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카레오 - 스오 츠카사와 츠키나가 레오의 편지
* 그냥 넘어가긴 심심해서 기획한 짧은 발렌타인 기획, 미나비님(@ens_nab)과 함께 하는 2017년 발렌타인데이 기념 츠카레오 편지 릴레이(?)입니다.
* 제가 레오 편지를, 미나비님이 츠카사 편지를 작성해서 14일까지 주고받았습니다! (츠카사 → 레오 순으로 이어집니다.)
보셨어요?
어... 아니에요. 그거, 아니니까.
으.... 전화로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안 받으셨잖아요? 물론 제가 업무보시는 쪽 라인으로 연락하긴 했지만.... 리더, 설마 제 번호 저장 안하셨어요? 아니죠? 아, 그치만 저장하셨다면 일부러 안 받으셨다는 말씀이잖아요? 둘 다 싫어요....... 저 피하시는 거 아니죠?
시작부터 두서가 없네요. 오해하실까봐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리더도 아시다시피... 매번 있던 모임 같은 거고.... 나이가 나이다 보니까 그런 의도로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물론 저는 당신뿐이지만요.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다른 사람을 좋아할 수는 없잖아요? 참고로 관련 언론들에겐 모두 정정기사를 내도록 요청했습니다. 약혼이라니, 결혼이라니. 다들 참 그런 걸 떠들기 좋아하는군요. 제 결혼이 그들에게 그 정도의 가치가 있을까요? 그래봤자 가십거리로 소비될 뿐인데. 그리고 이왕이면 그런 스캔들은 당신과 났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되면 이야기도 빠르고 좋겠죠. 음, 이상적이네요.
아, 이런 말을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여튼 아니에요. 아니니까요. 피하지 말아주세요. 지금도 이 편지를 쓰면서 다시 답장을 해주시지 않는 시기로 돌아갈까봐 걱정이 되고 있으니까요. 꼭 답장 써주셔야 해요. 리더.
그럼 답장을 주시리라 믿고 여쭈는 건데....
이번 겨울은 오스트리아에 계속 계시나요? 저번에 계약은 이 달 말까지라고 하셨었잖아요. 다른 말씀이 없으신 걸 보니 혹시 연장되셨나 해서요. 연말까지 유럽에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어쩌면 저도 겨울에 유럽에 있게 될지도 몰라서.... 아직 구체적인 일정은 안 나왔는데... 아, 오해는 마세요. 사업차 가는 거니까요. 그런데 좀 넓게 돌아다닐 거고, 어쩌면 시간도 빌 것 같고... 그런 거니까요. 거기까지 갔으니까 제가 당신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을까요? 겨울까지 계속 계시는 거라면 크리스마스 시즌 즈음해서 찾아뵙는 건 어떨까 하고요. 여행으로 그 주변은 좀 다녔었는데, 이상하게 빈에서 지낼 기회는 좀처럼 갖지 못 했어요. 당신도 그 곳에 계시니까....
괜찮으시면요. 괜찮으시면... 연말 일정을 이 츠카사에게 알려주세요. 찾아뵙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친애하는 스오 츠카사 님.
결혼 축하드립니다.
그럼 행복하시길.
어, 이렇게 편지를 적어뒀는데 말이야. 음, 너의 기사를 보고 말이지. 스오 가문이 대단하긴 한가봐. 여기까지 소식이 들려오고 그러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특히 떠들던데 이런 걸 좋아하는 나이들인가봐.
내가 네 연락을 피했다는 건... 글쎄, 망상해 보면? 언제나 말하잖아? 안이하게 답을 구하지 말라고! 그러니까 이건 스오의 망상의 영역으로 남겨둘게.
그거랑 별개로, 나는 이 편지를 쓸 일이 더 이상 없다고 생각했어. 긴 짝사랑 끝에 오가는 편지의 마지막이 청첩장! 완벽한 마무리 아니야? 관객들이 일어나서 극찬할 마무리라고! 츠키나가 레오는 이 극의 주인공에 된 것에 감사하며 위에처럼 시작하는 편지를 쓰지 않았을까? 나는 저 결말로도 충분히 만족했을 거야. 결국은 아닌 거지만. 이 극은 좀 더 계속 되는 거지?
이건 그냥 덧붙이는 건데 나는 스오랑 주고받는 편지를 꽤 좋아한 것 같아. 이제 쓸 일이 없다고 생각하니 좀 아쉬워지더라고. 이 시대에 누가 이렇게 손 편지를 주고받겠어? 재밌는 녀석! 그러니 답장을 안 하는 시기는 스오가 결혼이라도 하지 않는 한 없지 않을까. 역시 쓸데없는 말이네. 잊어줘.
스오가 예상한 것처럼 계약은 연장하게 됐어. 모차르트의 나라라는 건 열 받지만 음악의 도시기도 하고, 사실 꽤 마음에 들어. 일본보다 춥다는 것 빼고 말야. 요즘은 점점 추워져서 코타츠가 그리워. 왜 여기엔 코타츠를 팔지 않는 걸까. 스오 이사님 이런 건 어때, 유럽에 코타츠를 수출하는 기획 말이야. 유럽의 수많은 츠키나가 레오가 사줄 거야.
그런고로 스오도 여기 올 때는 따뜻하게 입고 와. 괜히 감기 걸려서 코찔찔 이사님이면 분명 놀림 받을 테고~?
올해까지는 여기 있을 거고 귀국은 내년 초에 하지 않을까 싶어. 크리스마스엔... 바쁘다고 하고 싶은데 그러질 않네. 원래라면 사랑스러운 루카땅이랑 근사한 저녁을 하고 있을 텐데, 루카땅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대. 들은 지 좀 된 소식이지만... 나와 식사 때 그 천인공노할 자식을 데려온대서 그날은 크리스마스니까 루카의 연인과 보내라고 했어. 이거 잘한 걸까? 루카땅이 아주 귀여운 목소리로 오빠 고마워! 라고 했는데 정말 잘한 걸까?? 그래서 난 조금 우울해. 귀국하면 오랜만에 활이라도 당길까 해. 과녁은... 눈치 빠른 이사님이라면 말 안 해도 알겠지? 이걸 봤으니 스오도 공범이다~!
글은 이상해. 쓰다 보면 자꾸 옆으로 새게 되네. 그러니까 스케줄 얘기를 하고 있었지? 크리스마스 시즌은 빌 것 같아. 파티를 초대받긴 했는데 보류한 상태거든. 결혼에 실패한 어느 스캔들 주인공이 오신다면 기꺼이 비워드릴 수 있고. 위로의 건배라도 같이?
앗, 크리스마스가 되기 직전에 결혼이 깨진 남자의 이야기?! 오옷~ 인스피레이션이 내려온다! 미안, 스오. 더 이상 편지를 쓸 수 없게 됐어! 곡이 완성되면 가장 먼저 너에게 들려줄게! 그럼 이만!
와... 정말 깜짝 놀랐어요. 심장이 떨어질 뻔 했다고요...! 그런 첫머리는 정말 너무하신 거 아닌가요. 물론 그 내용이 전부가 아니라서 다행이지만. 정말 '첫머리' 라서 다행이에요. 생각만 해도 끔찍해요. 당신이라면 분명 그런 편지를 보내놓고 뒤도 안 보고 숨어버리셨을테죠. 그렇다고 해도 제 탓이지만요. 다시 한 번 매스컴을 신경쓰지 못 한 스스로가 원망스럽습니다. 반성하고 있어요.
답장은...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시 좀... 기쁘네요. 주고받는 편지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씀해주셔서... 이 츠카사는 지금 어쩔줄 모르는 기분이 되었어요. 이런 기분은 고등학교 때 다 졸업하고 온 줄 알았는데, 역시 아니네요. 리더는 대단해요. 저를 단숨에 아이로 만드신다고요.
어, 그리고.... 짝사랑 끝에 오가는 편지의 마지막이 청첩장이라는 건 저도 좋은 마무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청첩장은 저와 다른 사람의 청첩장이 아니니까요. 기왕 보내는 청첩장이라면 저랑 리더의 이름이 적혀있는 게 좋겠어요. 음... 전에도 이런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있는데, 착각일까요. 그리고 그 때도 농담으로 넘기셨을 거예요. 전 진심이었는데. 리더가 허락만 해주시면 저는 언제든 괜찮으니까요. 가능하니까요. 농담이 아니에요. 리더. 정말이에요...!
...정말이니까. 이 이야기는 얼굴을 보면 다시 할게요. 크리스마스까지 아직도 꽤 남았네요. 아쉬워라.
츠키나가 양도 연인이 생기셨군요. 좋은 일이에요. 그리고 리더가 츠키나가 양에게 연인의 시간을 허락하신 점도 굉장해요.
실은 믿기지 않아서 그 부분만 세 번 더 읽었어요.
츠키나가 양이 기뻐하셨다니 좋은 일이고, 리더도 여동생의 기쁨을 이해하셨다니 또 좋은 일이 아닐까요. 새해엔 더 좋은 일들이 계속해서 생길 거예요. 절 믿으세요. 아, 그치만 과녁은 제대로 준비해두겠습니다. 원하시는 크기로 종류별로 갖춰둘게요. 그러고보니 저도 활을 당겨본지 오래된 것 같아요. 최근에는 승마도 기회를 놓치고 있고.... 리더는 어떠세요? 운동은 좀 하고 계세요? 책상 앞에 너무 오래 앉아 있으면 허리가 나빠진다는데....
아, 코타츠. 갑작스럽게 코타츠 말씀을 하셔서 잠시 당황했어요. 안 가지고 가셨군요. 하긴 겨울까지 계시려던 일정이 아니셨죠. 사심 가득한 사업 아이템에 제 마음이 흔들리네요. 유럽에 코타츠를 수출하면 당신이 제 생각을 좀 더 많이 해주실까요? 해외에 나가셔서 일을 하실 때마다 코타츠를 구입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엔 제 이름이 박혀있는 거죠.
음.... 별로 로맨틱하진 않네요. 어쩔 수 없으니 그냥 당신 것만 오스트리아로 보내는 걸로 해요.
지금은 코타츠 안에 계시겠죠? 전압 변환에 문제가 없기를 바랍니다. 혹시 몰라서 변압기도 같이 넣었어요. 동봉한 코타츠용 이불은 츠키나가 양이 골라주셨어요. 이미 연락받으셨을지도 모르겠네요. 크리스마스 시즌엔 제가 오스트리아에 있을 거라니까 안심하시는 눈치셨는데.... 기분탓일까요? 츠키나가 양도 리더의 기분을 잘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크리스마스 말인데.
...기뻐요! 다른 일정이 없으신 거군요. 리더는 저명한 음악가니까, 분명 잔뜩 초대받으셨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주제넘은 마음으로 절 위해 시간을 비워주신 거라고 착각하고 싶은데.... 아니, 그냥 착각할게요.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
평범한 여행객 코스를 알아봤어요. 광장엔 크리스마스 마켓이 선대요. 그리고 대형 성당에선 미사를 하겠죠. 저, 미사에 대해서 잘 몰라요. 하지만 그 안에서 울리는 미사곡엔 관심이 있습니다. 리더는 종교 음악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항상 많이 이야기해주셨는데, 어쩐지 모차르트가 가장 깊게 남아 있어요. 오스트리아는 모차르트의 나라였죠. 적을 알고 나를 안다는 마음으로, 일정이 되신다면 함께 잘츠부르크에 가 봐요. 모차르트가 아니더라도 아름다운 도시래요. 연말 음악회도 있겠네요. 아마 많이 들으셨겠지만, 이 츠카사에게 추천할만한 공연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자리도 알아보고, 공부도 해두겠습니다.
리더를 뵐 생각을 하니까 지금이라도 비행기에 오르고 싶은 심정이에요. 이 편지를 읽고 계실 쯤엔 코타츠와 크리스마스 콜라보의 인스피레이션을 느껴주셨으면 좋겠어요. 어쨌든 그 스캔들은 스캔들일 뿐이니까요. 별 다른 일이 없다면 당신의 답장을 받기 전에 만나게 되었으면 해요. 아, 빨리 뵙고 싶어요. 리더.
지금 내 앞에 있는 쓸모없는 종이 조각이 보이는데 스오는 어떻게 생각해?
음, 그래, 그랬지.
막내 기사에서 이사님으로 훌쩍 커버린 어느 높으신 분이 바쁘신 걸음을 한대서 나도 나름 준비를 했다고. 스오가 아직 음악에 관심이 있을지 모르지만 멋대로 티켓도 준비했고. 정말 말그대로 '멋대로'가 됐지만!
잘츠부르크에는 혼자라도 갈까 싶었는데 모차르트로 가득한 그 동네에 지금 가는 건 최악일 것 같아서 그만뒀어. 크리스마스의 악몽이 재현될 것 같거든.
편지는 왜 수정 기능이 없는 걸까. 만년필에도 지우개 기능이 있어야 하지 않아? 보기 흉하게 어린 아이가 뛰쳐나와서 양껏 떠든 글들이 잔뜩 있네. 하지만 예술가에게는 아이의 감성도 필요하긴 하지. 어른의 몸과 아이의 감성이 공존하여 최고의 작품이 만들어 지는 거니까! 절대 키 얘기는 아니야, 알고 있지?
어쨌든 크리스마스의 악몽 보단 나홀로 집에가 백배 낫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실천하려고 해. 영화랑 다르게 여기엔 코타츠도 있고. 그래서 스오가 이걸 보내줬구나! 이해했어. 이건 그러니까 복선인 거지? 코타츠는 전기코드만 꼽으면 착하게도 따뜻해지니까 혼자 있는 나에게 정말 필요한 친구인 것 같아. 코타츠야, 잘 부탁해. 어라, 내가 누구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더라. 코타츠였나? 나는 지금도 네 품에 있고 그대로 잘 예정이야. 그럼 안녕.
죄송해요, 리더.
일이 이렇게 틀어질 줄 몰랐어요. 짐도 다 싸놨고 예약도 전부 다 마쳤거든요. 다음 날 해가 뜨면 바로 공항으로 갈 예정이었는데 회사가 도와주지 않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가엾게 봐주세요. 당신을 만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던 츠카사는 72시간째 회사와 모임을 전전하면서 웃음을 팔았답니다. 이럴 연말이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차라리 소식을 듣기 전에 비행기에 올라있는 게 나았을 거예요. 그럼 빈에 도착하자마자 핸드폰에 불이 났겠죠. 그치만 전 당신의 얼굴을 보고 만족스럽게 핸드폰을 화장실에 버려놓고 올 수도 있었을 텐데.
변명을... 자꾸 생각하고 있어요. 정말 가고 싶어요. 보고 싶어요. 제가 받아야 할 관심을 제가 보낸 코타츠가 받는 군요. 코타츠의 품이라니. 어렸을 때도 그랬지만 여전히 절 질투하게 만드시네요. 코타츠에게 애정을 품지 말아주세요....
당신이 나홀로 집에라면 전 뭘까요. 눈이 돌아가는 사교모임을 목도하고 있지만 달리 좋은 영화가 생각나지 않아요. 저는 그냥 리더의 집에 숨어들어가는 도둑이 되고 싶은데.... 몸은 갈 수 없지만 마음은 비행기를 타고 거기까지 갔으니까요. 죄송하다는 말로 편지를 가득 채우기 전에 맺음말을 써야겠어요. 저는 가지 못 하지만 저 대신 작은 선물을 함께 보냅니다. 좀 더 다른 이야기로 길게 쓰고 싶은데 곧 또 모임이에요. 번잡한 연말이 지나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죄송해요, 리더.
말보다 행동이 빠른 막내 기사님께.
스오가 말한 작은 선물이 본인을 말한 건 아니었지?
사실 너의 편지를 확인한 건 얼마 되지 않았거든. 늦게 읽어서 미안. 상황을 정확히 설명하자면 편지가 와있고(뭔가 꾸러미들도 와 있던 것 같고), 편지를 다 읽은 순간 초인종이 울렸어. 문 앞에는 일본에서 오스트리아까지 달려온 것처럼 씩씩대고 있는 스오가 있었지. 서프라이즈도 이런 서프라이즈가 없었다고! 아주 잠깐 몰래 카메라를 의심했는데 먼 옛날에 은퇴한 퇴물 아이돌을 놀린다는 낭비성 기획을 할 피디가 있진 않을 테니 망상의 여지도 없었어. 그렇다면 아주 바쁜 이사님이 여기까지 달려왔다는 소리지. 여전히 스오의 행동력은 나이츠 으뜸이구나!
이걸 쓰고 있는 지금 너는 코타츠에 파묻혀 자고 있네. 코타츠에 질투하느니 어쩌니 해도 결국 같은 코타츠 노예 동지잖아? 이 입식 투성이 인테리어에 코타츠를 설치하려고 겨우 공간을 만들었다고. 멋진 양탄자도 사고 말이지. 그래, 거긴 아주 따뜻하지? 엄마 품처럼 말이야~!
온다고 귀띔이라도 해주지. 갑자기 들이닥친 덕분에 이쪽은 아무 일정도 잡지 못했잖아. 결국 이 앞 식당에만 겨우 가고, 아주 짧게 호텔 주변 거리를 산책하고. 그 외에는 호텔에만 있었고. 하루종일 집에 박혀있으려고 여기까지 온 거면 좀 아깝지 않아? 너는 만족한 것 같지만. 글쎄, 난 잘 모르겠어. 나는 72시간 넘게 웃음 팔다가 결국 오스트리아까지 단숨에 날아온 가엾은 스오 이사님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한, 정확히 말하면 큰 무게 없는 행동이었어. 하지만 스오가 받아들이는 건 다르겠지. 그도 그럴 것 없이 스오는 나에게 몇 번이나 고백을 했잖아? 나는 지금도 그걸 받아들이지 않았고.
울린 적도 없는 방 벨이 울리고(덕분에 여기 벨소리가 어떤 건지도 알게 됐어), 문을 열고,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네가 끌어안았을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게? 나는 결국 시소가 기울고 말았다고 탄식했어. 이 편지 주고받기가 마음에 든 것처럼 나는 너와의 관계도 제법 괜찮다고 생각한 것 같아. 아니, 꽤 좋아했어. 엄청 아슬아슬한 줄다리기였지만 말이야. 스오 입장으로는 어느쪽으로든 결판을 내는 쪽이 좋았겠지?
알면서도 모른척하고 있는 건 미안하게 생각해. 나는 어느새 변명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아. 커다란 불평 없이 계속 따라와 주니까 너에게도 이게 좋을 거라고. 그런 자기중심적인 생각으로 계속 널 대했어.
그래도 스오는 문 앞의 포옹을 마지막으로 아무일도 없던 것처럼 평소와 똑같이 나를 대해주고 있어. 리더도 아닌 나에게 계속 리더를 붙여가면서 말이지! 선을 지키고 침범하지 않고 영국 신사처럼 매너를 앞세워서 나를 대해서 츠키나가 레오는 드레스 한 자락도 걸치지 않은 몸으로 숙녀나 받을 에스코트를 받고 있지. 시소는 조금 더 계속되려나봐. 평행선을 맞추려고 노력하지. 시소는 그래선 안되는데 말이야.
나는 너에게 사과를 받을 입장이 아니야. 오히려 내가 납죽 엎드려 사과해야 하지. 이런 다 큰 어른의 어리광을 지금까지 잘도 받아줬다고 그렇게 말해야 해. 물론 지금 제일 먼저 할 일은 코타츠에 있는 너를 끌어내서 침대로 옮기는 거지만! 몇 잔에 취하다니 스오네 회식 문화를 알 것도 같은 걸. 아니면 아주 피곤했던 거야? 알콜이 들어간 따끈한 음료를 마시고 푹 잠든 거라던가. 어땠어? 빈의 밤은 괜찮았던 거지?
대단한 것처럼 줄줄 써놨지만 아직 나는 결정을 못하고 있어. 새까만 밤의 힘을 빌어 적어보자면 나는 너를 봐서 들뜬 건 인정할게. 스오를 보지 못하는 것보단 만나는 게 더 좋다고, 그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그걸로 모든 걸 결론 짓기엔 서로에게는 너무 많은 게 있잖아. 스오 가문이 대단한 것처럼 그 무게도 어마어마하겠지. 나는 네가 책임감이 많다는 것도 알고 있어.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하고 울면서도 사를 포기하고 공을 중시하지. 그런 너이기에, 스오 츠카사이기에 더 망설이고 있어. 어쩌면 내가 해야 할 말은 진작 결정되어 있다는 기분이 들어. 나는 모른척하고 있지만 이제 그걸 직시해야 할 때가 오겠지. 그렇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너를 이렇게 피곤한 일상으로 말려들게 할 거야.
이 편지를 너에게 부칠 수 있을 지 의문이야. 만약 보낸다면 네가 자고 있을 때, 아직 일본과 먼 이 나라에 발 붙이고 있을 때 스오보다 한 발 앞서 비행기를 타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면 스오 집에는 내 편지가 스오를 맞이하지 않을까? 멋진 마중이야! 대타 출동 같은 이 마중이 마음에 들어서 결국 편지를 부칠 것 같아! 선택은 자고 일어난 나에게 맡기겠다. 이것도 꽤나 즐거운걸~
그럼 슬슬 자고 있는 과거의 너를 침대로 옮길 거야. 네가 금방 일어나기를, 혹은 너무 무겁지 않기를 빌어줘!
이만 이 의미불명의 편지는 여기서 줄일게.
잘 자, 스오.
답장이 생각보다 늦어졌어요. 기다리셨을까요. 기다리셨다면 죄송해요. 나리타에 내려서, 집으로 돌아와서, 침대에 바로 쓰러질 줄 알았는데 당신의 편지가 절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덕분에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편지 뜯기 무서웠어요. 혼이 날 것 같았거든요. 그렇게 돌아와 버려서,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생각하기 두려웠어요. 비행기 안에서도 잠들었다가 깨다가를 반복했는데, 깨어 있을 때는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도 잘되지 않고....
...횡설수설하고 있네요. 여전히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아요. 부끄럽게도.
그리고 확인한 편지는 제가 아직 오스트리아에 있을 때 쓰신 거였어요. 안심도 했지만 야단맞을 일이 뒤로 미뤄진 것 같아서 곤란하네요.
저는 너무 행복했어요, 리더. 갑작스럽게 결정한 오스트리아행이었지만 역시 당신을 만나러 가는 게 옳은 선택이었어요. 오스트리아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며칠 동안 제대로 하지 못한 숙면을 취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잘 안 됐어요. 당신을 만나러 간다는 게 기뻐서, 설레어서, 들뜬 기분으로 빈에 도착했답니다. 당신도 분명 눈치채셨을 거예요. 제가 술을 먹은 것처럼 분위기에 취해있었다는 걸요. 놀라게 해드리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당신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당신을 본다는 마음이 컸어요. 문이 열리지 않을까 봐 걱정을 하기도 했지만.... 다행스럽게 나타나 주셨잖아요. 정말, 기뻤답니다.
리더가 적어주신 말씀을 보니 막상 오스트리아에서... 시간이 얼마 없기도 했지만 저희가 뭔가를 한 건 없었네요. 그렇지만 저는 정말 만족스러웠으니까요. 특별하지 않아도 좋았어요. 그냥 당신과 시간을 보내는 모든 순간이 제게 완벽했으니까.
제가 너무 갑자기 나타났기 때문이겠죠. 당신도 상당히 너그러우셨고.... 덕분에 제 마음이 주체할 수 없이 점점 더 커졌던 것 같아요. 저는 정말 행복했어요. 리더.
이젠 고해성사를 해야 할까요.
사실 제가 답장을 드리지 못한 시간 동안, 당신에게서 또 다른 연락이 오진 않을지...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아요. 당신의 반응을 걱정하면서.... 제가 마지막으로 받은 이 편지의 적혀있는 말들과는 또 다른 어조로, 이 츠카사의 신사답지 못한 행동을 탓하며 실망했다고 말씀하시진 않을지 많은 상상을 했어요.
그리고 상상보다 더 무서운 건 아무 말씀도 주시지 않는 거였지만. 답장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시겠죠? 제가 무슨 변명을 할지, 지켜보겠다고 생각하고 계시는 거겠죠? 제 그 행동들로 실망하셔서, 저를 피해 사라져버리신 건 아니라고 믿어요.
돌아가는 게 너무 싫었거든요. 미련이 넘치는 걸, 리더는 분명 알고 계셨을 거예요. 나이를 먹고는 많이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당신 앞에서는 뭐든 잘 안 돼요. 투정을 부리고 싶은 제 마음이 다 드러났던 게 틀림없어요. 그리고 당신은 공항까지 배웅을 해주셨죠. 예기치 못 한 이틀을 보내셨으니까요. 제가 당신의 시간을 온전히 소유했던 이틀이요.
일본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고, 비행기가 절 부르고 있었어요. 리더는 조심해서 돌아가라고 하셨죠. 잔뜩 우울한 제 뺨을 토닥이셨어요. 그렇게까지 어린아이의 표정을 하고 있었을까요. 뺨을 토닥이던 당신이 까치발을 하고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는데....
끝까지 신사다움을 지켰어야 했지만, 마음이 견딜 수 없었어요. 그냥 당신이 너무 사랑스러웠어요. 저를 맞아주시는 그 눈이 좋았어요. 당신이 제게서 황혼을 보셨다고 하신 말씀이 떠올랐어요. 저는 당신의 눈에서 과거와... 영광으로 넘칠 미래를 보고는 해요. 그건 따듯하고 강한 의지죠. 당신의 빛나는 눈이 좋아요. 떨어지고 싶지 않아요.
부끄럽게도, 게다가 이미 화를 내고 계시겠지만.... 그 키스는 이 스오 츠카사가 늘 생각하고 바라던.. 행동 중에 하나였답니다. 의식하지 못 한 사이에 입맞추고 있었으니까요. 제 몸이 저보다 먼저 반응한 거예요. 당신에게 키스하고 싶다고.
당신의 표정이 눈에 선해요. 그렇게 놀라신 얼굴은 처음 봤으니까.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충동적인 제 행동에 곤란하실 당신을 생각했어요. 머리 속이 저질러 버렸다는 말로 가득 찼고....
그리고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은 감기를 옮기고 오진 않았는지 걱정이 됩니다.
실은... 무리를 좀 했나봐요. 칠칠치 못 하게.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급한 일을 처리하자마자 병원신세를 며칠 졌어요. 부끄러운 일이네요. 단순 과로라고 하니까 큰 일은 아니지만.... 감기 기운이 있었던 것 같은데 당신에게 옮진 않았을지 걱정이에요. 역시 경솔한 행동은 하는 게 아니었는데 말이죠.
신사답지 못 한 행동으로 당신을 곤란하게 만들어서 죄송해요.
하지만 그 키스를 사과드리고 싶진 않아요. 당신은 제 영광이고, 미래고, 사랑이니까.
화가 나셨다면 제게 전부 화를 내주시고.... 결국은 용서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이기적인 녀석이라고 질려버리시면 어쩌죠. 하지만 저는 당신이 좋아요. 그리고 분명 저로 인해 화를 내는 당신도 좋아할 거예요. 좋아해요, 레오 씨.
답장이 늦고 말았네.
어땠어, 스오. 그동안 안절부절못하며 편지를 기다리고 있었어? 오자마자 바로 편지를 뜯을지, 아니면 한참을 뜸 들이고 목욕까지 다 끝내고 심호흡하며 뜯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인스피레이션이 솟는 것 같아!
근황을 알려주자면 너의 감기는 멋지게 옮고 말았어. 아니면 내가 먼저일 수도 있고. 스오가 내 감기를 여행 선물로 가져갔을 수도 있잖아?
네가 여기를 떠나고 나서 몸 상태가 묘하다 했더니 그대로 앓아눕게 되더라. 열병이 몸을 꽉 눌러서 아무 것도 못하고 계속 같은 꿈을 꾸고, 또 꾸고 했지. 아, 미리 말해두는데 싹 나았으니까 약 같은 건 보내지 마. 텅 빈 방 앞으로 도착해 감기에 걸렸을 지도 모르는 호텔 직원의 약이 되고 싶다면 말리지 않겠지만. 네가 떠나고 놀랍게도 꽤 많은 시간이 흘렀잖아? 내 귀국일이 내일 모레로 다가온 것처럼 말이야. 항공권 안내 문자를 보고 달력을 봤는데 믿을 수가 있어야지!
좋아, 그럼 스오 이제 말해도 돼. 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 그러니까 넌 마법사지? 나한테 시간을 빨리 가게 하는 마법을 걸어둔 거잖아?! 그렇지 않으면 시간이 나를 두고 먼저 갈 리 없어! 그게 아니라면 역시 내가 허송세월을 보낸 걸까? 그동안 마구 낭비되었던 분초시가 나를 질책한다!
어쨌든 나는 짐을 싸야하고 예쁘게 포장된 네 선물도 뒤늦게 열어봤어. 음, 척 봐도 비싸게 생긴 만년필! 스오 가문 적장자의 안목이 잔뜩 녹아난 사죄의 선물이겠지? 나 같은 사람보다 그걸 알아보는 사람에게 가는 게 좋겠지만.... 지금은 스오의 만년필로 이 편지를 쓰고 있어. 이것만 있으면 나도 마법을 부릴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기대도 담아서 말이야. 이를 테면 스오가 왔던 그 날의 시간으로 돌린다든가? 그럼 좀 더 똑똑한 츠키나가 레오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자기감정에 휩싸여서 아무것도 못하고 네가 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기만한 굉장히 멍청한 모습 대신 그럴싸한 배웅을 할 수 있을 지도 몰라.
저번 편지에 내가 뭐라고 썼지? 이미 떠난 영감은 다시 찾을 수 없는 것처럼 떠나버린 편지도 다시 읽을 수가 없네...! 뭔가 대단한 것처럼 정리를 한다고 썼던 것 같은데, 그거 기간 연장은 돼? 당장은 무리야. 사실 당장은 아니지만. 줄곧 생각을 거듭했는데 결국 여기까지 질질 끌고 말았어.
너와 같이 있어도 괜찮겠지, 스오도 날 좋아하니까 괜찮을 거야, 같이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되잖아? 한 사람의 인생이 걸려있는 거고. 그 인생이 누구에게나 사랑 받는 막내 기사님의 인생이라고 하면 역시, 그래선 안 돼. 사회의 시선을 아는 냉철한 츠키나가 레오는 판단을 완료했고, 나이츠를 아이로 둔 츠키나가 레오도 당연히 결론을 내렸지만 어느 멍청한 츠키나가 레오가 자꾸 판단을 흐리고 있었어. 그 츠키나가 레오는 언제 생겨난지 모르지만 굉장히 안하무인이고 욕심쟁이야. 셀러브리티의 주목받는 사생활 따위 알까보냐 라고 외치기도 하고. 아주 오랜만에 본, 예전보다 훨씬 어른이 된 아이의 단단해진 손에 갇혀 있던 두근거리는 온기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 내가 그 온기를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그 주인은 따로 정해져 있다는 걸 알아. 결국 그 욕심쟁이 츠키나가 레오도 납득했어. 언제까지 어리광을 부릴 수 없다고.
전에도 썼던 것 같지만 내가 스오에게 화를 내는 것도, 용서를 내리는 것도 할 입장이 아니야. 사과해야 하는 건 나니까.
그동안 너를 어디도 못 가고 붙잡은 건에 대해 미안해. 어정쩡하게 붙잡고 널 휘두르고 있었어. 나는 이제 너의 리더도, 왕도 아니고. 너는 이미 어딘가에서 어엿한 왕이 되어 있잖아? 너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너는 그들을 책임져야 해. 그걸 내가 망칠 순 없어.
여기에서 쓰는 편지도 이게 마지막이겠네. 이 주고받기, 일단은 내가 해외에 있어서 시작한 거였지? 내가 귀국하면 그런 명분도 없어지니 이 눈부신 편지 릴레이도 마지막이다! 마지막을 장식하게 되어 영광이야. 네가 내게 한 키스는... 그래, 내가 가지고 갈 추억 하나로 기억하고 싶어. 너는 나에게 용서를 구했지만 나는 화낼 생각도 없고, 그저 노인이 된 츠키나가 레오가 이런 일도 있었다고 조용히 더듬는 기억 정도로 남기는 게 좋겠어. 덧붙이자면 이런 사진을 찍었다며 너를 협박하는, 마침 오스트리아에 있던 운 좋은 기자는 없는 것 같아 다행이야.
스오의 마음을 받아주지 못해서 미안해. 너의 영광과 미래, 사랑... 그리고 행복은 이런 이상한 형태가 아닐 거야.
지금까지 정말 고마웠어.
우편함에 편지가 들어있던 설렘을 언제나 기억할게. 스오도 이제 너의 길을 걸어줘.
나의 기사였던 스오 츠카사에게,
못난 왕이었던 츠카나가 레오가.
레오.
당신은 바보예요, 멍청이. 고집불통.
그리고 안타깝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죠.
정말이지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요. 당신의 말씀대로, 지금 이 시대에 이런 편지를 주고받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이 느린 통신수단을 이용하는 동안 우리 사이에도 많은 시간이 흘렀죠. 천재인 당신은 아이 같고, 괴팍하면서 현실적이에요. 여전히 자신을 낮추시고, 음악이 아닌 스스로를 없는 존재 취급해요. 당신을 알게 된 후로 줄곧, 끝나지 않는 술래잡기를 하고 있어요. 제가 늘 당신의 답장을 노심초사하며 불안해 하는 것도 당연하단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스오 츠카사는 나이를 먹었고 어른이 되었죠. 그리고 더는 놓치지 않을 마음을 먹었어요.
기획력과 추진력, 그리고 그 모든 걸 가능하게 만드는 자본을 손에 넣었으니 하지 못할 게 없다고,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답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는 억지를 부릴 거예요. 당신이 도망가도록 내버려 둘 수 없어요. 당신의 막내 기사는 의외로 치밀한 책략가랍니다. 당신과 편지를 나누던 그 시간 동안, 제가 얌전히... 당신을 기다리기만 했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아마 이 편지는 당신에게 닿지 않을 거예요. 이걸 쓰고 있는 시점이면 당신은 이미 비행기를 타고 있을 테니까요. 저는 당신이, 단번에 일본으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걸 알아요. 의미 없는 티켓을 몇 장 더 끊으셨다는 것도 알고, 불필요한 경유지를 만드셨다는 것도 알고 있죠. 12시간이면 오는 거리를 당신은 둘러 오실 거예요. 하지만 결국 돌아오시겠죠. 그리고 그 날은 공교롭게도 발렌타인데이일 거구요. 당신이 오시는 그 날엔 수상쩍은 소문을 듣고 공항을 찾아온 예의 기자들이 널려 있을 겁니다. 그 소문은 당신과 나와는 전혀 관련없는 어딘가의 찌라시일 거예요. 그리고 그들은 그 소문을 확인하는 대신 다른 장면을 보게 되겠죠. 제가 당신에게 프로포즈를 하는 모습을 말이에요.
우리가 편지를 나누는 그 시간 동안, 저는 당신이 신경 쓰시는 게 무엇인지 가만히 살펴봤어요. 결국, 당신은 단 한 번도 제가 싫다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죠. 당신이 염려하는 건 제 안위, 제가 가진 것들, 혹은 제가 짊어져야 하는 것들, 미래, 그런 거였으니까요. 저는 당신에게 확신을 드리고 싶었어요. 맞아요. 당신의 말씀대로, 전 나이츠의 막내 기사였지만 지금은 아니죠. 어렸을 적, 걸어야 할 길이 예정되어 있다 하더라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유메노사키와는 달라요. 하지만 츠카사는 그 때도, 지금도 욕심쟁이죠. 모든 걸 다 가지기 위해 노력해왔어요.
하지만 모든 걸 다 가질 수 없다면 가장 원하는 걸 갖고 싶어요.
그러니까 당신을요.
저는 당신이 있다면, 다른 건 괜찮아요. 상관없어.
하지만 당신은 상냥한 사람이니까요. 저보다 더 절 걱정하시는 분이니까요. 결단은 제가 내려야 할 테고.... 상황이 다 벌어지고 나면, 그 때의 당신은 어쩔 수 없이 절 선택할 거예요. 당신의 눈에도 그 때의 저는 당신을 가지는 것 말고는 더 나을 게 없는 불쌍한 남자로 보일 테니까.
이런 건 치사할까요? 신사답지 못 하다고 말씀하실까요. 하지만 신사다움이 제가 원하는 걸 얻게 해주진 못 할 거예요. 이 츠카사는 약은 수를 쓸 테고 마음이 약한 당신은 제게 고개를 끄덕여 주실 거예요. 당신은 상냥하신 분이니까요.
아니, 상냥함으로 모든 게 해결되진 않겠죠. 저는 당신도 저를 원하고 있다는 걸 알아요. 제 손은 항상 여기에 있어요. 그러니까 부디 잡아주세요. 저는 아주 오래전부터, 당신에게 손을 내밀고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더 이상 신사적일 수 없는, 당신의 스오 츠카사로부터.
친애해 마지않는,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스오 츠카사에게.
음, 저런 말을 해도 되냐는 아직도 고민이 되지만 이왕 이렇게 돼버렸잖아? 거기다 아까까지 실컷 사랑한다고 떠들었으니까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제정신일 때 말하는 건 좀 부끄럽네. 글로 쓰면 괜찮을 줄 알았어. 그럼 넌 또 볼을 풍선처럼 부풀리며 익숙해지라는 말을 할까? 그것도 듣고 싶지만 아주 기분 좋게 자고 있는 어느 숨소리만 계속 들리니 무리인 것 같네.
내가 편지를 좋아하는 건, 멀리 있는 사람들을 잇는 얇은 종이의 로망! 아주 먼 곳에서 정성들여 눌러 쓴 손 글씨와 그걸로 채워진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기는 재미잖아? 하얗게 빛나는 화면에 있는 검은 글씨도 매력적이지만 손끝으로 더듬어 볼 수 있는 글씨는 쓰는 사람의 개성도 담겨 있고. 펜으로 멋들어진 글자를 하나하나 만들며 꾹꾹 눌러 담는 여기 아닌 저~ 먼 곳의 생각뭉치들이 와서란 말이야. 지금처럼 이렇게 바로 옆에 찰싹 붙어 있는 사람에게 편지를 주면서 '레오, 편지 좋아하죠? 답장 주세요.' 라고 하는 경우는 좀 다르단 말이지. 지금 당장이라도 자고 있는 네 뺨에 안부를 묻는 문구를 적어줄 수 있다고!
네 편지를 보니 그 날의 소란이 다시금 떠오르네. 정말 난리도 아니었지. 그렇게 플래시 세례를 받은 것도 오랜만이었고. 나이츠 시절로 돌아가서 신곡 발표하는 줄 알았다니까.
저기, 나를 붙잡기 위해서라고 하긴 했지만 이건 어느 정도 합의가 필요한 일 아니었어? 나는 먼지가 묻어있는 바지에 후드까지 깊숙이 눌러쓰고 있었다고. 이건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 땐 머리도 안 감았었어. 그런 상황에서 일생일대의 프로포즈를 받아야 하는 가엾은 사람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어?
카메라맨들이 꽤 보이는 것 같아서 연예인이라도 출국하나 보다고 생각했지. 단숨에 기사를 노리는 사냥꾼들의 무대를 이쪽으로 돌리는 이사님의 실력은 아주 잘 봤어. 그들의 카메라가 향하는 셀러브리티의 커밍아웃을 코앞이라는 특등석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지. 내가 주연일 줄은 더더욱 몰랐고!
욕심꾸러기 막내를 우습게 본 건 아니야. 나는 다만, 모든 걸 다 가질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네가 포기할 건 나일 거라고 생각했어. 그건 아주 합리적인 결정이니까. 그러니 굳이 내가 나서서 그 합리적인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까지 갈 필요는 없지. 겪어 보진 않았지만 그건 꽤나 비참한 기분일 거고.
나는 스오가 말하는 것처럼 전혀 상냥하지도 않고 내 기분만을 생각하는 사람이야. 너를 밀어내는 것도 결국은 내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 그런 거야. 츠키나가 레오가 얼마나 별로인 사람인지 알겠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모든 사람 앞에서 그렇게 보란 듯이 선언했지만, 대중의 흥미는 금방 식고 너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원래의 일상으로도 돌아갈 수 있을 거야.
음, 이제 이런 말은 하지 않기로 했던가? 최후의 우는 소리라고 생각해줘. 응애응애.
책략가인 스오 츠카사가 내놓은 작전인 게 모든 걸 내던지는 거라니, 너무 잃는 게 많은 전술 아니야? 내가 너를 뻥뻥 차고, 그대로 해외 어디든 일본이 아닌 다른 나라로 가는 비행기 표를 끊고 갔으면 어떡했으려고? 앞뒤 안 가리는 것도 적당히 해야지.
결과적으로, 나는 너와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한 침대에 있고, 너의 자는 모습도 지켜볼 수 있고, 너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일 수도 있게 되었어.
응, 스오가 이겼어.
알고 있을 지도 모르지만 편지 쓸 때 나는 제법 솔직해진다고. 이게 정말, 정말 마지막 편지가 될지 모르니 내친 김에 쓰자면 스오가 점점 무거워져서 큰일이야. 어, 화내지 마. 몸무게 얘기가 아니니까. 그 전까지 나는 스오 츠카사를 내 마음에서 가볍게 만들려고 애썼거든. 같이 있으면 적당히 편하고 그것뿐인 그런 관계. 조금 깊숙이 들어오려고 하면 농담을 하면서 선을 치고, 그렇게 잘 막았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일어나면 가슴이 묵직해. 그런 채로 아주 진지하게 너와의 생활과 미래를 그리는 내가 있어. 문제는 그게 싫지 않아.
내가 사랑하는 황혼이 가장 가까이에 있고 나는 그걸 질리지도 않고 보게 되겠지. 그 사실이 굉장히 벅차기도 하지만 가끔은 걱정도 앞서. 큰일이야. 나는 네가 감기 하나만 걸려도 억장이 무너질 기분이 될 거란 말이지....
이 정도 답장이면 너도 만족하겠지? 그리고 더 이상 쓰기 힘들거든. 네 잠버릇 꽤 고약한 거 알고 있어? 엄청 나무늘보 같아. 물론 그 나무늘보가 소중히 껴안고 있는 나무가 누구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
네가 나에게서 봤다는 미래는 우리가 마주하게 될 미래와 꽤 다른 모습일 수도 있어. 그 미래가 다가와도 스오가 후회하지 않게, 나를 선택한 걸 후회하지 않게 해줄게.
기다리던 손을 겨우 잡은, 너의 츠키나가 레오가.
추신.
나는 신사적이지 않은 스오도 꽤나 취향인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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