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페/Q19a] 츠카레오 - 달이 머무는 자리 재록본
(오지는 표지는 풍님@pung_av이 그려주셨습니다ㅠㅠㅠㅠ 감사합니다!!!!)
사양
A5 / 200p / 날개 / 전연령 / 20,000원
* 동양AU
* 2016년 2월, 11월에 낸 [달이 머무는 자리] + [벚꽃이 물드는 시간] 합본에 12p 외전이 추가됐습니다.
* 기존의 책 두 권을 가지고 계신 분들은 행사장에서 교환하는 형태로 하여 만원에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통판 구간 인증: 기존 구간 폐기 사진을 보여주시면 됩니다. (자세한 것은 통판 폼을 확인해 주세요.)
* http://rooas.tistory.com/31 <<이 글과 설정이 이어집니다. 수위글이니 비번은 수위글 공지를 참고해 주세요.
* 책에 위 글은 들어가지 않으며 전연령 관람가입니다.
0.
알싸한 향냄새와 엇비슷하지만 매캐한 담배 냄새가 섞여 사방을 진동한다. 멀리서 어렴풋이 들리는 가족을 잃은 이들의 곡소리는 이곳에 모여 있는 남자들에게 그 어떠한 애도의 감정도 자아내지 못했다. 그들은 충혈된 눈으로 자기 앞에 놓인 패를 연신 확인하고 걸린 판돈을 확인하며 옆자리의 상대에게 견제의 눈초리를 보낼 뿐이다. 검은 떼가 잔뜩 낀 손톱으로 조심조심 패를 뒤집고서는 이내 누렁니를 드러내며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거나, 입술을 짓씹으며 패배를 맛보는, 희비가 교차하고, 그런 그들과 상관없이 판을 벌인 주인에겐 이익을 선사할 이곳은 노름판이었다.
여러 조각의 나무들과 일정의 작은 공간들만 있으면 가능한 이 놀이는 하루 일해 하루 먹을 것을 간신히 마련하는 척박한 현실에서 눈을 돌려 패 몇 개를 뒤집기만 해도 돈을 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허황된 꿈을 가지게 했다. 순식간에 나라 전역에 걸쳐 유행하게 되어 패가망신하는 이들이 속속 늘어나자 높으신 분들도 마냥 두고 볼 수 없었는지 엄한 금지령이 내려졌다. 어마어마한 벌금형에도 일확천금을 노리는 이들과, 그들의 한줌 돈을 노리는 조직패들은 관리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알음알음 도박판을 열고 있었다. 개중엔 경계가 상대적으로 누그러지는 상갓집에서 하는 경우도 있었다. 오늘의 장소도 그러했다. 오랫동안 병을 앓다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건너게 된 아비를 두고 슬피 우는 자식들의 울음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노름꾼들은 안락한 장소에 만족해하며 속세의 놀이에 집중했다.
문이 끼익 열리며 찌들은 담배 향이 좀 빠져나가는 것과 동시에 다른 남자가 들어왔다. 슬쩍 얼굴을 확인한 남자들 중 몇 명의 인상이 눈에 띄게 구겨졌다.
“낄 거냐?”
“물론. 안 그러면 이 냄새나고 더러운 곳에 왜 왔겠어?”
새로 들어온 남자의 목소리는 쾌활했다.
“너 이 새끼 또 허튼 수작 부리려고 이번에야말로 네 놈의 그 얕은 수를 잡아내겠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말이지.”
남자의 주황색 머리가 호롱불 옆에서 더 밝게 빛났다. 남자들은 투덜거리긴 했지만 자리를 비켜줬다. 그 사이에 주저앉은 남자가 헐렁한 소매에 넣어둔 담뱃대를 꺼내며 웃었다.
“그럼 오늘도 한 판 놀아보실까.”
담뱃대를 물고는 뻐끔이며 연기를 내보내는 틈에 드러난 송곳니가 남자를 개구쟁이로 보이게 했다. 나무패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상주들의 피 맺힌 목소리가 사그라든지 오래일 때, 검정 하늘이 쉰 새벽을 찬찬히 맞이하자 판은 슬슬 접는 분위기로 들어갔다. 남자들이 달아오른 얼굴로 욕지기를 뱉고 적당히 챙긴 남자들은 그들의 노름에 만족해하며 주섬주섬 자리를 떴다. 주황색 머리의 남자도 거나하게 하품을 하곤 오늘 밤 몇 번이고 털어버린 재를 마지막까지 재떨이에 털어버리며 훌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자식 부른 거 누구야?”
불만스러운 목소리에 남자는 장난스럽게 손을 까딱였다.
“빠지면 섭섭해 할 거 아니었어~?”
“그렇게 털어만 먹다가 콱 뒈지는 수가 있어. 조심해.”
“따뜻한 걱정에 감사! 내 몸은 알아서 챙기니까 아저씨는 마누라 바가지 조심하셔.”
“진짜 재수 없는 자식, 아오.”
남자는 불끈 쥔 주먹을 내보였지만 마음 가득 담긴 폭력은 행사하지 못했다. 그러지 못한 이유엔 남자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칼이 한 몫을 했지만 남자는 자신이 분노를 잘 참는 것에 다행이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오늘의 노름판을 쓸어 담다시피 한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한 귀로 흘려듣는 것이 명백해 보였다.
“대체 여긴 왜 오는 거야? 호위 무사가 그렇게 빈곤한 직장인가?”
“하물며 그 스오 가문을 섬기고 있는데. 그쪽은 뭐가 부족해서 저런 부랑자를 들이는 거야?”
“자네, 그거 모르나? 저 남자는 칼질 뿐 아니라 비역질에도 능하다고 하더라고.”
남자들 사이에서 저급한 웃음이 스쳤다.
“그 스오 가의 도련님이 남색에 취미가 있다는 소문이 돌던데. 칼잡이를 부른 건지, 남창을 부른 건지 우리 같이 낮은 것들이 어찌 높으신 분의 뜻을 알겠나?”
“그래? 하지만 스오 가라면 얼마 전에 화려하게 혼례를 치르지 않았나.”
“그러니까 저 남자가 이런 노름판에 굴러들어온 거지. 직장을 잃게 생겼으니.”
“헤에, 그러고 보니 그쪽 도련님이 지나치게 곱상하다는 소린 들었는데. 과연 그런 취미가 있었나?”
“높으신 분이 계집처럼 안기는 꼴을 못 봐서 아쉽군. 가만 보니 비역질이 능한 건 그쪽 얘기였던게로군?”
들으라는 듯 소리를 높이는 치들에게 눈길을 준 남자는 곧 입을 벌리고 즐거운 것처럼 크게 웃었다.
“이게 바로 패배자들이 내는 아우성이란 건가? 이런 소리를 들으니 오늘의 승리자가 누군지 명확해졌네! 승부에서 진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권리, 뚫린 입으로 마음껏 떠들기! 인간의 자기방어기재란 거겠지? 재밌어! 흥미로워…!!”
신나서 남자들 사이에 얼굴을 들이밀며 떠들다가 훌쩍 일어나며 말했다.
“그래도 입은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나는 그런 너희들을 좋아하지만 스오 가의 높으신 분들의 생각은 또 다를 수도 있어. 가문의 명예를 해하는 무뢰배를 없애라는 명을 내리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거든. 알잖아, 우리 같이 낮은 것들은 시키는 대로 해야 해. 그러니까 그런 말을 했단 거, 소문나지 않게 조심하고?”
허리춤에 찬 칼을 톡톡 치며 남자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입을 다문 남자들을 내버려두고 남자는 덜컥거리는 장지문을 열었다. 새벽의 찬 공기도 이제는 옅다. 해를 토해내기 위해 점점 밝아지는 하늘 아래서 남자는 소맷자락에 손을 넣으며 걸음을 옮겼다. 늘어지는 하품이 뒤를 따랐다.
어느 누가 짖었던가, 새벽은 조용하기만 했다.
1.
츠키나가 레오는 스오 가의 호위무사였다. 그 명망 높은 가문에서도 적장자인 스오 츠카사 전속 호위다. 칼을 좀 쓸 줄 알지만 그렇다고 그가 장안에 화제가 될 정도로 특출난 실력을 가진 건 아니었다. 그는 그저 마을에서 흔히 있는 낭인이었고, 우연히 적의 습격을 받은 츠카사를 구해줬을 뿐이다. 그 우연은 아주 큰 행운으로 돌아왔다. 칼을 차고 대로변을 하염없이 어슬렁거리며 내심 귀족 가문에 눈에 띄길 바라는, 그런 낭인들의 염원 자체가 이루어졌으니. 의탁 할 곳 하나 없는 방랑자 신세에서 평생 발치도 못 가볼 대가문의 문턱을 제 집처럼, 아니 말 그대로 제 집이 되어 드나들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엄청난 운수대통이다. 그렇게 자신의 인생을 평가하다가도 레오는 자신의 주인의 생각에 빠지곤 했다.
스오 츠카사는 재밌는 사람이다. 레오가 재밌다고 칭하는 사람을, 세간에서는 이상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지만 재밌는 건 재밌는 거였다.
하인에게 존대를 하는 것부터 그랬다. 꼬박꼬박 씨까지 붙였다. 이 집에서 유일하게 레오를 ‘츠키나가 씨’라 부르면서 언제나 해사한 미소를 짓곤 했다. 주변의 등쌀에 못 이겨 ‘제발 말 좀, 아니 말씀을 낮추어 주십시오’ 라고 간언한 적도 몇 번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은인에게 어찌 그럴 수 있냐며 단칼에 거절했다. ‘츠키나가 씨도 그러셨잖아요? 은인에게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물론 그건 츠카사의 신분을 몰랐을 때 한 말이었다. 기껏 구해 놓고 나니 오히려 적 취급을 한 어디 귀한 도련님이 얄미워 그쪽은 집에서 물에 빠진 놈 건져 놓으면 봇짐 내놓으라 가르치냐고 비꼬았을 뿐이다. 나중에 가서야 어느 안전에 입을 함부로 놀리냐며 큰 벌을 받아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높으신 분이란 걸 알았다. 그럼에도 무슨 오기일지, 천성이 비뚤어져서인지 레오는 츠카사를 만났을 때부터 하던, 그리고 본인이 너그럽게 계속 그렇게 해주십사 허락한 하대를 츠카사에게 마구 했다. 불경죄로 정말로 목이 떨어져도 레오는 상관없었지만 츠카사는 그런 무례에 개의치 않아했다.
스오 츠카사는 재밌는 사람이지만 그의 기준에서도 그는 이상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가 정상이라면 자기 같은 것이 좋다며 얼굴을 붉히고 가만히 손을 잡아오지 않을 것이다. 사랑한다고 속삭이며 입술을 겹쳐오는 그런 기행은 벌이지 않을 것이다.
노름판에서 남자들이 떠들어대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어쨌든 그가 자신의 주인과 붙어먹었던 건 사실이니까.
그런 철없는 도련님의 일탈 행위도 결국은 끝을 고했다.
레오는 그날 밤을 기억한다. 거대한 스오 가문의 저택은 주인처럼 단정한 분위기를 자아낸 집이었지만, 그날만은 여름 축제를 앞둔 소란함을 감추지 못했다. 하인들의 조신한 걸음걸이에는 흥분이 어려 있었고 거의 들리지 않는 호흡 속엔 부산함이 언뜻언뜻 내비쳤다. 그걸 눈치 챈 가문의 어르신들은 하인들에게도 술과 떡을 내려주었다. 아랫것들도 마음껏 기뻐해야 할 날이었다. 스오 가문의 적장자가 무사히 성인을 맞음과 동시에 긴히 혼담이 오간 집안에서 허혼서를 보내왔다. 겹경사였다.
레오 역시 그날 차려진 푸짐하게 한 상을 대접받았다. 실컷 먹어치우고 거나해진 기분으로 소화도 시킬 겸 레오는 밤거리에 나섰다. 그날은 스오 가 식솔 뿐 아니라 모두가 즐거워 보였다. 평소라면 시종(時鐘)도 울리지 않는 어두운 밤거리지만 오늘은 야시장이 열렸다. 저마다 등을 줄줄이 맨 노점들이 들어선 곳에 추운 겨울을 녹이고 다가온 따뜻한 봄밤을 거리의 사람들이 한껏 봄밤을 즐기고 있었다. 모든 세상이 스오 가를 축복하기 위해 작정한 것 같았다. 그 속에서 레오는 옆 사람의 웃음이 번진 것처럼 미소를 짓다가도 미아가 된 아이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충만한 기쁨의 물결에서 레오는 멀어지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휩쓸리고 싶었다. 마구 뒤엉키는 생각 속에 정신을 차리면 ‘형씨 칼을 차고 있네’ 하면서 얼결에 끌려간 무술 대회에 참가하고 있었다. 힘 좀 쓴다는 젊은이들이 관심 있는 아낙들에게 힘을 선보이려 나가는 그런 작은 대회였다. 술이 조금 들어가긴 했지만 검을 쥐는 것조차 어설픈 젊은이들에게 질 실력은 아니었다. 가볍게 우승하고선 이 정도면 호위 무사를 할 실력은 되지 않겠냐고 스스로를 재단하던 레오는 픽 웃고 말았다. 호위 임무가 아닌 다른 이유로 스오 가에 붙어있었다는 걸 스스로 인정해 버린 꼴이었다.
하룻밤 정도는 진탕 놀 수 있는 상금을 짤랑거리며 레오는 천으로 얼기설기 세워진 간이 극장으로 들어섰다. 짚으로 이은 낡은 돗자리에 옹기종기 앉아있는 사람들이 가장 밝게 빛나는 무대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레오는 기둥이 세워져 있는 구석 자리에 주저앉았다. 얼굴 한가득 하얗게 분을 칠한 배우가 커다란 목소리로 곡조를 뽑아내고 있었다. 절절한 손짓 끝에는 하얀 가면을 쓴 다른 배우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노래가 정점을 향해 달려가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머리칼을 가진 배우는 결국 눈앞의 남자의 손을 마주 잡는다. 상대의 구혼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 이후 노도처럼 몰아치는 가무극을 레오는 묵묵히 바라보았다.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거짓 감정이 관객들에게 사정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소매로 슬쩍 눈물을 훔치는 코울음이 곳곳을 울렸다. 신분의 차가 크지만 서로를 사랑하게 된 남녀는 파멸이 기다리는 종막을 향해 가고 있었다. 좋은 음식을 잘 삼켰을 속이 점점 거북해졌다.
레오는 자리를 뜨는 대신 끝까지 그 무대를 지켜보았다. 겁도 없이 높으신 아가씨에게 손을 내민 남자는 어떻게 되지? 모두의 비난과 함께 저잣거리에 매달리나? 비극적인 사랑을 슬퍼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나? 속세를 떠나 머리를 밀고 한껏 경건해진 얼굴로 여자의 행복을 빌어주나? 각본가가 쓴 대로 움직이는 남자를 보며 레오는 비스듬히 턱을 기댔다. 북소리가 고조되어 갔다.
예상대로 두 남녀는 행복해질 수 없었다. 남자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고 여자는 슬피 울며 그대로 절로 들어가 언제까지고 남자를 향한 기도를 올린다. 무대를 비추던 호롱불이 어슴푸레 어두워지자 간이 극장을 뒤흔드는 박수 소리가 열렬하게 울렸다. 열연한 배우들의 이름을 연호하는 함성에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별로 재미있는 내용은 아니네요.”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레오는 움찔하다가 이내 한숨을 쉬었다.
“언제부터 있었어?”
“남자가 그녀를 사랑한 것이 죄냐며 울부짖을 때요.”
꽤 오래전부터 있었잖아. 레오는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평소에 입던 질 좋은 기모노 대신 어디서 많이 본 허름한 옷을 뒤집어 쓴 도련님이 쭈그려 앉아 있었다. 레오는 얼굴을 찡그렸다.
“내 옷이잖아?”
“주인이 없어서 양해를 구할 수가 없었어요. 당신의 옷을 입어도 괜찮을까요? 이미 입었지만요.”
“제 것은 도련님 것이니까, 굳이 미천한 놈의 양해를 구할 필요는?”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요. 밤거리로 빨려들어가는 당신을 빨리 따라가야 해서 경황이 없었어요. 허락도 없이 입은 건 죄송합니다.”
“아니, 사과를 바란 게 아니고. 변장에 잠입이라니, 언제부터 닌자 놀이가 취미가 됐어? 그렇게 한가한 몸이셨나, 스오 가의 도련님은?”
“츠키나가 씨를 찾는 것보다 급한 일이 어딨어요.”
농을 쳐도 진지하게 대답하는 모습이 얄미워 손으로 볼을 당기자 아야야 하는 소리가 나왔다. 손을 떼니 울상이었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오늘 야시장이 열리는 지도 몰랐네요. 구경 가요. 성인이 되고 난 후 첫 번째 밤이잖아요? 츠키나가 씨와 함께 있고 싶어요.”
보라색 눈동자가 아이처럼 반짝였다. 아직 젖살이 덜 빠졌는지 원체 동그란지 모를 얼굴엔 앳된 모습이 여전히 애틋하게 남아있다.
“이런 어린 애가 성인이라니, 말도 안 돼.”
“츠키나가 씨가 할 말입니까? 나이 차도 얼마 나지 않으면서.”
투덜대던 츠카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요, 밤은 짧아요.”
어스름한 극장 안에서 레오를 향해 곱게 휘어지는 눈이 무척이나 예뻤다. 내민 손도 상처 하나 없이 매끄럽고 곱다. 츠키나가 레오가 사랑해 마지않는 스오 츠카사의 모든 것.
“모처럼 자유시간이나 했더니, 도련님의 서민 생활 체험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과장되게 말하며 레오는 그 손을 잡았다.
“가극은 봤으니 이제 뭐 할까. 금붕어 잡기도 있던데, 그거부터?”
“좋아요. 이번에는 기필코 성공하고 말 겁니다.”
따뜻한 체온이 한 손에 온전히 담겨왔다. 밤에 잔뜩 몰려든 사람들 틈에서, 그 소란 속에서 레오와 츠카사는 주인과 하인 사이라기엔 너무나 친밀한 대화들을 주고받았다. 그 많은 말들 중에서 혼인에 관한 말은 한 마디도 없단 걸 깨달았지만 레오는 짐짓 모른 척 했다. 아니, 모른 척 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맞닥뜨린 현실에서 애써 눈을 돌리며 밝은 불빛으로 깊어지는 밤거리를 지금도 기억한다.
***
레오는 눈을 떴다. 닫힌 창문으로도 어스름한 빛이 그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새벽이 슬슬 물러나고 있는 듯 했다. 머리를 긁적이다가 레오는 훌쩍 몸을 일으켰다. 이 계절엔 맨살에 와 닿는 공기가 하나도 차갑지 않다. 여름이란 것은 좋다. 옷으로 꽁꽁 싸맬 필요도 없고, 추위로 손이 곱트는 일도 없으며, 칼도 공기를 가르며 시원스레 제 소리를 낸다. 조금만 지나면 이 계절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매미가 짝을 찾아 긴 울음소리를 낼 것이다.
주위에 어질러진 옷가지들을 하나씩 주워 모아 입고선 다시 이부자리를 돌아보았다. 자기가 덮기엔 송구할 정도로 질 좋은 비단 이불 속엔 다른 사람이 아직 잠들어 있었다. 색색 들리는 숨소리에 레오는 절로 마음이 느슨해지는 걸 느꼈다. 어깨가 드러나지 않게 이불을 잘 덮어주다가 문득 그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보라색 눈동자를 숨긴 눈꺼풀의 끝이 빨갛다. 조금 부어있는 것도 같다. 그걸 묵묵히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술을 내렸다. 잠을 깨우지 않는 접촉은 시시할 정도로 가벼웠지만 가슴을 묵직하게 누르는 느낌으로 돌아왔다.
레오는 미련 없이 몸을 일으켰다. 문을 조심스레 닫고 기지개를 쭉 폈다. 대단한 하루의 시작이 될 터였다.
“이나바 님이라고 하셨지요.”
기다란 두루마리를 바삐 훑으며 남자는 그 이름을 찾는다. 곧 원하는 글자를 찾았는지 그곳에 붓으로 표시를 하고는 허리를 숙여 인사한다. 옆에 나란히 서 있던 레오도 건성이나마 고개를 숙였다. 가문의 문장을 보인 시종을 거느린 이나바는 느긋한 걸음걸이로 문을 들어섰다. 그 뒷모습들이 문 안으로 사라지자 레오가 툭 말했다.
“대단해 보이는 나리들이 줄줄이구만.”
“보이는 게 아니고 대단한 게지. 나라의 실세를 잡고 있는 분들이시니.”
비단 두루마리를 정갈하게 만 남자가 타박을 주었다. 레오는 포르르 날아다니는 새를 보다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역으로 이 가문이 얼마나 큰지 알려주는 거네.”
“두말하면 입 아픈 소리.”
스오 가의 하인은 자부심 넘치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남자 뒤로 보이는 하늘이 눈부시다.
정말 좋은 날이었다. 마가 끼지 않고 길한 날이다 어쩌다하며 신이 닳도록 돌아다니며 수소문한 날들이 헛되지 않을 정도로. 새파란 하늘에 그림처럼 두어 점의 구름이 걸려있고, 상쾌한 공기가 피부를 스친다. 여름 특유의 끈덕지던 습기는 지금만은 기세를 접고 한 걸음 물러서 있었다. 나무 그늘 아래서 낮잠 한 잔 걸치면 딱 좋겠다고 생각하며 레오는 하품을 집어삼켰다. 평소라면 슬그머니 꽁무니를 뺄지도 몰랐지만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킬 정도로, 오늘은 정말 중요한 날이었다. 스오 가의 하나 뿐인 후계자가 혼인을 하는 날이니.
“자네도 그렇게 차려 입고 있으니 꽤 그럴싸해 보이잖아. 낭인 시절 옷은 이제 버릴 때가 되지 않았어?”
소매에 팔을 넣고 기우뚱 서 있던 레오는 흘끗 자신의 옷차림을 살폈다. 단정하게 다려진 남색 상의엔 은실로 흘러가듯 나무와 그 위에 핀 꽃, 그리고 가지에 걸린 달을 그렸다. 상의처럼 역시나 빳빳하게 길이 든 새하얀 하의 자락은 그 결을 유지하며 발등을 살포시 덮고 있었다. 이나바의 등에 있던, 비단에 새겨진 꽃과 새, 산수 등이 화려하게 어우러진 옷과 비교하면 검소하기 짝이 없지만, 레오가 입고 다니던 남루하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옷차림에 비하면 퍽이나 훌륭한 옷이긴 했다.
“무슨 소리야. 이런 옷차림으로 칼질을 제대로 할 수 있겠어? 뭐 묻을까 겁난다구~”
“그야 다시 빨면 되지 않느냐. 이상한데서 야단이구나.”
“이런 건 마음의 문제거든? 칼질이 아니라 칼춤을 춰야 할 것 같아.”
“유난스럽긴. 화려한 것은 싫다하여 도련님이 특별히 맞춰준 옷인 것을.”
그게 아니면 입지도 않았지. 완고한 츠카사의 목소리는 지금도 바로 떠오른다. ‘츠키나가 씨가 입지 않는다면 그냥 버릴 거예요.’ 레오는 한숨과 함께 자세를 고쳐 잡으며 소매에 팔을 넣었다. 평소와 달리 피부에 부드럽게 닿는 천의 감촉에 더 나오려는 한숨을 먹는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이런 날이면 나도 옷 정도는 깨끗하게 입는다고.”
“도련님이 마음 써주신 게야.”
하인이 달래듯 말했다. 그를 향한 눈빛에 위로와 동정의 시선이 섞여 있는 걸 눈치 챈 레오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서 눈에 띄는 기모노를 입은 행렬이 스오 가문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너도 이런 날이 올 줄은 알고 있지 않았느냐. 생각 없이 행동하는 척 굴어도 사실은 영리한 녀석이라는 거 우리도 다 안다.”
“웬일로 치켜세우네.”
“실제로 그러하니까 말이야. 아랫것들은 어르신들의 기분을 빨리빨리 파악해야 하니까 자연스레 사람을 꿰뚫어 보게 되지. 너같이 새파란 젊은이가 가진 깊이 정도는 알 수 있다고. 도련님은 너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으신 게야.”
“……”
“나도 네가 스오 가에 오래오래 남아있으면 좋겠으니 말이다. 같이 계속해서 주인 나리를 모시자꾸나.”
레오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남자도 그에게 대답을 바라는 건 아닌 듯 했다. 갑작스레 침묵이 찾아온 동안 저 멀리 가마 행렬은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시선이 저절로 안쪽으로 향한다. 그 거대한 저택 깊숙한 안쪽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갈한 검은 예복을 차려입은 스오 츠카사가 있겠고, 그를 마주할 흰 옷을 곱게 차려입은 신부가 일생의 한 번 뿐인 혼례를 치르기 위해 치장하고 있을 것이다.
밝은 햇살 아래서 아지랑이처럼 소란함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음이 시끄럽다. 목구멍 안쪽에서 긁어 올라오는 감정을 다시 묵직하게 누르면서 동시에 입도 다물어진다. 평소라면 안마당에 내려앉은 새들처럼 조잘거릴 입이 마음을 토하지 못하게 무겁게 닫혀있다. 다만 바라기를, 얼굴에 티가 나지 않기를. 이 좋은 날에 아무 일 없이 완벽하게 치러지길 바라는 하인들의 굳은 의지로 보이길, 혹은 큰 행사로 긴장된 얼굴로 보이길. 그렇게 바라며 레오는 스오 가의 커다란 대문을 등지고 묵묵히 서 있었다.
이리 오시어요.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칠흑으로 칠해진 짙은 밤에 굉장히 잘 어울린다고 레오는 생각하며 그 말에 따랐다. 흘러내린 옷 사이로 보이는 어깨와 그를 따라 이어지는 팔, 그리고 가볍게 올라간 손가락 끝까지 유려한 곡선을 그리고 있다. 화가가 붓 끝을 신중하게 놀려 그려낸 한폭의 그림 같았다. 레오의 눈빛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모를 여자가 살풋 눈웃음을 쳤다. 붉게 바른 눈꼬리가 어여쁘다.
“높으신 분이신가요?”
그림이 살아 움직여 말을 한다. 아니, 눈앞에 있는 것은 사람이다. 레오는 고개를 저었다. 방울이 울리는 것 같은 웃음소리가 짧게 울렸다.
“거짓말. 이렇게 좋은 옷을 입고 계시면서.”
“잘못 짚었어. 주인의 씀씀이가 좋은 거지, 내가 대단한 사람은 아니거든.”
개의치 않다는 듯 여자의 손이 천천히 등을 어루만졌다. 기다란 손가락이 부드러운 비단을 눌렀다.
“그래도 이 밤을 같이 보내줄 고귀한 분이시겠죠.”
등에서 어깨로 그리고 얼굴로 다가온 손가락은 따뜻한 온기가 있었다. 그림 따위가 아니었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기분 좋다. 스오, 여자란 이렇게 좋은 거였어. 딱딱하기만 한 마른 몸만 맛봤을 그에게 변명이라도 하듯 레오는 계속 말하고 있었다. 억지로 넓힐 필요 없이, 사내를 받아들이기 위해 젖어드는 몸과 기분 좋은 향기와 아름다운 목소리. 내가 너에게 빼앗은 것이었고 이제 돌려줄 때가 왔어. 레오가 떠올리는 스오 츠카사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않은 채 묵묵히 레오 발치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레오는 시선을 피하듯 여자의 몸 위로 올라탔다. 옷섶이 벌려지며 드러난 봉긋하게 솟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 마쉬었다. 장난스러운 웃음이 몸을 타고 올랐다.
그러다 문득 튀어나오지도 않은 그런 평평한 가슴을 떠올렸다. 잔뜩 붉어진 얼굴과 함께 달달하게 흐르던 말들도 같이 생각나면서 가슴이 뜨거워졌다. 스오, 스오, 스오.
그 넓은 스오 저택에서 가장 좋게 준비된 방에서 곱게 자란 아가씨와 침상을 같이 하고 있을 스오 츠카사를, 변두리 유곽의 외딴 방에 있는 츠키나가 레오는 소리 없이 불렀다. 수많은 걸음으로도 메우지 못할 사이에서 츠카사를 겹치며 여자를 보았다. 어둑한 방에 초가 일렁이며 어느 도련님의 상냥한 눈처럼 보이게 했다. 레오는 그 눈으로 고개를 내렸다.
***
언제 하루가 끝났는지, 어떻게 흘러갔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해가 뜨기 전부터 음식 준비와 혼례 준비로 정신없는 하인들 틈에서 얼기설기 찬을 들고, 츠카사가 준비해둔 옷을 입고 칼을 찰 때까지만 해도 나름 정신은 붙잡고 있었던 것 같았는데. 어느새 오늘은 어제로 넘어가고 내일이 오늘로 다가왔다.
시간이 더럽게 느리게 갈 줄 알았는데. 새벽의 푸른빛이 한가득 쏟아지는 돌길을 걸으며 레오는 얼얼한 뺨을 문질렀다. 왜 가느다란 버드나무 가지를 회초리로 쓰는지 알 수 있었다. 희고 가느다란 손바닥에 힘차게 얻어맞은 뺨은 안 봐도 붉은 손자국을 선명히 남기며 부어올랐을 것이다.
‘미안한 짓은 했지만.’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레오를 노려보던 여자는 방을 나갔고, 홀로 남은 레오는 뒤늦게 옷가지를 주워들었었다. 그 방에서 그대로 자도 됐었지만 남아있는 공기가 묘하게 불쾌했다. 더 녹진하고 땀범벅인 상태에서도 잘도 잠들었던 걸 생각하면 확실히 지금이 묘하게 곤두선 것도 같았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 길거리의 공기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갑자기 나타나 사람을 해치고 도망간다는 살인귀의 소문 때문에 다들 밤마실을 꺼려해서 레오 홀로 새벽의 서늘함을 맘껏 맛보고 있었다. 온갖 생각을 배회하는 머리 대신 발은 익숙하게 그의 주인을 스오 가로 이끌었다. 걸음을 서두른 것도 아닌데 어느새 거대한 대문 앞에 있었다.
여자 앞에서 제대로 구실을 못하여 돌아오다니 이 얼마나 한심한 꼴인가. 레오는 제 모습에 커다랗게 배를 잡고 웃고 싶어졌다. 어떤 희극보다도 우스운 장면일 것이다. 그 호위 무사는 이제 사람 구실도 제대로 못하는 게지! 짐짓 높은 소리에 관객이 웃음을 터뜨린다. 그래서 그 계집질도 못하는 무사의 말로는? 커다란 대문을 지나 널따란 벽을 지나고 하인이 드나드는 조그만 문으로 향하며 레오는 생각한다. 그 한심한 무사란 작자의 끝을 빨리 알려달라고!
끼익 거리는 낡은 문을 고개 숙여 지나가자 달빛이 환하게 쏟아지는 뒤뜰이 보였다. 레오는 멈춰 섰다. 모두가 잠들어 있어야 할 밤에, 눈을 감고 있어야 할 사람이 밤하늘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무문 소리에 천천히 돌아본 시선과 마주쳤다.
“…….”
“…….”
말문을 잃은 레오에게 다행히도 상대는 말이 없었다. 급게 틀어올린 머리칼에 장식될 것 같은 고운 색의 눈동자가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결국 먼저 말을 꺼낸 건 레오였다.
“안자고 뭐해?”
“츠키나가 씨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렇게 바로 대답한 츠카사는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처소에 갔는데, 안계시기에. 밤마실을 나가셨다면 밤이 개기 전에 돌아오지 않으실까 싶어서.”
레오는 바로 반발하는 자신을 느꼈다. 나를 기다렸다고 너는 말하지만 아까까지 너는 오늘부터 너의 반쪽이 된 사람을 안고 있었겠지, 나와 달리 제대로.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목구멍 바깥까지 튀어나오진 않았다. 생각만으로도 한심했다. 아니, 아니, 결국 귀결은 죄책감이었다. 이 집에서 새벽부터 시달린 건 다름 아닌 너일 텐데. 피곤했으며 잠에도 못 들고 밤을 헤매게 하고 말았구나. 아랫것의 천박한 행동거지에도 아무 탓도 하지 않고 돌아왔으니 안도했다는 표정이나 짓고서. 그러면서 섣불리 다가오지 못하고 초조하게 레오를 보고 있다.
레오는 지금이야말로 웃지 않으려고 배에 힘을 줬다. 명석하다고 불린 스오 가의 도련님, 그런 도련님이 왜 모르는 걸까요. 그대와 정분을 나눈 무사는 이 날이 올 것을 몇 번이고, 아니 몇 십번이고 몇 백번이고 계속 상상했답니다. 정인이 생겼다고 마음이 떠날까 두려워해야 하는 건 도련님이 아니라 분수를 모르는 무사인 거지요. 레오 안의 광대가 외치고 있었다. 레오는 입을 열려다 문득 목구멍 가득 치밀어 오르는 열기에 놀라 입을 닫았다. 참고 있던 건 웃음이 아니었다.
어두운 밤인 게 다행이었다. 몇 번의 심호흡 끝에 아무렇지도 않게 레오는 말할 수 있었다.
“…당연히 돌아오지.”
“어서 오세요.”
눈치를 보며 츠카사가 묻는다.
“밤 산책은 즐거우셨나요…?”
“아니. 역시 평소에 안하던 짓은 하는 게 아니라니까.”
농담조로, 그래도 솔직하게 레오는 말했다.
“도련님이야말로 밤 산책은 괜찮았어?”
“…달을 볼 수 있어서 좋네요. 언제나 그랬지만 오늘도 달이 정말 예뻐서.”
레오와 눈을 마주치며 말한 츠카사는 빙그레 웃었다.
“그 옷 잘 어울려요. 맞추길 정말 잘했네요.”
“누구님의 높으신 안목 덕에 빛 좋은 개살구라도 될 수 있는 거지.”
냉큼 뱉고는 레오는 덧붙여 말했다.
“이제 산책 시간은 끝이야. 착한 도련님은 잠들 시간이지. 물론 나쁜 하인도 잘 시간이고.”
깊어지는 새벽 속에서 말들은 허공을 떠돌았다. 가만히 레오를 바라보던 츠카사가 한 발 다가왔다. 천천히 거리를 좁혀오고는 어깨를 조심스럽게 쓸었다.
“정말 잘 어울려요.”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다정하다. 그렇게 옷이 마음에 들었나. 레오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만 입고 내팽개치려고 했는데 이렇게 열렬한 반응일 줄이야!”
“그럴 것 같아서 말하는 거예요. 일주일이라도 좋으니 더 입어 주세요.”
“아~ 그건 좀 고려를. 칼 한 번 휘둘렀다가 소매가 나비처럼 나풀거릴 거야.”
“―그것도 괜찮겠네요. 분명 멋진 광경일 거예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대답에 오히려 농을 친 레오가 흥이 식어버렸다. 손을 뻗어 츠카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레오는 말했다.
“밤이 깊었어. 자러 가자.”
그건 습관이었다. 대부분 침상을 함께 한 나날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말이었기에 말을 뱉은 당사자도 뒤늦게 자신의 실언을 깨달았다. 츠카사는 눈치 채지 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자러 가요. 소매를 잡고 이끄는 손을 레오가 떼어냈다.
“아참참, 이게 아니지. 이러다 새신부와 대면하겠어.”
굳어지는 상대의 얼굴을 보며 레오는 정적 속에서 가상의 관객들이 요란하게 웃는 걸 들었다. 희극이다, 희극이야.
“졸음이 너무 와서 망언을 해버렸습니다. 먼저 물러나는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고개를 꾸벅 숙인 채 대답을 듣지 않고 레오는 등을 돌렸다. 시선이 꽂히는 게 느껴졌다. 여전히 폭소를 터뜨리는 관객들에게 레오가 묻고 싶었다. 지금 도련님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지? 죽일 듯이 노려보나? 미련이 뚝뚝 넘치는 얼굴인가? 알려줘! 아니, 알려주지 마! 무슨 표정을 지어도 호위무사 역은 돌아보지 못하니까. 이제 무대에서 퇴장해야 하는 배우니까.
아우성치는 마음 소리 속에서 주변은 아주 고요했다. 그 고요함 속에 질식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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