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는 눈을 가늘게 떴다. 더 또렷해진 시야에 잡힌 얇고 가느다란 무언가가 엄지와 검지 사이에 단단히 붙잡혀 있다.
발견하게 된 건 정말 우연이었다.
성인 남자 두 명이서 자도 넉넉한 침대와 그 옆에 놓인 작은 탁상. 침대에 온갖 종이를 펼쳐 놓으며 악상에 잠긴 레오의 손에 잡혀 느릿하게 음표를 그려내던 펜이 미끄러져 침대 옆으로 굴러 떨어졌다. 하필 떨어진 것도 침대와 탁상 사이였다. 움직이기 귀찮았는지 대충 테이블을 밀고는 아래로 손을 뻗은 레오는 어렵지 않게 펜을 주웠다. 하지만 그와 함께 펜에 얽힌 이물질의 존재도 발견했다.
긴 머리카락.
레오는 다시금 그것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레오의 머리카락보다 훨씬 길다. 애초에 레오는 이런 꿀을 바른 것 같은 금발도 아니었다. 당연히 스오 것도 아닐 테고, 라며 이 집의 유일한 동거인을 레오는 떠올렸다. 츠카사와 함께 산 지몇 달이 지난 지금 이런 머리칼을 가진 사람이 출입한 일은 레오가 기억하기엔 없었다. 열쇠는 당연하게도 레오와 츠카사만 가지고 있었다.
여자?
바람?
수런거리는 마음처럼 레오는 쥔 머리카락을 살살 흔들었다. 손에 잡혀 붕 떠있는 그 모습이 민들레씨처럼 살래살래 흔들린다. 레오는 내동댕이칠 듯 손을 들어 올렸다가도 주요 증거를 수집한 형사처럼 다시 조심스레 그걸 잡았다.
레오는 요 몇 주간은 집에 자주 들어오지 못했다. 신곡 작업이 있었는데 진행이 신통치가 않아서 작업실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고, 며칠 전에 초췌한 몰골로 기어들어와 따뜻하게 안아주는 연인의 품에서 그대로 곯아떨어졌었는데.
이 머리카락의 주인은 어떤 사람일까. 긴 머리카락 임에도 윤기가 흐르고 끝이 갈라지지도 않았다. 미용 쪽에 별로 해박하지 않은 레오도 머리 관리를 잘 한다는 것 정돈 알 수 있었다. 어깨 너머까지 펼쳐질 풍성한 금발, 그에 어울리는 새하얀 피부, 자신을 가꿀 정도의 여유가 있는 사람, 무엇보다 스오 츠카사와 함께 이 방에 들어올 수 있을 정도의 여자.
머리카락 대신 악보가 바닥으로 내던져졌다. 방금까지 쓴 곡은 쓰레기 그 이상도 아니었다. 지금 엄청난 인스피레이션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고! 지지부진하던 작업이 거짓말처럼 머릿속에서 곡들이 쾌조로 전개되고 있다. 그 음들을 따라가느라 레오는 허겁지겁 펜으로 아직 흰 여백에 정신없이 적어 내려갔다. 될 것 같다, 될 것 같아! A사이드는 완성되었고, 이건 B사이드로 하면 돼. 느낌이 좋으니 잘하면 컴필레이션 앨범에 수록될지도!
액셀을 계속 밟는 자동차처럼 거침없는 멜로디를 흥얼거린다. 그래서 레오가 없는 사이, 이름 모를 금발의 여자는 이 방에 왜 왔을까? 침대 바로 옆이라는 건 역시 침대에서 잤을까? 아쉽게도 이 집에 침대는 하나뿐이다. 거실에 러그가 깔려있긴 하지만 스오가 그곳에서 자는 건 본 적이 없다. 둘이 한 침대에서 잤을까? 끝없이 솟아오르는 질문과 망상과 멜로디가 뒤엉키고 있다. 대단해, 고작 머리카락 하나를 발견했을 뿐인데. 레오는 토할 것 같은 감정 속에서 감탄했다. 그 작은 것이 순식간에 이렇게 시끄러운 세계를 만들어냈다.
레오는 한참동안 숙이고 있던 허리를 폈다. 곡은 완벽하지 않지만 그 토대가 단단히 잡혀 있었다. 마구 휘갈긴 음표들이 불온한 노래를 연주하고 있었다. 동시에 레오는 어느새 그 머리카락이 사라져 있다는 것도 눈치 챘다. 사실 별로 중요한 문제도 아닌 것 같았다. 레오는 주섬주섬 늘어진 악보들을 챙기고 나갈 준비를 했다. 곡은 완성됐고, 자신은 잭과 콩나무에서 나오는 마법의 콩처럼 무시무시하게 자란 악곡을 다듬기만 하면 되었다. 눈에 띠는 재킷을 대충 걸치고 악보뭉치들을 챙긴 다음 레오는 신발을 구겨 신었다. 서두르는 이유는 당연히 있었다.지금 영감이 솟았을 때 마저 곡을 완성시키고 싶었고, 무엇보다 이 집에 더 이상 있기 싫었다. 곧이어 활짝 열린 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집 안을 울렸다.
*
“Leader.”
레오는 그 목소리가 굉장히 오랜만이라고 느꼈다. 실제로 오랜만일지도 모른다. 날짜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나온 이후로 집에 들어간 적은 없었으니까.
밥을 제대로 챙겨먹지도 않은 채 작업을 끝내자 레오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핸드폰도 집에 놓고 온 듯 주머니는 한없이 가볍고, 지갑도 안 챙겨서 이대로 생의 마감을 각오한 레오를 발견한 건 세나 이즈미였고, 미쳤냐는 말과 함께 자신의 집으로 끌고 온 것도 그였고, 인상을 쓰며 츠카사의 연락을 전해준 것도 그였다.
“저, Leader에게 드릴 말이…. 그, 노래를 들었는데….”
“응? 노래~?”
“Leader가 작업하신 곡 말입니다. 오늘 공개가 돼서.”
“아아, 벌써 그렇게 됐나?”
그렇다면 적어도 한 달은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츠카사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