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카레오 - 목소리
* 츠카레오
* 전력. 주제는 목소리였습니다.
* 지각 죄송합니다....
밖에서 새소리가 들려온다. 아마도 밖은 갓 떠오른 해가 중천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것이다. 아무도 깨우러 오지 않는 아침이 이럴 땐 좋다. 빛이 들어찬 방의 모습이 시야에 멀거니 들어온다. 고풍스럽다는 이름으로 포장될 수 있는 낡은 벽지, 청소가 제대로 되지 않아 먼지가 낀 원목 선반, 멈춰버린 시계 바늘, 빨래만은 제대로 해주어 새하얀 시트, 그 위를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팔과 그 팔을 감싸 안은 다른 손. 깜박이며 그걸 보고 있으면 등 뒤의 온기가 꿈틀거렸다. 곧 무언가가 어깨에 닿는다. 촉촉하게 맨살을 누르는 것이 목으로, 머리칼로 차례로 움직였다.
"일어났어?"
레오의 목소리가 등을 타고 울리자 남자가 뒤에서 레오를 끌어안았다. 이마가 어깨에 부벼졌다. 레오는 꿈틀꿈틀 남자의 품에서 몸을 돌렸다. 방금 일어난 것치곤 제법 또렷한 시선이 레오를 바라보고 있다. 보랏빛 보석에 레오만이 온전하게 담겼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레오의 것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는 남자, 스오 츠카사는 부드럽게 웃으며 소중하게 레오를 품에 안았다. 남자는 바다에서 올라온지 한참 되었지만 여전히 그 입술에서는 바다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스오 츠카사와 첫 만남은 해변에서였다. 그다지 좋아하지 않은 바닷가를 산책했던 건 단순한 변덕이었지만 운명이라는 선물의 전조였을 지도 모른다. 츠카사는 파도가 지나간 자리에 젖은 해초처럼 널려 있었고 긴 나뭇가지로 모래 바닥에 질질 선을 그으면서 오던 레오는 그를 주웠다. 남자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걸음걸이도 갓 태어난 망아지처럼 어설펐다. 그런 츠카사에게도 할 줄 아는 것이 있었는데, 자신의 이름을 쓸 정도로 글자를 알고 있었고, 레오에게 덥석 매달리기라는 특기도 가지고 있었다. 처음 만났던 날, 물이 뚝뚝 흐르는 젖은 머리를 들고 인간이 아닌 것 같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레오를 모래사장에 넘어뜨렸을 때처럼 말이다.
레오는 모래 범벅이 되어, 자신의 상의를 걸친 것 빼고는 벌거벗은 남자를 자신의 동생에게 데려갔었다. 성에서 길러도 괜찮을까? 위대한 성의 주인이자 레오의 하나 뿐인 동생은 시리도록 푸른 눈으로 츠카사를 면밀히 훑어보곤 부드러운 금발을 끄덕이며 남자를 레오 수하에 두는 것을 흔쾌히 허락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벙어리 정도는 그에게 아무 위협도 안 될 것이며, 오히려 자비를 드러낼 수단이 되니 안성맞춤일 것이다. 그리하여 스오 츠카사는 츠키나가 레오의 것이 되어 성에 함께 살게 되었다.
츠카사의 어설픈 걸음은 차차 나아져서 빠르게 달리기는 무리더라도 보통 사람과 비슷한 수준으론 걸을 수 있게 되었지만 말은 전혀 진전이 없었다. 츠카사의 목에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의사는 말했지만 그가 뱉을 수 있는 유일한 소리는 목이 긁힌 짐승이 내는 소리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용케 글을 배웠는지 글은 유창했다. 남자는 준비해둔 종이에 글을 쓰거나 레오의 손바닥에 자신의 의사를 적곤 했다. 언제나 레오의 음표로 넘치던 종이에 반듯한 글씨들이 자리 잡은 건 츠카사가 오고 난 후 작은 변화 중 하나였다.
어디에서 왔냐고 물으면 츠카사는 저 너머 넘실거리는 푸른 바다를 가리켰다. 남자는 정말로 바다의 물거품에서 태어났을 지도 모른다. 걷는 것은 서투르지만 헤엄은 물고기마냥 자유롭다. 붉은 머리와 차분한 보라색은 심해 깊은 곳에서 품고 있는 보석 같은 색이었다. 민물을 뒤집어쓰고 목욕을 해도 그에게 안겨 있으면 바다 속에 잠기는 기분을 받았다. 바다는 질색인 레오지만 츠카사는 괜찮았다. 그가 진짜 바다가 아니여서였을 지도 모르지만.
레오는 바다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가 사는 성이 해변가에 위치한 걸 생각하면 그건 꽤나 불편한 불호였다. 천둥이 치며 파도가 몰아치는 소리가 유독 강한 날은 베개를 머리에 누르며 필사적으로 귀를 막아야 했다. 레오의 이런 성향은 그가 바다에 빠지는 사건이 일어나면서부터 생겨났었다.
왕의 첫째 왕비와 그녀의 아들이 주축이 된 화려한 선상 파티. 그 끝은 배의 침몰이라는 비극적인 결말이 되고 말았다. 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정을 알만한 이들은 모두 사자가 되어 더 이상 입을 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로 바다 한가운데에서 배는 침몰했고 첫째 왕비를 비롯한 유력한 측근들은 모두 바다의 침묵 속에 집어삼켜졌다. 유해를 발견하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에서 첫째 왕자의 생존을 논하는 이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몇 달 후, 놀랍게도 레오는 조금 야위긴 했지만 바다에서 오랫동안 사라진 사람치곤 멀쩡한 몰골로 해변가에서 발견되었다.
성에서 눈을 뜬 레오는 그간의 일들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배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몇 달간 어디에 있었는지를 포함해 모두. 하지만 바다가 남긴 상처는 그에게 분명히 남아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후계자 교육을 받으며 반듯하게 자라난 제 1왕자가 벽에 마구 낙서를 하는 광인으로 돌변하지 않았을 테니까. 원래부터 음악을 사랑했던 레오지만 아무데서나 작곡을 하겠다고 덤비지는 않았었고, 어릴 적부터 몸에 익힌 예의 작법 대신 시끄러운 웃음소리와 방정치 못한 소리를 입에 담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는 문안의 자리에서 병상에 누워있는 이 나라의 왕이자 그의 아버지인 사람에게도 하대를 하며 킬킬거리곤 했다. 제 1왕자는 완전히 정신이 나가버렸다. 성 안의 모두가 그가 겪은 끔찍한 재난에 동정을 했고, 후계자가 된 2왕자는 그런 자신의 하나 뿐인 형을 가엾게 여기어 바다에서 가장 먼 방을 내주고 그의 생활에 불편함이 없게 하였다. 레오는 씩씩하게 고맙다고 말했다. 거기에 나머지 동생들은 모두 어디 갔냐는 멍청한 질문은 들어가 있지 않았다. 만일을 위해서라는 수식과 함께 레오에게 왕자의 자격은 사라졌다. 1왕자는 죽었지만 레오는 살아남았다. 레오는 그 사실에 만족했다.
그런 츠키나가 레오가 데려온 스오 츠카사는 아주 이상한 사람이었다. 레오는 그가 어쩌면 오리의 후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알에서 깨어난 새끼 오리는 가장 먼저 본 것을 어미로 따른다. 바다의 거품에서 태어난 츠카사를 제일 먼저 본 건 레오였고 그에 따라 츠카사는 레오를 어미로 여겨 따르는 게 아닐까 하고. 물론 츠카사가 침대에서 하는 행동은 어미에게 하는 것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그 점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츠카사는 포옹을 좋아해서 언제나 레오를 끌어안곤 했다. 옷을 입은 채보다 살과 살이 닿아 비벼지는 걸 선호했고 레오에게 그것을 종용하다 종종 더 깊어진 행위로 이어질 때도 있었다. 그것이 걱정되어 자신은 괜찮지만 다른 사람한테 하면 안 된다고 하면 츠카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곤 했다. 다른 사람에게 할 리가 없잖아요. 레오에게만 하는 거예요. 레오는 오리의 본능을 떠올리면서도 왜냐고 물었고 그럼 츠카사는 이상한 대답을 했다. 줄곧 안아주고 싶었어요. 처음 당신이 내게 왔을 때처럼 꼭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러면 공기 거품이 찢어지니까 그럴 수 없었어요. 영문을 모를 소리였다.
"날이 지나치게 좋네! 햇빛이 유달리 씩씩한 느낌이어서 기분은 좋은데 덕분에 뭐할지가 깡그리 날아가 버렸어. 오늘은 뭘 하기로 했더라...."
레오의 수다는 자연히 많아졌다. 듣는 사람이 있고, 하물며 그가 말을 못하니 더 그랬다. 레오는 창틀에서 바깥을 보고 있었고, 츠카사는 그의 망토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를 끌어안고 있었다. 츠카사의 손이 아래를 가리켰다. 탑 아래 정원은 사람의 손이 거의 닿지 않아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아, 맞아. 저기를 손보기로 했지. 장미를 살리는 건 실패했으니까 산에서 들꽃을 잔뜩 데려오자. 걔네들은 생명력이 강해서 어떻게든 살아남을지도 몰라. 흙이랑 햇빛이랑 물로 버텨주면 좋겠는데. 너도 나도 이런 쪽은 하나도 모르잖아."
츠카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붉은 머리가 출렁이며 레오의 볼을 간지럽혔다.
"너도 이제 제법 말을 잘 타니까 커다란 자루를 가져가서 쌩하니 나르면 시들기 전에 어떻게 되지 않을까! 가는 김에 어제 설치한 덫 상태도 보고. 오늘도 흙투성이 하루가 되겠네! 물론 그런 망아지꼴이 나의 아우님이 원하시는 모습이겠지만 말이야."
의아한 시선이 따라붙어 레오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 것도 아니야! 하루하루 연명하는 목숨이니까 어찌 되었든 상관없지만 네가 생겨서 조금 고민이야. 그나마 네가 남자여서 다행이지, 여자였어봐. 애가 생기면 뭔가의 화근이 될 수도 있다면서 이러는 것도 허락 못 받았을 지도. 음? 내가 아이를 가지는 역할이라고? 와하하, 그건 그렇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니까 우린 어디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이 평화를 즐기면 되는 거야!"
시끄럽게 웃는 레오를 못마땅하게 내려다보던 츠카사가 레오를 꼭 끌어안았다.
"에, 뭐야, 건강하네?! 방금의 뭐가 너를 움직인 거야? 으아, 여긴 어지러우니까 적어도 침대에서~!"
레오의 바람을 받아들였는지 츠카사는 레오를 끌어안고 몇 걸음 근처에 있는 침대에 풀썩 쓰러졌다. 얼굴에 입술을 내리다가 손바닥에 츠카사가 글씨를 적어 내려갔다. 그 궤적을 가만히 살피다가 레오가 웃었다.
"와하핫, 나와 너의 아이가 보고 싶다고? 나는 그런 망상도 좋아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으니 더 간절하고 상상의 농도가 진해지지. 나는 이를 테면... 너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 너 되게 어디 왕자님 같이 생겼다고? 나같은 것보다 훨씬! 아, 난 이제 왕자가 아니지. 그럼 내 아우님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말이야. 그 단정하고 예쁜 얼굴 아래에 숨겨진 목소리는 어떨까 하고 매일 생각해. 밖의 새소리처럼 재잘재잘 높을까? 아니면 바다의 암석들처럼 묵직하게 가라앉을까? 목소리 어조는 네 글씨처럼 단정할 거야. 격식 있고 예의 바르지만 부드럽겠지. 마실 때마다 기분 좋은 따뜻한 우유 거품 같을지도 몰라. 그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주는 거야. 내가 어디에 숨으면 소리 내어 나를 부르고, 기뻐하고, 화내고, 울고, 웃고. 그 목소리의 가운데에 츠키나가 레오가 있는 거지. 정말 멋지지 않아?"
레오의 손이 뻗어져 츠카사의 목을 어루만졌다. 츠카사는 조심스레 그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천천히 입을 벌렸지만 여전히 목울대만을 간신히 긁어 올리는 듯한 소리만 덕지덕지 흘러 나왔다. 소리를 내는 것을 포기하고 츠카사는 레오에게 고개를 숙였다. 레오는 그 상처 가득한 목소리를, 숨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따뜻한 바다를 끌어안으면 이런 느낌일까. 한참을 서로를 갈구하면서 레오는 들릴 리 없는 어떤 소리를 듣는다. 짠 물거품들이 와르르 쏟아지는 검푸른 어둠 속에서 레오를 부르던 누군가의 목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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