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온/페06] 츠카레오 신간 수량조사 받습니다.
개화! 앙상블 페스티벌에 나왔으면 하는 츠카레오 소설본 인포입니다!
(표지는 카이루님이 그려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ㅠㅠㅠㅠㅠ)
사양
A5 / 90p / 전연령 / 1만원
현재 수량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구매 의사가 있으신 분은 수량조사에 참여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본 책은 오메가버스 세계관입니다. 이에 따라 엠프렉(남자 임신) 묘사가 있습니다.
또한, 강1간 소재를 사용하니 이 역시 주의 부탁드려요. 이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없으나, 만일을 위해 샘플 확인을 부탁드립니다.
* 오메가버스 세계관. 엠프렉 요소 있음.
* 샘플엔 나오지 않지만 2세가 등장합니다.
* 웹에 올렸던 오메가버스 글에서 이어집니다.
「이런 얘기 별로 전화로 하고 싶지 않았는데.」
내가 지금 해외라서 말이야. 이즈미에게서 걸려온 첫 마디는 츠카사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내용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목소리 저변에 깔린 불쾌함이 예사롭지 않았다.
“분명 파리로 가셨다고 하셨죠. 그쪽은 아직 한밤중일 텐데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따라서 츠카사는 최대한 자신의 목소리를 갈무리하여 정중하게 물었고 대답을 기다렸다. 이즈미는 잠깐의 침묵 속에 이야기를 말했다.
「요즘 임금님 소식 들었어?」
“아뇨, 요즘은 통... Leader의 신곡이 나오고 있으니 살아있다는 것 정도네요.”
「그래?」
창 밖에서 아침 새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있으면 출근 시간이지만 아직 이즈미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고 씹어뱉듯이 이즈미가 말했다.
「임금님 임신했대.」
“네?! Leader가 언제 결혼하셨지요? 아내 분이 벌써...?”
「아니, 결혼도 안했고. 임금님이 임신 했다고.」
“무슨 소릴... 세나 선배, 한 잔 하셨나봐요? 이 기가 막힌 술주정은 내일이면 기억 못하시겠지만 그래도 말씀 드리자면 Leader는 남자예요, 세나 선배.”
낭만적인 파리의 밤은 모르겠지만 평일 일본의 아침에 듣기엔 재미없는 농담이었다.
「뭐야, 카사 군. 몰랐어? 임금님 오메간데.」
“...세나 선배가 말씀하시는 임금님과 제가 아는 Leader가 다른 사람인가요? 저 그 사람이랑 학창 시절 보냈는데요.”
「진짜 몰랐나 보네. 임금님 오메가 맞아. 특이체질이라 페로몬에 향이 거의 안 나서 그렇지.」
“아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알파인 제가 오메가를 못 알아볼 리가 없지 않습니까? 밤샘은 물론 같이 합숙도 하고 그랬잖아요?”
「나도 이 시간에 별로 농담 따먹을 생각은 없거든? 거의 무색무취 수준인데 그걸 믿고 제대로 약도 안 챙겨먹어서 내가 잔소리를 얼마나 했었는데. 카사 군이 둔한 것도 있는 것 같은데 임금님 오메가 맞고 의심가면 뒷조사라도 해보던가. 아니, 본인에게 물어봐도 바로 대답할 테니 본인한테 묻던지.」
츠카사는 핸드폰을 들어 발신자의 이름을 확인하고 손목에 감긴 시계를 보고 자신의 뺨을 꼬집었다. 그 무엇도 지금은 출근 직전의 아침이란 걸 알려주었지, 꿈이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카사 군 오메가 싫어했지?」
“그건 그렇습니다만...”
「어쨌든 카사 군은 아니란 거네? 괜한 데를 짚었잖아. 완전 짜증나.」
“맙소사, 제가 생각한 그런 어림짐작은 아니시겠죠? Leader가 오메가란 것도 충격이지만 세나 선배가 저에게 그런 오해를 하신 것도 충격입니다. 저는 Leader를 존경해 왔다고요!”
「아아, 알고 있어! 혹시 한 거니까. 카사 군 문제가 아니라 임금님은 카사 군을....」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아까보다 더 짜증이 치민 목소리는 다른 말을 했다.
「몰랐던 게 잘 된 걸 수도 있네. 괜히 리더가 오메가라고 반발하는 제 2의 저지먼트 같은 일들이 스킵 됐으니까. 동경의 리더를 내가 방금 부쉈지만 어차피 알려질 일이었으니 상관없지? 그럼 끊는다.」
“자, 잠시 만요 세나 선배!”
츠카사가 외치든 말든 저 건너편의 남자는 매정하게 전화를 끊었다. 저쪽은 한밤중이라는 걸 되새기며 메신저를 켰고 폭탄을 던진 이즈미에게 연달아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
츠카사는 어정쩡한 기분으로 아파트 복도에 서 있었다. 돌아갈까. 여기에 오면서 수십 번은 한 생각이었다. 역시 메신저를 한 게 잘못이었나. 하지만 그런 중대소식을 듣고 아 그렇습니까 라고 넘어갈 정도의 얄팍한 관계는 아니었다. 적어도 츠카사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레오와 연락이 끊긴 건 거진 일 년이 다 되가는 시기였다. 사실 그와 일대일로 대화를 나눈 적은 거의 없다. 메신저에서도 나이츠 멤버가 모인 단체방에서 이야기를 하고 레오에게 따로 메시지를 주는 경우는 그의 신곡을 들은 감상 정도였다. 그에 대해 레오가 대부분 보내는 건 땡큐! 라고 외치는 스티커를 보내는 경우나 짧은 메시지, 가끔은 대답을 안 할 때도 있다. 알고 있었다. 그는 학생 시절에도 핸드폰을 거들떠도 보지 않는 사람이라는걸. 츠카사가 보낸 마지막 메시지 역시 신곡에 대한 감상이었고 그 메시지는 읽음이 떠있지만 답장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언제였더라. 단체방에서도 레오의 대화를 본 건.
몇 달 전의 시간에서 멈춰있는 메신져를 보다가 츠카사는 화면을 껐다. 전화는 퇴근하고 나서 걸어보았지만 전혀 받지 않았다. 어느 푹신한 코트 주머니에서 자신을 챙기지 않는 주인 덕분에 날씨에 어울리는 동면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손에는 과일 바구니. 문병은 아니지만 어쨌든 임신은 축하할 일이니까.
-그럼 아이 아버지는요...?
-없대.
-그건 말이...
-당연히 안 되지. 지가 동정녀 마리아도 아니고 저절로 잉태했겠어? 어디서 무슨 꼴을 겪은 건지, 한심한 짓거리를 한 지 모르겠는데 아이 아빠는 없다고 잡아떼고 있는 걸 보니 혼자 끙끙거리고 있겠지.
-세나 선배는 역시 리더를 잘 아시네요.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그 멍청이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데 아쉽게도 여기 해외고. 장기 로케니까 당분간은 일본에 못 가. 그러니까 카사 군이 가봐.
-어째서 그렇게 얘기가 되나요?!
-나루 군은 당분간 스케줄 꽉 차 있고, 쿠마 군도 자는지 연락이 안 돼. 그러니까 카사 군이 가. 물어보고 싶은 거 실컷 물어봤으니 책임 져야지.
-다른 사람에게 깊이 관여한다는 건 그 사람의 전장에 발을 들인다는 건가요....
-그건 무슨 소리?
-들었던 말이에요. 이 이야기의 당사자라는 게 아이러니지만. 알겠습니다. 퇴근하면서 찾아뵐게요.
-주소 알려줄게. 나대신 많이 혼내 주라고.
세나와 주고받았던 메신저를 다시 떠올리며 츠카사는 손에 잡힌 과일 바구니를 본다. 정말로 축하할 일인가? 아이 아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물론 본인은 알고 있겠지만 다른 사람에게 얘기를 못한다는 것부터가 그리 좋은 사정은 아닐 거라는 건 뻔했다.
오메가가 싫다는 건 귀여운 표현이다. 츠카사는 오메가를 증오한다.
알파는 오메가와 엮이는 게 좋다고들 하며 둘을 한 쌍으로 표현하곤 하지만 오메가와 엮이는 자신을 상상만 해도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알파라는 성이 발현하고 나서부터 츠카사는 드높은 스오 가문에게 따라오던 각종 위협에 성적인 접근까지 추가해야 했다. 어떤 입발림 소리보다도 츠카사를 쓰러트리고 몸으로 강제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그에게서, 스오 가에게서 무언가를 얻어내기 쉽다는 걸 어떤 이들은 잘 알고 있었다. 알파는 오메가에게 약할 수밖에 없다. 그 빌어먹을 페로몬이란 것 때문에 이성은 쉽게 날아가기 일쑤다. 유혹하자고 마음먹으면 곧바로 코끝을 스치는 단내, 노골적인 접촉, 동시에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역겨움. 그가 아는 오메가는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회적 약자 대신 이런 기분 나쁨 덩어리들의 정의였다. 적어도 츠카사에게 다가오는 오메가들은 그랬다.
성인이 되고 나선 접근이 더 은근해졌다. 기회를 만들어 접근하고, 유혹한다. 본능에 호소하는 그 작태들에 본능과 떨어진 이성은 더욱 진저리를 친다.
어느 날의 사교 파티. 츠카사는 소위 강간을 당할 뻔 했다. 몇 개월 전의 일이다. 그의 혐오감이 구체적인 형태를 지닌 모습을 보며 츠카사는 다시 확인했다. ‘봐봐, 맞잖아. 이것들은 역시 혐오스러운 존재야.’ 라고.
그 정의가 자신의 리더와는 쉽게 연결되지 않는다. 이즈미에게 소식을 들은 지금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그 리더가 오메가란 사실이.
문 앞에서 오가는 심호흡 속엔 긴장도 섞여 있다. 괜찮아, 리더는 리더다. 오메가지만 그거와는 별개다. 그러니 괜찮다. 왕을 모시는 기사 츠카사와 오메가를 혐오하는 알파 츠카사가 마구 섞여든다. 어느 쪽도 모두 스오 츠카사였다.
최대한 거부감을 억누르며 츠카사는 초인종을 눌렀다. 대답은 없었다.
예상한 바였다. 그는 츠카사가 집으로 가는 중에도 계속해서 전화를 받지 않았었다. 문을 두드려보던 츠카사는 고민에 빠졌다. 어쩌면 잘 된 건지도 모른다. 갑작스레 찾아간 것도 예의 없는 행동이니까. 하지만 내버려둬도 이 사람 괜찮은 건가. 혼란스러워하며 츠카사는 문 옆에 과일 바구니를 놓았다. 문 옆으로 새하얀 빛줄기가 가느다랗게 새어나온다. 츠카사는 무심결에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문은 열려 있었다.
변함없이 조심성 없는 그의 모습에 츠카사는 혀를 차며 안으로 들어섰다. 제대로 문을 닫지 않았는지 도어락이 잠기지 않은 상태였다. 문을 제대로 닫자 그제야 삐릭 하며 작동을 한다.
“실례합니다, Leader. 스오 츠카사예요.”
현관에서 목소리를 크게 내지만 답은 없었다. 망설이다가 츠카사는 신발을 벗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집은 따뜻했다. 거실과 방 하나. 거실은 주황색 간접 조명이 은은하게 켜져 있고 덜 닫힌 방문은 불빛을 환히 내보내고 있다.
“Leader?”
츠카사는 방문을 열었고 잠시 이곳이 레오의 방인지를 의심했다.
집 주인은 그곳에 있었다. 성인 남성을 감싸고도 남을 안락의자에 앉아 남자는 자고 있었다. 커다란 헤드셋을 끼고 있고, 그 둥그런 라인을 따라 미끄러진 주황색 머리칼이 한쪽 어깨에서 엉성히 묶여 있다. 두 눈은 감겨 있고 손은 허벅지 위에 늘어져있다. 무릎 담요를 덮고 있지만 누가 봐도 임신했다고 깨달을 만큼 부풀어 오른 배. 언제나 방방 뛰며 이곳저곳에 낙서를 휘갈기던 레오가, 스테이지에서 누구보다 가볍게 움직이던 그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그것은 이질적으로 보였다. 츠카사는 숨을 삼켰고 봐선 안 될 것을 본 것처럼 급히 시선을 돌렸다.
사람 뿐 아니다. 츠카사는 이전에도 레오의 집에 찾아온 적이 있었다. 아마 나이츠 모임이 있었을 때였을 것이다. 이게 사람 사는 집이냐고 이즈미가 잔소리를 했던 그 때와 비교하면 엄청 생활감이 붙었다. 가구가 덜 들어온 모델 하우스 같았던 집을 선명히 기억한다. 지금은 바닥엔 도톰한 러그도 깔려있고 전기스토브가 노랗게 타오르며 텅 비었던 벽엔 책과 음반이 꽂힌 책장도 들어서 있다. 아무 무늬 없이 하얗기만 했던 벽도 난색의 벽지가 발라져 있고 벽에는 그림이 담긴 액자가, 테이블에는 조그만 화분이 딱 붙어 있다. 그 따뜻한 공간 중심에서 부른 배를 안고 고요히 잠들어 있는 남자.
최소한의 인테리어 의지조차 없던 집이 이렇게까지 바뀐 것에 츠카사는 경이마저 느끼고 있었다. 남자를 변화시킨 건 아마 뱃속에 있는 아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다행히 츠카사는 그런 레오를 보고 생리적인 거부감은 들지 않았고 알파를 자극하는 달큰하고 기분 나쁜 향도 나지 않았다. 그저 이런 그가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 츠키나가 레오라는 사진에 매직으로 성의 없게 칠한 낙서처럼 임신은 레오에게 지독히 어울리지 않았다.
츠카사는 레오 근처로 다가갔다. 숨소리가 일정하다. 의자 근처에 떨어진 건 노트와 펜. 헤드셋 사이로 희미하게 들리는 음은 클래식 같았다. 망설이던 츠카사는 조심스레 레오의 어깨를 건드렸다.
“Leader.”
꾹 감겨있던 남자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감춰진 녹색이 드러나면서 시선이 멍청히 앞을 보다가 츠카사와 마주쳤다. 아주 작게 클래식이 들린다. 풀린 눈으로 츠카사를 멍하니 보는 그 모습에 츠카사는 왠지 모르게 그와 계속 시선을 마주했다. 천천히 두 눈을 깜박이던 레오가 아리송한 얼굴로 츠카사를 보고 손을 뻗었다. 얼굴에 닿는가 싶던 손가락이 멈추더니 주춤주춤 뒤로 빠진다. 그의 입은 벌어져 있지만 말은 나오지 않는다. 츠카사가 대신 손을 뻗었다. 움츠린 남자 귀에 걸린 헤드셋을 빼주었다. 클래식 소리가 아까보다 조금 더 크게 들렸다.
“오랜만이에요.”
“―잠깐, 잠깐. 기다려 봐. 망상할 테니까. 우선 이건 꿈이 아닌 거지? 꿈이어도 상관없지만.”
가라앉은 목소리가 잘도 떠든다.
“꿈은 아니에요. 갑작스레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전화를 드리긴 했는데 받질 않으셔서.”
“아, 핸드폰. 나 당분간 일 받지 않으니까 내버려뒀어. 어딘가에 있겠지. 이것도 추리해야겠네. 하지만 그것보다 스오가 어떻게 여기에?”
남자는 신나게 말하고 있지만 눈꼬리가 날카롭게 올라간 눈은 웃음의 기미 없이 츠카사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세나 선배에게 소식을 들었어요. 대신 상태를 봐달라고.”
“아아, 그렇지. 세나구나. 그렇다는 건 내 꼴을 알고 보러 왔다는 거네.”
“꼴이라뇨. 일단은 경사스러운 일이잖아요.”
츠카사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자신이 말하는 게 정답인지는 알 수 없었다.
레오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서 남자는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따뜻한 공기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몸은 어떠세요?”
“...괜찮아. 찾아올 만한 일도 아니고.”
레오가 츠카사를 반가워하지 않는 건 명백했다. 그는 담요를 추슬러 다시 배를 덮었고 시선은 여전히 발 근처에 있는 노트에 고정하고 있었다. 어쩐지 그가 배를 숨기려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희 되게 오랜만에 보는 거죠. 진작 찾아왔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레오를 본 지는 일 년이 넘어갔다. 나이츠 선배들과 만났던 것도 몇 개월 전. 그것도 좋은 일로 본 게 아니다. 납치 및 강간 미수 사건에 휘말린 츠카사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문병을 위해 나이츠 멤버들이 찾아왔었다.
츠카사를 윽박지르는 과정에 생긴 타박상도 입원의 사유가 됐지만, 범인들이 강제로 먹인 약이 가장 문제였다. 러트 사이클을 억지로 유도하는 약은 정상 경로로 유통되던 것이 아니었고 몸의 밸런스가 엉망이 된 츠카사에게 입원치료가 선고되었다. 문병 온 멤버 중에 레오는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오메가인 그를 배려한 선배들이 미리 말을 해뒀을지도 모른다. 리더는 츠카사의 소식을 모르진 않았다. 평소의 부재와 달리 다른 멤버들이 병문안 오기 전 그에게 먼저 안부 전화를 남겼기 때문에.
“그렇지, 오랜만이지. 유감스럽지만 나는 잘 지내고 있어. 세나한테는 잔뜩 혼났고... 물론 그걸로 끝나면 안 되지만. 일단은 아이를 낳는 게 먼저라고 생각해서.”
잔뜩 꾸중을 들은 아이처럼 그는 말했다. 배가 저만큼 부를 때까지 비밀로 했다. 그 이즈미가 ‘참 잘했어요’라고 넘어갈 리도 없고 임산부라는 배려 대신 무시무시한 잔소리를 했을 것이다.
세나 선배는 혼내라고 했지만 츠카사는 학원에 있던 시절처럼 그에게 했던 수많은 잔소리는커녕 심지어 안부 인사조차 힘들었다. 리더였던 남자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던 아이를 낳는다 같은 말에 기겁하고 있다. 무대 위의 당당하던 그가, 아무데나 펜을 들이대며 작곡하던 그가, 코타츠와 결혼한다던 그가 계속 머리를 스친다. 온갖 츠키나가 레오에서 임산부는 제대로 연결도 되지 않는다. 꿈이라도 꾸는 기분이었다. 배 밑에 숨겨져 있던 공을 집어 던지며 서프라이즈 끝! 이라고 외쳐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오히려 그걸 바라고 있었다.
“찾아와 준 건 고마워. 별로 좋은 추억도 안 남겠지만.”
레오는 의자에 여전히 앉은 채로 말했다. 거동이 불편한 걸지도 모르겠다. 갈팡질팡하던 츠카사는 과일 바구니를 들어보였다.
“저 선물을 좀 사왔는데 Leader는 힘들어 보이시니 제가 대신 냉장고에 넣을게요.”
“스오가 그대로 집에 가져가도 괜찮아.”
“일단 선물이에요. 꼭 축하 선물이 아니더라도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빈손으로 올 걸 그랬다. 누가 봐도 명백한 임신 축하 선물을 수습하며 츠카사는 후회했다. 무언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츠카사는 발걸음 소리도 죽이며 방을 나섰다.
조금 헤매어 거실에 불을 켜고 냉장고를 열었다. 생각보다 휑하지 않은 냉장고에 츠카사는 과일들을 퍼즐 맞추듯 넣어 갔다. 냉장고 문을 닫자 짧은 도피는 금방 끝이 났다.
방에 곧바로 들어가는 대신 츠카사는 괜히 집을 살폈다. 무언가 많이 들어섰다. 그중 눈에 띄는 건 거실 구석에 상자도 뜯지 않은 아기 용품들이었다. 상자 겉면에 쓰여 있는 아기 침대란 글자에 놀라고, 그 옆에 있는 부드러운 색의 작은 욕조를 발견하고 나란히 늘어선 젖병까지 눈으로 훑고는 숨을 집어 삼킨다. 츠카사가 모르는 사이에 레오는 차근차근 아기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먼 이야기도 아닌 그가 지금 배에 품은 아기의. 이건 장난도, 몰래 카메라도 무엇도 아니었다. 현실이다. 갑자기 찬물을 맞은 기분이었다.
츠카사는 다시 방으로 들어섰다.
“세나한테는 적당히 말해줘. 분명 귀국하자마자 들이닥칠 테니 의미는 없겠지만. 그럼 잘 가.”
레오는 여전히 츠카사 쪽을 보지 않았다. 손을 뻗어 스토브의 온도를 더 올리고 다시 담요를 끌어당겼다.
“네. 오늘은 이만 들어가 볼게요. 내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레오가 바로 고개를 들었다. 녹색 눈에 사나운 기색이 가득하다.
“왜? 세나가 시켰어? 세상에서 제일 쓸모없는 친절이야! 스오가 그럴 필요도 없고 세나도 마찬가지야. 동물원의 우리는 실컷 들여다봤지? 이제 문 닫을 시간이야. 손님 여러분은 어서 퇴장해 주시고 오늘부로 동물원은 문을 닫습니다. 그러니 다신 찾아오지 마.”
“그렇게까지 밀어내실 필요는 없잖아요. 저는 당신을 도와드리고 싶어서...”
“스오가 사람 좋은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건 도를 넘었어. 후회하지 말고 네 할 일을 해. 시간은 유한해.”
“Leader에게 쓸 시간 정도는 있어요.”
“그 정도로 시간이 남아돈다면 사회 정의 구현은 어때? 태연히 돌아다니는 범죄자를 검거한다거나.”
“제가 이러는 건 당신에게 있어서 쓸데없는 참견이겠지만, 봐요. 지금 없잖아요. 아이의 아버지가.”
불만을 토해낼 것처럼 굴던 레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츠카사의 안에서도 이런 참견을 하는 것이 정말 옳은 일인지 몇 번이나 묻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츠카사는 그런 목소리들을 일절 무시했다.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나요?”
“.......”
“억지로 물을 생각은 없어요. 도덕적인 문제를 따지자는 게 아니니까. 여기에서 Leader의 수발을 들어주거나 집안일을 도와주고, 급한 일이 생겼을 때 바로 대응할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예요.”
“그걸 스오가 할 필요는 없어.”
츠카사를 바라보는 레오는 겁먹은 듯이도 보였다.
“난 혼자서도 괜찮아. 진짜야.”
“왜 그렇게 혼자서 하려고 하세요? Leader의 집은 제가 회사 가는 길에 있으니 쉽게 들릴 수 있어요. 하루 종일 당신 곁에 있는 건 저도 불가능하고 당신도 원하지 않겠죠. 그저 가끔 들려서 상태를 보게 해 주세요. 저희들이 남남이라고 부를 그런 먼 사이도 아니잖아요. 연락은 뜸하더라도 Knights의 유대는 계속 이어졌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Leader?”
츠카사는 레오의 안색을 살폈다. 그는 여전히 츠카사와 눈을 마주치고 있지만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츠카사는 그가 고개를 끄덕이기를, 혹은 긍정의 의미를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다른 말이었다.
“강간이야, 스오.”
츠카사가 숨을 집어 삼켰다. 레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니 아이의 아버지는 없어. 세상의 축복을 받으면서 태어날 아이가 아니니까. 낳기로 마음먹었으니 낳는 것뿐이고. 누구 손을 빌릴 필요는 없어. 내가 피치 못할 사정이 되면, 그 때에만. 하지만 지금은 그런 때도 아냐.”
“...경찰에 신고는 했어요?”
레오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누구인지는....”
츠카사는 급히 말을 집어먹었다. 실언이다. 꺼낼 말을 한참을 혀로 굴리던 츠카사는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병원에 가기엔 늦었나요?”
저 배 안에 있는 아기에게 닿지 않기를 바라며 한 말이었다. 레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채는 게 늦었어.”
숙인 고개에 따라 힘없이 늘어진 주황색 머리가 암막처럼 그의 표정을 가리고 있었다.
츠카사는 입이 마르는 걸 느꼈다. 강간이라는 두 글자를 들은 이후로 불온하게 뛰던 심장이 사그라들지 못했다. 그런 자신의 상태보다 중요한 건 눈앞의 사람이었다. 그의 리더는 기사의 드높은 긍지를 가지고 있지만 어째선지 그 긍지가 본인에게 적용되지 않을 경우가 종종 있었다. 자신이 만든 노래는 세계의 보물이라며 칭찬하다가도 츠키나가 레오 그 자신에게는 한 걸음 물러나있다. 그 이상한 에고가 지금도 적용돼 있는 게 아닐까. 강간범을 증오하는 것보다 무거워진 몸으로 자책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츠카사는 그를 향해 무릎을 굽혔다. 밑에서 그를 올려다보자 시선이 마주친 녹색 눈이 움찔했다.
“Leader도 아시지만 저도 강간을 당할 뻔했어요. 당시 저는 운이 좋아서 다른 사람을 부를 수 있었고, 당신은 운이 나빠서 도움을 요청하지 못한 거예요. Leader는 아무 잘못도 없어요. 나쁜 건 강간을 한 사람입니다.”
흔들리던 녹색 눈동자가 점점 차분해졌다. 츠카사가 서툴게 꺼내는 위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당장이 아니라도 좋아요. Leader가 범인을 잡길 원하시면, 이 츠카사가 힘이 되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 전까지는 아주 조금이라도 괜찮으니 의지가 되고 싶어요. 너무 건방진 말일까요?”
레오의 입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긍정도 부정도 없다. 그가 알고 있던 밝은 색보다 훨씬 어두워진 색의 눈으로 츠카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츠카사는 자리에 일어섰다. 시선이 쫓아오다가 끊어진 실처럼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일 올게요.”
“...나는 스오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널 위해서야.”
“제가 리더에게 해드릴 일이 없다면 바로 돌아갈게요. 얼굴만 비춰주세요. 당신이 괜찮다는 걸 알 수 있으면 돼요.”
어디서 이런 마음이 솟는지 츠카사도 알 수 없었다.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을 가지고 호전적인 모양새로 날뛰던 그가 잔뜩 약해진 모습을 봐서 그런 걸까. 세계의 약자가 되어 주위의 전부를 밀어내는 모양새에 어째선지 더 손을 잡아주고 싶어졌다.
츠카사가 집을 나설 때까지도 레오에게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침묵하는 그를 뒤로 하고 문을 닫았다. 따뜻한 요람은 가볍게 바깥 세계와 다시 차단되었다.
숨을 들이마시자 차가운 공기가 한가득 들어왔다. 츠카사는 이번엔 깊게 숨을 내뱉었다. 흰 숨이 겨울과 섞여 들어가는 걸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레오에게 향하는 감정과 행동이 세간에서 흔히 말하는 싸구려 동정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못 본 척 할 수는 없었다. 츠카사가 믿는 기사도 정신은 그것이 옳지 않은 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니 움직인다. 그에게 다가간다. 츠카사는 그러기로 다짐했다.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에 뜬 세나 선배라는 글자를 보며 츠카사는 이 집을 오기 전의 자신을 생각했다. 그 때는 분명 가기 싫어서, 어떻게든 이곳을 빨리 빠져나갈 궁리를 했던 것 같은데. 이상한 나라에 뚝 떨어졌다가 급작스럽게 현실로 끌려온 것 같다. 그럼 시계 토끼는 세나 선배? 앨리스의 기분을 느끼며 츠카사는 레오의 상태를 궁금해 하는 이즈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다음 날, 츠카사는 예고대로 레오의 집을 찾았다. 저번과 달리 문은 굳건히 닫혀 있었으며 츠카사는 장기전을 각오하며 초인종을 눌렀다. 오늘 들여보내주지 않으면 다음날로. 장기전을 각오하고 있었지만 문은 쉽사리 열렸다. 날이 춥지, 라는 여상한 인사와 함께.
“있는데, 철분제. 많아.”
서랍에 들어있는 흰 플라스틱 통들을 확인한 츠카사는 어색하게 손 안에서 네모난 상자를 쥐었다.
“임산부에게 꼭 필요하다고 들어서 챙겨왔는데... 준비 안하실 리가 없겠네요.”
“응. 난 임신 사실을 어제 들은 게 아니니까.”
“그렇죠. 저, 괜찮다면 혹시 부족할지도 모르고....”
궁색한 변명을 우물거리던 츠카사는 선물 아닌 선물을 내밀었고 레오는 얌전히 그것을 받았다. 흰 상자가 서랍 깊숙한 곳이 아닌 식탁 위에 올라가는 걸 보니 괜히 기쁘다.
이즈미에게는 부탁한다는 말을 들었다. 카사 군도 바쁜 건 알지만 시간이 되는 한 봐줬으면 좋겠다고. 연말이 다가오고 있어서 업무도 켜켜이 쌓여가는 현실이라 츠카사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야 했다. 그런 노력을 아는지 어쩐지 츠카사가 찾아올 때마다 레오는 매번 문을 열어줬다. 메신저에는 츠카사의 방문 알림 메시지가 갱신됐다. 읽음 표시는 되지만 답장은 없다. 그래도 문은 굳게 닫히는 대신 초대 받지 않은 손님에게도 으레 열렸다.
“아들이에요? 딸이에요? 병원에서 안 알려주나요...?”
“원래 알려주는 게 아니라고 했지만... 이런 말은 하더라고. 파란색이 잘 어울리겠다고.”
“아들이군요!”
레오가 고개를 끄덕였고 츠카사는 머릿속에 그 정보를 새겨 넣는다.
둘 사이에는 조근거리듯 잡담이 오가곤 했다. 주로 츠카사가 말문을 열었고 레오는 그에 대답했다. 그런 둘 사이로 클래식이 흐른다. 헤드폰에서 잡음처럼 들리던 것이 거실의 스피커를 통해 잔잔하게 집안을 감돌았다.
레오는 방 안의 안락의자 대신 부엌의 좁은 의자에 앉아 있으려 해서 언제나 츠카사가 말려야 했다. 그는 이상하게 고집스레 버텼고 겨우 얻은 타협안이 거실에 있는 작지만 폭신한 의자에 앉는 거였다.
남자는 잔뜩 부른 배를 힘겨워 하면서도 츠카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일은 없었다. 사실 츠카사가 없이도 그는 잘 버텨왔었다.
레오는 이 집의 유일한 방문자가 오면 언제나 체크무늬 담요를 배까지 끌어 덮고는 이것저것 할 일을 찾아 헤매는 츠카사를 가만히 바라보곤 했다. 조용하게 찌르는 시선에 문득 뒤 돌아보면 그와 잠깐 눈이 마주쳤지만 녹색 눈은 이내 다른 곳으로 스르륵 시선을 옮겼다.
“다음에 또 올게요.”
“오지 않아도 괜찮아.”
이 말들은 츠카사와 레오 사이의 작별 인사말 같은 거였다.
그의 거부에도 익숙해져 있을 즈음, 츠카사는 임신과 육아 관련 서적을 찾아보는 게 취미가 되었다. 주위에 아이가 있는 회사 동료들에게 물어보고 필요한 물품과 어떻게 도와주는 게 도움이 됐다 같은 조언을 듣기도 하니 어느새 회사에 이상한 소문이 도는 듯 했다. 츠카사는 굳이 찾아가 정정하지 않았고,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직접 물어오는 사람에게만 지인이 임신했다는 진실을 알려주었다.
“예전에도 느꼈지만 Leader는 할 땐 확실히 하시네요.”
거실의 벽을 바라보며 츠카사는 그렇게 감탄했다. 깔끔한 흰 색으로 메워져 있던 그곳에 검은색으로 그림들이 죽죽 이어져 있었다. 생후 3개월의 아이는 색을 잘 구분하지 못하여 모빌 같은 것도 흑백으로 해두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는 걸 얼마 전에 읽었었다. 레오는 대부분 그랬다. 무대를 준비하는 것처럼 빈틈없이, 원치 않은 아이더라도 최선을 다해 맞을 준비를 했을 것이다.
레오는 화들짝 놀라 츠카사를 보았고 그의 시선을 따라 벽지도 차례대로 보았다.
“누구나 다 하는 거야.”
그 목소리는 이상하게 자조에 가까웠다. 시선은 다시 힘없이 배로 떨어진다. 자신의 배를 가만히 감싸는 모습은 이상하게도 외로워보였다.
생명을 품어 누구보다 행복할 임산부가 되지 못한 레오는 하루하루 지쳐가는 것처럼 보였다. 츠카사가 처음으로 찾아왔을 때보다 바싹 마른 팔다리와 점점 핼쑥해지는 얼굴에 츠카사가 병원을 권유해 보았지만 레오는 고개를 저었다. 정기점검은 꼬박꼬박 다니고 있고 별다른 이상은 없다는 말도 들었다고 했다. 그저 잠을 자꾸 설친다고, 그것 때문일 거라고 말했다.
요즘 그에게 가장 어울리는 단어는 침묵이었다. 츠카사가 왔을 때만 그럴 지도 모르지만 그는 잔뜩 지친 모양새로 버거운 숨을 쉬었다. 누구나 연민이 들 만한 모습은 츠카사를 더 부추겼다. 적어도 세나 선배가 오기 전까지는. 그 때까지 만이라도 옆에 있어 주자고. 지독한 위선이지만 그 위선이 누구에게는 필요한 행위일지도 모른다.
“곧 크리스마스잖아요. 이브 날에 트리도 장식하고, 캐롤송도 잔뜩 트는 거예요. 어때요? 분명 아기도 즐거워할 거예요.”
12월의 중반을 치닫는 지금 거리는 이미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한창이지만 집을 거의 나가지 않는 레오는 모를 터였다. 그는 TV도 즐겨보지 않는 듯 했고 츠카사가 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곤 했다. 무대에 오른 기분이었다. 츠카사를 주시하고 있지 않지만 반대편에 있는 배우를 바라보듯 그에게 거의 참견하지 않는 관객.
“스오가 하고 싶다면.”
“물론이죠! 말을 꺼낸 게 저잖아요? 그 때쯤이면 세나 선배도 올 테니까 시간 비는 사람들끼리 간단하게 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물론 Leader가 부담스럽지 않는 선에서요.”
“그렇지, 세나가 오지.”
그 말을 하고 레오는 츠카사가 모를 생각에 빠진 듯 했다. 입매가 좀 느슨해진 것도 같은 모습에 괜히 아쉬웠다. 예전부터 레오와 이즈미의 사이가 가깝다는 건 알고 있지만, 지금 그의 옆에 있어주는 건 자신인데. 자신에게도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어주었으면 하는 것이 근래 츠카사의 가장 큰 희망이었다. 더 이상 나이츠의 어린 막내도 아니고 사회의 구성원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어도 그의 리더에게는 언제까지나 귀여워해야 할 막내로 보이는 건지. 사실 귀여움을 받는 다기 보단 밀어내는 쪽이 맞지만. 우울하게 생각을 곱씹던 츠카사는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레오가 어느 정도의 도움이 필요한 건 사실이고 츠카사는 좀 더 형태를 가진 거부를 보기 전까진 모른 척하며 끝까지 집에 드나들 생각이었다. 레오의 몸이 가벼워지기 전까지 나름의 합당한 이유를 가진 방문은 계속될 예정이었다.
*
츠카사를 깨운 건 무엇인지 정확하지 않다. 목을 갑갑하게 죄고 있는 넥타이 때문인지, 빈틈없이 죄고 있는 셔츠 단추 때문인지, 머리를 커다란 망치로 두들기고 있는 것 같은 두통 때문인지. 인상을 쓰며 게슴츠레 눈을 뜬 츠카사는 꿈속에서 어렴풋하던 두통이 더 심해지는 걸 느꼈다.
물마시고 싶은데. 목을 태우는 것 같은 갈증에 츠카사는 몸을 일으켰다. 양말을 벗지 않아 괜스레 답답했다. 씻지도 않고 그대로 잠들었다는 찝찝함의 문제가 아니었다. 불이 꺼진 와중에도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자신의 방이 아니라는 것을. 멍청하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을 때 무언가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구역질을 하는 소리였다. 츠카사는 부리나케 일어났다.
“Leader...?!”
방의 문틈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빛의 선은 화장실의 노란 불이었다. 변기를 붙잡고 꺽꺽 대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몸을 잘게 떨면서도 그에게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인사를 보낸다.
“-일어났어?”
“이,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아니, 그보다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그냥 입덧이고.”
뚜껑이 덮인 채로 변기물이 콰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내려간다. 츠카사는 혼란스러웠다. 임신 후기에도 입덧을 하던가? 정말 괜찮은 게 맞나?
물로 입을 헹군 레오가 츠카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스오야말로 괜찮아? 숙취는 심하지 않아?”
“아―, 설마 했는데 저 술에 취해서 여기 온 건가요?”
“응.”
“맙소사... 정말 죄송해요. 왜 그랬지.”
연말의 회식을 조금 앞당겨서 하기로 결정이 났다. 주위에서 권하는 술을 자꾸 받다가 3차까지 끌려가려는 걸 막고 간신히 택시를 탔었다. 주소를 불렀는데 레오의 집 주소를 부른 모양이었다. 왜 이런 추태를 벌였을까. 한심함을 토기와 함께 필사적으로 밀어 넣으며 츠카사는 아픈 머리로 생각했다. 그러니까 뭔가를 전해주려고....
“아―.”
츠카사는 탄식했다.
“택배, 그러니까 인터넷에서 주문한 물건을 받았거든요. 그걸 전해드리고 싶어서.... 그런데 어딘가에 두고 왔나 보네요. 무작정 드리고 싶어서 이렇게 폐를 끼치게 된 것 같아요. 정말 죄송합니다.”
“나한테 죄송할 필요는 없고... 혹시 택배라면 저거?”
레오의 손가락이 침대 옆을 가리킨다. 눈을 가늘게 뜨며 어둑한 방을 보던 츠카사가 흐릿한 그림자를 보고 화색이 되었다.
“앗, 네, 맞아요! 어떻게 잘 들고 왔네요. 잠시 만요―.”
급하게 발을 디디자 속이 울렁거렸지만 꾹 참고 물건을 집어 들었다. 비닐이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아기자기하게 동물이 그려진 옷이 나왔다. 츠카사가 주문한 물건이 맞았다.
“입는 담요예요. 아기가 어렸을 때 담요를 덮으면 차거나 몸에 얽히는 문제가 있어서 이렇게 입히는 담요가 좋다고 들었어요. Leader가 이미 사셨더라도 예비용으로 쓰시면 될 것 같아서요.”
레오는 유독 선물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선물뿐이랴, 츠카사의 방문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역시 그의 표정엔 기쁨의 기색보다도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걸 바라볼 뿐이다.
“왜 이런 걸....”
“크리스마스 선물이에요. 이제 곧 크리스마스니까 아기에게 미리 주고 싶어서, 라는 걸론 안 될까요?”
“....”
손에 잡힌 봉투가 바스락거린다. 츠카사는 그 짐을 고대로 들고 문을 나서는 자기를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라는 말을 하기 전에 레오가 담요를 받아들었다.
“고마워.”
선물을 받은 기쁨의 표현 대신 눅눅하게 가라앉은 목소리 겨우 그렇게 말을 했다.
“하지만 스오, 너는 모르겠지만 네가 하는 행동들은 엇나간 음이야. 손가락이 미끄러져 건반을 잘못 누른 거라고.”
“이건 술김에 저지른 행동이 아니에요. 저는 제가 하는 행동에 확신이 있어요.”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며 이건 건물이라고 확신하는 거랑 똑같은 말이네.”
레오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뭐라고 더 말이 이어지지만 아주 작은 소리여서 들리지 않았다. 그는 기뻐보이진 않았지만 선물을 받아줬다는 사실에 큰 만족감을 느꼈다. 술 때문에 꼬여있던 속까지 진정되는 것 같아 츠카사는 저도 모르게 빙긋 웃었다. 마지못해서라고 해도 레오가 그의 호의를 제대로 받아들여 준 건 처음이었다.
“그럼 전 가볼게요. 야밤에 정말 말도 안 되는 폐를 끼쳤네요. Leader도 몸 건강히... 음, 구역질이 그 정도로 심하시면 역시 병원 가보시는 게 좋겠어요.”
“지금 간다고? 그냥 마저 자고 가.”
“어떻게 그래요? 몰염치하게 침대까지 차지하고. Leader는 안 그래도 몸이 무거우신데 도와드리지는 못할망정.... 정말 죄송합니다. 침대에서 편하게 주무세요.”
“...차타고 온 거 아니잖아? 잠시 속이 부대껴서 그렇지, 그 전까진 거실에서 잘 자고 있었어.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절대 그럴 순 없어요. 말도 안 되잖아요. 전 원래 오기로 한 손님도 아니고 행패 부린 취객일 뿐이에요. 더 이상은....”
츠카사는 말을 멈췄다. 뻗어 나온 손이 츠카사의 옷깃을 잡고 있었다.
“시간이 늦었어. 자고 가.”
말은 명령조이지만 잡고 있는 손길은 미약하기 짝이 없다. 츠카사가 몸을 조금만 돌리기만 해도 단번에 놓칠 것 같이 가느다랗게 이어진 모양새다. 츠카사가 바라보자 움찔한 손가락이 옷깃을 곧장 놓았다. 본인도 당황스러운 기색이었다.
“자고 갈게요.”
저도 모르게 그렇게 대답하고 있었다. 분명 술이 들어가지 않았으면 좀 더 이성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의 츠카사는 이래야 한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뭐가 어찌됐든 지금 리더를 혼자 남길 수 없다는 그런 판단을 말이다.
거실에서 자느니 침대에서 자느니로 서로의 말들이 부딪히다가 결국 둘 다 스토브가 조용히 열을 전하는 침대에서 자기로 했다. 다행히 침대는 꽤 넓었다. 한 사람이 벽에 붙어 구겨져 자지 않아도 자리는 넉넉하다.
천장의 불이 꺼지면서 깊게 가라앉는 공기, 부스럭대는 소리, 붉게 달아오르는 스토브의 불빛. 다시 잠들기 시작한 방의 침대에는 조금 외로운 거리가 두 사람 사이에 있었다. 츠카사는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토브가 비추는 아른거리는 빛이 츠카사의 그림자를 둥글게 그리고 있다. 그가 조금만 움직여도 저 죽은 듯이 잠든 그림자도 같이 너울거릴 것이 뻔했다. 뒤척이고 싶은 걸 참으며 츠카사는 자신의 그림자를 가만히 바라본다. 리더는 혼자인 게 싫었던 걸까. 알콜이 잔뜩 좀 먹은 뇌는 제대로 생각을 진행하지 못한다. 간단한 명제 하나 조차 한 걸음도 못 내딛고 잠에 들었다가 잤다는 사실에 놀라 눈을 뜨고 어느새 잠든다.
츠카사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몸은 침대에 녹진하게 늘어져 있었다. 잠든 지 꽤 지난 것 같았다. 벽을 보고 옆으로 돌아 누워있던 몸도 어느새 똑바로 누운 자세로 바뀌어서 덜깬 눈에 그림자가 진 붉은 천장이 흐릿하게 보였다. 모든 소리가 고요하다. 잠에 취한 츠카사도 다시 눈을 감았다. 익숙하게 꿈이 몰려오려 할 때, 문득 무언가가 닿았다. 아무렇게나 늘어진 손을 살며시 눌러오는 게 있었다. 따끈한 체온을 가진 그것은 잠꼬대로 움직였다기엔 아주 조심스럽게 손바닥과 마주친다. 손가락의 끝. 레오의 손가락이 몸을 사리는 것처럼 츠카사의 손에 닿았다가 떨어진다. 찰나의 온기가 손 안을 감돈다. 잠기운이 순식간에 달아났지만 한번 수면에 푹 절여졌던 몸은 어렵지 않게 자는 연기를 이어갈 수 있었다.
다시 손바닥에 닿는 무언가는 없었다. 대신 팔을 감싼 소매 끝에 뭔가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누군가 소매를 쥐고 있는 것처럼. 몸을 일으키면 지금 상황이 확연하게 보이겠지만 그랬다간 이 몽환적인 상황도 단번에 깨질 것이다.
저도 모르게 바란다. 조금 더 손이 움직이길. 아까처럼 피부와 피부가 닿아, 그가 누군가의 온기를 갈구하고 있다는 걸 확신하고 싶었다. 만약 손이 다시 닿는다면 꼭 잡아주자고. 어째선지 그런 생각까지 하며 기다리지만 잔뜩 죽인 숨소리처럼 더 이상 움직임은 없다. 규칙적인 호흡이 연거푸 반복되면서 츠카사의 의식도 천천히 침잠한다. 레오가 품고 있을지도 모르는 외로움에 닿고 싶다. 어렴풋한 생각은 어느 샌가 꿈이라는 색을 가진 어둠에 삼켜져버렸다.
*
회사에 출근하고 나서 츠카사가 제일 많이 들은 소리는 전무님 괜찮으시냐는 안부의 말이었다. 제대로 집에 들어간 지를 묻는 직원들에게 어정쩡한 미소로 화답하며 츠카사는 어제 자신의 상태가 심하긴 했구나를 다시금 깨달았다. 기억도 없이 레오의 집으로 기어 들어갔을 정돈데 회식 자리에서 제정신을 붙들기도 힘겨웠을 것이다.
책상에 앉자마자 츠카사는 역하게 달콤한 숙취 드링크를 들이켰다. 은은하게 올라오는 두통과 잔뜩 긴장하며 잠에 들어선지 여전히 뻣뻣한 어깨가 츠카사를 괴롭혔지만 기분은 날아갈 것 같았다.
어젯밤의, 그 잠깐의 기억이 잊히지 않는다. 어쩌면 레오는 츠카사에게 아주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었을 지도 모른다. 알파라는 유해한 족속에서 시작된 끝없을 경계에서, 학생 시절 같은 유닛이었던 스오 츠카사를 되찾아 가는 걸 수도 있다. 그의 마음에 자신의 공간이 있기를 염원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츠카사는 쓴 웃음을 지었다. 분명 츠카사가 한 행동은 레오가 말한 과도한 친절이고, 이 뒤에 숨겨진 말은 레오 본인이 바라지 않는 위선이었을 텐데. 어제의 그건 레오가 줄곧 하던 변덕의 일부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무척 기뻤다. 레오를 도와주고 싶다, 그를 혼자 있게 하고 싶지 않다.
츠카사를 흔드는 감정의 정체는 본인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나이츠라는 이름 아래로 묶인 둘의 인연이 어른이 되어도 풀리지 않고 어떤 모양이로든 엮여 있다는 것으로 충분한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동경하던 자신의 리더가 그를 의지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언젠가 레오가 범인을 잡고 싶다고 하면 츠카사는 그에 대한 지원도 확실하게 해줄 작정이었다. 레오를 저렇게 만들고 홀로 둔 사람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물론 그전에 레오의 의사가 먼저다. 기다려, 라는 말을 들은 훈련된 개처럼 츠카사는 착실히 기다릴 수 있다. 주인의 ‘물어’라는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이를 숨길 것이다. 비록 레오가 츠카사가 싫어해 마지않는 오메가라 하더라도 츠카사는 레오의 기사였다.
한 해가 끝을 향해 치닫고 추위도 더욱 기승을 부린다. 툭하면 쏟아지는 눈 때문에 교통이 마비되기 일쑤였지만 커플들은 흰 눈송이가 떨어지는 광경에서 낭만을 발견하고 사랑의 밀어를 속삭일 터였다. 츠카사에겐 그런 달콤한 대사를 말할 상대는 없었지만 어쩐지 근사한 기분으로 내리는 눈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올해 크리스마스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될지도 모른다. 거리를 수놓는 금빛 조명 속에서 그의 리더와 나이츠 선배들이 모여서 하는 작은 파티는 어떤 파티보다 완벽할 것이다.
슬슬 선배들에게 연락을 하여 날을 맞춰야 한다는 생각을 할 때 그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핸드폰이 진동을 올렸다. 세나 선배. 검은 화면에 뜨는 흰 글씨를 보며 츠카사는 반가이 전화를 받았다.
“세나 선배! 그렇지 않아도 연락을 드리려던 참입니다. 귀국은 하셨나요?”
“....”
수화기 너머의 자잘한 소음은 들리지만 이즈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츠카사는 귀를 떼 전화 상태를 확인했다.
“선배? 들리지 않으신가요?”
“아, 아니야. 잘 들려. 귀국은 그저께 했어.”
내용 탓인지 남자는 굉장히 피곤해 보였다.
“카사 군, 최근에 임금님이랑 만났어?”
“아, 네. 물론이죠. 세나 선배가 연락 주신 이후로 꾸준히 가서 상태도 살피고 있습니다. 엊그제만 해도....”
“이제 가지 마.”
츠카사의 말을 막아서며 이즈미가 말했다.
“카사 군은 충분히 고생했고 이젠 갈 필요 없어.”
“...세나 선배가 귀국했기 때문인가요?”
“그럴 리가 있겠어?”
그 한 마디만 대답하고 이즈미는 다시 말이 없었다. 평소의 그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에 의아함보다 답답함이 더 앞섰다. 한참 후에 이즈미가 대답했다.
“거기에 카사 군이 가서 좋을 일은 없다는 거야. 카사 군은 이제 카사 군의 일상으로 돌아가.”
“Leader를 뵈러 가는 게 그리 큰 부담을 끼칠 정도는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냐. 애초에 카사 군에게 부탁하면 안 되는 거였고. 임금님한테도 말해놨어. 그 빌어먹을 멍청이는... 아 됐어, 이건 내가 나설 문제도 아니니까. 나서기도 싫고.”
“저기, 선배.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데요....”
“어쨌든 앞으로 임금님을 보러 가지 말라는 얘기야. 본인이 따로 연락하지 않는 이상.”
“그러니까 어째서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지를....”
“카사 군을 위해서야.”
통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더 이상 아무 소리가 나오지 않는 휴대폰을 멍하니 쥐고 있던 츠카사는 문득 이와 비슷한 말을 들었다는 걸 기억해냈다. 레오였다. 그의 방문을 만류하는 레오도 이즈미와 같은 소리를 했었다. 자신을 위해서라는.
츠카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레오의 문안이라는 임무는 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갑작스레 거둬졌고 남은 건 이 일에서 빠지라는 명백한 배제다. 츠카사를 위한다는 기묘한 이유가 붙으면서.
다시 이즈미에게 전화를 걸려던 츠카사는 통화 버튼을 결국 누르지 못했다. 다시 얘기를 해도 그가 익히 아는 이즈미는 의사를 바꾸지 않을 것이 뻔했다.
본인이 연락하면 가도 된다는 조건을 내밀긴 했지만 레오가 먼저 츠카사를 부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사람 휴대폰을 쓰긴 하는 걸까 싶을 정도로 연락이 되지 않았고, 레오가 하루 종일을 머무는 집에서도 현대인 대부분이 가지고 있다는 그 작은 연락 수단을 만지는 것조차 보지 못했다.
애꿎은 휴대폰을 노려보다가 츠카사는 다시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처리하고 있던 업무가 흰 바탕에 검정 글씨로 빛나고 있다. 기계적으로 그것들을 들여다보지만 머리 한 구석엔 각종 생각과 감정이 구겨져서 한데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뭉쳐지고 꿈틀거린다. 아까까지 근사한 기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무슨 사정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엄중한 축객령은 적어도 직접 레오의 입으로 듣고 싶었다. 일주일정도 지난 후에 연락을 하거나 해서 찾아가는 건 괜찮겠지.
그런 결론을 내리며 당분간은 마음을 다 잡은 지 며칠 후, 먼저 연락 온 것은 다름 아닌 레오였다.
“Leader?”
「스오-, 전화기로 목소리를 들으니 아주 어색하네. 아니, 스오 뿐 아니라 누구나 다 그런 걸까. 이거 되게 이상하지? 얼굴도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목소리는 귓가에서 들리는 게 엄청 유령 같고.」
줄곧 침묵을 지키던 남자는 전화기에서는 요란스럽게 떠들어댔다. 그 시끄러운 모양새가 어쩐지 더 불안하게 느껴졌다.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요즘 줄곧 찾아뵙지 못해서.... 아, 세나 선배에게 이야기는 들었어요. 저는 더 이상 오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으니까.”
「세나가 그런 말을 했어?」
“...세나 선배가 찾아가고 계신 게 아니었나요?”
「오긴 오는데.... 아니야, 여기서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스오, 스오에게 할 말이 있어. 진작 말했어야 했는데. 이 상황까지 오면 안됐는데. 말해야겠지? 아니, 전화로 말해도 될까.」
“우선 진정하세요. 상황은 잘 모르겠지만 Leader가 마음을 정리한 뒤에 말씀하셔도 괜찮지 않을까요.”
정체를 모를 불안감은 츠카사에게까지 전염되었다. 더 들어선 안 될 것 같다는 알 수 없는 소리가 속삭인다. 하지만 기계를 거친 레오의 목소리는 이어졌다.
「스오, 미안해, 들어줘. 응당 말했어야 하는 거야. 네 호의를 이용했어. 그래선 안됐는데, 정말 미안해.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어.」
“잠시 만요, 지금 무슨 상황인지 하나도....”
「강간범은 나야, 스오.」
핸드폰을 고쳐 잡으려던 손이 멈췄다.
「당한 게 아니야. 내가, 내가 했어. 저항할 수 없는 상대를 내가 맘대로. 너는 몰랐겠지만, 아니 모르는 게 당연해. 스오는 그 때 의식이 없는 거랑 다를 게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겠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강간한 상대는 너야, 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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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약 26페이지 정도의 분량입니다.
이 직후 이야기와 몇 년 후 이야기가 실릴 예정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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