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린 (to. 카이루)
* 가이린
* 섬궤2 엔딩 요소 포함. 원작 날조 설정
* 오메가버스
녹색 풀 내음이 진하게 올라오는 평원을 자박거리는 발소리가 오간다. 짐이 한가득 실린 마차와 그 선두에서 촉촉한 땅을 가끔 두들기며 투레질하는 말들, 그 옆을 바삐 오가는 사람들. 노르드의 한적한 촌락은 여느 때와 다른 분주함이 흐르고 있었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올려다보던 가이우스는 말을 타고 달려오는 동생-토마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색하게 말 위를 오르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 샌가 말을 타는 품새가 제법 틀이 잡혀 있었다.
“형아, 준비 다 끝났어. 이제 올라가기만 하면 돼.”
토마는 익숙하게 말을 멈추고 폴짝 말에서 뛰어내렸다.
“장로님 일행은 다 올라가셨다. 이제 너도 가야지.”
“근데 릴리가 아직 안와서... 어디 간지 알아?”
짐을 챙기는 노르드 마을 주민들 사이로 망아지처럼 겅중겅중 뛰어다니던 작달만한 어린 아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 마지막으로 말을 타보겠다고 하고 내려갔었는데...”
릴리가 타고 다니는 말은 제 몸집만큼이나 작은 말이었다. 한동안 말을 타지 못할 걸 잘 알고 있는 아이는 금방 다녀올게~ 라는 말을 남기곤 남부 쪽으로 달려 나갔었다. 남부는 북부보단 마수들이 덜 흉포한데다 작은 말이 소녀를 태우고 달려갈 수 있는 거리로는 마수와 조우하기도 힘들다. 그래도 만일이란 게 있으니.
“토마, 릴리는 내가 찾아볼 테니 넌 먼저-.”
“앗, 형아 저기!”
눈을 둥그렇게 뜬 토마가 가이우스의 뒤를 가리켰다. 마을 입구에 작은 말과 고만고만한 소녀가 축축한 풀잎을 밟으며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가이우스를 본 듯 소녀도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처음에 가이우스는 자신과 토마에게 인사를 하는 줄 알았다. 조금 후에야 아이의 손짓이 인사 뿐 아니라 옆에 걷는 말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가이우스는 서둘러 릴리 쪽으로 발을 옮겼다. 릴리가 말을 타지 않은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말의 걸음이 굉장히 느린 것에도.
아이가 겨우 탈 작은 말 등에는 용량 오버일게 분명한 어떤 사람이 짐처럼 얹혀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망아지 위에 늘어져 있는 낯선 이를 보고 가이우스는 그의 작은 여동생이 시체를 들고 왔을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생각을 잠깐 했다. 그 정도로 릴리가 데려온 사람은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실 끊어진 인형처럼 미동도 없었다. 의식이 있었다면 그렇게 짐처럼 실려 오진 않았을 터였다.
성별은 남자, 나이는 가이우스의 또래거나 더 어려 보였다. 학생으로 보이지만 허리에 단단하게 매여 있는 건 태도. 가벼운 옷차림으로 보건데 감시탑이나 젠더 문에서 온 병사는 아닌 듯 했고 관광객이라기엔 시기가 좋지 않았다.
두 동생들은 의식을 못 차린 낯선 이방인을 걱정했지만 먼저 떠난 일행들과 너무 떨어지는 것이 염려한 가이우스의 말에 머뭇거리다 결국 마을을 떠났다. 이 의식불명 환자를 동생들과 같이 올려 보내는 게 좋았을까 라는 생각을 했지만 어떤 목적으로 이곳에 찾아온 지 모를 사람이었다. 만일을 위해 자신의 선에서 돌보는 게 최선의 선택이라고 가이우스는 마음을 정했다.
노르드 전통 문양이 그려진 이불을 덮은 남자는 여전히 죽은 듯이 자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시체처럼 새하얗던 얼굴에 혈색이 돌아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손가락을 가져다 대야 간신히 느껴지던 미약한 호흡도 지금은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안정돼 있다.
릴리는 남자가 아무것도 없는 초원에서 혼자 쓰러져 있었다고 했다. 지금의 노르드 고원은 특히나 기온이 낮다. 아무런 야영 장비 없이 밤을 지새웠다면 감기 수준으로 넘어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톡톡 들리는 소리에 가이우스는 이방인에게서 시선을 떼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묵직한 천에 누군가 천천히 자갈을 떨어뜨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어지던 소리는 곧 쏴아 하는 가슴 서늘한 소리로 바뀌어 사방을 에워쌌다. 문을 살짝 열어보면 연두색이던 초원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줄기로 짙은 색으로 바뀌어 물방울을 한가득 받아내고 있었다. 빗소리와 함께 가느다랗게 섞여 들려오는 양의 울음소리를 듣던 가이우스는 다시 문을 닫았다. 한층 빗소리가 작아지고 천막 안은 고요히 일렁이는 화톳불이 여전히 온화한 빛을 비추고 있었다. 한 가지 변화라면 죽은 듯이 누워있던 남자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직 정신이 덜 든 건지 천천히 눈을 깜박인 남자는 천장을 멀거니 보다가 앞을 본다. 그대로 느릿하게 주위를 둘러보다가 가이우스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랐다. 가이우스는 화톳불로 다가가 위에 놓인 작은 주전자를 집어들며 말했다.
“몸은 이제 괜찮습니까?”
“어, 저기...”
어색하게 남자가 말꼬리를 늘렸다. 당황한 기색이 얼굴에 역력했다.
“여긴... 어딘가요? 제가 왜 여기에...”
“고원 한복판에 쓰러져 있었다고 하더군요. 동생이 발견하여 마을로 데리고 오게 됐습니다.”
“폐를 끼쳤네요. 죄송합니다.”
남자는 정말 미안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가이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이 마을은 방문자가 많지 않아서 가끔 찾아오는 여행객들도 반가이 맞이합니다. 원래라면 마을 사람들 모두가 환영을 하겠지만 지금은 사정이 여의치가 않은 지라.”
“아, 아뇨. 이렇게 보살펴 주신 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합니다. 계속 신세질 수도 없는 노릇이니-”
조금 허둥거리며 남자는 침대에서 벗어났다. 가이우스가 뭐라 하기도 전에 남자는 가이우스에게 고개를 숙인 다음 문을 열었고, 그와 함께 앞 다투어 달려오는 빗소리에 그대로 행동을 멈췄다.
“지금 나갈 생각이라면 말리고 싶습니다.”
물안개가 뿌옇게 일어날 정도로 거세게 쏟아지는 빗줄기가 문 앞을 가로막는다. 우기의 고원은 이곳이 삶의 터전인 노르드 주민들도 섣불리 뚫고 가지 못한다. 폭풍을 본 것처럼 멍한 얼굴을 한 남자는 뒤늦게 문을 닫고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가이우스를 바라보았다.
당황한 것 같지만 크게 낭패한 얼굴은 아니기에 당장 이곳을 떠나야 할 급한 일정은 없어 보였다.
“괜찮으면 여기에서 좀 더 쉬어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정말 면목 없지만 신세 좀 지겠습니다.”
어깨를 늘어뜨린 남자는 머뭇거리며 화톳불 근처로 다가왔다. 이것도 바람의 인도일 겁니다. 한 마디와 함께 컵에 허브티를 담아 건네주면 남자는 감사합니다, 라며 공손이 컵을 받았다.
“가이우스 워젤입니다.“
자기소개를 하자 이방인은 곧바로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컵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머뭇거리던 남자는 말했다.
“제국 출신의... 린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대답하고는 남자는 가만히 컵을 입술로 가져다 댔다. 찾아온 침묵에 다시 빗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따뜻한 차가 경계심을 녹인 건지, 나뭇가지를 탁탁 튀기며 타오르는 불꽃 소리와 함께 가이우스는 이방인- 린과 여러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우연히도 그들은 같은 나이인 열여덟 살이었기에 편히 말을 놓기로 했다.
린은 제국의 트리스타에 있는 토르즈 사관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지금은 ‘오더’에 따라 잠깐 학교 밖에 나와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임무를 처리하고는 시간이 남아 노르드 고원에 있다는 커다란 거신상을 보고 싶어서 왔다고. 하지만 이렇게 넓을 줄은 몰랐다며 린은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말 없이 노르드 고원을 가는 것은 무모한 일이지.”
“응... 전적으로 동감이야.”
“거신상이라면 북부에 있어. 날이 개면 안내해 줄게.”
“폐가 아니라면...”
그렇게 말하고 린은 작게 웃었다.
가이우스가 느낀 린이라는 사람은 예의가 바르고 올곧았다. 눈을 마주치면 피하지 않고 연보라색 눈으로 시선을 마주한다. 잠깐의 대화로 사람의 모든 걸 파악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 마을을 해하러 온 사람은 아니라는 판단이 섰다. 하지만 그가 무작정 밝다고는 할 수 없었다.
가끔 빗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며 다른 생각에 잠기는 그는 종종 가라앉은 표정을 지었다. 하늘을 뒤덮은 잿빛 먹구름이 가득한, 좋다고는 할 수 없는 날씨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그의 침착함에는 우울과 비슷한 어두운 감정이 조용히 깔려있었다.
그 얼굴을 바라보며 가이우스는 생각에 잠긴다. 이상하게도 그는 어디선가 본듯한 낯익은 얼굴이었다. 언젠가 만난 적이 있던가 하며 자신의 기억을 점검해 보지만 노르드를 찾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있다 해도 가이우스의 또래가 찾아온 적은 없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결론은 린과는 첫 대면이라는 거지만 아직도 묘한 기시감이 마음 한 구석을 쿡쿡 찌르고 있었다.
만약 노르드에 관광 가이드가 있다면 이 시기에 방문은 절대 추천하지 않을 것이다. 매년 이맘때쯤의 노르드에는 아주 많은 비가 내린다. 넓은 노르드 고원의 모든 생물에게 있어 생명이나 마찬가지인 비를 내리는 것은 노르드 사람들이 섬기는 바람과 여신의 축복이었다. 하여 그들은 노르드의 일 년 중 가장 생명이 태동하는 이 시기를 경의를 담아 여신의 수유라 불렀다. 관광객에게는 여신의 골탕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역시나 린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먹구름이 잔뜩 낀 날씨도 하루쯤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건지 한 달 내내 비가 내린다는 사실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특히나 여신의 수유가 시작되는 며칠은 그간의 건기를 만회하려는 듯 폭발적으로 비가 내린다. 이 때 만큼은 노르드의 주민도 견디기 힘든 구간이다. 상대적으로 비의 피해가 덜한 고지대로 임시 처를 꾸려 그곳에서 생활하고, 일주일 후에 기세가 잠잠해지면 다시 원래의 거처로 돌아온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사람은 이러한 이동이 가능했지만 양들은 그러지 못했다는 점이다.
수가 굉장히 많은 양들을 데리고 이동이 힘들 뿐더러 임시처가 있는 곳은 양들의 먹이가 적은 곳이었다. 이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매년 마을 주민 중 한 명이 남아 양들을 관리하기로 하였다. 올해는 가이우스의 차례였다.
“그럼 이 마을에 가이우스 혼자 남아있는 거야?”
“그래. 일주일 동안은 말이지.”
“뭔가 대단한걸.”
그렇게 말하며 린은 죽을 한 스푼 떠 먹고 다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것도 굉장히 맛있어. 세간에서 흔히 말하는 우유죽이야, 노르드에선 우유 대신 양젖을 넣어서 만들지. 고소하게 입 안에 퍼지는 맛이 좋은지 린의 숟가락이 조금 빨라졌다.
“나는 이런 변경까지 오는 린이 더 대단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우물거리던 린은 이내 다물고는 대신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오더라고 칭한 걸 보면 자신의 의지가 아닌 강압적인 무언가로 인해 이런 곳까지 왔을지도 모른다. 가이우스는 넌지시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네 짐인 것 같은 물건도 가져왔는데 확인해 보는 게 어때.”
침대 옆에 있는 카키색 가방을 가리키자 린은 짧게 감탄사를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 맞아. 완전히 잊고 있었네....”
“가방 옆에 검은색 도력기도 떨어져 있다고 해서 가져왔다고 하던데 그것도 네 물건인가?”
가방에 손을 넣어 뒤적거리던 린은 가이우스가 말한 물건을 꺼냈다. 컴팩트 형식인지 짤깍하며 열린 작은 도력기를 몇 번 눌러보지만 별다른 작동은 없었다.
“고마워, 이것도 내 물건이야.”
“휴대용 도력기?”
“응, 통신용으로도 쓰이는데... 전혀 안 터지네.”
“이 시기엔 도력 통신이 잘 통하지 않는다고 하더군. 원래부터 원활한 편은 아닌데 비까지 오니까 그럴 거야. 잠들어 있을 때 몇 번 울리긴 했는데 받을 걸 그랬나?”
“음... 아니, 괜찮아. 중요한 일은 다 처리 했으니까 아마 급한 연락은 아닐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미련이 남는 지 버튼을 몇 번 꾹꾹 눌러보다가 결국 뚜껑을 닫는다. 매끈한 검은색의 뚜껑엔 은색으로 어떤 마크가 그려져 있었지만 제대로 보이기도 전에 다시 가방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가이우스는...”
“음?”
문득 이어지는 말에 고개를 들면 린이 가이우스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아니야.”
다시 자리에 앉는 린은 어쩐지 지쳐보였다. 가이우스와 동갑임에도 젠더 문의 병사처럼 회색빛의 우울한 얼굴을 보는 건 어쩐지 안쓰러웠다. 가이우스는 잘 모르지만 제국 같은 큰 도시에 사는 동갑내기들은 어쩌면 린만큼 복잡한 고민을 안고 살아갈지도 모른다. 어렸을 적 딱 한 번 가본 제국은 노르드의 탁 트인 초원 대신 건물들이 빽빽한 숲처럼 자라나 있고,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회색빛 옷을 입고 어딘가를 향하고 있는 어지러운 도시였다. 그곳에서 살아간다면 필시 마음 편히 지내지는 못할 지도 모른다.
가이우스도 제국 쪽의 학교로 입학할 기회는 있었지만 그것은 기회로 끝났다. 젠더 문에 있는 잭스 준장이 추천장을 써 준다는 제안을 했을 때 젠더 문과 감시탑 쪽에서 분쟁이 발생했다. 공화국과 제국의 분쟁은 노르드까지 번질 가능성이 높기에 가이우스는 제국의 유학보다 마을에서 가족들의 안전을 지키는 것을 택했다. 그에 관한 후회는 지금껏 한 적은 없었다. 지금은 그저 노르드 밖의 동갑내기인 린을 보며 그 때 유학을 갔더라면 만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가정을 할 뿐이었다.
“노르드는 도력 기기를 별로 쓰지 않는구나.”
“그렇지. 쓴다고 해도 도력 트랙터나 라디오 정도. 그 라디오도 촌장님 댁에 하나 있는 것뿐이지만 말이다.”
그 한 대 밖에 없는 도력 라디오도 작동되는 일은 별로 많지 않았다. 재상이 연설할 때에나 다 같이 모여 그 발표를 들었던 정도. 도력 조명 대신 화톳불을 키고, 도력 자동차 대신 말을 탄다. 제국시보도 배달되지 않아 정기적으로 젠더 문 상점을 이용해야 하고 알약 대신 노르드에 내려오는 민간요법으로 병을 다스린다. 그런 이야기들을 듣던 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제국보다 불편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 사람들도 이곳에 오면 생각이 달라지지 않을까. 그에게서 나오는 말들엔 노르드에 대한 순수한 호의가 들어가 있어 가이우스도 미소 지었다.
예정에 없던 갑작스런 방문자는 조용하고 예의바르며, 좋은 사람이었다.
*
다음날에도 노르드 고원에서는 세찬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새벽의 아스라한 햇살을 쏟아내는 대신 어두운 잿빛을 내보내는 하늘을 바라보며 가이우스는 젖은 초원을 걸었다. 양들이 모여있는 우리로 다가가자 그의 기척을 눈치 챈 양들이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내었다. 지붕을 구성하는 버들가지와 커다란 펠트 천은 다행이도 별다른 문제 없이 제 기능을 하고 있고 주위를 둘러싼 울타리도 흙에 쓸려간 곳 하나 없이 단단히 자리 잡고 있었다. 풀들을 가득 넣어주고 몰려든 양의 수를 확인한 가이우스는 다시 우리의 문을 닫았다. 간이 축사 주변에 파놓은 물길도 큰 흐트러짐 없이 빗물을 흘려내는 걸 확인하고 마을 천막 주위에 난 물길까지 살펴본 가이우스는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왔다.
화톳불을 하루 종일 피웠지만 몰려드는 습기를 완전히 떨쳐낼 수 없는지 꿉꿉함이 천막 구석구석에 남아 있다. 우비를 벗어 물기를 털어내고 안으로 들어선 가이우스는 먼저 침대 위를 확인했다. 나설 때와 마찬가지로 변함없는 모습으로 린이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면 여전히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혈색은 어제보다 훨씬 좋고. 아니 좀 붉을 지도.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자 뜨끈한 체온이 손바닥 밑으로 전해졌다.
“가이우스..?”
감겨있던 눈꺼풀이 천천히 떠지고 연보라색 시선이 천천히 가이우스에게 향하는 걸 그는 새삼스레 바라보았다. 이마에서 손을 떼자 린은 흐리멍덩한 눈으로 어설프게 몸을 일으켰다.
“더 자는 편이 좋을 거다.”
“...괜찮아.”
“열이 나는 것 같은데.”
그 말에 따라 린은 자신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가 금방 손을 뗐다.
“멀쩡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는 린은 정말로 괜찮아 보였다.
“네가 괜찮다면야. 그래도 너무 무리는 하지 마.”
동생들이 열이 났을 때 그의 어머니는 항상 보리차를 끓였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찬장에서 볶아둔 보리를 꺼내며 말한 가이우스에게 린은 그럴게 라고 대답했었다.
린이 온지 이튿날, 천막 안에서 고소한 보리차 냄새가 짙게 익어갈 무렵 린의 상태는 눈에 띄게 나빠져 있었다.
린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챈 건 가이우스가 해가 지기 전 양을 돌보고 돌아왔을 때였다. 불 옆에서 가이우스가 준 책을 보고 있던 린은 어느새 침대 구석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있었다. 책을 보다 잠들었다고 보기엔 옷깃을 그러쥐는 손가락이 도드라져 보였다.
“린?”
가이우스의 말에 린이 작게 반응했다. 여전히 가이우스를 등진 자세로 린이 말했다.
“미안, 속이 좀 안 좋아서.”
작게 흘러나오는 한 마디에 그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이 단번에 느껴졌다.
“린, 잠깐만.”
“오지 마...!”
가까이 다가가는 가이우스의 기척에 린이 비명처럼 외쳤다. 이틀 간 들었던 그의 목소리 중 가장 큰 목소리였다. 가이우스가 멈칫하고 린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가이우스를 바라보는 린의 얼굴엔 당혹감이 가득했다.
미안. 가까스로 나온 한 마디는 가이우스가 이해할 수 없는 사과였다.
“난 괜찮아. 어디 아픈 게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처음 봤을 때 새하얗던 얼굴은 열 때문인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가이우스와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 채로 린이 말했다.
“내 가방 좀 가져다 줄 수 있어..?”
빗소리가 시끄럽게 쏟아진다. 조용하게 넘쳐났던 말소리가 끊긴 천막 안에서 더 잘 들리는 빗소리는 둔하게 그릉대는 하늘의 소리를 전달하고는 기세 좋게 주변의 소리를 앗아갔다. 그런 노르드의 자연에 휩싸인 이방인 린은 여전히 침대에 누워있었다.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지만 몸의 떨림까지는 감추지 못했다.
가이우스가 가져온 가방을 절박하리만치 헤집던 린은 거꾸로 가방을 뒤집었다. 침대에 툭툭 떨어지는 건 도력 통신기, 노트와 필기구, 그리고 군용 식량이었다. 찾는 것이 없는지 한 번 더 빈 가방을 헤맨다. 도력 통신기 외에 다른 물건은 없었냐고 다시 묻기도 한다. 릴리가 주워 온 것은 가방과, 검은 도력기와, 린 뿐이었다.
‘중요한 물건이 없어진 건가?’
린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참담한 목소리가 마른 입술 사이로 새 나왔다.
‘약.’
‘약?’
‘응. 억제제라고 하는 건데.’
고개를 든 린은 불안한 눈초리로 가이우스를 바라봤다.
‘이 마을엔 없어?’
그 말의 주어를 가이우스는 억제제라는 약으로 이해했다.
‘그런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으니 아마... 그 약이 중요한 약이면 젠더 문에 가서...’
‘...거기도 없을 거야.’
가이우스는 문득 어떤 단어를 생각해 냈다. 그것은 린의 초조한 반응과 자신이 꺼낸 젠더 문에서 이어지는 연상이기도 했다. 분명 젠더 문에서 잡화상을 하고 계시는 자츠씨의...
가이우스의 생각은 다 이어지지 못했다. 가이우스는 놀란 눈으로 린을 바라보았다. 린이 방금 한 말은 분명.
‘군 시설에 오메가 관련 약은 없어.’
그리고 방금 자신이 한 말에 쐐기를 박듯 린은 이어 말했다.
‘오메가는 군인이 될 수 없으니까.’
가이우스는 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제 2의 성을 물론 알고 있었다. 알파, 오메가, 베타. 세상에 95%를 차지하는 건 베타. 그리고 소수의 5%만이 베타와는 다른 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매년 나라에서는 노르드 마을에 제 2의 성에 대한 검사를 진행했다. 가이우스는 물론 그의 어린 동생들인 시다도, 토마도, 릴리도. 정김검진에는 제 2의 성 검사 뿐 아니라 교육도 같이 포함돼 있었다. 그 성에 관해서, 그리고 알파와 오메가만이 가지는 유일한 관계인 ‘짝’에 관한 교육들이.
아직 어린 릴리는 알파, 오메가 라는 생소한 단어들이 쏟아지는 말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 했고, 토마는 제법 진지하게 들었던 것 같다. 작은 동생이 그 교육을 열심히 들었던 건 학구열과 더불어 그 나름의 이유도 있었다. 짝에 대해서 안 날, 조금 아쉽다며 베타라고 적힌 검사 결과 종이를 들으며 토마는 웃었다.
‘내가 만약 알파고, 샤르가 오메가였다면... 거기에 우리가 서로 짝이었다면 자츠 아저씨도 좋아하지 않으셨을까.’
샤르는 젠더 문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자츠 씨의 딸이었고 토마와 풋풋한 관계를 키워가고 있다는 건 가이우스를 비롯한 노르드 주민들은 대부분 아는 사실이었다. 토마도 베타, 샤르도 베타라는 결과가 나왔었다.
린은 오메가다. 그리고 그에게 온 것은 아마 발정기. 억제제는 3개월에 한 번씩 찾아온다는 발정을 억누르기 위한 약일 것이다. 공교롭게도 노르드에는 오메가가 없었고 자연히 억제제를 구비해 둘 필요도 없었다.
린의 억제제는 아마 그가 도력기를 떨어트린 초원에 있을 것이다.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약들을 릴리가 보지 못하고 지나쳤으리라. 지금 나간다 해도 비가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초원에서 그 작은 약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검은 하늘이 꿈틀거리는 소리와 그칠 줄 모르는 빗소리가 천막을 감싸 안아도 린의 소리를 숨기지 못했다. 이불이 버르작대는 소리, 어깨까지 뛰는 가쁜 숨소리, 간간히 들려오는 앓는 듯한 신음 소리.
언제나 머무르던 천막은 물건 하나 변한 게 없는데 린 하나만으로 낯선 곳으로 변해버린 것 같았다.
가이우스는 심호흡을 했다. 제일 힘든 건 당사자인 린. 지금 상황에서 가이우스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괜찮다고 시간이 지나면 나을 거라고 한 린의 상태는 시시각각 나빠지는 게 보였다. 이쪽에 관련한 지식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가이우스는 찐득하게 붙어 있는 습기라도 없애기 위해 화톳불에 장작을 더 넣었다. 나무를 집어삼키며 타오르는 불꽃과 린의 그림자가 한데 엉킨다.
더 세진 불길 탓일까, 가이우스는 문득 더위와 갈증을 느꼈다.
제대로 앉지도 못하는 린은 저녁도 마다했고, 가이우스는 혼자서 딱딱한 빵으로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했다. 간간히 린의 상태를 살피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채로 시간은 차츰 깊어져갔고, 결국 그날의 하루는 마감해야 했다.
빗소리와 린의 숨소리와 밤의 어둠이 뒤엉켜 어느새 까무룩 잠들었을 때, 가이우스는 불현 듯 눈을 떴다.
침대에 든 지 대략 한 시간은 지난 듯 했다. 천막을 두들기는 물소리는 여전했고, 불도 잦아드는 낌새 없이 타오르고 있다. 가이우스는 침대에서 급히 일어났다. 린이 없었다.
가이우스는 천막의 문을 활짝 열었다. 고막을 파고들 듯이 비가 쏟아지는 밖은 시커먼 어둠이 가득했다.
“린!”
가이우스는 소리 높여 그를 불렀다. 말도 없이 이 시간에 밖에 나가는 건 위험천만한 행동이다. 아니, 말이 있어도 위험하다. 빗물을 머금은 초원을 말로 달리면 그 말과 함께 저승길을 가겠다는 것과 다름없는 소리였다. 가이우스는 다시 소리를 높였다. 린의 대답은 없었다. 대신 응답이라도 하듯 하늘이 쿠릉댔다. 그 소리에 멈칫한 가이우스는 이내 가만히 기다렸다. 먹구름이 겹겹이 낀 하늘이 다시 꿈틀거리고, 조금 후에 번쩍이는 섬광이 하늘을 갈랐다. 사방을 삽시간에 하얗게 물들인 번개는 노르드의 마을도 일순 비췄고 가이우스는 자신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바닥에 쓰러져 있는 린을 발견했다.
“린.”
가이우스는 린에게 다가갔다. 가이우스. 의식은 있는 건지 잔뜩 쉰 목소리가 작게 그를 불렀다. 밤에 퍼붓는 비는 오싹할 정도로 차가웠다. 가이우스는 린을 끌어안고는 유일하게 빛을 내뿜는 자신의 천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물을 잔뜩 머금은 옷 바깥으로 삐져나온 팔은 처음 린을 봤을 때와 똑같이 흔들렸다.
급한 대로 불 근처에 린을 놔둔 가이우스는 수건을 잔뜩 가져와 물기를 닦기 시작했다. 젖은 옷이 마치 하나인양 몸에 들러붙어 있었다. 옷을 벗겨야 할까. 고민 중인 가이우스를 보는 린의 눈이 천천히 깜박였다.
“열을 식히려고 그랬어.”
가이우스가 하려는 말이 뭔지 아는지 갈라진 목소리로 린이 말했다.
“비가 이렇게 내리니까 좀 가라앉을까 해서.”
“너무 무모하다.”
“그러네.”
대답 속에 뜨거운 숨이 섞여있다. 차가운 물을 진탕 끼얹어서 사라질 열이 아니란 걸 린이 더 잘 알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이상 가이우스는 린을 나무라지 않았다. 괴로운 듯한 숨이 빗소리만큼 이어지고 있었다.
“폐를 끼쳐서 미안.”
“사과는 됐어.”
“하지만.”
린이 말했다.
“지금 아니면 사과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가이우스는 마른 수건으로 린의 얼굴을 닦았다. 천이 지나가고 난 자리에 물기는 남아있지 않지만 연보라색 눈동자엔 열기가 깊어졌다.
“점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으니까.”
아니, 한 가지 생각 밖에 들지 않아서. 정정하는 입술이 떨렸다. 시선이 가이우스에게 향했다가 금방 떨어졌다. 눈을 감아버린 탓이었다. 옆에서 타오르는 화덕의 불만큼 뜨거운 숨이 연달아 흘러나오는 걸 보던 가이우스는 손을 뻗었다. 손등에 닿는 볼의 열기가 천천히 전염된다. 린이 눈을 떴다.
“힘든가?”
“....”
린은 대답 대신 가이우스의 손에 얼굴을 작게 부볐다. 서늘한 체온 때문일까 기분 좋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손바닥에서 전해진 뜨거운 열 덩어리가 머리까지 번진 것 같았다. 가이우스는 천천히 그의 볼을 어루만졌다.
“편해지고 싶다면 도와줄게.”
“편하게...”
연보라색 시선이 가이우스를 흐리게 바라봤다. 문득 그 시선이 깊어졌다고 느껴졌을 때 얼굴을 감싼 손에 체온을 가진 손이 덮어졌다.
“가이우스에겐 계속 신세만 지네.”
“그런 생각은 하지 마.”
“...폐인거 아는데.”
편해지고 싶어.
아주 작게 흘러나오는 소리에 가이우스는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밭은 들숨과 날숨이 드나들던 곳에 서로가 얽혀 들어갔다.
그것은 한 여름 밤의 잠을 설치게 하는 무더위와도 비슷했고, 동시에 양들이 목을 축이던 작은 샘 같기도 했다. 온몸을 잠식하는 건 뜨거운 열기와 녹색이 빳빳하게 자라나는 여름 볕의 갈증이었다. 계속 원하고, 원하고, 원하여 입에 차가운 물이 잔뜩 끼얹어져 목울대를 넘기며 그것을 받아먹어도 부족했다. 린도 가이우스도 비바람에 젖은 옷을 입고 있을 터였는데 그것들이 어디로 간 지에 대한 의문도 사라지고 애초부터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양 자신의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몸과 섞여 갈증을 해소해 나갔다.
가이우스는 오메가와의 관계는 처음이었다. 넓힐 필요 없다고 갈라진 목소리가 말하듯 그곳은 여자와 같이 축축했고, 더 좁고, 뜨거웠다.
생경하게 달라붙는 살의 감각은 머리를 멍하게 하기엔 충분했다. 손이 등을 긁으면서 끙끙거리는 잔뜩 죽인 목소리가 천막 안에 습기처럼 들러붙었다. 괜찮다고, 듣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린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렇게 억눌린 소리는 빗소리와 한데 섞여 가이우스의 청각을 자극했다. 이상하게 그것에 더 흥분했다.
늦게 잠들었음에도 가이우스는 어김없이 비슷한 시각에 눈을 떴다. 그가 태어나고 자라면서 몸에 새겨진 흐름은 쉽게 깨지지 않았다. 몸을 섣불리 일으키는 대신 가이우스는 자신의 옆을 가만히 살폈다. 검은 머리의 소년이 몸을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어제부터 이어지던 괴로운 호흡 대신 고른 숨과 함께 어깨가 조용히 오르내린다. 그에 만족하며 가이우스는 조심히 몸을 일으켰다. 잦아드는 화톳불에 잔가지들을 몇 개 더 넣어주고 침대에 있는 이불을 가져와 잠든 소년에게 덮어줬다. 별다른 뒤척임 없이 린은 여전히 잠을 이어갔다.
양을 돌보고 돌아온 가이우스는 비에 젖은 채 엉망으로 구겨진 옷가지들을 빨래 통에 넣었다. 아침을 준비하고 있으면 조금 후에 린이 부스스 일어났다. 나른한 게 보이는 그에게 데운 양젖을 건네면 린은 여전히 붉은 기가 남아있는 얼굴로 그것을 받아마셨다. 삶은 양고기와 치즈를 바른 빵으로 아침 식사를 마치고, 먹는 둥 마는 둥 하던 린과 그렇게 하기라도 한 것처럼 몸을 겹쳤다. 이번엔 바닥이 아닌 침대에서였다.
침대는 천막을 덮고 있는 천과 맞닿은 곳에 놓여 있어 빗소리가 한층 더 가깝게 들렸다. 가이우스는 자신을 받아내며 헐떡이는 린을 내려다보았다. 밤과 달리 더 선명하게 잘 보이는 그의 땀이 맺힌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짠맛과 가시지 않은 열기가 입술에 묻어났다.
시간은 평소와는 다른 속도로 흘러가고 있었다. 아주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으면서도, 성큼 잡아먹힌 것처럼 어느새 훌쩍 지나가 있기도 했다.
가이우스와 린이 입었던 옷은 깨끗하게 빨려 천막 한 구석에서 자신의 물기를 떨구고 있다. 해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날씨에 빠른 건조는 무리였다. 옷을 입고 있어도 금방 벗어버리거나 벗겨졌기 때문에 노르드의 전통 문양이 아롱진 겉옷만 간단하게 입고 있는 린은 눈으로 자신의 젖은 옷을 좇고 있었다. 그가 입었던 붉은 옷은 죽은 검붉은 색으로 변해 세상에서 가장 피곤한 모양새로 늘어져 있었다.
“노르드에 오메가는 없구나.”
억제제에 대한 얘기와 함께 자연스럽게 알게 된 노르드의 사정을 린이 가만히 입에 담았다. 가이우스도 덧붙였다.
“알파도 없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이우스가 베타인 걸 은연중에 알고 있는 몸짓이었다. 가이우스는 알파를 본 적이 없다. 단, 그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알파는 오메가의 페로몬 향을 느낀다고 했다. 그 향이 알파를 자극하고, 오메가와 동조해 발정을 일으킨다. 그 향은 남부에서 볼 수 있다는 선명한 색을 가진 과일의 향이거나, 설탕을 녹여 꿀에 섞은 것 같은 달큰한 향이라고 했다. 가이우스는는 그렇게 묘사되는 향을 린에게서 느낄 수 없었다. 가이우스는 그저 땀 냄새와 비에 젖은 냄새, 섞여 들어온 풀 냄새, 흐릿하게 느껴지는 도시의 건조한 냄새를 맡을 뿐이었다.
“노르드 고원은 넓지만 마을은 작다. 양과 말이 사람들보다 더 많을 정도니까. 제국만큼 많은 게 있지 않아.”
“제국에도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긴 해. 오메가와 알파는 워낙 수가 적기도 하고. 하지만 제국은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어서. 없어야 할 것들이 잔뜩 몰린 걸지도.”
“그에 비하면 노르드는 너무 없는 편인가.”
“그게 맞는 걸지도 모르겠어.”
알파도, 오메가도 없는 곳. 린의 말에는 지친 기색이 묻어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가이우스가 느꼈던 그의 피로는 오메가와 알파에 관한 걸지도 모른다. 병사는 오메가가 될 수 없지만, 손에 굳은살이 단단히 박일 정도로 검에 익숙하고 군용 도력기를 지급 받아 오더를 처리하는 린은 그에 더한 사정이 있을 수도 있다. 가이우스는 그저 추측할 뿐이다. 그리고 그만뒀다. 당사자가 얘기해 주지 않는 한 그것은 어떠한 진실도 될 수 없다.
다만 떠올린다. 그 많은 제국 사람들 속에서 세상에 단 하나라는 오메가와 알파의 관계인, 린의 ‘짝’도 있을 거라고. 서로를 보자마자 바로 알 수 있다는 운명의 상대. 제국이나, 감시탑을 넘어 공화국이나. 세계 어디에 반드시 있을 것이다. 한 명의 오메가가 있으면 그의 짝인 한 명의 알파가 당연히 있기에.
이제 귀에 익숙해진 빗소리가 다시 귀에 들어찼다. 사람들이 가득한 세계와 단절시키는 이 비는 끝 모르고 쏟아지고 있다. 그 적막한 소리가 어쩐지 계속됐으면 하고 가이우스는 은연중에 바랐다.
하지만 비는 언젠가 개기 마련이었다.
양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가이우스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줄곧 자신 옆을 지키고 있던 온기가 사라져있다. 잦아들어가는 화톳불 옆에서 린이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다 말랐는지 등에 걸쳐지는 옷에 선명한 붉은 색이 가득했다. 문득 뒤 돌아본 린이 가이우스와 눈이 마주치자 계면쩍게 웃었다.
“미안, 깨워버렸네.”
“마침 일어나려던 참이야. 그보다 가는 건가?”
비가 완전히 그친 건 아니었다. 천막을 마구 두들기던 빗줄기는 기세가 훨씬 약해져 가볍게 천막을 톡톡 두들기고 있었다. 문을 열어 밖을 잠깐 살핀 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날도 그나마 풀렸으니까. 영력도 회복된 것 같고.”
마지막 말을 묻기도 전에 열린 문 사이로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빗방울과 함께 들어온 바람은 고원에서 비를 몰고 다니며 부는 바람이 아닌, 갑자기 솟아난 듯한 돌풍이었다. 바람이 멈추자 곧 땅을 둔하게 울리는 커다란 진동이 느껴졌다. 가이우스는 갑작스럽게 벌어지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색하게 웃으며 천막 밖을 나가는 린을 따라 가이우스도 홀린 듯이 그 뒤를 따라나섰다. 그 앞에는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거대한 물체가 있었다. 가이우스 눈앞에 있는 잿빛의 거대한 무언가는 노르드 북부에 있는 오래된 암석과 같이 자리 잡은 것과 매우 닮아 있었다. 린이 보러왔다고 한 거신상. 고원에 반쯤 묻혀있는 그것과 굉장히 흡사한 모습을 한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 물체는 단단히 대지를 딛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당연한 것처럼 린이 서 있었다. 가이우스는 문득 깨달았다. 린의 얼굴이 왜 낯익은 지를.
그가 가끔 들춰보는 제국시보에 그의 사진이 실린 적이 몇 번 있었다. -구국의 영웅, 잿빛의 기사. 린 오즈본.
“신세 많이 졌어. 나중에 이 은혜는 꼭 갚을게. 그러니...”
그렇게 말하고 린은 머뭇거린다.
“나중에... 또 와도 괜찮을까?”
고민할 필요도 없는 대답이었다.
“물론이지. 다음엔 거신상을 안내해 줄게.”
“...고마워.”
기신이 린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는다. 그쪽으로 걸어가던 린이 가이우스를 한 번 돌아보고 고개를 숙였다. 가이우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린이 그 기신에게 빨려 들어가듯이 사라지고 나서 다시금 돌풍이 휘몰아쳤다. 천막을 펄럭이는 바람을 일으킨 기신이 빠르게 사라진다. 먹구름이 낮게 깔린 하늘 아래서 그 작아지는 모양새를 바라본다.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어느 새 아득히 사라진 방문자를 가이우스는 생각했다.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왠지 모르게 그런 확신이 들었고, 비로소 가이우스는 다시 그의 보금자리로 들어갔다.
한 사람이 떠난 노르드 고원에는 여전히 비가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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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린이 7반과 만나지 못했고, 꼭두각시 영웅 노릇을 하고 있다는 설정
2. 노르드고원에 온 건 오더 수행 후 귀환하다가 기습을 받고 정령길로 도망치고, 영력이 떨어지고 같은 사소한 설정도 있습니다만 별로 상관없는 듯...
3. 가이린 짱 어렵네요..........
매번 신세진 카이루님께 드립니다. 평소 쓰던 거나 할 걸..ㅋ큐ㅠㅠㅠ 마음만 받아주시길..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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