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카레오 - 그리고 다음날
* 츠카레오
* 2016년 츠카레오 앤솔로지 [LEAD ME, LIKE ME, LOVE ME]에 올렸던 원고로 주최님 허락을 받아서 공개합니다.
* 이 원고를 공개하면 k님도 올린다고 했습니다.....
-삐삐삐삐.... 삐삐삐삐...
단조로운 디지털음이 고요한 침실을 연속으로 울렸다. 얇은 커튼 너머로 다가온 햇빛은 두 사람이 잠들어 있지만 여전히 미동도 없는 침대를 조용히 달궜다. 한참을 울리던 시계가 침묵하자 다시 침실은 원래의 고요를 되찾았다. 곤한 숨소리와 틱틱거리는 시계 소리가 계속하여 반복되기를 한참, 침대가 크게 요동쳤다. 벌떡 일어난 남자는 머리맡의 시계를 확인하고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삽시간에 얼굴이 새파래졌다.
“스오...?”
온몸으로 표현한 소란에 잠이 깬 건지 옆 사람도 덩달아 눈을 떴다. 스오라 불린, 스오 츠카사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늦었어요.”
“-어?”
“시간 엄청 위험한데... 왜 알람을 못 들었지? 아니, Leader는 주무세요!”
츠카사는 엄청난 기세로 화장실로 뛰어갔고, 이제 리더가 아닌 지 훨씬도 더 된 츠키나가 레오는 그 모습을 졸린 눈으로 보다가 길게 하품을 하고 츠카사가 가져온 엄청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기를 5분, 레오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늘어지게 기지개를 하고 나선 침대 밖에 뱀허물처럼 떨어진 옷가지들을 주워 그대로 빨래 통에 던졌다. 화장실 문 너머로 쏴아아 하며 쏟아지는 물소리를 들으며 레오는 옷장에서 적당히 옷을 꺼내 입었다. 부엌으로 가서 찬 물을 꺼내어 마시고 시계를 보며 여기서 공항까지 가는 시간과 비행기 시간을 묵묵히 계산한다.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무엇보다 성실을 사랑하는 츠카사는 정말 늦었다면 씻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뛰쳐나갔을 터였다. 물소리가 멈추나 했더니 드라이기 소리가 들렸다. 레오는 테이블에 던져 둔 차키를 찾고 주머니에 넣었다. 거실 소파에 하품을 하며 느긋하게 앉아있으면 평소의 츠카사답지 않게 거칠게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Leader?! 주무셔도 괜찮은데-.”
아직도 물기가 남아있는 츠카사에게 거실의 레오는 말했다.
"짐은 다 챙겼어?"
“네. 미리 싸뒀으니 문 앞에 있는 suitcase만 가져가면....”
“저 거대한 캐리어 말하는 거지? 칫솔은? 어제 보니 화장실에 그대로 있던데.”
“아, 그건 가서 사려고요.”
“여권은?”
“옷 주머니에 넣어뒀습니다.”
츠카사가 가슴 근처를 가볍게 두들기고는 말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레오가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내가 준 선물은?”
츠카사는 고개를 들었고 레오랑 눈이 마주치자 좀 붉어진 얼굴로 어물거리며 말했다.
“챙겼습니다. 사실 Leader가 잠든 후에 바로....”
“이럴 땐 빠르네, 스오~ 그럼 갈까.”
“예? 가다뇨...??”
츠카사가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자 레오는 키를 꺼내 손가락에 끼고 빙빙 돌리며 말했다.
“데려다 줄게. 아니, 배웅이라고 해야 하나? 늦었잖아. 어서 가자고, 도련님.”
기가 막히게 좋은 날씨였다. 거대한 푸른 하늘에 새로이 뜨는 비행기가 어느 곳보다 가깝게 보이는 공항에 도착했을 때 츠카사는 아침과 다른 의미로 핼쑥한 얼굴을 한 채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그 옆에서 레오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어때, 안 늦었지?"
“예에.... 안 늦었지만, 분명 벌금 나올 거예요....”
“비행기를 놓치는 것보단 낫지.”
그것도 사실이기에 츠카사는 준법정신을 역설하는 대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공항은 분주한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그 분주한 사람 중 하나인 츠카사는 항공 수속을 마치고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멀미로 뒤집힌 속과 불안했던 마음이 차차 진정되면서 그제야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러 색의 캐리어들이 제 주인의 손에 잡혀 여정의 시작을, 혹은 마무리를 짓고 있었고 사람들 머리 위로 펼쳐진 천장은 아주 높게 솟아있었다. 주위를 멍하니 보던 츠카사는 그의 옆에서 자신의 가방을 들고 있는 연인을 뒤늦게 인지하고 소스라쳤다.
“Leader, 제 짐을 언제부터-?!”
“으음? 차 내리면서부터 들고 있었는데. 이거 몇 개~?”
장난스럽게 손가락을 흔들어 보이는 레오 앞에서 츠카사는 한숨과 함께 가방을 받아들었다.
“죄송합니다, 정신이 없네요. 두 개 맞죠, 그건.”
“세 개야.”
엄지손가락을 뒤늦게 핀 게 분명한 레오가 짓궂게 웃었다.
“이래가지고 가서는 괜찮겠어? 외국이잖아. 아~ 스오에게 그런 건 별로 문제가 아닌가? 영어도 유창하고.”
“아뇨, 문제예요. 당신이 없잖아요.”
레오는 송곳니가 삐죽 보이던 입을 다물고 눈을 깜박였다. 레오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땐 그의 얼굴이 조금 붉어진 상태였다.
“너 진짜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구나. 유학파여서?! 하지만 해외는 이제 나가는데! 역시 스오는 재밌어!! 러브송을 쓰려면 스오가 옆에 있으면 엄청 도움이 되겠는데- 오옷, 굉장한 인스피레이션이 내려오려고 해~”
“Leader의 Love Song보다 눈앞의 제가 더 중요하지요? 이젠 알아요, 당신은 부끄러우면 그런 식으로 빠져나간다는 걸. 그렇지만 아니까 더더욱...”
공항에 가득 찬 사람들의 소음이 다시 시끄럽게 귀에 들이찬다. 안내 방송이 계속해서 들려온다. 계기판의 숫자가 빠르게 바뀐다. 츠카사가 타야 할 비행기의 일정은 거의 코앞에 와 있다. 갑작스럽게 현실과 맞닥뜨린 기분이었다. 이제 떠나야 한다.
딱딱하게 굳어있던 츠카사가 불현듯 레오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스오?”
의문은 표하지만 별다른 저항 없이 레오는 순순히 그의 손길을 따랐다.
넓은 공항 곳곳마다 있는 화장실을 어렵지 않게 찾은 츠카사는 그곳으로 들어갔다. 손을 씻는 이 하나 없는 화장실에 작은 행운을 느끼며 츠카사는 안쪽의 화장실 칸으로 그를 밀어 넣었다.
“헤에, 여기서 뭐하게? 야한 짓 하게?”
그렇게 말한 레오가 츠카사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얼굴을 잡고는 그대로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입술이 말캉하게 닿은 것도 잠시, 벌어진 입 사이로 뜨거운 호흡이 오갔다. 좁은 화장실 칸에서 츕츕거리는 젖은 소리와 달뜬 신음을 목 뒤로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먼저 끌어당긴 츠카사의 연인은 이제는 벽에 밀어붙여져 혀를 받아내느라 정신이 없다. 츠카사의 손이 자연스럽게 머리에서 허리로 내려간다. 손가락이 엉덩이를 쥐자 레오가 몸을 떨었다.
입술을 뗐지만 아쉬운 게 역력한 얼굴로 츠카사는 손에 잡힌 엉덩이를 다시 움켜쥐었다가 놓았다.
“야한 짓도 하고 싶지만 안 되겠죠. 공공장소고....”
“시간도 없고.”
말을 받으며 레오는 츠카사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주었다. 그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츠카사가 레오를 끌어안았다.
“겨우, 겨우 이렇게 있을 수 있게 됐는데....”
어깨로 한숨이 떨어졌다. 레오는 그런 등을 토닥여줬다.
“일 년은 금방이야.”
“금방일까요.”
“물론. 잠 몇 번 자고 밥 몇 번 먹으면 금방이니까! 너는 열심히 하라고 하지 않아도 열심히 할 테니 실컷 놀고 와.”
“뭐예요, 그게.”
이번엔 한숨 대신 웃음이 어깨로 떨어졌다.
“얼른 해치우고 올게요. 일 년 동안 어느 누구도 불만을 가질 수 없도록 완벽하게 처리하고 올 테니, Leader는 몸 건강히.... 츠카사를 기다려 주실 거죠?”
어리광을 부리는 것 같은 목소리가 간지러우면서도 간절했다. 직시하는 눈에 맺힌 여러 감정을 읽어 보려던 레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부터 당연한 말만 하는 걸. 걱정 말고 잘 다녀와.”
“-네, 다녀오겠습니다.”
말간 웃음이 단정한 얼굴에 자리 잡았다. 레오는 그 웃음에 만족했다. 사랑하는 아이는 여행을 보내라는 말이 불현 듯 떠올랐다. 스오는 내 아이도 아니고, 여행도 아니지만. 어쨌든 사랑하는 아이가 무사히 여행을 잘 다녀올 것 같은 얼굴이기에 안심하기로 했다.
***
일 년 짧은 거 맞지?
황야의 무법자처럼 공항으로 내달렸던 자동차는 이번에 아주 얌전하게 집으로 도착했다. 시작된 365일 카운트다운에서 하루도 안 지난 지금, 차에서 내려 어기적어기적 집으로 걸어가며 레오는 고민했다. 벌써부터 지루해질 것 같아. 안 되지, 안 돼. 츠카사한테는 그렇게 잘난 듯이 얘기했으면서 이제 와서 이러는 것도 우스웠다. 이걸 악상으로 전환해 보자. 끔찍하게 지루한 곡을 최대한 잠잠하고 평화롭게 바꾸는 거야. 커튼콜마저 끝난 후의 고요와 평화를 그리는 거지! 무대는 막을 내렸지만 노래는 끝나지 않은 그 이후의 이야기! 끝은 또 하나의 시작이다. 완결이지만 새로운 이야기가 준비된 세계로 떠나는 첫 걸음이지.
잠잠하던 세계가 음으로 시끄럽게 들썩이기 시작했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빨리 움직여서 이 음들을 종이에 옮겨야 했다.
음표로 떠도는 세상을 깨트린 건 핸드폰의 진동 소리였다. 흰 종이에 지저분하게 이어지던 검은 펜 자국이 멈추고 레오는 고개를 갸웃하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화면에 떠 있는 글자를 보고 레오는 더 영문을 알 수 없어졌다.
“세나~?”
「웬일로 전화는 빨리 받네. 그래서 지금 어디?」
스피커폰으로 돌려놓으니 목소리가 방 안에 쩌렁쩌렁 울린다. 레오는 손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종이 위를 춤추는 펜의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집인데-.”
「이번에 이사 간 집? 맞으면 당장 문 열어.」
레오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핸드폰을 보았다. 조금 어리둥절하다가 레오가 다시 펜을 쥐었다.
“이것만 쓰고 열면 안 돼?”
「죽는다.」
악상도 악상이지만 이즈미의 잔소리도 무시무시하기에 레오는 핸드폰을 그대로 쥔 채로 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선글라스를 쓰고 있지만 뚱한 표정일 게 뻔한 이즈미가 있었다.
“집에 있으면 초인종 소리 정도는 듣지?”
“눌렀어? 안 들렸어!”
“자랑 아니거든?”
툭 쏴 붙인 이즈미가 가져온 봉지에서 이것저것을 꺼내 냉장고에 넣었다.
“챙겨먹어. 오늘 뭐 먹긴 했어?”
츠카사를 데려다 주면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걸 깨닫고 레오가 고개를 젓자 이즈미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을 하며 샐러드가 담긴 플라스틱 팩을 집어던졌다. 풀이잖아, 세나. 안에 고기도 있거든? 일단 좀 뭐라도 집어넣어. 돌아오는 대답은 여전히 날카롭지만 그게 이즈미식 배려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는 레오는 기쁘게 그 호의를 받아들였다.
“카사 군은 잘 갔어?”
“응. 지금쯤 하늘 위.”
입 안 가득 싱그러운 채소를 넣고 잔뜩 우물거리며 레오가 대답했다. 달큰한 토마토와 드레싱이 거의 들어있지 않은 양상추가 하모니를 이룬다. 레오는 오른손에 쥐고 있는 펜으로 수첩에 끄적였다. 이즈미를 만나도 악상은 사라지지 않아 쉴 새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삿짐 덜 풀어서 난장판인거 구경하러 왔는데 다 해놨잖아? 카사 군 출장 때문에 정신없을 줄 알았는데.”
“한가한 내가 있잖아?”
“잘도 임금님이 하겠어. 사람 불렀지?”
“세나, 좀 더 망상해 보라고~! 망상은 세나의 미의식을 더 크게 키워줄 거야! 세계로 뻗어가는 모델의 안목이 높아지지 않는 건 세계적 손실이라고!!”
“네네, 자본주의의 수혜자님. 역시 세상은 돈이지.”
이즈미는 가만히 이 집 주인의 일정을 더듬었다.
카사 군은 오늘 오전 비행기랬고, 그저께 이사 왔었으니 사람을 부른 건 확실. 연예인 시절도 있어선지 웬만해선 지인 외에 사람을 집에 부르지 않는 츠카사를 잘 알고 있어서, 이즈미는 타이트한 스케줄에 휘둘렸을 츠카사에게 잠시 연민을 느꼈다.
“그래서 상냥한 모델 씨는 도와주러 오신 걸까~?”
빙글거리는 얼굴에 돌아온 건 평소보다 더 찌푸려진 미간과 틱틱대는 목소리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돈도 많은 집에 내가 뭐 하러 그런 걸 해줘?”
“맞아, 세나의 본심은 세나 밖에 모르니 망상으로 남겨둘게! 나는 이미 세나를 멋대로 망상하고 있으니까.”
“망상이 아니고 오해겠지.”
이즈미는 이죽였고 레오는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대화가 끊기고 잠깐의 정적이 찾아왔다. 두 사람의 침묵은 펜 소리를 리듬 삼아 이리저리 이어지고 있었다. 연인이 장기 출장을 간 사람으로 도저히 보이지 않을 정도로 레오의 텐션은 높았다. 가끔 흥얼거리는 콧노래는 긴 부재를 아쉬워하는 애달픈 멜로디도 아니었고. 턱을 괸 채 그 상황을 살펴보던 이즈미가 말했다.
“임금님, 괜찮아?”
“안 괜찮을 일은 없지만 괜찮을 일도 없긴 하지! 그건 왜 묻는 거야?”
“그야 이제 2월이니....”
뭐라 말을 하려던 이즈미는 입을 다물었다. 대신 다른 걸 툭 던졌다.
“임금님 취향이 신파인줄은 몰랐는데.”
“무슨 소리야. 신파라니! 듣기만 해도 진부할 요소가 가득할 것 같은데 취향일리가~?”
“웃기시네. 너희 삽질이 얼마나 길었다고 생각해? 졸업하고 나서 장장 7년이라고. 진짜 안팎으로 시끄러웠어. 카사 군은 스캔들까지 휘말렸지, 넌 거기서 땅 파고 있지. 아침 드라마는 시원하게 뺨을 후려치는 장면이라도 나오지, 너희처럼 이렇게 답답하진 않았을걸? 그렇게 겨우 사귀게 됐다고 하더니 바로 카사 군 장기 해외 출장이래. 지금 장난쳐?”
“그래도 몇 년 더 있을 거 일 년으로 줄인 거니까. 그건 칭찬해 줘야지.”
“아니, 애초에 그 해외 출장 건도 카사 군이 배수진 친 거라며? 임금님이 진작 넘어왔으면 이런 일도 없었잖아.”
“그건 결과론이야, 세나. 내 욕심대로 했으면 스오는 나한테 질려서 애초에 여기에도 없었을걸.”
“하아? 아직도 카사 군을 모르네. 카사 군이 쉽게 질리고 할 성격이면 유메노사키 때부터 임금님은 연 끊겼을걸. 임금님 자기혐오가 하루 이틀이 아닌 건 아주 잘 알고 있으니 말해도 소용없겠지만. 그보다 이미 커플이 됐으면 끈적이면서 보는 사람이 더워질 정도로 짜증나게 굴라고. 왜 카사 군 따라가지 않은 거야?”
레오는 잠시 고민했다. 머리에 떠오른 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여러 단어로 자극받은 뇌가 멋대로의 생각을 굴린다.
어린 막내기사와 벌거벗은 왕의 이야기는 그들이 성인이라는 나이를 찍기 전에 시작됐다. 좋아한다, 당신이 밉다, 솔직하게 대답해 달라, 제멋대로인 것도 정도껏 해라, 좋아한다, 진심이다, 사랑한다. 기사가 그의 왕에게 충성을 포기한 대신 품게 된 감정은 아무 포장 없이 뜨거운 맥박이 치는 날것 그대로 쏟아졌다. 어리석은 왕은 도망 다녔다. 차라리 기사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었더라면 그의 치기어린 고백들에게 객관적으로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유감스럽게도 왕은 그 기사에게 비슷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기약 없는 술래잡기는 계속 됐다. 모든 사람에게 폐를 끼쳤다. 눈앞의 세나는 말할 것도 없고, 이런 거에 아무 관심도 없는 리츠마저도. 지루한 전쟁은 계속 되고 더 이상 기사들의 왕이 아닌 그는 결국은 그 기사도 자신을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다. 기사가 가지고 있는, 왕이 사랑해 마지않는 올곧은 마음처럼 그에게 놓일 올바른 길을 걷게 될 거라고.
하지만 결국 왕은 그의 기사에게 항복했다. 일본에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며, 자신을 영원히 놓아버릴 절호의 기회라고 외치는 기사에게 끓는 연정을 고백하고 말았다. 둘 다 알고 있었지만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마음은 결국 이어졌다. 스오 분명 후회할 거야. 품에 안긴 채로 그런 삼류 악당의 최후 같은 대사에 돌아온 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스오 츠카사의 웃음이었다.
그 웃음을 생각하면 지금도 심장이 소란스레 뛰었다.
“망상해 보라고 하고 싶지만-. 내가 맡은 프로젝트도 꽤 되거든. 당장 급한 마감도 있고. 잠깐 같이 있는 건 괜찮지만 그 이상은 무리야. 그리고 잠깐 있을 거면 굳이 같이 갈 의미가 있을까.”
“자기 욕망에 충실한 것처럼 굴면서 또 그렇지도 않네. 일을 잘하는 사람은 싫어하지 않지만.”
“나 세나 취향~?”
“어이 없는 것도 정도가 있지. 임금님은 내 취향에 한참 미달이거든?”
툴툴거린 이즈미는 다시 눈으로 그들의 집을 훑는다. 어디 하나 찬바람 드는 곳 없이 난방이 빈틈없이 들어찬 고급 맨션은 최저한의 소품으로 깔끔한 인테리어를 뽐내고 있다. 이즈미의 깐깐한 기준으로도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아무데서나 드러누워 작곡할 게 뻔한 남자를 배려해선지 잔뜩 깔아놓은 러그 빼곤 합격선인 이 집은 어느 당돌한 막내의 '돌아올 곳'이라는 자기주장이 가득 담겨 있었다.
어쩐지 불청객의 기분을 느낀다. 정말로 이곳은 그들의 성이었다. 한쪽이 잠시 자리를 비운.
“-그렇게 해서 공주님과 왕자님은 행복해졌습니다.”
“으응?”
“아니, 동화처럼 모두 해피 엔드~란 느낌으로 끝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당사자들까진 아니더라도 조연으로 참여했던 드라마였다. 이즈미는 몇 년이나 지속됐던 소란의 완벽한 종결을 보고 싶었다. 이 지긋지긋한 두 놈들과도 슬슬 그만 얽히고 싶고.
“무대는 끝난 다음에 뒷마무리도 중요하지.”
이즈미는 코웃음을 쳤다.
“다음 무대를 위해서? 또 어떤 난장판을 일으키려고?”
“음- 큰 사건은 하나로 족하지 않아? 세나가 또 무대를 기대할 줄은 몰랐는데.”
“사양이거든. 난 깔끔한 마무리를 보고 싶은 거야. 이런 어정쩡한 거 말고.”
“그러려면 역시 스오가 와야겠네.”
“알고 있으면 됐어. 그러니 둘 다 몸 성하게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라고. 지지부진한 건 질색이니까.”
그렇게 말하며 이즈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식탁에서 몇 장이나 종이를 빼곡하게 채우던 레오가 고개를 들었다.
“가?”
“여기 있어서 더 뭐하게. 밥 제때 챙겨먹고 애도 아니니까... 잠깐, 임금님 걸음이 왜 그래?”
의자에서 어기적 걸어 나오는 레오를 보며 지적한 이즈미가 무언가 알아챈 것처럼 인상을 구겼다.
“설마... 떠나기 전에 주는 선물로 첫날밤 뭐 이런 짜증나는 거 아니지?”
“아? 아니야, 아니야. 사귀기 전에도 하긴 했거든.”
“너희 진짜 저질이야.”
세계적인 모델의 모럴은 생각보다 보수적인 듯 했다.
***
츠카사가 떠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시간은 아주 끔찍하게 천천히 지나갔다. 달력에 하나하나 엑스자를 치던 레오는 그것도 금방 포기해버렸다. 남아있는 달력 양이 까마득해서 하지 않는 쪽이 차라리 이 더딘 시간을 덜 민감하게 느낄 것 같았다. 지루함 속에 진하게 녹아있는 외로움과 초조함을 레오는 외면하며 달력을 닫았다.
츠카사와의 사정을 알고 있는 나이츠의 멤버들은 신경이라도 써주는지 레오에게 자주 연락을 해왔다. 불쑥 집까지 찾아온 이즈미까진 아니더라도, 늘어지게 말하면서도 타자는 묘하게 빠른 리츠의 라인이나, 지금 해외에 있다는 수선스러운 아라시의 통화 같이, 기사들은 왕의 무료를 아는 것처럼 그렇게 안부를 전했다.
뉴욕으로 로케를 떠난 아라시는 조금 특별한 소식을 가지고 있었다. 우연히 지역이 겹쳐서 츠카사를 만났다고 했다. 츠카사쨩도 바빠서 오래는 못 있어서 촬영 스케줄 마무리 되면 한 번 더 보기로 했어. 듣기만 해도 배배 꼬는 몸동작이 떠오르는 아라시의 목소리가 경쾌하게 셀카 찍은 걸 나이츠 라인방에 올렸으니 확인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츠카사쨩은 아주 건강해. 임금님도 잘 지내지? 밤샘은 피부의 적이니까!
마침 바로 전날이 마감이라 밤을 꼴딱 샌 레오지만 그걸 구태여 말하지 않는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그런데 임금님, 츠카사쨩에게 준 선물이 뭐야?」
레오는 잠시 멈칫했지만 바다 건너 다른 대륙의 통화자는 눈치 채지 못한 것 같다.
「츠카사쨩이 그게 안 보인다면서 엄청 걱정인 눈치였어. 임금님이 준 선물이라니까 궁금해지는 거 있지? 역시 목걸이? 아니면 좀 더 나가서 반지?」
아라시는 멀리 해외로 나가는 연인에게 줄 사랑의 증표 같은 걸 생각한 모양이지만 레오도 츠카사도 묘하게 그런 것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그런 작은 게 아니고 부피가 좀 있는 건데, 그걸 잃어버리다니 스오도 아직 어린 아이네! 엄청 당황하고 있지 않아?”
「으응. 츠카사쨩 그런 모습 오랜만에 보는 걸. 하긴 다른 사람도 아닌 임금님이 줬으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아주 소중한 거였을 테니!」
“나루의 망상은 사랑하지만, 그런 재밌는 건 아냐. 그건 그냥 캠코더인걸.”
「에에, 캠코더?」
“응, 비디오카메라. 한 손에 이렇게 쥘 수 있어서 학예회에 나간 자식들을 찍기 딱 좋아보였지. 모델명은... 몰라. 사실 내가 산 게 아니라.”
「그렇다는 건-.」
“그래, 뭐 영상이 하나 들어있긴 하지.”
전화기에서 소녀같은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머, 뭐니 그거! 엄청 로맨틱해~! 임금님도 제법인데? 영상편지라도 준 거야?!」
“글쎄, 어떨까~? 이다음부터는 나루가 상상해봐! 머릿속에서는 어떤 화려한 오페라도 무한히 펼쳐질 수 있으니까!”
「너무해, 드라마도 여기서 안 끊기는걸!」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사람 사이의 선을 지키는 건 누구보다 잘하는 아라시였다. 그는 발랄한 목소리로 다시 한 번 건강을 당부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다음엔 다 같이 모여서 보자는 말과 함께.
전화기가 잠잠해지고 레오는 러그에 벌렁 드러누웠다. 더 자도 될 텐데, 침대에 누워 제대로 잘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여기에 누워있다 보면 자지 않을까. 전장 한복판에 있다가 어느새 전쟁을 끝내고 비무장지대에 홀로 서 있는 군인은 이런 기분일까.
조명이 꺼진 무대는 침묵에 휩싸여있다. 고요가 익숙하지 않은 레오는 부들거리는 감촉에서 마찬가지로 이 러그를 딛고 서 있던 한 남자를 떠올렸다. 지금쯤 안절부절 못하며 캠코더를 찾고 있을지도 모를 사람이었다.
‘이거 이렇게 찍는 게 맞겠죠. 되고 있는 건가...’
레오보다 나이도 어리면서 묘하게 기계에 익숙하지 않은 지 몇 번이고 버튼을 누르는 츠카사에게 다가가자 그는 기겁했다.
‘우왓, 가까이 오지 마세요. 지금 찍고 있어요. 이 화면엔 언제나 Leader가 잡혀 있어야 하니까...’
그리고는 카메라 렌즈를 똑바로 향하며 웃는다.
‘아주 잘 찍혀요. Leader는 이걸로 봐도 예쁘네요.’
레오는 오히려 그런 츠카사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의 길었던 전쟁이 끝나 승전을 거머쥔 츠카사의 의사에 따라 둘의 동거가 결정되고, 그와 동시에 고속으로 이사를 끝낸 저녁이었다. 앞으로 두 밤이면 멀리 떠날 츠카사가 간절하게 말했다. 당신과 함께 하는 일상을 가져가도 되냐고.
무슨 소린가 했는데 아침에 눈 뜨면서부터 잠들기까지의 하루를 촬영하고 싶다는 말이었다. 무언가를 촬영하는 것도 처음일 츠카사는 잠자리에 눕기 전까지 설명서와 씨름을 벌이며 시험 영상을 찍었다 지웠다를 수차례 반복한 결과, 다음날 아침 아직 잠에 덜 깨 비몽사몽인 레오에게 REC라는 글자가 빨갛게 떠있을 캠코더와 함께 인사를 건넬 수 있었다.
그냥 아무것도 특별할 게 없는 영상이었다. 어딜 나가는 것도 아니고 평범하게 집에서 지냈다. 다만 그 평범에 츠카사가 추가되었을 뿐. 아이돌 경력이 있는 레오가 카메라를 피할 이유도 없었다. 스오 아침부터 부지런하네, 팬서비스 해줘? 웃츄~ 레오가 본 적 없는 영상은 아마 레오의 하품이 넘치는 더블 피스로 시작할 거다. 어쩌면 츠카사의 아침인사가 찍혀있을 수도 있겠다.
아침을 먹을 때도 들고 있으려는 걸 내려놓고 먹으라고 했던 것도 레오는 기억한다. 그 정도로 츠카사는 전문 카메라 감독이라도 된 마냥 카메라를 놓지 않았다.
‘이런 걸로 선물이 돼?’
한창 작곡을 하던 레오가 문득 물었고 츠카사는 캠코더를 놓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이상한 녀석.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레오는 그 비디오의 츠카사 버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어느덧 하고 있었다.
같이 산지는 약 이틀, 사귀게 된 건 사흘. 레오와 츠카사의 거리는 그렇게 가깝지 않았는데 그가 멀리 있다는 것만으로도, 보고 싶을 때 보러 갈 수 없다는 이유 하나로 레오는 지독한 매너리즘에 빠져있었다. 인스피레이션이 내려오지 않아. 지지부진한 곡만 쓰게 될 거야. 흔해 빠지고 식상하기 그지없는. 장난감을 사주지 않아 떼쓰는 애처럼 바닥에 누워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으름장을 놓다가도 뭐에 홀린 것처럼 다시 펜을 쥐고 머리에 떠도는 시끄러운 악상을 정리하기도 했다. 자신은 천재라는 칭찬을 잊지 않으며.
어쨌든 시간은 지나갔고 이 안온한 감옥에서 레오가 걱정할 것은 없었다. 포로는 얌전히 승자의 논리에 지배되면 된다.
‘하지만 이렇게 자리를 비워서야, 쿠데타 일으키기 딱 좋은 나라인걸.’
츠카사가 없는 무료한 시간 속에서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 그 중 하나인 반역을 곱씹으며 레오는 불온한 싹을 틔울까 고민했다가 금방 그만뒀다. 츠카사와 관련된 일이라면 이길 자신이 없었다. 예전 자신이 막내 기사를 제대로 바라본 어느 날의 라이브처럼, 결국 지고 패배를 인정하고 떠나려는 뒷덜미를 붙잡히지 않을까. 생각해 보니 지금도, 과거도 그랬다. 역사는 반복된다더니. 레오는 츠카사와의 승률을 생각하고 웃었다. 어차피 붙잡힐 거 세나 말대로 진작 넘어왔어야 했을 지도. 잠깐 든 생각에 레오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었다. 레오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게 있었다. 레오가 망쳐놓을지 모르는 츠카사의 눈부신 미래 같은 것이 또 하나 있었다.
급작스레 울리는 핸드폰 벨소리에 레오는 어깨를 움찔거리며 일어났다. 스오가 연락할 시간도 아닌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핸드폰을 본 레오는 눈을 크게 떴다. 통화가 아닌 미리 설정해둔 알람이었다.
-루카 졸업식
레오는 한참 그 글씨를 바라보았다.
졸업. 하나의 끝과 또 하나의 시작. 레오는 츠카사와 떠나고 신나게 써내려간 노래를 생각했다. 왜 그걸 쓰기 시작했는지. 자신도 눈치 못 챘던 곡의 주인을 깨닫고 레오는 침울해졌다. 곡은 완성돼 있었다.
***
2월 한복판의 졸업식은 쌩쌩 부는 찬바람이 옷깃을 흔들고 눈이 올듯 말듯 흐릿한 겨울 하늘 아래에서 진행됐다. 강당에선 아마 사회로 나가는 젊은이들의 앞길을 축복하는 늙은 총장의 목소리가 울렸을 테지만 밖에 나와 있는 레오는 들을 수 없었다. 두꺼운 목도리를 목에 칭칭 감고 모자는 귀까지 덮어서 눌러 썼다. 혹시 몰라서 챙긴 선글라스까지 합해져 밖에 노출된 피부는 극히 일부였다. 목도리 사이로 새어오는 흰 입김을 몇 번 의식적으로 불다가 레오는 다시 나무 뒤에 쭈그리고 앉아 동태를 살폈다. 졸업식의 절차는 다 끝났는지 졸업생들이 대학 건물 이곳저곳에서 가족들과 혹은 친구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루카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붉은빛으로 물든 고운 하카마를 입고 꽃다발을 안은 채 부모님 곁에서 무언가 얘기를 나누는 루카를 보며 레오는 다시 하얀 숨을 뱉었다. 아무리 봐도 여기에서 루카가 제일 예쁘다. 역시 그렇지, 고개를 끄덕인 레오는 얌전히 사진을 찍는 루카를 다시 바라보았다. 망원경이라도 가져오면 더 가까이 볼 수 있었을 텐데.
주머니엔 루카에게 줄 곡이 담긴 USB가 들어있었다. 건네주고 싶었지만 나갈 수 없다. 레오에게 허락된 위치는 이 정도였다. 가족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얼굴을 몰래 볼 정도의 거리. 사실 여기에 있다는 걸 들켜서도 안 된다.
루카는 부모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가끔 이리저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친구들이 기다리는 건가? 부모님이랑 점심을 같이 먹지 않나. 그렇다면 부모님과 헤어졌을 때 잠깐 만나서 전해주는 것도. 아니, 그것도 안 될까. 괜히 주머니 속의 작은 플라스틱 조각을 매만지던 레오는 한숨을 쉬었다. 이런 좋은 날이니 자신을 보지 않는 게 나을 지도 모른다. 곡이야 나중에 우편으로 보내도 되니까. 커밍아웃하고 집에서 쫓겨난 오빠 같은 건 평생을 가도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
“졸업 축하해, 루카.”
들리지 않을 거리에서 조용히 속삭였다. 차가운 공기가 금세 말을 먹어버렸다. 그 순간 루카가 레오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을까. 얼어붙은 레오는 가까스로 자신이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목도리 때문에 입도 안 보이고, 머리색은 모자 때문에 안 보이지. 나가기 직전에 확인한 자신의 완벽한 복장을 떠올리며 레오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돌렸다. 우연히 마주친 것처럼,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자리를 뜨면.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며 슬쩍 루카가 있는 곳을 본 레오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분명 저 멀리 있던 루카가 훌쩍 가까워진 거리에서 레오가 있는 쪽으로 똑바로 다가오고 있었다.
들켰다. 레오는 재빨리 반대편으로 빠르게 걷다가 급기야 달리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달리기는 레오가 빨랐을 터였지만.
“가지 마!”
루카의 비명 같은 외침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날 두고 가지 마, 오빠!”
어떻게 저 소리를 듣고 가버릴 수 있는 오빠가 있을 수 있을까. 레오는 전혀 움직일 생각이 없는 발을 보며 한숨을 쉬고 뒤를 돌아보았다. 하카마를 입어 총총걸음으로 다가온 루카가 숨을 몰아쉬었다.
“오빠 와줬구나.”
“...응.”
레오는 선글라스를 벗었다. 루카가 살풋 웃는 게 느껴졌다. 이런 겨울에, 그것도 구름이 잔뜩 낀 날에 선글라스는 더 눈에 띄었을 텐데. 멋쩍게 선글라스를 갈무리하자 어딘가 갈팡질팡해 보이는 녹색 눈동자와 똑바로 마주쳤다. 레오가 선수 치듯 말했다.
“부담 주려고 온 건 아니고, 졸업인 게 생각나서. 우연히 근처에 있었거든. 그래서 그런 김에....”
말하면서도 레오는 속으로 탄식했다. 이 얼마나 진부하고 치졸한 변명인지. 루카가 고개를 저었다.
“오빠를 부담스럽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어. 지금도 와줘서 정말 기뻐. 그러니까....”
루카의 입에서도 하얀 김이 나오고 있었다. 레오의 숨보다 더 빠르다. 루카의 말은 이어졌다.
“오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지금이 아니면 못할 것 같으니까, 들어줘. 저번에... 오빠가 집을 나가기 전에, 우리 모두에게 이야기를 했을 때 내가 아무 말도 못한 건 오빠가 지금까지 숨겼다는 거에 놀랐을 뿐이야. 나도 알았다면 계속 오빠를 도와줬을 텐데. 그런 나 혼자만의 섭섭함 때문에 그랬던 거지, 오빠를 싫어하는 건 절대 아니야. 내가 너무 비겁해서... 내 감정에 급급해서 오빠를 상처 줬어.”
아니야, 루카. 소리가 되지 못한 부정이 레오 안에서 소용돌이친다. 루카는 잘못한 게 없어.
그 집은 원래부터 레오가 없는 게 더 나은 집이었다. 잘못을 따진다면 반듯한 장남이 되지 못한 레오한테 있다. 그래도 자신이 츠키나가 레오인 이상 레오는 계속 루카의 오빠가 될 수 있었다. 기사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얄팍한 숨줄만 이어져 있던 가족 관계는 결국 깨져버렸다. 이해는커녕 그전까지도 겉돌던 레오였다. 집에서 쫓겨난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런 레오 곁에 츠카사가 있었다. 저 때문이죠, 죄송해요. 츠카사도 사과를 했던 것 같다. 자기가 잘못한 것도 아니면서.
이왕 이렇게 된 거 같이 살까요. 급한 이사는 츠카사가 불쑥 꺼낸 말처럼, 하루 만에 사라졌던 레오의 거주지처럼 갑작스럽게 정해졌다.
과거와 뒤섞인 현재 속에서 루카가 레오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예전보다 조금 컸지만 여전히 작은 체구가 레오를 현실에 붙들고 있었다.
“하지만 오빠로 여기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말은 정말 화났어. 나, 나는 엄마 아빠랑은 다르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오빠를 버리지 않아! 오빠가 언제나 내 편이었던 것처럼, 나도 언제나 오빠 편이야. 루카의 오빠는 오빠 하나뿐이니까.”
레오는 대답할 수 없었다.
울보는 어디 가지 않는지 커다란 눈에 눈물을 그렁거리지만 레오를 똑바로 바라보는 얼굴엔 애써 지은 미소가 고여 있었다. 루카가 언제 이렇게 컸더라? 기묘한 상실감과 동시에 벅차오르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레오의 목을 옭아매고 있었다.
“...고마워.”
소리가 겨우 목울대를 긁고 나왔지만 아주 작아서 루카에게 들렸는지는 모른다. 레오는 다시 목을 가다듬었다. 주인에게 가지 못해 손 안에서 구르고만 있던 USB를 꺼내어 루카에게 내밀었다.
“졸업 축하해.”
이번엔 제대로 닿았다. 엷었던 루카의 웃음이 봄의 꽃처럼 환하게 피어나는 걸 보며 레오는 안도했다. 언제나 걱정이던 아이가 자라나고 그 아이는 레오를 버리지 않는다. 루카만의 멋진 오빠로 있고 싶었지만 그걸 스스로 부순 레오에게 아직 오빠라 불러준다.
비록 계속 곁에 있을 순 없을 지라도. 그가 지켜야 할 어린 공주 대신, 그만을 바라볼 막내 기사가 그를 부를 것이다.
곡이 떠나자 새로운 곡이 태어난다. 레오는 문득 작곡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
귀갓길은 아주 이상했다. 레오는 멍하니 걸었고, 도착한 집이 자신이 살던 옛날 집이라는 걸 뒤늦게 깨닫고는 황급히 돌아섰다가 너무나 반대편 방향인 집의 거리에 결국 택시를 잡아탔다. 선글라스는 어딘가로 사라졌고 하루 종일 굶은 속은 자신의 존재를 새삼 주장하며 쓰려왔다. 잠도 한숨도 못 잤다. 마지막까지 루카에게 줄 노래를 손 보고, 또 손 보고. 그러다 보니 새벽이 밝았던 것도 같다. 어차피 잠도 오지 않았었다.
밥 잘 챙겨 먹으랬는데, 잠도 제대로 자라고 했고. 엄마처럼 잔소리하는 어느 남자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레오는 웃고 싶었지만 잔뜩 피곤한 몸은 제대로 웃지 못했다. 그저 바람 빠지는 소리 같은 게 들렸다.
“손님 괜찮으세요?”
운전석에 앉아있는 택시 기사의 목소리에 레오는 고개를 들었다. 백미러로 이쪽을 신경 쓰는 두 눈과 마주하며 레오는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문득 비치는 자신의 얼굴에 레오는 한 번 더 놀랐다. 언제부터 이랬는지, 고장 난 수도 꼭지마냥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레오는 소매로 눈을 비볐다. 잔뜩 훔친 눈물은 소매를 적셨지만 쉽게 멎지 않았다.
“하하.”
이번엔 제대로 웃음소리가 나왔다. 울면서 넋 빠진 웃음을 뱉어내는 승객을 기사는 이제 두려움이 들어선 눈으로 보고 있었다.
레오는 고개를 숙였고 조금씩 눈물을 떨구어냈다.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렸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무대에 등장하지 않지만 뒤에서 무대를 지탱해 주는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레오는 좁은 택시 안에서 그들의 인사를 들었다. 알 수 없는 피로감이 몰려왔다. 후련한 건지, 기쁜 건지, 슬픈 건지, 뒤죽박죽 섞인 눈물은 끝나지 않았다.
주머니에 들어있는 핸드폰이 진동을 울렸다. 레오는 상대를 확인하지 않고 받았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Leader?」
“스오~”
정말 듣고 싶은 목소리였다.
「혹시 울어요? 무슨 일 있어요??」
“안 우는데?”
「...우리 이제 거짓말 하지 않기로 하지 않았나요. 목소리도 가라앉았고, 전화 받을 때 코 훌쩍이던 소리도 다 들렸거든요.」
“알고 있으면서 왜 물어보는 거야?”
투덜댄 레오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목소리는 의외로 매끄럽게 나왔다.
“-루카땅이 계속 오빠라 해준대.”
바다 건너 있을 상대도 숨을 집어삼키는 게 느껴졌다.
「잘 됐어요. 정말 잘 됐어요.」
화려한 수사어구 대신 츠카사는 저런 말을 반복했다. 단어마다 진심이 뚝뚝 담겨 들려오는 축하를 들으며 레오는 코를 훌쩍였다.
「오늘이 루카 양의 졸업식이죠? Leader와 만나서 정말 다행이에요. 저도 조금 늦었지만 졸업 축하 선물을 보냈어요.」
“스오도 알고 있었어?”
「네. 미리 체크해 두고 있었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세나 선배가 알려준 거예요. 그렇게 바쁜 스케줄이시면서 어떻게 챙기는지 신기할 정도라니까요.」
레오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아까 루카가 묘하게 두리번거리기도 했고, 수상한 사람을 보자마자 바로 달려온 것도 그렇고, 설마.
“...세나한테 자꾸 빚을 지게 되네.”
「Leader? 잘 안 들렸어요. 뭐라고 하셨어요?」
“별 말 아냐. 그냥 나의 기사들은 언제나 사랑스럽구나 하고~”
「영문을 모르겠는데요.... 바람을 피겠단 소린가요?」
“너희들 전원 내 아이 같은 거라고 했잖아? 스오는 조금 달라졌지만. 그보다 캠코더는 찾았어?”
「어떻게 아신 거죠?! ...이건 나루 선배겠군요. 밤말은 세나 선배가 낮말은 나루 선배가, 라는 느낌입니다.」
한숨을 쉰 츠카사가 이어 말했다.
「캠코더는 무사히 찾았어요. 말해두지만 절대 부주의하게 둔 건 아니니까요! 제가 묵던 호텔이 갑자기 단수가 돼서 급히 새 호텔을 찾아야 했거든요. 그렇게 짐을 옮기는 와중에 안전하게 보관한다고 겨울 점퍼 속에 보관한 걸 깜박했어요. 어찌됐든 무사히 찾았으니까요. 지금 이렇게 제 옆에 계시고.」
딸깍이는 소리가 나더니 무언가 작은 소리가 들렸다. 묘하게 음질이 낮은 그 소리는 아마 츠카사가 재생한 비디오 파일에서 나는 소리인 듯 했다. 비디오 속 작은 화면에서 레오와 츠카사가 나누는 얘기는 정확히 들리지 않았지만 그들의 정지된 일상을 보내고 있을 터였다.
“다행이네, 그거 남들에게 보이면 큰일 나잖아?”
「그렇죠. 저만 봐야 할 Leader가 한가득이니까요. 여기에 큰 TV도 있어서 연결해서 보는데 최고예요. 이 커다란 화면에 비치는 당신이 너무 사랑스러워요. 식탁에서도, 거실에서도 그렇고... 물론 침대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겠죠.」
“그래~? 설마 침대까지 카메라를 들이밀 줄은 몰랐지. 복습하면서 한 발 뺐으려나, 젊은 기사님은.”
「들켰네요. Leader가 야한 게 문제입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책임전가를 하는 츠카사에게 레오는 웃고 말았다. 택시 기사의 표정은 더욱 미묘해지고 있었다. 뭐, 어떠랴. 그의 행동이 언제나 그렇듯 레오는 주위에 신경을 쓰는 대신 자신의 연인과 통화에 더 집중하기로 했다.
“옮긴 호텔은 괜찮아?”
「원래 호텔에서 수배해 준 곳인데 생각보다 괜찮아요. 이쪽과 장기계약을 할까 고민도 될 정도예요. 회사랑 접근성도 괜찮고, 조식도 꽤 맛있고.... 이제 Leader만 있으면 돼요.」
“1년 참기로 했잖아? 그래서 준 선물이고.”
「알고 있어요. 방금 건 츠카사가 부리는 어리광이랍니다. 전화할 때마다 들어야 할지 모르니 각오하세요.」
눈물은 흘렀던 때와 마찬가지로 어느덧 멎어 있었다. 레오는 가만히 츠카사와 아무것도 아닌 대화를 계속 나눴다. 그것만으로도 세상에 밤이 찾아오는 기분이었다. 안온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까맣고 반짝이는 그런 세계.
「어서 돌아가서 Leader와 같이 살고 싶어요.」
“이미 같이 살고 있잖아. 스오가 잠시 출장 나간 거지.”
「참, 그렇죠. 조금만 기다려줘요. 이 시간도 금방 지나갈 거니까요. 그렇죠? 제가 유메노사키에서 Leader를 만나고 나서 흐른 시간들처럼 말이에요.」
츠카사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귓가에 닿고 녹아든다.
택시가 천천히 멈춰서고 있었다. 레오와 츠카사가 돌아와야 할 곳이 눈앞에 있다.
무대 위의 조명이 하나도 남김없이 꺼졌다. 관객들은 퇴장한지 오래다. 스탭들도 철수한 어둠 속에서 레오가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행복해졌답니다. 해피엔딩을 고하는 나레이션을 마지막으로 깊은 침묵을 맞이한 곳에서 레오는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이제부터가 문제 아냐? 역경과 고난을 뚫고 서로 만난 왕자와 공주가 서로 성격차이 때문에 이별을 고민한다든지. 성에 돌아온 건 좋은데 100년이나 잠들어 있어서 보수 공사할 곳이 산더미라든지. 농담처럼 건넨 목소리에 뒤이어 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그래도 전쟁이 끝나면 평화의 시대가 오니까. 지루할지도 모르고 답답할지도 모르는 시대라지만 적어도 서로가 총칼을 겨누던 때보다 낫지 않겠어? 둘 다 레오의 목소리인 그 소리들은 사라진다.
레오 앞에 놓인 날들은 아직 무수히 있어 해피엔딩이란 한 마디로 마무리 지을 수가 없었다. 또 다른 사건이 기다릴 지도 모르는, 새로운 엔딩이 기다리는 끝으로 계속 걸어가야 한다.
이야기가 모두 끝난 무대에서 레오는 다음 장을 넘긴다. 다음 장, 다음 장. 그것은 하루라는 이름의 페이지였다. 다음날, 다음날, 그리고 다음날.
츠키나가 레오는 스오 츠카사의 귀환이라는 새로운 페이지에 도착하길 기다리며 끝이 날 하루들을 조금씩 앞당긴다. 그 날들은 지루하지만 조용하고 따뜻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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