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나스테/C4a] 츠카레오 신간 (1) 소설 트윈지
6/25 어나더 스테이지에 나올 예정인 츠카레오 소설 트윈지 인포입니다!
멋진 표지는 혜리님(@cremmme)께서 작업해 주셨습니다.ㅠㅠ!!
사양
A5 / 성인본 182p, 전연령 172p / 전연령 (17000) / 성인본(17000 / 예약자 한정)
전연령 버전과 성인본 버전을 나눠 판매할 예정입니다.
성인본 버전에는 성행위 관련 묘사가 있으니 주의 부탁드려요.
또한, 페이지가 증가하면 현장판매가가 올라갈 가능성도 있으니 이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현재 선입금 예약+통판 예약을 받고 있으며 예약 특전으로는 본편 관련 카피본을 드릴 예정입니다.
(성인본은 여분 없이 예약한 수만큼 뽑습니다.)
해당 회지는 인외 츠카사를 주제로 하는 츠카레오 소설본입니다!
자세한 것은 아래의 샘플에서 확인해 주세요.
※ 루우 파트에 타커플링(에이레오) 요소가 조금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의 부탁드려요! (샘플엔 X)
소리.
자연스레 두 귀가 움직였다. 기척을 쫓아 쫑긋댄다. 눈은 아직 감은 채다. 몸을 꼬물대다 푹 파묻고 있던 얼굴을 느리게 들었다. 가까워지는 소리와 익숙한 냄새. 항상 이곳에 머물고 떠도는 반가운 냄새. 몸이 반응하는 것과는 달리, 눈은 여전히 뜨지 않는다. 고개를 쳐든 채로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본다. 아직은 졸리고 눈꺼풀은 무겁다. 열심히 귀가, 코만 움직인다. 킁킁대고, 쫑긋거리고....
“푸....”
머리 위에서 들리는 웃음소리에 이젠 상체도 들었다. 웅크리고 있던 몸을 쭉 펴본다. 두 팔을 꾹꾹 밀어 기지개를 하고, 이어선 다리도 펴 몸을 길게 밀었다.
“스오.”
선명한 목소리에 그제야 눈을 뜬다. 코 앞에 보이는 남자의 손. 그대로 쿠션을 내려가 사뿐사뿐 걸었다. 불러주는 목소리에 응해 남자의 손바닥에 머리를 대고 부볐다.
“일어났어?”
쓰다듬어 주던 남자가 두 손으로 몸을 붙잡는다. 그대로 들어 올리는 손길에 꾸물대던 걸 그만두고 살짝 몸에 힘을 뺐다. 상대가 기다렸다는 듯 가슴께로 끌어안았다. 두 팔로 받침대와 울타리를 만들어 주자 다시 천천히 그 품에서 몸을 모은다.
“착하지, 스오....”
웅크리고 눈을 감으면 다시 몇 번이고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졸린 데도 착하네, 이렇게 오고.... 좋아, 그럼 어디로 가볼까. 속삭이는 목소리를 자장가삼아 다시 잠에 빠진다. 남자의 움직임에 몸이 가볍게 흔들리지만 꼭 안겨 있어 괜찮았다. 무엇보다 주위를 감싸는 안온한 온기와 남자의 냄새가 가장 좋았다.
This silence is mine
눈을 뜨면 언제나처럼 작은 쿠션 위다. 스오는 고개를 들고 주위를 살핀다. 소리가 없이 공간은 조용했다. 없나? 스오는 귀를 좀 더 세워본다. 하지만 역시 기척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로 갔지. 스오는 몸을 일으켰다. 팔을 앞으로 펴고, 다리도 길게 늘려본다. 그대로 쿠션을 나가려다 몸 밑으로 밟히는 기분 좋은 촉감에 쿠션을 괜히 꾹꾹 눌렀다. 누를수록 기분이 좋아지는 것도 잠시, 이게 아니지, 하는 마음에 급하게 쿠션을 뛰어 내려간다.
가볍게 바닥에 착지해서 막 뛰어내려온 곳을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소파 위다. 남자가 가져다 놨을까? 스오는 잠시 소파 주위를 천천히 걸었다. 길게 깔린 카펫 위로 펜이 떨어져 있다. 떨어진 펜 곁으로 다가가 한 손으로 툭툭 그걸 건드려 본다. 역시 남자의 것이다. 스오는 그가 턱을 괴고 이 펜으로 뭔가를 끄적거리는 걸 몇 번이고 봐왔다. 그렇다면 근처에 그 끄적대던 것들도 굴러다닐 게 틀림없었다. 자신이 잠들 때 옆에 있었던 걸까.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펜의 냄새를 맡는다. 남자의 냄새다. 응응,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다 몸을 바르게 했다. 소파 탐색을 마치고 잠시 고민에 빠진다. 자고 일어났더니 배가 고팠다. 이대로 부엌으로 가면 스오 몫의 아침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스오는 잠시 먹을 것과 탐색 사이에서 고민한다. 어느 쪽이 더 급하지.... 심각하게 고민을 하다 다시 아장거리는 걸음으로 카펫을 빠져나왔다. 문은 아주 조금 열려 있었다. 한 팔을 들어 톡톡, 건드려 본다. 틈이 벌어져 있는 문을 비집는 건 쉽다. 아예 닫혀있다면 열 수 없지만. 다행히 이번에도 빠져나갈 틈을 만들었고, 스오는 그 사이로 몸을 밀어 넣어 밖으로 나왔다.
쭉 뻗어있는 복도는 갈색이었다. 스오는 다시 귀를 세운다. 소리를 쫓아보지만 역시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지나친 정적에 살짝 우울해졌다. 낑낑거리려는 것도 잠깐 꼬리를 바르게 곧추세웠다. 그는 어디에 있을까. 발을 떼어 복도를 걸었다. 조용한 공간에 탁탁, 하고 스오가 발을 딛는 소리만 울린다. 곧게 뻗은 갈색 복도엔 작은 문이 두 개, 모두 잘 닫혀 있다. 바깥으로 나가는 현관 앞으로 넓어진 복도가 보인다. 넓어진 복도 끝엔 또 거대한 문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스오는 그 곳엔 가본 적이 없다. 그리고 그 거대한 문이 열린 걸 본 적도 없다. 그건 현관도 마찬가지지만.
작은 스오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고 다시 앞으로 걷는다. 스오가 향하는 곳은 계단이다. 계단을 지나쳐 쭉 걸으면 부엌이 나오지만 스오는 부엌으로는 가지 않았다. 계단 앞에 서서, 스오는 잠시 숨을 고른다. 솔직히 스오의 몸에 이 계단은 높다. 팔을 들어 계단을 건드려본다. 괜찮을까. 올라갈 수 있을까. 머뭇거리다 마음을 먹고 오르기 시작했다. 다행히 팔이 닿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턱이 높은 편이라 약간 숨이 찬다.
낑낑거리며 모두 밟고 다음 복도로 왔다. 주위를 두리번거리지만 역시 소리는 없다. 남자는 이곳에 없는 걸까? 하나 더 위로 향하는 계단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스오는 일단 복도로 나왔다. 조용한 복도는 여전히 갈색이었다. 탁탁 소리를 내며 복도를 걷는다. 몇 개의 문, 모두 다 닫혀 있다. 중간중간 붉은 러그가 깔려 있었다. 스오는 붉은 러그 위에 잠시 멈춰 섰다. 계단을 오르느라 너무 힘이 빠졌다. 그 곳에 배를 깔고 앉는다. 눈을 끔뻑끔뻑 해본다. 이렇게까지 올라온 적이 있었나. 애초에 이렇게까지 남자가 보이지 않을 일도 없었다.
어디로 간 걸까. 의기소침해져선 가만히 몸을 웅크렸다. 두 팔에 얼굴을 묻고 귀만 세운다. 남자가 움직인다면 기척도, 소리도 모두 다 들릴 테다. 눈을 감고 청각에 집중해본다....
귀보다 코가 먼저 반응했다. 아래쪽에서 냄새가 난다. 스오는 바짝 일어섰다. 복도를 도도도도 달려 계단으로 향한다. 높은 턱이라는 걸 잊고 바둥거리며 아래로 미끄러졌다. 짧은 다리로 어쩔 줄 모르고 그대로 미끄러진다. 어울리지 않게 한 바퀴 굴렀다.
“스오?”
꺄웅거리는 아픈 신음과 함께 바닥까지 굴러 떨어졌더니 놀란 목소리의 남자가 맞아주었다.
“하아? 위에 올라갔어? 안 다쳤어?”
허겁지겁 올라온 그가 스오를 안아 올린다.
“언제 일어났어. 부엌에 가 있지....”
높게 들어 올린 남자가 녹색 눈으로 이쪽을 빤히 응시했다. 스오는 아픈 걸 꾹 참고 눈만 깜빡인다. 눈엔 물기가 가득 고였다. 깜빡일 때마다 물기가 묻어 나왔다.
“저런, 울어?”
우냐는 말에 고개를 도리도리 흔든다. 아니긴... 그가 걱정하는 것 같기도 하고, 놀리는 것 같기도 한 표정을 지었다. 머리를 살살 쓰다듬더니 다시 품에 꼭 안아주었다.
“아침 먹자. 울지 말고.”
품에 안겨 부엌으로 향한다. 부엌에 도착한 남자는 스오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스오도 익숙하게 기다린다. 얌전하게 앉아 이리저리 분주하게 오가는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남자는 매일 같은 옷을 입었다. 하얀 와이셔츠에 짙은 갈색의 바지. 주홍빛 머리카락은 보통 하나로 묶고 있다. 그에게서 무엇보다 도드라지는 건 반짝거리는 초록 눈이다. 스오는 아직 본 적 없지만, 그건 분명 그림책에 나오는 푸른 잎과 똑같을 것이다.
“자, 여기.”
밀어주는 그릇을 받아 고개를 숙였다. 우유를 할짝여 목을 축였다. 허기가 밀려와 허겁지겁 밥을 먹는다.
“안 하던 짓을 다 하네, 스오. 음... 슬슬 심심할 땐가?”
“그러니까 어, 그거. 활동성이 높아진다는... 그거!”
한참 코를 박고 밥을 먹다가 고개를 들었다. 남자가 웃고 있었다. 그는 스오의 키보다 몇 배는 높은 식탁에 앉아서 턱을 괸 채 이쪽을 본다. 스오는 잠시 먹는 걸 그만두고 그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닿자 레오가 왜? 하고 물었다. 스오는 대답할 방법이 없었다. 그저 그를 가만히 보다 다시 고개를 숙여 밥을 먹는다.
“그러고 보니 얼마나 됐더라....”
조금씩 배고픔이 사라지자 먹는 속도도 느려진다. 남자의 목소리가 멀다.
“이곳에 있으면 시간이 더디게 흐르니까 말야. 어쩌면 나만 그렇게 느끼는 지도 모르고....”
“그래도 스오가 와줘서 다시 좀 빨리 가는 느낌이 들었는데 말이지.”
“그래, 그 때에 비하면 정말....”
스오는 남자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 한다. 작은 스오는 그저, 우유를 할짝였고 밥을 먹었고.... 더는 먹기 싫은 상태가 되자 밥그릇 앞에서 물러나 몸을 닦았다. 몸단장을 하고는 다시 위를 바라본다. 남자는 턱을 괴고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스오는 그를 물끄러미 보다 천천히 다가간다. 남자의 다리에 몸을 붙여 비빈다. 그가 푸,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다 먹었어?”
남자가 몸을 숙여 스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이제 다시 갈까? 경쾌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더니 그가 다시 스오를 안아 올렸다. 배가 불러 움직임이 둔해진 스오는 그저 가만히 남자에게 몸을 맡긴다. 남자의 어깨에 두 팔을 걸치고 몸을 늘어트렸다. 그가 걷는 걸음이 리드미컬하게 느껴진다. 또 다시 살살 졸려왔다.
“아기들은 원래 그렇게 많이 자나? 먹고, 자고, 먹고.... 아니, 스오가 건강하면 그걸로 좋지만.”
...그래도 조금은 심심할지도.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스오는 다시 잠이 들었다.
레오.
스오를 처음 맞아준 남자의 이름이다. 이 ‘스오’라는 이름도 남자가 주었다. 스오는 똑똑히 기억한다. 목소리가 들리고, 온기가 느껴졌다. 그게 남자의 손이라는 건 눈을 뜬 후에 알았다. 어둡고 컴컴한 숲이었다. 빛이라고는 거의 없는 그 곳에선 기이한 냄새만 났다. 어쩌면 눈을 뜬 직후라 제대로 느끼지 못 했던 걸지도 모른다. 스오의 어두운 시야엔 남자만 있었다. 그는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어쩌면 울었을 지도 모른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의 그가 두 손으로 스오를 안아 올렸다. 품에 꼭 끌어안더니 스오, 스오... 하고 불렀다. 아무 것도 모르는 작은 스오는 남자의 품에 눌려 마구 부벼졌다. 미안해, 미안해.... 그는 몇 번이고 그런 말을 했다. 스오는 아무 것도 돌려줄 수 없었지만 남자가 슬퍼한다는 것만큼은 분명히 알았다. 안겨 있기 때문이었을까. 맞닿아 있는 감정이 넘실거리며 전해지는 듯 했다.
“쉿. 잔다니까.”
또렷한 목소리.
“일어날 시간이잖아.”
“하아? 정해져 있지 않아, 그런 건.”
“그건 레오 군이 둔감한 거지.”
“무슨 의미야?”
좀 더 이렇게 있고 싶지만 몸이 멋대로 반응했다. 귀가 쫑긋쫑긋 움직인다.
“이것 봐, 또 세나 때문에 깼잖아.”
“깨운 게 아니라 일어날 시간이라니까?”
스오는 고개를 들었다. 눈을 뜨고 주위를 살핀다. 이번에도 소파 위다.
“미안, 스오. 일어났어?”
“미안은 무슨.”
레오의 얼굴을 보고, 맞은 편으로 눈을 돌렸다. 작은 테이블을 마주하고 있는 상대가 보인다. 눈을 깜빡이자 남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안녕, 카사 군.”
인사말이라는 건 안다. 스오는 그저 가만히 남자를 바라본다.
“오늘은 2층까지 올라왔었다면서? 그래도 많이 컸네. 한때는 자는 것 밖에 안 했잖아.”
“지금도 잠을 더 많이 자긴 하지만.”
“흐음... 불만이 많구나, 레오 군.”
“...딱히 불만은 아냐. 그냥.”
스오는 다시 레오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남자의 옆 얼굴이 어쩐지 석연찮다. 스오는 쿠션에 묻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사뿐사뿐 걸어 레오의 무릎으로 올라간다.
“눈치는 빠르네.”
툭 내뱉는 말이 들려왔지만 스오는 그저 레오의 무릎에 올라 앉아 몸을 웅크렸다. 머리 위에서 긴 한숨소리가 들렸다.
“...착실히 자라고 있는 거겠지.”
“그렇게 믿고 싶은 건 아니고?”
“.......”
“아아, 아냐. 아냐아냐. 널 탓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었지. 맞아.”
“...용납할 수 없으면 무리하지 않아도 돼. 말리지 않아.”
“안 해.”
“.......”
둘의 목소리가 끊긴다. 스오는 레오의 무릎에 웅크리고 있다 말고 불만스럽게 몸을 다시 일으켰다. 두 손으로 레오의 무릎을 꾹꾹 눌러본다. 남자의 무릎은 쿠션처럼 폭신하진 않았다. 오히려 뭐가 없는 편이다. 하지만 그래도 꾹꾹 눌러본다. 기다렸다는 듯 레오의 손이 스오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빨리 크는 게 좋아. 뭐가 됐든.”
“나도 그렇게 생각해.”
“선택은 결국 카사 군이 하는 거잖아?”
“...맞아.”
“여기까지 다시 오는 것도 어려웠으니까.... 그걸 폄하할 생각은 없어. 내가 신세지고 있는 것도 물론이고.”
“이제 와서 듣기 좋은 소리를 해준다고 해도 이미 늦었어, 세나.”
“이건 칭찬이야.”
칭찬으로 안 들린다고.
차가웠던 공기가 천천히 본래의 온도로 돌아가는 느낌에 스오는 꾹꾹 누르던 걸 느리게 하곤 다시 천천히 몸을 웅크렸다. 이번엔 졸리진 않았다. 그저 레오의 몸 위에 앉아서, 가만히 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위층에 다른 일은 없어? 나루는 내려오질 않네.”
“바쁘겠지. 나도 최근에야 정리됐으니까.”
“그런가아....”
“먼저 올라가 보는 건 어때? 겸사겸사 다락 보수도 하고.”
“...스오가 좀 더 자라면.”
“하긴, 오늘도 눈 뗐다가 굴러 내려왔다고 했지.... 어리니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네. 괜히 이상한 곳으로 빠져버릴지도 모르고.”
“무서운 소리 하지마.”
스오의 눈 앞을 레오의 손이 가로막았다. 눈을 깜빡이다 말고 고개를 다시 위로 들었다. 하지만 이 위치에선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다.
“두 번 다시 잃는 일은 없으니까.”
차를 다 마신 남자가 계단을 올라가 버린 후엔 다시 레오와 단 둘만 남았다. 스오는 여전히 레오의 무릎에 있었다. 쿠션으로 갈까도 고민했지만 움직이긴 싫었다. 사실 졸음도 밀려왔지만 이대로 자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스오는 팔 위에 턱을 댄 채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팔을 꼬리로 톡톡 쳐본다.
“왜?”
꼬리가 걸리적거리는지 그가 이쪽을 바라본다. 스오는 짧게 하품을 했다.
“자도 돼. 스오. 아기는 오래 자는 거니까.”
졸리지만 자기 싫은데.
다시 꼬리로 팔을 톡톡 치자 그가 흐음, 하고 고개를 기울인다.
“심심하면 구경할까? 집 안... 잘 모르지?”
“지금 알려줘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뭐, 상관없나. 나중에 기억 못 하면 또 알려주면 되니까.
중얼거리던 그가 스오를 안아 올렸다. 팔로 받침대를 만들어 주자 스오는 편하게 그 위에 몸을 기댄다. 제대로 끌어안은 레오가 방을 나와 복도를 걸었다. 작은 스오가 한참은 걸어야 하는 길을 레오는 쉽게 가버린다. 계단을 오르는 것도 금방이었다. 레오의 품 안의 스오는 편하고 아늑했다. 머리를 댄 채 눈 앞의 공간이 바뀌는 걸 바라본다.
“안 쓰는 방이 두 개... 여긴 열어도 안 열리니까 괜히 어정거리지 말고. 저기 커다란 창문은 여는 문이 아니라 세나가 쓰는 곳이야. 저기도 지금 바쁘니까 두드려도 안 나타날 거야. 지금 우리 집 손님들은 다 바쁘거든. 스오가 다 자랄 쯤이면 한가하려나?”
커다란 창문을 지나치고, 또 커다란 문 앞에 선다.
“여긴 내가 쓰는 서재. 스오도 필요하면 노크해. 열어줄게. 여긴 그냥 책만 많으니까. 아무 때나 들어와도 상관없지만.... 지금 스오에겐 필요 없겠구나. 다음엔 놀이방을 만들까? 어떤 걸 갖고 노는 게 좋아, 스오?”
레오에게 대답하듯 그가 이름을 부를 때마다 꼬리를 움직였다. 레오의 팔에 꼬리를 감고 팔목을 할짝인다. 남자가 머리 위에서 낮게 웃었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다시 얼굴을 부볐다.
“3층도 갈까? 지금 스오가 여기까지 올라올 일은 없겠지만....”
한번도 올라간 적 없는 계단을 레오가 밟는다. 완전히 몸을 기대고 있던 스오도 자세를 좀 고쳤다. 웅크리고 있던 걸 풀고, 몸을 세워선 팔 너머의 세계에 고개를 빼본다.
“그러다 떨어져.”
남자가 다시 고쳐 안는다. 스오는 그의 팔 안에 완전히 매달려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3층도 2층과 크게 다른 건 없었다. 단지 이 위로도 또 다른 계단이 있다는 것과 이곳의 복도엔 2층보다 문이 적다는 것....
“저 방은 신경쓰지 않아도 돼. 주인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아, 그리고 저기가 내 방.”
닫힌 문을 흘끔이다 레오의 손짓에 고개를 돌린다. 열려있는 문이 보였다. 그리고 넓은 침대. 레오가 그 방으로 들어가더니 침대 위에 스오를 내려놓았다.
“다락도 보여주고 싶은데, 나루는 지금 바쁠 거야. 얼굴도 안 비치는 걸 보면.”
이렇게 다망한 때에 올라가면 분명 싫어할 걸. 그러니까 먼저 내려올 때까지 모르는 척 해주자.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얼굴로 그렇게 말하더니 남자가 그대로 침대에 눕는다. 스오는 처음 보는 침대 위에 오도카니 선 채 누워버린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눈을 깜빡이더니 스오의 쪽으로 몸을 돌려 팔을 뻗어왔다.
“이 방... 스오랑 오는 거 처음이네.”
으응, 아닌가...?
쭉 끌어당겨 스오를 품에 안은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처음이라고 해야 할지, 아닌 건지 모르겠어.”
아, 스오가 얼른 대답해줬으면 좋겠다. 어떻게 기다리지?
남자의 웅얼거림에 스오는 아무 것도 답할 수가 없었다. 그저 얼굴을 붙여 혀를 내밀었다. 남자의 뺨에 촉촉 소리를 내며 그 얼굴을 핥으며, 스오는 남자에게 답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다시 찾아온 밤은 어둡고 깊었다. 스오는 쿠션 위에 있었다. 깼다는 자각도 없이 멍하게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지? 왜지? 아주 이상한 느낌이었다. 조용한 공간. 숨소리마저 죽어버린 그 새까만 어둠 속에서 스오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스오, 스오....
스오는 몸을 일으켰다. 발 끝에 딱딱한 게 채였다. 힐끗 내려다보자 저녁까지 레오가 읽어주던 동화책이었다. 남자는 자신에게 그림책을 보여주곤 했다. 그의 무릎 위에서 시간을 보내는 건 스오가 좋아하는 일과 중 하나였다.
스오, 읏, 스오....
그림책에 시선을 빼앗기던 것도 잠깐, 자신을 부르는 그 소리가 멈추지 않아 다시 고개를 든다. 스오는 천천히 걸었다. 카펫을 지나, 열려있는 문을 마저 열고 복도로 나온다. 이런 시간에, 이런 어둠을 목도한 채 문 밖을 나온 건 처음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친근하단 느낌마저 들었다. 이런 걸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스오는 소리를 향해 걷는다. 계단을 밟아 올랐다. 턱은 높았지만 어쩐지 힘들지 않았다.
스오....
소리를 쫓아 충실히 발을 움직인다. 계단을 오를수록 가까워졌다. 스오는 거침없이 향했다. 복도를 밟고, 문 앞에 선다. 닫혀있는 문 안에서 소리가 울려나왔다. 스오는 귀를 갖다 댄다.
힉....
짧은 신음.
스오, 응, 스....
이름을 부르는 낮은 소리에 몸이 반응했다. 스오는 닫힌 문을 조심스럽게 연다. 기다렸다는 듯이 틈이 벌어지고, 그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낮에 봤던 높은 침대가 보인다. 그리고 그 위의 남자도.
“스오, 스오....”
소리는 착각이 아니다. 가까워진 소리에 안도감이 들었다. 스오는 기쁘게 침대 위로 뛰어올랐다. 잘은 몰랐지만 수월하게 오를 수 있었다. 넓은 침대에 안착해서, 스오는 몸을 둥글게 만 채 가쁜 숨을 흘리고 있는 레오를 본다. 남자의 얼굴 옆으로 다가가 자신이 왔다는 걸 알리기 위해 그의 뺨에 얼굴을 댔다.
“흣...?”
등을 보이던 그가 움찔거리며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더운 숨이 닿는다. 눈이 마주치자 스오는 스스럼없이 익숙하게 남자의 뺨을 핥았다. 그가 눈을 깜빡이더니 한 손을 뻗는다.
“스오...? 어떻, 게....”
밤이라서? 닿아있는 남자의 체온이 평소보다 올라간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스오는 남자의 손에 머리를 부볐다. 그가 천천히 몸을 이쪽으로 돌린다. 마주보는 자세가 되어 스오는 레오의 얼굴을 계속해서 핥았다. 뺨을, 눈을, 코를.... 머리와 귀를 만져주는 손에 고양되어 열심히 남자의 얼굴을 핥았다.
“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연이어 부르는 그 입술에도.
벌려진 입술 사이로 흐르는 더운 숨과 자신의 이름이 따듯하고 간질거려서, 스오는 몇 번이고 남자의 그 입술을 핥았다. 지나치게 기분 좋았다.
다음 날 아침, 스오는 남자의 품에 안겨 있었다. 쿠션이 아닌 침대 위였다. 하도 꽉 끌어안고 있어 약하게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스오는 잠시 숨을 몰아쉬었고, 손을 들어 남자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저기, 레오....”
남자를 건드리다 말고 스오는 자신의 눈 앞으로 보이는 다섯 손가락에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레오?”
놀랍게도 그를 부를 수도 있었다. 스오는 입을 뻐끔거렸다. 그러니까 이건 남자가 자신을 부를 때와 같은 울림이었다. 스오는 남자의 품에서 벌떡 일어났다. 침대를 내려와 두 팔을, 두 다리를 살폈다. 스오의 그 부산스러움에 침대 위에서 자고 있던 남자도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음... 스오?”
남자가 그렇게 말하더니 스오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스오는 제자리에서 콩콩 뛰다 말고 팔을 벌린 남자를 향해 다시 올라가 안겼다. 남자의 몸에 비하면 스오는 여전히 작은 몸이었지만, 이젠 그의 팔에 안겨 매달려 다니긴 어려울 것 같았다.
전화와 편지는 동시에 왔다. 아마 편지가 먼저 왔을 것이다. 레오는 이 학교와 멀리 떨어진 집과 건조한 대화를 나누고 온 참이었다. 방학은 학교에서 보낼게. 그런 용건을 나누는 것뿐인 통화는 아주 짧았지만 불필요한 감정적인 소모를 하기엔 충분했다. 작별 인사는 서로의 안부도 아니었다. 루카는 잘 지내? 그 아이는 아주 잘하고 있어. 레오는 보이지도 않을 상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행이고.
전화는 끊겼고 같은 곳에서 온 편지는 아까 안부를 물은 아이에게서 왔다. ‘from 츠키나가 루카’가 써진 편지를 손에 쥔 레오는 아까의 늘어지는 걸음과 달리 아주 가벼웠고 훨씬 재빨랐다. 루카땅 사랑해! 편지를 뜯기도 전에 그렇게 외친 레오는 편지를 품에 안고 좁은 기숙사 침대에서 한 바퀴 데구루루 굴렀다가 벌떡 일어나 아까와는 다른 제법 정중하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편지를 뜯었다.
친애하는 오빠에게.
작은 구슬 같은 앙증맞은 글씨. 익숙한 글씨체를 쓸어보다가 레오는 다시 자세를 바로 하고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잠시 후 레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 길지 않은 편지를 다시 찬찬히 훑는다. 제대로 읽으면 무언가 단서가 나타날 것처럼. 하지만 몇 번을 들여다봐도 종이에 숨겨진 글자가 떠오르는 일은 없었다. 조금 후에 레오는 다시 옆방의 문을 두들겼다. 핸드폰, 다시 빌려줘.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고, 그냥 방학 때 집 내려가려고.
츠키나가 레오의 여름방학 일정은 그렇게 갑자기 변경되었다.
*
굽이치는 기찻길을 따라 좁은 선로가 달린다. 점점 지도의 안쪽으로 파고드는 선로는 어두운 동굴을 몇 번이나 통과했고 점점 짙어지는 녹음 속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덜커덩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귀에서 연신 울린다. 기차 안은 한가했다. 적어도 이 칸엔 레오 밖에 없었다. 귀가 찢어져라 우는 아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철로를 달리는 기차소리만 고요하게 울리고 있었다. 돌고래 같은 높은 울음소리와 아이를 달래는 어머니의 목소리의 조화는 독특한 리듬이 있어서 한 곡의 곡이 나올 것 같았는데. 여로의 끝이 다가올수록 침묵이 가득해지는 느낌이다.
주변이 고요하자 음악 대신 다른 잡상이 레오의 머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언제나 세상을 가득 메우던 음 같은 것들 대신, 시시하고 재미없는 생각들이다. 이를테면, 가족들과 언제 만났는지. 저번 겨울 방학에 이 기차를 끝까지 못 탄 것 같다. 걸핏하면 눈이 쌓이는 곳이라 운행 중지가 되어 기차역에서 노숙을 했던가? 쏟아지는 영감, 밀어닥치는 추위 둘 중 어떤 걸 우선해야 할지 몰랐던 기억이 얼핏 난다. 그 때는 사고로 못 간 거니까. 지난 여름방학은 어땠더라. 너무 더운데, 집에 에어컨이 고장 났다는 소식을 듣고 안 가기로 결정했다. 딱딱한 이야기만 종일 늘어놓는 주제에 학비는 무시무시하다던 학교의 좋은 점은 사시사철 냉난방 완비라는 점이었다. 그 여름방학을 뒤로 하면 입학식이다. 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집에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어쩐지 루카땅이 많이 그립다 했더니 오래되긴 했다.
가족 간의 불화 같은 건 제대로 된 이야기도 되지 못한다. 고등학교 2학년인 레오에게 그런 관계는 사춘기의 불명예스러운 타이틀 밖에 되지 못한다. 대신 자신에게는 아주 특별한, 사랑스럽고 귀여운 여동생이 있으니까. 부모는 레오의 질 나쁜 병이 루카에게 전염되지 않게 하기 위한 것 같지만.
기차 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아니 잠이 들고 있다. 자는 건 좋아하지 않지만 도리가 없었다. 이제 곧 도착할 곳은 지금의 기차와 비교도 안 되게 더 조용한 마을이다.
레오가 기차에서 내렸을 때는 눈부시던 태양의 자취는 온데간데없이 어둠이 세상을 시커멓게 잡아먹고 있는 시간이었다. 줄곧 혼자였던 기차에서 레오는 홀로 내렸고, 기차는 어딘지 모를 곳을 향해 바퀴를 움직여 떠났다.
갈 길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레오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유난히 반짝이는 별의 바다가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아서 현기증이 났다.
“오빠―!”
수명이 다하기 직전의 가로등 불빛 밑에서 작은 인영이 반갑게 뛰어온다.
“루카.”
사랑스러운 여동생에게 마음껏 달려드는 대신 레오는 의젓하게 손을 흔들었다. 이제 고등학교 2학년이니까. 평소에는 생각지도 않던 나이를 되새기며 레오는 달려오는 루카를 토닥였다. 저번보다 더 길어진 풍성한 갈색머리 뒤로 역시 전봇대 아래에 누군가 서 있는 게 보인다. 성인 남성, 그것도 두 명.
“누구야?”
루카도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같은 마을에 계신 아저씨들인데, 밤에는 위험하다고 같이 와주셨어. 차도 태워주신대”
사람이 적은 동네지만 아이가 일일이 어른의 얼굴을 기억하지 않는다. 가로등 아래에서 가득 음영 진 얼굴은 그들이 기괴한 가면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레오는 그들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상대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걸로 끝이었다. 남자 둘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루카를 쳐다본다. 무언가의 독촉처럼도 보이는 그것에 루카가 퍼뜩 놀라 레오의 소매를 잡았다.
“오빠, 어서 집에 가자. 밤이 늦었어.”
작은 손이 끌어당긴다.
루카와 나란히 앞장서서 걷고, 그 뒤로 남자들이 따라온다. 마치 영주의 뒤를 따르는 병사들처럼. 레오는 슬쩍 남자를 보았고 루카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진짜 마을 어른이지?”
레오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고 루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치곤 불안해 보이는 기색으로 그녀는 세워둔 차를 향해 조금 걸음을 빨리 옮겼다.
츠키나가 가의…, 거기 장남이라고. 남자들이 짧게 나누는 대화도 얼핏 들린다. 위해를 가하려고 하는 것 같진 않지만 경계가 수그러들지 않는다. 여자 아이 혼자 밤길은 위험하지만 별로 살갑지도 않은 어른 둘이 따라올 일인가? 레오는 루카의 편지를 기억했다. 그녀는 거창한 말을 쓰지 않았다. 자신의 학교도 여름 방학을 맞았고, 방학 숙제도 산더미처럼 받았다고. 기쁜 소식과 슬픈 소식 두 가지가 있는데, 기쁜 소식은 그 많은 방학 숙제를 안 해도 된다는 것, 슬픈 소식은 오빠가 여기에 와도 당분간 볼 수 없다는 것 정도였다. 왜 볼 수 없다는 건지는 전혀 적혀있지 않았다. 친구와 이런 일이 있었다느니, 학교에 있는 고양이가 자기를 알아봤다느니 같은 일들 하나하나 다 적던 그녀의 편지는 단출한 내용을 담고 부연 설명도 없이 바로 끊겼다.
레오의 걱정과 달리 전화상에서 루카는 마중을 나가겠다고 기쁜 목소리로 답했고 그녀는 레오의 기억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옆에 있다.
역에서 마을까지는 꽤 거리가 있다. 자전거가 있어도 한참 밟아야 했고, 없다면 꽤나 긴 거리를 걸어야 했다. 곧 있으면 날이 바뀔 시간에 차가 있다는 건 굉장히 다행스런 이야기긴 했다. 차 안의 공기는 아주 어색했다. 한 남자가 운전대를 잡았고 다른 남자는 조수석에 앉아서 레오와 루카는 자연스럽게 뒷좌석에 앉았다.
듬성듬성한 가로등이 비추는 흙길을 덜컹이며 차가 지나갔다. 루카의 작은 손은 여전히 레오에게 잡혀 있었다. 이제는 루카 쪽이 더 꽉 쥐고 있는 것 같다. 백미러 너머로 남자와 가끔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면 남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좁은 차 안은 밤이어도 금방 후덥지근해져서 더욱 갑갑해졌다. 남자도 그걸 느꼈는지 창문을 열었다. 곧이어 서늘한 공기와 흙냄새가 가득 들어찼다. 도시에선 맡을 수 없는 냄새. 나무가 땅에 단단히 뿌리를 내려 깊숙한 원천을 빨아들이고 잎사귀로 뿜어내고, 그 숲 사이를 바쁘게 오가는 작은 벌레들, 좀 더 큼직한 발걸음으로 자신의 영토를 누비는 들짐승들. 그런 순환의 정중앙에 터를 잡은 인간만을 위한 그들의 마을. 그 가득한 자연의 덩어리를 레오는 지금도 선명히 기억한다. 자신이 태어난 곳을 사랑했었고, 지금도 사랑한다. 떠나야 했던 곳이지만.
차가 천천히 멈춰 섰다. 도로 포장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마을의 유일한 입구에는 이질적인 차단기가 가로막고 있었다. 차단기를 사이에 둔 나무에는 긴 붉은 천이 걸려 있다. 운전석에 있는 남자가 창문을 열어서 차단기 옆 부스에 있는 어느 남자에게 말을 건다.
“여, 수고.”
“금방 오셨네요. 별다른 문제는 없죠?”
순경 복장을 한 젊은 남자가 뒷좌석을 힐끔였다.
“응. 내린 사람도 츠키나가 장남 혼자였어.”
“그렇죠, 이런 벽촌에 외지인이 올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순경은 그렇게 대답하며 부스로 들어가 버튼을 눌렀다. 차단기가 올라가자 운전석에 있던 남자가 수고해, 라고 말하고 다시 차를 움직였다. 길은 여전히 포장되어 있지 않다. 양 옆에 숲으로 가득 찼던 것이 점점 줄어든다.
듬성듬성한 나무가 끊어질 듯 말 듯 이어지다가 어느새 확 트인 정경이 펼쳐졌다. 달빛을 받아 빼곡히 심어진 벼가 푸릇푸릇한 잎을 한층 뻗고, 그 사이를 차가 빠르지 않은 속도로 달린다. 머지않아 점점이 인공적인 불을 밝히고 있는 마을이 다가온다.
돌아왔다. 이곳을 나갈 때만 해도 집을 잊기로 한 레오지만 저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차는 정확히 츠키나가 집 앞에서 멈췄다.
“감사합니다.”
차에서 내리고 레오는 운전석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만날 때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인 그들은 차를 움직였다. 레오는 저도 모르게 차가 간 방향을 보고 있었다. 차를 돌리지 않고 그대로 오르막길로 가고 있다. 저쪽으로 쭉 간다면 아마 신사에 도착할 것이다.
“어서와, 오빠.”
문득 들리는 목소리에 다시 앞을 보면 루카가 아까보다 풀어진 웃음을 짓고 있었다. 어쩐지 잔뜩 날 서 있던 마음이 가라앉아 레오는 비슷한 웃음을 마주 지었다.
“응.”
손을 내밀어 여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면 변하지 않는 수줍은 웃음소리를 들려주었다.
아버지는 이미 잠자리에 드셨고, 어머니만이 레오를 맞았다. 오느라 고생했어, 밥은 먹었니? 기차에서 도시락 먹었어. 목욕물 준비해 뒀으니 씻으렴. 일 년 넘게 보지 못한 모친과 나누기엔 조금 어색한 대화와 함께 레오는 자신의 방에 들어갔다. 어스름한 전깃불 아래 드러나는 방안은 나갈 때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긴 부재에도 먼지 한 톨 쌓이지 않은 바닥을 확인한 레오는 이불에 망설임 없이 드러누웠다. 조용해진 방 안에 풀벌레 소리가 조금씩 들어온다. 고요하고 숨 막히는 공간. 태어날 때부터 레오와 함께 했던 모든 것들이 숨을 죄고 있다.
“오빠, 자?”
문 너머로 들리는 조그만 목소리. 레오의 숨통을 트여줬던 건 언제나 사랑스러운 여동생뿐이었다. 레오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와.”
문이 열리더니 빼꼼 얼굴을 내민 루카가 살짝 방안을 둘러보았다.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선다.
“오빠랑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고.”
파자마를 입은 어깨에 평소처럼 양 갈래로 묶은 머리가 풀어져서 사자 갈기 같은 풍성한 머리를 한 루카가 수줍게 웃었다.
“거기 가서 노래도 만들었다고 했잖아? 그것도 듣고 싶어.”
“좋아! 그래 어디부터 이야기할까. 아무래도 기독교 학교 하면 뭔가 상상하는 이미지가 있잖아? 되게 정숙하고 그런 느낌이 있지. 근데 우리 마을이 더 조용한 것 같아. 다른 사람들은 여기가 아주 조용한 편이라고 했지만, 시끄러웠는걸! 그러니까 이렇게 사람들 마음이 말이야. 막 잡힐 듯이 웅성거렸어.”
루카가 눈을 반짝이며 듣고 있다. 밖으로 나갈 기회가 별로 없는 마을의 아이는 바깥 이야기가 언제나 궁금해 한다. 텔레비전도 마을 회관에 한 대, 라디오 역시 마찬가지. 신문은 자유롭게 가져갈 수 있지만 어린 아이들이 읽기엔 많은 한자와 겨우 읽어도 재미없는 이야기가 가득했다. 마을의 아이들에게, 루카에게 아주 귀중할 이야기를 레오는 계속 입에 담는다.
“루카, 예수라고 알아? 우리 마을의 신님과는 다른 거야. 다른 나라의, 다른 신이지. 내가 다닌 학교는 그 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지은 학교야. 그래서 매번 정해진 시간에 신의 말씀을 전하지. 이런 것도 있어. 성서라고, 그들의 신이 한 말들을 적어 놓은 무겁고 아리송한 책이야….”
레오의 이야기를 들으면 루카도 편지에 적지 못한 이야기를 해줄 것이다.
*
“오늘 루카와 신사에 다녀올 거다.”
한동안 젓가락 소리만 이어지던 아침밥상 앞에서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다.
레오가 돌아오고 난 매일은 극히 일상적이었다. 아버지는 원래부터 이 집에 레오가 있다는 듯이 대했다. 그간 어떻게 지냈냐느니 같은 말은 전혀 없었다. 레오는 루카와 함께 마을이 달라진 곳이 없는지 돌아다녔고 가끔 마주치는 동네 어르신들에게 인사를 할 뿐. 마을은 뭐하나 쉽게 변하지 않았다. 마을의 거목이 조금 더 두꺼워졌을까? 가지에 잔뜩 걸린 붉은 천 때문에 나무는 더 부풀어 보였다. 레오가 자라면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치장이다. 축제야? 라고 레오는 물었고 루카는 비슷한 거라고 들었어, 라고 답했다. 그 붉은 천은 각 집마다 걸려있었는데 레오네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너도 같이 갈 거냐?”
아버지는 그렇게 물었고 그 시선에 끝에 있는 레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랜만이기도 하고.”
루카는 자신의 상황을 정확하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못했다는 편이 맞을까.
‘그건… 내가 정한 게 아니고. 엄마랑 아빠도 잠시 여행을 가는 거라고 생각하랬어. 그러기 전에 오빠를 볼 수 있어서 기뻐.’
중학생이 긴 여행을 갈 일이 수학여행 말고 뭐가 있단 말인가. 레오가 본 바로는 아버지는 평소와 같지만 어머니는 루카를 왠지 더 챙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여행’에 대해 꺼내지 않는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츠키나가 일가의 생활은 평탄하게 이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밖에 나오니 매미 소리가 한층 더 강렬하게 들렸다. 뙤약볕이 떨어지는 한낮에 돌아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레오는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어머니에게 받아 그걸 썼고, 같은 모자를 쓴 루카와 나란히 걸었다. 앞서 가는 아버지를 포함해 오가는 말은 무엇 하나 없다. 이글거리는 바닥에 돌이 달궈지고, 태양에 지지 않을 것처럼 매미가 울어 녹색이 더 깊어져간다.
야트막하게 쭉 이어지던 오르막길은 곧 좁은 산길까지 이어진다. 산길은 돌계단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 길을 감싸듯이 위는 붉고 아래는 검은 도리이가 층층이 계단마다 관문처럼 겹쳐있다. 삐죽한 고딕 양식의 건물들이 어느새 익숙해진 건지 그 모습이 어쩐지 이질적이다. 도리이는 일반 세계와 신사를 구분하는 경계라고 했다. 도리이가 이어진 너머에서 서늘한 공기가 불어오는 것도 같다. 어렸을 때는 루카와 이곳을 달음박치며 올라간 적이 많다. 끝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돌계단 위로 붉은 통로를 오르며 루카 힘내, 다 왔어 라고 작은 아이의 손을 잡아주기도 했었다. 그 때보다 커진 레오의 동생은, 밀짚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어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길게 이어진 계단을 벗어나자 푸른 하늘을 등 진 신사가 드러났다. 그 앞마당에도 붉은 깃발이 그 천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들 앞으로 기다리고 있다는 듯이 무녀가 서 있었다.
“주지스님이 기다리셔요.”
검은 눈동자가 루카를, 그리고 레오를 한 번 본다. 그녀는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이 분은….”
“우리 집 장남입니다.”
“아―, 실례를. 그러면 같이 오시겠어요?”
종종 걸음으로 무녀가 앞장선다. 반질반질한 돌길을 밟으며 레오는 뒤를 따랐다. 모든 음이 가라앉는 세계. 이 신사는 마을에서도 무척이도 조용했다.
안내 받은 본전에는 검은 가사를 입고 커다란 안경을 쓴 승려가 기다리고 있었다. 승려 역시 레오를 보고는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눈을 둥글게 떴다.
“장남입니다. 외지에 나가 있다가 이번에 돌아오게 됐습니다.”
“그렇다면….”
깊게 패인 눈주름이 좁혀지면서 레오와 루카를 번갈아 바라본다. 레오는 어리둥절하게 그 시선을 받고 루카는 고개를 숙였다.
“다름이 아니고 이제 멀지 않았습니다. 이번 주 중으로, 빠르면 당장 내일이라도. 그러니 오늘밤부터 와주셔야겠습니다. 예정대로라면 따님께서….”
열기로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던 루카의 뺨이 어느새 하얗게 질려있었다. 그녀는 얼어붙은 표정으로 경내의 매끈한 바닥에만 시선을 던지고만 있다. 레오는 루카를, 그리고 승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짧게 알았다는 대답을 했다. 나머지는 일정대로, 그 외에 자세한 건 여기로 다시 오고 나서. 아버지는 승려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며 아이들을 내보내 더 이상 레오가 들을 수 있는 이야기는 없었다.
아까의 무녀는 어딘가로 갔는지 경내에는 아무도 없었다. 바람도 불지 않아 붉은 깃발은 일말의 펄럭임도 없이 추욱 늘어져 있을 뿐이다.
“루카, 이제 무슨 일인지 말해줘도 되지 않아?”
아이는 아까 이야기를 한 이후로 잔뜩 긴장해 있는 것 같았다. 레오의 말에 깜짝 놀랐다가도 주춤주춤 시선을 아래로 깐다.
“마, 말해도 될까…?”
'행사 안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츠카레오배포전/츠카사6] 벌레 재판 (0) | 2017.08.24 |
---|---|
[어나스테/C4a] 최종인포 (4) | 2017.06.24 |
[앙온/페06] 최종인포 → 통판중 (0) | 2017.04.01 |
[앙온/페06] 츠카레오 신간 수량조사 받습니다. (9) | 2017.03.22 |
[나이츠온/들2] 츠카레오 신간 안내 및 종합 인포 입니다. (0) | 2017.0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