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카레오 - 츠키나가 레오의 죽음
츠키나가 레오에게는 언제나 사랑이 있었다.
주변 하나하나가 모두 보석 같다. 보석은 각기 다른 색과 다른 빛남으로 레오를 황홀하게 했다. 아름다운 것은 사랑해야 한다. 레오는 그것들을 찬양할 능력이 있었다. 그들을 찬양하는 노래마저도 보석처럼 빛났다. 사랑이 가득 찬 세계지만 마냥 아름다운 건 아니다. 바닥에 구를지언정, 결국은 다시 일어나서 빛을 발한다. 같은 가지에서 피어나는 꽃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한 이가 있었으니까 기대대로 꽃을 피웠다.
레오는 다시 오른 무대의 눈부심을 기억한다. 눈물처럼 흩날리는 사이리움의 물결에서 느꼈던 전율, 수많은 이의 시선. 레오는 다시 눈을 깜박였다. 이번에도 수많은 이의 시선이 느껴졌다. 다들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레오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레오는 전율 대신 공포를 느꼈다. 붉게 펼쳐진 버진 로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보석 같은 순간에 레오는 그 어느 때보다 죽음을 느끼고 있었다.
예능을 찍으러 멤버끼리 합숙을 간 날이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조명도 반사판도 그 빛을 내지 않고 속살거리는 소리 대신 풀숲에서 우는 벌레소리가 선명하게 들릴 적 레오는 어둠 속에서 홀로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인스피레이션이 내려온 것도 아닌데 왜 잠이 오지 않는 걸까.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방 안의 가라앉은 공기를 입으로 코로 가늠하고 있을 때, 레오는 자신의 옆자리가 무던히 신경 쓰인다는 걸 그제사 깨달았다. 아마 자고 있을 것이다. 더운 여름에 엄청 지쳐했지만 그만큼 시골 배경에 누구보다 흥분하고 있었다. 귀여워, 귀여워. 우리 막내 너무 귀여워. 팔불출처럼 그렇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닿고 싶어, 그런 느낌. 모두의 숨소리는 고요하다. 잠자리에 든 지 몇 시간은 지났을 거다. 레오는 뒤척이는 척하며 한 바퀴 뱅그르르 굴렀다. 살짝 닿았을 거리면 충분한데 생각보다 가까웠는지 레오는 곤히 잠든 몸과 거의 정면으로 부딪혔다. 끄응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미안, 이렇게 소처럼 받을 생각은 아니었어! 내적 비명은 울리지 않았다. 레오는 숨을 멈췄다. 잠결에 밀어낼 줄 알았던 손은 얌전히 레오를 덮는다. 뭔가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심장 소리가 이 세상의 소리를 잡아먹을 정도로 쿵쿵 울리고 있었다. 죽부인 같은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굴러들어온 자신을 얌전히 안아주는 츠카사 품에서 레오는 몇 번이고 눈을 깜박였다. 이대로 있어도 될까. 잠결이고. 나는 잠결이 아니지만. 냉동 고등어처럼 딱딱하게 얼어붙은 채로 레오는 등에서 들리는 다른 이의 심장 소리를 듣는다. 황홀한 소리였다. 잠에 들 수 있을 리 없었다. 이 소리를 영원히 들어야 했다.
희망은 저도 모르게 피어나고 있었다. 연습 중에 스치듯이 부딪친 손을 피하지 않았고, 눈을 마주치면 동그랗게 떴다가 환하게 웃어왔다. 무슨 일이세요? 무슨 일이냐면 너와 잘 되는 상상을 하고 있어. 물론 그렇게 대답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잠결에 와도 안아주고, 그럼 이 정도 상상은 용서되지 않을까. 팬들의 눈을 피해 모자를 푹 눌러쓰고 선글라스도 쓰고 사람이 적은 곳으로 가 함께 걷는 상상, 카페에서 달콤한 것들을 잔뜩 시키고 행복해하는 너를 보고 있는 상상, 서로의 생일에 단둘이 불을 켜는 상상, 어쩌면 서로 손을 잡고 잔뜩 고양된 눈으로 마주보다가 서서히 가까이 오는 얼굴이라던가....
달콤하지만 부질없는 상상이었다. 레오는 옆을 보았다. 긴 머리칼을 가진 그녀가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붉어진 얼굴로 웃고 있다. 레오는 웃을 수 있었다. 이곳이 무대라면 그 무대를 망칠 수 없었다. 레오는 제법 잘 해내고 있었다. 인사하는 이들에게 웃어왔다. 퍼펙트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행복한 신랑을 그럭저럭 연기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앞에선 모르겠다. 달콤한 상상의 주인공은 여전히 상냥했다. 레오가 기억하는 부드러운 얼굴로 다가와서 결혼 축하한다고 말했다. 그 때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잘 했을 거라는 자신감도 없다.
하객들 속에 어느 보라색 눈동자도 자신을 보고 있을 것이다. 멤버들은 모두 너그러웠다. 나이츠를 망칠 뻔한 그의 결혼식에도 찾아와주었다. 아니면 매스컴이 보고 있기 때문에 그랬을 지도 모른다. 나이츠는 아무 문제없어. 이것만 알아주면 된다. 하지만 역시 츠카사에게 축하 인사는 받고 싶지 않았다.
평소에 아무거나 마시지 말랬는데. 팬이 주는 거니까 더 조심하라고 했는데. 세나 말을 들을걸. 가장 많이 했던 후회였다. 눈을 뜨니 낯선 천장. 머리가 기분 나쁘게 징징 울리고 있을 때 레오는 어리둥절하게 몸을 일으켰다. 싸구려 매트릭스가 기우는 느낌과 함께 레오는 자신이 아무것도 안 입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반사적으로 옆을 봤지만 우려와 달리 옆자리는 텅 비어있었다. 화장실에서도 누가 씻고 있는 기색은 아니었다. 어제 술을 마셨나? 전혀 기억이 없다. 무언가를 먹은 건... 팬이 준 음료였다. 하지만 아무도 없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떨어진 옷들을 주워 입고는 누가 올지 몰라 기다리다가 결국 체크아웃 시간이 돼서 나왔었다. 아마도 이 때였을 거다. 레오의 아이가 생긴 날은.
그 기억마저 흐릿해질 때 소속사에 몇 장의 사진이 날아왔다. 침대에 나신으로 누워있는 남자와 여자, 여러 각도의 사진(남자는 멍청한 얼굴로 잠들어 있다), 그리고 초음파 사진. 그 사진의 주인공은 전혀 기억을 못하는 웃기는 상황. 모텔은 기억나요. 거기서 혼자 자고 있었는데. 이 한 마디로 소속사는 모든 상황 파악을 완료한 듯 했다.
하나씩 하나씩 차근차근 쌓아올려 이룩한 시간보다 무너지는 시간은 훨씬 빨랐다. 그나마 나이츠 전체가 무너지는 건 막을 수 있었다. 레오 하나만 빠지고, 팬과의 결혼으로. 일선에서 물러나지만 뒤에서 작곡으로 멤버들을 지지한다. 멤버 한 명의 공백은 타격이 크겠지만 팬을 건드리고 심지어 임신까지 시켰다는 스캔들보단 나았다. 상대가 원하는 건 하나였다.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매스컴 보도까지 불사하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만큼 사고치고 연락 일절도 없는 한심한 남자를 원한다고 했다....
신부의 배가 더 부르기 전에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레오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여자를 만나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줄곧 이 날을 꿈꿨다는 그녀 앞에서 레오는 그가 줄곧 꿈꿨던 날을 말하지 못했다. 아직도 기억하는 온기가 있는데 이젠 가질 수 없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붉은 융단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왜 이렇게 됐을까, 뭐가 잘못 됐지? 그날 모텔을 나오지 말고 사람을 불러서 해결할걸, 역시 세나 말을 들을걸. 다 멍청했어, 그러니까 그냥 도망치면. 이 자리에서 도망쳐서 없었던 일로 만들어 버리고 사라지자. 도망치는 건 특기니까.
하지만 그러지 못한 건 하객들 사이에 있을 한 사람 때문이었다. 모든 이들 앞에서 도망칠 용기는 없지만 그 한 사람 앞에서 도망칠 수 없었다. 축하한다고, 행복해지라고 했다. 도망치면 행복해질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적어도 여기에선 도망칠 수 없다. 도망 끝에 나이츠의 몰락이 있다면 더더욱.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는 벌거벗은 왕 츠키나가 레오는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신부와 검은 양복을 입은 주례사에게 그가 사랑하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사형을 당했습니다.
로 이야기가 끝날 줄 알았지만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결혼이라는 무덤속에서도 망자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심지어 더 이상 출연하지 않을 뜻밖의 배우까지 함께.
“스오 삼촌~~~”
레오 품에 안겨 있던 아이는 남자를 발견하자마자 보채기 시작했고 작은 발은 땅을 디디자마자 곧바로 달음박질 친다. 남자는 두 팔을 벌려 아이를 끌어안았고 번쩍 안아들었다. 마이쨩 잘 지냈어요? 솜사탕처럼 사르르 녹을 것 같은 웃음이 아이에게 아낌없이 내려지고 있었다. 이곳에선 들리지 않는 속살거리는 소리가 오가고 있었다. 레오는 어쩐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후에 아주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마이쨩, 스오를 너무 귀찮게 굴면 안 돼.”
“하지만 마이는 스오 삼촌이 아주 좋은걸. 스오 삼촌도 그렇지?”
“물론이죠.”
아주 잠깐이다. 자신이 마이였더라면, 저렇게 거리낌 없이 달려서 안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잠깐의 생각이 폭죽처럼 피어오르고 이내 빵! 하는 소리와 함께 사그러든다. 4살짜리 애아빠가 가지기에는 파렴치한 생각이다.
“오늘은 뭐가 먹고 싶어요? 마이쨩이 먹고 싶은 거라면 뭐든지 사줄게요. 두 사람은 운이 좋네요, 오늘 마침 월급날이거든요.”
“아니, 이번에도 얻어먹을 순 없거든. 저번에도 먹었으니까 이번엔 내가 살게.”
“저것 봐요, 마이쨩. 삼촌이 멋지게 뽐낼 찬스를 리더가 가져가려고 해요.”
남자의 장난기 넘치는 눈이 레오에게 닿았다. 상냥한 얼굴이다.
아마 레오 가족 다음으로 츠키나가라 명패가 써 붙인 집에 많이 들렸을 츠카사는 언제나 이랬다. 나이츠 멤버와 모두 데면데면해질 거라 생각했는데 츠카사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예전보다 친밀하게 다가왔다. 아이를 좋아하는 성격인 모양이었다. 아이가 제 발로 걷기 시작할 무렵엔 그 빈도수가 더 늘었다. 츠카사가 이렇게 아이를 잘 보는 지 레오도 몰랐다. 사랑을 받은 아이는 사랑을 더 잘 나눠준다고 하는데, 그런 맥락이 아닐까 레오는 생각했다. 테이블에 앉아서도 자연스럽게 수저를 레오와 마이, 자신 앞으로 놔준다. 셀프로 수저를 두어야 하는 식당에 잘 가지도 않을 거면서 물까지 따라놓고는 눈이 마주치자 미소로 답한다. 레오는 시선을 슬쩍 피했다. 친절을 웃으며 받아들이는 것조차 힘겹다. 그 친절의 끝을 상상할 수 없게 돼서는 더더욱.
“디저트 아이스크림은 어떤 맛으로 드릴까요? 딸기맛, 바닐라맛, 메론맛이 있는데 따님은 무슨 맛을 좋아하시나요?”
직원의 친절한 말은 두 사람을 당혹시켰다. 약간 헛기침을 한 츠카사가 말했다.
“아버지는 이쪽이에요.”
“네? 앗, 실례했습니다!”
허리를 명백히 츠카사 쪽으로 기울인 점원은 화들짝 놀라다가 뒤늦게 레오를 바라보았다.
“마이는 무슨 맛이 좋아?”
“마이는 딸기맛~!”
고개를 들면 딸기맛, 알겠습니다 라고 대답한 점원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황급히 돌아갔다.
“나보다 스오가 더 아빠 같은가봐.”
“리더가 동안인 것도 있겠지만요. 그리고, 리더랑 많이 닮은 편은 아니니까.”
살짝 목소리를 낮추어 츠카사가 말했다. 마이는 식당 밖에서 지나다니는 퍼레이드에 온통 정신이 쏠려 있었다.
“응, 엄마를 닮았지.”
아이의 둥그런 머리통을 레오는 슥슥 쓰다듬었다.
“그래도 셋이 나란히 있으면 한 가족처럼 보이지? 그러니까 내가 입만 다물면.”
“옛날 얘기네요. 예전 리더의 평가였죠? 입 다물면 기품이 느껴진다고 했었나.”
“기품보다 어른스러움이 느껴져야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멀리 들렸다. 꼭 남이 말하는 걸 옆에서 보는 기분이었다. 그랬던 시절도 있었다. 이제 자신의 것이 아닌 이야기 같았다.
츠키나가 레오의 사형은 훌륭히 집행되었다. 이제 이전의 츠키나가 레오는 없다. 이전을 기억하는 사람들 앞에서 그 허상을 흉내 낸다. 그 정도는 자신 있었다. 예전의 자신의 모습을 흉내내는 것 정도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행복한 가정 속의 츠키나가 레오였다. 팬과 연애 결혼이 가능하다는 것, 이후도 문제없다는 것. 레오에게 아이돌의 모습 대신 또 다른 조명이 비춰졌다. 예상하지 못했던 것들이다. 팬들에게 또 다른 꿈을 심어줘야 했다. 지금은 좀 덜하지만 잊을만 하면 매스컴이 찾아왔다. 예능에도 나와야 했다. 그의 아내는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레오는 거절해선 안되었다. 나이츠를 은퇴하면서까지 이뤄낸 결혼이 불행덩어리여선 안됐다. 나이츠가 해산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끝까지 나이츠를 아름답게 빛내야 했다.
“사실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리더는 리더인 걸요. 실컷 떠들어도, 가만히 있어도, 어떤 행동을 해도, 어떤 곳에 있어도 당신이란 사람이고요. 신경 쓸 것 없어요.”
반듯한 유닛의 막내는 이때도 이런 소리를 했다. 그런 점을 레오는 사랑했었다. 무엇을 해도 츠키나가 레오, 너무 좋은 말이었다. 그런 말이 적용되지 않는 인간이 된 지금은 더더욱.
“지금 무슨 생각해요?”
레오는 그 질문에 너무 늦게 반응했다는 걸 깨달았다. 입이 열기도 전에 날카로운 마찰과 함께 얼굴이 돌아갔다. 레오는 저도 모르게 뺨에 손을 가져갔다. 잔상처럼 남은 열이 화끈거렸다.
“날 앞에 두고 딴 생각 했어요?!”
물기가 가득 담긴 눈으로 그렇게 말했다. 아니, 아니. 레오는 고개를 흔들었다. 시야 너머로 둥그런 가슴과 결을 따라 완만한 곡선들이 보인다.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나신이 눈앞에 있다. 관능적인 장면에서 침대 위의 신입 배우는 처음 카메라를 받은 것처럼 압박감에 시달린다. 어떻게든 해야,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나이츠 멤버끼리 야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부끄러워하는 반응이 귀여워서 짜증내는 이즈미를 모른 척 더 떠든 적이 없다. 그래서 봤다는 말이야? 하하! 이렇게 빼는 스오도 결국은 하겠지! 스오 인기 많을 거야! 여기 있는 모두가 그렇겠죠, 저희는 아이돌이잖아요. 볼멘소리로 말하는 아이의 볼 끝이 좀 붉어져 있었다. 아이돌은 사랑 받아야 하고 사랑을 나눠줘야 한다. 이제 유일한 레오의 팬에게 레오는 사랑의 결실을, 아니 사고의 책임을 마땅히 짊어져야 하는데. 잘 되지 않았다. 술이라도 먹어야 하는 걸까? 레오는 흰 살결 앞에서 얼어붙고 심지어 겁에 질리는 자신을 보았다.
무대 위에서 빛나던 아이돌은 정말로 죽었다. 그 재 속에서 태어난 한 가정의 가장은 조립이 덜 된 것처럼 마구 삐그덕거렸다. 스테이지가 제 안방인양 마구 날뛰고 멤버들에게 이리저리 치대며 브이 사인을 크게 보였던 이는 사라졌고, 점점 수그러드는 어깨와 한 마디도 제대로 못해 어물거리는 한심한 인간만이 남아있다.
“아아, 나도 모르게 얼굴을.... 그래도 레오 씨는 아이돌인데, 미안해요. 너무 화가 나서 그만... 아아, 어떡해....”
은퇴했으니 더 이상 아이돌이 아닌데, 그녀는 언제나 그렇게 말했다. 손이 뻗어져와 볼을 부드럽게 감싸서 어루만진다. 뭐라고 대답을 하지도 못하는 사이 뺨을 비비던 손이 머리를 끌어당겼고 이내 레오는 둥근 둔덕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달콤한 사과의 목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손바닥이 아무 것도 입지 않은 등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미안해요, 레오 씨, 다 알아요. 응응, 이런 건 내가 처음이랬잖아요? 엄청 기뻐요. 당신은 당연히 이런 거에 익숙할 줄 알았는데.... 아니야, 괜찮아요. 비록 사고였지만 마이를, 우리 아이를 함께 만들었잖아요? 그건 사고가 아니고 이 미래로 이어져야 할 당연한 일이었어요. 그러니까 우린 잘 할 수 있어요.”
그녀는 둘째를 원했다. 그렇게 하면 더 사랑이 깊어질 것이라는 듯이.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원하는 상사처럼 레오를 쉼 없이 쪼았다. 레오는 점점 위축되어갔다. 그 사고라는 것도 기억도 없는 일이다. 그녀를 사랑해야 하는 것마저도 벅찬 상황에서 그러한 행위까지 이어질 수 있을 리 없었다. 이제는 츠키나가에 적을 둔 그녀는 그런 레오를 이해하지 못했다. 울고 화내고 급기야 폭력까지 나왔다. 그녀의 인생을 진흙탕으로 처박은 것에 대한 아주 당연한 형벌이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맞는 건 아팠다. 견디다 못해 막거나 하면 그녀가 더 크게 울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정당한 폭력에 레오는 점점 무뎌져가는 자신을 느꼈다.
“엄마랑 싸우지 마....”
유독 심했던 어느 밤의 다음날, 마이가 그렁거리며 말했다. 레오는 멍한 눈으로 아이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 아빠가 잘할게.”
어떻게 잘해야 할까? 그 방법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대답했었다. 손바닥도 맞부딪혀야 소리가 난다고 했다. 레오는 저항하지 않지만 그 이전에 그녀의 자존심이 매번 부수어져 어떻게든 소리가 나고야 말았다. 그러니까 그녀를 제대로 안을 수 있다면 무언가 맞부딪히는 소리는 나지 않을 터였다.
아예 그쪽이 고장 난 건 아닌지 쌓이고 쌓인 날엔 어떻게든 할 수 있었다. 쾌락 보다는 의무에 가까운 행위가 한차례 끝나면 레오는 방전된 기계처럼 아무 것도 못하고 쓰러져 잠들었다. 유일하게 여러 번을 한 적도 있었다. 염색을 고민하는 그녀에게 붉은 머리를 아무 생각 없이 추천했었다. 그리고 침대 위에 흐트러진 붉은색 머리칼은 이상한 연상을 가져다줬다. 그녀는 너무나 만족스러워했지만 레오는 죄의식에 짓눌려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두 사람에게 터무니없는 짓을 저질렀다는 자책에 아주 오랜만에 눈물이 흘러나왔다.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이었다.
그녀의 붉은 염색은 금방 빠졌지만 좋은 기억 때문인지 그녀의 머리는 가끔 붉게 물들곤 했다. 물론 그 때와 같은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누군갈 겹쳐서 안는 것보다는 남자 구실도 제대로 못하는 폭언과 함께 얻어맞는 편이 더 좋다고 레오는 생각했다. 아주 간신히 그녀를 안는 날은 이어졌다.
아이돌 레오가 죽은 날, 작곡가 레오도 죽었다. 이 죽음은 레오 혼자 눈치 챘다. 여자는 아이돌이자 작곡가인 남편을 자랑스러워했다. 집안에는 언제나 레오가 만들었던 노래가 흘렀으며, 나이츠가 해체한 것을 아쉬워하면서도 레오가 새로운 남성 아이돌의 노래를 작곡해 주었으면 했다. 레오는 그 기대에 부응해 펜을 잡고 텅 빈 오선지를 보고 억지로 손을 움직였다가 멍청이처럼 이어진 음계들을 찢곤 했다. 어느 부부의 밤과 똑같았다. 간신히 짜내어 만든 곡을 가져가면 사람들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말고 다른 느낌은 없을까요? 좀 더 통통 튀었으면 하는데....’
‘나쁘지 않지만.... 흠, 이런 것보다 예전에 만들었던 그 곡처럼 말이죠....’
평작을 눈앞에 둔 사람들은 감탄 대신 어정쩡한 감상을 내놓았다. 그 말들이 한 덩어리로 뭉치면 이런 말이 되었다.
‘츠키나가 레오도 이제 한물갔네.’
레오는 동의했다. 이런 곡은 나도 쓰고 싶지 않아. 내가 하고 싶은 건 좀 더 이런, 가닥들이 높은 곳으로 올라올 생각도 못하는, 느릿느릿하게 한걸음 한걸음 전진하는 곡. 장엄하게 내리 떨어지는 노래는 격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다가 거대한 어둠으로 막을 내릴 것이다. 장송곡, 무엇보다 쓰고 싶은 노래였다. 아무도 추모하지 않는 죽음을 스스로가 추모하고 싶었다. 그 누구도 모르는 죽음에게 홀로 바치는 노래.
그렇게 흐르는 서정적인 감정 옆에서 한 이가 열심히 숫자를 중얼거린다. 아직 괜찮아, 곡 저작료가 있고 이걸로는 당분간 문제없어, 아이 한 명 키우는 데에 돈이 얼마나 들지? 두 명이면 감당이 안 될지도 몰라.
둘째. 레오는 숨이 막혔다. 안 돼, 지금도 엉망진창인데 나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 쓰는 곡 하나도 제대로 완성 못하고 머저리 같은 것만이 튀어나오고 있는데 맞으면서 겨우겨우 한심하게 만든 아이까지, 그만, 그만, 그만.
레오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머리를 처박고 자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작업실에서 멍하니 있다가 핸드폰을 켰다. 아내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우리 도착했어요, 피곤하니까 금방 잘 것 같아. 작곡 힘내요, 사랑해요.]
레오는 글자들을 느릿느릿하게 읽다가 손을 움직였다.
나도 사랑ㅎ
그렇게나 외치고 다녔던 사랑이 지금은 잘 나오지 않았다. 그 거대한 사랑은 어디 갔을까. 시체에게 감정이 깃들리 없었다. 결국 아무 것도 적지 못하고 레오는 핸드폰을 닫았다. 오늘도 아무것도 못한 채 작업실을 나왔다. 검은 밤이 죽음처럼 다가와 있었다. 레오는 죽음을 향해 주춤주춤 걸어갔다. 그리고 곧 집어삼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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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봐도 대체 무슨 소리인지, 하실 텐데 사실 츠카사 시점이랑 서로 맞물려야 되는 글이라 정말 영문을 모르겠죠.
그래서 공개 안하려고 했는데 어흐......
미래AU의 배경 같은 느낌으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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