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카레오 - 상자 속
* 츠카레오
* 2016년 케스에 냈던 카피본입니다.... (2년전 글......)
* 재판 예정이 없으므로 공개합니다.
* 표지는 카이루님(@kimgyul)이 그려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모브 캐릭터가 나오며 그 시점으로 진행됩니다.
인생 첫 면접이었다. 결혼식이나 가족 행사 같은 곳에 입던 흰 블라우스에 아래는 검정 바지. 운동화 대신 사이즈가 안 맞는 단정하기만 할 뿐인 검은 구두. 오늘따라 애먹은 렌즈까지 겨우 장착한 상태로 잔뜩 긴장한 채 들어섰다. 또박또박과 따박따박의 애매한 경계에서 나오던 대답들이 면접관에게 어떻게 비칠지도 모른다. 시비 걸지 않는다고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항상 미소를 띠고 있으면 좋은 인상을 준다는 것도 머리에 날아간 지 오래다. 평소에 긴장을 하는 편이 아니었다. 어떤 중요한 시험도, 도쿄돔에서나 열릴 큰 대회도. 다만, 내 옷을 집 앞 슈퍼에 나갈 복장으로 보일 만큼 빳빳한 깃이 세워져 주름 하나 없는 검은 양복과 영화에서나 본 외알 안경, 온건한 중년의 상징인 흰 수염의 남자라는 초현실적인 남자가 면접관일 따름이었다.
홍차도 일류로 탈 것 같은 면접관이 마지막 질문이라고 했고 나는 끝났다는 해방감을 미리 준비하려고 했다.
“호모포비아신가요?”
처음에는 귀를 의심했다. 면접에서 절대 하지 말라고 한 짓인, 질문을 되물었고 면접관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말했다. 정신이 돌아왔을 때 느껴진 건 불쾌감이었다.
“그 질문에 꼭 대답해야 하나요?”
“네, 지금 면접에서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가 한 질문들은 대략 이랬다. 이곳에 지원하게 된 동기, 사는 곳, 부모도 이곳에 사는 지의 여부, 평소의 정리정돈 습관 등. 솔직히 처음 것만 빼고는 왜 하는 지 모를 질문들이긴 했다. 지원한 이유는 뻔하다. 돈 때문이지. 방학을 맞아 본가로 내려온 나는 동네 어르신에게 이곳이 사람을 구한다는 말을 들었고 호기심 반, 금전 반 이런 기분으로 지원하게 됐다.
면접은 면접관의 마음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런 질문은 너무 했다. 개인 사상과 관련된 문제 아닌가? 내가 동성애자면 어쩌려고 저런 질문을 하는 건지?
면접관 앞의 지원자라는 것도 잊은 채 나는 대놓고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대답의 여부에 따라 합격 불합격이 달라지나요?”
“그렇습니다.”
나는 기가 찼다. 그래도 이 어이없는 면접을 끝내려면 뭐든 말해야 했다.
“그건 아닌데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쪽엔 아무 관심도 없어요. 당사자들이 알아서 해결할 일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제가 뭐라고 그러는 것도 웃기고요.”
“알겠습니다.”
남자는 그렇게 말했고 그가 말했던 대로 그것이 마지막 질문이었다.
나는 곧 에어컨이 아낌없이 돌아가는 커다란 집을 나서 뙤약볕이 떨어지는 밖에 있었다.
신발을 벗어 던져버리고 싶은 걸 참으며 가로수가 드문드문 난 길을 괜히 힘주어 걸어갔다.
붙기 글렀다는 건 뻔했다. 다른 집들과 더 높은 곳에, 그리고 홀로 위치한 거대한 집을 등지며 괜한 시간 낭비에 더위와 더불어 짜증이 밀려왔다. 두 달만 일해도 일 년치 등록금 올클리어라는 말도 안 되는 조건이라 누구나 그럴 테지만, 역시 혹한 게 잘못이었다. 이런 시골구석에서 그런 일확천금을 이제 막 성인이 된 내가 쥘 수 있을 리가.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을 차도 짜증은 가시지 않고 오히려 꽉 죄는 구두 때문에 발만 더 아파왔다. 집에서 잠이나 자자. 이번 방학은 그냥 집에서 굴러다니던가. 분명 부모님이 밭일하라고 부를 테니까. 시끄러운 매미 소리가 평소보다 더 성가시게 들린 면접이 지나고, 이틀 후 집 앞에 편지가 도착했다.
채용이 확정됐다는 내용을 담은 편지엔 면접을 본 곳, 스오 가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
인생의 첫 출근의 첫 난관은 땀을 뻘뻘 흘려야 하는 언덕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면접 때처럼 렌즈를 끼지도, 구두를 신지도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콧등에서 미끄러지는 안경을 연신 밀어 올리며 도착한 거대한 저택에선 면접관이었던, 이제는 상사이자 스오 가의 집사인 남자가 그 때와 변함없는 얼굴로 나를 맞아주었다.
“이렇게 매번 정문으로 와도 되나요? 뒷문 같은 거 있지 않아요?”
“도련님은 그런 걸 나누시는 분이 아닙니다.”
나는 이 저택의 도련님이란 사람을 알고 있다. 이 마을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 것이다.
스오 가문은 이 마을의 왕이다. 총리를 선출하는 21세기의 일본에서 무슨 말이냐 하겠지만, 작은 시골에서는 조금 이야기가 달라진다. 마을 입구에 있는 산부터 시작하여, 마을을 가로질러 뒤편의 산이 있는 곳까지 전부 스오 가의 것이다. 그 산마저 스오 가의 자산이라는 소문이 있지만 정확하진 않다. 마을에서 누구나 한 번쯤은 바라보게 되는 거대한 흰 저택은 이 마을에서 스오 가의 영향이 얼마나 막강한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나는 중학생 때 이곳으로 이사 왔다. 아버지의 발령지이자 새로이 살아간 터전은 도시와 비교도 안 되게 좋은 공기와 일본에 아직도 이런 곳이 있구나 싶은 감상을 주었다. 시골로 오는 게 내심 불만이신 것 같은 어머니도 취미로 시작한 조그만 밭을 돌보는 일에 꽤나 열중하셨고 나도 중학교에 입학하여 큰 어려움 없이 친구를 사귀었다. 타지 사람을 배척하는 작은 마을 특유의 거리감은 없었다. 다만 그들에게 가끔 느껴지는 ‘스오 가문’은 내게 낯설었다.
그들에게 스오 가는 특별했다. 그들의 본가는 이곳이 아니었지만 어쩌다 오는 방문마다 마을 사람들이 보여준 행동은 국빈을 접대하는 모습 그 자체였다. 그 중에 더욱 특별한 건 스오 츠카사였다. 유일한 후계자인 도련님은 어렸을 적에 이곳에 살다가 외국으로 유학을 갔고 그 후 도시에 있는 아이돌 양성 학교를 다녔고, 내가 막 이 마을에 왔을 즈음엔 이름 있는 아이돌 활동을 하고 있었다. 나와 가장 친했던 친구도 스오 츠카사의 팬이었으며 매번 음악 방송을 지켜보고 음반은 당연히 샀으며 어쩌다 하는 투표 일반 아이돌 순위 투표에서부터 안기고 싶은 남자 아이돌 순위, 함께 여름휴가 가고 싶은 아이돌 순위 같은 이상한 투표에도 열을 올리며 참가하곤 했다. 이상한 건 마을 전체에서도 투표를 참여하는 분위기였다. 우리 도련님을 1위로 올려야 한다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출신지마냥 자부심을 한껏 가지고, 투표 했냐고 묻는 것이 이 마을의 기묘한 안부 인사였다.
아이돌에 관심이 하나도 없는 나지만 도련님이 속한 유닛이 몇 위를 했는지, 어떤 잡지 몇 월 호의 표지를 담당하게 됐는지 정도는 꿰고 있었다. 그만큼 스오 츠카사는 친숙했다. 시간이 흘러 소식을 얼핏 들었을 때 그 유닛이 해체를 했던가. 왕자의 짧은 유희치곤 꽤나 화려하긴 했더랬다.
그 어린 왕자는 지금은 성인이 되어 별저에 살고 있고, 나는 메이드 복을 입고 이 더럽게 넓은 별저를 청소하고 있다.
지원 직종은 가사도우미였다. 그게 메이드로 연결되기엔 나는 고속열차가 시속 200km로 당연하게 달리는 현대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 안경은 써도 되지만 머리는 묶을 것. 출퇴근 시의 복장은 상관없으며 출근 시엔 지정된 옷으로 갈아입을 것. 근무 중 핸드폰 지참은 불가능. 얼핏 보면 당연한 지시 사항 속에 검은 치마가 발목까지 오고 흰 앞치마가 무릎까지 오는 메이드복이 포함돼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복장에 불만이 있었지만 옷이 노출도가 전혀 없고, 생각보다 편했으며, 긴 소매지만 땀 한 방울 나지 않고 오히려 시원하기까지 한 완벽한 냉방 상태를 고려해 잠자코 있기로 했다.
스오 츠카사를 좋아했던 친구에게 사실 메이드 취향 속성이 있다는 걸 알려주면 어떤 반응을 할지 굉장히 궁금했지만 그건 영원히 알지 못했다. 생전 처음 써 보는 계약서에는 스오 가에서 관한 일은 무엇이든 제 3자에게 유포, 발설을 하거나, 그로 추정되는 행동을 할 시 고소를 당할 수 있다는 것과 일정액의 벌금을 청구 한다고 적혀 있었다. 옆에 적힌 현실성 없는 숫자는 내가 함부로 입을 놀렸다간 아주 현실성 있게 찾아올 걸 알기에 뭐가 되던 입을 다무는 편이 좋다. 애초에 이런 소문을 퍼뜨리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도 하고.
‘당신이 새로 오신 분이군요.’
일한 지 한 달, 내 최종 상사이자 메이드복 취향의 왕자님과 만난 적은 그다지 많지 않다. 처음 막 왔을 때 한 번, 그리고 어쩌다 그가 휴일 같은 날에 몇 번. 스오 츠카사는 평일에는 출근을 했고 그가 퇴근할 즈음에 나는 이미 메이드복을 벗고 넓은 집을 욕하며 돌아가는 시간이었다.
가까이 서 본 그는... 일단 생긴 건 멀쩡해 보였다. 정정, 왕자님이란 별명이 농담이 아닐 정도로 정말 잘생겼다. 흐릿한 기억의 그는 전직 아이돌이라는 화려한 수식어가 붙는 만큼의 여전히 눈부신 외모로 나이도 어린 나에게 정중히 물었다.
‘지금은 쉬어도 되지 않나요? 로봇 청소기가 돌아가고 있는데.’
스오 츠카사는 응접실을 청소하고 있는 나와 윙윙 거리며 바닥을 쓸고 다니는 동그란 기계를 가리키며 말을 건넨 적이 있었다. 나는 이 청소기는 구석까지 쓸지 못한다고 설명했고 그는 고개를 갸우뚱 하다 말했다.
‘성능이 더 좋은 걸 사야겠군요. 그래야 일하기에 더 편하겠죠?’
모델을 알아봐야겠다며 바로 나가지만 않았어도 나는 스오 츠카사가 호스트 출신인지를 의심했을 지도 모른다. 그럴 의도가 있었다면 방을 나가는 대신 눈을 그윽히 마주하고 필살 미소 한 방이라도 날렸을 테니. 친절함이 지나쳐 자칫하면 선수로 보일 정도의 발언이라고. 이 전의 사람이 그만둔 이유는 못 들었는데 어쩌면 스오 츠카사와 금단의... 라는 상상은 제대로 완성되기도 전에 끊겨버렸다. 이유는 뻔하다. 절대 그럴 리 없기 때문에.
스오 가의 적장자. 전직 아이돌에 기사(騎射)―말을 타고 활을 쏜다는 에도 시대에나 있을 법한 기예가 특기. 나이 불문 존댓말까지 예의도 장착해 신사라는 말이 무엇보다 어울리는 이 무궁무진한 스펙의 도련님에겐 밖으로 드러내지 못할 취미가 있다.
스오 츠카사는 가끔 평일에도 집에 와 있었다. 그럴 때 그의 패턴은 뻔했다. 작업실에서 온갖 서류를 늘여놓고 씨름을 하고 있거나, 어느 방에 들어가서 나오질 않는다거나. 대개는 후자가 압도적이다.
스오 가의 식솔이 아닌 ‘어느 손님’이 머무르는 방에서 스오 츠카사는 나오지 않았고 문은 꾹 닫혀 열리지 않는 게 태반이었다. 고작 문이 닫혔다고 그 손님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분명 어느 비싼 원목으로 만들어졌을 문은 문틀에 한 치의 뒤틀림 없이 짜임새 있게 잘 맞추어졌지만 방음 기능만큼은 그 값만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복도를 걷기만 해도 문은 방의 사정을 알리는 소리를 아주 적나라하게 울렸다. 에로 영화라도 틀어둔 것처럼 녹을 것 같고, 어쩌면 아파보이기까지 한 신음소리들은 지금까지 쾌적한 직장을 음탕한 매음굴로 만들어버리는 재주가 있었다. 제멋대로 박차를 가하는 목소리 중에는 그 신사 스오 츠카사의 목소리도 분명히 섞여있었다. 갓 성인인 나를 배려해선지 집사는 처음에는 스오 츠카사와 그 손님이 함께 있을 때 복도로 나를 보내지 않았었지만 모르는 게 더 힘들었다. 방에 틀어박힌 이후엔 반드시 엉망이 된 시트가 세탁기 앞에 놓여 있었고 그걸 세탁기에 집어넣고 터는 일 중 하나가 내 몫이었다. 그 더럽혀진 시트들이―가끔씩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액체가 묻은 옷가지들이 뭘 의미하는지는 뻔했다. 격조 있는 스오 가의 가사도우미 알바는 스오 츠카사와 손님이 만나기만 하면 모텔 알바로 전락하기 일쑤였다.
그럼 그렇지,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있을 리가. 나는 지저분한 시트를 최대한 손가락 끝으로 집어 올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돈 많은 도련님의 말할 수 없는 비밀 같은 거겠지. 음습한 지하실의 사이키 조명이 마구 요동치는 난교 파티 같은 것보단 훨씬 건전할 수도 있고. 하지만 그의 휴일, 그리고 주말마다 쌓이는 빨랫감을 볼 때마다 내 회의감은 갈수록 커져갔다. 작작 좀 치지? 차마 내뱉을 수 없는 상사에 대한 불만은 새하얘진 시트를 팡팡 터는 손짓으로 해소하곤 했다.
어쨌든 저런 오점이 하나 정도 있는 게 인간다울 수 있다고 넘어가면 되는 문제였다. 일이 좀 더 늘어나는 것 말고는 내게 아무 상관없는 개인사니까. 관여하고 싶지도 않고. 그러니 스오 츠카사의 밤상대가 누군지는 내 알 바 아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나는 그 작자를 스오 츠카사보다 훨씬 더 자주 봐야했다.
이름은 츠키나가 레오. 성별은 믿을 수 없게도 남자. 통성명을 끝낸 것도 아니다. 스오 츠카사가 그를 레오 씨라 불렀고, 집사는 츠키나가 님이라고 불렀다. 인사 한 번도 하지 않은 그는 스오 가의 중요한 손님이며 내가 일하기 전부터 저택에 계속 머물고 있었다. 스오 츠카사와 달리 이 저택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은 채.
면접의 그 질문이 무엇을 겨냥한 건지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저기, 메이드 씨.”
그 남자는 날카로운 고양이 같은 눈매를 가지고 있고, 하는 행동도 고양이와 흡사했다. 발자국을 죽이고 걸어오는 것에 능숙했으며 갑자기 나타난 주제에 원래부터 거기 있었다는 듯이 태평하게 말을 걸곤 했다.
츠키나가 레오는 처음부터 붙임성 있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와 몇 번 마주쳤을 때 그는 눈앞의 내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 스쳐지나갔다. 어색하게 마주하는 것보다 이쪽이 훨씬 좋았기에 나도 똑같이 그렇게 했다. 그랬는데 얼마 전부턴가 묘하다 못해 노골적인 시선이 느껴진다 하더니 이 모양이다.
“말 시키지 마세요. 스오 도련님이 좋아하지 않는다고요.”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했고 남자는 그 날카로운 눈매를 멍청하게 몇 번 깜박였다.
“그래? 스오는 그런 말 안하던데.”
아마 이 사람은 전 세계에서 스오 라는 이름을 가장 편하게 부르는 사람일 거다. 나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한 번은 퇴근이 빨랐는지 미처 집에 가기 전에 스오 츠카사가 집에 돌아온 일이 있었다. 나가려는 나에게 영양가 없는 말을 나누는 걸 우연히 본 스오 츠카사의 이변이 얼마나 굉장했냐면 평소의 젠틀한 인사를 나누는 것까지 잊었다. 미소가 싹 가신 그 표정에 위험을 감지하고 바로 잽싸게 집으로 돌아간 자신의 재치에 칭찬을 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츠키나가 레오는 작곡가라고 했다. 그는 그 흔하지 않은 직종에 걸맞은 행동이라도 하려는지 바닥에 종이를 늘어뜨리고 낙서 같은 음표를 쉴 새 없이 그리다가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그 모습은 작곡가라기 보단 낙서 놀이를 하는 아이 모습에 더 가까웠지만. 구석의 먼지마저도 사금으로 만들어졌을 것 같은 이 이름 높은 저택에서 그는 유일하게 동떨어진 모습을 했다. 며칠 째 같은 재킷을 걸치고서 멋진 문양으로 수놓아진 소파에서 주말의 중년 가장보다 더 나태한 모습으로 드러누워 있기도 했고, 구름이 잔뜩 낀 날엔 격식 있는 발코니에서 젖은 빨래처럼 늘어져 있기도 했다. 도련님의 은밀한 밤 상대는 항시 관능적인 몸짓을 하는 위험한 매력을 풍기는 대신, 배 나온 고양이처럼 자신의 마음이 내키는 대로 움직여 저택 이곳저곳에서 발견되곤 했다.
한없이 뒹굴 거리기만 할 뿐인 이 장기 투숙객은 어찌됐던 간에 스오 가의 스폰서를 받는 듯 했다. 일단은 작곡이란 걸 하면서 몸도 섞는, 잠자리 영업의 일환? 어찌됐든 구역질나는 일이다.
그런 그가 오늘은 어째선지 가는 곳마다 쫓아왔고 나는 집사 할아범이 신신당부한 소중한 손님이라는 걸 망각한 채 대체 왜 따라 오냐고 쏘아붙여버렸다. 츠키나가 레오는 불쾌한 기색 없이, 오히려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야 넌 재밌으니까! 평소에 돌려 말할 줄을 모르고 직구를 던지지? 그러면서 귀찮아지는 걸 질색으로 여기지? 동성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다든가?”
“손님이 저에 대해 뭘 아신다고 그래요?”
“맞아. 나는 메이드 씨를 알지 못해. 그저 망상할 뿐이지. 망상은 나를 더 큰 세계로 데려가 줄 테니까! 메이드 씨를 괴롭히려는 뜻은 없어. 나는 그저 어디에서 솟아오를지 모르는 인스피레이션을 찾아서 이곳저곳을 헤맬 뿐이야. 오늘은 그곳이 메이드 씨일 수도 있으니까. 물론 메이드 씨는 평소에도 아주 재밌기도 하고. 메이드 씨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본심을 숨기지 않아.”
츠키나가 레오의 말은 아주 장황하고 실속이 없었다. 예술 쪽에 종사한다는 사람은 좀 이런가. 속으로 그런 편견을 쌓고 있을 때 그의 시선이 똑바로 날아와 꽂혔다.
“다른 사람은 눈이 마주치면 보통 피하는데, 메이드 씨는 안 그래. 아주 솔직하게 눈으로 말하거든. 이 더러운 창녀야 날 보지 마, 라고.”
인스피레이션을 찾아 떠돈다는 츠키나가 레오는 다른 곳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걸음을 옮겼고, 나는 그에게 반박도 긍정도 그 어떠한 말도 건네지 못한 채 얼어붙어있어야만 했다.
***
그날을 마지막으로 나는 스오 가에서 해고되었다.
라는 결말을 당연히 예상하고 있었는데 나는 여전히 아무 통보 없이 그 언덕길을 오르내리는 일상을 이어가고 있었다. 물론 그 츠키나가 레오와도 격정적인 전개는 오가지 않았다.
그 다음날에도 그는 특별한 말없이 나를 맞았고 무언가 잔뜩 떠올랐는지 들떠서 흰 종이에 거침없이 써내려가고 있었다. 그런 날은 대개 밥도 먹지 않았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퇴근하기 전 손님방 앞에 손도 대지 않은 게 분명한 식기들을 흘끗 보고는 집을 나섰다. 그가 방에 틀어박힘에 따라 나도 자연히 그와 어떠한 이야기도 할 수 없었다.
어쨌든 사과해야만 했다. 내가 그런 눈으로 츠키나가 레오를 보고 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가 눈치 챌 정도로 노골적이었다면 그건 내가 잘못한 게 맞다. 츠키나가 레오만의 개인사고, 내가 뭐가 됐든 어떤 개인을 멋대로 평가해선 안 되는 거였다.
하지만 츠키나가 레오는 며칠간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가 두문불출한 지 삼일 째, 그가 단단히 화났다는 확신이 자리 잡았을 때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던 손님방 문이 열렸다.
그는 좀비처럼 다리를 질질 끌며 나왔고 집사에게 무언가 말을 소곤거리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제대로 닫히지 않은 문 틈새로 보인 그는 이불도 제대로 덮지 않은 채 기절하다시피 잠들어 있었다.
“오늘이 작곡 마감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린 아이에게 하듯 이불을 제대로 덮어주며 집사는 말했고 나는 그제야 내가 너무도 츠키나가 레오의 행동 하나하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마감이 있다는 건 일이 들어왔다는 뜻일 테고, 그는 생각보다 이곳의 마냥 식충이는 아니라는 말이기도 했다. 나도 모르게 그에게 켜켜이 쌓았던 악평을 조금씩 삭제해 나갔다. 그의 입장에서도 억울할 것이다. 사정도 모르는 여자애 한 명에게 경멸의 눈빛을 받는다는 건, 역지사지를 할 필요도 없이 당연히 기분 나쁠 일일 테고.
“으응~?”
허리를 잔뜩 숙이고 나온 대답은 펜을 문 채로 나오는 성의 없는 대답이었다.
“왜 사과하는 거야? 앗, 대답하지 마. 망상할 테니까!”
연상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 텐션으로 남자는 소리 높여 말했고 나는 그의 말을 따르는 대신 일전의 이야기를 바로 꺼냈다. 그는 좀 김샜다는 얼굴이지만 곧장 그 화제를 받아들였다.
“그게 왜 사과할 일인지 모르겠는데.”
“보통은 기분 나쁘잖아요. 그런 취급 받아서 기분 좋은 사람이 어딨어요.”
“그래?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그게 맞을 테니.”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고 츠키나가 레오는 빙글빙글 웃는 상이었다. 조금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손님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해요?”
“뭐, 창녀라고는 생각하지 않지. 창녀는 엄연히 사람이고, 그게 손가락질 받을 수도 있지만 하나의 직업이잖아? 나는 일단은 작곡가고 여자도 아니고. 나를 소개하는 말은 꽤 있을 테지만 스오 가에서 판단하는 기준으로 불러보면 어떨까. 암세포라던가... 아앗, 너무 진부한 표현이야. 더 참신한 표현이 없을까! 부족한 어휘력은 세계를 비좁게 만든다고!!”
그가 또 자신만의 세계로 빠지고, 나는 이이상 자리를 비울 수 없어 대화는 다시 산으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츠키나가 레오가 화가 나지 않았다는 건 빈 말이 아니었다. 마감이 끝난 그는 또 다시 방 밖 세계로 뛰쳐나왔으며, 자신이 창녀 취급을 받건 말건 스오 츠카사와 질펀한 밤을 나누었다. 결국 변한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아니 하나는 있었다. 나는 츠키나가 레오가 궁금해졌다.
시원한 에어컨 대신 선풍기가 윙윙 돌아가는 방에서 나는 내 절친과도 같은 반바지를 입고 입에는 아이스크림을 문 채 츠키나가 레오를 검색했다. 놀랍게도 그에 관한 기사는 거의 없었다. 이상한 검색어가 뒤섞여 엉망진창인 결과를 보던 나는 작곡이라는 키워드를 넣어보았지만 뜬 것은 텅 빈 페이지와 전혀 별개의 단어인 추천 키워드들이었다.
본명으로 활동하지 않을 수도 있고. 다른 필명이 있다든가. 마우스를 딸깍이며 고민해 보지만 그걸 알아낼 방법은 내게 없었다. 아니면 정말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을 지도. 자선 사업을 자처할 스오 가문은 아니었을 테지만 나는 시험 삼아 스오 작곡을 검색했고 곧 스오 가문이 손대고 있을 온갖 작곡과 신곡의 이야기들 속에 넌더리를 냈다. 얼핏 몇 개를 클릭해서 보았지만 그곳엔 츠키나가 레오로 추정되는 사람은 없었다.
푸르스름한 빛에 몇 마리가 걸려들었는지 창가에 설치된 벌레퇴치기가 틱틱 거리는 소리가 나길 한참, 나는 결국 컴퓨터를 껐다. 데뷔 직전의 작곡가여서 이제 막 작품을 출품...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상상하던 나는 포기했다. 애초에 그런 세계엔 관심도 없었다. 짝꿍이 옆에서 색색깔의 야광봉을 휘둘렀을 때도 동네잔치에 불려온 어르신의 박수만 칠 수 있던 나였다. 생각난 김에 나는 친구에게 메신저를 넣었다.
-혹시 츠키나가 레오라고 알아?
보낸 지 몇 분도 안 돼서 나는 조금 후회했다. 밤에 대뜸 한다는 말이 고작 이거라니. 그녀와는 방학 때 만나자고 해놓고 서로의 스케줄 때문에 만나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아니 별 거 아냐 위에 말은 잊어줘 라는 문장이 완성됐을 때 읽음 버튼이 뜨더니 냅다 대답이 돌아왔다.
-왜 몰라?
나는 당황했고 황급히 써놓은 문자들을 지웠다. 그 와중에도 그녀의 메시지는 계속 됐다.
-너 정말 내 친구 맞니?
-이거 사칭 아니지?
정체성까지 의심 당하고 있어 해명을 보내면서도 나는 다시 물었다. 그래서 츠키나가 레오가 대체 누군데? 한참을 날 놀리느라 여념이 없던 그녀가 결국 대답을 해주었다.
-나이츠의 임금님이잖아
나는 순간 탄성을 질렀다. 많은 것들이 잔뜩 가라앉은 망각의 바다에서 케케묵은 상자가 끄집어 올려지는 기분이었다.
“우리 그 시절 청춘을 다 바쳤잖아.”
어쩌다보니 주말인 다음 날에 바로 약속을 잡게 된 나는 차가운 음료와 함께 나와 마찬가지로 대학생이 된 친구와 마주 앉아있었다. 중학생 시대를 역설하며 말하는 그녀에게 나는 같이 오빠를 쫓던 뜨거운 동료로 기록된 듯하다.
함께 하긴 했었다. 티케팅을 도와주고, 앨범 줄도 서고, 특전을 모으기 위해 마을 탈출을 감행하고. 잊고 있었을 뿐이지 찬란한 수니질 인생이긴 했다. 비록 멤버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도 않고, 친구의 헬프에 응했을 뿐이지만.
“스오 츠카사, 세나 이즈미, 사쿠마 리츠, 나루카미 아라시, 츠키나가 레오! 와, 이것 봐. 아직도 다 기억해.”
주문이라도 외우듯 이름들을 다다다 내뱉은 그녀가 한숨을 흘렸다.
“네가 임금님을 모르다니 실망이야.”
“시간이 많이 지났잖아.”
빨대를 쪽쪽 빨며 그렇게 말했지만 츠키나가 레오란 이름은 여전히 낯설다. 그 외에 멤버도. 그도 그럴 것이 친구가 매번 입에 담은 건 스오 츠카사였다. 나에게 있어 나이츠란 스오 츠카사와 그의 동료들 정도였기에 얼굴만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도 스오 츠카사는 기억해.”
“역시 내 친구다.”
그녀는 오랜만의 나이츠란 말에 스위치가 켜졌는지 꽤나 들떠서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반쯤은 세피아 빛에 젖은 것 같은 아름다운 추억이었지만, 나는 그 속에 숨겨진 밤샘 줄의 지옥과 같은 팬끼리 싸움, 속 터지는 굿즈 경쟁 등을 아련하게 떠올렸다.
“그래도 너 덕분에 이렇게 생각나고 좋긴 하네. 찾아보니까 이런 거 아직도 가지고 있어.”
친구는 백을 열어 종이 같은 것을 꺼냈다. 그건 나이츠의 포스터카드였다.
계단을 오르는 컨셉으로 찍은 건지 나이츠 멤버들은 각 칸마다 서서 이쪽을 쳐다보거나 다른 곳을 보거나 했다.
츠키나가 레오는 맨 앞에, 가장 높은 계단에 있었다. 시선은 카메라 대신 옆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뒤에 있는 건 스오 츠카사였다. 앳된 얼굴의 스오 츠카사는 앞의 남자와 달리 카메라를 바라보고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데뷔했다고 했던가.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서 나는 몇 년은 젊어진 츠키나가 레오의 얼굴에 집중했다. 그는 무표정이었고 흐트러짐 없이 직시하는 시선 속에 한 유닛의 리더가 가질 법한 카리스마도 제법 있었다. 얼른 츠키나가 레오를 떠오르지 못한 건 이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저택에서 얼빠져 보일 정도로 활짝 웃는 얼굴과 이 단단한 무표정은 지금도 쉽게 매칭 되지 않는다. 이른 바 온 스테이지의 모습이란 건지.
“우리 오빠, 마을에 돌아왔다고 들었는데 얼굴은 한 번도 못 봤어... 방학되고 나서 좀 기대했는데 역시 우연히 보는 건 힘드네. 요즘 뭐하고 지내실까?”
나는 그가 그 유닛의 리더와 붙어먹는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아직 돈의 논리가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어쩌다 해체하게 됐지?”
그저 궁금했다. 잘 나갔을 아이돌인 그들이 지금은 어떤 경위로 저 흰 저택에 머무르게 된 건지, 어떻게 지금의 관계가 되었는지. 스오 츠카사와 츠키나가 레오는 서로 사랑하고 있는 건가?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그 둘이 연인관계라는 걸 상정한 적이 없었다. 왠지 비즈니스 관계로, 혹은 몸만 추구하는 관계로. 동성애자도 충분히 연애를 즐길 수 있고 연인을 가질 수 있다. 나는 호모포비아가 아니라고 하면서 실은 굉장히 그들에게 무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건가?
“그거 때문이잖아, 스캔들.”
“스캔들?”
나는 깜짝 놀랐다. 나만 몰랐을 뿐이지 츠키나가 레오와 스오 츠카사는 공인 사이였던건가? 하지만 그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다.
“임금님... 츠키나가 레오가 스캔들을 터뜨렸어. 팬을 임신시켰댔나? 공식 기자회견 열어서 대국민 사과하고 나이츠 탈퇴한다고 선언해서 난리도 아니었어. 그 뒤로 팬이랑 해외로 튀었나? 그랬고 남은 나이츠는 활동 하나도 안하더니 그대로 해체했어. 리더란 게 병크 쩔었다고.”
***
나는 오후의 티 세트가 실린 트레이를 밀고 있었다. 작은 바퀴는 꼼꼼하게 깔린 카페트를 소리 없이 굴렀고 곧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중한 노크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나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고 곧 바닥에 엎어져 있는 전직 아이돌 리더를 발견할 수 있었다.
“손님, 차를 준비했습니다.”
나는 최대하게 정중하게 말했고 천천히 올라가고 내려가는 등의 박자는 변하지 않았다. 식기들을 테이블로 옮기고 난 후 나는 가감 없이 보이는 자는 모습을 보았다. 가볍게 감긴 두 눈, 살짝 벌어진 입, 펜을 꼭 쥐고 있는 손. 날카로운 눈매가 사라지니 정말 어린 아이 같았다. 난 아무 것도 몰라요. 나이츠도, 리더도, 스캔들도.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얼굴에 갑자기 어떤 충동이 치밀어 올랐고 그걸 실행했다.
“임금님.”
그건 그다지 큰 소리도 아니었는데 남자의 반응은 곧바로 돌아왔다. 곤히 자던 것도 거짓말처럼 녹색 눈이 반짝 떠졌고 바로 몸을 일으켰다.
“-어라.”
주위를 둘러보던 남자가 나와 눈을 마주치고 멍청히 말했다.
“혹시 릿츠가 왔어? 목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다른 손님은 오지 않으셨어요.”
나는 스오 가의 유일한 손님에게 말했다.
“제가 불렀어요.”
“그래? 너 릿츠랑 목소리가 비슷하구나-.”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기지개를 뻗었다. 손바닥에 늘어붙어 있던 종이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릿츠라면 사쿠마 리츠를 말하는 건가요?”
츠키나가 레오는 눈을 깜박였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너도 나이츠를 알고 있었구나.”
“며칠 전까진 기억 못했어요.”
“그럴 것 같았어. 아직까지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팬인 경우가 많고, 너는 팬의 눈을 하고 있지 않았거든.”
“팬의 눈이 뭔데요?”
“뭐랄까, 엄청 반짝거리면서도 아련해지지. 사랑했던 것을 보는 눈이 되거든. 눈은 솔직하니까. 너는 특히나 솔직한데 그런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아서 금방 알았어. 이게 아니면 증오로 가득 차서 바라보지. 나이츠를 정말 좋아했던 아이들은 말이야. 그들이 사랑한 나이츠를 내가 부숴버렸으니.”
나는 순식간에 치솟는 질문들을 억누르느라 입을 다물어야 했다. 나는 나이츠의 팬도 아니다. 며칠 전까진 그의 이름에서도 나이츠를 전혀 떠올리지 못한 문외한이기도 했다. 그런 내가 연예 기자처럼 그에게 온갖 질문을 던질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 나를 꿰뚫어 보는 것처럼 츠키나가 레오는 웃고 있었다.
“엄청 궁금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아무 말도 안하네.”
“일전에도 엄청 실례인 행동을 봤는데 더 실례를 저지를 순 없어요.”
“그래? 난 상관없는데. 어떤 인터뷰에도 응하지 않은 무거운 입이 메이드 씨 앞에선 우연히 열릴 지도 모르고.”
츠키나가 레오는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티 세트를 주섬주섬 바닥으로 가져왔고 쿠키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츠키나가 레오에게 물었다.
“그럼 질문해도 되나요?”
“메이드 씨 뜻대로.”
아직 온기를 가진 차가 찻잔에 말갛게 담겼다. 은은한 향기 속에서 나는 질문했다.
“스오 츠카사와는 연인 관계인가요?”
“푸흡.”
츠키나가 레오는 입 안에 머금고 목구멍으로 넘기려던 홍차를 거하게 뱉었고 비싼 카펫에 다홍색 물이 큼지막하게 아롱졌다.
“저기서 어떻게 저런 질문이 되지..? 역시 우주는 신비로워! 예측 불가능해!!”
잔뜩 신난 그가 허공에 대고 떠들었다. 미치광이 같은 우주예찬론은 얼마 가지 않아 끊겼고 그는 팔짱을 끼며 고심에 잠겼다.
“그런 달콤한 이름은 예전에 끝났던 것들이고. 음, 그러게... 우리 관계는 뭘까? 나는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찢어져서 솜이 다 빠져나간 인형에 바느질? 금이 간 도자기에 본드칠? 다 무의미한 일들이네.”
그와 대화를 하려면 어느 정도 형이상학적인 개념을 몸에 둘러야 할 것 같았다. 아니면 마지막 잎새에도 몸을 움츠리는 시인이 되거나.
“제가 말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스오 씨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걸요.”
“그럴 수도 있어, 관찰력 좋은 메이드 씨. 하지만 연인은 역시 조금 다른 것 같아. 도망친 비겁자에게 그런 황송한 칭호를 내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연인은 그런 거창한 게 아니에요. 서로 좋아하면 되는 거죠.”
짜증이 난 나는 그렇게 내뱉었다. 나는 고등학생 때 사귄 남자친구를 떠올렸다. 분명 두근거렸을 첫 고백은 거기까지, 두근거림도 무엇도 남지 않은 그 바보 같은 관계는 츠키나가 레오가 칭하는 거창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떤 유치한 사랑도, 소꿉놀이 같은 것도, 형식적인 것만 실행하는 무엇도 다 연인이라는 이름 밑에 있을 수 있다. 그냥 당사자들의 문제이지 누구에게 평가 받아야 할 경연 대회가 아니다. 사람과 사람의 얽힘일 뿐이다. 나도 아는 걸 왜 이 사람은 모르는 걸까.
“물론 세상은 그렇게 간단하진 않겠지만요.”
그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기에 나는 이렇게 덧붙여야 했다. 츠키나가 레오는 고민을 하는 것도 같았고 아무 생각이 없는 것도 같았다. 그저 자신이 뱉어낸 찻물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나는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
“...아이가 있어서요?”
나는 또 후회하고 말았다. 제멋대로 튀어나온 말은 카펫의 얼룩처럼 도로 주워 삼킬 수 없었다. 남자는 두 눈을 껌벅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런 설정이었지. 맞아, 아이가 있어! 팬을 임신시킨 희대의 쓰레기의 가엾은 자식. 짜잔 놀랍지요, 거기에 한 명이 더 늘었어요. 아들 하나에 딸 하나라는 이상적인 구성. 그 둘은 뉴질랜드에서 맛있는 우유를 마시며 아주 건강하게 자라고 있답니다! 카메라 잘 돌아가고 있는 거지?”
가상의 카메라에 브이를 그린 츠키나가 레오가 몸을 굳히더니 줄곧 굽어있던 등을 바르게 폈다.
“인터뷰는 끝났어. 나이츠의 몰락, 그리고 몇 년 후... 라는 조각 기사를 완성하기 위해 기자들은 키보드를 두들기겠지. 좋아, 이제는 심야야. 웬만한 방송실은 붉은 불을 끄고 암흑 속에 잠겨있을 테지. 지금은 음모론을 속삭이는 게릴라 방송들이 눈을 뜨는 시간이야. 들어주겠어 메이드 씨? 이건 다 끝나버린 어느 이야기를 헤집는 것뿐이야. 신빙성은 물에 타먹으려 해도 없지.”
츠키나가 레오는 헤드셋을 쓰는 시늉을 했고 가까이에 마이크가 있는 것처럼 몸을 끌어당겼다. 혼자만의 극적인 연극은 계속 됐다.
“츠키나가 레오의 스캔들 상대가 정말 팬이었을까? 여기부터 짚어보자고. 지금은 알 수 없어. 왜냐하면 어떤 입김 센 곳이 권력을 휘둘러 관련 기사들을 다 삭제해 버렸거든. 이건 미래의 일이지만! 다시 그 때로 돌아가 볼까. 당시 연예 기자들은 츠키나가 레오와 그렇고 그런 일이 벌어진 팬이라는 상대를 찾기 위해 갖은 정보망을 모두 이용했어. 결과는 어느 한 사람도 머리카락 한 올 조차 찾지 못했지. 그럼 팬이란 건 거짓말일까? 팬이라는 게 딱히 틀린 말이 아닐 수도 있어. 존경과 팬심은 종이 한 장 차이 아니겠어? 하지만 팬의 증거도 임신의 증거도 그 어디에도 없지. 이렇게 가정해 보자. 사실은 그 스캔들의 상대가 남자라면? 그것도 같은 그룹의 멤버라면..? 좀 더 가공을 해볼까. 그가 휘말린 스캔들은 동성애 관련 이슈인 거야. 아직 신문에 공표하기도 전에 한 협박 편지에서. 그 멤버와 호텔 앞에서, 휴양지에서 찍힌 적나라한 사진과 함께. 막대한 돈 요구는 빠져선 안 되겠지? 솔직히 세상은 돈이 최고잖아.
하지만 말야, 돈을 준다고 하면 그 사진이 사라지겠어? 지운 척 하다가 언제 어디서 다시 나타나 아무렇지도 않게 요구를 할 수도 있고, 냄새를 맡은 다른 곳에서 더 많은 돈을 준다고 하고 정보를 사갈 수도 있어. 그 협박자는 실제로 그런 낌새를 내보였거든. 이니셜 처리되지만 누구지 뻔한 그런 대문짝만한 기사가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폭탄을 계속 안고 가야 하는 거지.
그래서 츠키나가 레오는 어떻게 했을까? 스캔들 상대를 츠키나가 레오는 사랑하긴 했을 거야. 좋아하고 아끼고 사랑했지. 하지만 그의 나이츠만큼 사랑했을까? 그건 아무도 몰라. 그런 츠키나가 레오와 달리 어떤 막내 기사는 세상의 견고한 역경과 싸울 결심을 굳혔어. 협박이라는 비겁한 수단에 넘어가느니 당당히 밝히자고 말야. 아주 눈부신 사람이야, 그렇지? 그는 그의 하나 뿐인 리더도 같은 길을 걸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어.
츠키나가 레오는 멋대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 역적이 될 명분을 내세우고는 나이츠를 탈퇴했어. 멤버 그 누구에게도 상의하지 않고 말이야. 영문을 모를 멤버들의 연락도 모두 무시하고, 기자회견에서 했던 말들은 사실이라는 통보와 함께 해외로 도망쳤어. 그 어리석은 왕은 누구보다 도망치는데 자신이 있었거든. 실제로도 잡히지 않았고. 왕은 대충 이렇게 생각한 거지. 자기만 빠지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잘 될 거라고. 그런 안일한 결론의 끝은 모두 알다시피 사랑하는 것의 종말과 한 사람의 파멸이었어. 이건 음모론이지만... 사실이라면 정말 끔찍하지 않아? 어리석은 것도 정도가 있지!”
나는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고 필사적으로 혀를 굴렸다.
“한 사람의 파멸이란 건 스오 츠카사 씨를 말하는 건가요? 그 사람은 괜찮잖아요?”
“오옷, 시청자의 의견이 들어왔습니다. 읽어볼게요. 스오 츠카사는 멀쩡하다... 이런 명민한 사람 같으니. 누군지 말을 안했는데 제대로 짚었네. 그럼 음모론을 좀 더 펼쳐보자. 믿고 말고는 시청자의 몫이니까. 2화 시작이다.
스오 츠카사는 이미 말했지만 아주 눈부신 사람이야. 지금은 그 눈부심을 잃었어. 무슨 말이냐면 망가져 버렸거든. 사람의 신뢰를 모조리 부숴버리면 이런 꼴이 되나봐. 리더를 긍정하고 현실을 부정하던 그는 자신의 굴레에 사로잡혀 망가졌어. 아주 심한 꼴이었나봐. 세계를 떠도느라 그 자리에 없던 츠키나가 레오는 알 턱이 없겠지만. 하나 뿐인 적장자의 이상에 스오 가는 발칵 뒤집혔지. 몇 년 후에 모든 일의 원흉인 츠키나가 레오가 돌아왔지만, 너무 늦고 말았어. 스오 츠카사는 츠키나가 레오의 말을 진실이라 믿는 거야. 그의 기자회견도 사실! 츠키나가 레오는 팬 사이에 사고 친 자식과 단란히 가정을 꾸리고 있고 츠카사는 그를 붙잡을 수 없는 방해꾼이 된 거야. 그것이 절대적인 진실이 되어서 전에 했던 말들은 거짓말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믿지 않는 거지.
‘저를 위해 그런 말을 해주는 건가요? 당신은 역시 상냥해요. 미안해요, 내가 빨리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어때, 좀 그럴싸한 흉내가 되었을까?”
“그럼 믿을 때까지 말해야죠. 배신당했는데 하루 만에 마음을 푸는 사람이 어딨어요.”
“감정 이입이 빠른 걸? 호응이 좋은 관객은 좋아해! 그래, 비록 음모론이지만 츠키나가 레오 좀 더 힘을 내 보라고. 사랑하는 막내 기사를 모두가 잠 든 성에서 구출하자! 거긴 벌써 시간이 멈춘 지 100년이니까~!”
“멍청한 왕의 이야기 잘 들었어요. 들려줘서 고맙고요. 그거랑 별개로 나에게 이런 얘기를 왜 하는 거죠?”
“그을쎄에~ 망상해 보라고 하고 싶지만 끝까지 이야기를 들어줬으니 작은 상을 줄까. 시청자 씨는 어느 학교에 있던 전학생이랑 느낌이 좀 비슷해서, 응석을 부리고 싶어져. 물론 이쪽이 더 거침없지만!”
다 식어버린 홍차를 츠키나가 레오는 한 입에 모조리 삼켜버린다. 정성스럽게 끓여질 홍차는 최악의 방식으로 소비됐다. 그는 만족한 모양이지만.
과연 홍차 맛에 대한 만족일까? 그의 눈에는 후련함이란 감정과 포만감이 깃들여 있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츠키나가 레오가 나라는 기묘한 공범자를 만들었다는 것을.
“단 한 명의 시청자는 가엾게도 어디에 말을 하지 못할 테고 말이지. 이곳의 조심스러운 비밀을 풀었다간 말도 안 되는 폭력에 저항도 못하고 사라져. 조심해, 여긴 무서운 곳이야. 물론 저 음모론들을 듣고 믿어줄 사람이 있기야 하겠냐만은.”
나는 멈칫했고 그는 녹색 눈동자를 가늘게 좁히며 웃었다.
“방송은 끝났어. 이만 돌아가, 메이드 씨. 그렇지 않으면 홍차를 아주 맛있게 타주는 집사가 걱정할 거야.”
츠키나가 레오는 대화의 끝을 고했다.
나는 어느 아이돌의 흥망성쇠라는 정보 속에 머리가 뒤죽박죽인 상태였다. 그가 말한대로 지금은 근무시간이었기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지막으로 돌아본 그는 다시 카펫에 누워있었다. 침대로 가서 자는 게 어떠냐는 마을 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
“메이드 씨.”
나는 고개를 들었고 내 머리보다 한참 위에 자주색 머리가 있는 걸 발견했다. 나는 스오 츠카사를 잠시 얼빠지게 바라보다가 조금 뒤늦게 고개를 숙였다.
“일찍 오셨네요.”
“네, 폭염으로 조기 퇴근하기로 했거든요.”
어딘지 몰라도 정말 좋은 회사다. 나는 잠시 메이드에게 조기 퇴근이 없냐는 질문을 꾸겨 삼켰다. 이곳의 냉방과 밖의 더위를 생각하면 정시 퇴근하는 게 조금이라도 나에게 도움이 될 터였다.
“일은 할 만해요?”
“네, 로봇 청소기를 바꿔주신 것도 큰 도움이 됐고요.”
“그거 다행이네요.”
스오 츠카사가 빙그레 웃었고 나도 예의상 미소를 돌려주었다.
“혹시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곧 메이드 씨의 계약기간이 끝나가잖아요? 저는 메이드 씨가 좀 더 이곳에서 일 해줬으면 좋겠어요. 일도 물론 잘하고 레오 씨와도 사이가 좋아 보이고. 원한다면 임금 인상도 고려하고 있어요.”
집사에게도 들었던 이야기였다. 방학으로 한정된 계약 기간을 늘리는 게 어떠냐는 제안이었다. 여기 월급은 쏠쏠하다 못해 황금 노다지가 아니냐 싶을 정도로 굉장했다. 학교를 휴학하고 이곳에서 이를 악물고 돈을 버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츠키나가 레오의 이야기가 내 등을 누르고 있는 상태에서 어쨌든 나는 고민 중이었다. 사실 결론은 거의 나왔다.
“돈은 충분해요. 우선은 방학까지만 다니는 거였으니 앞으로 일정도 고려해 봐야 하고...”
사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니다. 나는 스오 츠카사를 힐끔 쳐다봤고 그는 상냥하게 눈을 마주해줬다.
“스오 씨의 입장에서는 제가 손님과 친한 게 도움이 안되는 게 아니었나요?”
그는 츠키나가 레오와 관계를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 질문이 무례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스오 츠카사는 이 어이없을 질문에 눈을 둥그렇게 떴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그런 가요? 레오 씨에게도 친구는 필요하니까요. 처음에는 조금 의심했지만 메이드 씨는 신원도 확실하고. 나이츠의 팬도 아니고, 해외에 나간 경력도 없고,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 맞잖아요?”
나는 그 어딘가 맛이 간 대답을 곱씹다가 어이가 없어져 말했다.
“제가 두 분께 자주 무례를 끼치는데요, 일단 끝까지 말할게요. 손님, 아니 츠키나가 씨의 말은 언제쯤 믿어줄 거예요?”
“말이라면, 레오 씨의 상냥한 거짓말을 말하는 건가요? 메이드 씨도 깜박 속아 넘어갔나 보네요. 그 사람은 정말 다정한 사람이라 그런 필요 없는 거짓말을 한답니다. 나는 그 점도 아주 좋아해요.”
“그럼 유부남이란 소릴 믿고 있다는 건데 아주 좋아한다니 그거 불륜인데요.”
“좋아하는 마음을 막을 수 없잖아요? 제가 하는 행동이 불만이면 상대가 따지러 오겠죠. 저는 그 편이 오히려 좋네요.”
“상대는 평생 올 일 없을 걸요. 츠키나가 씨는 거짓말 하는 게 아니니까.”
“그건 음모론이에요.”
스오 츠카사는 딱 끊어 말했고 나는 속에서 밀려오는 답답함에 소화불량이 될 지경이지만 이걸 어떻게 해결할 방법은 없었다. 도를 넘는 참견은 여기까지 할까. 어쩌다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버려서 말하긴 했지만 더 이상은 관여하기 싫었다. 스오 츠카사의 말이 이어졌다.
“만약 그 사람 말이 사실이라 쳐요. 나는 레오 씨의 말에 수긍하고 그럼 임무를 다한 그는 여기를 떠나겠죠. 내가 그 음모론을 믿어서 이득이 될 건 하나도 없네요.”
“츠키나가 씨는 그 사실을 믿어줄 때까지 여기 있을 거라고 했어요?”
“네, 실제로 그는 이곳에만 있어요. 나는 그 사실에 언제나 감사해요.”
스오 츠카사는 행복하다는 듯이 웃었다. 나는 그만두기로 했다. 그는 자기가 만든 미로에 츠키나가 레오와 자신을 가두고 만족하고 있었다. 애초에 제정신인 사람은 저런 말을 할 턱이 없다.
“제가 말이 심했어요. 스오 씨는 환자인데 말이죠.”
“아니에요. 저야말로 시간 뺏어서 죄송합니다. 일 마무리하고 가세요. 오늘은 정말 더우니까 빨리 들어가셔도 괜찮아요.”
잔뜩 비꼼 섞인 말에도 스오 츠카사의 예의는 여전했다. 놀랍게도 그는 나를 오히려 애정 어린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메이드 씨는 정말로 누님과 닮았네요. 누님은 저에게 언제나 옳은 소리를 해 주셨죠. 메이드 씨의 말도 새겨듣도록 할게요.”
그게 정말 마지막인지 그는 정중한 인사와 함께 자리를 떴다. 누님이 누군데? 이맛살을 찌푸리며 그 말을 생각하던 나는 문득 든 생각에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만약 그 누님이 츠키나가 레오가 말했던 전학생이라면? 그 대화는 확실히 츠키나가 레오 둘만이 있을 때 벌어졌다. 스오 츠카사가 언급했던 음모론이란 단어도 묘하게 걸렸다. 둘의 어휘가 겹친다고 생각했지만 우연이 아니었던 걸까? 나는 츠키나가 레오와 스오 츠카사가 서로 비슷한 말을 구사한 적 없는 지 필사적으로 생각하다가 어떤 사실도 떠올랐다. 스오 츠카사가 부르는 메이드 씨란 호칭 역시 츠키나가 레오가 부른 뒤에 시작됐다.
나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숨겨진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정신없이 천장 구석 등을 살폈다. 그 어느 곳에도 빨간 빛을 점등하는 카메라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보통은 자신의 집에 카메라를 설치하지 않는다. 그럴 테지만.
긴팔을 입고 있는데도 걷잡을 수 없는 소름이 돋아서 나는 팔을 감싸야 했다.
***
메이드복을 벗어 던지자 그제야 꽉 막힌 숨이 터지는 기분이었다. 조금 거칠게 벗은 옷가지를 빨래 통에 구겨 박고 저택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반팔과 반바지를 챙겨 입고는 황급히 문을 나섰다. 살을 지질 듯이 덤비는 열기가 반가울 지경이었다.
성큼성큼 걷는 걸음에 따라 흰 저택이 점점 멀어졌다. 매미 소리가 고막을 터뜨릴 기세로 울 때 나는 안도를 하고 있었다. 여기라면 무엇이든 조용히 듣고 있을 무언가의 눈도, 귀도 없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 집을 바라보았고 다시 앞을 보았다.
메이드들이 조용히 오가는 중세의 저택이 아닌 더운 현실이 앞에 있었고 나는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 여름에도 서늘한 상자 속에서 그들은 어떠한 거짓과 환상을 뿜어내 언제 깨질지 모르는 낙원을 만들어 내겠지만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앞으로 내가 저곳으로 들어갈 일은 없을 테니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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