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잔뜩 몸을 움츠리고 있는 주제에 나오는 목소리만큼은 꽤나 달콤했다. 드라마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던지는 회심의 대사라도 뱉듯이 그가 말했다.
“연이 있으면 Eearth 10바퀴를 돌아도 만나게 된다고.”
“엄청 우주적인 비유인데. 지구를 빙빙 돈다니!”
“인공위성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그만큼 사람 사이에는 연이라는 게 존재해요.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남자의 볼은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레오는 그걸 재밌게 보다가 자신의 볼에 손을 가져다 댔다. 차가운 손바닥 아래로 얼음장처럼 질려있는 볼이 느껴졌다. 한여름 밤에 진귀한 체험인데. 우주인도 이런 느낌일까? 더운 여름을 우주인은 빙하기처럼 느낄지도 몰라! 금세 다른 곳으로 빠지려는 레오를 눈치챈 것처럼 스오 츠카사가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각오한 잔소리 대신 다른 말이 나왔다.
“많이 추워요?”
츠카사 뒤로 쏴하는 빗소리가 다시 들렸다. 레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는 스오가 더 추워 보이는데.”
“저는 멀쩡합니다. 당신은 원래 추위에 약하니까.”
츠카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지만 그는 모를 것이다. 그의 입술은 평소의 건강한 붉은 기가 사라지고 점점 파랗게 질려가고 있다는 걸. 레오는 손을 뻗어 그 입술을 문질렀다. 예상보다 조금 열이 있지만 역시 서늘하다. 이 녀석 이러다 죽는 거 아냐? 그런 걱정과 달리 츠카사의 얼굴은 아까보다 조금 붉어져 있었다.
“이거 무슨 의도로 받아드려야 하나요. 대답으로 생각해도 될까요?”
“질문을 안했는데 무슨 대답이야? 스오 입술이 페인트 사탕이라도 먹은 것 같아.”
“당신도 마찬가지에요. 그리고 질문은 아니지만 저는 당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츠카사는 몸을 가까이 붙였다.
“이런 때 얘기하는 것도 우습지만, Leader. 슬슬 포기하시는 게 어떠신가요. 그렇게 도망쳤는데 결국 이렇게 만났잖아요.”
“우연이지. 나도 도망친 건 아니고, 스오도 날 찾으러 여기 온 건 아니잖아.”
“당신과 나는 이렇게 우연히 계속 마주쳤잖아요. 우연이 계속되면 필연이라고 하죠.”
츠카사가 들떠 말했다. 레오는 생각했다.
우연히 식당에서 만나나 했더니 알고 보니 같은 건물에 살고 있었고, 해외 로케이션 장소는 츠카사가 유학 간 캠퍼스였다. 졸업 후 행보에 우연이란 이름의 스오 츠카사가 계속 끼어들었다. 한쪽이 여자였다면 적당한 로맨스 물로 보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그렇게 믿어왔던 것 같다. 생각보다 개방적인 스오 가의 도련님은 결국 진심을 듬뿍 담은 고백을 했고 레오는 그 고백을 보류했다. 일단 일이 너무 바빴다.
“제 인내심에 칭찬해 주세요. 놀랍게도 제가 고백한지 일주년이 되기 직전이랍니다.”
“칭찬해 줄게요, 스오 츠카사 군.”
되는 대로 지껄인 레오는 한숨을 쉬었다.
“대답을 피하려던 건 아니었어. 어 그러니까 하는 건 마저 끝내야 하니까.”
“네, 이해해요. 사실 저도 바빠서.”
잠시 침묵한 츠카사가 말했다.
“그래도 하늘은 역시 제 편이네요. 어떻게 휴가지가 겹쳐서 이런 exciting한 체험도 같이 할 수 있는 거잖아요. Leader도 인정해요. 저희 둘은 분명 하늘이 정한 짝일 겁니다.”
대국민 스마트폰 보유의 21세기에 터지는 방언 같은 내용엔 코 훌쩍임이 더해져서 없는 진지함이 바닥을 굴렀다. 장기 프로젝트가 끝나고 뒤풀이 겸 오게 된 휴양지에 태풍이 발생한 것과, 인스피레이션이 넘쳐흘러 멋대로 이탈한 레오가 오두막과 거의 다를 것 없는 허름한 건물에 고립된 츠카사와 만나게 됐다는 건 확실히 굉장한 인연이긴 하다. 그래도 역시 고백을 되새김질하기엔 장소도, 시간도, 상황도 별로인 게 아닐까.
뜨거운 태양 아래 시원한 칵테일은 오간데 없고. 유리창도 없어 굵은 빗줄기를 가감 없이 그리는 밖과 거칠게 휘날리는 지붕 아래로 삐져나온 지푸라기, 젖은 나무 바닥을 괜스레 둘러보던 레오가 하품을 하자 츠카사가 깜짝 놀라며 레오의 어깨를 강하게 쳤다.
“Leader! 지금 잠들면 안 됩니다! 죽을 거예요!!”
“안 자...”
얼얼한 어깨를 문지르며 레오는 대답했고 츠카사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제 위치를 파악했을 텐데 이상하게 구조대가 늦는 군요. 이러다가 죽는 건 아닐지... 억울합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못하고 죽는 건! Leader를 만난 건 죽기 전에 Love Castle 쌓으라는 계시가 아닐까요?”
“물이 저기까지 차올랐잖아. 진입하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다 대기하고 있을걸. 빗줄기가 좀 잦아들면 바로 올 거야. 완전 외지도 아니고. 구조하러 왔는데 너랑 나랑 뒹구는 모습을 보여줄 거야?”
“Leader, 저랑 할 의사는 있으셨군요!”
감격한 츠카사와 달리 레오는 이제 달아나버린 인스피레이션과 서바이벌 상황에 떨어지면 제일 먼저 죽을 것 같은 도련님이 진지하게 걱정되기 시작했다.
“처음에 옷을 벗으라고 한 것도 그런 의미였나요? 이 불초한 츠카사를 용서해 주세요. 깨닫는 게 늦었네요.”
“아니. 그거 그대로 입고 있었으면 배로 추웠을 테니까.”
“그래요, 역시 처음은 집이나 호텔이 좋습니다.”
급작스런 상황에 스오 츠카사가 미쳐버린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레오는 가엾은 츠카사의 어깨를 도닥였다.
“무사히 여길 나가면 그 다음에 대답할게. 우선 일본에 도착하고 나서.”
“네. 네..!”
“그러니까 일단 진정해...”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고 말만 하면 되지만. 레오는 작곡할 때만 발동하는, 자신 안의 일말의 로맨스를 좀 더 지켜주자고 생각했다. 어쨌든 츠카사와는 진지한 관계를 이어가고 싶으니까.
입술을 덜덜 떨면서 들뜬 츠카사와 함께 하는 지금의 상황이 굉장히 이질적이어서 레오는 지금의 광경을 기억하자고 다짐했다. 분명 작곡에 도움이 될 거다. 굉장히 이색적인 노래가 나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