 노르드의 하늘을 한가득 비추었다. 혼자만의 진실게임을 끝낸 린은 어쩐지 멍하게 그 푸름을 바라보았다.
재상의 꼭두각시도 언젠가 그 실을 끊고 자신만의 길을 걷는 때가 올 거라는 크로스벨의 전단지의 문구가 떠올랐다. 불법 전단지를 배포한 단체는 정보국에서 추적했고 그 행방이 어떻게 됐는지 모르지만, 린은 그 바람이 지금 당장이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뒤처리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신도 제국도 정당한 걸음을 옮길 수 있을 때. 그 때가 되면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린은 사라 교관의 말도 떠올렸다. ‘생각이 있으면 연락 줘.’ 언제나 쾌활하던 그녀는 밝은 소리로 말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린의 어깨를 두들기며 했던 말은 ‘나는 7반의 리더를 믿고 있으니까!’였다. 아직 늦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가 받은 임무와 사라의 제안―유격사협회와 이 상황을 어떻게 엮을지 고민하던 린은 지금이 굉장히 즐겁다는 걸 깨닫고 소리 없이 웃었다. 그 웃음은 언젠가 토르즈에서 가이우스와 주고받았던 미소와 닮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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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성 공약 리퀘(2)로 핅님께 드린 가이린입니다.
모르시는 게임도 응원해 주시고 감사합니다 ㅠㅠ)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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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로린
* 현대 패러렐 (전생X)
* 모브 인물이 나오지만 큰 비중은 없습니다.(이름은 카이루님이 지어주셨습니다)
* 사다리타기로 [커플링: 크로린, 키워드: 마피아]이긴 한데...
* 넘 생각없이 썼습니다
이 글의 팁!
-리퀘 키워드가 마피아라는 걸 잊으면 좋다.
-원작의 캐릭터성을 잊으면 좋다.
-그냥 섬궤라는 걸 잊으면 좋다.
툭 떨어진 펜이 책상과 부딪히고 동시에 졸고 있던 크로우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후끈한 온기가 가득하다. 천장에 설치된 에어컨 겸 히터는 계절에 맞게 뜨거운 바람을 왕왕 내밀고 있으며 그 바람은 거리와 제일 멀리 떨어져 있는 맨 구석자리까지도 공평하게 온기를 전해주고 있었다. 아니 공평하지 않은 듯 히터와 제일 가까운 자리의 학생은 조끼를 벗어던지고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푼 채로 기진맥진해 있었다. 온도를 줄이고 싶겠지만 그런 의견을 내는 즉시 배부른 소리 취급을 받으며 추위와 싸우는 창가 자리 학생들의 맹비난을 받을 것이다. 크로우는 열락 같은 교실 맨 앞에 화이트보드 앞을 서성이는 교사와 그의 치명적인 자장가를 꿈결처럼 바라보다가 옆을 바라보았다. 가장 구석의 검은 머리의 학생은 아예 머리까지 책상에 처박고 자고 있었다. 이리저리 뻗친 머리와 그 밑으로 이어진 어깨는 일정하게 오르락내리락한다. 피부가 바짝바짝 들어가는 건조한 열기 속에 소년은 최적의 잠자리마냥 숙면을 즐기고 있다.
졸리다. 그 모습을 보던 크로우는 떨어트린 샤프를 내버려 둔 채 자신도 책상과 접촉을 시도한다. 책상은 무생물의 차가움 대신 어느 정도 뜨뜻한 열기로 그의 볼을 맞이했다. 곧이어 크로우도 옆 사람과 뒤지지 않는 모습으로 잠 속에 빠져들어 갔다.
뜨겁고 졸리고 평화로운 공기를 깨트린 것은 종소리였다. 아주 느릿하게 흘러가던 시간은 학교 전체를 뒤흔드는 멜로디를 시작으로 교사가 교과서를 접고 문 밖으로 자취를 감추자마자 빨리 감기를 누른 비디오 마냥 급작스럽게 흘러갔다. 쉬는 시간의 소란 속에서 눈을 뜬 크로우는 여전히 몽롱한 정신 속에서 지금이 한창 허기를 느낄 시간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그 문제를 해결해야 했고 실행했다.
“야.”
크로우의 목소리는 지금도 책상에 고개를 뉘이고 자고 있는 소년에게 향했지만 그의 주변의 소음은 금세 잦아들었다.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고 있었기 때문에.
“미친, 작작 처자라.”
크로우의 행동은 말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용서 없이 의자를 걷어찼고 그 위에 무방비하게 자고 있던 소년은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교실 바닥을 뒹굴어야 했다.
“어... 어?”
“학교가 여관이냐? 그만 좀 자.”
크로우의 말에 교실의 많은 이들이 그의 지난 수업 태도를 바로 떠올렸지만 입에 담지는 않았다. 볼썽사납게 자빠진 소년은 부스스 몸을 털며 일어났다. 삐뚤어진 안경을 밀어올린 후에 크로우를 제대로 바라보았다. 보라색 눈동자는 완전히 잠에 깬 것 같진 않아 보였다.
“수업 끝났나 보네.”
“새끼 태평하네.”
“그럼... 나는 매점에 가야 되는구나. 오늘은 무슨 빵이 좋아?”
소년, 린의 물음에 크로우는 잠깐 고민한다. 아니 고민하는 척을 한다.
“나도 간다.”
“알았어. 잠시만 지갑 좀 챙기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넘어진 의자를 제대로 세웠다. 크로우는 그 옆에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온기와 냉기가 엉켜있는 뿌연 창문 너머 농구코트에는 아무도 있지 않았다.
린이 먼저 걸어 나갔다. 몇 발자국 앞서 교실 문을 열고는 크로우가 먼저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순종적인 모습으로 서 있는 린의,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크로우가 나가고 린 역시 나간 후 문을 닫는다. 닫힌 문 너머로 소음을 잃어버린 교실이 다시 활기를 찾는 게 언뜻 느껴진다.
얼어붙은 복도에 나와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겨울 방학이 코앞으로 다가온 학교는 학생을 내쫓기 위해 단단히 냉기를 품고 있어 복도에 있는 소수의 학생들은 종종 걸음으로 급히 화장실로 가곤 했다. 팔짱을 끼어도 영 시원치 않아 옆의 린을 끌어당겼다.
“추워.”
“핫팩 사둘까.”
크로우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고 어깨에 팔을 둘렀다. 교복 마이는 싸늘하지만 그 안에 있는 36.5도로 발열하고 있을 체온이 슬슬 옷자락을 타고 전해진다. 린은 별 저항 없이 끌어당기는 대로 얌전히 있다. 서두르는 걸음도 아닌 걸 보니 추위를 그렇게 타는 것도 아닌 듯 했다. 생각해 보면 원래 안긴 쪽이 따뜻하다. 린에게 자길 끌어안으라고 하기엔 뭔가 이상하고, 망토처럼 덮으라고 하기도 이상하여 결국 목덜미의 온기 끌어 쓰기 정도로 크로우는 만족했다.
“어.”
“!”
계단을 슬슬 내려가는 도중, 학교에서는 꽤나 이질적인 사복 차림과 딱 마주쳤다. 크로우와 같은 학년이다. 그 뿐 아니라 같은 반. 또한 크로우가 앉아있던 자리의 원 주인이기도 했다. 벌써 정학이 끝났나. 그러니까 이름이... 영 떠오르지 않는 이름을 고민할 때 상대는 그들을 눈에 띄게 경계하며 벽으로 슬슬 붙어 갔다.
“그 웃긴 걸음은 뭐냐. 안 잡아먹어.”
“이 새끼가 사람을 우습게...”
남자는 말을 다 잇는 대신 황급히 입을 다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군가 오기를 바라는 듯 했지만 텅 빈 인기척 속에 결국 포기하고 남자가 말했다.
“너 그러니까 그...”
“그 뭐? 빨리 말해. 빵셔틀 부려야 돼.”
린이 맞장구치듯 고개를 끄덕였다. 울컥하는 표정이 역력하지만 그래도 쉽사리 말을 맺지 못했다.
“그러니까 크로우 암브러스트, 넌...”
“그래, 내 이름은 크로우 암브러스트고 너랑 같은 학년에 같은 반이지. 또 뭘 기억나게 해줘야 하냐.”
“까불지 마! 네가 마피아라는 증거도 없잖아!! 결국 다 소문인걸....”
“프레드.”
아, 맞아 프레드였어. 옆에서 조용히 끼어든 목소리에 크로우는 깨달음을 얻고 고개를 끄덕였다. 린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원인제공은 둘째 치고, 둘이 싸웠는데 입원까지 한 너만 정학을 당하는 건 왜라고 생각해? 마피아든 뭐든 뭔가 압력이 학교에 있었을 것 같지 않아?”
“하! 아무 것도 아닌 새끼가 뭘 대단한 듯이 입을 놀리냐, 어엉?”
“아무 것도 아니긴 한데 줄을 잘 서지.”
감흥 없이 흘러나오는 말에 크로우가 더 질릴 정도였다. 프레드는 크로우를 한 번 쳐다보고 다시 린을 이를 가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크로우는 벌써부터 이 대화가 지겨워졌다.
“됐고, 슬슬 가야겠는데? 내일부터 마주칠 텐데 친하게 지내자고.”
“웃기지 마. 네놈이랑 같은 곳에 있을 것 같냐. 토 쏠리게.”
씹어뱉듯이 말하며 프레드는 그들을 지나쳐 가 버렸다. 그 모습을 흘끔 보다가 둘은 다시 원래의 목적지로 발을 옮겼다. 크로우가 별 생각 없이 한 마디를 던졌다.
“왜 사복이지.”
“말을 들어보면 크로우와는 같은 공기도 마시기 싫으니 그에 관한 대책을 세우러 가는 걸지도.”
보라색 눈이 살짝 접혀 웃는 모양 비슷한 걸 그렸다. 까분다 라고 말하기 전 크로우는 이곳에 둘 밖에 없다는 걸 눈치 채고 입을 닫았다.
추운 날 교실 밖을 나가야 하는 매점은 최악이다. 겨울보다 여름을 선호하는 크로우는 추위가 무엇보다 싫었다. 추울 바에야 조금 배고픈 쪽이 낫다. 그럼에도 일부러 매점까지 가는 이유는.
매점에 계신 아주머니가 불룩한 봉지를 내민다. 린은 지갑에서 돈을 꺼내 건네고 그 봉지를 받아든다. 따로 건네주신 호빵은 크로우에게 넘긴다. 그리고 위를 가리키며 린은 말했다.
“갈까.”
“쉬는 시간 5분도 안 남았는데.”
언제는 그런 걸 따졌냐는 눈빛이 돌아왔다. 크로우가 나오려는 한숨을 억지로 밀어 넣고 말했다.
“하다못해 건물 안에서라도...”
“위계질서의 계율.”
크로우는 입을 다물었다.
“보스는 아니지만 지켜줬으면 하는데.”
조용한 복도에서도 간신히 들릴만한 작은 소리로 속삭이는 린에게 크로우는 결국 항복 선언을 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프레드의 의문은 옳았다. 크로우 암브러스트는 이 도시의 패권을 장악한 마피아 조직에 속한 몸이었다. 전학 온 첫날부터 그에게 거하게 얻어맞은 프레드의 예상과 달리 크로우는 폭력을 종용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야 누구라도 그 상황에서 폭력은 나갈 거라고 본인은 회상한다. 예를 들어 조직의 보스 후계자가 빵셔틀로 부려지는 그런 상황 말이다.
린 슈바르처는 보스의 하나뿐인 자식이다. 애초에 얌전히 자신의 학교를 잘 다니고 있던 크로우가 급하게 이 학교로 전학을 오게 된 것도 귀하신 핏줄 때문이다. 크로우는 얼굴도 제대로 본 적 없는 보스의 자제 분이 이미 학교를 접수해놨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 자신이 투입된 건 적당히 그를 보좌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른 조직의 끄나풀일지 모를 개망나니의 등짝에 다짜고짜 킥을 날리면서도 흙바닥을 뒹굴고 있는 저 꼴이 정말 후계자가 맞는지 고민했다.
“괜찮으십니까, 도련-”
물론 그 고민은 넘어져 있던 게 언제였다는 듯 번개같이 일어나 그대로 복부에 주먹을 꽂는 모습에 바로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나오려던 안부의 말도 숨을 집어 삼키는 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저 같은 조직인데. 억울 가득한 항변보다 뒤에서 꿈틀거리는 이름 모를 누군가의 말이 먼저 흘러나왔다.
“뭐, 뭐야....”
발차기를 맞은 남자가 흙바닥을 버르적거리며 일어나는 걸 보자마자 보스의 하나 뿐인 후계자는 다시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아주 잠깐 눈이 마주쳤을 때 호랑이 같은 기색을 보고 크로우의 다년간 조직에서 구른 짬밥이 발동되었다. 여기서 도련님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하면 안 될 거라는 걸.
“너 이 새끼 갑자기 뭐하는 거야...”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모습을 보고 크로우는 입 안의 말을 골랐다. 그러니까..
“왜 선량한 학생을 괴롭히고 그래.”
“허?? 뭔데 넌.”
“음.. 전학생?”
그 외에 딱히 할 말은 없었다.
얼어붙은 복도는 과장된 표현이었다. 옥상에 올라서 얼굴 한가득 쏟아지는 찬바람을 맞았을 때 크로우는 진정한 얼음장을 느낄 수 있었다.
옥상 건물 벽에 기대어 앉아 봉지를 부스럭거리는 린 옆에서 크로우는 금세 차갑게 식어버린 호빵을 덜덜 떨리는 턱으로 한 입씩 먹기 시작했다. 봉지를 찢은 린도 빵을 크게 문다. 한 입 먹었는데 벌써 절반이 사라진 것 같다.
“너으 추네요.”
진동하는 턱을 간신히 억누르며 크로우가 추위를 피력하면 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공기 좋다.”
그 말이 아닌데요. 이를 가는 크로우의 기운을 느낀 건지 린은 넌지시 크로우를 바라보았고 크로우는 차기 보스의 위엄에 움찔하며 놀랐다. 하지만 그는 추위에 떠는 조직원을 챙겨줄 정도의 일말의 자비심한 푼 정도는 있는 것 같았다. 린이 무심히 내민 건 핫팩이었고 크로우는 그 은혜를 감사히 받아 자신의 손바닥만한 봉지를 열심히 흔들었다. 뜨끈하게 열이 오르는 걸 두 손으로 맞잡으며 크로우는 성냥팔이 소년의 기분을 느낀다. 빵 하나를 다 해치운 린은 봉지에서 또 다른 먹을거리를 꺼내고 있었다. 이 속도로 보아 금방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위안이 그나마 있긴 했다.
“그렇게 추워?”
“안 추운 게 더 이상합니다아.”
“많이 추우면 붙어. 조난당했을 때 필수 행동이잖아.”
우리는 조난을 당한 게 아니며, 필시 당했다고 하더라도 이건 도련님이 자초한 일이지 않냐는 항의 대신 크로우는 꿈지럭거리며 옆의 린과 바싹 붙었다.
“팔짱 껴도 됩니까?”
“안 돼. 먹는데 불편해.”
단호하게 말하며 린은 우유를 입에 털어 넣었다. 크로우는 꾸물대며 온기랑 더 밀착됐다. 호빵을 다 먹고 갈 곳 잃은 손은 주머니에 꼭꼭 넣어두었다. 다음에는 목도리까지 챙기자. 어린 조직원은 그렇게 다짐한다.
이 학교로 전학이 결정됐을 때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미래의 보스의 오른팔이 될 지도 모른다는 것? 꿈은 누구나 꿀 수 있는 법이다. 린 슈바르처가 조직에서 지정한 보스자리의 유일한 후계자라는 것과 그를 견제하려는 시도 대신 다들 그 어린 후계자 눈에 들고 싶어 하는 분위기일 때 유일한 학우라는 건 엄청난 접점이 아닌가. 김칫국은 시원했지만 현실과 꿈은 구분할 줄 아는 크로우였다. 하지만 이런 상황까지 예상한 건 아니었다.
이 학교는 별 특색 없는 일반(보다 질이 좀 떨어지는) 고등학교였고, 린 슈바르처도 그 속에서 흔히 있는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 그의 특징 중 하나라면 반에 있는 일진의 샌드백 중 하나라는 거.
왜 가만히 있냐고, 피의 보복까진 아니더라도 한 번이라도 되받아치면 저런 일은 없지 않냐는 말에 린은 대답했다. 맞고 다니는 사람이 누가 마피아 후계자라고 생각하겠어? 크로우는 그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숨길 이유는 또 무어란 말인가?
어디서든 어떻게 연기가 나는 법인지 이 학교에 어둠 속에서 도시를 휘어잡고 있는 마피아 후계자가 다니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단다. 그리고 혐의는 한동안 등교거부를 하다가 다시 복귀한 린 슈바르처에게까지 도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저 일진에게 맞기 시작하면서부터 언제 있었냐는 듯이 린의 혐의는 사라져 있었다고. 린은 그 사실에 아주 만족해했다.
학교에 좋아하는 여자가 있고, 그 여자가 마피아를 싫어할 수도 있다 라는 순정만화스러운 가정도 생각했지만 린의 시선이 5분 넘게 머문 학생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대부분 시선은 칠판, 교과서, 책상, 그리고 약속된 수면의 시간으로 떨어지기 일쑤였다.
물론 직접 물어본 적도 있다. 그걸 왜 숨기는 겁니까? 혹시 맞는 걸 좋아해요? 뒷말에 대한 응징을 내린 린은 물끄러미 크로우를 바라보았다.
‘너 조직 쪽 사람이잖아.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은데.’
그게 끝이었다. 부정했다가는 조직의 신분까지 잃을 위기여서 크로우는 잔가지 같은 몇 마디를 더 던져 보았지만 돌아오는 건 물 흐르는 듯한 무시였다.
사실 이건 가정싸움이다. 부자간의 불화라고도 할 수 있겠다.
어느 날 보스와 대판 싸운 도련님이 가출했다는 건 본가에 머무는 조직원들은 대부분 알고 있었다. 고급 목재로 만들어진 유서 깊은 가구들이 부자의 손에 유명을 달리해서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싸운 이유는 불명. 조직원들이 보스에게 은근히 물어봐도 돌아오는 건 “에잇!” 이라는 소리와 거친 콧김뿐이었다.
일주일이면 돌아올 줄 알았던 후계자님은 두 달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고 가출과 동시에 띄엄띄엄 다니던 학교도 아예 등교거부 태세로 전환했다고 한다. 그러기를 약 한 달 전, 갑자기 보스의 호출을 받은 크로우는 린이 갑자기 성실하게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는 정보를 보스의 입에서 들었다. 저 자식의 꿍꿍이를 알아오라는 보스의 명령에 전학까지 오게 됐는데... 크로우는 자기가 잘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보스를 빵셔틀(그것이 흉내일지라도)을 시키고 있다는 걸 들키면 거꾸로 매다는 정도의 형벌은 감사할 정도다.
“빵 정도는 당당히 드세요.”
“빵셔틀이 빵 먹는 거 봤어?”
“아... 그러니까 왜 그런 무리한 설정을...”
“네가 내 연막을 없앴잖아. 그 정도 대가는 치르라고.”
“도련님 그래도 이건 너무 저급한 설정이잖아요. 이런 삼류 양아치 같은 짓을 하면 조직의 위상에도 폐가...”
“탈세를 한다, 할 정도의 돈이 없다 차이 말고 다른 점 좀 말해 줄래.”
크로우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마피아 싫어하세요?”
“너라면 좋아하겠냐.”
“아니, 저 일단 마피아고...”
린은 빵 두개와 우유 한 팩을 해치우고는 봉지를 잘 여미고 있었다. 저 봉지는 크로우에게 올 것이며 그는 빵들을 잘 보관하고 있다가 하굣길에 다시 린에게 돌려주면 되었다. 옥상에서 후퇴할 수 있다는 기쁨보다 지금 이야기 흐름이 더 끊기는 게 싫어 크로우는 급히 말을 이었다.
“그럼 보스랑 절연하실 건가요?”
“하고 싶어도 못 할걸. 내가 얼마나 자세히 알고 있는데. 거기다 정통 후계자가 버젓이 살아있는데 차기 보스가 잘도 나를 내버려두겠다.”
“그럼 보스 자리를 이으실..??”
“글쎄.”
린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크로우는 여전히 앉아있는 걸로 자신의 대화 의지를 굳건히 보였다. 귀찮다는 듯이 내려다보던 린이 툭 말했다.
“생각 좀 해 보고.”
“생각은 다 해두셨으면서..!”
“왜 그렇게 생각해?”
“뭔가 생각한 게 있으니까 학교 안 나오시다가 갑자기 성실하게 나오시는 거 아니에요?”
“유급하면 꼴사납잖아.”
건성으로 답하는 말에는 본심이 하나도 안 담겨 있었다.
“춥다매, 안 가?”
“도련님은 학교 안에선 마피아 얘기 안 하잖아요.”
“누가 듣고 있을 지 어떻게 알고.”
린은 한숨과 함께 크로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따 집에서 마저 얘기하든가.”
여기서 더 끈질기게 굴다가 버려두고 갈지도 모르고, 적당한 타협에 크로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손을 마주잡았다.
보스에게 드릴 정보는 없지만 크로우에게도 수확은 있었다. 조직의 누구나가 궁금해 하지만 답을 알 수 없던 보스와 도련님의 불화의 원인 말이다. 수확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물어보니 바로 답했기 때문이다.
‘커밍아웃 했거든. 응, 나 게이야.’
정말 간단명료했다. 보스가 힘겹게 얻은, 늦둥이 아드님의 성정체성을 보스는 받아들이지 못했고 개싸움을 하고선 집을 나왔다고.
‘그래도 이해하려는 노력은 해주실 줄 알았어. 큰 맘 먹고 고백한 건데.’
성정체성에 고민하는 질풍노도 시기의 청소년처럼 린도 꽤나 고민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 뭔가 고민이 있는 듯 한 아들의 모습에 보스는 바쁜 시간을 쪼개어 대화의 장을 마련했고 그 장이 싸움의 장이 됐다는 건 당시의 조직원들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말해도 상관없어.’
크로우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조직 내 이 소문이 파다하지 않은 건 싸움의 당사자인 보스가 입을 다물고 있다는 건데 그 보스가 입을 잠그고 있는 걸 간부도 아닌 크로우가 퍼뜨렸다간 뒷감당 정도가 아닐 것이다.
대신 크로우는 정론 비슷한 걸 린에게 물어볼 수 있었다.
‘그, 십대의 일시적인 혼란이라든가-’
‘그건 성인이 되면 판가름 나겠지. 그 때 대답할 수 있는 거기도 하고.’
‘그건 그런데... 아, 그래. 저도 남자잖아요? 게이라면 막 설레고 그래야 되는 거 아니에요?’
‘나한테도 눈이란 게 있어.’
‘......’
‘오해하지 마. 내 눈은 널 취향이라고 하니까 조심하라고.’
‘억.’
그래, 이런 대화도 했었지. 크로우는 문득 드는 일련의 기억들과 현재의 상황을 연결시켰다.
아주 가까이에 있어 초점을 제대로 잡지 못하지만 시야를 한가득 메우는 건 보라색 눈동자 한 쌍. 가늘게 뜬 그 눈은 먹잇감을 노리는 것처럼 끈질기게 시야를 박아두고 있다. 키스할 때는 눈 좀 감지. 내가 감으면 되는 문젠가? 하지만 상대가 안 감는데 내가 감는 건 싫고. 당하는 것 같잖아. 아니 당하는 게 맞나?
뇌는 길게 이어지는 입맞춤에 점점 제 기능을 못하지만 손은 자신의 위에 올라탄 린의 허리를 끌어당겨 밀착을 더 요구하고 있었다. 하반신이 언뜻언뜻 비벼져서 잡아먹을 듯이 겹쳐진 입술 사이에 호흡과 타액이 넘길 새도 없이 깊어졌다. 이런 줄 듯 말 듯 하는 자극 말고 좀 더 확실한 거. 바지도 방해다. 어차피 끝까지 안 하는 거 속옷 차림으로 가벼운 페팅 안 되나요. 아 제기랄, 저는 게이가 아닙니다. 근데 꼴려 미치겠다.
그나마 멈출 수 있는 건 자신은 게이가 아니라는 바람 같은 이성과 위에서 지분대고 있으면서도 어느 정도 버티고 있는 린 때문이었다. 한참을 입 안의 혀를 서로 얽히고 젖은 입술이 몇 번이고 춥춥 거리며 서로의 접촉을 과시할 정도인데도 하반신은 벌칙 게임이라도 하는 것 마냥 애태우고 있다.
한숨과 함께 떨어져나간 입술과 동시에 얼굴이 멀어지면서 린의 얼굴이 제대로 보인다. 붉게 달아오른 볼 위로, 역시 방금의 키스를 생생히 재현하듯 붉어진 눈시울이 크로우를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더하고 싶어?”
“솔직히 말하자면... 네. 아무래도 그렇죠.”
“너, 역시 바이인 것 같은데...”
“지금까지 아니라고 부정했는데 도련님과 붙어먹는 꼴을 보니 맞는 것 같아요.”
“응, 그래 보이네. 빨리 화장실 가서 처리하고 와.”
크로우의 몸에서 느릿하게 비키며 입가를 팔등으로 문질러 닦는다. 타액으로 빛나던 입술이 언제 그랬냐는 듯 본래의 색으로 돌아가 있다. 아니 키스하기 전보다 더 붉어졌고 부풀어있다.
“너무 하십니다.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내가 어떻게 책임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아?”
“장기적인 책임은 그렇지만 당장의 책임은 충분히 질 수 있으실 것 같은데요?”
“성행위는 성인이 되고 나면서부터.”
그렇게 말하며 린은 책상에 놓았던 안경을 다시 쓰고 의자에 주저앉았다.
“나의 부적절한 놀음에 어울려 준 건 감사해. 하지만 여기까지.”
“그건 어쩔 수 없지만, 도련님이야말로 약속 지켜주셔야 합니다.”
“뭐였지-”
“왜 마피아의 계율에 말 뒤집지 않기의 계율은 없는 거죠??!”
“농담이야. 다녀오면 이야기 할게.”
크로우는 엉거주춤 일어섰다. 화장실에 가기엔 머쓱하지만 안가기도 곤란한 상황이라 결국 화장실로 향했다. 바지를 벗기 전 거대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벌써부터 느끼는 현자 타임에 크로우는 오늘도 머리를 감싸 쥐었다. 왜 매번 이렇게. 같은 사내끼리 쪽쪽대고 당연하다는 듯이 서는 거냐. 먼저 다가온 건 린 쪽인데 자기반성은 크로우가 하게 된다.
이유야 뻔했다. 하면 기분 좋고, 그 때의 린 도련님이 굉장히 귀엽게 보이니까. 그리고 자신은 그 도련님의 애인 같은 거기도 했다.
“보스 후계자의 자리는 일단 가지고 갈 거야.”
잘 들어, 라고 먼저 엄하게 말한 린의 이어진 말에 크로우는 그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일단이라뇨? 조직의 유일한 후계자로 있다가 계승식 직전에 자살 퍼포먼스라도 보일 셈?”
“아니, 그렇게 단숨에 끝내 줄 수야 없지.”
“그거 도련님 목숨인데요.”
“비장의 카드는 나중에 쓰는 거지. 그것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있으면 그걸 써야 하고.”
린 말에 크로우는 예의상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긍정적인 몸짓이 린의 말을 잇게 할 추진력이 되기를 바라면서. 다행히 린은 거기서 말을 끊지 않고 계속 이어나갔다.
“내가 가진 패를 생각하고, 내가 제일 하고 싶은 걸 생각했어. 그러니까 난 그 꼰대에게 엿을 먹이고 싶어.”
“...그렇군요.”
크로우는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직의 미래가 너무나 어둡다.
“아버지에게 엿을 먹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간단해. 아버지가 싫어하는 짓을 잔뜩 벌리는 거지. 혹은 싫어하는 것 그 자체가 되거나.”
“그러니까 게이가 되겠다는 거죠?”
“이미 훌륭한 게이가 됐잖아. 동성의 조직원과 찐한 키스를 나눌 정도의.”
“그러니까, 그건... 헉, 도련님, 설마, 모든 조직원을 게이로 만드려는...?”
“그게 될 리 없잖아.”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눈빛을 크로우에게 던진 후 린은 진지하게 말했다.
“아버지가 게이만큼이나 싫어하는 게 있지. 바로 판검사야. 사사건건 잡아먹으려 든다고 진저리를 치지. 이 둘을 조합해 봐. 게이에 검사라니 완벽하지 않아? 게이 검사가 되어 꼰대가 사랑해 마지않는 조직을 심판하는 거야.”
크로우는 아까의 눈빛을 린에게 그대로 되돌려주고 싶었다.
“검사는 아무나 되나요.”
“나 같은 고등학생이 법대에 들어가면 되는 거지.”
“설마 법대 들어가기 어려운 거 모르시는 거 아니죠? 당장 이번 기말고사 자신 있어요?”
“음, 이번 건 완전 무리. 수업 빠진 게 너무 컸어. 다음 학기부터 만회하려고.”
“그런 주제에 잘도...”
린은 침착하게 말했다.
“방학 때 다니려고 학원도 알아봤어.”
“그걸로 될 것 같으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사로 끝나는 직업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요.”
“왜 이렇게 부정적이야? 그렇게 생각하면 될 일도 안 되겠다.”
“도련님은 언제부터 그렇게 긍정적이셨다고... 아니, 그보다 제가 특히나 비관적인 게 아니고 일반적인 기준인데요?!”
크로우가 억울하게 외쳐도 린은 들은 척도 안하고 의자를 빙글빙글 돌리며 자신의 미래 구상 계획에 바쁘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하나 남은 후계자가 조직을 파멸시키려 한다는 걸 알면 보스의 불같은 성격에 당장 머리채를 붙잡고 끌고 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인데. 이게 거짓말일수도 있지만 왠지 거짓말 같지 않다는 게 더 문제긴 했다. 차라리 더 시커먼 속셈을 가졌으면 좋겠는데.
문득 린의 의자가 멈췄다. 다리를 꼬며 린이 거만한 자세로 앉아 말했다.
“이제 내 이야기는 끝났어. 다음은 네 처리 문제.”
“예?”
“여기까지 알게 된 상대에게 아무 일 없이 넘어갈 생각은 없는데. 아니면 내게 협조를 하던가.”
“뭐, 뭘 아니 일단 협조한다는 방향으로 잡아줘요. 어떻게 협조하라는 겁니까?”
“일단 아버지에게 내 계획을 알려 나를 방해하지 않는 것.”
크로우는 속으로 찔끔했다.
“다음은 물심양면으로 내 입시를 돕는 것.”
“그게 뭐예요... 도시락이라도 싸다드려요?”
“그것도 괜찮은데, 학원 같이 다니면서 내가 졸거나 하면 깨워줘. 필기도 하면 더 좋고.”
“헐, 전 공부 싫어요. 학원은 더 싫고..!”
“가서 숨만 쉬어도 되니까 거들어. 그러면 마지막은... 역시 맹세인가.”
“...맹세요?”
“응. 마피아에게 목숨보다 무거운 거잖아.”
그렇게 말하는 당사자가 마피아 파괴를 선언했단 걸 크로우는 알지만 굳이 그 점을 지적하진 않았다. 대신 내밀어진 한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린이 말했다.
“내게 협조할 거라면 너의 명예를 걸고 맹세해. 절대적인 내 편이 될 거라는 신뢰를 보여, 크로우 암브러스트.”
묵직한 말인만큼 린은 잠깐이지만 나름의 생각할 시간을 크로우에게 주려고 했다. 하지만 크로우는 린을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내밀어진 손을 조심스레 한 손으로 받쳐 들어올린다. 린과 시선이 맞닿는다. 안경 너머로 무표정한 눈동자를 한동안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손등에 고개를 숙인다. 맹세의 키스를 떨어트리기 전 크로우는 손목을 힘주어 끌어당겼다. 얼결에 끌려나온 린에게 그대로 입을 맞췄다. 콧등에 있는 안경테가 살짝 부딪히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아까와 다르게 꾹 누르기만 한 입술은 금방 떨어졌다.
“아 이쪽이 더 확실하지 않을까 해서.”
장난스럽게 이어진 말에 린은 입술을 매만지며 잠시 크로우를 노려보긴 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곰곰이 자신의 계획을 정리하는가 싶더니 선언하듯이 말했다.
“앞으로 바빠질 거야.”
“예, 입시로 말이죠...”
크로우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내일 등교를 하면 크로우는 린이라는 빵셔틀을 끌고 다니는 학교의 고독한 일진으로 지내다가 하교를 하면 본래의 역할로 돌아와 린과 학원을 다녀왔다가 야식을 먹고 잠드는...
이거 정말 잘못된 길의 선택이 아닐까 하고 조직의 꿈나무 크로우는 잠시 자기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앞으로 인생의 행보가 달린 문제인데 너무 성급하지 않았냐 하는.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저것도 그렇게 나쁜 삶은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저런 생활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미지수인 것이 흠이라면 흠이지만.
린에게 이러니저러니 투덜거리긴 하지만 그것뿐이다. 마피아가 키스로 행하는 맹세는 절대적이고 마피아 조직원인 크로우 역시 어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린 후계자의 삐뚤어진 반역과 함께 하기로 한 이상 이것이 희극인지 비극인지는 특등석에서 결말을 보자고 크로우는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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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생각하는 마피아: 담배 하나를 물면 여러 손이 확 튀어나와 불을 붙여주는 간지슈트남들의 총알 빵야빵야 느와르
내가 쓴 마피아: 리본으로 마피아 배운 새끼
마피아 키워드 넣으신 클립님께 면목이 없읍니다...
좀 다른 린을 쓰려고.. 마계황자 린을 생각하면서 썼는데 걍 캐붕이더라구요.
언젠가 저도 간지물을 쓸 수 있지 않을까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크로린 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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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문을 나서니 안과 대비되는 싸늘한 공기가 뺨을 스쳤다. 린은 문 앞에 서서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바깥의 풍경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정갈하게 심어져 있는 나무에 걸려 있는 것은 거의 없어 앙상한 가지가 도드라졌다. 붉게 물들었던 나뭇잎은 바싹 말라 나무 밑동에 뒹굴어 청소부의 허리를 피게 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일련의 풍경을 멍하니 보던 린은 센서 때문에 닫히지 않는 문을 뒤늦게 깨닫고 옆으로 비켜섰다. 문이 닫히면서 차가운 공기에 완전히 감싸였다. 유리문 너머로는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과 그 옆을 지나치는 흰 옷의 간호사가 지나다닌다. 문득 린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차라리 병원 생활을 계속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퇴원을 축하한다는 인사는 린에게 축하로 다가오지 못했다.
몇 번이나 읽었던 종이를 펴서 다시 읽는다. 딱딱한 행정구로 이루어진 주소는 생소했고, 그럴 배려한 듯이 주소 밑에는 이 근처 정류장에서 주소로 통하는 버스들의 번호가 적혀 있었다.
린은 한숨과 함께 다리를 움직였다. 이곳은 병원일 뿐 누구의 집도 될 수 없었다. 그것이 다리를 못 쓰게 된 사람이든, 몸에 종양이 생겨난 사람이든, 기억을 잃은 사람이든.
린은 후두부 강타로 인한 기억 상실증이란 병명으로 입원했고 막 퇴원한 참이었다. 경찰의 말로는 싸움에 휘말렸다고 한다. 시비가 붙은 사람들 사이에서 중재를 하다가 밀려 부딪혔는데 하필 부딪힌 부분이 머리였다고. 싸움을 한 당사자들은 린이 쓰러지는 걸 보고 모두 도망쳤다고 한다. 꼬박 하루를 침대에서 보내고 의식을 회복한 후엔 이틀간 입원 치료 후 퇴원이 매끄럽게 이어졌다.
오지랖 넓기도 하지. 린은 스스로에게 조소했다. 그렇게 그에게 남은 건 범인을 잡으면 연락 주겠다는 경찰의 한 마디와 삼일 간 입원비, 그리고 텅 빈 기억뿐이었다.
자신의 근본이 송두리 째 사라진 린 슈바르처라는 사람은 지금 사람이 얼마 없는 버스에 몸을 싣고 흔들리는 차창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그는 줄곧 자신이 누군지 생각해내려 애썼다. 드라이아이스가 가득 담긴 깊은 상자처럼 손을 휘저어도 잡히는 건 형체 없는 희뿌연 안개뿐이다. 버스에 타기, 교통 카드를 꺼내어 찍기, 좌석에 앉기, 옆으로 지나가는 자동차 이름 같은 건 다 기억하면서도 의자에 숨 쉬고 있는 자신에 대한 건 기억나지 않는다. 린 슈바르처라는 이름도 낯설다. 어떻게든 돌려서 기억하려고 해도 헛수고라는 걸 깨닫고 린은 한숨과 함께 창가에 머리를 기댔다. “몸의 충격을 조심하세요, 특히 머리.” 의사의 충고가 떠올라 얼마가지 않아 금방 머리를 뗐지만.
정류장에 내렸을 때도 린은 그 풍경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이국의 땅에 내려선 여행자 마냥 낯선 땅을 더듬더듬 길을 물어가며 린은 귀로 같지 않은 귀로를 재촉한다. 갈색 벽돌이 빼곡하게 박혀 있는 건물 앞에 도착하고 린은 한참을 그 낡은 건물을 바라보았다. 주저주저하며 건물로 들어섰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수위의 낯선 눈초리는 린을 보자 곧 무덤덤하게 바뀌었다. 린은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손잡이를 돌리고도 힘을 더 주어 당겨야 열리는 문은 거슬리는 소리와 함께 출입을 허가했다. 일광은 잘 드는지 닫힌 꼭 닫힌 창문 사이로 오후의 햇빛이 넉넉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남의 집에 들어오는 것 같은 기분이 가시지 않지만 문을 닫고 잠그기도 잊지 않았다.
조용한 공간에서 린은 린 슈바르처 떠올리기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 시도는 두통이 심해지면서 울렁증까지 일어날 때까지 계속 됐다. 결국 린은 구석에 잘 개켜져 있는 요를 펴서 그곳에 벌렁 드러누웠다. 해소되지 않은 갑갑함이 계속 됐다.
의사는 여유를 가지라고 했다. 머리에는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으니 크게 걱정할 필요 없으며, 두통이나 구역질 같은 증상이 일어나면 약을 먹어보고 지속되면 당장 병원으로. 의사가 일러준 매뉴얼에 따라 린은 받아온 약을 꺼냈다. 작은 냉장고를 열어보니 생수가 있었다. 그 외에 거의 없다시피 한 그 공간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린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또 다른 막막함을 느끼며 문을 닫고 물과 함께 약을 삼켰다. 약보다 당장 목구멍을 넘기는 차가운 물 때문에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크게 몰려오는 허한 감각에 린은 쓰러지듯 요에 누웠다. 중요한 것을 상실했다는 건 몸이 더 잘 알고 있는지 꾸역꾸역 졸음이라는 해결책을 가지고 온다. 어쩌면 약에 수면 성분이 들어있을지도 모르고. 린은 수마가 가득 올라탄 눈꺼풀을 무겁게 들어 올리다가 그대로 잠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린은 주황 불빛에 휩싸여 있었다. 창 밖에 바로 서 있는 가로등의 불빛이 방 안을 훤히 비추는 인공적인 조명 속에서 린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혹시 무언가 기억해 내지 않았을까 하며 꿈속의 그는 여전히 새까만 암흑 속에 있었다는 결론에 다다르고는 아쉬움 속에 몸을 일으켰다.
어쨌든 기억을 한시라도 빨리 찾는 게 급선무였다. 미리 사왔던 먹거리로 허기를 채우고 린은 실마리가 될지 모르는 소지품을 점검하기로 했다. 이곳 건물, 고시원에서 기본으로 제공되는 것 같은 서랍을 열어보지만 하나같이 텅 비어있다. 책장도 역시 서랍과 마찬가지여서 자잘한 먼지만이 뭉쳐져 있었다. 책상을 전혀 안 쓰나. 린은 문득 책상 옆에 있는 상자들을 발견했다. 상자 속에는 빈틈없이 책들이 들어차 있었고 현대경제학원론, 미시경제학, 조직행동론, 재무학원론이라는 글씨들이 무겁게 표지에 박힌 채로 린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몇 권 들쳐보던 린은 그 중에 책 하나를 꺼내들었다. 가볍게 훑어보면 형광펜과 볼펜의 깨알 같은 글씨들이 군데군데 적혀져 있다. 자신이 사용하던 교재들인 듯 했다. 낯선 지식의 향연에서 린은 그간 자신이 쌓아왔을 학업의 모든 것도 같이 잃었음을 깨달았다. 더 큰 상실감 속에서 이득은 없었다. 한 가지 얻은 거라곤 의문 하나뿐이다. 왜 책장을 두고 이렇게 상자에 책을 담아뒀는가.
공부에 뜻을 접은 걸까. 린은 고민해 보지만 지금껏 자신에게 품어왔던 수많은 의문처럼 역시 풀리지 않았다. 빈 책상 중 유일하게 무게를 가지고 존재하는 노트북은 린 슈바르처라는 사용자 이름 밑의 네모난 암호 칸에 막혀 살펴볼 수도 없었다.
자신의 확실한 흔적은 가방에 들어있던 스케줄러에 남아 있었다. 월별로 기입된 종이에서 린은 일정하게 적혀진 ‘알바’라는 글자를 발견했다. 그 글자가 당장 이번 주의 주말이라고 써 있는 걸 발견한 린은 낭패하며 몇 번이나 그걸 내려다보았다.
아르바이트 장소는 지난달의 기록들을 헤집어 알아냈다. 면접일과 장소가 적혀 있고 그 이후로 일정하게 아르바이트와 시간이 적혀있는 걸 보아하니 그가 하고 있던 아르바이트가 확실한 듯 했다. 그나마 이렇게 적어두던 습관이 있는 게 정말 다행이었다.
‘다음 주 일요일이면... 그 전에 말해두는 게 좋겠지.’
요령이 없어도 되는 단순한 일이 아닌 이상 기억을 잃은 린이 가봤자 방해가 될 것은 뻔했다. 내일 찾아가서 직접 사정을 설명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며 린은 한숨과 함께 스케줄러를 가방에 넣었다. 문득 보이는 작은 물건에 린은 그것을 꺼냈다. 린은 우울해진 마음으로 그것을 멀거니 보다가 도로 넣어버렸다.
그건 린이 의식을 회복하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울린 적이 없는 린 슈바르처의 핸드폰이었다.
다음 날 역시 물어물어 찾아간 아르바이트 장소는 번화가에 있는 꽤나 커다란 패스트푸드점이었다. 하교 시간대였는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주로 보였지만 아직은 그리 바빠 보이지 않았다.
린은 깨끗하게 잘 닦인 창 너머로 프론트 쪽을 살피며 잠시 고민했다. 자신의 상황을 어디까지 설명해야 할지, 그걸 누구에게 말해야 할지 망설일 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뒤를 돌아보니 패스트푸드점의 복장을 입고 있는 청년이 린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직 주말도 아닌데 어쩐 일이에요?”
“아, 그게...”
린은 아무리 봐도 기억에 없는 그 얼굴을 보고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날 알고 있는 거 맞지?”
“엥,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당연히 알죠...”
“사실은... 내가 기억을 잃었거든. 지금 내가 누군지도 제대로 기억을 못해서.”
린은 간단하게 자신의 부상을 설명했다. 경위는 그냥 사고를 당했다 정도로 얼버무렸다. 입을 헤 벌린 채로 듣던 알바생이 감탄하며 말했다.
“그런 거 드라마에나 있는 줄 알았어요. 진짜 아무 것도 기억 안나요?”
“응. 컴퓨터 비밀번호도 기억이 안 나서 좀 곤란한 상황이야.”
“진짜 신기하네요. 그럼 주말 알바는 무리겠네요. 어, 그런데 알바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스케줄러에 써 있어서.”
“아하.”
남자는 그렇게 말하곤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점장님에게는 제가 말해 둘게요. 어차피 형 이번 달까지기도 하고.”
“아, 그랬구나. 그래주면 고마워.”
그럼. 고개를 가볍게 숙이고 고개를 들면 알바생은 어쩐지 석연찮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도 같은데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다. 그대로 뒤돌기도 애매해 린은 어색하게 시선을 마주했다. 알바생은 입을 끔뻑이다가 머리를 박박 긁으며 말했다.
“아 이거 오지랖일지도 모르는데. 그냥 말 할게요. 형 기억 잃은 거 잘 된 걸 수도 있어요.”
예상외의 말에 린은 자기보다 한 뼘 큰 알바생을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청년의 말은 계속 됐다.
“솔직히 나 같으면 그렇게 안 살아요. 그게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 같기도 한다는데 잘 모르겠고요. 대놓고 돌 던지고 하는 건 아닌데 좋게 보이는 것도 아니거든요. 좀 역겹기도 하고. 아니 형이 역겹다는 건 아닌데, 아오 씨. 이런 말하고 믿어줄지 모르겠지만 저 형이랑 꽤 친했거든요? 형이 가족한테 연 끊기고 힘들어 하는 것도 보고 그랬어요. 여튼 형이랑 이게 마지막이라니까 하는 말이고요. 그냥 기억 찾지 말고 편하게 사세요. 그게 나을 거예요.”
린은 지금 상황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린 슈바르처는 대체 어떻게 살아왔기에 저런 소리를 듣는 건가? 청년은 악의를 가지고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껄끄러워하는 건 분명했다. 미안,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렇게 말하려 했으나 목구멍은 아무 소리도 뱉어내지 못했다. 다만 린은 딱딱하게 굳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였는지 잘 모르겠다. 청년은 린에게 고개를 숙이고 다시 가게로 들어갔다.
린은 한참을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얼마가 지나지 않진 모르지만 린은 어느새 집을 향해 걷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여전히 낯선 공간이지만 어디든 돌아갈 곳이 필요했다. 몸에 익은 감각이란 게 있는지 다행히 몸은 별로 헤매지 않고 그를 고시원 건물로 데려갔다.
문을 닫고 답답한 공기와 마주했을 때 린은 자신이 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눈을 깜박이자 더 많은 눈물들이 볼을 타고 후두둑 쏟아졌다. 화가 났다. 지금 린이 느끼고 있는 건 명백한 분노였다. 갑작스런 폭언, 그것도 자신과 친했다고 주장한 이름도 모르는 어느 청년의 말은 무방비하게 있던 린에게 던져진 돌 같았다. 언어의 모습을 한 폭력이었다. 어느샌가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거친 숨과 함께 그 때 터져 나오지 못한 감정이 눈물과 함께 폭발했다.
기억을 잃은 자신보다 그 청년이 린 슈바르처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런 평가들을 린에게 내리는 게 허락되진 않을 것이다.
억울하고 답답했다. 그가 지금껏 살아온 날들이 어떤 모난 형태였는지 조차 알 수 없어서 린은 더 화가 치밀었다. 린 슈바르처를 같이 질타하고 싶어도 형체가 없는 상대에게 주먹질을 할 수 없듯이 분노는 갈 곳을 잃어 몸속에 소용돌이쳤다.
비참한 건 그 청년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친지는커녕 주변의 누구에게서도 연락이 안 오는 핸드폰은 지금도 침묵을 하고 있다. 단 한 번 울렸던 것도 (광고)로 시작하는 스팸 문자를 덤덤히 띄울 때뿐이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이의 삶이 위대할 수 있을까? 생각이 깊어질수록 암울한 가정이 심장을 조이듯이 파고들었다. 그걸 뿌리치듯 눈물을 쏟아내고 오열로 변할 목의 떨림을 악물었다.
옆방의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조용히 들리는 좁은 방 안에서 린은 입을 틀어막았던 손을 풀었다. 뜨거운 숨으로 막혀있던 곳이 해방되면서 시원해졌다. 자기혐오로 얼룩진 호흡은 진정되고 가라앉은 바다 같은 잠잠함이 조용히 철썩대고 있었다.
어쨌든 그는 린 슈바르처였다. 자신을 모르지만 이건 확실했다. 어찌됐든 그는 꿋꿋이 살아가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의 싸움을 중재할 정도의 여유도 있었고 작지만 그만의 공간도 있다. 기억이 사라졌다고 해서 그의 지난 인생까지 사라진 건 아니다. 의사가 말했던 대로 린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건 여유였다. 기억이 돌아오길 기다리자고 마음먹으며 린은 소매로 엉망이 된 얼굴을 대충이라도 닦았다. 당장 해결된 것은 없지만 어느 정도 속은 시원해졌다.
그 때였다. 이제껏 아무 소리도 내지 않던 가방 속에서 우우웅 하는 진동음이 들리고 있었다.
*
“이걸 해제하시려면 신분증이 필요해요.”
창구에 앉아있는 직원의 말에 한참을 가방을 뒤적거리던 린은 신분증을 두고 왔다는 현실을 인정해야 했다.
“신분증만 있으면 되나요?”
“네, 본인 명의 신분증만 있으면 돼요.”
린은 다음에 다시 오겠다는 말과 함께 뒤를 돌았고 골똘히 생각에 잠기다 보니 그 말을 미처 듣지 못했고 건물 밖으로 나와 있었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시선이 마주했지만 쫓아 나올 정도의 일은 아닌 듯 했다.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꺼내 다시 화면을 킨다. 깔끔한 무늬의 잠금 화면에는 3개의 알림창이 떠 있었다.
크로우 오후 4:31
짜잔~ 이게 누구실까~? 바로 린 슈바르처 군이 기대하고 기대하던 크로우 암브러스트 군입..
크로우 오후 4:32
앗 이거 말하는 거 깜박했다. 전화번호가 내 걸로 되어있는지 나한테 연락이 왔더라고. 집..
크로우 오후 4:36
추신에 또 추신. 요즘 꿈자리가 사나워서 괜히 싱숭생숭하고 신경 쓰이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린은 몇 번이고 읽고 읽은 메시지를 다시금 바라보았다. 이 크로우란 사람은 누구일까. 꽤나 친한 사이로 보인다. 허물없는 친구사이 같기도 한 그 메시지는 보기만 해도 린을 미소짓게 만들었다. 크로우 암브러스트가 적은 대로 린 슈바르처가 기대하고 기대하던 사람일지도 모른다.
가족에게 연은 끊겼지만 모든 이에게 연이 끊긴 건 아니었다. 이렇게 사소한 안부를 물을 만큼의 사람이 린에게 남아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됐다.
비밀번호를 해제하고 전문을 읽어보고 싶었지만 마음만 앞선 듯 했다. 벌써 해가 떨어져 전광판에 색색 들이 불이 붙는다. 밤이 깊어질수록 점점 화려해지는 거리 속에서 린은 내일의 일정을 생각한다. 확실히 신분증을 챙겨 와서 핸드폰 먼저... 까지 생각하던 린은 불현 듯 핸드폰을 보았다. 커다란 숫자 밑에 금요일이라 적혀 있는 글자를 확인하자마자 린은 부리나케 달려가기 시작했다. 별 거 아니지만 지금 상황에 꽤나 중요한 상식이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이다. 주말에 대리점은 열지 않는다.
방으로 돌아와 급히 신분증을 챙기고 다시 이동통신사 대리점까지 거의 쉴 새 없이 달렸지만 아쉽게도 수확은 없었다. 하얀 빛을 내던 간판은 꺼져있고 전면 유리는 어두운 건물 안을 흐릿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가게 안을 보며 린은 어깨까지 차오른 숨을 억눌러야 했다. 문득 나가기 전의 직원이 하려던 말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얼핏 들었다. 결국 핸드폰 해제는 월요일로 미뤄지게 되어버렸다. 린은 습관적으로 폰을 눌러 화면을 확인하고는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서두를 일은 아니지만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간단히 저녁을 챙겨먹고 난 뒤 린은 다시 자신의 상황을 파악하기로 했다.
현재 린은 고시원에서 자취 중이다. 음식은 도시락을 사먹기 보다는 공용 부엌에서 직접 해 먹는 것 같았다. 방 안의 소형 냉장고에는 직접 해놓은 반찬들이 소량으로 보관돼 있었다. 스케줄러를 확인한바 그날 사갈 찬거리를 적어둔 메모도 군데군데 있었으니 이건 어느 정도 확실.
고시원에서 살게 된 건 반년 째로 오래 살았다고 할 수도 아니라고 할 기간이었다. 스케줄러에 적힌 고시원 입실 날짜와 고시원 원장에게 문의 결과는 일치했다. 그리고 새로 알게 된 사실은 이번 달을 마지막으로 계약이 끝난다는 것이었다.
돈 문제는 아닌 듯 했다. 이곳엔 처음부터 6개월로 계약을 하고 들어왔고 그 후에 계약 연장을 할 거냐는 말에 갈 곳이 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린 슈바르처는 이곳을 잠시 머무를 곳으로 정했고 해당 기간이 끝나면 다른 곳으로 이동할 장소가 있는 것 같았다. 텅 빈 책장과 그 옆의 상자에 담긴 책들은 이사 준비라고 하면 아귀가 맞았다.
다만 문제라고 한다면 이번 달이 일주일 정도 밖에 안남은 점이었다. 난처하지만 그렇다고 쉽사리 계약 연장을 할 수도 없는 문제였다. 그 때까지 기억이 돌아오면 좋고 그게 안 되면 그 때 다시 고민하자고 린은 정했다. 이상하게 그렇게 막막하진 않았다. 아마 ‘크로우’에게서 연락이 오고 난 후부터일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그에게 호의어린 잡담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 지금의 린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메시지를 보낸 당사자는 모를 것이다.
내일엔 대타로 대형마트 물류 알바를 뛰기로 했다. 린의 사정을 들은 고시원의 총무가 딱하게 여겼는지 그에게 택배 상하차 알바 자리 공석이 생겼는데 머리 쓸 필요 없이 움직이는 일인데 생각 있냐며 제안했고 린은 잠시 고민하다 받아들였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고 몸을 움직여야 된다는 말에 어느 정도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내일의 일정도 있고 린은 어제보다 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약기운에 떠밀려 억지로 잠든 밤과 달리 머리에서부터 다가온 수마가 천천히 온 몸을 지배하는 느낌이었다. 나른한 감각 속에 빠져들며 린은 퇴원 이후로 푹 잠들 수 있었다.
다음 날 핸드폰에 메시지가 한 통 더 추가 되어 있었다. 보낸 이는 이번에도 크로우였다.
크로우 오전 7:28
이럴 수가 내가 보고 있는 게 진짜인가. 위에 있는 메시지에 아직도 읽음이 안 떠있어! 이거 오류..
미안합니다, 핸드폰 너머의 크로우 암브러스트님. 당신의 메시지들은 월요일에나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차곡차곡 쌓인 네 칸의 알림을 보며 린은 상대에게 닿지 않을 사과를 했다.
또 이 사람에게 기운을 얻었다. 어제 미리 준비해둔 아침이 기분 좋게 넘긴 후 린은 씩씩하게 방을 나섰다. 아르바이트 장소인 대형마트로 발걸음을 옮기며 린은 오늘 하루도 좋게 흘러갈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물론 현실이 모두 예상 그대로 흘러들어가는 건 아니었다.
바지춤에 넣어둔 핸드폰이 지잉 하고 두 번 진동했다. 무언가의 메시지. 누군가의 연락 혹은 스팸 메일. 평소라면 바로 확인했을 그 행동을 린은 실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두 팔에 얹힌 상자의 무게가 중력의 개념을 확실히 설명해 주고 있었다. 상자를 붙들고 있는 팔보다 허리가 미칠 듯이 아파왔다. 극한 직업 체험. 몇 대의 트럭이 여기에서 물건을 쏟아냈는지, 몇 십 개의 상자들이 그들의 손에 내려왔는지 세는 것을 포기했다.
린은 생각했다. 자신이 총무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 분명하다고. 아니면 절대 ‘간단히 움직이는 일’이라며 이걸 추천해 줄 리 없다. 수많은 상자들과의 싸움에서 린은 “내가 어떻게 살아왔고, 앞으로 무엇을 하면 좋은 가”와 같은 자아성찰을 했고 기억상실증은 사실 별 거 아닌 게 아닐까 하는 긍정적인 전망과 동시에 돈이 정말 급한 게 아니면 다신 이런 일을 하지 않는다는 교훈도 가지게 됐다.
일의 고됨 속에서 뇌는 한 가닥의 기적을 일으켰는지 린 슈바르처의 대학과 전공을 기억해 냈고 린은 그것들이 운동과 전혀 관련 없는 과라는 것에 놀라지 않았다. 콜택시를 불러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을 애써 누르며 린은 새로이 들어오는 트럭과의 전투를 다시 시작했다.
*
새하얀 아침 해가 한참 하늘의 정중앙으로 오르고 있을 때 시작한 일은 그 해가 서쪽의 저편으로 숨어버리고 지상의 색색 별들이 떴을 때 끝이 났다. 린은 후들거리는 전신을 애써 다잡으며 약국으로 들어갔다. 초췌한 몰골로 “파스 부탁드려요”라는 말을 하면 약사는 딱한 눈으로 “강력한 놈으로 드릴게요”라는 친절을 베풀어 주었다.
근육통은 씻고 난 후부터 슬슬 올라오기 시작했다. 벌써부터 이러면 내일은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덜컥 들어 린은 정성스럽게 파스를 온 몸에 붙였다. 시원함과 뜨거움이 격렬하게 섞이는 화끈한 통증 속에서 린은 스케줄러를 꺼내들었다. ‘oo대 경영학과’라고 적힌 씨는 린이 급하게 적어둔 것이었다. 대각선으로 날아가는 글씨를 보며 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이지만 잊어먹을 것 같진 않았다.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아 그러고 보니 그랬지 와 느낌으로 위화감 없이 들어온다. 린은 핸드폰의 화면도 바라보았다. 아르바이트 중에 온 메시지는 문자였다.
xx대학교 대학원 최종 합격자 발표. 수험번호로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admisso..
잠긴 핸드폰으로 링크를 확인하는 건 불가능했다. 수험표는 지갑 안에 들어있었다. 역시 핸드폰을 미리 풀어놨어야 했다. 잘못된 비밀번호를 연이어 누른 탓에 핸드폰은 1분간 비활성화라는 메시지를 띄우고 있다. 자신의 생일도 아니었고 방 번호도 아니었으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누른 0000도 아니었다. 과거의 자신에게 도전을 되풀이 하던 린은 어느새 핸드폰을 쥐고 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차피 월요일에 풀릴 건데. 린은 머리맡에 핸드폰을 두고 꾸물꾸물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저항할 수 없는 거대한 졸음 속에서 린은 말 그대로 머리를 뉘이자 마자 곧바로 잠들었다.
그런 그를 깨운 것은 벌레소리였다. 린은 꿈속에서 커다란 벌레를 타고 있었다. 한 쌍의 거대한 날개를 퍼덕이며 창공으로 치솟듯이 날아가는 벌레 위에서 린은 필사적으로 매달려 하소연했다. 자신은 방금 100개의 상자를 날라서 너무 힘이 든다, 조금만 천천히 움직여 달라고. 하지만 벌레는 몸을 진동시키며 더 세차게 날아갔고 린은 떨어지지 않게 벌레를 힘주어 잡았다. 조금 후, 린은 자신이 힘주어 붙잡고 있는 건 베개였고 우웅 우웅 떨리는 건 벌레의 몸소리가 아닌 핸드폰의 진동이라는 걸 깨달았다. 비몽사몽인 채로 린은 전화를 받고 말했다.
“여보세요...”
「린?! 살아있어?? 목소리가 왜 그래?」
손 안에 잡히는 기계 속에서 우다다 쏟아지는 말들은 아직 잠에서 덜 깬 린이 이해하기 어려웠고 너무 빨랐다. 린은 무심결에 대답했다.
“크로우..?”
「그래, 오랜만이지? 룰 깬 건 봐주라. 비상사태인줄 알았다고.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됐어?」
린은 생각했다. 깊은 생각까지 불가능한 정신은 거의 본능에 가까운 답을 끌어내고 있었다.
“핸드폰이 고장 났어.”
「허 고장?」
“응. 월요일에 고치려고..”
린은 크로우에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일련에 있었던 일들은 그가 돌아와서 해도 늦지 않는다. 돌아와서? 린은 잠깐 이상한 점을 깨달았지만 잠의 장막이 생각의 앞길을 살며시 가려버렸다. 메신저 확인은 불가능하지만 통화는 되는 거냐는 질문에 하품 섞인 대답을 하면서 린은 현실과 꿈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한다.
「앗, 그러고 보니 지금 자고 있을 시간인가?」
린은 빨리도 깨닫는다고 생각했다.
「너무 정신이 없어서 깜박했네. 미안. 얼른 자고... 그럼 합격한지는 아직 모르는 거지?」
“..합격?”
「아, 아니다. 나중에 너 일어나고 나서 다시 얘기해. 엄청 졸려보인다고. 폰 고치면 바로 연락하고.」
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화 너머의 상대에게 보일 리 없건만 크로우는 눈앞에 있는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래그래, 잘 자고. 얼마 안 남았으니까 다시 볼 때까지 몸 건강히 잘 있는 거 알지? 그리고-」
자장가처럼 도롱도롱 떨어지는 목소리에 졸음이 더 깊어졌다.
「--.」
린은 그대로 잠들었다.
아침 햇살이 오롯이 떨어지는 방에서 린은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온 몸이, 특히 등에서 허리로 이어지는 부분과 어깨가 끊어질 듯이 아팠다. 꼼짝을 할 수 없는 건 근육통 때문도 있지만 다른 것도 있었다. 린은 여전히 잠겨있는 휴대폰을 쥐고 멍하니 있었다.
크로우
부재중 전화(6)
전화는 받았다. 새벽에. 파스가 소용 있나 싶을 정도로 과격하게 울리는 근육들의 비명 속에서 린은 어젯밤의 일을 가까스로 떠올렸다. 잠결에 한 말이지만 대충 기억은 났다. 그 크로우와 대화를 자연스럽게 주고받았고 지금 자신이 처한 일도 숨겼다. 린은 그렇게 한 이유도 알고 있었다. 별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돌아오면 그 때 해도 늦지 않고. 물론 상대는 화를 낼 테지만, 지금이 크로우에게 중요한 시간인걸 아니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린은 깜짝 놀랐다. 얼굴도 모르는 크로우라는 사람의 기억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고 있었다. 물통에 떨어트린 물감이 서서히 풀리는 것처럼 가닥가닥의 기억들은 제자리를 찾아간다. 그 기억과 기억 사이에는 크로우가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크로우와 있었던 일들이 눈 내리는 것처럼 소복이 쌓여갔고 린은 어색한 방관자처럼 그걸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크로우가 누구였는지. 두통이 지긋하게 슬슬 머리를 누르고 있는 와중에 린은 잠들기 직전 크로우가 한 말이 떠올랐다.
아아, 그랬었다.
잊고 있었던 게 이상할 정도로 린은 모든 것을 기억해냈다.
그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동네로 홀로 온 것도, 모든 지인들과 연락을 끊고 이런 곳에 조용히 숨어 지낸 것도, 자신을 잘 따르던 동생에게 해버렸던 말도, 그가 배신당한 반응을 보인 것도. 모든 걸 아울러 앞으로 린 슈바르처가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계획도.
손에 잡힌 핸드폰을 보던 린은 화면을 열고 익숙하게 네 자리 숫자를 눌렀다. 화면 전체가 흔들리는, 몇 번이고 봐야했던 이펙트 대신 지금껏 숨겨왔던 바탕화면을 보여주었다. 린은 그 네 자리의 숫자가 뭘 의미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십대의 어느 날부터 시작했던 고민과 갈등과 억압의 시대에서 벗어나 벽장에서 나오기로 한 출발일이었다. 그가 이 방을 벗어나는 날과 동시에 크로우 암브러스트와 같은 곳으로 돌아가는 날이기도 했다.
크로우와 연락용인 메신저를 누르는 대신 린은 메시지 함을 눌렀다. 매번 정리를 하는 터라 그리 많지 않은 메시지들이 있었다. 린은 그 중에서 정리 하지 않은 제일 오래된 메시지를 눌렀다. 발신지는 그의 어머니였다. 린은 그녀의 어머니가 과거의 그에게 하는 길고 긴 글자들을 보았다. 나는 내 아들인 너를 이해한다, 하지만 아버지의 입장도 이해한다, 서로가 맞춰가야 한다, 우린 가족이다... 몇 번이고 읽었던 내용들이었다. 그리고 이미 마음을 정한 일들이기도 했다. 린은 조금 새로운 마음으로 그것들을 훑고 껐다. 그리고 크로우와의 메신저를 열었다.
화면을 가득 메우는 글자들을 보며 린은 웃고 말았다. 할 말이 가득 압축되어 있는 검은 글씨를 차분히 읽으면서 린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다시금 깨달았다. 크로우가 기다렸을 답장을 하기 위해 린은 터치 패드에 손을 가져다댔고 멈칫한다. 그에게 일어난 작은 해프닝을 어떻게 알려줘야 할까. 가능하면 별 거 아니고 재밌는 일로 여겼으면 좋겠는데. 잠깐 고민하던 린은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크로우와 린에게 짧은 단절이 되었을 순간이 점차 메워져갔다.
-
크로우는 모습도 안나오지만 크로린입니다...
크로린 개짱...
아래는 크로우가 보냈던 메시지 전문인데 읽지 않으셔도 무방합니다!
↓
크로우 오후 4:31
짜잔~ 이게 누구실까~? 바로 린 슈바르처 군이 기대하고 기대하던 크로우 암브러스트 군입니다! 일정이 너무 바빠서 요즘 씻고 나면 그대로 잠들어 버려. 크로우 늦잠꾸러기 데헷-★ 은 농담! 바쁜 건 사실이야. 이러니 실감하는 게 곧 돌아갈 수 있다는 거니까. 이 바쁨이 오히려 좋기도 하다. 잘 지내고 있지?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기로 했으니까 무소식이 희소식인 거 맞지? 다음 주부터는 본격적으로 마무리 작업으로 들어갈 거야. 외국어를 하도 많이 듣다 보니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헷갈려. 얼른 돌아가고 싶다. 그리고 빨리 린 네 목소리를 듣고 싶다. 물론 얼굴도 보고 싶고. 만지면 감격해서 울지도!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는지 더디게 지나가는지 헷갈리지만 이렇게 차곡차곡 날을 지나면서 너를 보러 갈 날을 기다린다. 그 때까지 어디 아프지 말고 잘 지내야 해. 지금쯤 자고 있으려나? 내 꿈꾸고 있기를-☆
크로우 오후 4:32.
앗 이거 말하는 거 깜박했다. 전화번호가 내 걸로 되어있는지 나한테 연락이 왔더라고. 집 계약 관련해서 약관이 좀 변경된 게 있다는데 들어보니 대수롭지 않은 약관이어서 그냥 내가 처리했어. 전화번호를 네 걸로 변경했으니 다음 주쯤에 전화가 갈 수도 있어. 돌아갈 때까지 집은 잘 부타악☆
크로우 오후 4:36
추신에 또 추신. 요즘 꿈자리가 사나원서 괜히 싱숭생숭하고 신경 쓰이는데... 아무렇지 않게 그거 개꿈이야 라고 린이 단호박 해줬으면 좋겠어. 혹시 시간되면 전화 줘. 바쁘면 무리하지 않아도 되고. 사실 목소리 듣고 싶은 핑계도 있습니다요~ 그럼 진짜로 좋은 꿈!
크로우 오전 7:28
이럴 수가 내가 보고 있는 게 진짜인가. 아직도 위 메시지에 읽음이 안 떠 있어! 이거 오류 아니지? 진짜지?! 음 린 요즘 바쁜 거야? 이사 준비 때문에 바쁠 것 같긴 한데... 오늘이 그러니까 발표일 맞지? 왜 내가 더 긴장 되지. 결과 뜨면 알려줘. 어떤 결과든 말이야. 앗 그럼 나도 들어가 봐야 해서 메시지는 여기까지. 오후에 연락 꼭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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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 크로우 도련님 린
* 크로린
* 카이루님 그림에서 파생. 3차 창작..?
* 섬궤2의 치명적인 네타를 기반으로 합니다
* AU인듯 아닌듯 날조 설정
- 이럴 줄 알았다.
바닥에 처박힌 몸은 끝이란 걸 아는지 자석마냥 젖은 흙바닥에 달라붙어 일어날 생각을 못한다. 왼손에 굳게 쥐어있던 쌍인검은 아까의 경합으로 날아가 진흙창에 처박혀 있다. 딱딱한 헬멧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호흡은 가쁘다. 신원이 노출되지 않게 어둡게 가려진 실드에 투둑투둑 빗방울이 떨어져 부딪혔다. 시커멓게 꿈틀거리더니 결국은 비를 토해내는 날씨를 보며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거 참, 악역의 최후도 아니고.
축축한 흙을 짓뭉개며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서두르지 않고 신중하게 걸어오는 남자의 모습이 턱 끝에서부터 보인다. 다시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한숨 같기도 하고 체념 같기도 했다. 거뭇한 시계에 홀로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크로우는 온통 어두운 세상에서도 그 색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아주 예전에도 본 눈동자였다.
그 눈을 처음 봤을 때, 크로우는 그 눈의 주인이 어미 잃은 짐승의 새끼 같다고 생각했다. 등을 꼿꼿이 펴도 크로우의 허리도 안 되는 조그만 아이는 풀숲에 숨어 덜덜 떨리는 몸을 간신히 붙들고 있었다. 선한 웃음을 짓던 얼굴은 하얗게 질렸고 이질적인 붉은 얼룩이 꽃처럼 피어 있었다. 그 꽃은 어린 그가 단정하게 입던 마이에도, 짧은 바지에도, 주변의 땅에도, 그리고 크로우가 급히 쫓아왔던 길에도 헨젤과 그레텔의 빵조각처럼 점점이 흩뿌려져 있다. 그 붉음만큼 새빨간 눈동자와 새하얀 머리칼의 주인은 크로우를 알아보고 금세 글썽거렸다. 하지만 쉽사리 다가오지 않았다. 입은 어물대지만 크로우의 이름을 뱉지 못했고 여전히 겁에 질린 기색이었다. 두려움의 상대는 바로 자기 자신인, 린인지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았다.
‘도련님.’
아이는 주춤했다. 크로우는 허리를 숙여 그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어디 다치신 곳은.’
크로우는 웅크린 몸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당장 눈에 띄는 상처는 팔뚝에 길게 베인 것 같은 자상. 이곳저곳에 작은 생채기들이 있지만 대량의 피를 흘릴 정도의 부상은 그에게 없었다. 크로우는 뒤로 고개를 돌렸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한 손에 단도를 쥐고 널브러져있었다. 미동 없는 그의 몸 주위로 피어난 검붉은 핏물은 이미 흙이 잔뜩 집어삼켰다. 복부에 한층 짙어진 검은 흔적이 사인, 그리고 흉기는 아직도 린의 오른손에 잡혀 있는 굵은 나뭇가지. 시선이 마주치자 린은 한층 더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저 남자를 죽인 것이 자신이라는 걸 알아차리면 큰 벌이 내려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크로우는 손을 뻗어 아이를 끌어안았다.
‘무서우셨죠.’
린에게선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경직된 자세로 잘게 몸을 떨 뿐이었다.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이제 돌아가시면 됩니다.’
‘저, 사람은.’
딱딱해진 턱을 간신히 움직이며 아이가 말했다.
‘도련님을 해치러 온 사람이에요.’
‘내가...내가 했...’
‘괜찮아요. 이제 끝났어요.’
등을 쓸어주자 작은 손이 옷깃을 잡아왔다.
‘....크, 로우....’
이름을 겨우 뱉으며 린은 무너지듯 크로우에게 안겨들었다. 크게 소리 내어 울지 않지만, 긴장 속에 갇혀 있던 마음들이 아이의 눈에서 방울로 크로우의 옷깃으로 적셔 들어왔다. 응어리졌던 공포가 풀어지는 걸 느끼며 크로우는 린을 만날 때부터 줄곧 하던 생각을 한다.
-죽여야 한다.
크로우와 린이 처음 만난 곳은 으리으리한 오스본의 저택에서였다. 큰 저택에 서 있어 더 왜소해 보이는 아이는 크로우와 눈을 한 번 마주치고 금세 아래로 시선을 숙였다. 이 저택의 하나 뿐인 후계자 같지 않은 거동이다.
사실 크로우는 낙심하고 있었다. 그의 동지들이 치밀하게 만든 위조 신분이다. 그 철두철미한 오스본 재상의 집에 아무 문제없이 집사로 취업했을 정도로 완벽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집사는 집사지만 재상이 거주하고 있는 저택이 아닌 그의 집과 한참 떨어진 별저의 집사가 됐다. 재상의 집에 침투하여 그의 동선 파악 및 각종 정보 탈취라는 목적이 멀어진 것은 물론이고, 리더인 크로우의 얼굴이 노출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들인 노력과 시간에 비해 수확은 전무. 사실상 이번 위장 작전은 실패였다.
재상의 유일한 혈육이 사는 곳이라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자식을 인질 삼아 협박 비슷한 것까지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는 손끝 하나 건들기 어려운 재상 대신 그의 아들에게 복수를 감행할 수도 있다. 동지들 중엔 재상에게 자식을 잃은 자도 존재한다. 철혈에게 같은 맛을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 재상이 그에 대해 눈 하나 깜짝 하느냐는 별개의 문제로 말이다.
그런 어른들의 사정에 휘말릴 예정인 린 오스본은 권위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 주눅 들어있는 전형적인 어린 아이였다. 그 나이대의 평균 체격인데도 언제나 좁히고 있는 어깨 때문인지 더 왜소해 보였다. 말수도 많은 편이 아니고, 사람과 접촉을 많이 못해서인지 낯도 가리고, 양지보다는 어두운 그늘 속에 숨죽여 있는 타입이었다. 아이는 아이다워야 귀엽고 사랑받는다. 오스본 재상의 심중은 모르지만 그는 아들에게 언제나 엄격하게 대했다. 부하 직원에게 대하는 듯한, 짧게 끝나는 질문과 명령. 그 속에 인자한 미소나 부자 사이에 흔히 있을 법한 자연스러운 스킨십은 일절 배제돼 있었다. 어린 오스본은 그의 부친 앞에선 잔뜩 긴장하여 평소보다 어눌하고 작은 목소리, 그리고 굳어있는 몸동작으로 아버지를 대하곤 했다. 그리고 오스본은 그 태도를 언제나 마땅찮아했다.
이거 복수가 되긴 하려나. 옆에서 그 모양새들을 지켜보며 크로우는 소리 없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린 오스본은 오스본 가의 유일한 혈육이다. 그건 재상의 사람이란 소리고, 재상은 자신의 사람들은 아껴했다. 아들을 정기적으로 보러오는 것만 봐도 린 오스본은 재상의 사람이라는 테두리 안에 있었다. 그러니 어린 오스본을 죽이는 건, 재상에 대한 복수와 경고로 훌륭하게 작용할 것이다.
그렇게 크로우는 그를 죽일 기회를 누리며 작은 오스본과 함께 했다. 아이 혼자 살기엔 터무니없이 넓은 저택과 조용히 제 할 일만 하는 모노톤의 하인들과 계절마다 색이 바뀌는 숲에 둘러싸여서. 사실 말이 집사지, 보모나 다름없었다. 재정 관리는 크로우가 하나 건들 것도 없이 오스본의 본가에서 먹을 것, 잘 것, 입을 것 등등 부족함 없이 들어왔고, 어린 주인이 살고 있는 별장의 하인에게 내려오는 돈과 그 주인의 교육 역시 오스본(인지, 그의 저택에 있을 또 다른 집사일 수도 있다)이 관리했다. 크로우는 그저 어린 주인의 상태와 하인들의 태만과 필요한 자재 등등을 기록하여 정기적으로 보냈다. 그 철혈재상의 하인들인 만큼 그들은 자신의 일을 말끔히 해냈고, 퇴근 시간이 되면 빠르게 자리를 정리하는 공무원들처럼 저택을 떠나거나 자신들의 방에 들어가 버려, 해가 지면 오스본의 별저는 더 커다란 침묵 속에 휩싸였다. 벌레 소리가 시끄러울 지경의 집에서 크로우는 아롱거리는 등잔불을 들고 어린 주인의 방으로 찾아갔다. 환한 도력등의 빛보다 어스름한 불길을 좋아하는 주인 옆에서 책을 읽어주거나 과장된 모험담을 읊곤 했다. 아이는 새카만 눈을 가만히 깜박이며 낮보다 더 가까워진 거리로 크로우와 바싹 붙어 있었다. 겨울의 추위도 잊게 할 푹신한 이불 속에 몸을 감추고 빼꼼 내민 손은 크로우의 옷깃이나 손을 잡고 있었다.
린 오스본은 애정결핍이었다. 어머니는 그를 낳을 적에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정적의 위협에 맞서며 나라의 패권을 쥐는 싸움을 하고 있다. 그를 돌봐주던 유모는 비명횡사했다. 린 오스본을 감싸다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그걸 이해하기엔 아이는 어렸고, 소문은 소문처럼 슬금슬금 잦아들었다. 아이의 주위에는 그를 보호하는 장승같은 경호원들이 우뚝 서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집사인 크로우가 접근하는 건 쉬웠다. 아이는 지독히도 말이 없었지만, 젊은 집사는 살갑게 말을 붙이는 특기를 가지고 있었다. 경계가 풀리면 당연하게도 죽일 기회는 많아진다. 날카로운 쇠붙이를 품은 마음으로 아이에게 다가가 이야기를 걸고 그의 외로운 밤을 함께 했다. 시간이 깊어가 하늘만큼 검은 눈동자가 얇은 눈꺼풀에 스륵 감기고, 옷깃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풀릴 때 그 평온한 잠을 덮고 있는 앳된 얼굴을 보며 크로우는 고민한다. 지금 죽일까?
그가 매번 밤을 아무 일 없이 흘린 건 오스본에게 효과적인 공격이 되지 않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냉대하는 어린 자식이 죽는 것보다, 그가 자라 재상에게 쓸모 있고 자랑스러운 아들이 죽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이런 숨죽인 살인보다 철혈의 마음을 난자할 수 있는, 그런 충격적인 죽음이 더 좋지 않을까? 크로우의 이러한 생각에 다른 동지들도 동의했고 그의 판단을 믿어주었다. 크로우가 속한 조직은 점점 몸을 부풀리면서 때를 숨죽여 기다리고 있다. 어쩌면 어린 오스본의 죽음이 자신들이 벌일 커다란 일의 점화점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아이에 대한 동정심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건 인간이 가지고 있을 최소한의 양심 비슷한 거였다. 그 감정을 크로우는 언제든지 잘라낼 수 있었고, 필요한 순간엔 언제나 잘라냈었다.
린 오스본이 처음으로 사람을 죽인 날은 아주 고요한 밤이 찾아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를 뒤집어쓴 아이를 깨끗이 씻기고, 볕이 잘 드는 곳에 말린 잠옷으로 갈아입히고, 도란도란 흘러나오던 목소리는 들을 사람이 없어 끊기고, 눈물을 쏟아내느라 부었던 두 눈이 심신의 피로에 쫓기어 잠에 젖어들고. 일렁이는 주홍색 불빛을 보며 크로우는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잠든 숨소리는 아주 가늘다. 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모든 것이 고요하다. 적막하다.
보여주기식 죽음을 고를 때가 아니다. 상황은 급변했다. 린 오스본이 보여준 힘은, 검도 제대로 배우지 않은 작은 아이가 암살자를 죽이는 능력 정도가 아니다. 크로우의 동지 중에는 그 힘을 가진 사람이 있었고, 그 힘을 발현했을 때 인간의 기준을 넘어선 괴물이 되는 것 역시 봤었다. 린은 아직 어리지만 분명 나이를 먹으면서 그 힘을 습득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 것이다. 크로우는 물론, 훈련된 군인들이 덤벼들어도 감당 못할 무력이 탄생한다. 재상에겐 뛰어난 정치 수완과 그의 말에 철저히 따르는 철도헌병대만으로도 버거운데 귀신의 힘을 가진 린 오스본까지 추가되면 전황은 그들에게 극도로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지금 죽일까, 가 아니고 지금 죽여야 한다. 제대로 힘을 쓰기 전에. 그러니까 지금 바로.
크로우는 손을 뻗었다. 잠든 아이의 목 정도는 한 손으로도 쉽게 조를 수 있다. 손끝에 부드러운 살덩이가 닿아왔다. 조금만 힘을 줘도 뭉근하게 눌리는 살덩이에선 우유내가 나는 것 같았다. 린은 우유를 좋아했다. 얼른 먹고 크로우처럼 키가 크고 싶다고 했다. 얼른 어른이 되고 싶다고 했다. 다 비운 우유 컵을 들고 크로우에게 말했었다.
그러고 보면 요즘 린은 잘 웃었다. 아이가 처음 웃는 걸 보고 내심 놀란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그 얼굴이 익숙해져서 호랑이 같은 철혈을 앞에 두고 우연히 눈이 마주치면 공범 같이 씨익 웃는 미소를 서로 짓곤 했다. 하이파이브도 자주 했다. 별거 아닌 일로도 둘이 해냈다면서 손바닥을 마주친다. 뒷산에 있는 밤을 실컷 땄을 때라든지, 계단 난간 슬라이딩을 성공했을 때라든지, 저번 달보다 키가 몇 센치 더 컸을 때라든지. 아직은 덜 자랐지만, 쑥쑥 크고 있을 작은 손과 맞부딪히는 일이 기분 좋다는 걸 알아버렸다. 겨울이 녹고 봄이 오는 것 같은 변화를 보고 있었다는 걸 크로우는 몰랐다. 어느새 따뜻해진 바람처럼, 자연스럽게 한 손에 감겨오는 아이의 따끈한 손과 낮에도, 밤에도 같은 시간 속에 함께 있었다. 재상과 닮지 않은, 어머니의 유전자에 감사하며 어느새 아이와 재상을 떨어트려 재고 있었다. 그와 함께 했던 날들은 크로우가 알고 있는 어떤 보석들보다 반짝거리고 예쁜 빛을 품고 있었다.
손가락이 힘을 줘 목숨 줄을 쥐어뜯는 대신 무엇보다 사랑스럽다는 듯이 통통한 볼을 가만가만 쓰다듬는 걸 깨달았을 때 크로우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언제부턴가 그 안에서 아이는 ‘어린 오스본’에서, ‘린’으로 변해 있었다.
-지금 당장 오스본의 자식을 죽여야 한다.
-...린은 죽일 수 없다.
자업자득. 못 당하겠다, 귀신의 힘. 그래도 이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후회인지 자조인지 모를 감정이 뒤엉켰을 때, 어두운 세상에서 흰 머리칼과 붉은 눈을 가진 린 오스본의 얼굴이 분명하게 잡히자 크로우의 마음은 놀랍도록 간결해졌다.
『죽여라.』
변조된 목소리가 헬멧에서 흘러나왔다. 대답은 없지만 칼끝은 여전히 흔들림 없이 크로우를 겨누고 있었다.
린을 죽이지 않은 것에 후회는 없다. 그러니 지금의 마지막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자신의 선택이고, 누군가에게 빈축을 살지언정 스스로에게는 떳떳하다. 만약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크로우는 린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의 목숨이 자신에게 칼끝을 돌릴 거라는 걸 알아도.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많이 컸다. 아이가 어른이 되기 전에 크로우는 린의 곁에서 떠났다. 린에게 귀신의 힘이 있다는걸 오스본에게 알려지기 직전, 크로우는 집사복 같은 자신의 손길이 닿아 있는 물건들을 모두 소각로에 던져버리고 그의 얼마 없는 짐과 함께 작은 주인의 저택을 조용히 뒤로 했다. 그 이후로는 바쁜 나날이었다. 그가 속한 조직, 제국해방전선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고 크로우는 전면에 서서 테러 활동을 주도했다. 얼핏얼핏 들리는 린의 소식을 들으며,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작았던 어린 아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진,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서 있는 린은 역시나 그의 아비를 위해 귀신의 힘을 두르고 싸웠고, 그는 아이언브리드 만큼이나 골치 썩이는 존재였다.
몇 번이나 부딪히고, 부딪히고, 서로 칼을 맞대고.
성장한 제자와 싸우는 게 이런 기분일까.
가끔 향수에 젖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보일 리 없는 헬멧 속에서 혼자 반가운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까지다.
다른 동지들은 무사히 후퇴했겠지. 린을 잡아두는 것이 크로우의 목표였다. 그 후에 무사히 빠져나왔으면 퍼펙트였겠지만, 계획대로 순조롭게 흘러가주지 않다는 건 일찍이 알고 있다. 인정사정없이 덤비는 저 태세를, 이제 완성에 가까운 귀신의 힘을 간신히 받아내기만 할 뿐이었다.
제국과 혁명전선의 싸움은 막바지에 치닫고 있었다. 그 결과를 마지막까지 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크로우는 여기까지인 듯 했다.
이제 칼끝은 목에 닿아 있었다. 크로우는 그 칼에서 시선을 돌려 하늘을 보고, 린을 보았다. 비에 젖은 머리칼 밑으로 음울하게 젖은 눈이 물끄러미 크로우에게 향해 있었다. 그 얼굴을 마주 보며 크로우는 돌아오지 않을 미소를 지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주마등도 지나가지 않았다. 크로우는 눈을 감았다. 목 끝에 칼의 기운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잘 비려진 칼이 피부 끝을 찢을 때, 그와 동시에 덜걱이는 느낌이 났다. 목을 파고들듯이 가까이 다가온 칼날과 동시에 다른 손이 헬멧을 벗기려하고 있었다. 곧이어 허파까지 시릴 것 같은 싸늘한 공기와 차가운 빗물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밝아진 시야 바로 앞에 린 오스본이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여어, 도련님.”
묵묵부답인 게 답답해 건넨 말이긴 하지만 괜히 했다고 후회할 정도로 목소리는 형편없었다. 오랜만이다, 만나서 반갑다. 이런 안부를 물을 상황도 아니고. 어두운 실드 너머가 아닌, 훨씬 선명하게 보이는 린을 보며 크로우는 어정쩡하게 웃었다.
“이제 끝을 내야지. 포로로 만들 생각은 하지 마라, 죽을 만큼 저항할 거니까. 그러니 지금 이렇게 얌전히 있을 때 어서 죽여.”
집사 시절엔 도련님에게 집사가 드리는 공손한 존댓말 대신, 친우에게나 건넬 만큼 거리낌 없는 반말이 흘렀다. 목에 닿아있는 칼날이 파르르 떨렸다.
“.... .... ...해.”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크게 떠진 동공 대신 다시 가라앉은 붉은색 눈이 크로우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변성기를 지나 이제 성인으로 접어들고 있을 남자의 목소리가 말했다.
“크로우가 떠나고.”
더 이상 아이가 아닌 청년은 그렇게 말했다.
“아버지가 내 힘을 아시고. 그리고 많은 게 변했어.”
“....”
“내가 사는 곳도, 하는 일도, 나를 보는 시선도 모두 달라졌어. 그럴 수밖에. 그 전까진 내가 괴물인 걸 몰랐으니까.”
린의 목소리는 잠잠했다. 하지만 그 잠잠함은 심해 비슷한 것이었다. 안에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깊은 바다의 수면 같이 린은 고요했다. 크로우와 헤어지고 나서 그가 어떤 곳에서 살아남았고, 어떤 것들을 끌어안고 가라앉는 바다가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눈동자에서는 그의 속 마음의 잔물결만 간신히 볼 뿐이다. 솔직한 아이의 눈동자 대신 속을 알 수 없는 눈이 문득 반짝였다.
“크로우 뿐이야.”
쏟아지는 비속에서 크로우는 멀거니 린을 바라보았다.
“내가 괴물인걸 알아도 날 괴물 취급하지 않은 건 크로우 뿐이야.”
목을 엷게 스친 칼이 멀어져 간다. 린이 뽑아든 검이 진창을 뒹군다. 아이의, 아니 청년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비에 잔뜩 젖어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린이 말했다.
“내가 어떻게 크로우를 죽일 수 있겠어?... 나는 못해.”
크로우는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점점 거세지는 빗줄기에서 린의 얼굴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어렸을 적에 자주 그랬던 것처럼, 양팔을 벌리면 크로우의 품속으로 뛰어든 그 때처럼, 린은 천천히 크로우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얼굴 대신 잔뜩 젖은 등만 보였다. 주춤거리며 크로우는 린의 등을 끌어안았다. 덜덜 떨리는 몸이, 처음 사람을 죽였던 어린 그와 같았다. 손바닥만 한 작은 날붙이로 단숨에 목숨을 끊을 수 있다는 것도 그러했다. 지금의 린은 크로우의 완전한 지배권 아래에 있었다.
-죽여야 한다.
다시 크로우 안의 누군가가 속삭였다. 크로우는 코웃음 쳤다. 미쳤냐? 내가 왜?
"도련님, 아니 린."
젖은 검은 머릿결을 쓸어 올려주며 크로우가 귓가에 속삭였다.
“나를 죽이지 않으면 아버지 곁에 못 돌아가.”
린은 흠칫 놀라며 등을 굳혔다. 하지만 이내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렸다.
“그래도 할 수 없어.”
“재상에게, 아버지에게 버림받을 텐데.”
“....”
크로우는 신중하게 린의 반응을 살폈다. 추위 때문일까, 크로우의 말 때문일까 떨림이 더 심해진 것 같았다. 이유가 어느 쪽이든 크로우가 바라는 반응이었다.
“나는 더 이상 집사가 아니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묻혀 있던 감정들이 다시 꿈틀거린다. 부성인지, 살의인지, 복수인지, 애정인지, 증오인지, 사랑인지. 린과 함께하면 언제나 나타나던, 린 오스본에 대해 정확히 그을 수 없던 모순된 감정이 다시 목구멍에서 치솟고 있었다.
"나랑 같이 갈래?"
빗소리가 귓가를 두들긴다. 침묵이 이어지지만 크로우는 이상하게 걱정하지 않았다. 대답은 정해져 있다. 귀신의 힘이 풀려 다시 짙은 색을 지닌 눈동자가 적의 없이 크로우를 바라보고 있다. 머리를 매만지는 손에 머뭇머뭇 대다가 딱 그의 머리만한 무게가 기대어 왔다.
지금 린 오스본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너무나 명백했다.
-
요 글은 카이루님이 그려주셨던 크로린 연성을 바탕으로 합니다.
여기에서 확인 가능! https://twitter.com/kimguul/status/634044744390176768
근데 지금 보니 푸신 썰이랑도 좀 다르고 ㅋㅋㅋㅋㅋ 그러네욬ㅋㅋㅋ (민망
연성 봤을 때 넘 좋아서 허락 받고 썼어요. 헤헤
네 그렇습니다. 크로린은 개짱... 크로린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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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린 (to. 카이루)
* 가이린
* 섬궤2 엔딩 요소 포함. 원작 날조 설정
* 오메가버스
녹색 풀 내음이 진하게 올라오는 평원을 자박거리는 발소리가 오간다. 짐이 한가득 실린 마차와 그 선두에서 촉촉한 땅을 가끔 두들기며 투레질하는 말들, 그 옆을 바삐 오가는 사람들. 노르드의 한적한 촌락은 여느 때와 다른 분주함이 흐르고 있었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올려다보던 가이우스는 말을 타고 달려오는 동생-토마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색하게 말 위를 오르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 샌가 말을 타는 품새가 제법 틀이 잡혀 있었다.
“형아, 준비 다 끝났어. 이제 올라가기만 하면 돼.”
토마는 익숙하게 말을 멈추고 폴짝 말에서 뛰어내렸다.
“장로님 일행은 다 올라가셨다. 이제 너도 가야지.”
“근데 릴리가 아직 안와서... 어디 간지 알아?”
짐을 챙기는 노르드 마을 주민들 사이로 망아지처럼 겅중겅중 뛰어다니던 작달만한 어린 아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 마지막으로 말을 타보겠다고 하고 내려갔었는데...”
릴리가 타고 다니는 말은 제 몸집만큼이나 작은 말이었다. 한동안 말을 타지 못할 걸 잘 알고 있는 아이는 금방 다녀올게~ 라는 말을 남기곤 남부 쪽으로 달려 나갔었다. 남부는 북부보단 마수들이 덜 흉포한데다 작은 말이 소녀를 태우고 달려갈 수 있는 거리로는 마수와 조우하기도 힘들다. 그래도 만일이란 게 있으니.
“토마, 릴리는 내가 찾아볼 테니 넌 먼저-.”
“앗, 형아 저기!”
눈을 둥그렇게 뜬 토마가 가이우스의 뒤를 가리켰다. 마을 입구에 작은 말과 고만고만한 소녀가 축축한 풀잎을 밟으며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가이우스를 본 듯 소녀도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처음에 가이우스는 자신과 토마에게 인사를 하는 줄 알았다. 조금 후에야 아이의 손짓이 인사 뿐 아니라 옆에 걷는 말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가이우스는 서둘러 릴리 쪽으로 발을 옮겼다. 릴리가 말을 타지 않은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말의 걸음이 굉장히 느린 것에도.
아이가 겨우 탈 작은 말 등에는 용량 오버일게 분명한 어떤 사람이 짐처럼 얹혀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망아지 위에 늘어져 있는 낯선 이를 보고 가이우스는 그의 작은 여동생이 시체를 들고 왔을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생각을 잠깐 했다. 그 정도로 릴리가 데려온 사람은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실 끊어진 인형처럼 미동도 없었다. 의식이 있었다면 그렇게 짐처럼 실려 오진 않았을 터였다.
성별은 남자, 나이는 가이우스의 또래거나 더 어려 보였다. 학생으로 보이지만 허리에 단단하게 매여 있는 건 태도. 가벼운 옷차림으로 보건데 감시탑이나 젠더 문에서 온 병사는 아닌 듯 했고 관광객이라기엔 시기가 좋지 않았다.
두 동생들은 의식을 못 차린 낯선 이방인을 걱정했지만 먼저 떠난 일행들과 너무 떨어지는 것이 염려한 가이우스의 말에 머뭇거리다 결국 마을을 떠났다. 이 의식불명 환자를 동생들과 같이 올려 보내는 게 좋았을까 라는 생각을 했지만 어떤 목적으로 이곳에 찾아온 지 모를 사람이었다. 만일을 위해 자신의 선에서 돌보는 게 최선의 선택이라고 가이우스는 마음을 정했다.
노르드 전통 문양이 그려진 이불을 덮은 남자는 여전히 죽은 듯이 자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시체처럼 새하얗던 얼굴에 혈색이 돌아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손가락을 가져다 대야 간신히 느껴지던 미약한 호흡도 지금은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안정돼 있다.
릴리는 남자가 아무것도 없는 초원에서 혼자 쓰러져 있었다고 했다. 지금의 노르드 고원은 특히나 기온이 낮다. 아무런 야영 장비 없이 밤을 지새웠다면 감기 수준으로 넘어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톡톡 들리는 소리에 가이우스는 이방인에게서 시선을 떼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묵직한 천에 누군가 천천히 자갈을 떨어뜨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어지던 소리는 곧 쏴아 하는 가슴 서늘한 소리로 바뀌어 사방을 에워쌌다. 문을 살짝 열어보면 연두색이던 초원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줄기로 짙은 색으로 바뀌어 물방울을 한가득 받아내고 있었다. 빗소리와 함께 가느다랗게 섞여 들려오는 양의 울음소리를 듣던 가이우스는 다시 문을 닫았다. 한층 빗소리가 작아지고 천막 안은 고요히 일렁이는 화톳불이 여전히 온화한 빛을 비추고 있었다. 한 가지 변화라면 죽은 듯이 누워있던 남자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직 정신이 덜 든 건지 천천히 눈을 깜박인 남자는 천장을 멀거니 보다가 앞을 본다. 그대로 느릿하게 주위를 둘러보다가 가이우스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랐다. 가이우스는 화톳불로 다가가 위에 놓인 작은 주전자를 집어들며 말했다.
“몸은 이제 괜찮습니까?”
“어, 저기...”
어색하게 남자가 말꼬리를 늘렸다. 당황한 기색이 얼굴에 역력했다.
“여긴... 어딘가요? 제가 왜 여기에...”
“고원 한복판에 쓰러져 있었다고 하더군요. 동생이 발견하여 마을로 데리고 오게 됐습니다.”
“폐를 끼쳤네요. 죄송합니다.”
남자는 정말 미안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가이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이 마을은 방문자가 많지 않아서 가끔 찾아오는 여행객들도 반가이 맞이합니다. 원래라면 마을 사람들 모두가 환영을 하겠지만 지금은 사정이 여의치가 않은 지라.”
“아, 아뇨. 이렇게 보살펴 주신 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합니다. 계속 신세질 수도 없는 노릇이니-”
조금 허둥거리며 남자는 침대에서 벗어났다. 가이우스가 뭐라 하기도 전에 남자는 가이우스에게 고개를 숙인 다음 문을 열었고, 그와 함께 앞 다투어 달려오는 빗소리에 그대로 행동을 멈췄다.
“지금 나갈 생각이라면 말리고 싶습니다.”
물안개가 뿌옇게 일어날 정도로 거세게 쏟아지는 빗줄기가 문 앞을 가로막는다. 우기의 고원은 이곳이 삶의 터전인 노르드 주민들도 섣불리 뚫고 가지 못한다. 폭풍을 본 것처럼 멍한 얼굴을 한 남자는 뒤늦게 문을 닫고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가이우스를 바라보았다.
당황한 것 같지만 크게 낭패한 얼굴은 아니기에 당장 이곳을 떠나야 할 급한 일정은 없어 보였다.
“괜찮으면 여기에서 좀 더 쉬어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정말 면목 없지만 신세 좀 지겠습니다.”
어깨를 늘어뜨린 남자는 머뭇거리며 화톳불 근처로 다가왔다. 이것도 바람의 인도일 겁니다. 한 마디와 함께 컵에 허브티를 담아 건네주면 남자는 감사합니다, 라며 공손이 컵을 받았다.
“가이우스 워젤입니다.“
자기소개를 하자 이방인은 곧바로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컵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머뭇거리던 남자는 말했다.
“제국 출신의... 린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대답하고는 남자는 가만히 컵을 입술로 가져다 댔다. 찾아온 침묵에 다시 빗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따뜻한 차가 경계심을 녹인 건지, 나뭇가지를 탁탁 튀기며 타오르는 불꽃 소리와 함께 가이우스는 이방인- 린과 여러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우연히도 그들은 같은 나이인 열여덟 살이었기에 편히 말을 놓기로 했다.
린은 제국의 트리스타에 있는 토르즈 사관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지금은 ‘오더’에 따라 잠깐 학교 밖에 나와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임무를 처리하고는 시간이 남아 노르드 고원에 있다는 커다란 거신상을 보고 싶어서 왔다고. 하지만 이렇게 넓을 줄은 몰랐다며 린은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말 없이 노르드 고원을 가는 것은 무모한 일이지.”
“응... 전적으로 동감이야.”
“거신상이라면 북부에 있어. 날이 개면 안내해 줄게.”
“폐가 아니라면...”
그렇게 말하고 린은 작게 웃었다.
가이우스가 느낀 린이라는 사람은 예의가 바르고 올곧았다. 눈을 마주치면 피하지 않고 연보라색 눈으로 시선을 마주한다. 잠깐의 대화로 사람의 모든 걸 파악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 마을을 해하러 온 사람은 아니라는 판단이 섰다. 하지만 그가 무작정 밝다고는 할 수 없었다.
가끔 빗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며 다른 생각에 잠기는 그는 종종 가라앉은 표정을 지었다. 하늘을 뒤덮은 잿빛 먹구름이 가득한, 좋다고는 할 수 없는 날씨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그의 침착함에는 우울과 비슷한 어두운 감정이 조용히 깔려있었다.
그 얼굴을 바라보며 가이우스는 생각에 잠긴다. 이상하게도 그는 어디선가 본듯한 낯익은 얼굴이었다. 언젠가 만난 적이 있던가 하며 자신의 기억을 점검해 보지만 노르드를 찾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있다 해도 가이우스의 또래가 찾아온 적은 없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결론은 린과는 첫 대면이라는 거지만 아직도 묘한 기시감이 마음 한 구석을 쿡쿡 찌르고 있었다.
만약 노르드에 관광 가이드가 있다면 이 시기에 방문은 절대 추천하지 않을 것이다. 매년 이맘때쯤의 노르드에는 아주 많은 비가 내린다. 넓은 노르드 고원의 모든 생물에게 있어 생명이나 마찬가지인 비를 내리는 것은 노르드 사람들이 섬기는 바람과 여신의 축복이었다. 하여 그들은 노르드의 일 년 중 가장 생명이 태동하는 이 시기를 경의를 담아 여신의 수유라 불렀다. 관광객에게는 여신의 골탕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역시나 린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먹구름이 잔뜩 낀 날씨도 하루쯤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건지 한 달 내내 비가 내린다는 사실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특히나 여신의 수유가 시작되는 며칠은 그간의 건기를 만회하려는 듯 폭발적으로 비가 내린다. 이 때 만큼은 노르드의 주민도 견디기 힘든 구간이다. 상대적으로 비의 피해가 덜한 고지대로 임시 처를 꾸려 그곳에서 생활하고, 일주일 후에 기세가 잠잠해지면 다시 원래의 거처로 돌아온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사람은 이러한 이동이 가능했지만 양들은 그러지 못했다는 점이다.
수가 굉장히 많은 양들을 데리고 이동이 힘들 뿐더러 임시처가 있는 곳은 양들의 먹이가 적은 곳이었다. 이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매년 마을 주민 중 한 명이 남아 양들을 관리하기로 하였다. 올해는 가이우스의 차례였다.
“그럼 이 마을에 가이우스 혼자 남아있는 거야?”
“그래. 일주일 동안은 말이지.”
“뭔가 대단한걸.”
그렇게 말하며 린은 죽을 한 스푼 떠 먹고 다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것도 굉장히 맛있어. 세간에서 흔히 말하는 우유죽이야, 노르드에선 우유 대신 양젖을 넣어서 만들지. 고소하게 입 안에 퍼지는 맛이 좋은지 린의 숟가락이 조금 빨라졌다.
“나는 이런 변경까지 오는 린이 더 대단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우물거리던 린은 이내 다물고는 대신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오더라고 칭한 걸 보면 자신의 의지가 아닌 강압적인 무언가로 인해 이런 곳까지 왔을지도 모른다. 가이우스는 넌지시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네 짐인 것 같은 물건도 가져왔는데 확인해 보는 게 어때.”
침대 옆에 있는 카키색 가방을 가리키자 린은 짧게 감탄사를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 맞아. 완전히 잊고 있었네....”
“가방 옆에 검은색 도력기도 떨어져 있다고 해서 가져왔다고 하던데 그것도 네 물건인가?”
가방에 손을 넣어 뒤적거리던 린은 가이우스가 말한 물건을 꺼냈다. 컴팩트 형식인지 짤깍하며 열린 작은 도력기를 몇 번 눌러보지만 별다른 작동은 없었다.
“고마워, 이것도 내 물건이야.”
“휴대용 도력기?”
“응, 통신용으로도 쓰이는데... 전혀 안 터지네.”
“이 시기엔 도력 통신이 잘 통하지 않는다고 하더군. 원래부터 원활한 편은 아닌데 비까지 오니까 그럴 거야. 잠들어 있을 때 몇 번 울리긴 했는데 받을 걸 그랬나?”
“음... 아니, 괜찮아. 중요한 일은 다 처리 했으니까 아마 급한 연락은 아닐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미련이 남는 지 버튼을 몇 번 꾹꾹 눌러보다가 결국 뚜껑을 닫는다. 매끈한 검은색의 뚜껑엔 은색으로 어떤 마크가 그려져 있었지만 제대로 보이기도 전에 다시 가방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가이우스는...”
“음?”
문득 이어지는 말에 고개를 들면 린이 가이우스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아니야.”
다시 자리에 앉는 린은 어쩐지 지쳐보였다. 가이우스와 동갑임에도 젠더 문의 병사처럼 회색빛의 우울한 얼굴을 보는 건 어쩐지 안쓰러웠다. 가이우스는 잘 모르지만 제국 같은 큰 도시에 사는 동갑내기들은 어쩌면 린만큼 복잡한 고민을 안고 살아갈지도 모른다. 어렸을 적 딱 한 번 가본 제국은 노르드의 탁 트인 초원 대신 건물들이 빽빽한 숲처럼 자라나 있고,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회색빛 옷을 입고 어딘가를 향하고 있는 어지러운 도시였다. 그곳에서 살아간다면 필시 마음 편히 지내지는 못할 지도 모른다.
가이우스도 제국 쪽의 학교로 입학할 기회는 있었지만 그것은 기회로 끝났다. 젠더 문에 있는 잭스 준장이 추천장을 써 준다는 제안을 했을 때 젠더 문과 감시탑 쪽에서 분쟁이 발생했다. 공화국과 제국의 분쟁은 노르드까지 번질 가능성이 높기에 가이우스는 제국의 유학보다 마을에서 가족들의 안전을 지키는 것을 택했다. 그에 관한 후회는 지금껏 한 적은 없었다. 지금은 그저 노르드 밖의 동갑내기인 린을 보며 그 때 유학을 갔더라면 만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가정을 할 뿐이었다.
“노르드는 도력 기기를 별로 쓰지 않는구나.”
“그렇지. 쓴다고 해도 도력 트랙터나 라디오 정도. 그 라디오도 촌장님 댁에 하나 있는 것뿐이지만 말이다.”
그 한 대 밖에 없는 도력 라디오도 작동되는 일은 별로 많지 않았다. 재상이 연설할 때에나 다 같이 모여 그 발표를 들었던 정도. 도력 조명 대신 화톳불을 키고, 도력 자동차 대신 말을 탄다. 제국시보도 배달되지 않아 정기적으로 젠더 문 상점을 이용해야 하고 알약 대신 노르드에 내려오는 민간요법으로 병을 다스린다. 그런 이야기들을 듣던 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제국보다 불편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 사람들도 이곳에 오면 생각이 달라지지 않을까. 그에게서 나오는 말들엔 노르드에 대한 순수한 호의가 들어가 있어 가이우스도 미소 지었다.
예정에 없던 갑작스런 방문자는 조용하고 예의바르며, 좋은 사람이었다.
*
다음날에도 노르드 고원에서는 세찬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새벽의 아스라한 햇살을 쏟아내는 대신 어두운 잿빛을 내보내는 하늘을 바라보며 가이우스는 젖은 초원을 걸었다. 양들이 모여있는 우리로 다가가자 그의 기척을 눈치 챈 양들이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내었다. 지붕을 구성하는 버들가지와 커다란 펠트 천은 다행이도 별다른 문제 없이 제 기능을 하고 있고 주위를 둘러싼 울타리도 흙에 쓸려간 곳 하나 없이 단단히 자리 잡고 있었다. 풀들을 가득 넣어주고 몰려든 양의 수를 확인한 가이우스는 다시 우리의 문을 닫았다. 간이 축사 주변에 파놓은 물길도 큰 흐트러짐 없이 빗물을 흘려내는 걸 확인하고 마을 천막 주위에 난 물길까지 살펴본 가이우스는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왔다.
화톳불을 하루 종일 피웠지만 몰려드는 습기를 완전히 떨쳐낼 수 없는지 꿉꿉함이 천막 구석구석에 남아 있다. 우비를 벗어 물기를 털어내고 안으로 들어선 가이우스는 먼저 침대 위를 확인했다. 나설 때와 마찬가지로 변함없는 모습으로 린이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면 여전히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혈색은 어제보다 훨씬 좋고. 아니 좀 붉을 지도.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자 뜨끈한 체온이 손바닥 밑으로 전해졌다.
“가이우스..?”
감겨있던 눈꺼풀이 천천히 떠지고 연보라색 시선이 천천히 가이우스에게 향하는 걸 그는 새삼스레 바라보았다. 이마에서 손을 떼자 린은 흐리멍덩한 눈으로 어설프게 몸을 일으켰다.
“더 자는 편이 좋을 거다.”
“...괜찮아.”
“열이 나는 것 같은데.”
그 말에 따라 린은 자신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가 금방 손을 뗐다.
“멀쩡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는 린은 정말로 괜찮아 보였다.
“네가 괜찮다면야. 그래도 너무 무리는 하지 마.”
동생들이 열이 났을 때 그의 어머니는 항상 보리차를 끓였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찬장에서 볶아둔 보리를 꺼내며 말한 가이우스에게 린은 그럴게 라고 대답했었다.
린이 온지 이튿날, 천막 안에서 고소한 보리차 냄새가 짙게 익어갈 무렵 린의 상태는 눈에 띄게 나빠져 있었다.
린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챈 건 가이우스가 해가 지기 전 양을 돌보고 돌아왔을 때였다. 불 옆에서 가이우스가 준 책을 보고 있던 린은 어느새 침대 구석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있었다. 책을 보다 잠들었다고 보기엔 옷깃을 그러쥐는 손가락이 도드라져 보였다.
“린?”
가이우스의 말에 린이 작게 반응했다. 여전히 가이우스를 등진 자세로 린이 말했다.
“미안, 속이 좀 안 좋아서.”
작게 흘러나오는 한 마디에 그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이 단번에 느껴졌다.
“린, 잠깐만.”
“오지 마...!”
가까이 다가가는 가이우스의 기척에 린이 비명처럼 외쳤다. 이틀 간 들었던 그의 목소리 중 가장 큰 목소리였다. 가이우스가 멈칫하고 린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가이우스를 바라보는 린의 얼굴엔 당혹감이 가득했다.
미안. 가까스로 나온 한 마디는 가이우스가 이해할 수 없는 사과였다.
“난 괜찮아. 어디 아픈 게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처음 봤을 때 새하얗던 얼굴은 열 때문인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가이우스와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 채로 린이 말했다.
“내 가방 좀 가져다 줄 수 있어..?”
빗소리가 시끄럽게 쏟아진다. 조용하게 넘쳐났던 말소리가 끊긴 천막 안에서 더 잘 들리는 빗소리는 둔하게 그릉대는 하늘의 소리를 전달하고는 기세 좋게 주변의 소리를 앗아갔다. 그런 노르드의 자연에 휩싸인 이방인 린은 여전히 침대에 누워있었다.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지만 몸의 떨림까지는 감추지 못했다.
가이우스가 가져온 가방을 절박하리만치 헤집던 린은 거꾸로 가방을 뒤집었다. 침대에 툭툭 떨어지는 건 도력 통신기, 노트와 필기구, 그리고 군용 식량이었다. 찾는 것이 없는지 한 번 더 빈 가방을 헤맨다. 도력 통신기 외에 다른 물건은 없었냐고 다시 묻기도 한다. 릴리가 주워 온 것은 가방과, 검은 도력기와, 린 뿐이었다.
‘중요한 물건이 없어진 건가?’
린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참담한 목소리가 마른 입술 사이로 새 나왔다.
‘약.’
‘약?’
‘응. 억제제라고 하는 건데.’
고개를 든 린은 불안한 눈초리로 가이우스를 바라봤다.
‘이 마을엔 없어?’
그 말의 주어를 가이우스는 억제제라는 약으로 이해했다.
‘그런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으니 아마... 그 약이 중요한 약이면 젠더 문에 가서...’
‘...거기도 없을 거야.’
가이우스는 문득 어떤 단어를 생각해 냈다. 그것은 린의 초조한 반응과 자신이 꺼낸 젠더 문에서 이어지는 연상이기도 했다. 분명 젠더 문에서 잡화상을 하고 계시는 자츠씨의...
가이우스의 생각은 다 이어지지 못했다. 가이우스는 놀란 눈으로 린을 바라보았다. 린이 방금 한 말은 분명.
‘군 시설에 오메가 관련 약은 없어.’
그리고 방금 자신이 한 말에 쐐기를 박듯 린은 이어 말했다.
‘오메가는 군인이 될 수 없으니까.’
가이우스는 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제 2의 성을 물론 알고 있었다. 알파, 오메가, 베타. 세상에 95%를 차지하는 건 베타. 그리고 소수의 5%만이 베타와는 다른 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매년 나라에서는 노르드 마을에 제 2의 성에 대한 검사를 진행했다. 가이우스는 물론 그의 어린 동생들인 시다도, 토마도, 릴리도. 정김검진에는 제 2의 성 검사 뿐 아니라 교육도 같이 포함돼 있었다. 그 성에 관해서, 그리고 알파와 오메가만이 가지는 유일한 관계인 ‘짝’에 관한 교육들이.
아직 어린 릴리는 알파, 오메가 라는 생소한 단어들이 쏟아지는 말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 했고, 토마는 제법 진지하게 들었던 것 같다. 작은 동생이 그 교육을 열심히 들었던 건 학구열과 더불어 그 나름의 이유도 있었다. 짝에 대해서 안 날, 조금 아쉽다며 베타라고 적힌 검사 결과 종이를 들으며 토마는 웃었다.
‘내가 만약 알파고, 샤르가 오메가였다면... 거기에 우리가 서로 짝이었다면 자츠 아저씨도 좋아하지 않으셨을까.’
샤르는 젠더 문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자츠 씨의 딸이었고 토마와 풋풋한 관계를 키워가고 있다는 건 가이우스를 비롯한 노르드 주민들은 대부분 아는 사실이었다. 토마도 베타, 샤르도 베타라는 결과가 나왔었다.
린은 오메가다. 그리고 그에게 온 것은 아마 발정기. 억제제는 3개월에 한 번씩 찾아온다는 발정을 억누르기 위한 약일 것이다. 공교롭게도 노르드에는 오메가가 없었고 자연히 억제제를 구비해 둘 필요도 없었다.
린의 억제제는 아마 그가 도력기를 떨어트린 초원에 있을 것이다.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약들을 릴리가 보지 못하고 지나쳤으리라. 지금 나간다 해도 비가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초원에서 그 작은 약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검은 하늘이 꿈틀거리는 소리와 그칠 줄 모르는 빗소리가 천막을 감싸 안아도 린의 소리를 숨기지 못했다. 이불이 버르작대는 소리, 어깨까지 뛰는 가쁜 숨소리, 간간히 들려오는 앓는 듯한 신음 소리.
언제나 머무르던 천막은 물건 하나 변한 게 없는데 린 하나만으로 낯선 곳으로 변해버린 것 같았다.
가이우스는 심호흡을 했다. 제일 힘든 건 당사자인 린. 지금 상황에서 가이우스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괜찮다고 시간이 지나면 나을 거라고 한 린의 상태는 시시각각 나빠지는 게 보였다. 이쪽에 관련한 지식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가이우스는 찐득하게 붙어 있는 습기라도 없애기 위해 화톳불에 장작을 더 넣었다. 나무를 집어삼키며 타오르는 불꽃과 린의 그림자가 한데 엉킨다.
더 세진 불길 탓일까, 가이우스는 문득 더위와 갈증을 느꼈다.
제대로 앉지도 못하는 린은 저녁도 마다했고, 가이우스는 혼자서 딱딱한 빵으로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했다. 간간히 린의 상태를 살피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채로 시간은 차츰 깊어져갔고, 결국 그날의 하루는 마감해야 했다.
빗소리와 린의 숨소리와 밤의 어둠이 뒤엉켜 어느새 까무룩 잠들었을 때, 가이우스는 불현 듯 눈을 떴다.
침대에 든 지 대략 한 시간은 지난 듯 했다. 천막을 두들기는 물소리는 여전했고, 불도 잦아드는 낌새 없이 타오르고 있다. 가이우스는 침대에서 급히 일어났다. 린이 없었다.
가이우스는 천막의 문을 활짝 열었다. 고막을 파고들 듯이 비가 쏟아지는 밖은 시커먼 어둠이 가득했다.
“린!”
가이우스는 소리 높여 그를 불렀다. 말도 없이 이 시간에 밖에 나가는 건 위험천만한 행동이다. 아니, 말이 있어도 위험하다. 빗물을 머금은 초원을 말로 달리면 그 말과 함께 저승길을 가겠다는 것과 다름없는 소리였다. 가이우스는 다시 소리를 높였다. 린의 대답은 없었다. 대신 응답이라도 하듯 하늘이 쿠릉댔다. 그 소리에 멈칫한 가이우스는 이내 가만히 기다렸다. 먹구름이 겹겹이 낀 하늘이 다시 꿈틀거리고, 조금 후에 번쩍이는 섬광이 하늘을 갈랐다. 사방을 삽시간에 하얗게 물들인 번개는 노르드의 마을도 일순 비췄고 가이우스는 자신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바닥에 쓰러져 있는 린을 발견했다.
“린.”
가이우스는 린에게 다가갔다. 가이우스. 의식은 있는 건지 잔뜩 쉰 목소리가 작게 그를 불렀다. 밤에 퍼붓는 비는 오싹할 정도로 차가웠다. 가이우스는 린을 끌어안고는 유일하게 빛을 내뿜는 자신의 천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물을 잔뜩 머금은 옷 바깥으로 삐져나온 팔은 처음 린을 봤을 때와 똑같이 흔들렸다.
급한 대로 불 근처에 린을 놔둔 가이우스는 수건을 잔뜩 가져와 물기를 닦기 시작했다. 젖은 옷이 마치 하나인양 몸에 들러붙어 있었다. 옷을 벗겨야 할까. 고민 중인 가이우스를 보는 린의 눈이 천천히 깜박였다.
“열을 식히려고 그랬어.”
가이우스가 하려는 말이 뭔지 아는지 갈라진 목소리로 린이 말했다.
“비가 이렇게 내리니까 좀 가라앉을까 해서.”
“너무 무모하다.”
“그러네.”
대답 속에 뜨거운 숨이 섞여있다. 차가운 물을 진탕 끼얹어서 사라질 열이 아니란 걸 린이 더 잘 알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이상 가이우스는 린을 나무라지 않았다. 괴로운 듯한 숨이 빗소리만큼 이어지고 있었다.
“폐를 끼쳐서 미안.”
“사과는 됐어.”
“하지만.”
린이 말했다.
“지금 아니면 사과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가이우스는 마른 수건으로 린의 얼굴을 닦았다. 천이 지나가고 난 자리에 물기는 남아있지 않지만 연보라색 눈동자엔 열기가 깊어졌다.
“점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으니까.”
아니, 한 가지 생각 밖에 들지 않아서. 정정하는 입술이 떨렸다. 시선이 가이우스에게 향했다가 금방 떨어졌다. 눈을 감아버린 탓이었다. 옆에서 타오르는 화덕의 불만큼 뜨거운 숨이 연달아 흘러나오는 걸 보던 가이우스는 손을 뻗었다. 손등에 닿는 볼의 열기가 천천히 전염된다. 린이 눈을 떴다.
“힘든가?”
“....”
린은 대답 대신 가이우스의 손에 얼굴을 작게 부볐다. 서늘한 체온 때문일까 기분 좋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손바닥에서 전해진 뜨거운 열 덩어리가 머리까지 번진 것 같았다. 가이우스는 천천히 그의 볼을 어루만졌다.
“편해지고 싶다면 도와줄게.”
“편하게...”
연보라색 시선이 가이우스를 흐리게 바라봤다. 문득 그 시선이 깊어졌다고 느껴졌을 때 얼굴을 감싼 손에 체온을 가진 손이 덮어졌다.
“가이우스에겐 계속 신세만 지네.”
“그런 생각은 하지 마.”
“...폐인거 아는데.”
편해지고 싶어.
아주 작게 흘러나오는 소리에 가이우스는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밭은 들숨과 날숨이 드나들던 곳에 서로가 얽혀 들어갔다.
그것은 한 여름 밤의 잠을 설치게 하는 무더위와도 비슷했고, 동시에 양들이 목을 축이던 작은 샘 같기도 했다. 온몸을 잠식하는 건 뜨거운 열기와 녹색이 빳빳하게 자라나는 여름 볕의 갈증이었다. 계속 원하고, 원하고, 원하여 입에 차가운 물이 잔뜩 끼얹어져 목울대를 넘기며 그것을 받아먹어도 부족했다. 린도 가이우스도 비바람에 젖은 옷을 입고 있을 터였는데 그것들이 어디로 간 지에 대한 의문도 사라지고 애초부터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양 자신의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몸과 섞여 갈증을 해소해 나갔다.
가이우스는 오메가와의 관계는 처음이었다. 넓힐 필요 없다고 갈라진 목소리가 말하듯 그곳은 여자와 같이 축축했고, 더 좁고, 뜨거웠다.
생경하게 달라붙는 살의 감각은 머리를 멍하게 하기엔 충분했다. 손이 등을 긁으면서 끙끙거리는 잔뜩 죽인 목소리가 천막 안에 습기처럼 들러붙었다. 괜찮다고, 듣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린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렇게 억눌린 소리는 빗소리와 한데 섞여 가이우스의 청각을 자극했다. 이상하게 그것에 더 흥분했다.
늦게 잠들었음에도 가이우스는 어김없이 비슷한 시각에 눈을 떴다. 그가 태어나고 자라면서 몸에 새겨진 흐름은 쉽게 깨지지 않았다. 몸을 섣불리 일으키는 대신 가이우스는 자신의 옆을 가만히 살폈다. 검은 머리의 소년이 몸을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어제부터 이어지던 괴로운 호흡 대신 고른 숨과 함께 어깨가 조용히 오르내린다. 그에 만족하며 가이우스는 조심히 몸을 일으켰다. 잦아드는 화톳불에 잔가지들을 몇 개 더 넣어주고 침대에 있는 이불을 가져와 잠든 소년에게 덮어줬다. 별다른 뒤척임 없이 린은 여전히 잠을 이어갔다.
양을 돌보고 돌아온 가이우스는 비에 젖은 채 엉망으로 구겨진 옷가지들을 빨래 통에 넣었다. 아침을 준비하고 있으면 조금 후에 린이 부스스 일어났다. 나른한 게 보이는 그에게 데운 양젖을 건네면 린은 여전히 붉은 기가 남아있는 얼굴로 그것을 받아마셨다. 삶은 양고기와 치즈를 바른 빵으로 아침 식사를 마치고, 먹는 둥 마는 둥 하던 린과 그렇게 하기라도 한 것처럼 몸을 겹쳤다. 이번엔 바닥이 아닌 침대에서였다.
침대는 천막을 덮고 있는 천과 맞닿은 곳에 놓여 있어 빗소리가 한층 더 가깝게 들렸다. 가이우스는 자신을 받아내며 헐떡이는 린을 내려다보았다. 밤과 달리 더 선명하게 잘 보이는 그의 땀이 맺힌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짠맛과 가시지 않은 열기가 입술에 묻어났다.
시간은 평소와는 다른 속도로 흘러가고 있었다. 아주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으면서도, 성큼 잡아먹힌 것처럼 어느새 훌쩍 지나가 있기도 했다.
가이우스와 린이 입었던 옷은 깨끗하게 빨려 천막 한 구석에서 자신의 물기를 떨구고 있다. 해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날씨에 빠른 건조는 무리였다. 옷을 입고 있어도 금방 벗어버리거나 벗겨졌기 때문에 노르드의 전통 문양이 아롱진 겉옷만 간단하게 입고 있는 린은 눈으로 자신의 젖은 옷을 좇고 있었다. 그가 입었던 붉은 옷은 죽은 검붉은 색으로 변해 세상에서 가장 피곤한 모양새로 늘어져 있었다.
“노르드에 오메가는 없구나.”
억제제에 대한 얘기와 함께 자연스럽게 알게 된 노르드의 사정을 린이 가만히 입에 담았다. 가이우스도 덧붙였다.
“알파도 없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이우스가 베타인 걸 은연중에 알고 있는 몸짓이었다. 가이우스는 알파를 본 적이 없다. 단, 그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알파는 오메가의 페로몬 향을 느낀다고 했다. 그 향이 알파를 자극하고, 오메가와 동조해 발정을 일으킨다. 그 향은 남부에서 볼 수 있다는 선명한 색을 가진 과일의 향이거나, 설탕을 녹여 꿀에 섞은 것 같은 달큰한 향이라고 했다. 가이우스는는 그렇게 묘사되는 향을 린에게서 느낄 수 없었다. 가이우스는 그저 땀 냄새와 비에 젖은 냄새, 섞여 들어온 풀 냄새, 흐릿하게 느껴지는 도시의 건조한 냄새를 맡을 뿐이었다.
“노르드 고원은 넓지만 마을은 작다. 양과 말이 사람들보다 더 많을 정도니까. 제국만큼 많은 게 있지 않아.”
“제국에도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긴 해. 오메가와 알파는 워낙 수가 적기도 하고. 하지만 제국은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어서. 없어야 할 것들이 잔뜩 몰린 걸지도.”
“그에 비하면 노르드는 너무 없는 편인가.”
“그게 맞는 걸지도 모르겠어.”
알파도, 오메가도 없는 곳. 린의 말에는 지친 기색이 묻어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가이우스가 느꼈던 그의 피로는 오메가와 알파에 관한 걸지도 모른다. 병사는 오메가가 될 수 없지만, 손에 굳은살이 단단히 박일 정도로 검에 익숙하고 군용 도력기를 지급 받아 오더를 처리하는 린은 그에 더한 사정이 있을 수도 있다. 가이우스는 그저 추측할 뿐이다. 그리고 그만뒀다. 당사자가 얘기해 주지 않는 한 그것은 어떠한 진실도 될 수 없다.
다만 떠올린다. 그 많은 제국 사람들 속에서 세상에 단 하나라는 오메가와 알파의 관계인, 린의 ‘짝’도 있을 거라고. 서로를 보자마자 바로 알 수 있다는 운명의 상대. 제국이나, 감시탑을 넘어 공화국이나. 세계 어디에 반드시 있을 것이다. 한 명의 오메가가 있으면 그의 짝인 한 명의 알파가 당연히 있기에.
이제 귀에 익숙해진 빗소리가 다시 귀에 들어찼다. 사람들이 가득한 세계와 단절시키는 이 비는 끝 모르고 쏟아지고 있다. 그 적막한 소리가 어쩐지 계속됐으면 하고 가이우스는 은연중에 바랐다.
하지만 비는 언젠가 개기 마련이었다.
양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가이우스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줄곧 자신 옆을 지키고 있던 온기가 사라져있다. 잦아들어가는 화톳불 옆에서 린이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다 말랐는지 등에 걸쳐지는 옷에 선명한 붉은 색이 가득했다. 문득 뒤 돌아본 린이 가이우스와 눈이 마주치자 계면쩍게 웃었다.
“미안, 깨워버렸네.”
“마침 일어나려던 참이야. 그보다 가는 건가?”
비가 완전히 그친 건 아니었다. 천막을 마구 두들기던 빗줄기는 기세가 훨씬 약해져 가볍게 천막을 톡톡 두들기고 있었다. 문을 열어 밖을 잠깐 살핀 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날도 그나마 풀렸으니까. 영력도 회복된 것 같고.”
마지막 말을 묻기도 전에 열린 문 사이로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빗방울과 함께 들어온 바람은 고원에서 비를 몰고 다니며 부는 바람이 아닌, 갑자기 솟아난 듯한 돌풍이었다. 바람이 멈추자 곧 땅을 둔하게 울리는 커다란 진동이 느껴졌다. 가이우스는 갑작스럽게 벌어지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색하게 웃으며 천막 밖을 나가는 린을 따라 가이우스도 홀린 듯이 그 뒤를 따라나섰다. 그 앞에는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거대한 물체가 있었다. 가이우스 눈앞에 있는 잿빛의 거대한 무언가는 노르드 북부에 있는 오래된 암석과 같이 자리 잡은 것과 매우 닮아 있었다. 린이 보러왔다고 한 거신상. 고원에 반쯤 묻혀있는 그것과 굉장히 흡사한 모습을 한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 물체는 단단히 대지를 딛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당연한 것처럼 린이 서 있었다. 가이우스는 문득 깨달았다. 린의 얼굴이 왜 낯익은 지를.
그가 가끔 들춰보는 제국시보에 그의 사진이 실린 적이 몇 번 있었다. -구국의 영웅, 잿빛의 기사. 린 오즈본.
“신세 많이 졌어. 나중에 이 은혜는 꼭 갚을게. 그러니...”
그렇게 말하고 린은 머뭇거린다.
“나중에... 또 와도 괜찮을까?”
고민할 필요도 없는 대답이었다.
“물론이지. 다음엔 거신상을 안내해 줄게.”
“...고마워.”
기신이 린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는다. 그쪽으로 걸어가던 린이 가이우스를 한 번 돌아보고 고개를 숙였다. 가이우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린이 그 기신에게 빨려 들어가듯이 사라지고 나서 다시금 돌풍이 휘몰아쳤다. 천막을 펄럭이는 바람을 일으킨 기신이 빠르게 사라진다. 먹구름이 낮게 깔린 하늘 아래서 그 작아지는 모양새를 바라본다.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어느 새 아득히 사라진 방문자를 가이우스는 생각했다.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왠지 모르게 그런 확신이 들었고, 비로소 가이우스는 다시 그의 보금자리로 들어갔다.
한 사람이 떠난 노르드 고원에는 여전히 비가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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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린이 7반과 만나지 못했고, 꼭두각시 영웅 노릇을 하고 있다는 설정
2. 노르드고원에 온 건 오더 수행 후 귀환하다가 기습을 받고 정령길로 도망치고, 영력이 떨어지고 같은 사소한 설정도 있습니다만 별로 상관없는 듯...
3. 가이린 짱 어렵네요..........
매번 신세진 카이루님께 드립니다. 평소 쓰던 거나 할 걸..ㅋ큐ㅠㅠㅠ 마음만 받아주시길..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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