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아가없어/이2) 츠카레오 소설본 - 벚꽃이 물드는 시간
사양
앙스타 츠카사x레오 / 동양 AU / A5 / 90p / 인쇄본 / 9,000
부스 위치
동양AU이며
구간인 '달이 머무는 자리'와 이어지는 책입니다!
해당 책을 보셔야 이어지는 흐름이 있습니다.ㅠㅠ 전 책을 보신 후에 보시는 걸 추천드려요.
같은 시리즈인 이 책은 소량 재판할 예정입니다.
(달이 머무는 자리 인포: http://rooas.tistory.com/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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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 이야기
신발 상인이 공들여 만들었을 신은 주인의 발을 품고 앞으로 한 걸음 나선다. 얼어붙은 눈이 녹아 진창이 된 길은 손쉽게 신을 더럽힌다. 갈색 얼룩이 아롱져도 남자는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겨울이 물러나는 구나, 라고 기뻐하며 그 걸음을 더 빨리할 뿐이다. 점점 빨라지는 걸음에 맞추어 다른 이의 걸음도 빨라진다. 큼직한 폭으로 성큼성큼 앞선 걸음을 따라잡으며 들뜬 신에게, 그 신을 주인에게 무어라 한 마디 한다.
“눈 맞은 강아지도 아니고 뭘 그렇게 신난 거야.”
“그 반대입니다, 츠키나가 씨. 봄이 왔어요!”
“네 모양새가 그렇다는 거지.”
어쩔 수 없이 보폭을 맞추는 남자를 보며 스오 츠카사는 웃었다. 그의 호위 무사인 츠키나가 레오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신에게 약했다. 츠카사는 그런 상대의 기색을 읽는 것에 나름의 자신이 있었다. 저 자가 나를 싫어하는지, 호감을 갖고 있는지. 그건 거대한 스오 가의 빛을 조금이라도 쬐고자 줄줄이 찾아오는 이들이 짓곤 하는, 꾸며낸 웃음에 둘러싸여 살아온 덕분이기도 했다. 츠카사가 판단한 츠키나가 레오는 적어도 배경에 눈이 멀어 의도적으로 접근한 자가 아니라는 것과 호위무사로서의 대우에 만족하고 있어 재력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스오 츠카사를 아끼고 있다는 것.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츠카사가 싫어하는 겨울도 이제 한껏 누그러져 뺨에 와 닿는 바람은 상냥하기 그지없다. 이번 겨울은 무던히도 눈이 많이 내렸다. 겨우내 집안에 꼼짝없이 갇혀있어야만 하는 연유에서 츠카사는 겨울을 싫어했다. 하지만 그의 호위 무사가 스오 가에 적을 두고 나서부터는 그런 답답한 계절도 조금씩 좋아지고 있었다. 옷은 훌렁거리는 걸 선호하는 주제에 묘하게 추위를 많이 타는 그와 바싹 붙어 앉아, 화톳불 앞에서 고구마를 구워먹으며 느긋하게 굴던 겨울은 나쁘지 않았다.
‘겨울은 정말 싫어.’
‘맞아요, 책 읽을 때도 손이 시리고 해도 빨리 지지요.’
‘이불에서 꼼짝도 하기 싫어, 사람은 불가능한가? 겨울잠 같은 거 말이야.’
그는 추워지면 아이 같아졌다. 그런 그와 함께 솜이 가득 들어간 두터운 이불을 뒤집어쓰고, 예전이었다면 시답잖다고 평할 그런 아무 것도 남지 않을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긴 겨울밤을 보냈었다.
“정말 동네 꼬맹이들처럼 좋아하네. 아니, 애가 맞구나. 성인식도 치르지 못한 어린 아이.”
레오는 오히려 츠카사를 아이 취급했다. 어쨌든 그는 성인식을 치른 나이긴 했다.
“저도 곧 입니다. 저희 나이차도 얼마 안 나잖아요.”
“그랬나~?”
볼멘소리에 돌아온 건 어쩐지 어른의 여유여서 츠카사는 성인식을 치르면 자신에게도 놀라울 만큼 어른스러운 변화가 올까, 하고 생각을 해보았다. 그건 곧 다가올 일인데도 불구하고 쉽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진창이 아닌 부분을 디디며 둘은 계속 걷는다. 누그러진 바람 위로 회색구름이 떠갔다. 봄맞이 기념으로 장이 선다는 소식에 츠카사는 몇 달 만의 외출을 감행했다. 바람을 쐬는 건 좋은 일이라며 그의 부모도 허락했다. 다만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단단히 주의하라는 말과 함께.
츠카사는 버석거리는 소매를 내려다보았다. 안감에 솜을 넣긴 했지만 츠카사가 평소에 입고 다니던 옷들과는 전혀 다른 질감이 팔을 덮고 있다. 레오와 체격이 비슷한 게 츠카사에겐 정말 행운이었다. 호위를 여럿 붙이는 것보다 레오가 입고 다니는 허름한 옷으로 신분을 숨기고 외출을 즐기는 쪽이 훨씬 즐거웠다. 걸치고 있는 옷에선 온통 레오의 향기가 났다. 소매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는 채신머리없는 행동을 할 수 없지만 옷감이 스칠 때마다 간간히 향이 난다는 걸 깨달은 츠카사는 진중하게 걷는 것보다 조금 더 팔을 휘휘 저으며 걸었다. 왠지 그렇게 걸어야 할 것 같은 옷차림이기도 했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들뜬다. 레오는 평소와 다른 츠카사를 눈치 챈 것 같지만 크게 신경은 쓰지 않는 듯 했다. 봄이 와서, 라는 사실은 모든 걸 너그럽게 만드는 듯 했다.
두 사람 분의 걸음이 진흙 발자국을 남기며 내리막길을 내딛자 조금씩 사람의 소음들이 들려온다. 쥐 죽은 듯이 고요하던 겨울이 거짓말처럼, 잔뜩 모인 사람들이 소란스럽게 봄을 부르고 있었다.
“여기, 전에 왔을 때는 엄청 조용했었지요.”
“겨울 동안 이런 걸 꾹 참고 있었던 거지.”
아직 신기는 이른 꽃무늬의 천을 가볍게 덧댄 가벼운 가죽신, 둥그런 모양에 큰 것부터 작은 것까지 오목하게 담겨있는 나무그릇, 아이들의 손에서 이리저리 움직일 알록달록한 공과 팽이. 시장에는 벌써부터 꽃이 핀 것처럼 각종 색이 넘쳐흐른다. 고요한 함박눈은 더 이상 내리지 않는다. 츠카사는 가지고 온 돈을 생각했다. 무언가를 살 요량은 아니었지만 부모님께 작은 선물 정도는 괜찮아 보였다.
장을 갈 때와 달리 차근차근 물건을 살피니 츠카사의 걸음걸이가 차츰 느려진다. 레오 역시 느긋하게 발걸음을 맞춘다. 다른 곳을 휘휘 보고 있으면서도 츠카사가 사람에 치일 것 같으면 슬쩍 막아주는 배려도 잊지 않는다. 그런 레오에게 감사 인사를 표하던 츠카사는 문득 어느 물건에 시선이 갔다.
진열대 위에 색을 내고 있는 건 빗이었다. 촘촘한 빗살 위로 몸통에 큼직한 붉은 꽃이 우아하게 새겨져 있다. 그 빗을 한 번 보고 레오를 보고 다시 빗을 본다. 시선이 마주치자 레오가 의아하게 츠카사를 쳐다보았다.
“왜?”
“그게... 이 빗을 사드리면 츠키나가 씨의 그 부스스한 머리도 얌전히 정리가 될까 싶어서요.”
“으음, 내 머리 그렇게 지저분해? 그보다 이거 그냥 빗이 아니고 장식용 빗이야. 이렇게 해서 위에 꽂는. 도련님도 보지 않았어?”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칼을 대충 그러모아 위로 치켜 올리는 시늉을 하며 레오가 말했다.
“그러니까 이런 건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하는 선물이라고.”
“...그런가요.”
“이 정도까지 도련님일 줄은 몰랐는데.”
놀리듯이 던지는 말에 츠카사는 대꾸할 마음이 들지 않아 묵묵히 빗을 보았다. 둥근 곡선과 고운 빛에서 무언가 생각이 스며드는데 그것이 뭔지 영 모르겠다. 빗이 아니라면, 다른 걸. 문득 자신이 하고 있는 생각을 눈치 채고 츠카사는 아연해졌다.
“형씨, 사려고? 이쪽은 꽤 비싸. 바다거북 껍질로 만든 건데다가, 여기 정교한 세공 보여? 우리 쪽 할아범이 힘주어 만든 물건이거든. 이런 곳에 내놓을 건 아닌데 간판 같은 의미로 가져온 거야.”
빗 앞에서 움직이질 않으니 눈치를 보는 상인이 그들에게 슬쩍 한 마디를 한다. 레오는 그제사 빗에 눈길을 주며 말했다.
“그래서 얼만데?”
남자는 가격을 말했고 레오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거 하나가?”
“터무니없는 가격은 아니야. 요즘 알잖아, 물가가 말도 안 되게 비싸다고. 우리도 남는 게 있어야 되는데 본전도 못 찾을 판이라니까.”
츠카사는 슬쩍 레오의 눈치를 살폈다. 눈이 마주친 레오가 보일 듯 말듯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의 말이 맞다는 소리였다. 뭐하나 부족한 것 없이 큰 츠카사는 돈의 가치를 잘 모른다. 가격을 들었을 때도 츠카사는 놀라지 않았다. 그저 그게 얼마의 가치가 되는 지를 레오와 상인 사이의 기류로 추측할 뿐이었다.
“그래서, 살 거야?”
레오의 물음에 츠카사는 잠시 고민했다.
“네, 살게요.”
소매 주머니에서 돈주머니를 꺼내자 남자는 놀라다가도 부리나케 고급이라는 그 빗을 포장하기 시작했다.
“어머니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는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여운 아들이 주는 건데 싫어하실 리가 없지.”
변명처럼 한 말에 레오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붉은 빗이 상자에 감춰지고 상자는 다시 천 주머니에 감싸이는 걸 츠카사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단아하게 틀어온 머리에도 저 붉은 빗은 분명 잘 어울릴 것이다.
“저기에 고서를 파는 모양이던데, 어때? 이 날씨에 어떤 책을 무겁게 짊어지고 왔는지 보자고.”
멋들어지게 포장된 빗을 받아들자 레오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츠카사가 빗을 고르는 사이 주위를 둘러보았던 것 같았다.
츠카사는 독서를 좋아한다. 구하기 힘든 고서를 구하는 건 취미이기도 하다. 호위에 아무 도움도 안 될 정보일 텐데 기억해 주는 레오가 대견해 츠카사는 저도 모르게 칭찬의 말을 할 뻔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대견? 그것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내리는 감정의 흐름이다. 표면적으로는 일개 무사일 뿐인 레오는 츠카사의 아랫사람이긴 했다. 하지만 레오에게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와 동등해진 관계에서 그와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레오는 책 읽기를 즐겨하지 않았지만 츠카사의 이야기에는 종종 어울려 주었다. 어디서 나온 견식일까. 그가 지닌 깊이는 츠카사도 종종 놀랄 정도여서 일개 칼잡이의 무식이라고 낮추는 말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었다.
좀 더 알고 싶다. 츠키나가 레오라는 사람에 대해.
지식을 추구하는 열망과도 같은 감정이 레오에게 향한다. 츠카사는 자신의 이런 감정이 낯설었지만 싫지 않았다. 그리고 그와 같은 시야에서 그를, 세상을 보고 싶었다.
“-어딜 한눈팔고 있는 거야?”
시장의 소음 속에서 레오의 목소리가 종소리처럼 울렸다. 눈앞엔 어느새 사람들이 가득 차 있어 그의 옆을 지키고 있던 환한 머리칼이 보이지 않는다.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자 사람을 헤집고 남자가 가까스로 츠카사에게 다가왔다.
“이런데서 미아 되면 큰일 난다고.”
레오가 손을 뻗어 츠카사의 손을 잡는다. 서늘한 공기에 뜨끈한 체온이 손바닥을 데운다.
“잠깐 실례. 저기까지만 가고 나서 놔줄 테니까.”
츠카사의 손을 단단히 잡은 손이 노를 젓듯이 사람의 바다를 헤쳐 나간다. 그 손길에 끌려, 체온에 끌려 츠카사는 멍하니 그를 따라갔다. 짙은 노을색의 머리칼.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가끔 보이는 흰 목덜미. 츠카사는 알 수 없는 열이 몸속에서 번지는 걸 느꼈다. 놓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고. 그렇게 말하려는 걸 츠카사는 간신히 목구멍으로 밀어넘겼어야 했다.
사람들과 이리저리 치이면서도 츠카사는 꽉 잡힌 손과 나풀거리는 머리카락을 보았다. 눈이 녹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봄 때문일까? 그의 모습이 어여쁜 꽃처럼 보였다.
***
“...츠키나가 씨?”
“오- 일어났어? 오늘은 아침이 좀 늦네!”
쾌활한 목소리가 마당을 밝게 울린다. 츠카사는 아직 제대로 뜨지 못한 눈을 다시 비볐다. 어린 하인과 놀아주던 모양인지 굽힌 허리를 펴고 레오가 츠카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부엌에서 음식을 담당하는 이의 여식으로 기억하는 아이는 츠카사를 발견하고 급히 허리를 숙였다. 괜찮다고 손을 젓던 츠카사는 다시 레오를 보았다. 묘한 위화감의 정체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츠키나가 씨 머리...”
“아, 이거? 네가 어제 지저분하다고 해서 묶어봤어!”
지저분하다고는 하지 않았는데요. 반론하고 싶은 걸 참으려 츠카사는 사뭇 인상이 달라진 그를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어깨 근처에서 우쭐거리던 머리들이 대충이나마 잡혀서 오른쪽 어깨에 모아져 있다. 채 묶이지 않은 옆머리가 볼을 간지럽히듯이 내려와 턱 끝에서 대롱거린다. 머리를 묶었을 뿐인데 사람의 인상이 확 변했다.
“어때? 꽤 깔끔하지?”
“그야 그렇긴 한데.”
츠카사는 어물거렸다. 당신의 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소리가 아니었어요. 그저 빗을 선물할 수 있는 핑계를 대고 싶었던 것 뿐. 속마음은 가슴 속에서만 소용돌이친다.
“요기 꼬맹이가 머리끈을 빌려줬어. 이렇게 묶으니까 훨씬 편하네!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는 거 은근 신경 쓰였거든.”
정작 본인은 츠카사의 말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분위기였다.
레오가 다시 허리를 숙여 여자아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머리끈 고마워, 다음에 깨끗하게 돌려줄게.” “츠키나가 님이 가지셔도 돼요.” 아이가 볼을 발그레하게 붉히며 수줍게 말했다. 츠카사는 그제사 아차 하는 기분이 들었다. 빗 따위가 아니라 머리끈을 선물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거라면 레오도 지금처럼 별다른 말없이 받아들였을 텐데. 하지만 그의 머리를 동여매고 있는 건 다른 사람이 건넨 머리끈이다. 분한 마음에 그 끈을 노려보고 있자니 레오가 어색하게 머리를 흔든다.
“도련님 눈엔 별로? 역시 자르는 게 나을까?”
“아, 아뇨.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머리는 자르지 않으셔도 돼요. 제 섣부른 발언이 츠키나가 씨를 신경 쓰게 하신 것 같아서 그게 걱정이라...”
“뭐야, 평소엔 옷 좀 반듯하게 입고 다니라고 잔소리 하더니 갑자기 약한 말을 하는 거야?”
짓궂은 농담에 츠카사가 어쩔 수 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거랑 이건 별개의 문제잖아요? 옷은 여전히 단정히 입어주셨으면 좋겠지만요...”
무엇보다 츠카사는 레오의 머리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다. 불타는 노을 색을 가진 머리가 바람에 휘날리는 것처럼 보기 좋은 광경은 없었다. 자르는 건 아깝지만 묶은 건 괜찮다. 저 머리는 그의 깡총대는 검술에 맞춰 같이 그 추임새를 더할 것이다. 아쉬운 건 그의 머리를 묶고 있는 것이 자신이 준 물건이 아니라는 것.
어째서? 갑자기 든 의문에 츠카사는 고민했다. 어째서 이런 걸 아쉬워하고 있는 건가. 그가 두르고 있는 물건이 꼭 자신이 줘야 하는 건 아니다.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니까 그에게 은혜를 갚고 싶어서?
츠카사는 자신의 집에 찾아오던 글 스승을 떠올렸다. 훌륭하신 분이었다. 그의 가르침은 자상하지만 끈기 있게 어린 말을 모는 모습과 비슷했다. 먼 거리를 달리기 위해 조바심 내지 않고 미숙한 제자에게 하나하나 짚어주는 모습. 츠카사는 생신을 맞은 그에게 마음을 담은 선물을 보냈고 그의 스승은 허리를 굽히며 제자의 선물에 감사를 전했다. 츠카사 말고도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각종 진귀한 선물을 보냈었다. 그 때 츠카사는 그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졌던가. 자신의 선물만 있으면 된다고 욕심을 부렸던가? 아니었다. 츠카사는 오히려 그 일을 흐뭇하게 여겼었다. 역시 그는 덕망 있는 훌륭한 선생이었다며 글 선생을 불러 주신 부모님의 안목에 다시금 감탄까지 했었더랬다.
츠키나가 레오와 글 스승의 간극을 츠카사는 알아차릴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차이는 있었다. 츠카사는 혼란스러웠다. 왜 자신이 이런 고민을 하는 지조차도 알 수 없어졌다.
“도련님, 오늘도 나갈 거야?”
레오가 담장 밖을 가볍게 가리킨다. 츠카사는 화들짝 깨어나 그를 보다가 담장 밖을 바라보았다. 산천초목이 녹고 있을 바깥이 지금은 왠지 끌리지 않았다.
“오늘은 집에 있을게요. 어제 사둔 책도 있으니까요.”
“응, 알겠어. 그럼 나도 오늘 하루는 얌전히 지내볼까.”
“같이 읽으실래요?”
“내키면. 일단은 얌전히 도련님의 방문을 지킬까 하는데, 어때?”
츠카사는 기쁘게 대답했다.
“그러면 저야 감사하죠.”
“감사~? 뭐야, 그 이상한 대답은. 나 대충하는 것 같아 보여도 일단은 호위 무사거든? 네 옆을 지키는 게 당연하잖아.”
“그런가요? 하지만 당신이 말한 그 당연이 저는 기뻐요.”
솔직하게 말하니 반응은 묘연하게 돌아왔다. 어린 아이는 아까보다 볼 끝을 더 발그레하게 물들인 채 츠카사를 바라보았고 레오도 입을 벌렸다가 조금 후에 다문다.
“자각 없이 하는 말이란 게 더 무서운데... 역시 타고난 건가.”
“무슨 말씀이세요?”
“아~무것도 아니야. 스오 가의 대는 끊길 걱정은 할 필요가 없겠다 싶어서!”
츠카사는 인상을 찡그렸지만 금세 표정을 풀었다. 레오가 츠카사를 골려먹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말은 가벼이 해도 속은 그렇지 않다. 그와 함께 한 시간이 쌓이면서 조금씩 알게 된 사실들이었다.
실타래처럼 마구 엉켜가던 마음이 금세 풀어진다. 그가 문을 지키고 있을 방 안에서 독서를 하며 생각을 정리하자. 고민의 당사자지만 그가 옆에 있어 준다는 것에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
츠카사는 문득 어제 시장에서 사오고 모친에게 드린 붉은 빗을 떠올렸다. 목덜미를 가리는 머릿결을 틀어 올려 하나로 쪽지고 그 앞을 장식할 붉은 꽃. 유리세공처럼 반짝이는 녹색 눈을 감싸고 제비꼬리처럼 날렵하게 올라간 눈꼬리, 그 위로 하늘에 번지는 노을에서 가장 깊은 색. 레오에게도 그 빗은 분명 잘 어울렸을 터였다.
(중략)
- 여름 이야기
푸르스름한 새벽의 빛이 하나하나 세상을 밝힌다. 이슬이 맺혀 나란히 늘어선 기왓장, 먼 곳에서 기이한 형태로 가치를 인정받아 스오 가의 정원까지 옮겨진 소나무의 날카로운 잎, 마당의 희게 빛나는 돌길을 차례로 비춘다. 푸른색에서 점점 본래의 빛을 찾아가는 때에 스오 가의 집도 서서히 깨어난다.
불을 지피고, 물을 올리고, 마당의 먼지를 쓸고. 하인들이 부지런히 자신에게 맡겨진 일들을 처리할 때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렸다. 차분히 가라앉은 새벽의 공기를 뒤흔드는 아기의 울음은 계속 이어졌고 황급히 문이 열리고 갓난애를 품에 안은 유모가 나타났다.
“아이고, 아기씨 우시면 안 돼요. 아직 주인마님이 주무시고 계신답니다.”
비단 포대기에 안긴 아이를 어르며 등을 도닥였다. 아이는 쉽사리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유모는 젖을 물려보기도 하고, 기저귀를 살피고, 다시 아이를 어른다. 울음을 넘어서 악쓰는 소리는 더 이어졌다.
“목청도 좋으시네, 우리 아기씨.”
뒤뜰에서 마저 장작을 패던 이가 고개를 들었다.
“유모도 고생이야. 매번 새벽잠을 설치는 것 같더만.”
옆에서 나무를 집어다 주며 다른 이가 대답했다.
“지어미 품이 그리울 지도 모르지.”
“그것도 어쩌겠어. 주인마님은 몸살이 나셔서 본인이 간호를 받아야 할 입장이니.”
혀를 끌끌 차는 와중에도 아이의 울음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하인들은 슬슬 아이보다 유모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주인마님은 아이를 태내에 품었을 때도 자주 앓았으며 그 병은 지금까지 알음알음 이어졌다. 용하다는 의원을 불러도 쉽게 고치지 못했고 자주 병상에 드러눕는 그녀는 병 때문인지 한층 더 날카로워져 있었다. 이러다가 이른 시간에 잠을 깬 그녀가 호통을 치는 일도 시간문제일 때 아이 울음이 멈췄다. 두 하인은 한시름을 놓았다.
“속병이라고들 하더라고. 마음의 병에는 약도 없지.”
“딱한 일이지만 어쩌겠어. 우리들이 어떻게 해볼 문제도 아니고.”
“주인 나리라면 외간 사람과 또 다른 정분을 맺어도 용서하실 텐데... 안 그래?”
“어허, 불경한 소릴.”
그렇게 따끔하게 말하는 남자에게도 진지함은 담겨있지 않았다. 그들이 언제나 주고받는 농담이었다. 주인 나리와 주인마님의 관계는 스오 가에서 큰 비밀도 아니었다.
일 년 전의 한 사건으로 명맥이나마 이어지던 부부간의 금슬은 완전히 깨어졌다. 스오 가의 후계자는 틀어진 부부 관계를 숨길 생각은 없어보였고 그의 부인 역시 더 이상 지아비에게 애정을 구걸하지 않았다. 마치 이것이 원래 모습이라는 양 스오 가는 지금의 모습을 유지했고 이후는 놀라울 정도로 평안했다.
주인마님의 심경을 감히 하인들은 헤아릴 수 없었다. 다만 그녀는 임신을 한 후로 이를 악물며 살아갔고, 그 모습은 몇몇 하인들에게 후계자를 낳아 지금까지 받은 수모를 되갚아 주리라는 한 편의 치정극을 상상하게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대를 이을 수 없는 따님을 낳았고, 출산의 피로와 더불어 속병이 더 깊어졌는지 그녀는 잔병을 얻어 아이를 안는 시간보다 열과 씨름하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도련님은 대쪽 같은 분이라는 걸 빨리 알아차리셔야 되는데 말이야.”
“그럼, 그럼. 그게 남자여도 말이지...”
“어디 시끄러운 새가 있나? 아침부터 수다스러운 소리가 끊이질 않네! 시답잖은 소리들 말고 어서 아침이나 드셔.”
흰 수건을 머리에 동여맨 여자 하인의 목소리에 두 남자가 반가이 고개를 들었다.
“벌써 그런 시간인가? 오늘 반찬은 무엇일꼬.”
도끼를 내버려두고 폴짝 일어나는 모습에 여자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녀는 다시 제 갈 길을 걷는다. 손에 든 상을 엎을 새라 조심해서 반듯하게 이어진 복도를 디디던 그녀는 피곤한 얼굴의 유모를 발견하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언니, 아기씨는 주무셔요?”
“아니, 주인어른이 일어나셔서 돌봐주고 계셔. 쉬어도 된다고 하셔서 잠깐 눈 좀 붙이려고.”
그렇게 대답하는 유모의 눈가에는 잠을 설친 흔적이 여실했다.
“언니 밥 따로 챙겨왔는데.”
“괜찮아. 자고 일어나서 대충 주워 먹을 테니.”
어깨를 연신 주무르며 유모는 자신의 방으로 터덜터덜 걸어간다. 주인 잃은 밥상을 들고 있던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복도에 상을 내려놓았다. 달음질치는 걸음으로 스오 가의 가주님 방 앞에까지 도착한 그녀가 무릎을 꿇은 채로 조심스레 여쭈었다.
“주인나리, 기침하셨나요? 괜찮으시다면 지금 진지상을 올릴까요.”
대답은 가주의 방이 아닌 그 옆방에서 들려왔다.
“지금은 괜찮다. 나중에 사람을 부르도록 할 테니 먼저들 들고 있어라.”
하인은 조바심내지 않고 옆문으로 슬쩍 이동했다. 장지문 너머로 아기의 칭얼대는 소리가 들렸다. 어르는 소리도 뒤이어 들려온다. “예에.” 대답을 하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이가 좋으신데 그것이 금슬이 아니라는 게 아쉬울 따름이고.’
주인나리가 계신 방의 주인은 다름 아닌 호위 무사 중 한 명의 방이었다. 대관절 어느 집이 호위 무사를 주인과 같은 건물에 묵나 하지만 이곳에선 그랬다. 이 나라에서 손꼽히는 대귀족인 스오 가. 세간 기준으론 확실히 이상한 거긴 하겠지만 그녀에겐 이쪽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오히려 도련님이 혼인을 한다는 소식이 더 놀라웠을 정도로.
혼례 이후 태풍은 예견된 것이었다. 지금은 잦아들었지만 그렇다고 쓰러진 나무가 다시 일어나지는 않는 것처럼, 간간히 터지는 불협화음에 몸을 움츠리게 된다. 아랫것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살얼음판이었다.
‘그래도 곧 가시니까는.’
하녀의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그녀는 ‘가는 쪽’이었다.
-
본편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총 네 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구매 의사가 있으신 분은 수량 조사에 참여 부탁드립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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