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약 리퀘1 에이레오
* 에이레오
* 오메가버스
츠키나가 레오는 학생회실을 막 박차고 들어온 참이었다. 홍차라도 마셨는지 은은하게 감도는 달짝지근한 향에 레오가 인상을 쓰는 찰나 가장 가까운 의자에 앉아 있던 토리가 벌떡 일어섰다.
“이 무례한 놈! 노크도 없이 들어오다니 아무리 원숭이들이라고 해도 그렇지 최소한의 매너도 몰라?”
“말로 했는데.”
“‘손님 받아라!’가 무슨 노크라는 거야?!”
“이 시끄러운 분홍 병아리는 학생회 새 멤버? 그보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은데.”
레오는 씩씩 대는 토리 너머를 손을 뻗어 가리켰다.
“너네 회장 쓰러졌어.”
“-회장님?!”
레오는 다시금 들어왔을 때 학생회 실의 풍경을 기억했다. 달큰한 방에서 가장 크고 안쪽에 위치한 곳에서 에이치는 평소의 등을 편 올곧은 자세 대신 무너진 석탑 마냥 책상 위에 쓰러져 있었다. 토리가 화들짝 놀라 에이치에게 달려가고 레오도 어슬렁어슬렁 그 뒤를 따라갔다.
“불러서 왔더니 이건 무슨 퍼포먼스?”
“퍼포먼스 일리가 있냐! 빨리 회장님을 부축하라구, 노예!”
레오에게 왈칵 화를 내면서도 토리는 안절부절 못하며 에이치를 흔들고 “회장님 정신 차리세요”가 섞인 울음소리를 왕왕 내고 있었다. 하필 있는 게 이런 꼬맹이 도련님뿐이라니 인복도 없는 놈. 레오는 이죽이며 쓰러진 에이치의 교복 주머니를 뒤졌다. 날렵하게 빠진 핸드폰을 꺼내고 지문 인식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자 잠금은 곧바로 풀렸다. 눈을 둥그렇게 뜨는 토리 옆에서 레오는 번호를 찾고 전화를 걸었다.
“네에- 츠키나가 레오입니다. 댁네 도련님이 쓰러져서요. 네, 네. 그럼 지금 교문으로.”
간단하게 대꾸한 레오는 전화를 끊고 다시 주머니에 핸드폰을 쑤셔 넣었다. 책상에 늘어져 있는 에이치를 어떻게든 부축하려 한참을 씨근대던 레오는 그 때까지 멍하니 보고 있는 토리에게 말했다.
“회장님 저세상 가는 거 보기 싫으면 좀 도와주지 그래?”
아 진짜 싫다. 레오는 그렇게 투덜거리고 싶었지만 지금은 자신의 등 위에서 중력의 실재를 온 몸으로 증명하는 무게에 집중해야 했다. 자신보다 10센티 정도 큰 남자를 업고 가는 것이 신기했는지, 아니면 그 텐쇼인 에이치를 업고 가는 모습에 경악했는지 유메노사키 학원생의 시선들이 다트처럼 꽂히고 있다. 황제랑 얽혀서 좋은 일이 일어난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이번에도 역시나 그랬다. 어찌됐든 레오는 빠르지 않지만 꾸준한 걸음으로 전진할 수 있었다. 그래도 다리는 끌리지 않아. 공중에 안정적인 높이로 떠 있는 에이치의 다리를 흘끔 쳐다보며 레오는 자신의 키에 다시 자부심을 가졌다. 학생회 분홍 꼬마가 유즈루인가 유자인가 뭐를 불러온다고 나갔지만 이런 거북이걸음에도 올 소식은 없어 보였다. 아이돌이어서 그런지, 원래가 부실해서 그런지 멀대 같이 큰 키에 비해 무게는 제법 가벼워서 죽을 것처럼 힘들진 않았다.
다만 걸음 한 걸음마다 영감이 치솟아 오를 것처럼 꿈틀댔다. 세기의 음악이 태어날 것 같아. 그 때는 황제고 뭐고! 레오는 두근거리며 우주의 교신을 기다렸지만 움찔거리는 영감은 발자국과 귓가에 흔들리는 옅은 금발에 섞여 사라지고 만다. 역시 텐쇼인 에이치는 츠키나가 레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고난의 계단을 내려가고 1층의 복도를 비틀비틀 걷고 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귓전을 두들겼다. 돌아보지도 않아도 알았다. 이 학원에서 레오를 리더라고 부르는 사람은 한 명 밖에 없다.
“이게 무슨 일... 이 사람은 학생회장님인가요?”
“응응. 벌거벗은 임금님 위에 유랑하는 황제 폐하라니, 이거 굉장하지 않아?”
“확실히 situation은 굉장합니다만...”
옆으로 다가온 츠카사가 둘의 모습을 살피며 따라 걸었다.
“제가 업을까요? Leader 굉장히 힘들어 보여요.”
“아서라, 아서. 이거 생각보다 무겁다고! 스오가 업으면 곧바로 넘어질걸? 어때, 하늘을 받치는 아틀라스 같아 보여?”
“그것보단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Jesus 같지만요...”
“헤에~ 그것도 멋지네! 망상할 수 있을 것 같아!”
신명나게 말을 하다가 스테미너가 배로 떨어진 레오는 반강제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Leader, 역시 제가... 옆에서 종종 걸음으로 쫓아오는 걸 레오는 고개만 저어 거절했다. 어차피 정문까지만 가면 텐쇼인 가문의 사람들이 도착할 것이고 그들에 넘기면 끝이다.
어정쩡하게 따라오고 있던 츠카사가 말했다.
“Leader는 의외로 회장님과 close한 사이군요 옛 이야기만 들으면 말도 섞지 않을 사이 같았는데 Leader가 이렇게 남을 위해 움직이는 것도 처음 봐요.”
어쩐지 감탄한 것 같은 그 모습을 보던 레오는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웅얼거리는 것처럼 작은 소리로 레오는 말했다.
“그거야 뭐, 찐한 육체관계가 오간 사이니까.”
“네?”
“아-니 그야 뭐 그냥 옛정 같은 거? 지겹게 얼굴을 마주봤어야 했으니까 모른 척 할 수 없었던 것 뿐.”
“그렇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츠카사 옆에서 레오는 에이치가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기분 나쁜 예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레오의 착각일 뿐인지 옆에서 늘어진 팔은 무기질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오후의 느지막한 햇살이 특히 쏟아지는 중앙 입구가 보이자 레오는 발을 멈췄다.
“스오는 이제 돌아가.”
“예? 교문까지 가시는 거지요? 끝까지 함께 하겠습니다.”
“텐쇼인 가문 쪽이랑 괜히 얼굴 마주할 필요 없잖아? 나는 얼른 이 짐덩이 던져두고 갈게. 곧 나이츠 활동 시작할 시간이기도 하고.”
“그 Knights에 Leader가 빠져있으면 곤란하잖아요. 곡은 오늘 받기는 했지만...”
“그래그래, 내 천재적인 신곡에 어울리는 퍼포먼스 연습들 하고 있으라고! 간다!”
츠카사의 대답을 기다리기도 전에 레오는 아까보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뒤에서 “연습에 꼭 오셔야 합니다!” 라는 말에 건성으로 한 손을 흔들고는 한쪽으로 무너지는 몸을 제대로 잡았다. 얼른 이 짐덩이를 던져버리면 인스피레이션이 다시 솟구칠 거야! 얼마 남지 않은 거리를 씩씩하게 걸어갈 때 문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몇 들어서는 게 보였다. 그들은 에이치를 업은 레오를 보자마자 똑바로 다가왔다.
“오랜만입니다, 츠키나가 님.”
“....”
다른 남자가 에이치를 등에서 조심스레 받아들었고, 레오는 그새 결리는 어깨를 돌리며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대로 패스했으니까, 나는 이만-”
“잠시.”
레오는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만 더 도련님과 함께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흐음, 그 황제 폐하가 눈을 떴을 때 내가 있는 걸 알면 별로 좋아하진 않을 것 같은데?”
“도련님의 부탁이십니다.”
그렇게 말한 남자가 몸을 옆으로 비켜섰다. 다른 사람에게 안겨 있는 에이치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고 있었다. 자신의 유닛에 있는 누군가의 말투가 레오 속에서 저도 모르게 샘솟는다. 아, 짜증나. 역시 텐쇼인 에이치와 엮이면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빠르게 이동하는 것에 비해 별다른 진동이 느껴지지 않는 리무진은 부잣집 도련님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옆으로 길게 늘린 모양의 차체만큼 옆으로 늘어선 좌석에 에이치는 누워있었고 레오는 반대편에 앉아 푹신한 시트에 몸을 깊게 묻고 있었다. 수첩을 꺼내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악상을 적긴 하지만 우주의 목소리가 닿아있진 않았다. 그저 곁가지 같은 음정과 음표를 끼적이며 레오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수많은 모차르트가 내려다보는 불쾌한 감각 속에서 레오는 문득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푸른 눈동자를 눈치 챘다. 눈이 마주치자 살풋 미소가 지어진다. 레오는 심술이 비죽 나오는 걸 느꼈고 그대로 입으로 뱉어냈다.
“황제 폐하가 자주 쓰러지셔서야 그 신민들은 어떡하겠어? 학원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강해서 자꾸 쓰러지나?”
“그 신민 중 하나인 츠키나가 군이 하는 걱정이니 고맙게 받을게.”
“걱정 아닌데. 그보다 언제부터 깨어 있었어?”
“무슨 말이야?”
“시치미 떼지 마. 학원에서 언제부터 깨어있었냐고.”
“임금님이 그의 충직한 기사와 이야기 할 때부터. 벌거벗은 임금님의 목소리는 무척 듣기 좋아서 덕분에 기분 좋게 일어날 수 있었지.”
아, 역시. 레오는 아까부터 의미 없이 볼펜의 자국이 이어지던 수첩을 덮고는 에이치를 노려보았다.
“너 무겁거든? 눈 떴으면 발딱 일어나 주지 않을래?”
“아쉽게도 의식이랑 몸을 움직이는 건 별개의 일이야. 지금도 이렇게 꼼짝을 못하잖아?”
“...그래 보이긴 하네. 왜 쓰러진 거야? 혹시 어제 라이브라던가? 여전히 약하다 못해 가녀린 황제 폐하신걸~?”
“그렇지. 열성은 힘들어. 그래서 네가 정말 부러워. 안 그래? 우성인 츠키나가 군.”
“하.”
비웃음과 닮은 소리가 레오 입에서 뛰쳐나왔다. 그 대상은 에이치가 아닌 레오 자신에게 향해 있었다. 그리고 에이치도 역시 알고 있을 것이다.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면서도 황제의 여유는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 당장 두 손으로 목을 졸라도 꼼짝 못할 주제에.
그 생각을 실행하는 대신 레오는 빈정거렸다.
“그래그래, 많이 부러워하라고. 열성 인자는 평생 모를 감각일 테니까.”
에이치는 아까와 다름없는 평온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도발은 공기 속에 녹아 흩어진다. 레오는 구태여 말을 덧붙이지 않았고 덕분에 차 안은 임시 휴전의 평화가 머물렀다.
레오는 흘끗 에이치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이번엔 눈이 마주치지 않아 레오는 빈말로도 좋다고도 할 수 없는 호흡소리가 나가고 사라지는 걸 지켜본다. 열성이란 판결 아래 저 몸 안에선 허술하게 구성된 세포가 지금도 간신히 그 연결을 유지하고 있을 것이다. 조금만 무리해도 이리저리 흔들리는 몸이라니 열악하기 짝이 없다. 그나마 얼굴이라도 잘나서 다행이다. 저게 없었으면 아이돌도 못해먹겠고, 레오와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고. 생각해 보니 그편이 훨씬 더 좋았을 텐데.
“그래도 츠키나가 군이 이렇게 옆에 있어줘서 다행이야.”
언제 눈을 떴는지 에이치가 말했다. 레오는 수첩을 팔랑거리며 대답했다.
“언제부터 그렇게 외로움을 탔다고? 손가락만 까딱해도 달려올 사람이 넘치는 도련님의 고독이란 거? 이건 꽤 괜찮은 망상일지도!”
“투덜투덜 거리면서도 너는 내 옆에 있지.”
“정말 자기 좋은 것만 듣는 황제네. 네가 말할 때마다 멜로디가 죽어가니까 조용히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래, 사랑스러운 숙적 츠키나가 군. 이것만 말해줘. 너는 너의 세계가 죽어가면서도 왜 나와 함께 있는 거지?”
시선이 다시 마주쳤다. 속모를 푸른 눈동자를 뚫어지게 보던 레오는 활짝 웃었다.
“어떤 오페라를 기대한 거야? 안타깝게도 여기엔 희극도 비극도 낭만도 없어! 너와 나 사이엔 한 곡조차 완성하지 못했고, 쓰다 만 희곡은 일말의 가치도 없지. 굳이 남은 걸 찾자면 지저분한 조각이 있네.”
팔을 과장되게 뻗어 에이치를 가리키고는 말했다.
“단순한 동정과 몸정이라는 이름의 조각. 어때, 삼류 드라마에서도 안 쓸 소재지?”
흰 벽에 기대어 레오는 다섯 손가락을 쭉 피고 다른 손과 그것을 마주 댔다. 데칼코마니처럼 이어진 손을 움지럭움지럭 거리며 이것저것 모양을 만들어 낸다. 손끝끼리 이어져 인도 신전 지붕 모양을 만들었다가 바싹 붙은 다섯 개의 기둥이 되었다가. 한참을 그걸 노려보고 있던 레오는 손을 뗐다. 무료함 속에서도 영감은 내려온다. 레오는 언제든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눈을 감자 시각이 잠드는 대신 온갖 음악이 앞을 다투어 몰려오기 시작했다. 커다랗게 뚜벅이는 구두 소리가 만들어 내는 독단적인 선율에 끼익 거리는 쇠의 마찰음이 난입하고 성대를 비집어 올라온 웅성임들이 제각각의 하모니를 이룬다. 병원은 진정되지 않는 기묘한 흥분감에 잠겨 있었다. 레오는 기시감을 느꼈다. 신경을 타고 뇌가 자신의 기억을 헤집기 시작했다. 청각도 잠이 든다.
그건 첫 저지먼트 때였다.
승자와 패배자가 나뉘는 순간 무대는 고양감으로 폭발할 듯 일렁였다. 나이츠였던 그들은 혁명을 완성하지 못하고 숙청이란 이름 아래 기사의 검을 빼앗겼고, 레오의 동료는 그의 뒤에 서 있었다. 세나, 릿츠. 이 저지먼트를 돕거나, 혹은 지켜본 자들이 레오에게 몇 마디를 던졌지만 레오는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나의 나이츠! 그들은 더욱 단단하게 굳어지고 칼끝은 날카로워진다. 명예로운 기사는 더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간다. 레오는 고열 같은 흥분 속에서 끝없이 내려오던 인스피레이션을 기억한다. 무대에 막이 내리고 모두가 돌아간 유메노사키 학원, 그 속의 나이츠의 성에서 레오는 우주가 시끄럽게 속삭이는 소리를 적어내리기 바빴다. 그 위대한 작업은 손에서 볼펜이 미끄러질 때까지 계속됐었다. 레오는 바닥으로 떨어져버린 펜을 주우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언제부턴가 덜덜 떨리고 있는 손가락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펜을 향해 숙였던 몸은 그대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무대에서 한껏 들이마셨던 열기가 빠져나가지 않고 몸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 뜨거움에 억지로 숨을 내쉬면서도 레오는 지금의 음악을 기억하려고 애썼다. 아아, 음악이 사라져간다. 분위기 파악 못하는 멍청한 몸 때문에 세기의 음악이 사라져 간다고! 차가운 바닥이지만 그 온도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죽어가는 벌레처럼 버르작거리며 바닥을 긁었다. 손으로 적지 못하면 입으로라도 뱉어주마. 억지로 입을 벌려 성대를 울려 끄집어낸 목소리가 엉망진창으로 음표를 불러댔다. 끊어질 것 같은 목소리는 이어지다가 이어지다가 결국 마지막을 고하고 추락했다. 감당 못할 열기 속에서 레오는 귓가에서 자신의 숨소리라고 생각할 수 없는 밭은 숨을 들었다. 그래도 행복했다. 저지먼트는 승리하고 세기의 음악은 레오를 감싸고 있다. 이대로 죽어도 좋다고 생각할 때였다.
“다친 새가 구조 신호를 보내는 줄 알고 손을 내밀어 주려고 왔는데.”
열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승리한 왕의 옥좌가 있는 곳이라니, 참 흥미로운 일이지.”
몸속의 열이 한층 더 치솟는 걸 느꼈다. 레오는 억지로 몸에 힘을 줬다. 두 팔로 바닥을 디디자 상체만 간신히 일으킬 수 있었다. 유일하게 움직이는 기관이 심장인 것처럼 동맥이 귓가에서 두근박질 쳤다. 어질어질한 시야를 잡으려고 레오는 눈을 찡그렸다.
“왕이 쓰러지면 모든 것이 끝나는 전장에서, 가장 앞장서서 싸운 너의 모습은 아주 인상 깊었어. 뒤에 따르는 기사들의 신뢰도, 자신의 동료였던 자들을 숙청하는 용서 없는 모습도. 그런 혈기왕성한 왕이 오메가라니. 정말 재밌어, 츠키나가 군.”
“누구야, 너.”
레오는 말하면서도 그 의문은 불필요하다고 느꼈다. 서늘한 손이 두 뺨을 감쌌다. 볼에 와닿는 감각에 레오는 당장 그 두 팔을 붙잡고 싶었다.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시야가 백금발을 얼핏 잡았다가 푸른색을 잡았다가 휘청였다. 그 와중에 상냥한 목소리가 깃털처럼 내려왔다.
“텐쇼인 에이치. 너는 츠키나가 레오 맞지?”
대답할 여력은 없었다. 레오는 본능에 따라 눈앞의 사람의 멱살을 잡고 끌어당겼다. 이제 한계였다.
레오는 눈을 떴다. 바로 앞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기 때문이었다. 흰 가운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 문을 열고 나왔다. 텐쇼인 에이치의 검진이 끝났다. 레오는 문득 자신의 꼴이 한심해졌다. 애 보는 엄마도 아니고 병원까지 쫄쫄 와서 앉아있는 꼬락서니라니. 닫힌 병실 문을 보면서 레오는 신경질 적으로 벽에 더 몸을 기댔다. 벽은 그의 체온으로 더 이상 차갑지 않았다.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이 부웅 울렸다. 레오는 아무 생각 없이 그걸 받았고 곧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것 같은 후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Leader! 아까 분명히 연습에 꼭 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스오?”
「예에! Knights의 스오 츠카사입니다! Leader 지금 어디신가요?!」
“병원~”
「네..? Hospital 말입니까? 어디 아프신 건...」
“별 거 아냐~ 덩치 큰 애를 봐야 해서. 나의 기사들은 왕의 감시가 없어도 열심히 할 거라고 믿고 있어!”
「제일 큰 문제는 Leader 같습니다만...」
나이츠의 막내의 한숨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그래도 몸조심하세요. 세나 선배님도 약 챙겼냐고 물어보셨고.」
약? 잠깐 갸웃하던 레오는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걱정 마, 걱정 마. 제대로 챙겼으니까!”
잔소리를 몇 마디 더 보태지만 상대의 기세는 아까보다 훨씬 잦아들어 있었다. 독하지 못하다니까. 결국 마지막은 걱정으로 끝나는 전화를 끊으며 레오는 히죽 웃었다.
세나가 약 이야기를 꺼낸 건 슬슬 주기가 돌아올 때가 됐단 거였다. 얼핏 든 기시감의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약이 어디 있더라. 레오는 예의상 약의 마지막 행방을 떠올렸다. 나이츠 성에다 던져뒀는데. 아니다, 그 후에 세나가 약을 발견하고 화를 내면서 억지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거추장스러웠는데. 집에 있을까? 모른다. 몇 년 전에 받은 약은 절반도 먹지 않고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약―억제제를 먹은 건 딱 한 번뿐이었다. 끔찍했다. 육체와 정신이 맞지 않는 듯 붕 뜨는 느낌하며, 감각이 둔해져 걷는데도 둥실둥실 떠다니는 기분,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나른함이 전신을 지배했다. 세상에 가득한 망상을 다 밀어내는 그 상태를 레오는 다신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약을 먹지 않으면 세계는 레오에게 더 많은 음악을 들려줬다. 예민해진 귀는 그 모든 것들을 남김없이 받아들였고 바흐에게로 한 걸음을 더 재촉한다. 주위의 모든 것이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다가와 레오는 더 많은 자극을 원하며 그들에게 몸을 던졌다. 망상이 가득한 세계는 너무나 행복했다.
‘그건 망상이 아니야. 네 몸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것들이지.’
그런 때에 언제나 같이 있던 에이치가 초를 치는 소리를 했지만 레오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심중을 헤아린 적은 거의 없었다. 물가에 드리워진 버들처럼 한들거리면서 시종일관 짓고 있는 미소 속에 무엇을 품고 있는지 알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레오에게 별로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다.
레오도 그랬지만 에이치도 그랬다. 텐쇼인 에이치가 주축이 된 학생회가 만들어 낸 암흑기는 나이츠를 빗겨가지 않았다. 몸을 섞는 달큰한 관계의 뒷면은 한 쪽이 망가질 때까지 이어진 끝없는 싸움이었다. 서로가 자기 좋을 대로 하고 있었고 그 사이에 태어날 군상극은 없었다.
다시 문이 열렸다.
“돌아간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기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레오가 자리를 뜨려고 했다면 복도에 대기하고 있던 텐쇼인 가의 사람들이 제지했을 것이다. 레오는 삐뚜름하게 위를 올려다보았다. 환자복을 입고 있는 에이치의 곁에 기사처럼 링거대가 서있었다.
“병약하신 황제 폐하가 친히 마중 나와 주신 건가?”
“초대한 손님을 맞이하는 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그으래? 그래서 왜 불렀는데.”
“흐음, 처음엔 츠키나가 군이 돌아와 준 기념으로 저녁을 제안할까 했는데 말이야.”
“여기에서야 대접할 건 환자식뿐일 것 같은데. 미슐랭 가이드가 극찬할 만찬이겠네.”
“임금님의 입맛에 맞을 식사는 좀 더 고민하게 해주겠어? 자, 그럼.”
레오 앞으로 흰 손이 정중하게 내밀어졌다. 살짝 숙인 허리와 조금 내려간 시선엔 호의적이라고 판단해도 아무 문제없을 미소가 걸려 있었다.
“들어가실까요?”
명백한 에스코트의 자세에 울컥했지만 텐쇼인 에이치가 한두 번 이러는 것도 아니었다. 에스코트는 자기가 받아야 하면서. 링거액을 곁눈질 하던 레오는 결국 손을 내밀어 에이치의 손을 잡았다. 서늘한 손에 레오의 열기가 전염된다. 아무런 관객도, 어떠한 감동도 없을 즉흥극이 시작되는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츠키나가 레오는 그 극을 다시 시작한다. 그리고 배우이자 관객인 그는 궁금해 한다. 이번에 그 극의 결말은 어떻게 날 것인가. 엉망진창인 무대에 두 명의 배우가 오름과 동시에 병실의 문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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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성 공약 리퀘로 클립님께 드린 에이레오입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나즈냥을 얻었습니다. 헉헉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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