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카레오 - 왕과 기사
*츠카레오
*전력 주제를 보고 쓰기 시작했으나 시작한 시각도, 걸린 시간도 전력 60분이 아닙니다....
*주제는 왕과 기사였습니다.
자고 일어나니 스오 츠카사가 커져 있었다.
츠키나가 레오는 이렇게 밖에 상황을 설명할 수 없었다. 녹음이 끝도 없이 우거진 푸르름의 한복판에 갈색 흙을 요 삼고 단단히 뿌리내린 나무 밑동을 베개 삼아서 레오는 말 그대로 아주 꿀잠을 자고 있었다. 그 깊은 수면을 깨우는 건 땅을 흔드는 거대한 진동이었다. 얌전히 놓인 돌멩이까지 들썩들썩 움직이게 만드는 거대한 울림에 레오는 멍청하게 눈을 깜박이다가 벌떡 일어났다. 왼손에 활을 쥐고 다른 손으론 화살 통에서 화살을 꺼내려고 했지만 한참 전에 비어있다는 걸 뒤늦게 눈치 챘다.
레오가 일어난 후에도 진동은 일정하게 쿵쿵 울리고 있었다. 레오는 베고 누워 있던 나무를 원숭이처럼 올라탔다. 가장 높고 가장 얇은 가지가 손에 잡힐 때 레오는 거대한 츠카사를 보았다. 그는 나무로 이루어진 녹색 바다를 도랑 건너듯이 천천히 걷고 있었다. 나무들은 츠카사의 무릎에도 미치지 못했고 드높이 솟은 산 정도가 그와 눈높이를 마주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 광경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레오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어~이, 스오~!!!”
외치면서도 레오는 걱정됐다. 과연 목소리가 저 높이 있는 그에게 닿을까. 츠카사의 발걸음에 밥알처럼 으깨지는 나무는 레오의 몇 배나 되는 나무였다. 츠카사는 너무 컸고 레오는 너무 작았다. 하지만 그 걱정은 기우였는지 츠카사의 걸음이 우뚝 멎었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나 싶더니 이쑤시개의 먼지처럼 보일 레오를 금방 찾아냈다.
“어디 있나 했더니 그런 곳에 계셨습니까?!”
몸집만큼 거대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숲 어느 곳의 새 무리가 퍼드득 날아가는 와중에 레오가 와하하 웃었다.
“에, 여기서 자고 있었지. 스오야말로 어 그러니까 많이 컸구나??”
“당신이 멀리 있어도 쉽게 찾으려고 이렇게 커졌나 보죠. 그나저나 또 땅에서 주무신 건가요? 그러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시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당신이 감기 하나 걸리는 것 하나로 수십 명이 고생하는 것도 알아주세요.”
츠카사의 깊은 한숨에 밑에 있는 나무가 태풍에 휘말린 듯 소스라쳤다. 그 꼴을 가만히 보고 있던 레오 앞에 커다란 손이 내밀어진다.
“갑시다. 이번에도 한참 찾았어요.”
내밀어진 두 손바닥은 넓은 무도회장에 깔린 양탄자보다 컸다. 레오는 고민하다가 그 손에 올라탔다. 발을 디디자마자 당연하지만 뜨끈한 체온이 느껴졌다. 츠카사의 손이 울타리라도 되듯 둥글게 감싸 안더니 조심스레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긴다. 곧이어 츠카사는 아까보다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둔한 울림에 몸이 절로 우쭐댄다. 아주 거대한 코끼리에 탄 기분이었다.
“어디로 가는 거야?”
“어디긴요, 성이죠.”
츠카사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맞아, 그랬지. 레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 아주 멀리 온 것 같은데 츠카사는 몇 걸음 가지 않아 깊은 숲을 금방 빠져 나왔고 장난감 같은 집들이 모여 있는 도시가 보였다. 분명 커다란 도시인데도 츠카사 손 위에서는 개미들이 꼬물꼬물 모여 살 작은 마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츠카사는 도시를 짓밟지 않고 대신 그 옆의 숲을 차근차근 발바닥 길을 만들며 이동했고, 도시 끝에 있는 성에 도착하자 높은 담 안에 살짝 내려놔주었다.
“스오는 방에 못 들어가서 어떡해? 그렇게 커졌으니 손가락 하나도 들어가면 다행이겠어!”
“저는 옆에 있는 구덩이에 있으면 돼요. 호수가 있던 자리 말이에요.”
“있던? 물은 다 어디 갔어?”
“비가 계속 내리지 않아 엄청난 가뭄이 왔어요. 왕이 자리를 비우면 땅은 황폐해지기 마련이니까요. 반대로 백성들의 눈에선 눈물이 마르지 않고요.”
저 높이 있는 츠카사의 얼굴 그늘 속에서 유달리 반짝이는, 당장에라도 떨어질 것 같은 커다란 보라색 눈이 레오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구나. 못난 왕을 둬서 다들 고생이 많네.”
츠카사는 한참을 말이 없었다. 거대하지만 아직도 레오에게는 아이로 보이는 그가 말했다.
“정말요. 세상 천지에 이런 왕이 어디 있습니까.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성 안에 있는 시간보다 밖에 나가 있는 시간이 더 많고, 위엄은 툭하면 갖다 버리고, 신하에게 신분 위장을 해서 놀리는 건 또 무슨 경우이며, …이 …라진 …을 … 대신 …는 왕이 대체, 어디 있냐고요….”
츠카사의 목소리는 점점 잦아들었고 마지막에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레오는 어쩐지 츠카사의 머리를 토닥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레오에게 날개가 솟아나지 않는 이상 불가능했다.
“스오~, 계속 거기 있을 거야?”
레오는 크게 소리 내어 물었고 츠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그늘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여기가 제가 있을 곳이잖아요.”
“그럼, 잠시만―!”
레오는 허둥지둥 옆에 있는 탑으로 들어갔다. 조금의 저항과 함께 열리는 문 너머엔 얇게 깔린 먼지와 벽돌 따위가 지저분하게 널려있었지만 신경 쓸 여력은 없었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건물에 레오의 발자국 소리만 시끄럽다. 벽을 따라 길게 이어져 있는 나선형 계단을 레오는 오르고 올랐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을 때 레오는 간신히 탑 꼭대기에 도착할 수 있었다. 뻐끔히 열려있는 창문으로 얼굴을 내미니 츠카사의 옆구리쯤이 보이는 것 같았다. 발치에 있던 것보다 훨씬 낫다.
“스오, 나 보여~?”
기사는 충실히 왕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거대한 그가 조심스레 바닥에 앉자 그늘 없이 츠카사의 보라색 눈동자를 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오오, 위치가 딱 맞네! 이걸 위한 탑이었냐!”
“거긴 천문학자들이 이용하는 탑이에요. 별을 관찰하기 위한.”
“어쨌든 관찰을 위한 탑이라는 거잖아? 나는 스오를 제대로 보기 위한 용도로 쓰면 되지. 스오도 계속 고개 숙인 채로 개미 같은 날 보느라 힘들었잖아.”
“…계속 왕을 내려다보는 불충을 저지르고 있었군요. 부디 용서를….”
“어쩔 수 없잖아. 스오는 엄청 커졌고 그런 스오 위에 있으려면 구름 정도는 타줘야 하니까. 하지만 그런 재주는 부릴 수 없으니, 무력한 왕은 너그러이 용서하노라.”
장난으로 손을 뻗어 흔들면 츠카사가 작게 웃었다.
“넓으신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가슴에 손을 대고 고개를 숙이며 그도 장난스럽게 답했다. 아주 간만에 보는 웃음이었다. 레오는 그의 미소가 굉장히 그립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는 웃는 얼굴이 가장 잘 어울린다. 츠카사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화려한 조명도 츠카사의 웃는 얼굴을 따라올 순 없었다. 아주 낡은 기억을 헤매듯이 레오는 거대한 얼굴과, 눈과 콧구멍과 입과 마주하고 같이 웃었다.
“오늘은 거기서 주무실 겁니까?”
레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여기 있어야 스오가 심심하지 않지.”
“저는 딱히 상관없습니다만…. 저도 폐하가 옆에 있는 게 안심이 되네요.”
츠카사는 거대해져도 반듯한 자세는 변하지 않았다. 그의 머리 위로 구름이 넘실넘실 지나간다. 츠카사의 머리 위로 올라가면 구름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레오는 딱딱한 돌 창틀에 기댔다. 보라색 시선이 물끄러미 레오를 따라온다. 산울림 같은 목소리로 졸리세요? 같은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보라색 머리 위로 이번엔 토끼모양 솜털 구름 하나가 떠간다. 너무나 느긋한 광경에 졸음까지 올 지경이다. 세상의 무엇보다 큰 기사가 옆을 지키고 있다. 레오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고 잠들었다.
훙.
훙.
사나운 바람 소리 같은 게 어렴풋이 들렸다. 레오는 눈을 떴다. 새하얀 구름까지 선명하게 보이던 낮이 자취를 감추고 새까만 밤 아래 바람소리만 세찼다. 레오는 창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바람 소리의 원인은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츠카사가 앉은 채로 제 몸집처럼 커다란 활을 쏘고 있었다. 성문 하나 정도는 가볍게 부술 수 있을 것 같은 화살이 검은 하늘을 향해 흉흉한 기세로 빠르게 날아가고 금세 하늘에 먹혔다.
“스오, 뭐해?”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레오가 묻자 츠카사의 시선이 살짝 레오에게 닿았다가 다시 먼 곳으로 고정했다.
“달을 쏘고 있어요.”
“평화로운 달님은 왜?”
“너무 눈이 부셔서 잠을 잘 수가 없어요. 그리고 이 세상에 달은 당신 하나면 될 것 같아서.”
“뭐야, 그거. 내가 츠키나가(月永)여서야?”
츠카사는 고개를 끄덕였고 재차 활을 쏘기 시작했다. 저 멀리 걸려 있는 달은 화살을 피하는 것처럼 꿈질꿈질 이동한다. 달이 도망가면서 하늘이 점점 밝아진다. 달이 산 뒤로 숨어버리기 전에 츠카사는 기어코 달을 맞추고 말았다. 화살에 꿰뚫린 달은 생명이 다한 나비처럼 그대로 풀썩 곤두박질쳤고 달을 따라 꾸물꾸물 움직이던 밤도 완전히 접혔다. 낮으로 바뀐 하늘에 갓 나타난 태양이 이글거렸다. 츠카사는 다시 새로운 표적을 향해 활을 쏘기 시작했다.
“해님도 쏘려는 거야?”
“한 하늘에 해가 두 개 일수는 없지요. 태양은 제 주군만 있어도 충분하니까요. 거기다 이쪽 세상이 이렇게나 밝으니까 당신이 돌아오지 않는 거 아닙니까.”
레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츠카사 손을 타고 돌아와서 이렇게 얌전히 성 안에 있는데. 레오는 그 하는 양을 구경했다. 몇 번 쏘아진 츠카사의 화살은 이번에도 해를 맞추었다. 숨통이 끊긴 해도 달처럼 곧바로 산 아래로 떨어져버리고 세상에 어둠으로 가득 찼다. 별이 반짝이는 밤이 아닌 아무 것도 없는 거대한 어둠이었다.
츠카사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창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펼쳐진 푹신한 바닥으로 레오가 발을 내딛었다. 곧 레오는 츠카사의 코와 뺨을 만질 수 있었다.
“봐요, 이제 이곳에서 빛나는 건 당신뿐이에요. 여기엔 아무 것도 없죠. 태양도, 달도, 땅도, 사람도. 그저 검기만 할 뿐이에요. 아무 가치도 없는 세상. 당신을 제외하고요.”
츠카사가 조심스레 뺨을 비빈다. 따끈하게 데워진 찰떡이 온몸에 닿는 것 같다. 레오는 두 팔을 뻗어 보자기같이 넓은 뺨을 토닥여줬다. 문득 물이 쏟아진다. 뺨을 타고 데구르르 구르는 물방울이 레오를 적시고 턱 끝으로 떨어진다. 레오는 보라색 눈동자에서 망울망울 흘러넘치는 범람을 보았다.
“스오?”
“그러니, 이제 돌아와요. 제일 작았던 막내 기사가 성보다 커질 정도로 충분한 시간이에요. 이정도로 커지지 않으면 당신은 나를 돌아보지도 않잖아요. 그리고 드디어 나를 봐주셨죠. 왕보다 활도 못 쓰는 기사라고 놀려도 좋으니까,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도망쳐도 눈감아 줄 테니까, 늦게 주무셔도 잔소리 대신 따뜻한 우유를 준비할 테니까 제발 돌아와요….”
츠카사의 눈물이 계속 떨어진다. 거대한 눈물이 땅을 적시고, 메마른 호수를 채워간다. 바다처럼 짠 물을 품을 호수가 점점 커진다. 어느새 눈물은 츠카사의 가슴까지 차올랐다. 어둠 속에 츠카사와 레오와 눈물의 바다밖에 없다. 설탕이 녹는 것처럼 그 속에서 츠카사가 점점 허물어진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손이 녹아들면서 레오도 물속에 빠져 들어간다. 숨을 쉴 수 없어 갈 곳 잃은 호흡이 물거품이 되어 터져 나왔다. 아무도 살 수 없는 침묵의 물. 그 안에선 진한 슬픔의 맛이 났다.
*
기상은 언제나 힘들다. 잠에서 깨기도 전에 알았다. 몸이 엄청 무겁다고. 가슴까지 덮여있는 이불이 무거울 정도. 여름인데 누가 이렇게 이불을 목까지 덮어놨을까. 자면서 걷어차지 않은 게 용할 정도다.
레오는 끙끙거리며 눈을 떴고 물에 젖은 것처럼 일렁이는 시야 속에서 한 사람이 미역처럼 꿀렁댔다. 그것이 자리 머리색만큼이나 잔뜩 붉어진 얼굴을 한 츠카사라는 걸 레오는 한참 후에 깨달았다.
“…정신이 드셨습니까?”
대답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두터운 자물쇠라도 걸린 것처럼 나오는 목소리라곤 간신히 목을 긁으며 나오는 으… 어… 같은 해괴한 단말마였다. 목을 가다듬고 싶어도 천근같이 무거운 몸은 그것하나 쉽지 않았다.
“목소리가 안 나오시나요? 당연합니다. 거기에 누운 지 얼마나 지났다고 생각하세요?”
보라색 눈동자가 격정적인 감정으로 일렁였다.
“자그마치 한 달입니다. 한 달! 세상 천지에 이런 왕이 어디 있습니까?! 독이 발라진 화살을 기사 대신 맞는 왕이 대체, 어디 있냐고요…!”
그 감정이 흘러넘쳐 눈물이 되어 쏟아진다. 아 또 울렸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막내 기사의 우는 모습이 어쩐지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달래줘야 할 것 같은데 무능한 왕은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기 힘들다. 대신 목에서 쇳소리 비슷한 소리가 낡은 솥을 긁는 것처럼 연신 나왔다. 그 모습을 보던 츠카사가 입술을 질끈 물더니 일어섰다. 여전히 펑펑 쏟아지는 눈물, 여느 때보다 반짝이는 보라색 눈동자. 일련의 것들이 아주 가까이 다가왔고 이내 감춰졌다. 대신 한 달 동안 제 기능을 아무 것도 못해 버석이는 메마른 입술에 축축한 무언가가 꾸욱 닿고, 조금 후에 떨어졌다.
“사람을 불러오겠습니다.”
여전히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훔칠 생각도 안하고 츠카사가 그대로 방 밖을 나가버렸다.
레오는 불경하게 쿵 닫히는 문을 멍하니 바라본다. 입술에 닿은 짠 맛이 선명하다. 온갖 감정이 한껏 녹아든 그 맛에 어쩐지 슬픔의 맛은 들어있지 않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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