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카레오 - 동거
* 츠카레오 네임버스
* 츠카레오 합동지가 1년이 됐기도 하고 재판 예정이 없기 때문에 제 원고만 공개합니다!
* 합동지 주제는 [동거]였습니다.
열쇠가 부드럽게 구멍에 감겨든다. 딱 들어맞는 금속 조각이 이내 잠근 문을 연다. 어스름한 복도에 금세 흰 빛이 가득 찬다. 집은 어둡지 않았다. 옅은 갈색으로 덮인 원목바닥과 새로 바른 흰 벽지가 깔끔하게 집을 감싼다. 거실로 들어서니 커다란 창문이 빛을 한가득 받아들이고 있다. 제대로 가구가 들어서지 않아 좀 휑해 보이지만 그건 앞으로 채워나가면 된다. 앞으로 새집과 함께 맞을 희망찬 미래를 상상하며 남자는 창틀에 몸을 기대어 미소 지었다.
―일 리가 없다. 이 집의 새로운 주인도 아니고 그저 세입자인 츠키나가 레오는 주의사항이 적힌 종이를 여전히 쥔 채 집을 휘휘 둘러보았다. 좁다. 혼자 살기엔 괜찮을지 모르지만 이 집에 살 사람은 한 명 더 있다. 그것도 성인 남자. 거실에 자신만한 성인 남자가 한 명 더 있을 거라 생각하니 갑갑해져 온다. 아무리 봐도 생판 남인 사람과 같이 살기엔 터무니없어 보였다. 아니, 생판 남이 아니다. 주위에선 이렇게 떠들었다. 하늘이 점지해준 운명이라고.
강제 동거인 이름은 스오 츠카사.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이라는 거창한 칭호를 가진, 레오의 네이머다.
세상엔 드물게 누군가의 이름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다. 몸에 새겨진 그 이름을 가진 상대 역시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네이머라 불리며 서로와 마주하게 되면 바로 사랑에 빠진다는 로맨틱하기 짝이 없는 인종이다. 물론 몸 어느 구석에 이름이 새겨져 있는 걸 제외하면 일반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긴 했다. 아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곤.
네이머가 이 세상에 나타난 건 그리 오랜 역사를 가지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세상에 나타난 이들은 자신의 몸에 새겨진 이름을 찾는 호소를 했었다. 그것이 큰 문제는 아니었다. 로맨스 소설에서나 나올 것 같은 이들에 여러 분야의 창작열들이 들끓거나, 전혀 다른 관점으로 호기심을 표하는 과학자들이 실험의 요량으로 그들을 찾거나 같은 일들뿐이어서 네이머는 낭만적인 해프닝 정도로 치부됐다.
하지만 불행히도 사건은 일어났다. 한 네이머가 연쇄 살인을 저지른 것. 이 네이머는 상대 네이머를 찾았지만 안타깝게도 상대는 이미 결혼하여 가정을 둔 사람이었다. 애절한 사랑 노래 정도로 끝날 줄 알았던 결말은 네이머의 배우자를 포함한 일가족을 모두 살해하고 그들의 결합을 반대한 부모와 친척들까지 모조리 죽이는 참사였다. 이런 끔찍한 범죄에 운명적인 사랑의 상징이던 네이머는 범죄의 오명을 뒤집어썼고, 그 이후 재판 과정에서 상대 네이머가 그를 여전히 사랑한다며 자신도 같이 감옥으로 보내달라는 호소가 퍼지면서 사회에 파장을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치정싸움이란 이름으로 물밑에 있던 수많은 네이머 간의 문제들이 떠올랐고, 나라 차원에서도 이들에 대한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해야 했다.
그 결과 중 하나가 이 아파트였다. 네이머가 발현되면 의무적으로 국가에 등록해야 하고, 자진 신고뿐 아니라 정기적인 검사로 네이머의 여부를 판정받았다. 등록된 네이머는 모두 국가가 만든 페이지에서 검색이 가능하며, 25살이 되면 상대 네이머 역시 이름이 발현됐다는 전제하에 네이머 전용 아파트로 강제 거주가 결정된다. 지금의 레오처럼.
‘괜히 다른 사람이랑 눈 맞아서 문제 일으키지 말고 네이머들끼리 빨리 붙어먹으라는 소리겠지.’
서로의 네이머가 가족이 되면 위와 같은 문제는 일단 없어지긴 하지만 민주주의 공화국이라는 이 나라에서 네이머들 한정 자유연애는 다 헛소리가 됐다. 결국은 몸에 새겨진 인물과 사랑해야 하는 운명. 레오는 자신에게 새겨진 이름이 아주 천천히 완성되는 걸 보아왔고, 완벽한 이름이 됐을 때 상대의 상세정보를 구태여 알아내지 않았다. 대신 나이만 보았다. 그는 레오보다 두 살 연하였고 그가 25살이 되는 즉시 레오는 원치 않는 동거인을 얻게 될 것이다. 레오의 상대가 25살이 되는 4월 6일, 레오는 도주를 감행했다. 결국은 붙잡혀서 이곳에 오게 되었지만.
레오는 아무 것도 없는 거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미 도착한 짐에서 노트북을 꺼내고 안내 사항에 적힌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적어 넣었다. 가동되는 인터넷 창에서 네이머 홈페이지를 들어가고 단어를 검색한다. 스오 츠카사. 검색 결과 1건을 심드렁하게 클릭했다.
레오의 네이머는 남자였다. 자주색의 둥그런 머리를 한, 잘 생겼다기 보다 예쁘다는 게 더 어울린 단정한 얼굴이 거기 있었다. 홈페이지에서는 최소한의 정보만 제공되고 있었다. 이름과 생년월일, 명함 크기의 사진 한 장과 상대 네이머 이름, 츠키나가 레오.
얼굴은 공주님 같지만 그가 진짜로 자신의 공주님이 될 지는 모르는 일이다.
아까전만 해도 레오는 아파트에 들어오는 행정 절차를 진행하며 투덜거렸다. 생판 모르는 남이랑 느닷없이 동거라니 이런 경우가 어딨냐며 그에게 있어 당연한 불만을 토로했지만 정보를 입력하기 여념 없는 관청 직원은 여전히 사무적인 태도를 고수하며 말했다.
‘모두 처음에는 그렇게 말해요. 만나기 전까진 말이죠.’
‘만나면 생각이 달라질 거다?’
‘당신도 알잖아요? 네이머라고요.’
그녀 안의, 아니 일반적인 네이머의 인식은 그렇다.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진다고.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되겠다고. 이것이 과장이 아니라는 듯 네이머들의 아파트는 그런 공식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허니문베이비가―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놀라운 일이 아니라며, 그들은 아이를 키우기엔 너무 좁은 이 집을 벗어나기 위해 아파트를 나가게 되며, 아이를 가지지 않더라도 두 사람이 살기엔 제법 열악한 환경이기에 이곳을 가급적 빨리 나가게 된다고 한다.
‘츠키나가 씨는 동성 케이스군요. 걱정 말아요. 이번에 법안이 통과돼서 동성 네이머들끼리의 결혼도 인정되고 있으니까요. 아마 당신도 일주일 후엔 저에게 퇴거 절차를 묻겠죠. 네이머의 아파트에 온 걸 환영해요. 멋진 만남의 시작이죠.’
그녀는 마지막 엔터를 치며 베테랑의 미소를 선보였다.
레오는 자신에게 그런 드라마틱한 감정의 반전이 일어날 거란 상상은 어려웠다. 재미있는 극을 짜는 게 취향이지 남이 만든 극에 광대처럼 어울리는 건 사양이다.
‘신은 나에게 네임이라는 선물을 줬어. 그건 당신과 나를 이어주는 마법이기도 하지.’
전쟁터에서 만나게 된 적군과 간호사라는 네이머들의 로맨스 영화에서 배우가 한 말이었다. 이 영화에 과장은 없으며 내 인생 역시 그를 만나기 전과 만난 후로 나뉜다는 한 네이머의 감상평이 베스트 댓글이 되는 등 연애에 관심있는 이들은 네이머라는 주제에 열광한다. 그 당사자가 된 레오에겐 떨떠름할 뿐인 일들이지만.
일단 만나보고. 스오 츠카사는 퇴근 후에야 올 수 있다고 한다. 아직 중천에 떠 있는 해를 보던 레오는 노트북을 덮었다. 자의든 아니든 레오는 새 집으로 이사를 왔고 짐을 풀어야 하는 등 할 일이 산더미였다.
*
레오는 시계를 흘끗 보았다. 저녁 8시 혹은 밤 8시. 저녁과 밤의 애매한 경계에 따라 레오의 배도 애매하게 고픈 상황이었다. 그리 넓지 않은 식탁에 과하게 차려진 진수성찬을 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자신의 생일 파티를 맞아 잔뜩 음식을 차려놓고 기다리는 어린 아이처럼. 거기에 약속 시간에 늦는 친구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심정까지 플러스.
레오 눈앞에는 어느 파티에 타임리프라도 한 듯 먹음직스럽게 익은 칠면조 구이가 놓여 있었고 그 옆으로 으깬 감자, 구운 호박, 달큰한 시럽에 익힌 고구마와 베이컨을 곁들인 양배추 볶음을 비롯한 사이드 메뉴와 함께 저녁의 분위기를 지배할 레드 와인까지 놓여 있었다. 휘황찬란한 메뉴 중 하나였던 스프는 이미 비운 상태였다. 7시가 넘어가니 꽤나 허기져서 그냥 넘길 수가 없었던 레오는 식으면 맛이 없을 테니 이 한 놈이라도 살리자는 심정으로 들이켰고 결과에 만족했다. 그러던 시간이 있었는데 어느새 한 시간이 경과했다.
아무것도 못하고 테이블만 곁눈질하던 레오가 역시 더 맛없어지기 전에 해치워야, 아니아니 조금만 기다리자, 랩이라도 감싸서, 이런 랩이 없네, 같은 번뇌 속에 빠져 있을 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집의 열쇠를 가진 자는 딱 두 명이다. 레오와 그의 네이머.
레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떤 무대가 준비돼 있을까. 퍼레이드 마냥 오색 빛깔의 종이가 흩어지듯이 뇌에서 펑펑 울리며 새로운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해요 같은 심상일지, 고대하던 막이 오르고 잘 조율된 악기들이 일제히 하모니를 맞추어 시작하는 웅장한 오케스트라일지, 깊고 깊은 어둠 밤에 연달아 터지는 여름의 불꽃놀이와 그 밑에서 일렁이는 은근한 감정일지.
문은 꽤나 신중하게 열렸다. 상대도 긴장하는 게 틀림없다.
왠지 반갑기까지 한 붉은 머리칼이 먼저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기억과는 전혀 다른 모양으로 있어서 레오는 당황했다. 포마드라도 발랐는지 매끈하게 넘긴 머리와 그 아래로 드러난 얼굴에도 또다시 당황했다. 사진으로 익히 보던 앳된 얼굴 대신 성인 남자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어디 갔어, 홈페이지의 말랑말랑해 보이는 도련님 얼굴은. 검정 트렌치코트를 입은 매우 낯선 남자는 레오를 보고 놀라는 듯하더니 얼른 고개를 숙였다.
“반갑습니다, 스오 츠카사입니다.”
“어, 응. 츠키나가 레오.”
“늦어서 죄송합니다. 회사 일이 갑자기 쏟아져서, 정말 중요한 날인데 염치가 없네요.”
“아니, 나는 상관없는데.... 그쪽이 부른 거 맞지? 셰프라고 하면서 굉장한 음식을 차려놓고 갔는데 나보단 음식 쪽이 더 신경 쓰여. 식었거든.”
“앗, 그렇겠네요. 이사를 하고 나서 제대로 차려 먹긴 힘드니 사람을 불렀습니다. 본의 아니게 냄새 속에 계셨겠군요....”
“그건 상관없는데....”
“....”
“....”
술술 풀리는가 싶던 대화는 어느새 사그라진다. 레오는 기다리고 있었고 상대 역시 마찬가지리라. 언제쯤이면 네이머들끼리 터진다는 인생을 반전시킬 끝내주는 감정의 해일이 오는 거지? 레오는 상대를 만나 네이머로 각성하면 그를 끌어안고 진한 키스라도 퍼부을 줄 알았다. 하지만 처음과 마찬가지로 감정은 요지부동이다.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큐피드의 화살을 기다리지만 그들을 놀리는 양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저기, 저녁이라도 먹을래? 내가 차린 건 아니지만.”
“아, 앗, 그럴까요?!”
한 박자 늦게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짐을 먼저 두고 올게요. 그러니까 방이....”
주위를 둘러보며 허둥지둥 거실 뒤쪽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가 레오의 짐들을 발견했는지 여자 화장실에 잘못 들어간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문을 닫았다.
“앗, 여긴 당신 방이군요. 그럼 전 다른 방을....”
남자는 그리 넓지 않은 집에서 미아처럼 두리번거리다 다른 문을 잡았다.
“거긴 화장실.”
“그, 그러네요.”
곧장 보이는 욕조에 남자의 당황한 기색이 더 짙어진다. 주위를 둘러보던 남자가 아연하게 말했다.
“설마 여기 방 한 개 인가요...?”
“응. 구조를 보니까 그렇더라고.”
레오는 손가락으로 여기에 들어오면서 받은 집의 평면도와 주의 사항이 적힌 종이뭉치를 가리켰다. 심각한 표정으로 그걸 본 츠카사가 탄식했다.
“맙소사, 외견만 그런 줄 알았더니 정말 tiny한 집이군요. 방이 한 개 뿐이라니!”
“그래, 매우 스몰한 집이야. 우선은 밥을 먹는 게 어때?”
잘사는 집의 도련님일게 분명한 발언을 귀담아 듣기엔 온갖 음식의 냄새 속에서 어떻게 버텨오던 배가 이제는 한계라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네이머와 조우라는 묘한 긴장감이 풀어지니 허기는 더했다. 남자는 전혀 무언가를 먹을 기분은 아닌 것 같았지만 결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 식사는 아주 어색했다. 금방 먹고 치울 음식들이 아니어서 더 그랬다. 낯선 사람과 파티에 끌려왔는데 그것도 둘 만의 파티다. 숨 막히는 침묵까지는 아니었지만 어쩌다 서로가 꺼내는 화제는 이리저리 핑퐁이 제대로 오가기도 전에 죽어버렸고 식은 음식만큼 칙칙한 분위기가 돼버렸다. 레오가 판단컨대 저 남자, 스오 츠카사는 돌발 상황에 약해 보였다. 그는 흔히들 말하는 네이머와 첫눈에 반한다는 일을 전제로 모든 것을 계획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그런 핑크빛 세상과 거리가 먼 어색함 속에서 그의 자색 눈동자는 연신 레오를 흘끔흘끔 보면서 의심의 눈빛을 던지기 일쑤였다. 마치 진짜 네이머는 따로 숨겨두고 그 자리에 대신 있는 것 같은 무례한 느낌으로 말이다.
레오는 남자가 자신의 네이머가 맞는 가에 대한 의문은 딱히 가지지 않았다. 그저 막연하던 감각은 역시 레오에게 찾아오지 않았을 뿐이고 이쪽이 훨씬 현실적이다. 역시 네이머들끼리의 불같은 사랑은 로맨스 소설에서나 나오는 과장이었다. 갑작스레 다른 사람을 사랑하다니. 마치 지금까지 츠키나가 레오는 거짓이란 것처럼 표현되는 것은 불쾌한 일이다. 결과적으로 레오는 지금의 상황에 만족하고 있었다. 원하지도 않은 배우가 되는 것보다 이쪽이 훨씬 나았다.
꽉 막힌 공기 속의 식사가 끝나고 각자 가져온 차―레오는 편의점에서 대충 집어온 믹스 커피, 도련님은 고급스러워 보이는 패키지의 홍차―를 마시면서 어쭙잖은 탐색전을 벌이고 있었다.
“원래 이런 걸까요.”
남자, 츠카사의 말에 주어는 없지만 레오는 충분히 알아들었다.
“으음, 영화랑 많이 다르지.”
“듣던 얘기들이랑도 전혀 다르네요. 말해주던 사람들 장난치는 기색이 없었는데.”
다시 의심하는 눈초리가 향했다.
“그러니까 츠키나가 레오 씨죠?”
“자기소개는 아까 했잖아?”
“네, 그렇지만 제가 아는 것들이랑 많이 달라서....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네임을 보여주실 수 있나요?”
배배 꼬면서 말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직구를 던진다. 레오는 속으로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전혀 실례가 아니지만, 원한다면!”
곧바로 바지 버클에 손을 대니 츠카사가 기겁한 표정으로 물러섰다.
“아, 아니 갑자기 무슨 짓을-!!”
“보고 싶다며.”
레오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나는 여기 있거든. 물론 네임 말이야.”
손가락으로 왼쪽 허벅지 안쪽을 톡톡 두드린다. 남자가 대번에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저, 정말요?”
“그쪽에게 거짓말해서 내게 무슨 이득이 있다고. 상황도 그렇고 하니 확인해 보고 싶은 거 아니야?”
“그건 그렇습니다만....”
조금 붉어진 얼굴로 남자가 우물댔다. 속으로 열심히 재고 있는 모양이다. 결국 그의 선택은 최소한의 예의치레 보다 명확한 상황을 우선했다. 어쩐지 딴 곳을 어정쩡하게 보고 있는 츠카사를 보며 레오는 입고 있던 청바지를 벗었다. 한쪽 다리를 의자 끝에 걸친 레오가 다시 손가락으로 선명히 보이는 상처 같은 각인을 가리켰다.
朱桜 司.
자신의 이름을 확인한 남자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익히 듣긴 했지만, 정말로 제 글씨군요.”
네임은 상대의 글씨체로 새겨진다고 한다. 츠카사는 남의 허벅지 안쪽이라는 은밀한 곳을 본다는 파렴치한 행동과 그럼에도 그걸 누르는 호기심 때문에 몇 번이고 시선이 닿았다. 그러고 눈이 마주치자 민망했는지 허리를 바짝 폈다.
“저, 츠키나가 씨도 보여주셨으니 제 네임도 보여드릴게요.”
츠카사는 그렇게 말하며 넥타이를 풀었다. 누가 보면 딱 오해하기 좋은 광경이다. 바지를 벗고 있는 남자와 그 앞에서 넥타이를 푸는 남자. 둘 다 그럴 의사는 눈곱만큼도 없지만.
레오의 이름은 남자의 목덜미에서 흐르는 어깨선까지 새겨져 있었다. 月永 レオ. 명백한 자신의 필체로 새겨진 이름을 보니 묘했다. 글을 막 배우는 어릴 적도 아닌 지금 자신이 생각 없이 휘갈겨 쓰는 글씨체를 누가 눈여겨보았다가 적어놓은 거 마냥 아주 친숙하다. 운명이란 게 있어서, 자신의 상대는 물론이고 자신이 어떤 글씨체를 가질 지도 정해놓았다는 건지. 진짜 재수 없네, 라고 레오는 생각을 씹어 삼킨다.
“정말 눈에 띠는 위치네. 여름이면 보일 수도 있겠어.”
“네, 덕분에 학교에서 제가 네이머란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죠.”
마치 레오가 그 쪽에 새겨놓기라도 한 양 시선이 곱지 않다.
“달이 아름답네요 라는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꼭 농담거리가 됐기도 했고요. 목 부근에 달이 먼저 새겨지기 시작해서 보였거든요.”
“과연, 나는 내가 네이머인지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렇게 몸 안 쪽에 새겨질 수도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어요. 보통은 팔목이라든지, 어깨라든지 그렇잖아요? 발목에 새겨져서 일부러 드러내는 사람도 있고요. 저는 그렇게 담대하진 못해서... 집안 어른의 말씀도 있고 하니 가리고 다녔었어요. 당신은 딱히 가릴 필요가 없어서 부럽네요.”
더운 여름에도 목 끝까지 셔츠의 단추를 고집스레 채울 남자의 모습은 쉽게 상상이 된다. 어쩐지 홈페이지에 있던 그 어린 시절의 모습을 하고.
“나는 그런 불편한 일은 없었지만.... 그래 이런 일은 있었네. 잠자리에서 뒤늦게 이름을 발견하고 자길 속였냐고 얻어맞은 적은 있어.”
“잠자리요...?”
츠카사의 얼굴이 사정없이 굳어졌다. 설마 아무런 경험도 없는 클린한 몸이라고 생각한 걸까. 네이머라도 그렇지, 혼전순결 같은 걸 지지할 그런 모럴의 소유자 일지도 모르는 건 예상도 못했었다. 오히려 레오를 올라탄 어느 사람은 네임을 발견하고 기묘한 소유욕을 돋우기도 했었다. 다른 사람 이름이 새겨진 걸 가로채는 기분이라고.
츠카사는 그 이후로 뭐라 말을 잇진 않았다. 대신 누가 봐도 가라앉은 얼굴로 홍차를 마실 뿐이었다. 기분은 나쁠 수도 있었다. 츠카사와 레오에게 네이머가 필연적으로 온다는 불벼락 같은 뜨거운 사랑은 쏟아지지 않았더라도 상대 네이머의 잠자리 이야기는 불쾌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을 터울 없이 말하기엔 이 둘은 이제 막 저녁 식사만 마친 참이었다.
스오 가는 이른바 명문 가문이라고 했다. 명문가 적장자의 단 하나 뿐인 상대, 네이머. 그런 신데렐라 구두를 레오가 받아버렸다. 이름은 새겨져 있지만 아무리 봐도 맞는 사이즈가 아닐 그 구두 때문에 여기까지 끌려오긴 했지만. 상대도 그것이 썩 좋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이 누군가의 이상향이 되어본다는 생각을 한 적 없는 레오로서는 우습지도 않은 네임 덕분에 눈앞에 있는 츠카사를 동정한다.
어쨌든 대단한 가문의 도련님 치곤 솔직하다고 레오는 생각했다. 격식 높은 말투를 사용하여 진심을 이리저리 포장한 거품 넘치는 대화 대신 직선 도로를 달리는 것처럼 남자는 말을 하곤 했다. 지금도 그랬다.
“당신도 들었잖아요? 네이머들끼리 만나면 무조건적인 사랑에 빠진다고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도 기대한 것도 같아요. 당신도 그런가요? 나는 그런 격렬한 감정을 느낄 수가 없어요.”
“이쪽도 마찬가지야.”
“역시 그렇죠? 이게 무언가의 착오가 아니라면 지금까지 제가 알고 있는 것들이 모두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네요.”
“성실하게 생각했구나. 대단해! 나는 가끔 내가 네이머란 것도 잊고 살았거든.”
“아침에 세수하면서 어느 이름과 매일 마주해야 할 사람은 다를 수도 있죠. 갑자기 이주가 지연됐다고 해서 사정을 알아보니 츠키나가 씨가 도망쳤다고 해서 무척 놀랐어요. 그쪽에게 숨겨진 전과가 있는지도 의심 했고요.”
“고분고분 말 듣기 싫었다고 해야 하나. 그렇지 않아? 몸에 이름이 하나 새겨졌을 뿐인데, 나를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고 미리 수감하려 드는 게 싫었을 뿐. 딱히 범죄자 지망생은 아니야.”
“여긴 교도소가 아니지만요.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군요. 아무래도 예술 관련 일을 하셔서 그런 가요? 생각이 자유로우신 것 같아요.”
“헤에, 그거까지 조사한 거야?”
“누구든지 궁금해 할 거라고 생각해요. 스물다섯 살이 되면 무조건 같이 살아야 하니까 그런 상대에 대한 정보를 알아두는 건 서로에게 나쁘지 않을 것 같으니까요. 물론 당신이 이걸 불쾌해 한다면 사과드릴게요.”
“아니, 불쾌하진 않아! 과연 돈 많은 사람은 역시 정보도 쉽게 얻는 구나 하는 감탄이니까!”
“...일단 칭찬으로 들을게요. 대학 이후로 아무 경력이 없어서 자유로운 무직의 몸이신가 싶었는데 다른 이름으로 활동하셨더군요. 작곡 마인 X, 성천사 수호자, 행인A... 다 동일인물일 줄은 몰랐고, 그 사람이 제 네이머일 줄도 몰랐죠. 그리고 그 사람이 딱 제가 스물다섯 살이 되는 해를 시작으로 2년이 다되도록 국가를 피해 도망치고 있을 땐 진짜 직업이 스파이가 아닌가 했고요.”
“마침 외국에 있었을 때니까. 타이밍이 좋았을 뿐이야. 이 나라가 보안이 약하다고 해야 할지, 네이머 하나에 인력을 투입하기 어렵다고 봐야겠지. 봐줘, 지금은 여기 있잖아?”
“저에게 그렇게 말씀하셔도. 전 정부 기관 사람이 아니니까요. 지휘가이자 작곡가인 츠키나가 레오 씨.”
“순서가 바뀌었어. 지휘는 취미. 그보다 내 이야기는 됐고 그쪽 얘기도 해줘. 나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심지어 사진도 달라서 좀 당황스럽다고~!”
“Web의 그것 말씀이십니까? 그건 학생 때 사진입니다. update가 늦어진 것 같은데 제 책임은 아니라고요. 어쨌든 당신을 제가 멋대로 조사한 건 맞으니 정식으로 다시 소개를 드리겠습니다. 처음 말씀드린 대로 스오 츠카사라고 하며 아직 불초한 몸이지만 스오 재단의 전무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오오, 전무님이셨구나~.”
“놀리지 마세요.”
츠카사가 부루퉁하게 말했다. 그는 스물일곱 살이니 굉장한 직책에 앉아있는 거지만 이름대로 아마 스오 가의 후계자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할 출세 루트다. 과연 진짜 신데렐라의 유리구두가 맞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 신발은 당사자에게도 맞지 않는다.
“그래, 만나자마자 네가 끝내주는 미인으로 보일 줄 알았어.”
“실망을 시켜드려서 죄송하네요.”
“비꼬지 마. 너도 그렇잖아?”
“....”
침묵에는 긍정이 함뿍 담겨있다.
“나도 이쪽에 전문분야가 아니긴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뭐가 달라질 건 없는 것 같아. 일단 자고 일어나서 생각해 보면? 또 몰라. 천지가 개벽하듯이 뭐가 달라져 있을지도.”
“일단 자고 일어나 봐요. 정말 뭔가 변해있을 지도....”
기대가 하나도 없어 보였지만 츠카사는 그렇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처음으로 상대 네이머를 만났지만 운명적인 화학 반응은 불발이 나고 야근까지 한 가엾은 회사원이기도 했다. 잠은 보약이니까. 레오는 그렇게 말하며 대충 구석으로 밀어붙인 저녁 식사의 잔재에게 다가갔다. 츠카사 역시 굳은 표정으로 다가갔다. 더 이상 먹을 것 같지 않은 음식들을 버리자는 것에 츠카사는 동의했다. 그리고 심각하게 물었다.
“츠키나가 씨, 여쭤볼 게 있는데 이것들, 음식물 쓰레기라고 하죠? 이런 것들은 어떻게 처리하나요?”
레오는 츠카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못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레오는 그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쾌활하게 외쳤다.
“너 재밌는 녀석이구나!”
물론 츠카사는 기꺼워하지 않았다.
*
츠카사는 밤새 잠을 엄청 설친 게 분명했지만 레오는 그럭저럭 잘 잤다. 옆에서 조용히 한참을 엎치락뒤치락하던 박자를 세어보다가 나른한 음표들의 세계에 까무룩 잠이 들었다. 아침 해가 찾아들고 반짝 눈을 뜬 레오는 낯선 방에 어리둥절해 하다가 옆에서 색색 대며 잠든 붉은 머리의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제처럼 멋들어지게 올라간 머리 대신 중력을 순순히 받아들인 앞머리가 가볍게 엉켜있고 그 밑으로 곱상한 얼굴이 선을 그린다. 작게 벌어진 입에서 나오는 숨소리는 일정하다. 꽤나 예쁘고 잘생긴 얼굴이지만 딱 그거뿐이다. 그를 사랑해야겠다는 선고는 이번에도 내려오지 않았다. 몇 시간 뒤 일어난 츠카사도 레오와 같은 감상을 말했다.
“사실 이런 게 정상일지도요.”
변변한 요리도구가 없기에 아침 겸 점심식사는 레오가 편의점에서 사온 도시락으로 대체됐다. 전자렌지가 있을 리 만무하니 편의점에서 데우고 식기 전에 부리나케 뛰어오는 과정이 어느 전무님에게는 꽤나 재밌는 경험이었는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서민 문화 Marvelous!’라는 괴상한 반응을 보였다. 그것도 잠시, 닥쳐온 현실을 끝까지 미루는 성격이 아닌지 지금의 상태에 관해 말을 꺼냈다.
“물론 몸에 서로의 name이 새겨진다는 건 굉장한 일이지만 저희는 거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당신과 제가 어떤 특별한 인연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게 Lover까지 가진 못한 거죠.”
“매스컴의 과장일 수도 있지. 상황이 로맨틱하다는 건 나도 인정.”
“그래요, 말도 안 되는 일들이라니까요. 다른 집도 다 그럴 겁니다. 네이머도 아쉽지만 상상 속의 소재인 거죠.”
츠카사는 정부가 이 말도 안 되는 일들에 따로 맨션까지 세울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어떻게든 이 상황을 정리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고 레오도 적당히 받아주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암묵적으로 내린 결론은 어쨌든 이 집에서 빨리 퇴거하고 갈 길 가자는 것이었다. 이런 비일상적인 해프닝은 레오에겐 크게 환영할 일이었다. 그 안의 인스피레이션은 이 재미난 상황에 신나게 쏟아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끈 하나만 당기면 천장에서 와르르 쏟아질 것 같은 예감.
레오의 몸에서 조금씩 면적을 넓히던 네임도 결국 이걸로 마무리 될 이야기였다. 다리를 벌리거나 허리를 숙여야 볼 수 있는 그의 네임은 아마 계속 남아있을 예정이겠지만. 저번에도 그랬던 것처럼 레오와 몸을 섞을 상대에게 적당한 자극을 주는 것 정도로 임무를 다하지 않을까. 이름을 궁금해 하는 가상의 상대에게 떠들 말은 대충 이렇지 않을까. 내 상대 네이머? 이미 만났어. 재밌게도 나도 그녀석도 상대에게 사랑을 못 느꼈지 뭐야!
그렇게 끝냈어야 했다.
“제 말이 맞죠. 금방 찾아오실 거라고.”
직원은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레오는 굳이 그에 반박하지 않았다. 츠카사가 가급적 빨리 나가고 싶다며 차분히 퇴거 절차를 물었고 직원은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먼저 이걸 작성해 주시고요. 항목은 빈틈없이 기입해 주시고 이쪽에 희망 퇴거 날짜를 적어주세요. 싸인은 안 되니 도장으로 하세요. 어차피 혼인신고서에도 도장 필요하니 없으시면 이번 기회에 파두시는 것도 괜찮고요. 혼인신고서는 직접 가져오셔야 하고요, 처리는 이틀 안에 문자 메시지로 안내 될 거예요.”
평온하게 서류를 훑던 남자의 어깨가 눈에 띠게 움찔했다.
“혼인신고서요...?”
“네. 두 분 이 집을 나가서 따로 살려고 하시는 거 아닌가요?”
“아, 마, 맞는데요. 그러니까 집도 좁고 그러니 더 나은 환경에서 더 안락하게 살고자-.”
장황해지는 변명에 직원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해요. 솔직히 이 맨션 시설이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죠. 그래도 나가기 위해선 반드시 혼인신고서가 필요해요. 보통은 먼저 서류상으로 신고를 올려두고 나중에 식을 올리는 식으로 순서를 정한답니다. 식을 먼저 올리고 싶어 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저는 이쪽을 추천 드려요. 서류는 서류일 뿐이니까요. 물론 식을 올리고 싶다면 조금 더 이곳에 머무르는 것도 방법이죠.”
딱딱한 츠카사의 얼굴을 다르게 해석했는지 직원이 여러 설명을 덧붙였다. 옆에서 보고만 있던 레오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게, 실은 나 예능계 쪽에 이름이 좀 팔려있는 상황이라 혼인 관계가 되면 기획사 쪽이랑 계약이 틀어지게 돼. 법적인 문제라 조금 곤란해져서 그러는데 혼인 신고 없이 나갈 순 없을까?”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맞습니다, 이이가 사정이 좀 있어서.”
츠카사는 놀란 얼굴로 레오를 바라보는 실수는 하지 않았고 조금 그 말을 받는 어색한 호칭을 곁들인 애드립까지 선보였다. 다행히 직원은 의심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녀는 안타까운 얼굴을 하고 말했다.
“그러시군요. 연예인이셨구나. 어쩐지 다들 한 얼굴 하신다 했어요. 하지만 절차상엔 무조건 혼인 신고서가 필수에요. 예외의 상황은 아쉽게도 어떻게 방법이 없네요.”
“그러지 말고 혹시 윗사람한테 물어봐주면 안 돼?”
“여쭤는 볼게요. 만약 대안을 찾으면 번호로 연락을 드리겠지만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그 기획사...라고 하셨죠? 그쪽과 조율하는 편이 빠를 지도 몰라요.”
직원의 말에는 거짓이 없어보였다. 서로의 얼굴을 흘끔 마주 본 두 사람은 더 이상 뭘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결국 둘은 아무 수확 없이 관리 사무소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정말 crazy하지 않습니까?! 무조건 결혼이라니! 이 맨션을 나오는 조건에 인생 중대사가 들어가는 건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네이머는 인권도 없습니까? 이런 강압적인 조건은 정말 말도 안 됩니다. 변호사를 선임해서 대응해야 합니다!”
씩씩거리는 목소리가 엘리베이터에 울렸다. 얼마 숫자를 카운트하기 전에 금방 멈추는 좁은 상자에서 내리며 레오가 물었다.
“근데 왜 그런 연기는 한 거야? 우리 둘이 사랑하고 있는 것 같은 연기.”
“...직원도 그랬지만 이웃들 태도도 그랬잖아요. 저희가 커플인 게 당연하단 분위기.”
관리 사무소에 가는 도중 레오와 츠카사는 같은 층의 이웃을 만났었다. 어제 이사 오신 분들인가봐요, 라며 반갑게 대화의 물꼬를 튼 그녀는 일주일 후에 이 맨션을 떠날 예정이라고 했다.
‘나는 아직도 그이를 봤을 때의 날을 잊지 못해요. 당신들도 그랬죠?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학생 시절엔 네이머란 게 정말 싫었지만 지금은 너무 감사하고 있어요.’
그 면전에 두고 아 그러세요? 저희는 안 그런데 라고 말하지 않을 주변머리는 둘 다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직원에게 저랑 이쪽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면 저런 안타깝네요 라고 할까요? 특수 case라고 하면서 실험용 쥐처럼 굴려지지 않으면 다행이죠. 안 그래도 네이머란 이유로 이것저것 요구당하고 있는데.”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은 안 그런가 보네.”
레오의 눈에 비친 맨션 주민은 정말로 행복한 듯 보였다. 문제는 둘에게 있었다. 네이머 한정 합법 콩깍지가 둘에게 내려오지 않은 것. 그렇다고 해서 이걸 굳이 원인을 알아낸다거나 상황을 개선시킬 의지는 없었다. 그냥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하고 자신이 갈 길을 가면 될 일.
“이유는 별로 궁금하지 않지만 이 상황은 흥미로워! 이름을 가졌지만 운명의 사람이 아니었다? 비극적인 이야기일지, 네이머라는 지금의 세계를 풍자할 이야기일지 아직 가닥을 못 잡겠어!”
“남 일이 아니고 본인 이야기입니다. 좀 진지해지는 게 어때요?”
츠카사의 얼굴엔 불만이 가득하다. 지금 당장 집을 나갈 수 없다는 것과 레오의 태도가 합쳐져 이 상황이 영 못마땅한 것 같다.
“진지한 이야기라면... 그래, 방 문제 같은 거?”
“방이라뇨?”
“방은 하나뿐이잖아. 누가 쓸 건지 정하는 것도 가장 현실적인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츠카사의 표정이 제법 진지해졌다. 그 역시 개인 방을 노리는 게 틀림없었다.
*
「당신 어디입니까!!」
전화기에서 쏟아지는 목소리에 노기가 충만하다. 레오는 잠시 핸드폰에 귀를 뗐다가 다시 말했다.
“밖인데-. 점심은 먹었어?”
「예에, 먹다마다요! 그보다 잊었습니까? 오늘 낮에 분명히 세미나가 있다고 며칠 전부터 말씀 드렸을 텐데요?」
“앗, 그랬나? 미안! 깜박했어!”
「그럴 줄 알았습니다! 이번에도 저 혼자 다녀왔다고요! 적어도 연락은 돼야 하는 거 아닌가요? 당신이란 사람은 휴대폰이 멀쩡히 있으면서도 많지도 않은 연락 때마다 매번 연락도 되지 않고-...」
레오는 쏟아지는 목소리에 적당히 대답―응, 응, 미안, 죄송해요, 잘못했어―을 했고 어느 정도 분이 풀린 강제 하우스메이트이자 자신의 하나 뿐인 네이머의 통화가 끊기자 한숨과 함께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반대편에서 그런 레오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남자가 물었다.
“누~구? 매니저는 아닌 것 같은데.”
“으음, 내 마누라 같은 분이긴 하지만....”
“아하-, 임금님의 그~?”
새끼손가락을 들어보이던 남자가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레오와 현재 프로젝트를 같이 진행하고 있는 가수 사쿠마 리츠는 아까까지 시끄럽게 소리를 전달하던 핸드폰을 톡톡 튕기며 말했다.
“얘기를 들었을 땐 사이가 안 좋아 보였는데 그것도 아닌가봐?”
“사람의 마음에 정답은 없다지만 릿쯔, 그건 아냐. 방금은 내가 잘못했으니까 고분고분 사과한 거지만. 상상해봐! 지금까지 생판 남이랑 갑작스레 살아야 하는데 한쪽은 집안일 하나 제대로 못하는 철부지 도련님에 변주곡에 딱 어울리는 생활 리듬을 가진 내가 만났다고. 밥 하나 제대로 못 지으면서 삼시세끼 꼬박꼬박 먹어야 되고 요즘은 나한테까지 규칙적인 생활을 슬금슬금 참견하고 있다고.”
“음~ 그래서 임금님 요즘 작업실에서 밤샘이 많았구나? 오늘 점심 먹자고 잡아둔 것도 땡땡이치려고 그런 거고~?”
“정답은 릿쯔의 망상 속에 남겨두기로 할까!”
“그래도 난 임금님이 부러운데. 내 이름이 마~군의 몸에 있으면 괜찮을 것 같고? 물론 없어도 우린 가족이지만.”
“릿쯔랑 이사라는 소꿉친구니까. 내 경우는 그렇지, 누군진 모르겠지만 내가 아닌 남이 정한 거잖아? 내게도 취향도 있고 선택할 권리쯤은 있을 텐데 싹 무시당한 셈이란 말이지. 다른 네이머들한텐 만능 필터가 있는 모양이지만 난 그것도 씌워주지 않았으니. 솔직히 좀 지쳐.”
그렇게 말하며 레오는 눈앞의 음료를 쪼옥 빨아들였다. 시원한 음료는 지금 날씨에 먹기엔 좀 차가운 감은 있지만 답답한 속에는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츠카사와 같이 살게 된 지 한 달이 지났다.
둘 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성인이니 어느 정도는 괜찮을 지도 모른다고 안이하게 생각했다는 걸 레오는 인정해야 했다. 성인의 지성과 예의는 스스로의 영역을 완고하게 만들었다. 적당히 눈 감고 넘어갈 서로 다른 삶이 겹치고 고유의 리듬은 너무나 달라 엉망진창의 화음을 만들어낸다.
남자는 좋은 집에서 바르게 살아간 도련님답게 일정한 수면시간과 규칙적인 식사를 하려고 노력했으며 레오는 내킬 때 먹고 그 안의 들끓던 영감이 조용해지면 잠자리에 드는 패턴을 고수하고 있었다. 츠카사는 그것이 영 못마땅한 기색인지 넌지시 그러다 돌연사합니다 라는 걱정인지 저주인지 비슷한 말들을 던짐으로써 레오의 삶에 난색을 표했다.
집의 유일한 방은 레오가 쓰게 됐다. 예로부터 내려오던 정정당당히 승부를 겨루는 방식인 가위바위보를 제안했고 츠카사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5전 3승이란 룰을 정하고 시작한 비장의 가위바위보는 레오가 연달아 세 판을 이기는 걸로 좀 싱겁게 결정되었다. 방에 있는 침대를 포함해 방에 있는 모든 물건은 레오가 쓰되 이 집의 유일한 옷장은 둘이 나누어 쓰기로 했다. 그 좁은 옷들의 공간에서도 둘의 스타일은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어두운색 계열로 이루어진 그의 정장과 캐주얼한 옷들은 인접한 대립국처럼 몸을 붙이고 서로 대치하고 있다.
방에서 깔끔한 건 옷장까지였다. 이사 올 때 마구잡이로 짐을 싼 상자에서 쏟아져 나온 레오의 소지품들이 그대로 탑을 쌓고 있는 것 역시 츠카사는 좋게 보지 않았다. 그는 딱히 정리벽이 있는 것 같진 않았지만 전쟁이라도 난 것 마냥 정돈되지 못한 방의 몰골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저거 언제 정리할 거예요?
한 달. 레오와 츠카사의 본의 아닌 동거가 시작하고 나서 츠카사의 잔소리는 서서히 시작됐다.
사람에게 정답인 생활 패턴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소한의 정리는 하고 살아야죠. 이게 뭡니까? 청소하기 힘들면 청소부를 부를게요. 이런 조그만 집에 부르는 것도 웃기지만 말이죠. 당신에게 그럴 능력이 없다는데 어떡하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다가도 그는 퍼뜩 놀라 사과를 했다. 지금은 말이 좀 심했네요,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방을 나간 것이 며칠 전. 가족들과도 소원한 관계인데다가 일찍 나와 산 레오는 츠카사의 잔소리가 새로웠지만 한편으로 짜증이 치미는 자신을 볼 수 있었다.
스스로가 누군가에게 칭찬 받을만한 삶이 아니란 건 물론 알고 있지만. 실제로 그런 대접을 받으니 흘려들었다고 생각했는데도 데미지가 조금씩 조금씩 쌓이고 있었다. 그의 다른 동료들이 으레 하던 볼멘소리까지 다시 곰곰이 되짚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레오는 어이가 없어졌다. 츠카사가 네이머이기 때문에 그의 말에 이렇게 신경을 쓰는 건지. 그렇게 고민을 해보았지만 결론은 매번 아니다 였다. 그는 레오와 같이 있지만 레오를 이해하려는 일말의 노력도 없는 그저 자신의 이름을 목덜미에 달았을 뿐인 완벽한 제삼자다. 레오 역시 그의 이해와 인정을 받을 필요도 없다. 신경을 쓰지 않으면 되는 사람이지만 그와 얼굴을 마주하기 싫다는 것도 레오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츠카사에게도 당연히 결점은 있다. 그는 밖의 음식을 꺼려하는 주제에 요리 솜씨는 지독히도 없었다. 자취 경력 전무인 이 도련님은 밖에 나가 살면 매번 집에서 요리를 해먹고자 하는 학구열은 있었지만 결과는 매번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것을 만들어 냈다. 집에 들어오면 창문을 열고 환풍기를 열심히 가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프라이팬을 까맣게 태우고도 남을 냄새가 집안에 가득 차 있었다. 레오는 좁은 부엌에서 고군분투하는 그에게 비키라 하고 새 프라이팬을 꺼내어 간단한 볶음밥 같은 걸 해줬다. 옆에서 벌 받는 아이처럼 있던 츠카사는 그걸 가만히 먹다가도 가끔 땅이 꺼질 한숨을 흘렸다. 자신이 해준 요리를 맛있게는커녕 마지못해 먹는 사람을 굳이 끝까지 볼 필요도 없으니 레오는 그를 피해 방문을 닫고 들어갔다. 그릇을 끼적이는 숟가락 소리, 잠시 후에 개수대를 두들기는 물소리. 일련의 과정들을 다 귀로 담아내면서 울컥울컥 치솟아 오르는 감정을 목으로 삼켰다.
출근하는 남자에게 잘 다녀오라며 보내는 가벼운 키스. 조금 더 밀착하는 몸. 진해진 키스. 결국 입술은 떨어지지만 아쉬운 듯 이마 콩. 출근 시간만 되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핑크빛 배웅이 가득한 맨션에서 츠카사와 레오만 동떨어져있다.
둘 다 집에 있어도 서로에게 오가는 살가운 대화는 없다. 서로를 무시하고, 최소한의 대화만 이어졌다. 남자의 소음이 괜히 신경 쓰여 큼지막한 헤드셋을 쓰고 침대에 무너져 있다가 답답한 공기를 참지 못해 뛰쳐나가고. 밤늦게 돌아오면 깊이 잠든 집안의 공기를 흔들지 않으려 애쓰며 다시 숨죽여 잠든다. 일어나서 거실로 나오면 늦은 오후 햇살만 가득한 집안에 유독 흰 칸막이가 레오를 거부하듯 가로막고 있다. 거실에서 생활하는 그가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해 가져온 그것은 주인이 부재중일 때도 그 소임을 다하고 있었다.
처음엔 이렇게까지 사이가 나쁘지 않았었다. 이 동거는 적어도 일 년간은 지속되며, 이 기간을 단축되려면 맨션 자리가 부족해질 상황뿐이지만, 다른 곳과 달리 빠른 퇴거가 이루어지는 맨션에 빈 방이 아주 많다는 걸 알고 난 뒤부터였을까. 묘하게 삐걱거리기 시작한 건. 어쩌면 레오가 방을 차지하고 난 이후부터 일수도 있겠다.
츠카사는 온수 버튼을 눌러야 뜨거운 물이 나오는 집을 이해할 수 없으며 그것도 바로 나오는 게 아니라 물이 데워지는 시간이 어느 정도 흘러야 나온다는 것에 넌더리를 냈다. 레오의 불만은 방음의 기능이 있으나마나한 벽에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옆집의 대화가 어렴풋이 들렸는데 귀가 예민한 레오로서는 이만저만한 방해가 아니었다. 거실 뷰가 좋지 않다, 집이 너무 좁다, 집도 집인데 주말마다 네이머들 대상으로 한 세미나에 반강제적으로 참가해야 한다, 등 입을 열면 청산유수처럼 나올 것 같은 불평의 근간은 자신이 원해서 이곳에 온 게 아니라는 것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집 들어가면 또 혼나겠지. 약속 좀 제대로 지키라면서. 머릿속에 츠카사의 화가 난 목소리가 어렵지 않게 재생되었다. 내가 잘못했지만, 거기 가기 싫고. 무슨 부부 클리닉도 아니고 다들 강사 말에 고개 끄덕끄덕이면서 듣지만 공감을 하나도 하지 못하는 레오는 창문 밖의 새소리를 듣거나 나눠준 종이에 음표들의 열창을 그렸었다. 그것도 한두 번이지 더 이상 가기 싫고. 하지만 성실한 태도를 보이지 않으면 문제아로 낙인 찍혀서 퇴거가 더 늦어질 수도 있다니까 가긴 가야하고.
“릿쯔, 이러다가 인스피레이션이 뚝 끊기겠어. 이거 역시 세계적 손실이지?”
“임금님의 노래를 더 이상 못 부르면 슬플 것 같은데~”
“어떡하지. 11개월이나 남았어. 단테의 신곡이 펼쳐진다-! 이제 막 연옥에 다리를 들였을 뿐인 선택받은 네이머! 이제부터 시작이야. 루시퍼가 하늘에서 쫓겨나 추락하면서 땅속으로 뚫어놓은 지옥의 입구라고~!”
“헤에 그만큼이면... 임금님 죽이기에 충분한 시간~?”
“나도 나지만 그녀석도 죽겠지. 서로가 만들어내는 비극이랄까.”
“음~ 임금님이 죽으면 곤란하니까 내가 가서 슥삭 처리해줄까? 흡혈귀의 힘을 보여줄게.”
“그 이후에 나도 커다란 스오 가문에서 슥삭하러 올 거야. 둘이 죽으면 지옥도도 끝나겠군. 잘 됐네, 잘 됐어.”
먼지처럼 가벼운 말을 휙휙 던지던 레오가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리츠가 손을 뻗어 레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착하지, 착하지. 아이처럼 어르는 손길에 레오는 어깨를 추욱 늘어뜨렸다.
“임금님이 살아나려면 역시 그 운명의 상대님과 사이좋게 지내야겠네.”
“응, 무리무리. 그 녀석 나 싫어해.”
“정을 줘보는 건 어때? 임금님 은근 내 사람, 아닌 사람 경계 심한 편이니까.”
“흐응, 내가?”
“응. 덕분에 임금님 사람인 나는 아주 귀여움을 받고 있지. 그 사람도 임금님을 제대로 알면 절대 싫어할 수 없을 거야~.”
“평가가 아주 후하잖아? 그쪽이 나를 안다고 딱히 변할 것 같진 않지만. 어쨌든 응... 노력해 볼게.”
이번엔 칭찬의 의미인지 리츠가 다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얌전히 그 손길을 받던 레오가 불쑥 말했다.
“그래도 저녁까진 같이 먹어줘.”
“알겠어. 임금님 어리광쟁이~”
*
9시를 넘어가는 시간. 레오는 슬그머니 집 문을 열었다. 문틈에서 나오는 흰 빛으로 츠카사가 자고 있지 않다는 건 알았지만 굳이 큰 소리를 낼 필요도 없었다. 현관에서 왼쪽으로 가면 거실, 오른쪽으로 가면 방. 굳이 불편하게 얼굴을 부딪히지 않고 바로 방으로 들어갈 수 있다. 화장실을 가려면 마주치겠지만 조금 늦게 씻어도 괜찮으니까.
“츠키나가 씨.”
방으로 그대로 들어가려던 레오가 어깨를 움찔했다. 거실 쪽에서 들려오는 또렷한 목소리를 무시할 수도 없다. 어쨌든 세미나를 무단으로 빠진 건 레오가 나빴다. 어깨를 늘어뜨리며 레오는 거실로 몸을 틀었다. 작은 식탁에 츠카사가 앉아있었고 레오는 그를 향해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잠깐 얘기 괜찮으신가요.”
“어, 응....”
죄인은 얌전히 그의 반대편 의자에 앉았다. 크로스백을 벗어 최소한의 방어라도 하듯 끌어안고 레오는 상대의 야단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츠카사가 말했다.
“그간 죄송했습니다.”
“아니... 응?”
레오는 고개를 들었다. 갑작스런 외계인의 공격으로 츠카사와 레오가 할 말이 바뀐 게 아니라면 츠카사가 저런 말을 할 리가 없는데. 예상도 못한 대화에 눈을 껌벅이는 레오에게 이번엔 츠카사가 시선을 숙였다가 다시 눈을 마주했다.
“오늘 세미나 내용에서 네이머 간의 감정 동화에 대한 얘기를 들었어요. 네이머끼리는 일반인보다 서로의 감정에 대한 공감도 깊을 뿐더러 상대가 굳이 자신의 상태를 얘기하지 않아도, 멀리 있어도 느낄 수 있대요. 서로 간에 감정 네트워크가 연결돼 있어서 공유라고 볼 수 있을 정도라고 하네요. 때문에 다른 이가 화나 있을 경우 상대편도 그 감정에 동화되어 같은 기분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하네요. 물론 부정적인 감정이라도 그 감정을 쏟아낼 표적이 같으면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도 많기 때문에 네이머 부부여도 싸움은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고 해요. 감정 동화 인지 판단하기 쉬운 건 네임이 쑤시냐로 알 수가 있다고 하고요. 결론적으로 둘이 긍정적인 감정을 가지는 게 서로에게 제일 좋은 거라는 이야기였어요.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저희가 제대로 된 네이머라고 하기 힘들고 네임에 뭔가 반응이 있는 일은 없었지만 일단은 서로의 이름이 있으니까, 저런 감정 동화가 오갈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저의 짜증이, 이 부정적인 감정이 모두 당신에게서 비롯된 게 아닌데도 당신은 감정 동화에 의해 저의 부정적인 감정을 오롯이 느끼고 있던 게 아닐까 해요. 저도 어느 순간부턴가 당신을 보면 답답해졌는데 이건 츠키나가 씨가 저에게 느끼고 있는 감정이 전염된 걸 수도 있지 않을까요. 당신을 보며 답답해 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한 달간은 서로가 서로에게 감정적인 오해가 덧씌워져서 지낸 것 같습니다. 이에 사과를 드리고 싶어요.”
“아니, 아니.”
레오가 손을 내저었다.
“꼭 그런 게 아니더라도 그쪽 같은 사람이 나처럼 엉망진창으로 사는 걸 보면 짜증나는 것도 당연하니까. 원인은 애초부터 나한테 있던 거니 사과할 필요는 없고....”
“츠키나가 씨가 왜 엉망진창으로 살아요? 사는 방식에 정답은 없잖아요. 당신을 보며 딱히 엉망진창이라고 느낀 적도 없고요. 생활 패턴은 사람마다 다르다고 생각해요. 방에 있는 짐들은... 조금 정리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 때 한 실언은 지금도 후회하고 있습니다. 정말 무례했지요, 죄송합니다.”
다시 츠카사의 고개가 아래로 향했다. 레오는 당황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츠카사가 잘못한 상황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보기에도 그랬다. 츠카사처럼 사는 삶, 레오처럼 사는 삶을 비교해도 누가 잘못된 지는 뻔한데 남자는 무엇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저는 그래요. 당신이 이 집을 불편하게 여기는 것도 저 때문이잖아요? 작업이 바쁘신 것도 있겠지만 일부러 집을 피하는 걸 모를 정도로 눈치는 없지 않으니까요.”
그건 어느 정도 사실이었기에 레오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츠카사가 이어 말했다.
“너무 안이하게 생각한 것 같아요. 당신과 나는 네이머니까, 만나기만 하면 문제 없이 지낼 거라고, 그렇게 아무 준비도 없이 왔어요. 밥 하나도 제대로 못하는 덜떨어진 상태로 말이에요. 늦었다고 생각은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다시 당신과 잘 지내고 싶어요. 적어도 당신이 이곳을 쉴 수 있는 공간이라고, 집이라고 인식하셨으면 좋겠어요. 노력할게요. 그러니 이 츠카사를 용서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레오는 숨이 막혔다. 갑자기 자신이 다른 장르로 온 것 같았다. 허리께를 조이고 그 밑으로 풍성하게 펼쳐지는 색색 드레스와 그 가운데 기품 있는 어느 남자. 그래, 여긴 루이 14세가 있는 베르사유 궁전이야! 눈앞에 있는 사람은 온갖 예법을 몸에 갖춘 왕자님이지. 그렇지 않다면 무대 위도 아니고 현대에 이런 인물이 있을 리가 없다.
눈이 뱅뱅 돌 것 같은 혼란 속에서 레오는 이렇게 생각했다. 역시 저 녀석 외계인에게 공격이라도 당한 건가, 가엾게도.
레오는 자신이 무슨 대답을 했는지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고 있었다. 저런 정중함에 푹 절여진 말을 거절하는 방법 같은 건 전혀 모른다는 걸.
레오가 리츠에게 한 말은 빈 말이 아니었고 츠카사에게 들은 일련의 사과들은 기폭제가 됐다. 연말이 다가오고 있고 레오의 스케줄도 점점 숨통을 조여들 예정이었다. 레오가 떠안고 있는 집 문제 혹은 츠카사 문제를 더 바빠지기 전에 결착을 내야 했다.
방에 무질서하게 들어놓은 물건들을 다시 원래 있던 상자 속에 차곡차곡 넣는다. 이사한 이후로 간만에 바닥을 보이는 방을 말끔히 쓸고 평면도를 보고 연필로 이리저리 구조를 고민하다가 방 한가운데 떡하니 있는 침대를 복도와 붙어 있는 벽에 밀어붙였다. 벽의 한기는 올라오겠지만 공간은 전보다 넓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올 때부터 놓여있던 화장대를 이리저리 재보던 레오는 마음을 정하고 사무소에 전화를 걸었다. 쓰지 않는 가구기 때문에 처리하고 싶은데 어떡하냐는 문의에 직원은 맨션 기본 가구이기 때문에 회수하러 오겠다는 답변을 주었다.
화장대까지 사라진 방은 예전보다 훨씬 넓어졌다. 만족스럽게 보던 레오는 자신의 짐에서 태반을 쓰레기로 분류해 처리한 다음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방바닥을 굴러다니며 작곡을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이 집에서 작곡을 한 건 처음이었다.
흰 종이에 가득 찬 검은 음표가 가득 차고, 다음 장에도 가득 차고, 또 차고. 별로 망설이지도 않고 나온 멜로디는 영감을 잔뜩 받아 레오가 보기에도 썩 괜찮은 곡이었다. 그리 길지 않은 곡이 완성되자 그것들을 부리나케 챙겨서는 집을 나섰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저녁은 스키야키였다. 부제로는 화해의 스키야키, 재시작의 스키야키 같은 것이 붙을 터였다. 협찬으로는 마트의 손쉽게 해 먹는 스키야키 한바구니 세트가 있겠다.
“방 다 치웠는데.”
보글보글 끓는 국물 너머로 직장인의 시장함과 서민 음식에 잔뜩 기대를 품은 도련님에게 레오가 말했다.
“이제 방은 네가 쓰도록 해.”
“네? 하지만 츠키나가 씨가 쓰기로 한 거고....”
“한 달 지냈으니 괜찮아. 난 방은 딱히 필요 없고 작업도 다 작업실에서 하니까 그렇게 까진 필요하지 않아. 안 그래도 바빠져서 이제 더 작업실 비율 높아질 거니까 이왕 집에서 업무가 많은 사람이 하는 게 좋지 않겠어?”
츠카사는 퇴근이 빠른 편이었다. 그렇다고 일이 적은 건 아닌 듯 했다. 그는 매번 집에 돌아올 때 일거리를 한가득 짊어져 오고 조그만 테이블에 허리를 숙인 채 옆에 서류더미를 처리하곤 했다. 왜 그러는지 예전에 레오가 넌지시 물어본 적이 있는데 회사에서 자신이 늦게 퇴근하면 부하 직원들도 눈치를 보며 늦게 퇴근하는 일이 맞아 정말 급할 때를 제외하곤 가급적이면 집에서 처리한다고 한다.
“좌식 불편하지 않아? 방이면 책상을 놓을 수도 있고 침대도 쓸 수 있어.”
“그건 정말 매력적인 제안이지만 이제 와서 바꾸는 것도 좀 그렇고, 저도 나름 이곳 생활에 익숙해졌어요.”
“잠을 제대로 못자서 맨날 눈 밑이 퀭한 게 익숙해진 거야? 잠은 제대로 침대에서 푹 자. 나는 침낭에서도 잘 자고 라꾸라꾸에서도 잘 자니까.”
“저 이 타이밍에 질문은 이상하지만, 라꾸라꾸가 뭐죠?”
“일명 간이침대. 편리하고 실용적이고 경제적인 침대라는 전략을 세웠고 성공했지. 물론 회사에 라꾸라꾸가 있으면 도망치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요는 도련님과 달리 나는 어디서든 잘 잔다는 말이야!”
“잠은 제대로 침대에서 푹 자라는 말을 제가 돌려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그럼 이건 어떠세요? 침대 그래도 2인용이니까 같이 자는 건?”
“으음, 그건 조금 고민을 해 보자. 여튼 짐은 다 치웠으니까 책상이라도 마련해서 멋진 자세로 작업하라고, 전무님! 나는 거실에 나만의 성을 지을 거니까. 코타츠도 놓고 말이지~”
“앗, 코타츠! 들이시면 저도 방문을 허락해 주세요. 한 번 쯤은 들어가 보고 싶었습니다.”
“진짜 성에 살았구나, 도련님은! 그러고 보니 줄 게 있는데.”
레오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다 오늘 갓 완성한 곡이 담긴 usb를 건넸다.
“이게 뭐예요?”
“곡이야. 그냥 선물.”
보라색 눈이 아이처럼 반짝였다.
“설마 당신이 만드셨나요? 저에게 주시는?”
“일단은 이게 일이고.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라.”
“와아, 벌써 크리스마스가 온 기분이에요. 지금 들어봐도 될까요?”
레오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츠카사는 거실에 있는 자신의 노트북에 usb를 연결했다. 작은 스피커의 조금 막힌 음질에서 곡이 아장아장 흘러나왔다.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노래네요. 특히 메인 음이라고 해야 하나요? 이게 리코더라 정말 깜찍해요. 콧노래로 흥얼거릴 것 같은 느낌이고.... 제목이 뭔가요?”
“타이틀은 ‘단칸방 왕자님의 한 달’. 커다란 성에서 갑작스레 아랫동네로 끌려온 왕자님의 고군분투를 표현한 노래야!”
“그 왕자님이란 거 절 말하는 거 아니죠?”
“글쎄~? 코타츠에 한 번도 안 들어간 어떤 왕자님이 맞긴 하지.”
“으음, 제가 아닌 것 같은데요.... 정말 귀엽달까, 뿅뿅 걷는 펭귄 왕자 느낌이고. 스오 츠카사는 좀 더 어른스럽고 멋진 이미지잖아요?”
“오호, 그렇게 나온단 말이지? 다음엔 자아도취 컨셉도 넣어줄게.”
푹 익은 버섯을 자신의 그릇으로 옮기며 레오가 말했다. 뜨거운 김 너머로 츠카사의 부드러운 미소가 보였다. 감정 동화라던가 그런 거 별로 믿진 않지만 이 집에서 사람의 마음이 옮아가는 거라면 그렇다면 자신에게도 책임은 있다고 생각했다. 꼭 네이머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어딜 가든 그 분위기는 전염되고, 또 자리 잡기에.
저렇게 웃으니까 얼마나 예뻐. 어디서나 사랑받는 전무님일 텐데 괜히 여기서 생고생 하고. 완전한 낯선 이지만 다른 의미로도 레오는 인정해야 했다. 이 집을 함께 쓰는 어떤 의미에선 파트너라는 걸.
이걸로 된 게 아닐까. 움터야 할 사랑은 무덤덤한 감정의 흙더미 아래에서 빛도 보지 못하고 죽어버린 것 같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운명이다. 죽은 운명의 잔재인 인연은 유효기간 일 년으로 계속될 예정이었다.
구수하게 익어가는 국물의 향과 고군분투하는 왕자님의 멜로디와 스키야키에 고군분투하는 전무님. 그건 썩 나쁘지 않은 조합이어서 레오는 만족하기로 했다.
*
한 해의 끝자락을 알리는 12월이 왔다. 연말을 향해 날짜를 하나하나 부풀릴수록 레오와 츠카사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레오는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잡힌 공연이 코앞으로 다가와 막바지 준비가 한창이었고 츠카사는 레오가 어림짐작하는 서류더미와의 전쟁 같은 걸로 평소의 신념에 위배되는 잦은 야근에 시달리고 있었다.
며칠간의 밤샘에 시달리다 집에 간신히 돌아온 레오가 시체처럼 잠들어 있다가 게슴츠레 눈을 뜨면 어둠이 깊어진 방에 새하얀 모니터 불빛 속에 츠카사가 좀비처럼 그 빛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사둔 코타츠는 조립도 하지 못한 채 거실 구석에서 여전히 상자의 모습으로 이 집의 두 사람 대신 깊은 잠을 취하고 있었다.
냉장고에 반찬 대신 에너지 드링크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기를 몇 주, 해방은 레오가 빨랐다. 지긋지긋한 마감을 벗어난 것 같지만 다른 일정이 연달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말의 사회인이라면 피할 수 없는 모임들. 그렇다고 해도 지옥의 마감에서 빠져나온 레오였다. 연말 회식 따위 샥샥 해치우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었다.
“...다녀왔습니다아....”
부글거리는 속을 억지로 눌러 삼키며 고되게 걸어온 길의 끝엔 따뜻한 집이 있었다. 가지런히 놓인 검은 구두를 피해 자신의 신발을 패대기치며 레오는 힘주어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 아니다.
“오셨어요?”
대답은 방 쪽에서 들려왔다. 레오는 거실로 몸을 틀었다. 질질 끄는 걸음 도중에 가방이 비에 잔뜩 젖은 낙엽마냥 흘러 떨어졌다. 문을 열고 레오는 흰 변기를 붙잡고 고개를 숙였다. 곧이어 줄곧 참아온 역한 기운이 힘차게 쏟아졌다.
한참을 꺽꺽 대며 붙잡고 있자 누군가 등 뒤를 두들겨 주었다.
“오늘도 성대하네요. 많이 마셨어요?”
“샴페인... 다섯 잔 정도.”
“술 너무 약한 거 아니에요?”
“아니야, 그거 도수가 은근 세다고.”
헐떡대다가 겨우 몸을 추슬러 입을 헹궜다. 등을 두들겨 주던 츠카사는 어느 샌가 물을 들고 서 있었다. 편해 보이는 라운드티에 안경을 낀 모습을 보며 레오가 힘없이 웃었다.
“전무님, 오늘도 프리하네. 철야 가시나요~?”
“안 가려고 노력 중입니다만. 당신은 얼른 주무세요. 약도 드시고요.”
숙취 해소제를 건네받은 레오는 두 알을 입에 털고는 물과 함께 삼켰다. 깨질 것 같은 두통과 속은 여전히 울렁거리지만 억지로 웃을 정도는 되었다.
“코타츠에서 잘까. 옆에서 코골 것 같아.”
“전에 그쪽에서 자다가 무릎 박으신데 멍들었었잖아요. 침대에서 편하게 주무세요, 주정뱅이 씨. 저도 곧 잘 거니까.”
“내가 그 쪽에 멍을 새길 것 같은데.... 으음, 그래도 침대가 좋으니까아....”
“샤워하고 침대에 들어오세요.”
“네에, 엄마. 이도 깨끗이 닦을게요-.”
“술 마시는 아들을 둔 기억은 없네요. 이 집에 오고 나서 눈부시게 발전한 skill은 숙취 해소제 고르기랑 집까지 무사귀환한 음주자의 뒤치다꺼리일 겁니다.”
“분명 도움 될 거야. 아무렴.”
한숨과 함께 츠카사는 방으로 돌아갔다. 아마 마저 하지 못한 잔업을 처리하겠지. 아직도 띵한 머리를 부여잡고 레오는 화장실 옆의 온수 버튼을 누르려다가 불이 들어와 있는 걸 발견한다. 갸우뚱하며 샤워기에 물을 틀어보면 바로 뜨거운 물이 나왔다. 미리 온수를 눌러줬을 멋진 하우스메이트에게 감사하며 레오는 훌러덩 훌러덩 옷을 벗었다.
벽에 머리를 기대어 조는 둥 마는 둥 하며 간신히 씻고 나왔더니 문 앞에는 미처 챙기지 못한 새 속옷과 잠옷이 예쁘게 놓여 있었다. 뜨거운 물을 맞아선지 더 올라오는 술기운 속에 그걸 휘적휘적 입으며 레오는 감탄했다. 이걸 뭐라고 했더라, 슈퍼 달링이라고 했던가. 결혼하면 엄청 사랑 받을 남편이 될 것 같은데. 네이머라고 결혼 못하면 어떡하지? 그럼 내가 보증 서줘야지. 저희는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녀석은 다시없을 훌륭한 남편감입니다. 그러니 믿고 결혼해 주세요!
완벽해. 거침없이 말하는 자신의 모습에 실실 웃으며 레오는 거실의 홀로 있는 코타츠를 켰다. 아직 서늘한 책상의 이불 속으로 꼬물꼬물 들어가 몸을 웅크렸다. 사사로운 생각들이 음과 함께 뛰어다녔다. 이렇게 어리광 받으면서 살면 안 되는데. 리츠같이 귀여운 사람은 괜찮지만 나는 곤란해. 혼자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살지. 리츠 콘서트가 언제랬지. 전무님 데려가고 싶다. 아니야 우린 그런 관계도 아닌데. 역시 곤란해, 계속 같이 사는 건.
코타츠가 점점 따뜻해진다.
위장이 조여들고 있다. 배고프다. 인간의 3대 욕구라는 식욕이 수면욕을 날리면서 레오의 정신은 점점 위로 떠오른다. 머리는 생각보다 아프지 않은 것 같다. 샴페인이라서 깔끔해서 그랬을까. 하지만 몸은 여전히 무겁고. 연이은 술자리에 지쳐있는 것 같았다. 오늘 아무데도 가지 않는다는 것에 감사를 표하며 레오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의 양이 아무래도 오전의 신선함이 아니다. 점심도 지났을 것 같고. 익숙한 천장을 생각 없이 바라보던 레오는 몸을 일으켰다. 싸구려 매트리스가 출렁였다. 옆에서 다른 이의 몸도 같이 흔들리는 걸 보며 뒤늦게 이크 했지만 다행히 상대는 깨지 않았다. 잠깐, 매트리스?
분명 코타츠에서 잤던 마지막 기억과 달리 레오는 반듯하게 그것도 베개도 제대로 보고 이불까지 착실하게 덮은 채였다. 아마도 범인은 옆에서 자고 있을 츠카사. 혼자 넓게 자면 될 기회를 패대기치고 굳이 레오를 여기까지 불러서 자는 건가. 그 안에 굳게 자리 잡고 있을 기사도 정신은 주정뱅이의 코타츠 노숙이라는 불의 아닌 불의를 그냥 넘길 수 없는 것인지. 배는 피곤하게 사는 남자에게 레오가 손수 만든 한 끼 정도의 은혜는 내려주자고 생각한다.
“오늘 쉬는 날?”
자고 있는 귀에 소곤거리며 물어보면 남자가 잠깐 미간을 찡그렸다가 대답했다.
“네.... 깨우지 마요.”
깨울까.
비죽이 튀어 오르는 심술을 가라앉히며 레오는 침대에서 미끄러져 내려왔다. 침대 옆 책상에는 치울 겨를이 없었는지 노트북을 중심으로 여러 색들의 서류철과 빠져나온 서류 몇 장과 의자 밑에도 한 장이 떨어져 있었다. 밟을 뻔한 걸 간신히 멈춘 레오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 얌전히 전무님의 품으로 돌아가시오. 다른 종이들과 함께 놓아두려던 레오는 문득 딱딱한 검정 글씨로 가득 찬 서류들 사이에서 이질적인 것을 발견했다. 톡 튀는 주황색 머리칼, 녹색 눈, 완연한 츠키나가 레오의 얼굴.
레오는 의아해하며 그것을 집어 올렸다. 두꺼운 종이에 유광코팅이라도 한 듯 번들거리는 그것은 자신의 사진 엽서였다. 어떤 시간 속의 레오가 검은 정장을 입고 무대 위의 조명을 정면으로 받는 그 사진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이거 그러니까 예전에 공연했을 때 같이 냈던 굿즈 같은데. 레오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휘자 얼굴도 굿즈로 내냐고 하니까 젊은 지휘자의 얼굴은 팔아먹어야 한다던 공연 기획자와 솔직담백한 대화를 나눴던 기억도 난다.
엽서를 뒤집어 보았다. 멋들어진 펜글씨로 날짜가 적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4년 전. 그가 가진 기억과 시간의 아귀가 맞아 들어간다. 확실히 그 때 쯤이었던 것 같다. 계절도 대략 겨울, 이맘때였던 것 같고.
부자들의 정보력은 굉장하네. 레오는 다시 그것들을 서류 틈에 넣었다. 정보력이라고 할 필요도 없나. 시간이 조금 지났을 뿐이지 일반 판매하던 굿즈고. 하지만 기분은 확실히 이상했다. 스오 츠카사는 아마 자신의 네임이 완성됐을 때부터 그의 운명의 상대가 될 사람에 대해 확실히 조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스오 가의 합격선에 들었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얄궂게도 두 사람은 네이머의 일반적인 선로에서 벗어나고 말았다. 이제 저런 정보도 한낱 가치가 없는 종이 쪼가리가 되었다.
네이머라는 틀이 없이 만났다면 친구가 되긴 했을까도 의심스러운 상황. 지금 집에서 좀 더 원만한 생활을 지내기 위해 배려라는 항목을 추가했을 뿐. 더도 덜도 아니다.
나라에게 보일 가면을 쓴 두 사람의 소모적인 연극의 기한은 9개월. 레오에게 그 기간은 아직도 까마득했다.
*
“오늘은 제 술주정을 들어주셔야 할 겁니다.”
츠카사가 의기양양하게 말했었다. 그가 손에 들고 있는 건 어디서 선물 받은 게 분명해 보이는 전통주. 코타츠에 몸의 절반을 파묻고 있던 레오는 두 손을 들고 환영했다.
“코우덴에서 만든, 황금빛 논에서 펼쳐지는 향기라고 하네요. 근사하지 않나요?”
“좋은 작명 센스네~! 이름만큼 탁월한 맛이길 빌어.”
연이은 회식에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며 우는 술주정을 기억 뒤편으로 날려버리며 레오는 잔과 아껴뒀던 보리멸 소금구이를 가져왔다. 츠카사는 레오 건너편에 마주 앉았다. 그 역시 1월의 추위를 견딜 자신이 없는지 다리를 코타츠 안에 집어넣었다.
제법 값이 나 보이는 술을 담기엔 조금 아쉬운 잔에 맑은 액체가 쪼로록 담긴다. 잔을 들고 고민하던 츠카사가 진지하게 말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빨리도 말한다. 몇 주나 지난 인사를 하는 거야?”
“음, 딱히 건배사가 떠오르지 않네요. 당신과 나의 동거를 위하여?”
“몸에서 잠만 자고 있는 네임을 위하여.”
“스오 가문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우주천재 츠키나가 레오님의 영원을 위하여.”
“이번 달 결재 서류양이 적기를 위하여.”
“코타츠를 발명한 자를 위하여.”
잔을 부딪칠 때마다 제각각의 건배사가 튀어나왔다. 과연 깊은 맛이라고 레오가 칭찬했고 츠카사는 얼굴을 붉히며 자기가 만든 것 마냥 자랑스레 쌀을 65%나 깎은 다이긴죠 급이라고 응수했다. 그 붉어진 얼굴은 잔을 내려놓고 나서도 풀리지 않았다. 레오도 마찬가지였다.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이 오간다. 안주는 진작에 동 났다. 만들기 귀찮다는 이유로 잔만 바빴다.
푸른 병에 그득하게 차 있던 술이 어느 샌가 반이나 줄어 있었다. 변기물이 내려가는 소리와 함께 레오가 창백해진 얼굴로 입가를 닦으며 다가왔다. 그의 하나뿐인 술 상대는 코타츠에 죽은 듯이 엎어져 있었다.
“...쥬거써?”
혀가 절로 꼬인다. 레오는 침착하다고 생각했지만 굉장히 이상한 행동을 했다. 턱에 두 손가락을 가져다 대 알콜 때문에 더 날뛰고 있을 맥박을 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죽었네. 레오는 만족하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츠카사의 엉덩이가 보였다.
“방에 가서 자라. 침대는 샤워하구 가야 된다.”
“제 흉내에요? 따아하지 마세요.”
엉덩이가 말했다. 레오는 말하는 엉덩이를 노려보다가 손으로 찔렀다. 엉덩이가 화를 냈다.
“어힐 만지헤요?!”
“하하, 너 발음 너무 웃겨.”
레오는 배를 쥐고 웃었다. 엉덩이여서 발음이 좋지 않나봐. 지금 순간이 웃겨서 참을 수가 없었다. 엉덩이가 갑자기 다가와 레오의 얼굴을 때렸다. 아이쿠. 코를 감싸 쥐며 레오가 낑낑 댔다.
“지금 뭐하는 거야. 엉덩이면 다야?”
“엉덩이하 아님니다. 스오 츠카하입니다!”
아주 빨갛게 달아오른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엉덩이는 어느새 츠카사의 모습으로 레오 머리 위에 있었다.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레오는 감탄했다. 빨간데도 잘 생겼다.
하지만 잘생긴 얼굴은 화를 내고 있었다.
“어, 언제가 되면 절 이흠으로 불러주실 거죠?”
“이흠?”
“이흠... 이름말입니다. 한 번도 절 이흠으로 불러주신 적이 없어요. 맨날 너 아님, 그쪽, 아님 더련님, 전무님 이러구. 동네 고양이도 그것보다 마니 들어쓸 겁니다. 이흠... 이름....”
“내가 그랬어?”
“그래써요!”
레오 얼굴 옆에 놓인 남자의 팔이 위태롭게 흔들거렸다. 붉어진 목덜미에 레오의 이름이 선명하게 보였다.
“나눈, 언제나 당신을 떡바러 보고 있는데. 첨부터 그랬지. 당신은 저 가튼 건 안중에도 업스니까. 이흠도 자긴 꽁꽁 숨기고.... 난 이케 맨날 목에 아주 광고하고 다녔는데.”
“그건 내가 한 게 아닌데....”
“사라미 상도덕이 이써야죠! 나는 이거 땜에 여내 한 번 제대로 못 하구.”
“왜 그랬지. 보는 눈이 없네, 네 주위 사람들.”
“아니, 아니에요. 그 사람들은 당여내. 왜냐면, 왜냐하면, 끝을 알고 시자카는 사람은 없어요. 있다면 놀이지. 나는 사랑이지, 놀이를 원하지 않아. 내 사랑은 첨부터 정해져 있고. 그러니 하는 으미가 없어요.”
말을 할 때마다 뜨거운 술 냄새가 전해졌다. 한 번 게워냈는데도 다시 취하는 기분이다. 레오의 얼굴도 다시 술기운이 달아올라 붉어진다.
“그래서 내 뒷조사 했어?”
“네!! 내가 당시늘 언제부터 알고 있다고 생각해요? 내 이흠... 고등학겨 때부터 완성대써요. 츠키나가 레오라고 읽는 것도 다 알고. 그래서 당신 차잦는데. 당신은 아직, 이고. 그래서 이흠 완성될 때까지 계속, 계속 지켜봤어요. 당시는 그때부터 대단해써. 벌써 자, 자꼭.. 작곡가니까, 돈도 많고. 머싯서요. 나, 나는 내 능녁은 없는데, 당시는 벌써 그런 능녁으로 걸어가니까. 너무 멋있어서, 나두 걸맞는 사라미 대야지, 하고 계속 계속 생각해쓰니까.”
“나는 천재니까 어쩔 수 없어.”
“당신 지짜 재수 없군요.”
“사실인 걸 어쩌겠어. 그래서 이렇게 멋있는 전무님 됐어?”
“전무는 머싯지 아나! 그래도 부끄러운 사라믄 아니라고, 그러케 믿었는데. 노력해쓰니까요. 이흠, 이름을 보면서 당신이 나를 언제 봐도 괜차는 사람이 되자고. 그러케 하고 살아왔어요. 그런데, 당신과 가치 살게 되는 내, 내 생일 날에... 당신은 도망쳤어. 그 때 알았어요. 당신에게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
“어굴해. 나는 당시니 내 인생, 전부였는데. 하지만 만나고 또 알았어요. 당신은 자유로운 사라미니까, 그게 어울려. 다행이야. 내 이름이 족쇄가 될 뻔 했는데, 정말러 잘댔군요. 빨리 가세요. 자유와 방종의 세계로.”
버티던 팔이 미끄러지더니 레오 얼굴 위에서 뇌까리던 츠카사의 머리가 그대로 추락한다. 성대하게 이마에 이마를 찧고 난 후 레오와 츠카사 둘 다 비명소리를 냈다. 지, 진짜 아파.... 뉴턴 모하는 거에요! 꿈틀대던 츠카사가 겨우 몸을 일으키나 했더니 다시 가슴으로 풀썩 쓰러졌다. 두 번째 타격에 레오는 꽉 눌린 테디베어가 낼법한 울음소리를 냈다.
“자, 잘못했어. 그만 때려....”
“아니에요, 안 때려요. 이쁜 사람....”
가슴께에서 츠카사가 웅얼댔다.
“내가 멋대로 기대하고, 속상한 거 뿐이니까. 미안해요. 어흔이 이래서 나도 우껴요.”
“어른이 아닌가 보지.”
“당시는, 나쁜 어흔이죠. 내 이름도 막 숨기고.”
손가락이 바닥을 긁다가 허벅지 안쪽에 자리 잡았을 이름을 찾아 마구 눌러온다. 레오가 소스라쳤다. 무거워, 누르지 마, 이상하다고. 끙끙대며 손을 치우려고 해도 레오의 손은 허공에서 춤추고 츠카사의 손은 마구잡이로 더듬었다.
“나만 조아해서 속상해요. 만나기 전부터 좋아해써. 이게 네이머니까 당여난 줄 아랏는데 아닌 거구. 이젠 기대 안 해요. 대신 이흠, 아니야 이흠, 이름. 언젠가 불러줘요. 아라쬬, 레오 씨.”
“지가 부르면서....”
레오는 답답한 숨을 쉬었다. 남자는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머리를 레오에게 뉘이고 미동이 없다. 이대로 잠이 들면. 그것도 나쁘지 않지. 츠키나가 레오, 지금부터 압사당해 보이겠습니다. 술기운이 아우성치는 머리가 또 아무 말이나 만든다. 들은 얘기들은 제대로 해석되는 것 같다가도 눈앞에서 춤춘다. 어쨌든 확실한 건 지금의 츠카사가 가엾고 사랑스럽다는 거였다.
“까짓 거 부름 되지. 내가 부른다고 다시 네이머로 각성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그런 미시늘....”
“네이머 자체가 미신 같거든. 아니, 아니야. 이젠 모르겠다. 어차피 한동안은 같이 살 거니까. 동네 고양이보다 좋게 만들어 줘야지.”
레오는 목을 가다듬었다. 칼칼한 목이 껄떡 댄다.
“그러니까... 안 잊었어. 어떻게 잊어? 스오 츠카사. 음, 스오~?”
“....”
“자? 스오~ 자?”
“아니, 안자요. 한 번 더 해죠요.”
“스오-.”
“한 번만 더....”
츠카사의 숨이 아주 가까웠다. 충혈된 눈으로 그걸 보던 레오가 웃었다. 스오. 입모양만 벙긋이며 웃었더니 입술이 겹쳐졌다. 맞부딪히고 섞였다.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몸이 서로 비벼졌다.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뇌 속의 레오가 떠든다. 츠키나가 레오, 이번엔 질식사 가보겠습니다. 안녕!
몰아 넘치는 잠기운과 가쁜 호흡 너머로 의식은 끊겼다.
*
“...머리 아파.”
“죽을 것 같아요. 몸을 일으키면 바닥을 토사물로 덮을 자신도 있어요.”
“상상하니 내가 토할 것 같아.”
“상상하지 마요....”
몸을 먼저 일으킨 건 레오였다. 어쩐지 제일 욱신거리는 이마를 만지니 불룩하게 혹이 나 있었다.
“내 이마 왜 이러는 지 아는 사람?”
“몰라요, 말 걸지 마요. 저는 이마가 문제 아니고 머리 전체가 깨질 것 같으니까.”
“뭔가 중요한 전투가 있던 것 같았는데....”
“기운 있으면 숙취 약 좀 가져와 주세요. 이러다 두통으로 죽을 거예요....”
누가 더 상태가 안 좋은 지는 뻔했다. 레오는 머리를 감싸 쥐고 일어섰다. 하나도 정리가 안 된 술판에 사케 냄새가 지금도 동동 올라오고 있었다. 환기, 이 날씨에 환기.... 얼어붙은 1월의 창밖을 보며 고민하던 레오는 잠시 이 문제를 뒤로 미루기로 하고 비척비척 약통을 향해 걸어갔다. 약을 꺼내어 입 안에 털어 넣고 물을 마시고. 뒤를 돌아보면 코타츠에 다리 한쪽만 간신히 넣고 있는 츠카사가 끙끙 대고 있었다. 너, 아니, 도련님, 아니, 전무님, 아니. 지끈거리는 머릿속에서 말들이 확확 지나갔다.
“찬 물이 좋아, 미지근한 물이 좋아?”
이리저리 뻗친 둥그런 머리통을 향해 레오는 다정하게 묻는다.
“응? 스오.”
집은 처음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휑하니 비어 있었다. 한창 집을 장식하던 과하게 커다란 냉장고, 바닥을 장악하던 코타츠, 폭발적인 음량을 자랑한 나머지 옆집에서 항의가 온 스피커, 창문을 감싸던 민무늬 커튼 등은 모두 사라지고 커다랗게 뻥 뚫린 유리가 가을 날씨의 쓸쓸한 정경을 비추고 있었다. 창틀에 몸을 기대 밖을 바라보던 남자는 다시 몸을 바로 세웠다. 처음 왔을 땐 정말 일 년 동안 살줄은 몰랐는데.
네이머의 맨션이 세워진 이래로 일 년을 꽉 채웠다는 이례적인 기록을 남긴 채로 그들에게 정정당당한 퇴거의 날이 왔다. 직원은 여전히 반신반의했다. 두 분 같은 분들은 처음이에요. 혹시, 지금도 결혼 의사가 없는 건 아니시죠? 소속사 계약 문제 때문이죠? 이제 그녀에게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지만 진실을 이야기할 필요도 없어 레오는 망상해 보면? 이라는 역질문을 하여 직원을 고민에 빠트리게 했다.
이 좁은 집에서 싸우기도 엄청 싸웠었는데. 한 여름에 갑자기 고장 난 에어컨, 뒤집어 놓지 않은 양말, 쓰레기 버리는 날. 별거 아닌 거 가지고 잔뜩 기분이 상해 싸웠다가 쭈뼛대며 화해를 하곤 했었다. 조금 감회에 젖어 집을 바라보다가 레오는 고개를 저었다. 감회라기 보단 그거였다. 함께 해서 더러웠고, 다신 만나지 말자. 이젠 굳이 좁은 데서 서로 어깨 부딪히며 싸울 필요는 없다. 부디 이집에 들어오는 다른 이들은 레오와 츠카사처럼 싸우지 말고 빨리 혼인신고해서 나가기를. 그렇게 가벼운 기원을 하고 레오는 문 밖을 나섰다. 단칸방의 왕자님의 고군분투는 막을 내렸다.
짐은 이사 갈 집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열쇠를 반납하고 레오는 택시에 올라탔다. 조금 익숙하지 않은 주소를 부르자 택시는 부드럽게 출발했다.
문득 한 얼굴이 떠오른다. 주말엔 동글동글한 머리를 했다가 출근할 때만 되면 머리를 넘긴 멋진 전무님이 되던 한 남자가. 나름 레오 취향의 얼굴이 한껏 얄미워질 수도 있다는 걸 레오는 알았다. 사실 그런 얼굴들은 그냥 국보 지정해서 아무 사심 없이 감상만 할 수 있어야 하는데.
핸드폰이 붕붕 울렸다. 화면에 뜬 글자가 시끄러운 메시지의 주인공을 알려주었다.
스오 츠카사. 생각만 했을 뿐인데 대뜸 나타나는 모습이 호랑이 선조 쯤 되나 보다고 레오는 속으로 이죽였다.
-어디세요, 도착하셨어요?
-당신 짐은 방에 옮겨놨대요. 그쪽만 짐 푸시면 돼요.
-오늘 저녁엔 딴 데 새지 말고 바로 들어오세요, 레오 씨.
대답할 새도 없이 연달아 메시지가 조록조록 떴다.
레오는 다시 어느 날의 남자를 떠올린다. 그 날은 주말인데도 머리를 넘긴 희귀한 날이었다. 그 머리 스타일은 아마 스오 츠카사 나름의 기합 같은 거였나 보다.
‘곧 퇴거일인데, 이 집을 나간 후에 갈 곳이 있으신가요? 제가 집을 구했는데...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커서요. 보시면 알겠지만 분명 당신도 만족할 거예요. 위치도 괜찮고요, 작업실이랑 멀지도 않아요. 우연히도 저희 회사랑도 거리가 괜찮아서. 물론 주변시설도 잘 돼 있고요. 아직 갈 곳을 정하지 못하셨다면 어때요? 아니, 갈 곳이 있으시더라도 고려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저와 같이 사는 걸요.’
레오는 물론 갈 곳을 찾아놓았었다. 퇴거가 한 달도 안남은 시점이었다. 갈 곳을 정해두지 않으면 노숙이라는 꽤나 곤란한 처지에 놓일 테고. 다만 레오도 츠카사와 마찬가지의 사정으로 혼자 살기엔 큰 집을 골라버리고 말았다. 아주 우연히 말이다.
레오는 핸드폰을 두들겼다.
-이제 택시 탔어. 아마 금방 도착할 거야.
-저번처럼 괜히 셰프는 부르지 말고.
-알겠지, 스오.
메시지에 읽음 표시가 뜨자 다리 안쪽에 자리 잡은 그의 네임이 노크라도 하듯 쿡쿡 거리며 쑤신다. 기분 좋은 감각이었다.
“그래서, 날은 언제쯤으로 잡을 건가요, 츠카사?”
츠카사는 포크를 떨어트리지 않았다. 얼굴을 굳히지도 않았으며 무슨 날이냐고 아둔하게 질문도 하지 않았다. 대신 물을 한 잔 마셨다. 능숙한 거짓말에 초조하게 마른 입술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의 어머니가 한 마디를 더 보탰다.
“이제 서른인데 식을 슬슬 올리는 게 좋지 않겠어요?”
“아직 보류중이에요. 그 사람도, 저도 좀 바빠서요. 아시잖아요, 한창 잘 나갈 때니까 시기를 놓치고 싶지 않은 거. 다음 달엔 해외 공연도 잡혀 있대요.”
알고 있다는 듯이 부모님이 고개를 끄덕이신다. 그의 부모도 아들의 하나 뿐인 상대 네이머에 대한 소식을 알아보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동거한 지 일 년도 넘었는데. 슬슬 생각해야 하지 않겠어요?”
“츠카사도 이제 서른이니.”
두 분의 말에 츠카사는 예의바르게 대답한다. 바쁜 게 마무리 되면 슬슬 얘기해 보겠습니다. 조금 굳어진 표정에 어머니가 부드럽게 말했다.
“결혼은 형식적인 거니 너무 부담가지지 말아요. 츠카사와 그 사람은 이미 사랑하는 사이잖아요? 이미 어엿한 부부나 마찬가지예요.”
지금은 고기를 먹는 게 자연스럽겠지만 츠카사는 저도 모르게 물을 마시고 말았다. 속이 탔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어머님. 이 불초 츠카사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왜 네이머의 운명이란 게 츠카사와 레오만 빗겨갔는지, 츠카사는 아직도 모른다. 네이머 관련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해봤자 이제 와서 집 나간 큐피트 화살이 돌아올 리도 없다. 스오 가문의 적장자가 네이머라는 사실만으로 사교계는 난리도 아니었었다. 그러다가 이젠 네임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알면 또 어떤 소란이 일어날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나이가 들어 네임이 완성되고 레오를 찾아냈을 때 츠카사는 안도했다. 자신의 네이머가 스오 가의 배경에 눈이 멀 속물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오히려 지금은 속물이었으면 좋겠다고 가끔씩 생각한다. 그럼 이 사람은 진작에 스오 레오가 되어 신혼 생활을 보내고 있지 않을까 하는 달콤한 상상도 곁들여서.
그러나 현실은 두 사람은 하우스메이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적어도 레오에겐 그런 듯 했다. 사실 레오에게 했던, 같이 살자는 말은 츠카사에게는 프러포즈와 거의 다를 바 없는 말이었다. 수락했을 때 정말 기뻤는데. 막상 같이 살아보니 레오가 여타 하우스 쉐어 정도로만 받아들였다는 걸 깨닫고 츠카사는 직구를 꽂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머리를 감싸 쥘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츠카사는 미래지향적이었다. 레오가 네이머 맨션을 나와서도 자신과 함께 산다는 것, 그에게 츠카사란 최악의 동거인이 아니고 같이 살 만한 정도의 파트너라는 인식에 위안을 얻으며 후일을 도모한다. 비록 주위 사람들은 네이머의 당연한 동거 수순 정도로 생각하고 있지만 말이다.
오랜만의 부모님과 식사는 즐거웠지만 점점 중첩되는 거짓말에 뒷맛이 무거워졌다. 조만간 레오를 부모님에게 소개시켜야 하는데 어떻게 말할 것인가. 츠카사는 우울하게 핸드폰을 켰다. 레오에게 부모님과 약속이 있어서 밥을 먹고 들어갈 것 같다고, 먼저 저녁 챙기시라는 메시지를 보냈었다. 대답은 와 있었다.
-지금 집인데 최대한 늦게 오는 걸 추천할게.
-아 들어오기 전에 연락 한 번 넣어줘.
츠카사는 자리에 멈춰 서서 화면을 노려보았다. 왜죠? 왜 늦게 가야하는 거죠? 누굴 불렀습니까? 물론 그곳은 당신의 집이기도 하지만 당신과 내가 함께 생활하는 공간이잖아요. 나 말고도 당신 같은 자유로운 영혼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대요? 그전에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지 알기나 해요?
속으로는 마구마구 감정이 끓어 넘치지만 얼굴은 평정을 가정한다. 츠카사에겐 레오에게 뭐라고 할 권리가 없다. 일방적인 짝사랑은 괴롭다. 그러니 이런 심술은 용서해 주세요. 급한 걸음으로 뛰다시피 와서 그런지 잔뜩 땀이 났다. 이마에 맺힌 땀을 대충 팔로 훔치고 츠카사는 문을 열었다. 자신의 집이니까 초인종을 누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하며.
문을 열자마자 밖과 거의 다를 바 없는 후덥지근한 공기가 한가득 다가왔다. 후덥지근? 츠카사는 인상을 썼다. 보통이라면 에어컨이 돌아가 서늘한 공기가 가득해야 할 텐데.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거실에 선풍기가 윙윙 돌고 있었다. 선풍기와 거의 키스하듯이 붙어있던 레오가 츠카사를 보고 몸을 일으켰다.
“어라, 스오? 생각보다 일찍 왔네.”
“...당신 혼자예요? 누가 온 게 아니었어요?”
“이 시간에 올 사람이 누가 있겠어. 그보다 큰일이야, 스오. 에어컨이 고장 났어!”
레오가 호들갑스럽게 설명한다. 갑자기 잘 돌아가던 에어컨이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멈췄다느니, 어떻게 고치려고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느니, 기사를 불렀으니 내일쯤에 온다느니. 츠카사는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민소매에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짧은 바지. 더위를 잘 안타는 그도 한 여름 도심의 더위는 어지간히 견디기 힘든 모양이었다. 다시 선풍기 앞으로 조록 다가간 그의 머리칼이 바람에 이는 불처럼 세차게 펄럭이는 걸 보던 츠카사가 물었다.
“그런데 왜 오기 전에 연락하라고 한 거예요?”
“아~, 아이스크림 사오라고 하려고. 음, 이렇게 된 거 가서 사올까. 밖이 더 시원하지?”
“...네. 그랬던 것 같아요.”
“역시-. 스오도 갈래? 여기 엄청 더워. 편의점에서 잡지 같은 거 보다가 쿨팩이랑 아이스크림 사들고 올라가자.”
레오는 얇은 반팔 티만 대충 걸쳤다. 그대로 슬리퍼를 신으려는 모양새에 츠카사가 멈칫했다. 평소의 그라면 너무 짧은 바지의 길이를 지적하며 다른 바지를 입지 않겠냐고 권유했겠지만, 오늘만은 다른 점이 그를 멈추게 만들었다. 레오가 걸을 때마다 왼쪽 다리에 츠카사의 이름이 슬쩍슬쩍 보이고 있었다. ‘스오 츠카사의 것’이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모양새였다. 가끔은 다른 사람에게도 이 사람이 내 사람이라는 걸 인식해도 나쁘지 않겠지. 불안감이 허탈하게 사라지고 알 수 없는 만족감이 차올랐다. 바지 길이는 오히려 긴 편이다. 온전히 그의 이름을 다 보이기에는.
“연락을 깜빡했으니 아이스크림은 제가 살게요.”
“오옷, 전무님이 쏘신다고? 와~ 전무님이 최고예요~!!”
“그거 누구 흉내예요...? 하겐다즈 여름 한정이 나왔다는데 먹어보고 싶었어요.”
“스오네 회사 직원들?! 높으신 분이 쏘면 신나서 이렇게 하고 말하지 않아?”
그러면서 냉큼 츠카사의 팔짱을 낀다. 깜짝 놀라면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 츠카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츠카사는 팔에 힘을 주고 성큼성큼 걸었다. 오히려 레오가 당황했다.
“어어, 이대로 가게? 덥잖아??”
“애교 부리는 직원에게 그에 마땅한 대응을 해줘야죠.”
“전무님, 이거 성희롱~”
그렇게 말하면서도 레오는 별다른 저항 없이 팔짱을 낀 채로 걸었다. 더위를 잘 타는 츠카사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덥지 않았다. 오히려 츠카사는 까맣게 가라앉은 밤이 원망스러웠다. 지금이 햇빛이 환하게 비추는 낮이라면 더 많은 사람들이 레오와 자신의 모습을 봤을 텐데. 그리고 그의 허벅지에 선명히 새겨진 자신의 이름까지도.
당신과 나의 놀이가 아닌 진짜 스킨십이, 애정행각이 되기를. 칠석은 지났지만 대나무에 소원을 적는 것처럼 어느새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다. 사실 저번 달 칠석 때도 비슷한 소원을 적었던 것 같다. 새해에도 비슷한 소원이 적힌 나무패를 달았던 것 같다.
신이 이루어주지 않는다면 스스로 쟁취할 수밖에. 그러니 이 여름이, 이 뜨거운 계절이 가기 전에 그에게 이 마음을 고백하자. 츠카사는 옆의 사람을 보며 그렇게 다시금 다짐하자 두근거리는 심장과 함께 목덜미의 이름도 같이 쿵쿵 뛰는 것 같았다. 문득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레오의 눈길이 츠카사의 얼굴에서 목덜미로 내려간다. 머쓱하게 웃은 그가 다시 시선을 바로 했다. 더운 여름밤, 아직 팔은 풀리지 않았다.
* 이것은 위 원고를 너무나 좋아해 주신 풍님에게 생일 선물로 드렸던 이야기입니다.... 올려도 된다고 허락해 주셔서 올려요..! (그리고 어마무시한 걸 받게 되는데...)
* 본편의 살짝 뒷 이야기입니다.
바른 생활을 추구하는 츠카사이지만 가끔은 그의 예정에 어긋나는 일들이 있었다. 이를 테면 시계 바늘이 12를 훌쩍 넘긴 시간까지 깨어있다든지. 레오가 빌려온 비디오가 생각보다 츠카사의 취향에 맞았다든지. 푹 꺼지는 소파에서 비디오에 집중한 그와 맞닿는 어깨가 기분 좋았다든지. 정작 빌려온 당사자는 중반부터 꾸벅꾸벅 졸다가 그대로 츠카사의 어깨에 기대어 곯아떨어졌다든지. 크레딧이 끝나고도 한참을 뻣뻣하게 굳어 있느라 침대로 갈 수 없었다든지, 같은.
결과적으로 츠카사는 평소라면 현관에서 신발을 신을 시간에 침대에서 눈을 뜨고 말았다. 평소에 깨지 않는 레오가 일어날 정도로 부산을 떤 츠카사는 아주 간신히 지각의 문턱에서 벗어났지만 노트북에 꽂았던 메모리를 놓고 왔다는 사실을 무려 회의 한 시간 전에 깨닫고 말았다. 지금 당장 출발하면 겨우 시간을 맞출 수 있을까 말까한 시점. 패닉 속에서 일어난 츠카사를 멈춰 세운 건 한 통의 전화였다.
「전무님~, 노트북 필요한 거 아니야? 책상에 그대로 있던데.」
구원의 목소리가 핸드폰에서 흘러나왔다.
“츠키나가 씨! 노트북은 괜찮지만 거기에 꽂힌 USB가 필요해요.”
「아하, 지금 당장 필요한 거?」
“면목 없지만, 네. 안 그래도 지금 가져가려고 했는데….”
「급한 거면 내가 가져다 줄 수도 있어. 나 오프잖아? 딱히 할 일도 없으니 심부름꾼 역할 정도는 해줄 수 있지.」
통통 튀는 목소리에 부정하려다가 츠카사는 시계를 보았다. 신호를 무시하고 마구 밟는다면 아슬아슬하게 맞을 지도 모르는 시간. 사실 차를 다시 주차하고 건물을 올라갈 생각을 하면 거의 늦는 거나 다름없었다. 결국 츠카사는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래 주실래요…?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은혜?! 그럼 다음 설거지 당번은 스오가 하는 걸로~!」
“그걸로 되겠어요? 다음에 저녁이라도 살게요.”
현재 동거인 츠키나가 레오. 자신과 네이머라는 관계로 꽁꽁 묶인 이 남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츠카사를 도통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도련님, 전무님, 너, 그쪽. 에둘러 부르는 호칭은 자신과 네이머 관계를 부정하는 것 같아서 내심 속이 상한 츠카사였다. 하지만 그걸 굳이 입 밖으로 꺼내어 애처럼 투정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불행하게도 네이머들 사이에 생겨난다는 운명적인 사랑이 둘 사이엔 전혀 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둘은 그저 우연히 붙은 타인과 타인에 불과했다. 정정, 츠카사의 일방적인 짝사랑이라는 더 안타까운 상황일 뿐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는 츠카사를 스오라는 호칭으로 불러주기 시작했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예전보다 꽤나 다정해진 것도 같다. 조금 기대를 가져도 되는 걸까. 이 사람도 나에게 호감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네이머 전용 아파트의 퇴거가 점점 다가오면서 어색한 역할극이 끝나기 직전인 지금, 츠카사는 레오에게 동거 제안을 언제 할지 전전긍긍해하며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레오가 기꺼이 수락을 하기 위해선 자신이 여전히 그에게 불편하거나 귀찮은 존재가 되면 안 된다는 걸 츠카사는 불현 듯 깨달았다.
“아, 아니에요. 역시 제가 가지고 가는 게 낫겠어요. 츠키나가 씨는 그냥 집에서 쉬세요.”
「에, 보안인가 뭔가 때문에 그래? 걱정 마, 걱정 마! 안은 절대 보지 않을 테니까!」
“그런 문제가 아니고, 당신이 귀찮아지니까요. 모처럼 오프잖아요. 이건 제 실수니까 제가 알아서 해결해야 할….”
「같이 사는 주제에 뭘 딱딱하게 굴고 그래! 라인으로 회사 주소 보내놔~」
레오는 츠카사의 대답도 듣지 않고 바로 끊어버렸다. 다시 전화를 걸까도 싶었지만 고민 끝에 츠카사는 결국 주소를 톡톡 입력하기 시작했다. 레오의 도움이 굉장히 절실한 시점이기도 했지만 다른 사실에 굉장히 마음이 끌렸다. 츠카사의 목덜미에 새겨진 이름의 주인공이 회사에 온다. 츠카사가 네이머인 건 회사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 또한 그 파트너와 현재 동거하고 있다는 것도 물론. 사실 이 세계의 성인 네이머는 대부분 동거를 하고 있다. 아주 당연하게 츠카사를 유부남 취급하는 회사 사람들에게 아주 잠깐이라도 레오의 얼굴을 보여주고 싶다. 이 사람이 나의 둘도 없는 네이머라는 걸 알려주고 싶다. 스스로도 부끄러울 정도로 유치한 마음이지만 굳이 그걸 물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와 공공연한 사이가 될 수 있다면 당시의 츠카사는 무슨 짓이든지 할 수 있었다.
츠카사는 곧장 1층에 전화해 츠키나가 레오라는 손님이 찾아오면 제지 없이 올려달라고 연락을 해두었다. 아주 귀중한 손님이라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물론 경비도 그 이름이 누구인지도 눈치 챌 것이다.) 지각 때문에 정신없던 마음이 다른 의미로 들뜨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사실을 노크하는 소리는 울리지 않았고, 걸려오는 건 내선 전화였다.
「츠키나가 님은 오시지 않았고 그 심부름꾼이라는 분이 물건을 전달하셨는데요….」
츠카사는 당황하며 되물었다.
“심부름꾼이라고요?”
「네, 혹시 츠키나가 님이냐고 물으니까 아니라고 하면서 부탁 받은 물건만 전달하겠다고….」
“혹시 그 사람 인상착의가… 아니, 그 사람 벌써 나갔나요? 죄송한데 잠시 붙잡아 주세요. 곧 내려갈게요.”
전화를 끊자마자 츠카사는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오가 굳이 다른 사람을 시켜서 올 것 같진 않은데. 급한 용건이라도 생긴 건가? 그랬다면 미리 연락을 줬을 텐데.
다급하게 1층으로 내려간 츠카사는 어렵지 않게 그 심부름꾼이라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회색 후드를 푹 눌러쓰고 있는 남자는 회사에 뜬금없이 가져다 둔 조각상마냥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작은 체구에 후드 너머로 슬쩍 삐져나온 주황색 머리칼. 누가 봐도 레오였다.
“츠키나가 씨!”
츠카사의 목소리에 움찔한 그는 고개를 들었다가 이내 붕붕 저었다.
“에, 사람 잘못 보신….”
“츠키나가 씨 맞잖아요.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바로 올라오셔도 괜찮은데, 혹시 여기에 만나기 싫은 사람이라도 있어요?”
가까이 다가가자 갈팡질팡한 녹색 눈동자가 얼핏 보였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잔뜩 낮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내가 굳이 올라갈 필요는 없잖아?”
“여기까지 오셨는데 차 한 잔이라도 대접하게 해주세요. 위에 제 전용 공간이 있으니까 거기에서 누구 눈치 볼 필요 없이 그냥 편히 있으시면….”
레오의 입에서 커다란 한숨이 나왔다.
“그게 문제라는 거야. 안 그래도 네가 네이머인걸 다 알고 있는 판에 생판 외부인인 내가 회사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겠어? 이렇게 큰 건물의 멋쟁이 전무님의 파트너가 이런 사람이라고 알려지면 곤란하잖아.”
츠카사가 황당하게 되물었다.
“누가요? 제가요? 제가 곤란하다는 건가요?”
“아니야? 내가 곤란할 수도 있고. 어쨌든 우린 임시적인 그거잖아. 그러니까 여기까지.”
레오가 명백하게 선을 긋는 것처럼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츠카사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전혀 곤란하지 않은데, 당신이란 사람이 나의 네이머란 게 너무 좋다고 그에게 말하고 싶은데. 레오가 곤란할 수도 있다는 말이 계속 혀를 묶어두고 있었다. 그런 츠카사에게 작별 인사조차 하지 않고 레오는 후드를 푹 눌러 쓰고 건물 안을 빠져나갔다. 마치 죄라도 지은 모양새였다. 이러려고 부른 게 아닌데. 작은 체구는 금세 사라졌지만 츠카사는 그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그 때는 정말 모든 것이 끝났다고 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해가 지났지만 비슷한 계절의 달라지지 않은 회사 로비에서 츠카사는 초조한 마음을 숨기지 않고 서성거리고 있다. 프론트 직원의 호기심어린 시선이 츠카사에게 달라붙고 있지만 모른 체 한다. 손목시계를 보고 다시 문을 보았다. 슬슬 올 시간이다.
그 예상이 맞기라도 한 것처럼 회전문에 한 인영이 들어선다. 감춰지지 않은 주황색 머리가 태양처럼 눈부시다. 회전문을 통과하는 그 모습이 어쩐지 극적이어서 츠카사는 멍하게 그 모습을 바라본다. 금세 드러나는 녹색 눈이 둥그렇게 떠지며 츠카사를 시야에 담는다.
“오옷? 마중 나와 준 거야?”
“또 다른 사람인척 가버릴까봐요.”
“엄청 옛날 일을! 은근 뒤끝 있네, 스오~?”
“당신 일이 되면 특히 그래요.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요. 내가 당신의 파트너라는 게 곤란하다고 말하는 모습이….”
“음, 그거 좀 왜곡된 것 같은데. 비련의 남주인공 모드인 거야?”
네이머 아파트의 퇴거가 끝나도 여전히 츠카사는 레오와 함께 살고 있다. 예전 일이 재현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침의 늦잠, 정신없는 와중에 부스스하게 츠카사를 침대에서 배웅하는 레오, 머리맡 스탠드 밑에 얌전히 놓여 있던 핸드폰. 이제 그 핸드폰은 레오의 품에서 츠카사에게로 이동한다.
“평소에는 나한테 핸드폰 챙기라고 잔소리하더니 이런 날도 오네!”
“덕분에 당신이 이렇게 가져와줬잖아요?”
“갈수록 뻔뻔해지는 것 같은데, 스오 츠카사 씨.”
“물론 방금 한 말은 농담이죠. 덕분에 살았어요. 엄청 감사하고도 있고요. 귀찮으실 텐데 여기까지 와주셔서 고마워요, 레오. 그런데 오늘 미팅 있었어요? 제법 차림이….”
손등까지 덮이는 후드가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남자는 품이 넉넉한 옷 대신 차분한 색상의 재킷을 깔끔하게 걸치고 있었다. 레오가 입을 삐죽인다.
“오늘 미팅은 하나도 없고 나도 이런 옷 정도는 입는다고. 가면무도회에서 파자마를 입고 갈 수는 없는 노릇 아냐?”
“여긴 우스꽝스런 가면을 쓰고 상대를 물색해야 하는 장소가 아니잖아요. 신경 안 쓰셔도 괜찮은데.”
“하아아~, 스오는 바보야? 내 입으로 말하기 이상한데… 나, 네 주변인한테 잘 보이고 싶다고. 너한테도 물론이고. 너는 까먹었을 지도 모르지만 나 일단 너에게 고백했거든?”
가까이 다가온 몸, 잔뜩 낮춘 목소리, 그리고 어째선지 자신만만한 얼굴. 이리저리 많은 것을 비추고 있었을 녹색의 세계에 지금은 츠카사만이 한가득 담겨 있다. 그 사실에 고양감을 느끼며 츠카사는 생각한다. 아아, 신에게 너무나도 감사한다. 그가 점지한 자신의 네이머는 너무나 사랑스럽다.
“하아, 까먹을 리가 없잖아요. 그거 진짜 비겁하다고요. 내가 먼저 좋아했는데. 엄청 공들여서 고백하려고 준비했는데.”
“뒤늦게 말해봤자 소용없지. 용기 있는 자만이 공주님을 얻는 거고, 나도 내 공주님을 얻고 싶었거든. 아직 대답은 못 들었지만!”
“당신에게 그런 말을 듣는 건 엄청나게 기쁘고 영광이긴 한데…. 조금만 기다려줘요. 엄청 근사한 대답으로 돌려드릴 예정이니까.”
“보통 대답은 예스, 노 이렇게 간결하게 대답하면 된다고. 눈물을 글썽이며 기뻐요 라는 거면 더욱 좋고. 물론 나는 스오가 대답을 줄 때까지 껌딱지처럼 붙어 있을 예정이야.”
“대답을 듣고 나신 후에도 껌딱지처럼 붙어 있어야 할 겁니다.”
“아앗, 그거 대답 스포 아냐? 스포일러 금지!”
“예고편 같은 거죠. 그보다 모처럼 여기까지 와주셨으니 사무실에 잠깐 들리실래요? 맛있는 차로 보답할게요.”
“와하핫, 몇 년에 걸친 리벤지인가~ 나쁘지 않은 프레이즈네. 좋아, 전무님의 자신작을 먹어보실까.”
호탕한 말과 달리 꽤나 조심스러운 시선이 살짝 목덜미로 갔다가 이내 거둬진다. 평소라면 목을 꽉 조이고 있을 넥타이를 츠카사는 일부러 풀어두었었다. 느슨하게 벌어진 셔츠 사이로 그의 이름이 아주 잘 보일 것이다. 당신은 지금의 운명에 감사할까? 누군지도 모를 신 비슷한 존재가 내려준 이정표에 여전히 불만을 가지고 있을까? 그럼에도 당신은 나를 선택했다. 그 사실이 지금도 츠카사는 믿기지 않았다.
길고 긴 짝사랑의 끝이 해피엔딩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아직 페이지를 다 넘기지 않은 츠카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괜찮지 않을까, 지금만큼은 이 행복한 기분을 만끽하는 것도. 기분 좋게 두근거리는 네임이 가슴에 위치한 심장처럼 행복한 가닥을 끊임없이 자아내고 있다. 분명 레오도 그럴 것이기에 츠카사는 미소 지었다. 마주친 상대 역시 비슷한 표정으로 바라봐준다. 레오에게 고백을 받은 이후로 더할 나위 없는 순간이 이어진다. 자신 앞에서 사랑스런 이가 웃고 있는 지금처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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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황송하게도 풍님이 위 글을 만화로 그려주셨어요ㅠㅠㅠㅠㅠㅠㅠ 하 감동.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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